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그대 - You Will Meet a Tall Dark Str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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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어플 중 애용하는 것 중 하나가 오늘의 별점Daily Horoscope이다. 매일 자정이 넘으면 업데이트된다. 오늘 별자리 점괘는 이렇다. There is now a situation in your world that could be comapred, in a way, to that magical horse. Something keeps changing. Just when you think you know what it is, it begins to look different.  

한 마디로 말하면, 모든 게 내 마음에 달렸다는 말이다. 이런 추상적인 말이 어딨나. 게다가 이 어플을 사용하는 사람 중 나와 같은 별자리를 가진 사람을 정확히는 몰라도 꽤나 많을 것이다. 아무런 동요가 없을 때 누구나 할 수 있는 두리뭉실한 말은 수수께끼다. 하지만 마음이 흔들리는 날이라면 이런 추상적인 말에서 내게 유리하거나 불리한 단서를 찾아낸다. 주술 혹은 마법이란 결국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자기 방어기제일 뿐이다.  

이 영화 속 주인공들은 현실 속 인물들처럼 각기 나름의 문제를 지녔다. 현실처럼 운도 따라주질 않는다. 안 좋은 일이 한꺼번에 오기도 한다. 사람은 솟아날 구멍을 찾는다. 늙어가는 걸 두려워하는 한 노부부가 이혼 한 후 딸보다도 어린 여자와 결혼하고, 남편을 잃은 충격을 엉터리 점쟁이를 찾아가 미래를 의지하고, 중년의 부부는 사랑은 희미해지고 증오만이 남아 서로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또 결혼을 앞둔 예비 신부는 자신이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지 불안해하다 결국 운명적 사랑을 최선의 선택이라고 확신한다. 각자 처한 혹은 선택한 상황에 대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때, 사람은 비난할 대상이나 불길한 현 상황을 꺼내 줄 것 같은 대상이 있어야한다. 우디 앨런은 그 대상이 한마디로 '환상'이라고 말한다. 행복 레시피에 환상이란 참기름처럼 어디에나 조금씩 들어가야할 양념이란 말씀이시다. 즐겁게 끄덕일 수 있는 영화다. 환상이란 자기 방어기제가 각기 형태만 조금씩 다를 뿐. 내 참기름은 오늘의 별점이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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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입술 위에 - Read My Lip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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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자끄 오디아르 영화다. 사건이 일어날듯..하면서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 연출법에 매번 매혹당한다. 형식적으로는 세 편 모두 범죄 스릴러지만 실은 심리 묘사가 탁월하다.  

1. 이 영화 역시 형식적으로는 범죄 스릴러다. 감옥에서 갓 나온 폴은 전에 진 빚 때문에 다시 한탕할 거 같은 분위기가 조성된다. 사무직 알바생으로 취직했지만 곧 밤에는 나이트 클럽 바텐더로 일한다. 한탕을 언제할지는 이 영화의 관전 포인트가 아니다. 그가 한탕하기 위해 거치는 과정들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잡아끈다. 바에서 칵테일을 만들려고 뒤 돌면 카메라는 폴의 등을 흔들리게 잡는다. 그냥 비추는 게 아니라 카메라 밖에서 매복 중인 암살자의 시선이 그가 뒤돌기만 기다리는 느낌을 전달한다. 매복 중인 암살자 따위는 없는데도 매번 폴이 등을 돌릴 때마다 긴장감이 돈다. 폴이 다시 정면으로 돌아 어지러운 클럽 안을 바라볼 때, 신체 비례와 전혀 맞지 않게 큰 눈동자가 흔들리며 클럽 안을 쭉 훓는다. 그러면 클럽 안에 누군가 있는 게 아닌가,하고 나도 같이 폴의 시선을 쫓아가는 식이다.  

2. 청각장애인인 칼라는, 말하자면 폴의 직속 상사쯤 된다. 칼라는 사람이 말하는 입술을 보고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는 독순술을 익혔다. 칼라한테는 생존과 소통을 위한 언어 수단이지만  폴한테는 범죄에 유용한 기술이 될 수도 있다. 독순술은 성격도 다르고 목표도 다른 두 사람을 한 곳으로 모아주는 소실점이다. 칼라는 순응적 성격으로 자신만의 규율과 틀에 고착된 삶을 살아가는데 익숙하지만 이면에는 억압된 심리를 들여다 볼 줄 안다. (변태성욕자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사무실에 나갈 때 입는 옷과는 전혀 다른, 어쩌면 한 번도 입어보지 않았고 입지 않을 드레스나 분홍 샌들을 신고 거울을 본다. 이따금씩 자신의 나체를 보기도하며 폴의 옷에서 나는 체취를 은밀히 즐기기도 한다. 폴은 모른다.  

3. 막 살아 온 폴과 틀 안에서 살아 온 칼라가 만나서 하는 일은, 추운 밤에 건물 옥상에 올라가 클럽 사장이 돈을 어디다 숨겼나 염탐하는 거다. 집 안을 들여다보면서 칼라는 그녀의 무기, 독순술을 성실히 수행하다가도 짜증이 난다. 어째서 범죄자같은 혹은 범죄자를 돕고 있는지. 이유를 알고 있지만 칼라는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다. 자신과 너무 다른 폴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그녀가 자신의 숨겨진 욕망, 사회적으로 표출하면 안 된다고 교육받은 그런 욕망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둘 사이에 놓여있는  장애가 사랑의 장애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사랑보다는 인간의 이중적 본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관성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영역으로 돌아가려는 자아가 있고 관성을 벗어나 위로 솟구치려는 잠재적 자아가 있다. 두 자아가 충돌할 때 어떤 물리적 현상이 일어나는지 고찰하고 있는데 이런 일이 대체로 답이 없다.  

4. 한 가지 못마땅한 점은, 칼라를 보는 시선이 철저한 남성의 시선이라는 것. 어떤 의문이나 감정 때문이 아니라 그냥 한 여자를 관찰하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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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 - The Beat That My Heart Skipp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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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은 부동산 브로커다. 말이 브로커지 하는 일은 깡패 짓이다. 갖은 수단을 동원해서 입주자를 쫓아내고 수익을 남겨 부동산을 다시 파는 일을 한다. 밤에 출동도 해야하고 필요하면 주먹도 써야한다. 낮에는 사무실에 앉아 회의도 하는 척 해야한다.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거친 바람에 흔들리는 톰의 마음을 담는다.  

거센 바람 속에 톰이 넘어지는 걸 간신히 지탱해주는 두 가지가 있다. 아버지와 피아노다. 나이 든 아버지는 이미 톰의 보호자가 아니라 톰의 자식같다. 늘 돌봐야하고 뭘 해달라고 조른다. 톰은 아버지의 뒤치닥거리가 지겹지만 보호자 역할을 충실히 한다. 성공하지 못한 피아니스트였던어머니는 일찍 죽었다. 톰은 어머니 영향으로 피아노를 쳤었지만 그만둔지 십 년이나 됐다. 갑자기 그는 오디션을 보려고 하고 다시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한다.  

톰은 사회적으로 고상하지 못한 일을 밥벌이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과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피아노는 밥벌이와 양립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동료들은 일하는데 타이밍을 놓치는 톰에게, 그 예술 때문에 그러면 그만두라,고 충고한다. 심지어 피아노 레슨 선생도 불어를 모르는 중국인이다. 바흐의 토카타 E단조를 영화 내내 연습하는데 두 사람은 건반을 통해서만 소통할 수 있다. 두 사람이 같은 곡에 대해 갖는 템포와 감정은 완전히 다르다. 톰의 흔들리는 심리는 빠른 템포로 건반을 두드리면서 드러난다. 외적 환경의 거친 풍랑은 박자를 해석하는 내적 초조함으로 반영된다.  

초조와 긴장을 버리는 순간에 바흐의 곡을 제대로 칠 수 있을 것이고 가능할 것 같은 순간이 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막상 오디션에서는 수도 없이 연습했던 곡을 마치 처음 치는 것처럼 꾸물대다 망치고 만다. 아버지는 살해된다. 톰은 자신을 지탱했던 뿌리 둘 다 잃어버린다. 뿌리가 뽑혀도 얼마간은 버틸 수 있다. 아무리 극한 일을 겪어도 사람은 살 수는 있지만 결국 말라 죽는 일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 시간은 흐르고, 톰은 트라우마는 잊은 것 같아보이지만 운명은 톰의 편이 아니다. 뿌리 뽑힌 나무는 살아있던 가지마저 잃는다.  

<예언자>로 자끄 오디아르 감독을 처음 알았는데 <예언자>보다도 훨씬 더 섬세하다. 화려한 장치나 스페터클 없이 닫힌 공간을 사용할 때 인물의 표정이나 몸짓은 긴장감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전적으로 톰이란 인물을 재현하는 배우에게 의존하는데 배우 혹은 사람은 감정을 전달하는 최고의 수단이다. 톰이 느꼈을 서늘함이나 좌절을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연출법과 연기는 이 영화의 백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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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느와르 - Café N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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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3시간 18분이라는 런닝타임을, 극장에 가서야 알았다. 정성일씨의 장황한 글처럼 영화도 장황할 것이며 재미없을 거라고 단정했다. 중간에 두 번쯤 졸고 화장실도 갔다오고...그래서 그런지 영화는 기대했던 것보다도 지루하지 않았으며 재미있기까지 했다. 

프랑스 영화사에 누벨 바그 시절이 있다. 1960년대 평론을 하던 감독들이 영화에 대한 잡담이나 한다는 말에 발끈해서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영화는 카메라로 쓴 문학작품을 직접 보여주겠다는 참 고마운 발상이었다. 이들의 영화는 당연히 문학 작품에 많이 빚지고 있으며 소설 속 대사를 카메라로 비추거나 등장 인물들이 대사를 그대로 말한다. 당시 감독들은 영화광일 뿐 아니라 하드보일드 장르의 미국문학이나 프랑스 고전 문학을 탐독했다.  

1.  

정성일 씨가 각본을 쓰고 연출한 이 영화는 프랑스 누벨 바그 시절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학작품에서 그대로 가져온 대사들, 서울 한복판 거리를 배회하는 카메라. 카메라를 통해 본 익숙한 서울 풍경은 이 영화에서 단연 돋보인다. 청계천부터 종로 거리를 쭉 트래킹하면서 광장시장, 평화시장의 겉을 훑는다. 그림자가 늘어지는 시간, 일몰 직전의 노르스름한 빛 속에 앉아 있는 익숙한 서울은 아주 아름다웠다. 뉴욕이나 파리가 아름다운 도시로 자리잡은 이유는 영화가 단단히 한 몫 한 게 아닐까. 네러티브보다 뉴욕이나 파리의 골목 자체가 빛나는 영화가 많다. 센트럴 파크의 아찔한 단풍이나 거리, 파리의 이름 모를 골목 때문에 영화를 보기도 했다. 돌이켜보건대, 서울이라는 풍광 때문에 영화를 기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홍상수 감독 속에 나온 서울은 서구인의 시선을 끌기 위한 스펙터클이었으며 <괴물>이나 <추격자>에 나온 서울은, 서울의 정체성이 필요없는 공간이었다.  <카페 느와르>에서 서울은 인물보다도 더 주인공같다. 인적 드문 청계천 한쪽 면은, 세느 강변 같고 카메라가 쭉 트랙킹하는 종로 길가는 마치 뉴욕 같다.  

2.  

영화광이며 독서광이 만든 영화답게 영화는 "인용구"로 가득 찬 영화이다. 키에슬로브스키의 <블루>의 한 장면도 보이고 레오 까락스의 영화에서 보는 공간을 압축한 이미지도 엿보인다. 물론 <극장전>, <괴물>, <올드 보이> 등 한국영화를 영화 속에서 이야기 하기도 한다. 영화를 본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나는 인용구에 상당한 신뢰와 애정을 보내는 편이다. 어떤 글이나 영화를 보고 무언가를 인용한다는 행위 속에는 인용한 사람의 주관과 시선이 들어가 있다고 여긴다. 같은 글을 읽고도 다른 인용구를 기억하는 일이 그 증거다. 게다가 인용구들로만 자신의 주장을 하는 이도 있는데(강준만 씨의 글이 대체로 그렇다) 머리 나쁘면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주장하는 것보다도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일 수도 있다고 본다.  

아무튼, 영화 속 영화를 보는 잔재미도 쏠쏠하다. 

3.  

정성일 씨 인터뷰를 보니 문학작품 속 글을 살아있는 인물들이 발화했을 때 느낌을 알고 싶었다고, 한다. 결과는 썩 좋지 않다. 이 영화가 형편없지는 않지만 좋은 영화라고 분류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인물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영화와 문학의 가장 큰 차이는 방향성에 있는지도 모른다. 문학이나 영화에서나, 작가나 감독의 목소리를 해석하는 건 전적으로 독자나 관객의 몫이다. 문학 속 인물은 적극적이기 보다는 작가의 필요에 따라서만 움직일 때가 많다. 반면 영화는 감독의 관점이 들어가기는 하지만 두 시간 동안 대체로 살아있다. 인물만 떼어놔도 할 이야기가 있는 게 영화다. 그런데 <카페 느와르>에서 인물들은 서로 소통하지 못한다. 서로 주고 받는 대사가 아니라 이미 쓰여진 글 중에서 읽고 싶은 부분만 읽기 때문에 서로 주고 받지 못한다. 인물들이 하는 유의미한 말을, 관객은 당연히 무의미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인물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뭐, 현대 사회에서 익숙한 일이긴 하지만 소통을 원해 영화를 보는 관객한테는 일종의 좌절감마저도 줄 수 있다.  

인물들은 각자 진지한 사연을 지니고 있지만 듣는 이들은 귀담아 듣질 않는 것처럼 보인다. 실연에 관한 이야기의 속성이 자신한테는 심각하지만 제 삼자한테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수 있는 대동소이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인간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관심과 애정의 문제처럼 보인다. 자신의 얘기만 하는 사람은 주변에 널렸으니 남의 얘기에도 귀 기울여주는 배려심 있는 인물을 영화에서는 기대하게 된다. 영화를 보는 심리기도 하고.  

4.  

이렇게 할 말이 많은 거 보면, 이 영화는 내가 생각하는 것 보다 더 괜찮은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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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 The Ameri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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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도 조지 클루니가 연기를 잘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이기적 유전자를 가진 이들은, 그들의 진정한 재능을 외모 때문에 무시당하는 비운을 겪어내야하지 않나, 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그동안 봐왔던 조지 클루니가 아니다. <인 디 에어>에서도 조차도 조지 클루니는 할리우드 배우같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이탈이아의 아름다운 시골 마을에 떨어진 의지할 곳 없고 믿는 건 자신의 본능 밖에 없는 외로운 미국인일 뿐이었다. 시종일관 건조하고 초조한 표정, 공허하면서도 지친 표정이 주름의 깊이를 아름답게 만든다. 특히 마지막 장면서 피 흘리면서 운전할 때 얼굴에 확장된 혈관이 보여주는 고통의 깊이는, 조지 클루니는 명배우라고 외치고 싶을 정도다.  

조이 디비전의 이안 커티의 짧은 삶을 다룬 <컨트롤>을 만든 감독인데 이 영화 역시 우울하면서도 존재의 근원적 고민에 초점을 맞춘다. 잭이면서 에드워드인 조지 클루니는 왜 킬러로 살고 있는지 모두 생략해 버린다. 잭이면서 에드워드는 킬러로 사는 데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 다닌다. 누군가를 죽이는 일을 하면서 결코 행복하지 않다. 은퇴마저도 쉽지않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줄 수 없는데서 오는 심리적 갈등인데 이야기를 풀어가는 법은 새롭지 않지만 우울한 심리를 영상과 음악을 이용해 표현하는데 능하다. 게다가 아름다운 마을, 델 몬테의 풍경도 서정성을 부추긴다. 새해 첫날 <고독의 편린>을 봤는데 연속 우울한 영화로 새해를 열었다.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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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01-05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 클루니는 제게도 잘생긴 얼굴 이상도 이하도 아닌데요. 저도 이 영화보고 넙치님처럼 좀 바뀌면 좋겠네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넙치 2011-01-06 01:18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도 웃음 가득한 새해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 영화는 썩 훌륭하진 않지만 조지 클루니는 명품연기자로 돋보이는데 반딧불이님이 좋아하실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