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피탈리즘 : 러브 스토리 - Capitalism: A Lov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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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면서 인간의, 특히 내 변덕과 간사함에 대해 생각했다. 2004년 마이클 무어의 <화씨 911>을 처음 본 후, 그 전에 만든 영화들을 모두 찾아보고 마이클 무어가 운영하는 사이트에도 들어가보고 그가 쓴 책도 샀다.(물론 다 읽지는 않았지만)  그가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은 발랄하고 억지스러우면서도 약간의 진정성이 있다고 봤다. 페이크 다큐에 대해 가자미 눈을 뜨는 사람들도 있지만 페이크 다큐 역시 영화의 한 장르라고 본다면 욕할 것 없이 즐길 수 있다. 

<마이클 무어 뒤집어 보기>란 다큐에서 마이클 무어가 얼마나 야심가며 경박한 속임수를 쓰고 있는지 보여주려고 하지만 그 다큐 역시 감독의 시선에 따른 편집이니 마이클 무어가 쓴 기법과 마찬가지고 판단은 각자의 몫이라고 여겼다. 지금도 이 생각은 변함없지만 <캐피탈리즘: 러브 스토리>는 마이클 무어식 말하기에 대한 내 편애를 흔드는 영화다. 전작들과 똑같은 기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서브프라임의 수혜자와 피해자의 입장, 월가의 기득권과 금융파생상품에 대한 조롱이 주요 플롯인데 전에는 희미했던 단점들이 이 영화에서는 두드러진다. 논점에 대한 객관적이고 설득력있는 주장보다는 감정적이고 심지어 선정적 어조로, 자 누가 잘못한거야?하고 아이한테 묻듯이 묻는다. 이런 식의 주장은, 그야말로 아이한테나 먹힐 법하다. 그가 굵직한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있는데도 사회 운동가라기 보다는 기발한 오락물 제작자로 간주되는 이유가 아닐까.

마이클 무어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내 마음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마이클 무어는 이 영화에서도 그의 주특기를 잘 살리고 있다. 영상과 음악, 내레이션의 배치로 유머를 끄집어내고 나아가 조롱한다. 문제는 나란 관객은 그의 영화에 익숙해져서 그가 만든 유머에도 별 감흥없다는 거다. 같은 상품을 연속해서 쓰다보면 질려서 다른 상품을 찾는 소비자가 점점 더 자극적인 걸 원하는 이치와 같다. 자본주는 소비자의 이런 변덕을 잘 간파하고 본질은 같지만 외형만 다른 상품을 신상품으로 출시하고, 총체적 통찰력이 결여된 소비자는 일시적 충족감에 굴복한다. 이런 싸이클이야말로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골조다. 이 영화를 보면서 마이클 무어의 통찰능력까지 의심하는 데 이른 나야말로 캐피탈리즘 러버가 아닐까, 뭐 이런 자아비판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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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etr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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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은 묵직하고 정직하다. 영화 혹은 영화 감독이 어떤 힘을 갖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영화라는 제한된 매체를 통해 알지만 선뜻 할 수 없는 말을 할 때다.  얼마 전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감독이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했다.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는 건 영화라는 매체를 다룰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보다 좀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 계속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겠다"고.  영화라는 매체가 단지 화면을 때깔 좋게 이어붙이고 오감을 유혹하는 매체라면 그 영화는 안 봐도 되는 영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란 매체가 어떤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인위적 감동이나 빛깔 좋은 촬영술이나 편집술이 전부가 아니라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보일 때가 그렇다. 물론 이런 종류의 영화를 보는 건 썩 유쾌하지는 않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은 편하게만 즐길 수는 없는 영화다. 도덕이나 윤리라는 대사 한 줄 없지만 도덕적이고 성찰적이다. 등장인물들 모두, 우리처럼 도덕이나 윤리란 어떠해야하는지, 그 당위성에 대해 알고 있다. 사람이 생각대로 수 있을 거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아는 건 아는 거고 상황은 상황이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  

올해 나이 66세. 이름 박미자. 취미 혹은 특기 시 쓰기. 직업은 가사 도우미. 이런 스펙을 가지고 있는 미자 할머니는 세상살이에서 두 발을 떼고 날리는 꽃잎에 영혼을 맡긴 거처럼 보인다. 시골길과 안 어울리는 화사한 옷, 길을 걷다 멈춰 시상을 메모하는 행동. 확실히 도시에서의 삶과는 다르다. 미자 할머니가 저 멀리 어린 시절 시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말 한 마디에 뒤 늦게 시를 쓰려고 한다. 극 중 시는 죽었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시가 죽은 게 아니라 시심이 죽었다.  

시심이란 섭리대로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나 하지만 영화 속에서 전개되는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은 섭리에 기초한 게 아니라 편의에기댄다. 신속하고 좋은 게 좋다는 논리는, 결국 가해자 입장의 시선이지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염려는 부재한다.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을 보이는 초로의 노인만이 인간적 도리에 대해 고민한다. 시 수업을 들으면서도 정작 아무도 시를 안 쓰는 분위기. 시, 즉 인간이 인간에 대한 도리와 예의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인 시를 쓸 수 없는 혹은 쓰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미자 할머니는 시를 쓰려고 발버둥친다. 미안함에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태도는 전반적 사회적 분위기를 알고 있지만 선뜻 나서서 행동하지 못하는 데서 내적 갈등 내지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이 영화가 참 불편한데는 어떤 모범답안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경계를 나누는 데 길들여진 제도 속에서 바라볼 때, 참 현실같으면서도 영화에서만이라도 선이 보상받았으면 좋겠다는 심리가 작용한다. 가해자 VS 피해자란 구도를 주입시킨 분위기, 그리고 시심을 거세하는 분위기 간의 함수관계는 관객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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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디 에어 - Up In The 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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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이 별로 안 좋아서 안 봤던 영화인데 억울하다. 조지 클루니의 간지만 부각시킨 평들이 많은데 그게 다가 아니다. 일년 중 322일을 비행기와 호텔에서 보내는 남자가 집처럼 편안하게 느끼는 게 건조한 호텔방, 비행기 기다리면서 이용하는 라운지, 저렴한 스시 부페다. 내 침대, 배게, 아침에 마시는 커피 한 잔이 아니다.  

1천만 마일적립해서 비행기 안에 이름을 새기는 게 목표고 비록 해고를 통보하는 일을 하지만 그들의 푸념과 독설을 들어야 도리라고 믿는 남자, 라이언. 친구나 가족, 아는 사람은 배낭 속 짐처럼 무겁기만하다고 강연을 하면서도 동생 부부 사진을 캐리어 속에 끌고 다니면서 곳곳에서 기념사진 촬영을 부탁받은 대로 한다. 사람보다 호텔 빈 방을 더 편안하게 느끼고 마일리지 적립되지 않는 곳에서는 한 푼도 안 쓰는 미국적 인간유형이지만 잠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거 같은 착각을 하기도 한다. 그만 돌아다니고 집이라는 곳에 자신의 물건과 사랑하는 사람의 물건을 풀어놓고 지내기로 마음을 바꿔 먹어본다. 그러나 운명은 계속 비행기나 타고 호텔방을 전전하라고 한다. 두 발을 딛고 서고 싶어하는 그녀는 이미 두 발을 다른 곳에 딛고 있으면서 그는 일상의 탈출구라고 말한다. 보고 싶으면 찾아오지 말고 전화하라고 말한다. 남자는 다시 원래의 쳇바퀴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지만 이미 전과 같을 수 없다.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만 아마도 비극이 시작될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이 가치있고 다른 삶이 있다는 걸 의심해보지 않는 사람에게 다른 삶이 있다고 말해준다. 그렇지만 너는 그런 삶을 살 수 없다고 말해주고 사라진다면 남은 사람은 똑같은 삶을 살아도 전처럼 자신의 삶을 대하기 힘들다. 비극은 이렇게 자각에서 생긴다. 익숙한 일상에서 거리를 두기를 하는 게 꼭 필요한지 모르겠다. 행복하려면 미몽에 그냥 빠져있는 것도 괜찮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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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판타스틱 데뷔작 - Son of Ramb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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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상암동에 있는 영상자료원에서 본 영화다. 처음 가 봤는데 가까운 자주 가고 싶을 정도로 시설도 좋은데 영화도 공짜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는 길은 너무 험난했다. 마포쪽은 오, 노, 하고 싶은 곳이다. ㅠ.ㅠ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만든 감독의 영화로 비슷한 분위기다. 발랄하고 유쾌하면서도 섬세하다. 그런데도 난 이런 류의 영화에는 빠져들 수 없다. 어쩌면 감독의 탁월한 재능을 질투하는지도 모른다. 누구나가 머리속으로 한 번쯤 생각해봤음직한 맥락없는 잔생각들을 한 편의 영화로 풀어놓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이 영화도 아주 사소한 에피소들로 영화를 풀어간다. <람보>를 보고 영화를 만들기로 결심한 열살 무렵의 소년들 이야기다. 영화 속 액션과 현실을 혼동해서 죽을 뻔한 사고도 내고 갑자기 고학년들이 영화를 함께 찍겠다며 끼어들어 원래 두 소년의 우정이 금이가기도 한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는 완성되고 형의 도움으로 극장상영까지하고 두 소년은 다시 우정을 회복한다.  

꼬마들의 우정 속에서 긴장과 갈등이며 아이들의 시선으로 본 가족의 의미를 섬세하게 잡아낸다. 아이들을 꿈을 꾸기 시작하는 매체와 아이들을 둘러싼 학교와 집, 아주 일상적인 것에서 액센트를 줄 곳을 찾아내는 시선이 이 감독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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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끝 - At the End of Daybrea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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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전에 한국 독립영화 <양 한 마리 양 두마리>를 봤다. 굉장히 정직한 영화로 안톤 체홉 <세자매>의 대사를 모티브로 극을 이끌어가는데 연극적 경향이 강했다. 연극을 그냥 카메라로 담은 거 같았다. 영화적 메시지가 꽤 좋은데도 영화가 이러면 안 되지..하는 고정관념이 있다. 다음에 바로 이 영화를 보면서 그렇지 이게 영화지, 했다.  

같은 독립영화라도(두 영화를 연속 봐서 아무래도 비교를 하게 된다) 영화가 연극과 다른점은 영화 언어다. 카메라 움직임이 주는 긴장감이나 효과, 각종 쇼트들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연극과 구별된다.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황철민 감독보다는 확실히 영화언어에 능하다.  

여자친구를 죽이고 터벅터벅 나타나는 장면을 예로 들면, 카메라는 나무 위에 위치해있다. 아무도 없는 잔디 위로 발이 느릿느릿 나타나고 반대편에서 친구들의 머리가 나타난다. 남자가 카메라 안으로 다 들어왔을 때, 친구들은 뛰어서 카메라를 빠져나가고 다시 남자는 혼자 남는다. 이 장면은 그 어떤 대사보다도 남자의 처참한 심경을 잘 담아내고 있다.  

이런 수려한 장면이 있긴하지만 영화는 대책없이 어둡다. 왜 사람을 다 죽이는거냐. 오프닝에서 쥐를 생포(?)해서 뜨거운 물을 부어서 죽인다. 엔딩도 죽음으로 끝난다. 새벽의 끝이 아니라 밤의 계속이다.-.-;  

덧. 말레이시아 영화인데 처음에는 태국말인 거 같았고 조금 지나니 중국말 같기도 하다. 말레이어가 이렇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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