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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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스토리라인이 예측되는 영화다. 적절한 액션을 표피로 한국사회의 소수 이주민의 단면을 섞고 '의형제'라는 한국식 의리를 소스로 뿌린다. 그럭저럭 런닝타임은 잘 간다. 시계를 한 번 밖에 안 봤으니. 송강호는 여전히 산만하면서도 코믹한 캐릭터다. 강동원이 눈에 힘 한 번 줄 때마다 자세를 바로 잡고 설렘을 즐긴다. (강동원은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외모다. 사막에소 홀로 핀 꽃처럼 가녈프고 곧 쓰러질 거 같은 게 뭘 해도 가슴이 아프다..+_+)  캐릭터도 낯익고, 재현 배우가 송강호와 강동원이라는 차이점만이 있다. 액션도 골목신 아슬아슬하고 평균은 했다. 마초세계의 의리도 고만고만하다. 전체적으로 평범한 영화되시겠고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가족 영화되시겠다.

이에 비하면 장훈 감독의 전작 <영화는 영화다>는 좀 더 색깔 있는 영화다. 이번 연휴 때, 케이블에서 봤다. 소지섭의 간지는 죽음이었다.ㅋ 일반적으로 대사가 있을 거 같은 자리에 인물의 클로즈업이 인상적이었다. 각본을 김기덕 감독이 썼다는 말을 떠올리면 김기덕 감독 스타일인 거 같기도 하지만 침묵이 연출하는 분위기라는 게 또 한 간지하는 영화였다.  

그에 비하면 이 영화는 아주 수다스럽고 산만하다. 송강호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수다스러웠을 영화다. 특이할 만한 점은 총의 등장과 사용이다. 한국영화에서 총이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칼 아니면 칼에 준하는 다른 무기들, 쇠방망이(조폭영화에서 종종 등장한다)같은 게 등장한다. 이 영화에서는 홍콩영화처럼 총이 등장해 사람을 죽이고 피를 보여주는 데 굉장히 낯설었다. 내가 총에 대한 거부감이 있기도 하지만 한국 영화에서 총기 사용이 현실성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 거 같다.

메세지는, '그림자' 말대로 "쓸데없이 감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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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리그 - Zelig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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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름은 레너드 젤리그, 별명은 카멜레온, 특기 변신인 남자 이야기를 다큐 형식을 차용한 페이크다큐다. 의사와 있으면 의사, 흑인과 있으면 흑인, 비만인 사람과 있으면 비만인이 되는 인간 카멜레온이다. 젤리그는 사람들 속에서 눈에 안 띄는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은 갈망이 컸다. 갈망이 크면 기적을 이뤄낸다. 상황에 맞춰 외모 뿐 아니라 화법도 바꿀 수 있게 되었고 그의 이상한 재주는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 젤리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신문에 매일 실리고 젤리그를 하늘 높이 올려놓았고 또 언론은 일련의 스캔들로 그를 추락시킨다. 사람들은 젤리그를 잊어가고 플레쳐 박사만이 그에 대한 관심을 불태운다. 플레쳐 박사는 그의 이상 행동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고 이상행동을 치료해 명성을 얻으려는 개인적 야심을 갖고 있다.  야심은 사랑으로 바뀌고 그 후에는 눈물어린 노력이 펼쳐진다.

2.  

젤리그가 살았던 시기는 1930년대. 대공황 직후로 멜팅팟을 강요하던 시기였고 대중문화가 막 꽃 피울 준비를 했던 때다. 젤리그의 이상행동은 개인이 인격을 가진 고유한 개체라는 정체성을 갖는 게 악덕인 시기를 살아야했기 때문이다. 젤리그는 마음의 평정은 주변환경과 동화될 때만 생겼다. 20세기 중반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지만 한 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 21세기 초에도 젤리그의 복제 인간은 여전히 존재한다.  

미디어는 더 발달했고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한다. 미디어는 사람을 상품화하는 데 앞장선다. 골드미스, 품절남, 품절녀..등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용어는 물건을 사고 파는데 사용하는 용어와 동일하다. 우리는 '재고', '불량'이 안 되려고 미디어가 이끄는대로 끌려가 발버둥친다. 최강 동안, 몸짱...이라는 말과의 거리감을 불안해하고 불안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는 현대기술을 위해 지출을 한다. 엣지있으려면 상품 용어들과 익숙해져야하고 다 같이 엣지있으려다 보니 다 똑같아진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아마 젤리그의 신비한 재주를 기꺼이 훔쳐오려고 할 것이다. 20세기에는 젤리그가 소수였다면 21세기에는 다수가 돼버렸다. 집단 행동은 더 이상 이상 행동으로 간주되지 않는데 비극이 있다.

3.  

우디 앨런은 로맨티시트시다. 격변하는 사회 상황 속에서 적응하려고 몸부림치는 남자를 구원하는 건 한 여자의 사랑이다. 사랑이 그의 이상행동을 바꿨고 주체성을 찾아 행복하게 오래 살았다. 우디, 정말 사랑이 그렇게 사람을 바꿀 수다고 아직도 믿나요?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부족한 게 사랑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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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짱 도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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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시작 될 때 호되게 추위를 겪은지라 이제 추위에 대충 적응했다. 영하2-3도만돼도 내복 안 입고 돌아다닐 만하다. 얼마나 놀라운 적응력인가! 그동안 발길을 뚝 끊었던 중앙극장에 오랫만에 갔더니 일본인디영화제를 하고 있는데 시간 맞는 걸로 본 영화. 

같은 동양문화권이어서 그런지 사회적 고민이 비슷한가보다. 흔한 소재로 흔하디 흔하게 풀어간다. 서른 한 살 되도록 자신이 뭘 하고 싶은지 모른 채 살다 자칭 소설가, 타칭 백수인 남편에게 질려 딸 아이를 데리고 독립하는 이야기다. 도시락 가게를 열면서 여자의 진정한 독립을 암시하고 영화는 끝난다. 뭘 하려는 의욕 없는 젊은이들에 대한 개탄도 담겨있는데 결국 근면을 강조한다. 근면이란 시장경제의 일원이 되기 위한 미덕이고 시장경제의 구성원이 성공적 어른이 되는 것처럼 묘사했다. 이렇게까지 느끼게 만는데는 감독의 책임이다. 감독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할리우드영화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일본영화를 많이 보진 않았지만) 디테일에서 참 서양스럽다. 이렇게 말하면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지만 같은 에피소드를 다루는 관점이, 당연하지만 한국과 엄청 다르다.  

참 재미없고 특징없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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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일의 썸머 - (500) Days of 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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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코미디를 그닥 즐기는 편이 아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옥신각신하다 결국 사랑한다는 꿈을 주는 영화가 극장 밖을 나서는 순간 현실은 더 가혹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평이 좋길래 기대를 너무해서 그런지 별점이 네 개까지는 줄 수 없는 영화다. 영화가 아주 나쁜 건 아니지만 기대치, 이런 걸 갖는 건 조심해야겠다. 실망은 기대의 부산물이다. 기대가 없다면 실망은 없다. 부작용은 건조함이지만.  

사랑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상대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알 수도 없고 조절할 수는 더욱 없기 때문이다. 사랑을 안 믿는 여친의 기대에 부응하느라 쿨한척 하지만 사실은 여친, 썸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어 괴로워하는 한 남자 이야기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의 환희에 찬 삶의 상승 곡선에서 차였을 때의 괴로움으로 이르는 하향 곡선을 경험한 후, 500일이 지나 새로운 사랑으로 상승 곡선의 새로운 출발점에 서는 이야기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가 저절로 연상되는 대사들이 종종 등장한다. 

이 영화는 사랑에 빠졌을 때부터 시작하는 게 아니라 헤어진 후부터 시작한다. 사랑을 곱씹어보는 시간은 바르트가 말했듯이, 이별 후다. 곱씹는 기억들이 배열되는 방법은 시간 순이 아니라 감정의 농도순이다. 기억이란 불완전하고 파편적이란 사실을 상기시켜주듯이, 썸머를 만난 첫날이 시작이 아니라 300일 째, 한 달 째, 이틀 째, 이런 식이다. 7시간을 함께 있었다면 썸머가 했던 인상적인 말, 웃음 등을 배치한다. 머릿속에서 뒤죽박죽된 생각의 꼬리를 재치있게 재현해서 배열했고 공감지수는 급상승한다. 남자는 여자를 300일쯤 만나고 차이고 200일쯤 운명은 없으며 세상에 널리 퍼진 가식을 저주하며 보낸다. 사이사이에 썸머를 잊으려고 하면서 썸머를 떠올리기도 하고 실제로 만나기도 하고 썸머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는 헛꿈을 꾸기도 한다. 결국 남자가 새로운 사랑일, '가을'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여름이 다음에 가을이를 만나는 반전이 있는 특별한 해피엔딩이다. 생각지 못한 엔딩에 크레딧이 올라가도 히죽거리고 있게 된다. 가을이와 남자 생각을 하면서 극장 밖으로  나왔더니 어둠까지 짙어져 바람은 여전히 차고 겨울은, 그 끝이 멀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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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조각들 - Summer Hou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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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으로 우거진 고풍스러운 집 안뜰에서 식사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어머니의 75세 생일을 맞이해 뉴욕에 사는 딸, 중국에 사는 아들 가족, 프랑스에 살고 있는 아들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죽은 후 삼남매는 다시 모인다. 장례식 풍경으로 어머니를 회상하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남긴 문화재급 유품들을 처리하면서 어머니를 들여다본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란 감정은 배제하고 남매는 유품처리를 의논한다. 우리 문화권에서 호로자식이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껄끄러운 문제들일 수 있다. 삼남매 역시 잠깐 언성을 높였지만 유품처리에 대체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독립을 하는 게 일반적인 문화권에서 가족은 애틋함보다는 과거의 흔적들이다. 자식들의 미래에 대해 부모가 갖는 권리는 결정을 청취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한때는 품안에 있었던 자식들이 각자 자기 길로 가면서 어머니 폴은 19세기 그림들, 가구들, 인테리어 소품들을 집안에 품고 숨결을 불어넣었다. 물건이란 게 사용하는 사람의 온기가 있어서 유의미한 대상이 되지만 사용자가 없는 물건은 냉기가 감돈다. 꽤 이름있는 화가인 어머니가 쓰던 역시 유명한 디자이너의 책상이 오르세 미술관 유리벽에 덩그러니 갇힌다. 단체관람객들이 우르르 몰려 가이드의 설명에 따라 잠시 눈길을 던지지만 곧 다시 혼자 유리벽 안에 남아있는 신세다. 작업실에서 봤던 어머니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가구와 짐들이 처리되고 빈 집은 스산하다. 미처 못 치운 쓰레기 잔해만이 뒹군다. 새로운 주인을 만나 다시 온기를 찾기 전 집은 십대 손녀와 친구들이 파티를 열면서 영화는 끝난다. 손녀가 남친과 유년기를 떠올리며 들판 속으로 사라진다. 소녀는 나중에 자식에게 할머니에 대한 작은 기억만을 이야기해 줄 것이고 소녀의 자식들도 소녀처럼 할머니의 추억을 처분하느라 의논하는 시간이 반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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