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디두르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01
비톨트 곰브로비치 지음, 윤진 옮김 / 민음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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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타임머신이 있었으면 한다.내 의식은 지금 그대로 인 상태에서 과거의 내가 되는거다.

때는 80년대,내 친구들은 어리숙한 중학생.선생님은 그들을 상대로 진실을 가장한 허구를 전달한다.난 그때 손을 들고 말하는거지.

"그건 상황의 한면만을  부각한 지배 이데올로그의 전형적인 왜곡방식인데요." ㅋㅋㅋ

물론 먼지나게 두드려맞겠지.그럼 의식있는 젊은이로서 폭력의 부당성에 대해 끝까지 준법투쟁을 하는거다.ㅋㅋㅋ 상상만해도 통쾌하다.

이런 상상을 해보는 건 시간이 지나 돌아보니, 20대 후반의 어린 선생님들의 개인적 가치관이 마치 진실인양 강요되던 교실이 억울해서이다.그때야 뭐도 잘 모르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그게 억울하다.지금 성인의 의식으로 몸만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내 논리로 선생님들의 논리를 무찌를 수 있을 텐데.^^

소설<페르디두르케>의 주인공 유조,그는 어느 날 뜬금없이 미성숙한 소년으로 둔갑한다.어떻게 그럴수 있냐구.모른다.작가가 그렇게 그냥 만들어버렸다.그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도 아무런 효과가 없다.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르니까.... 소년이 된 유조가 처음 겪게 되는 것은 "순진"과 "타락"의 갈등이다.시폰과 미엔투스로 대변 되는 두 친구가 이 이분법적 갈등의 전사들이다.결국 폭력에 의존한 미엔투스의 승리로 끝나게 되지만 승자 미엔투스 역시 피투성이의 낯짝을 갖기는 마찬가지이다.전과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된 것이다.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원시적 삶에 대한 강박증을 보인다.이름하여 "머슴"에 대한 동경이다.여기까지 읽었을 때 상황이 좀 개연성이 없긴 하지만 두 관념의 갈등과 대결 양상은 흥미진진했다.

그러나...이게 왠 말인가.갑자기 <어른이며 아이인 필리도르의 서문>이라니...이건 정말 당혹 그 자체였다.드라마 보고 있는데 갑자기 M뉴스의 엄기영 앵커가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하는 격이다.4장과 5장에 해당하는 <필리도르>이야기,중간에 끼어든 내용이 왠 서문이람? 어쨋거나 서문에선 갑자기 작가 곰브리치의 비평가들에 대한 불만과 예술에 대한 대중들의 편박함에 대한 공격이 시작된다.그리고 본문에 해당하는 이야기에는 총합과 분해의 대가인 필리도르와 안티 필리도르의 피튀기는 대결이 시작된다.그로테스크한 우화인데 결국 총합과 분해의 갈등은 어처구니 없는 마무리를 빚고 "뭐든 뒤집어 보면 다 어린애랍니다."라는 말로 결론 짓는다.총합은 결국 근대적 가치의 전형 아니던가....그리고 분해와 다양성이란건 탈근대적 가치가 지향하는 바이다.너무 이분법적이라고? 맞다.내가 그런게 아니라 작가 곰브로비치가 그렇게 만들었다.그는 가치를 이분법적으로 제시한다.하지만 그가 과연 이분법의 신봉자였을까? 그의 이분법은 위악적일 뿐이다.

 소설은 유조의 첫번째 변신과 감금을 한 장으로 하고 그 다음 유조가 탈출하여 미엔투스와의 여정이 또 한 부분으로 나뉘는 듯 하다.물론 내 개인적인 구분일 뿐이다.첫장의 마지막은 현대적 여고생으로 대표되는 므워드지아코프 일가의 근엄함,세련됨,현대적 감성에 대한 처절한 조롱과 복수로 일관된다.유조는 관음증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지탱하지만 결국 현대성에 대한 위악적인 보복을 가한다.그 보복의 방법은 삼각관계의 더러운 욕망을 폭로하는 방식이다.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내적 욕망이 타인에게 폭로될 때 이는 붕괴로 이어진다.마치 더운 여름날 땅바닥에 떨어져 녹아드는 아이스크림처럼.....

작가는 이 책에서 수시로 포스트모던 시대에 일상적으로 쓰이는 단어들을 들먹인다.자신의 욕망이나 자아라는 것 역시 타아를 매개로 한 것임을 주장한다.또 우리의 삶이 내적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는것을 부정하고 형식의 승리를 주장한다.또 총합에 대한 부정,완성된 의식에 대한 부정,미성숙에 대한 동경등이 수시로 등장한다.툭하면 등장하는 궁뎅이,낯짝,장딴지등은 관념성 속에서 무지되어 온 에로스와 육체에 대한 새로운 의미부여라고 볼 수 있다.대체 하늘에 궁뎅이가 걸려 있다는 상상을 누가 할 수 있을까?

책의 후반에 해당하는 미엔투스와의 동행은 유조의 이모 집에서 시작된다.미엔투스가 그리도 찾던 머슴이 등장하는 것이다.미엔투스와 머슴의 형...제되기는 결국 기존 체제에 대한 붕괴를 보여준다.하지만 이것을 계급투쟁의 상징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80년대 같으면 이를 계급투쟁의 한 상징적인 모습으로 읽을 수도 있겠으나 이는 좀 더 광범위한 가치의 붕괴와 생성으로 바라봄이 옳을 듯 싶다.미엔투스와 머슴의 관계는 동성애적 성향을 다분히 내포하고 있다.정상과 비정상의 구분,동성애와 이성애의 구분,성숙과 미성숙의 구분....작가는 이 모든 이분법적 구분에 위악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독설을 퍼붓는다. 소설은 주인공 유조의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사랑의 도피로 미성숙에서 발을 빼고자한다.하지만 독자들은 작가가 결코 미성숙과 불완전성의 미덕을 포기했다고 절대 생각하지 않는다.작가는 늘 "인간을 이루는 모든 요소는 미성숙"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성숙된 문화,성숙된 인간,성숙된....무었을 존재의 끝으로 짐작해왔다.가벼운 예로 책을 보는 행위에도 성숙한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라는 답을 들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다분히 완성이란 덕목을 위한목적론적이다. 곰브로비치는 미성숙과 불완전함이 성숙과 완성의 폐쇄와 답답함을 뛰어넘을 수 있는 미덕으로 본다.우리가 살고 있는 이 꼬인 세상 역시 지나치게 많은 성숙한 무었때문에 이렇게 막혀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본다.

추신) 그나저나....이 책을 보다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다음 보는 책은 좀 쉽게 읽을 수 있는 녀석으로 골라야지....휘휘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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