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oetry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은 묵직하고 정직하다. 영화 혹은 영화 감독이 어떤 힘을 갖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영화라는 제한된 매체를 통해 알지만 선뜻 할 수 없는 말을 할 때다.  얼마 전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감독이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런 말을 했다.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이야기하는 건 영화라는 매체를 다룰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보다 좀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으니까 계속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겠다"고.  영화라는 매체가 단지 화면을 때깔 좋게 이어붙이고 오감을 유혹하는 매체라면 그 영화는 안 봐도 되는 영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화란 매체가 어떤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인위적 감동이나 빛깔 좋은 촬영술이나 편집술이 전부가 아니라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를 보일 때가 그렇다. 물론 이런 종류의 영화를 보는 건 썩 유쾌하지는 않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은 편하게만 즐길 수는 없는 영화다. 도덕이나 윤리라는 대사 한 줄 없지만 도덕적이고 성찰적이다. 등장인물들 모두, 우리처럼 도덕이나 윤리란 어떠해야하는지, 그 당위성에 대해 알고 있다. 사람이 생각대로 수 있을 거 같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아는 건 아는 거고 상황은 상황이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은 어떻게 반응할까?  

올해 나이 66세. 이름 박미자. 취미 혹은 특기 시 쓰기. 직업은 가사 도우미. 이런 스펙을 가지고 있는 미자 할머니는 세상살이에서 두 발을 떼고 날리는 꽃잎에 영혼을 맡긴 거처럼 보인다. 시골길과 안 어울리는 화사한 옷, 길을 걷다 멈춰 시상을 메모하는 행동. 확실히 도시에서의 삶과는 다르다. 미자 할머니가 저 멀리 어린 시절 시인이 될 수도 있겠다는 말 한 마디에 뒤 늦게 시를 쓰려고 한다. 극 중 시는 죽었다는 말이 여러 번 나오는데 시가 죽은 게 아니라 시심이 죽었다.  

시심이란 섭리대로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나 하지만 영화 속에서 전개되는 하나의 사건을 둘러싼 사람들의 시선은 섭리에 기초한 게 아니라 편의에기댄다. 신속하고 좋은 게 좋다는 논리는, 결국 가해자 입장의 시선이지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염려는 부재한다. 알츠하이머 초기 증상을 보이는 초로의 노인만이 인간적 도리에 대해 고민한다. 시 수업을 들으면서도 정작 아무도 시를 안 쓰는 분위기. 시, 즉 인간이 인간에 대한 도리와 예의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인 시를 쓸 수 없는 혹은 쓰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미자 할머니는 시를 쓰려고 발버둥친다. 미안함에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태도는 전반적 사회적 분위기를 알고 있지만 선뜻 나서서 행동하지 못하는 데서 내적 갈등 내지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이 영화가 참 불편한데는 어떤 모범답안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경계를 나누는 데 길들여진 제도 속에서 바라볼 때, 참 현실같으면서도 영화에서만이라도 선이 보상받았으면 좋겠다는 심리가 작용한다. 가해자 VS 피해자란 구도를 주입시킨 분위기, 그리고 시심을 거세하는 분위기 간의 함수관계는 관객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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