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스페셜 짝 3부는 부부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든 다큐였다. 연애는 꿈이요 결혼은 실재라는 말로 흔히들 결혼생활의 팍팍함을 말하곤 한다. 실제 대한민국에서는 1시간에 14쌍의 부부가 이혼도장을 찍는다고 한다. 결혼 전 목숨을 바칠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이 결혼 후 철천지 원수가 되는 것이 도대체 어떤 이유 때문일까.  

다큐에서는 정서적, 그러니까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결혼한 사람들이 좀비형으로 변해갈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실제 많은 부부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좀비처럼 하루 온종일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을 정도다. 아직도 사랑하는 감정이 남아있음에도 손길이 스치는 것에 소스라칠 정도로 놀라는 모습 속에서 남남 보다 더 못할 듯 느껴지기도 한다. 도대체 어쩌다 이 모양이 됐단 말인가. 

수십년을 함께 산 노부부들이나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변화를 직시하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꿈에서 깨란 소리다. 연애에서 결혼으로 넘어가면 환경부터가 변한다. 그렇게 변화된 환경에 맞추어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연애시절때 꿈꾸던 환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좀비형 부부의 대부분은 환상과 현실의 격차 속에 갇혀버린 사람들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양보하고 있다고 자위하며,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고 자부하며, 묵묵히 고통을 이겨낸다. 행복한 가정은 멀게만 느껴진다. 그러나 부부가 된 순간, 환경도 변하고, 나도 변하고, 배우자도 변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출발을 해야한다. 전문가들은 그래야지만 행복이 저 멀리 도망가지 않는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그 변화의 중심에 자기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가족을 위해, 배우자를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이 자꾸만 불행의 구렁텅이로 밀어넣는 것같다. 다큐에서 보여진 나름 행복해 보이는 부부(아내는 밸리댄스 전문가, 남편은 은행 부지점장)는 다소 이기적이라 보여질 만큼 자아 완성을 첫번째로 두었다. 그리고 그 완성의 과정에서 힘든 일에 부닥칠 때면 배우자에게 서로 기대며 도움을 주었다. 자기가 행복할 때 가족도 행복하다는 생각, 그리고 자기의 행복을 위한 길에 희생을 강요하지 않고 윤활유가 되어주는 상대가 바로 짝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지만 짝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잠시 내 곁에 있는 짝을 생각해본다. 그리고 혹시나 짝에게 희생을 강요하며-자발적 희생까지 포함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 자문해본다. 그토록 사랑하는 짝과 함께 있으니 행복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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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한 시대가 열리고 과학이 아무리 발전을 해도 생명에 대한 비밀을 밝히는 것은 아직도 멀기만하다. 최근 뇌과학이 각광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뇌의 작동은 신비라는 이름을 빼앗기지 않았다. 신체 작용의 비밀 중 또하나 잠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추론만 가능할 뿐 정확한 작동기제는 밝혀지지 않았다. 도대체 동물들은 왜 잠을 자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잠은 어떤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것일까. 잠을 자며 꿈을 꾸는 것은 왜일까.... 

아이가 백일을 지나면서 잠을 재우는 게 힘들어졌다. 두 눈을 자꾸 비비면서 잠이 온다는 신호를 보내면 잠 재우기에 들어간다. 하지만 어지간해선 도저히 잠을 청하지 않는다. 자꾸 보채며 가끔씩 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안아주지 않으면 발버둥을 친다. 누군가는 손을 탔다고 그러지만 '와서 키워봐라 그런 소리 나오나'라는 말을 꼭 집어 삼키며, 그냥 웃어 넘긴다. 하루이틀도 아니고 한달이 넘게 아이의 잠떼와 씨름하다 보니 점차 지쳐간다. 그래도 어쩔 것인가. 잠을 자고 나서의 모습은 그야말로 천사 그 자체인 것을. 천사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는 말 할 필요가 없을테다. (가끔씩 야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자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면 눈물이 글썽해질 때가 있다. 끝없이 차오르는 어떤 행복감과 충만감으로 말이다. 한편 잠자는 모습을 보고 나갔다 돌아와서도 다시 잠자는 모습만 봐야 한다는 비애감으로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아이들은 잠떼를 부리는 걸까. 곰곰히 생각해봤다. 정답은 없겠지만 나름 해답을 내려봤다. 우리 신체는 잠이 오면 그 기능이 저하된다. 눈꺼풀도 감기고 손발의 힘도 떨어진다. 하지만 아이는 자신의 신체가 저하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자신을 제어하고 싶은 욕구대로 신체가 따라오지 않는 것에 화가 나는 것이다. 배고프면 울고 기저귀 갈아달라고 울면서 욕망을 채우는 아이가 아니던가. 이 제어에 대한 욕구를 타인에게로 확장한다면 그것은 권력욕이 될 것이다. 세상을 자기 뜻대로 움직여보고 싶은 욕망, 그래서 어른들도 떼를 부린다. 권력욕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찌질한 어른들의 행동은 바로 권력떼인 것이다. 하지만 권력떼를 부리다가 잠잠해진 그들의 얼굴은 결코 천사가 될 수 없기에 세상은 참 슬프다. 제발 떼 좀 부리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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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방일기
지허 지음, 견동한 그림 / 불광출판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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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들은 여름에 한번 겨울에 한번 안거에 들어간다. (원래는 여름 우기 한번 뭇생명들을 죽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행해졌다) 이 책은 지허 스님이라는 분이 동안거에 들어가기 전부터 끝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금욕적인 생활의 어려움, 김장 울력, 화두와의 싸움 등등이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으로 보여진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속된 세상을 떨쳐버린 곳에서도 지극히 말초적인 욕망(맛있는 걸 먹고 싶고 잠시라도 잠을자고 싶은 욕망 등)에 휩싸인 이들의 모습 속에서 구도자의 길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짐작케 만든다. 또한 이들의 수행이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결국 그것이 궁극적으로 이타적 존재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과정임을 깨닫게 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이 나에게 '쿵'하고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은 다음과 같은 지허 스님의 말씀 때문이다.

이 세상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또 신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지금 괴로워하고 있는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이 부처님 교설의 의취입니다. ... 인간은 초월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완성될 수 있고 인간의 조건은 조화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인간의 완성을 위해 선을 내세웠고, 인간은 선을 통하여 완성을 가능케 하고 있습니다. 선은 신비가 아니고 절대자의 조종을 받는 그 어떤 것도 아닙니다. 인간 완성을 위한 길입니다. 즉 열반으로 이르는 길입니다.  108.109쪽 
  

이 글을 읽고 나를 사로잡고 있는 고민 중 세상의 유한성이나 신의 존재성과 같은 고민은 없었는지 돌아보게 만들었다. 즉, 지적 유희에 빠져 허우적대지는 않았는지 생각해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고민이 해결되면 과연 인생의 문제도 해결될 것인지 살펴봤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질문인데도, 그리고 그런 생각도 얼핏 몇번인가는 해봤을 터인데도, 이번처럼 크게 와 닿은 건 무엇때문일까. 이 책과 나와의 인연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실존적 고민과 동떨어진 고민을 놓아두고, 사고의 유희도 잠시 제쳐두자고 생각해본다. 그러면 나에게 남은 실존적 고민은 무엇인가. 새로운 화두를 스스로 던져본다.   

지금 나를 괴롭히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일이 괴롭다면 그 괴로운 일의 결과물이 다른 이에게 행복을 줄 수 있을까. 괴롭다면서 그 일을 놓치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단으로서의 일이다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생계 때문인가. 생계가 삶의 목적인가. 그렇다면 얼마나 비루한 인생인가. 밥벌이의 지겨움을 말한 김훈의 글이 떠오른다. 정녕 입에 풀칠하는 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미소 지으며 마음에 거리낌없이 행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아무래도 나의 올 동안거 화두는 이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나에게 있어 열반은 아무래도 이 화두를 깨우치는 것에서 그 길을 열어줄 듯하다. 스님들의 치열한 안거생활처럼 화두를 깨우치기 위해 먼저 게으름과 안주부터 벗어던지고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을 떠나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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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나는 숙명의 객체이지만 운명의 주체이다.숙명은 자기 부재의 과거가 관장했지만 운명은 자기 실재의 현재가, 그리고 자신이 관장하는 것이어서 운명을 창조하고 개조할 수 있는 소지는 운명 직전까지 무한히 열려져 있다. 숙명의 필연성을 인식하면 운명의 당위성을 절감하게 된다.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숙명적인 것을 피하려고 괴로워 할 것이 아니라 이해해야 하며 운명적인 것은 붙잡고 사랑해야 할 뿐이다. 고집의 표상 같은 누더기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선객이야말로 견성의 문턱에서 문고리를 잡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끝내 운명은 타기될 것이 아니라 파지되어야 함은 선객의 금욕생활이 극한에 이를 수록 절감되는 상황 떄문이다.  35쪽 

중생세계에서 보면 필요성을 주장하면 이유가 되고 타당성을 주장하면 독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방관자가 된 채 그대로 보고 느끼면서 오직 견성에 매달려 중생계를 탈피하려 한다. 자신이 중생에 머물러 있는 한 모든 판단의 척도가 중생심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서 불가에서는 시비는 터부로 여기지만 그러나 시비가 그칠 때가 없으니 역시 중생인지라 어쩔 수 없을 뿐이다.  39쪽 

사랑하는 사람을 갖지 말라. 미워하는 사람도 갖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워하는 사람은 자주 만나 괴롭다. 애증을 떠나 단무심으로 살아가라는 교훈이다.  54쪽  

훌륭한 선객일수록 훌륭한 보건자이다. 견성은 절대로 단시일에 가능하지 않고 견성을 시기하는 것이 바로 병마라는 걸 잘 알기 떄문에 섭생에 철저하다. 견성이 생의 초월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생의 조화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선객은 부처님처럼 위대해 보이나 병든 선객은 대처승보다 더 추해진다. 화두는 멀리 보내고 비루와 비열의 옷을 입고 약을 찾아 헤멘다. 그는 이미 선객이 아니고 흔히 세상에서 말하는 인간폐물이 되고 만다. 身外가 無物. 차원 높은 정신성 속에서 살아가는 선객일수록 유물적이고 속한적이라고 타기할 게 아니라 화두 다음으로 소중히 음미해야 할 잠언이다.  78쪽 

인간이란 과거의 사실만을 위해 서있는 망두석이 아니라 내일을 살려고 어제의 짐을 내려놓으려는 자세가 있기에 비로소 인간이라고. 93쪽 

불교의 중도는 역의 태극이나 자사의 중용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에도 상통한다. 상극의 초극이야말로 진실로 인간의 가장 긴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비로소 인간의 순화, 지상의 정화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개개인의 마음에 달려 있을 뿐이다. 개인의 순정한 마음 없이 사회의 복지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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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백가기행 조용헌의 백가기행 1
조용헌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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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학이 내린 결론은 간단하다. 바로 명당이다. 명당을 찾아서 거기에 집 짓고 살면 된다. 그렇다면 어떤 곳이 명당인가? 무릇 명당이란 일단 거기에 살면 사람이 건강해져야 한다. 그다음에는 영성이 밝아져야 한다. 명당은 건강과 영성이다. 영성은 뭔가? 자유다. 영성이 밝아질수록 자유가 확대된다. 영성과 자유는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기독교식으로 이야기하면 명당에 살면 구원에 가까워진다. ... 자기에게 맞는 집터는 어떻게 구하는가? 어떻게 그 장소가 명당인지를 확인한단 말인가? 이 같은 의문에 대한 필자 나름의 해답은 두 가지다. 우선 그 장소에서 잠을 잘 수 있으면 한번 자봐야 한다는 것이다. .. 잠을 자고 나서는 숙면을 취했는가가 관건이다. 깊이 잠들고, 자고 난 후 몸이 개운하면 그곳은 나에게 맞는 터 또는 명당이라 볼 수 있다. 205쪽 
  

이 책은 전국의 내로라하는 집들을 직접 찾아 그 집의 내력을 담고 있다. 집값 비싸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서울 평창동의 럭셔리한 집에서부터 한적한 시골의 2평 남짓한 흙집까지 그 스펙트럼이 광범위하다. 그런데 이들을 묶어주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명당이 아닐까 싶다. 

지은이는 명당을 건강과 영성으로 말한다. 이때 건강과 영성은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집단적, 사회적 차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백가기행에 소개된 한옥 중에는 집안대대로 내려온 것들이 많다. 역사적 사건을 수두룩하게 겪으면서도 온전하게 집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그 집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과의 공존을 꾀했기 때문이다. 즉 자신만의 안위가 아니라 마을 전체의 안위를 생각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또다른 한편으론 유독 혼자 사는 남자들의 집이 많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사회라는 울타리로부터 벗어나 철저히 혼자로 산다는 것은 외롭다는 의미와 함께 자유롭다는 뜻도 포함된다. 영성의 확장이라는 뜻의 자유는 소유욕의 감소와도 관련이 깊다. 즉 갖고 싶은 것이 적을 수록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 산다는 것은 자유가 확장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이라 할 수 있다.(가족이 생긴다고 해서 욕망이 확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이라는 의무가 욕망의 테두리를 넓히는 것을 완전히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욕망을 줄이려면 삶이 간소해야 한다. 군더더기를 다 털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너무 간소함을 추구하다 보면 궁색하게 보일 수도 있다. 궁색은 자칫 속됨으로 갈 수 있다. 이 또한 바라는 삶이 아니다. 소박하면서도 궁색하지 않고 품격이 느껴지는 집. 이 집 주인인 오여 김창욱 선생이 품은 인생관이다. 51쪽 

두려움과 근심이 없는데 점을 쳐서 무엇하겠는가. 그만큼 세상살이에서 독립(홀로 있어도 두렵지 않다)과 둔세(세상에 나가지 않아도 근심이 없다)는 어렵다. 166쪽 

어떤 삶이 바람직한 것인가? 돈을 쓰지 않는 삶이 바람직하다. 돈을 적게 쓰면 돈을 적게 벌어도 된다. 돈을 적게 벌면 시간이 남는다. 남는 시간에 인생을 즐겨야 한다. 어떻게 인생을 즐긴단 말인가? 나무, 꽃, 돌, 물고기, 구름, 석양, 한가롭게 흩어져 가는 연기를 보면서 즐겨야 한다. 이런 것이 다 나를 즐겁게 해준다. 쾌락의 근원인 셈이다. 174쪽 -하동 시인 박남준 
  

책을 덮고 나니 연립주택과 아파트에서 살아온 내 주거환경이 답답해져 온다. 궁색하지 않으면서 품격을 유지할 수 있는 삶, 과연 가능할까. 어떻게 살아야 이런 경지에 다다를 수 있는가.  

공간을 바꾼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다. 생각과 업보, 나아가서는 운명까지도 관계되는 부분이 바로 이 공간의 문제다. 창의적인 생각을 하려면 공간을 전환해야 한다. 여행이 주는 매력이 여기에 있다. 공간을 바꿔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활의 불편함이 따른다. 156쪽 
  

불편한 행복을 추구하는 삶을 위해 한발 나아가보자고 새삼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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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내 경험에 의하면 금기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된다. 사람은 금기에 달려드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뉜다. 금기를 금기로 여기고 무서워하면 이야기는 없다. 금기에 달려들어야 이야기가 생긴다. 왜냐하면 스파크가 튀기 떄문이다. 스파크가 이야기인 것이다. 맨땅에 헤딩을 해야 들을 만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법이다. 그러자니 이마에 피가 맺힌다. 81쪽 

동정일여라는 말이 있다. 동과 정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것인가? 이것이 동양의 신비가들이 평생 동안 추구한 목표였다. 움직이는 가운데서도 어떻게 하면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왜 고요함이 중요하단 말인가? 고요함이 있어야만 긴장이 풀리고, 긴장이 풀려야만 내면 세계로 깊이 침잠할 수 있고, 침잠을 해야만 신비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비 체험은 깊은 행복감을 동반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체험의 기본은 정이다. 고요함이 바탕이 되어야만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는데, 현대문명은 구조적으로 이 고요함을 얻기 어렵게 되어 있다. 휴대폰, 컴퓨터, 자동차와 같은 문명의 이기는 고요함을 파괴하는 무기다. 우리는 고대나 중세인에 비해 동만 있고, 정이 부족한 삶을 살고 있다. 고요함이 움짃임보다 더 기본이고 우선적인데, 이 고요함이 너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1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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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내리실겁니까" 

"아... 네..." 

시내버스에서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곤혹스러워 하신다. 버스 뒷문이 열린지 한참이 됐는데도 어르신은 내리지를 못하고 연신 카드 단말기에 카드를 대고 계신다. 하지만 단말기는 고장이 난 상태. 어르신은 한참을 단말기와 씨름하며 그렇게 서 계시고 있었던 것이다.   

출입문 바로 뒷좌석의 남자가 보다못해 한마디 건넨다.  

"이쪽이요" 

다른 쪽 카드 단말기에 카드를 대라고 알려주니, 그제서야 어르신은 카드를 대고 급히 버스에서 내리신다. 그때 버스 문은 닫힐 뻔했다. 그냥 출발할 태세였다.  

사람들은 가끔 실패 속에 갇혀 살 때가 있다. 빨리 다른 방법을 택하거나 다른 길을 걸어야 할 때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그 한가지 방법만을 고집하다 낭패를 당하곤 한다. 아니면 실패하고 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아무 생각없이 하던 일을 되풀이 하고만 있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말이다.  

버스에서 전전긍긍했던 어르신은 단말기가 카드를 읽지 못하자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그리고 다시 수십번 카드를 대본다. 하지만 단말기에선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때 빨리 깨달아야 한다. 그냥 포기하고 내리거나 다른 단말기를 선택하거나. 그냥 계속 카드만 대고 있으면 아무 것도 해결 될 것은 없다.  

그렇다면 지금 시도하고 있는 일이 무의미하거나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보통 단말기에는 붉은색 글자와 녹색 글자가 있다. 처리된 금액과 잔액으로 구분되는데 보통 잔액란은 녹색숫자로 시간이 표시된다. 그런데 어르신이 카드를 댔던 단말기는 녹색숫자의 시간 대신에 이상한 영문자가 떠 있고, 붉은색 글자란에도 숫자가 잔뜩 쓰여 있었다. 평소 단말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면 고장난 것이라는 것을 금세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무심코 카드를 단말기에 대고 오르내리다 보니, 그리고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지 못했기 때문에 고장난 것이라는 것을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많은 문제들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되풀이 되는 일상을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다 보면 일상의 어딘가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지나갈 것이다. 아무런 성과없는 또는 보람없는 헛된 시간만이 흘러갈지도 모른다. 잘못된 상황을 빨리 파악하고 대체할 수 있는 능력, 또는 빨리 포기하고 새로운 도전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란 평소 우리가 생활하는 바로 그 환경을 유심히 살펴본 사람에게만 주어질 것이다. 단말기가 고장 나 있다는 것을 알아채기 위해선 단말기가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를 알고 있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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