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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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 카피로도 쓰인 "YES WE CAN"은 이제 너무 자주 들어 식상할 정도다. 하지만 난관에 부딪히거나 힘겨울때면 주먹을 쥐고 외친다. "난 할 수 있어." 일종의 자기 최면인 셈이다. 때론 스스로에게 칭찬을 하기도 한다. "그래 잘 했어. 거봐, 넌 할 수 있다니까"라면서. 그러다 보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도 나오지 않았을까? 그런데, 과연 그 고래는 진심으로 춤추고 싶었을까.

 

<피로 사회> 저자는 현재 우리 사회를 후기근대사회로 보며 성과사회라고 명명한다. 규율이나 지시, 명령을 통해 이루어지던 생산성 향상이라는 자본주의적 목표가 스스로의 성과를 목표로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게 됐다는 것이다. 타율에 의한 강제보다는 스스로  일에 임했을 때 생산성 향상은 배가 된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는 더욱 발전하고 있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개인은 자유를 느끼지만 또한 그 자유로 인해 강제가 발생한다. 바로 성과라는 수갑이 두 손을 옭아매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현대 사회에 우울증이나 소진증후군과 같은 '질병'이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것으로 방증된다.

 

즉 자유로운 개인들은 스스로가 설정한 목표에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실패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살며, 자신이 열등하다는 느낌을 갖는 자책과 자학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을 소진시킨다. 때론 그 목표를 위해 약물을 이용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주인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노예가 되어버린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서 얻는 성공이란 자기 착취에 불과할 수도 있다.

 

'뭐, 그 정도까지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으나, 생존을 위해 야근을 밥먹듯 해야하는, 또는 승진을 위해 가족을 잊고 사는 피곤한 모습을 한번 떠올려보라. 물론 아직도 야근을 강제로 해야만 하거나 굶지 않기 위해 잠을 줄여가며 일해야 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성과사회라고 명명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된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성공을 위해 스스로 택한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정말로 피곤한, 피로 인생이다.

 

그런데 이맇게 자신의 목표를 위해 매진하며 살아가는 것이 '보다' 나은 삶일까라고 의문을 품어 본 적이 있는가. 또한 좋은 삶이란 혼자서만 목표에 도달한다고 해서 누릴 수 있는 것일까. 행복은 모두가 함께 해야 그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생존을 위해 또는 성공을 위해 혼자서만 줄기차게 달려가고 있진 않은가.

 

그러니 제발 앞만 보고 달리기를 멈추고 뒤돌아보고 둘러볼 필요가 있다. 명상과 같은 깊은 심심함에 빠져 보아야 한다. 모든 일에 즉각 즉각 대응하기를 멈춰야 한다. 그래서 지금 상황이 무언가 마땅치 않다면 새로운 상황을 가져올 수 있도록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한다. 천천히 가더라도 어깨동무의 즐거움을 누려보아야 한다. 더이상 피곤하고 피로한 삶이 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스스로 정한(또는 스스로 정했다고 생각하는) 그 목표가 과연 나의 행복을 위한, 더 나은 삶을 위한 종착지인지 이젠 나에게 소리내어 물어보아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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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49쪽

 

자신이 부족하다든가 열등하다는 느낌, 실패에 대한 불안은 바틀비의 감정 목록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끝없는 자책과 자학은 그에게 낯선 것이다. 그저 너 자신이 되어라라는 후기 근대적 성과사회의 특유한 명령에 부딪힌 적이 없다.  57쪽

 

후기근대의 성과 주체는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지 않는다. 복종, 법, 의무 이행이 아니라 자유, 쾌락, 선호가 그의 원칙이다. 그가 노동에서 기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쾌락의 획득이다. 그의 노동은 향유적 노동이다....그런데 이러한 타자로부터의 자유가 해방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자유에서 새로운 강제가 발생한다는 데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86쪽

 

탈진과 우울상태에 빠진 성과주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는 자기자신으로 인해, 자신과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탈진해버린다.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95쪽

 

개성을 확장하고 변형하고 새로 발명해야 한다는 명령이 그 이면에서 우울증을 초래하는데, 그러한 명령의 원천은 정체성과 관련된 상품이다. 사람들이 정체성을 자주 바꾸면 바꿀 수록 생산은 더욱 큰 활력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산업적 규율사회가 변함없는 정체성에 의존했다면, 성과주의적 후산업사회는 생산의 증대를 위해 유연한 개인을 필요로 한다.  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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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자, 새로운 자, 낯선 자에게 마음이 가는 모든 이들아. 너희는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각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서 기다리지도 못한다. 심지어 게으름을 부리지도 못하는구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중에서

 

<개미와 베짱이>에서 베짱이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새로운 롤모델이 되기도 한다. 노래를 잘 부르는 엔터테이너로 성공한다는 뒷이야기 말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라면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하거나 기획사 연습생으로 몇년씩 땀을 흘려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베짱이가 되려고 해도 그냥 놀고 먹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길인 것이다. 휴일도 없는 연습과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내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나를 불사르는 열정이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어찌 연예계만의 일일 것인가. 정치인들도 경제인들도 학자들도 성공을 위해서는 쉼없이 달려야 한다. 보통사람들은 또 어떤가. 살기 위해서, 올라서기 위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발버둥쳐야 한다. 그러는 과정에 조금씩 나를 잃어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함은 여전히 세상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덕목인 셈이다.

 

아~, 그러니 얼마나 피곤한 일인 것인가. 게으름도 부리지 못하는 삶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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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는 잠시 멈출 줄을 모른다. 컴퓨터는 엄청난 연산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다. 머뭇거리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피로사회> 한병철 49쪽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걸음을 재촉해야 한다. 빨리 빨리, 뛰는 것이 더 낫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하면 무엇이 기다릴까. 또다른 목적지가 우리를 기다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는 건 어떨까. 일단 멈춤. 그리고 춤을 추는 것이다. 흥겹게. 뭐 급하지만 않는다면 춤을 추며 목적지까지 가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날지도 모른다. '난 왜 그 목적지를 향해 가는 걸까'하고 말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생존을 위한 것인가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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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똥 민들레 그림책 1
권정생 글, 정승각 그림 / 길벗어린이 / 199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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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엉, 어~엉"

아이가 울며 들어온다. 부모의 눈엔 불똥이 튄다.

"어디서 맞고 들어온거야?" 부모의 훈계가 시작된다. "한대 맞으면 두대 치라고 그랬지"

 

무한 경쟁의 시대, 절대 져서는 안된다. 승자가 모든 걸 갖는 시대에선 오직 이겨야만 한다. 그래야지 살아남는다. 비참해지지 않는다. 그런 시대에 `강아지똥`이라니...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는 이야기라니. 도대체 씨알이나 먹힐 동화일까.

 

그림책 `강아지똥`의 힘은 마이너리티의 반란에 있지 않다. 힘없고 비천한 사람들의 희망찬 모습에 있지 않다. 깨끗함과 더러움, 아름다움과 추함이라는 경계가 허물어지는 인식의 전환에 있다. 똥이 갖고 있는 생태적 힘이 고스란히 동화의 힘이 된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아파트 촌에서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똥은 그저 더러운 똥일 뿐이다. 동화책 속에서처럼 민들레를 피우는 훌륭한 거름이 되지 못한다. 똥은 더러운 것이라며 변기의 단추를 눌러 저멀리 보내야만 하는 아이들이 강아지똥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겠는가. 똥이 어떻게 거름이 되어 우리의 입으로 다시 돌아오는지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강아지똥은 눈을 찡그리며 보는 대상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분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여질 수 있다.

 

우리 사람사는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 똥이 흙과 민들레와의 관계성 속에서 아름다운 거름이 되듯, 사람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이 동화는 예쁘게 화장하고 가꾸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소박하고 진솔된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느끼기엔 시멘트로 둘러싸인 도시는 척박하기만 하다. 강아지똥이 아름다울 수 있는 자연속에서 아이들이 뛰놀수 있는 도시를 꿈꾸기엔 우린 너무 멀리왔을까.

 

강아지똥이 동화책 속 그림처럼 아름답게 느껴질 그날을 꿈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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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법정(法頂) 지음 / 문학의숲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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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행무상(諸行無常),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한다. 

그럼, 너무 허무하다고. 그냥 손을 놓아버리고 싶다고.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살아갈 힘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게 바로 불교라고 한다.

모든 현상은 한때입니다. 이 한때에 꺾이지 말아야 합니다. .. 무상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때라는 소리입니다. 좋은 일이든 언짢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모든 것은 한때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극복할 수 있는 의지가 생깁니다. 한때이기 때문에 우리가 뛰어넘을 수 있는 용기와 기량이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33쪽  

만약 모든게 항상 그렇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같은 시간을 되풀이해서 살게된 주인공들이 나오는 영화를 떠올려보라. 처음엔 신과 같은 존재처럼 신나하다가 결국 삶의 의욕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게된다. 변화란 살아가는 것들의 숙명인 셈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변화라는 삶 속에서 휘둘리기 보다는 그 변화를 주체적으로 끌고 가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운명은 결코 녹녹치 않다. 괴로움의 연속이다. 변화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 이토록 힘든 일일까. 불교는 그 원인을 욕심, 집착에 있다고 본다. 그 욕심과 집착을 끊으면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 방법은 8정도(정견 정사:정어 정업정명 정근:정념念 정定)에 있다.  

법정 스님의 강연도 이 큰 틀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다. 아함경의 8정도가 있듯, 책을 읽으며 스님이 강조한 몇가지 단어를 간추려 봤다. 

청빈(맑은 가난), 자유, 사랑과 신의, 지혜와 자비, 덕, 친절, 주인노릇, 단순함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주위에서 자주 듣는 단어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어들이 가슴을 울리는 것은 스님의 입에서 나온 소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고리타분한 도덕적 언사도, 공염불도 아니기 때문이다. 스님이 입적하시기 전까지 그가 살아온 행적들이 이 단어들을 더욱 빛나게 한다. 돈에 쪼들려, 돈을 쫓아 허겁지겁 뛰어가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찬찬히 그 발걸음을 돌아보게 만든다.  

난, 지금 세상에 주인 노릇하며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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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빈 

맑은 가난인 청빈, 맑은 가난이란 많이 갖고자 하는 욕망을 스스로, 자주적으로 억제하는 일입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더 바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맑은 가난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고,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갖고자 하는 욕망을 스스로 억제하기 때문에 더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21쪽 

2. 자유 

출가는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에 이르는 길입니다. 인간은 본디 자유로운 존재이며, 존재의 궁극적인 목표도 자유입니다. 물질,온갖 관계, 심지어 자신이 따르는 종교로부터도 자유로워지는 일입니다. 60쪽 

3. 사랑과 신의 

인간의 아름다움은 사랑과 신의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이웃과 나누는 일입니다. 66쪽 

4. 지혜와 자비 

지혜와 자비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진정으로 지혜를 체험했다면 그것이 자비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89쪽  

5. 덕

덕은 나누는 일입니다. 101쪽 

6. 친절 

우리는 만나는 대상에게 한결같이 친절해야 합니다. 234쪽 

7. 주인 노릇 

종교적인 사람은 순간순간 중심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살든 간에, 그 자리에서 중심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면 당당하게 사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주인 노릇하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 자리가 바로 법계, 진리의 세계입니다. 소도구나 부속품으로써 살지 말고 중심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308쪽 

8. 단순함 

단순한 것이 본질적인 것입니다. 단순함이란 무엇인가?... 단순해지기 위해서는 가진 것이 적어야 하고, 불필요한 관계가 정리되어야 합니다. 문득 홀로 있게 된다는 것은 모처럼 자신에게 명상의 문이 열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때 조용히 혼자서 자기 삶을 되돌아보십시오.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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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함의 진리, 모든 것은 변화한다. 어떤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27쪽
 

분별과 집착을 떠난 마음이 곧 도량이라는 것입니다. 29쪽 

사람은 무엇에 쫓겨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주적인 삶이 아닙니다. 36쪽 

자신의 존재를 억지로 꾸미지 말라는 뜻입니다. 있는 그대로가 좋다는 것입니다. 42쪽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입니다. 출가란 집착의 집, 욕망의 집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행이 필요합니다. 일상의 굴레에서 벗어나 다른 세상으로 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 여행을 통해 비본질적이고 일상적인 삶을 주기적으로 털어내야 합니다. 53쪽 

출가는 안정된 삶을 뛰어넘어 충만한 삶에 이르려는 것입니다. 안정과 편안함은 타성의 늪입니다. 쉼 없는 탈출과 새로운 시작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변화가 없이는 죽은 존재입니다. 59쪽 
 

똑같이 되풀이되는 삶은 무익합니다. 69쪽 
 

아쉬움과 부족함을 무르면 고마움을 알 길이 없습니다....무엇보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움켜잡기보다는 쓰다듬을 줄 알아야 합니다. 105쪽 

인간의 가장 큰 병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 데 있습니다.112쪽  

기도는 삼업, 말과 생각과 행동을 맑히는 일입니다. 127쪽 

진리란 별것이 아니라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모든 사물 그대로라는 소식입니다. 134쪽 

타인과의 교감을 통해서, 정을 나눔으로써 마음이 열립니다.... 행복은 마음의 평화를 통해서 싹이 틉니다. 153쪽 

게으름은 최대의 악덕입니다. 게으르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196쪽  

자기 생각과 마음의 흐름을 지켜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을 맑히는 기본적인 훈련입니다. 238쪽 
 

가난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 볼 때가 되었습니다. 주어진 가난이 아니라 선택해야 할 가난입니다. 그것은 빈곤이 아니라 아름다운 절제입니다.  320쪽  
 

종교란 무엇입니까? 종교학자들은 거창하게 이야기하지만, 종교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선한 마음입니다. 강물처럼 살아서 끝없이 흐르는 자비심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그 자비심을 순간순간 남에게 펼치는 일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이고 수행입니다. 337쪽  
 

사람은 활발해야 합니다.자신의 견해로 생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지혜에 의지해 스스로 판단해야 합니다. 뜻을 담아서 이야기해야 합니다. 탐구하는 노력을 하고 창조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에리히 프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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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cina 2011-11-12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삶을 살아라. 새겼답니다. 에리히 프롬의 말씀에도 동감합니다. 좋은 글 여전히 아름답게 써 주고 계심에 감사합니다~ 하루살이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