한 나라를 의인화하거나 내가 아는 모든 사람을 국경의 경계로 나누는 것이 그리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안다. 미국 사람, 일본 사람, 중국 사람, 인도 사람. 하지만 헤어지고 나면 남는 것은 그 친구의 이름보다는 국적이다. 개인적으로 만난 몇몇의 일본인들은 예의바르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기민하게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들의 손으로 뽑은 정권이 하는 일은 비이성적이고 비도덕적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렇다면 나는 일본을 대체 어떻게 인식하고 앞으로 만날 일본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면 한국인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은 어떤 것인가. 어떤 의식을 가지고 다른 나라의 사람을 대하고 살아가야 하는 걸까. 국경이 민족이 나를 규정짓는 범위와 깊이는 어디까지 미치는가. 나는 내 이름 석자를 가지기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존재하는 걸까. 미국에서 미국 사람들은 나의 고국을 마치 내가 떠나온 고향 마을인 것처럼 규정하고 궁금해했다. 나를 알기 이전에 내가 있었던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자기식의 선입견과 해석을 예비하고 있었고 내가 거기에 부응하고 호응해주기를 바라 나를 놀래켰다. 나는 나의 나라를 넘어설 수 없었다. 그건 놀라운 발견이었다. 나는 나 이전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먼저 존재했다.


















이 책의 저자 제임스 S. 게일은 선교사로 1888년에 조선에 입국하여 보낸 자신의 10년 경험을 [Korean Sketches]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한다. 그는 최초의 '한영사전'을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했고 심지어 김만중의 [구운몽]을 

영어로 번역하기도 했던 만큼 그냥 슬쩍 이방인의 위치에서 서양의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겉핥기로 우리나라의 풍광을 묘사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양반의 노동현장에서 유리되어 자신의 안위만 챙기는 폐습이나 제사의 허례허식 같은 대목에서는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깊은 이해도와 균형감 있는 비판 의식을 보여주어 놀랍다. 조안에 있을 때는 몰랐던 우리 민족 특유의 습속에 대한 외부인의 관찰은 유머러스하고 예리하다.


이곳에서 가장 흔한 작별인사는 "Nail do orita"인데, 대부분은 오지 않았다. 친구들 대부분이 이런 약속을 하고 돌아갔기에 나는 곧 내 가까운 친구들이 모두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고 오해했었다. 하지만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나자 나는 조선 사람들의 이런 말이나 약속은 꼭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단순한 인사치레임을 알게 되었다. 

-p.234


"내일 또 오리다" 는 "언제 한번 만나 밥 먹자"로 변형되어 현재진행형인 것을 보면 이러한 언어 습관의 역사는 오랜 것이었나 보다. 일제 침략과 특히 민비시해에 대한 그의 공분은 조선 사람 이상이었다. 연금 상태에 처한 조선 왕실 사람들을 돕기 위해 동분서주한 흔적도 있다. 쓰러져가는 타국의 지배층에 대한 비판의 시선 못지 않게 그들에 대한 예우와 애정을 잊지 않는 균형감이 인상적이었다. 군데군데 산업화와 개방화가 이루어지기 전인 우리나라에 대한 안타까움과 비하가 뒤섞인 감정 토로는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중심 정서다. 구한말 외세의 침략에 하릴없이 당하고 분열되고 온갖 고초를 겪으며 일신의 영달과 개인적 소망들, 목숨까지 바치며 조상들이 지켜낸 오늘날의 진보와 번영 앞에서 다시 돌아온 것만 같은 일본과의 상황에 분노가 치민다. 아마 저자 게일이 살아 있었다면 그도 한마음으로 성토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자신의 종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던 그의 방문이지만 그가 머물렀던 시간은 조선의 격동의 시간을 제3자적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증언하고 서구에 우리나라 고전 문학을 번역하여 전파하고 기독교 성경의 중요 어휘를 우리의 언어와 정서에 맞게 다듬는 등 한국학자로서 의미 있는 성취를 이룬 시간으로 남았다. 또한 이렇게 자신이 남긴 저작으로 후손들이 선조들의 눈물과 땀으로 되찾은 자신의 나라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되었다. 따뜻하고 뭉클하고 아름다운 글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나의 정체성을 다시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내일 또 오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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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7-22 07: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에 제가 알라딘 서재에 활동했을 때 다른 분의 리뷰를 읽고나면 댓글로 인사치레로 하는 말을 남겼어요.

˝oo님이 소개한(추천한) 책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그 말을 한 100번 이상 했을 거예요.. ㅎㅎㅎ 물론 제 취향에 잘 맞아서 읽은 것도 있어요. 그런데 그 수가 많지 않다는 게 함정이죠.. ^^;;

blanca 2019-07-22 11:02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읽고 싶은, 읽어야 할 책은 많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