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처 다시 다 읽어버렸다. 2011년 1월 이 책에 대한 페이퍼를 썼다. 김연수가 서른다섯에 쓴 글, 우연찮게 그때 나도 서른다섯이었다. "이제 나는 서른다섯 살이 됐다."로 시작하는 책. 앞으로 살 인생은 이미 산 인생과 똑같은 것일까, 반문하는 책. 청춘의 언저리에 쓰여진 그러니까 이제는 청춘이라고 명명하기 좀 뭣한 나이가 되기 전 돌아본 스무 살 그 언저리의 이야기들. 밑줄 그은 문장들이 생소하다. 그때 그의 서른다섯을 읽었던 나를 둘러싼 기억이 흐릿하다. 그러고 보면 고작 삼년 전임에도 나는 퍽이나 미성숙하고 어렸던 듯하다. 돌아보면 꼭 그렇다. 난 다 컸다고, 아니 이제 늙었다고 생각했는데...
스물다섯이, 서른이, 서른다섯이 잘 기억나지 않는데 스무 살은 너무나 강렬해 마치 화인 같다. 만났던 사람도 들었던 이야기도 봤던 풍경도 "넌 고작 스무 살이라고! 넌 스무 살이나 됐다고!"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 지울 수가 없다. 지금의 깨달음과 시선을 가지고 다시 스무 살을 복기하고픈 생각 가끔은 한다. 나를 둘러쌌던 것들, 내가 서 있던 자리, 그 무모하고 어리석고 일방적이었던 치기들, 돌이켜 보면 부끄러워 그대로 땅 속으로 꺼지고프게 만들고 마는 장면들.
앞으로 겪을 모든 일들을 스무 살 무렵게 다 겪었다는 사실을, 그 모든 사람을 스무 살 무렵게 다 만났으며 그 모든 길을 스무 살 무렵에 다 걸었습니다. 그 모든 기쁨을, 그 모든 슬픔을, 그 모든 환희를, 그 모든 외로움을, 스무 살 무렵에.
-<청춘의 문장들+> 중
처음에는 그의 서른다섯, <청춘의 문장들>이 그저 새로운 옷을 입은 줄만 알았다. 알고보니 그로부터 십년 뒤의 그의 새로운 문장들이라는 것에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을 받은 것만 같았다. 서른 다섯에 이미 져버린 꽃을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던 그는 이제 떠나보낸 스무 살을 돌아오지 않는 게 좋다,고 이야기한다. 정릉의 자취방에서 매 시간마다 시를 쓰고 또 썼던, 넘치는 건 시간 뿐이었던 청춘은 이제 자전거 앞바구니에 태웠던 딸 연두가 훌쩍 크고 부모가 돌아가셔서 모두가 '나'에게 기대는 그 힘든 시기를 걸어가고 있다. 대체적으로 항상 짐작과는 달라 삶을 추측하는 일을 그만 둔 지점에서 그는 대통령보다 힘들다는 전업소설가로서의 길을 성실하게 걷고 있다.
서른다섯에 돌아보는 스무 살보다 어쩌면 마흔다섯에 돌아보는 스무 살은 더 절절하고 강렬해 보인다. 하지만 이미 떠나온 그 지점을 돌아보는 시선은 어쩌면 더 성숙하고 담담하다.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임을 그리고 그것은 겹겹이 생생하게 그 원형대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한데 어우러져 뭉근하게 나의 기억과 내 내면을 이루는 것임을, 아니 물질적으로 내 몸을 채우고 있음을, 이제 나도 그와 더불어 조금 알 것도 같다.
다시 그의 책머리로 돌아간다. 그가 인용한 페르시아 시인 '루미'의 시.
그는 시인이었기 때문에 아니 지금도 시인이기 때문에 그가 내미는 시는 표피적인 것이 아니라 바로 뚫고 들어온다. 그러고 보면 그의 전작 <청춘의 문장들>에 실린 그 많은 한시 들도 당시에는 그저 바깥으로 흘러 나갔었는데 이제 다시금 만나니 재회한 친구의 진가가 이제서야 밝혀지는 것처럼 속살거리며 걸어 들어온다.
인간이란 손님이 머무는 집,
날마다 손님은 바뀐다네.
기쁨이 다녀가면 우울과 비참함이, 때로는 짧은 깨달음이 찾아온다네.
모두 예기치 않은 손님들이니
그들이 편히 쉬고 가도록 환영하라!
때로 슬픔에 잠긴 자들이 몰려와
네 집의 물건을 모두 끌어내 부순다고 해도
손님들을 극진하게 대하라.
새로운 기쁨을 위해 빈자리를 마련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어두운 생각, 부끄러운 마음, 사악한 뜻이 찾아오면
문간까지 웃으며 달려가 집안으로 맞아들여라.
거기 누가 서 있든 감사하라.
그 모두는 저 너머의 땅으로 우리를 안내할 손님들이니.
-루미, <여인숙 전문>(김연수, <청춘의 문장들+> 책머리에 중 발췌)
모두 예기치 않은 손님들이니/ 그들이 편히 쉬고 가도록 환영하라! 아직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을 읽지 않아 지금 두 권을 나란히 놓고 읽기 시작하려는 당신들에게 확 치미는 질투. 이미 읽어버려 아쉽고 애잔하다. 마치 내가 떠나 보낸 나의 스무 살과 서른 다섯처럼. 다시 돌아간다면 더 진지하고 더 열린 정말 인간의 마음으로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이 진부한 마음. 아직 나는 더 늙어야 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