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권창은 외 지음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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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지될 수도 있는 법이라는 표현으로 가리키는 법은, 선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나 시행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거나 혹은 제정 당시에는 순기능이 컸으나 달라진 상황 속에서 문제가 생겨나 대체입법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는 불완전한 법이지 악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 -44쪽

철학하는 일을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내려진 신의 명령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국가 공권력을 행사하는 자들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만약 철학 금지 명령이라면, 자신은 신의 명령을 따르기 위하여 죽음을 무릎쓰고 공권력의 명령이라도 이에 복종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경건을 대체로 신의 뜻에 따른 것 혹은 옳은 것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불경건을 피하려 했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57쪽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정의롭다고 합의한 것들"을 우리는 행해야 하며, 반대로 국가를 설득시키지 못하고서 떠나는 식으로 탈출함으로써 이를 짓밟는 것은 위약이다.(위약설). 또한 이러한 탈출은 상대방들을 나쁘게 해 놓는것, 달리 말해서 상대방들에 해를 가하는 행위이며(파괴설), 그것도 가장 그렇게 해서는 안될 "그런 상대방들(국법 내지 국가, 조국)에게 행하는 종류의 행악이라는 것이다(불경설). -84쪽

고대희랍에서 성문법이 생기기 이전의 초기 단계에서 분쟁 해결의 평화적인 방법은 분쟁 쌍방이 동의하는 제삼의 인물에게 그 해결을 함께 호소하여 쌍방이 받아들일 만한 판결을 얻는 것이었다. 이 경우 판결 내용은 강제적 구속력을 갖기보다는 분쟁 해결의 중재안으로서 쌍방에게 제안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의 판결에 분쟁 당사자들 중 어느 한쪽이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 이러한 판결은 강한 구속력이 없기 때문에 무시되어질 수 있다. -86쪽

왜냐하면 불의를 행할 것을 적법하게 명령받을 경우, 이 명령이 옳지 않다는 것을 설득하려는 노력이 실패했을 때 소크라테스는 명령받은 자의 입장에서는 이에 복종하는 것이 정의롭게 행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64쪽

소크라테스의 정의의 원칙은 불의를 행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지 불의를 당해서는 안된다는 원칙이 아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불복종사상 역시 불의를 행하라는 명령에 대한 불복종사상이지 불의를 당하라는 명령에 대한 불복종 사상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118쪽

"나는 말과 행동으로 그리고 투표로써 또한 가능하다면 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아테네에서 민주정을 전복시키는 자나, 민주정이 전복된 이후에도 관직을 차지하고서 통치에 참여한 자나, 스스로 폭군 노릇을 하려고 쿠데타를 한 자나, 혹은 폭군이 되는 데 협력한 자 등을 죽이겠다." (BC410년 아테네 법률)-146쪽

"통상적으로 심지어 나쁜 법의 불복종조차도 그러한 행위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좋은 법을 포함하여 모든 법에 대한 일반적인 경멸을 초래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어린이들이 모든 과일을 팽개쳐 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좋은 과일은 물론 썩은 과일도 먹어야 한다는 주장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썩은 과일을 먹도록 강요당한 사람은 그로 인해 모든 과일을 싫어하게 되지 않을까?"(하워드 진)-154쪽

"명령을 내리는 자와 복종하는 자 간의 '권위적' 관계는 공통된 이성에 근거하고 있지도 않으며 명령을 내리는 자의 권력에 기초하고 있지도 않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양자가 그 올바름을 정당성을 인정하고 양자가 그 안에서 미리 결정된 안정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위계 구조 그 자체이다."(한나 아렌트)-164쪽

가장 정의로운 사람인 철학자가 이상국가에서 통치자로 군림하지만, 현세의 타락과 불의로 가득 찬 세상에서는 공적인 영역을 피해 사적인 영역에 은신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는 '소크라테스적 아이러니'라 아니할 수 없다. -1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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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6-03-24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말인데도 이렇게 어려울 수가,,, ^^;;
올려주신 모든 문장들이 인상적이네요.

마늘빵 2006-03-24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이거 한번 더 읽어야할 거 같아요. 대강의 틀만 잡혔고 아직 머리 속에서 정리가 안돼요.

코마개 2006-03-24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강정인 교수도 필자로 들어가 있나요?
'소크라테스 악법도 법이다'이 책이 좀더 좋은듯 한데요.

마늘빵 2006-03-24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두 사람 모두 기재되어있던거 같은데요. 흠. 이상하게 검색하면 권창은 교수만 나오네요.
 



  영화를 보기전까지는 그냥 멜로영화인줄 알았다. 영화를 다 보고 난 지금 멜로보단 컨츄리 음악계 가수의 실화로서 더 다가와있다. 영화보는 내내 이거 실화야, 라는 의문을 가지긴 했지만 정말 실화일 줄이야. 실화인줄 모른채 영화를 보러갔다가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뜨며 실화임을 알렸을 때의 그 감동은 두 배가 된다. 엘비스 프레슬리와 더불어 미국 음악계를 강타한, 소녀들의 우상으로 순식간에 떠올랐다는 쟈니 캐쉬, 난 처음 듣소.

  <앙코르>는 쟈니 캐쉬의 일대기를 담아낸 영화이다. 한편의 로맨스이기도 하고, 또 한편의 음악영화이기도 한 이 영화는 얼마전(?) 봤던 <레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재즈계의 거목, 레이 찰스를 다룬 영화 <레이>. 영화에 너무나 감동 받아버린 나머지 이 영화의 디비디를 구입하고, 또 봤다. 음악 영화하면 또 하나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흑인들이 주름잡고 있는 랩의 세계에 과감히 도전장을 던지고 래퍼의 최정상으로 발돋움한 에미넴을 빼놓을 수 없지. 영화 <8 mlie> 또한 나로 하여금 굉장한 감동과 흥분을 전달해준 영화이다. 이 역시 디비디로 소장중.

  음악과 영화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음악과 영화가 한데 묶인 뮤지션의 삶을 줄거리로 삼고 있는 영화들을 좋아할 수 밖에 없다. 잘 모르는 뮤지션이라도 좋다. 잘 알려지지 않은 뮤지션이라도 좋다. 영화를 통해서 음악을 찾아가는 것도 즐겁다. 평소에 듣던 음악이 아닌, 랩, 컨츄리, 정통재즈 등등 영화에서 다루는 음악들은 나로하여금 새로운 장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고, 새로운 뮤지션과 음악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든다.

  영화 <앙코르>의 주인공 쟈니 캐쉬의 음악은, 정말이지 너무 컨츄리하다. 옛날 티가 팍팍, 시골 티가 팍팍.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겨운 리듬과 멜로디, 그리고 삶이 묻어나는 가사들. 아 좋다. 중간에 딴지 하나. 근데 왜 리듬과 멜로디는 계속 똑같고, 가사만 바뀌는 거지. 그리고 대중은 매번 똑같은 멜로디와 리듬에 지겨워하지 않는다. 음 신기한 일이야. 러닝 타임 135분. 두 시간 훌쩍 넘겨버린 이 영화는 90%가 노래하는 장면이다. 아 같은 리듬과 멜로디에 정말이지 노래만큼은 지겨웠다. 영화 <8mile> 덕분에 에미넴을 접했고, 그의 음반을 모두 구입했다. 또 영화 <레이>를 통해 레이 찰스를 알았고, 그의 음반을 구입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통해 쿠바의 음악을 접했고 음반을 구입했다. 하지만. 하지만. 영화 <앙코르>를 통해 내가 쟈니 캐쉬의 음반을 구입할 것 같진 않다. 너무 똑같애. 너무 똑같애. 



* 준과 쟈니. 쟈니는 그동안 준에게 수없이 많이 고백했고, 준은 쟈니의 청혼을 수없이 거절했다. 하지만 쟈니의 재기 이후 함께 한 공연에서, 쟈니의 청혼을 결국 받아들인다. 짝짝짝.

   결혼하고 아이까지 있으나 전업음악가로 나선 뒤의 성공, 그리고 같은 레코드사 소속의 아리따운(?) 여가수 준 카터와의 만남, 그리고 사랑, 약물중독, 폐인 또 재기, 새로운 삶. 그의 인생은 어린시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했다. 아버지는 어린시절부터 쟈니를 인정하지 않았다. 음악으로 대성공을 거둔 뒤에도 아버지 눈에는 그저 쓸모없는 놈 쯤으로 비춰졌다. 인정받고 싶다고.

  쟈니는 결국 준의 도움으로 약물중독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고, 다시 투어를 시작한다. 준과 함께. 그동안 수없이 많은 편지가 도착을 했지만, 읽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눈에 들어온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의 편지. 그는 첫번째 투어로 교도소를 택했다. 또 사랑에도 성공했다. 수없이 많이 40여 차례나 청혼을 밥먹듯 했으면서도 준으로부터 거절당한 쟈니. 하지만 결국 준의 승락을 받아내고 두 사람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았다는 이야기. 2005년 준이 죽고, 몇달 뒤 쟈니도 세상을 하직했다 한다. 평생을 투어를 함께 하며 노래를 부르고,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고, 결국 죽음까지 함께 한 쟈니와 준. 애초 영화를 보기전 기대했던 한편의 아름다운 로맨스 일 뿐 아니라 한 뮤지션의 삶에 대한 아름다운 고백이다. 이 영화 또 디비디로 지를까봐 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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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6-03-21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 ^^; 33으로 들어가면서 괜찮은 숫자들이 꽤 많이 만들어지고 있어요.

히피드림~ 2006-03-21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어즈'의 자서전을 보면 재기한 자니 캐쉬를 자신들 공연의 오프닝가수로 초청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자니캐쉬가 몸만 와서는 도어즈 멤버들에게 악기를 빌려달라고 하죠.^^ 그러자 멤버들이 뭐든 맘껏 쓰라고 선배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멋진 오프닝공연을 보여준 자니에게 큰 감사를 표시하죠. 혹시 영화에 그런 부분은 없던가요?^^;;;

마늘빵 2006-03-21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펑크님 도어즈 얘기는 전혀 안나오던데요? 음. 자서전을 한번 봐야겠네요. 관심이 가요.

Kitty 2006-03-23 0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앙코르가 뭔가 했더니 walk the line이로구만요..
앙코르로 아카데미상 여우주연상 받았다길래 영화를 두 개나 찍었나 했더니만..;;;;
이 영화 재밌다고 하데요~ ^^

마늘빵 2006-03-21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키티님 제목을 바꿔걸었더라구요. ^^ 재밌어요.
 
사랑을 생각하다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강명순 옮김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품절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을 때는
나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그것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하면
나는 더 이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9쪽

시인이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 쓰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비록 잘 알지는 못하지만 아주 정확하게 알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정확하게-알지-못함>, 즉 <도대체-나는-그것이-무엇인지-모르겠다>는 사실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붓이나 펜, 혹은 악기를 집어 들도록 만드는 가장 원초적인 동력이 된다. -11-12쪽

플라톤에 의하면 바보들은 그들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 아름다움이나 선함, 혹은 성스러운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현명한 사람들 역시 이미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단지 중간에 있는 사람들, 바보와 현자의 중간에 있는 사람들만 그것을 추구한다. -22쪽

사랑에 빠지게 되면 누구나 어느 정도 멍청해진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을 확인하려면 자신이 쓴 연애편지를 한 20-30년쯤 지난 후에 다시 읽어보라. 기록으로 남아있는 그 멍청함, 치기, 우월감, 그리고 맹목적인 사랑을 보고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또한 내용은 얼마나 유치하고, 문체는 또 얼마나 격정적인가. 평균 이상의 지적인 사람조차 그런 상태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어리석은 짓을 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어리석은 내용을 써내려 간다는 사실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좀더 너그러운 시각에서 말한다면, 순진무구해서 그런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또한 그것에서 오히려 공감과 감동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행동은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멍청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입증해 줄 뿐이다. -36쪽

사랑은 언제나 이성의 상실, 자포자기, 그로 인한 미성숙함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잘 해야 우스꽝스러운 코미디가 되는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세계 정치사의 대재앙이 되는 것이다. -38쪽

나 살아있는 그 존재를 찬양하리,
불꽃같은 죽음을 동경하는 그런 존재를.

사랑의 밤들의 서늘함 속에서,
당신의 증인이었고, 이제 당신 자신이 증인이 된 그 속에서,
촛불이 고요히 타오를 때,
낯선 느낌이 당신을 사로잡네.

이제 더 이상 당신은
어둠 속 그늘에 싸여 있지 않네,
새로운 욕망이 당신을 사로잡네,
더 높은 곳에서의 성교라는 욕망이.

그곳이 아무리 먼 곳이라도 당신은 두렵지 않네,
당신은 황홀경에 빠져 훨훨 날아오르네,
그리고 빛을 열망하는 당신,
이제 당신은 드디어 나비로 불타오르네.

하지만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하네,
그렇다 : 죽으면 그리 되리라!
이 어두운 지상에서는
당신은 단지 우울한 손님일뿐.

괴테 <행복한 동경> -56-5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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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소피 카사뉴-브루케 지음, 최애리 옮김 / 마티 / 2006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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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자체로서 하나의 작품이고 세상이 된 책이다.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라는 제목을 단 출판사는 정말 탁월한 선택을 했다. 어쩜 이렇게 이 책을 압축적으로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제목은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담아내고 있는 동시에 책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이 책 그 자체를 표현하기도 한다. 이 책 안과 밖에 모든 세상이 담겨있다.

  "신이 세상을 창조했듯이 사람은 한 권의 책을 만들었다"
 "그의 빛 깊은 곳에서 나는 보았노라. 우주에 흩어진 모든 것이 사랑에 의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진 것을"

  이 책에 딱딱하게 곧이곧대로 부제를 붙이자면 '책의 역사'가 가장 적절한 선택일 것이다. 제 1장의 책 만들기 에서부터 시작해서, 책값과 책수집가들, 책도둑을 살피고, 3장에서 책을 읽는 독자들의 변천사를 다룬다. 4장에서는 책에 그림을 그린 채식사들의 작업과 그 예술의 결정체들을 보여주며 마무리 한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손쉽게 책을 구경하고, 약간의 돈만 지불하면 쉽게 책을 구입할 수 있지만, 그때 그시절에는 책이 매우 귀했다. 그것은 하나의 예술작품이고, 돈 많은 부자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고가의 보물이었다. 종이가 아닌 양피지와 파피루스로 만들어진 책들은, 성서의 경우 한 권을 만들기 위해 양 200마리를 죽여야 한다고도 했다. 아 이런 불쌍한 양들. 양만 죽느냐. 아니다. 소가죽도 쓰인단다. 또 책장을 만들기 위해 양과 소를 죽이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책에 쓸 필기구가 필요했다. 펜이 흔치 않았던 그 시절에, 가장 고급스럽게 사용되었던 것이, 거위의 깃털이라고 했지. 거위의 깃털 중에서도 네번째 깃털이 가장 부드럽게 쓰여졌나보다. 그러니 종이에 필기구에 벌써 동물들의 희생과 거금의 돈이 따른다. 여기에 오늘날처럼 글자만 쓰여져있는 책이 아닌, 책에 삽화를 넣고, 그림을 그리고, 꾸미는 작업을 하는데에 또 대단한 노력이 들어간다. 그런 작업을 하는 이들을 채식사라 불렀는데, 이 책 안에 소개된 그들의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입이 떡 벌어진다. 정말. 책에 들어간 삽화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박물관에 걸려있어야 할 유명 화가들의 작품과도 같다. 그러니 책이 비싸고, 귀할 수 밖에 없다. 아무나 책을 소유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자신만이 소유하는 책이 그만큼의 값어치를 하길 바랬고, 하나뿐인 책을 위해 온갖 정성과 노력을 기울였다.

   중세에는 주로 수도원에서 수도사들에 의해 책이 만들어졌으나, 이후 도서관과 학교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필경사라는 직업과, 채식사라는 직업이 따로 생겨났다. 책이 있음에도 공부를 하지 않는 지금의 우리들은 너무나 행복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이다. 엄청나게 비싼 책값과 그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책들을 구입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고. 책이 귀했기에 또 책을 훔치는 이들도 있었는데, 마치 오늘날 고가의 노트북이나 피엠피를 훔치는 도둑들에 비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리하여 13세기의 한 성서에는 이런 경고문구까지 적혀있었다.  

"이 책은 파리 생빅토르의 소유이다. 이 책을 훔치거나 이 경고문을 숨기거나 지우는 자는 천벌을 받을지어다. 아멘. 이 장서는 프랑스 왕비이며 성왕 루이의 모후였던 블랑슈가 파리 생빅토르 교회에 기증한 것이다."

 "이 책을 훔치는 자는 교수형을 당할지어다"  

  아니 어떻게 교회에서 이런 문구를 사용할 수가 있는가. 사람들의 행복을 기도해야 할 교회에서, 사랑과 자비의 정신을 실천해야 할 교회에서 어찌 이런 문구가 사용될 수 있단 말인가. 하기야 오늘날의 일부 교파에서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타인의 불행을 눈감는 이들이 어디 한둘이랴. 책을 훔치면 천벌을 받고, 교수형을 당할 것이라니. 아 정말 무섭다. 책 하나 훔쳤다가 지옥가게 생겼다. 얼마나 책이 귀했고, 책 도둑이 극성을 부렸으면 저런 문구가 붙여있었을까 싶다.  

  고대와 중세를 거슬러 올라오는 책의 역사는, 한마디로 문명의 역사이고, 세상의 역사이다. 책 안에는 모든 세상이 담겨있다. 그 안에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이 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있고, 왕과 왕비가 있고, 음악이 있고, 건축이 있다. 책은 지식을 전파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그치지 않고, 그림과 음악과 건축 등등의 예술,문화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다. 책 안에는 모든 역사와 세상이 담겨있었다. 

  "어떤 이들은 신을 발견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러나 더 큰 책이 있으니 창조된 세계 자체가 그것이다. 사방 위아래를 둘러보고 눈 여겨 보라. 그대가 발견하고자 하는 신은 먹물로 글씨를 쓰는 대신 지으신 만물을 그대 눈 앞에 두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원죄 이후 불완전한 존재가 되어 세상이라는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신이 인간에게 그 뜻을 계시한 책 곧 성서를 주셨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세상은 신의 손가락으로 씌어진 한 권의 책과도 같다. ... 그러나 까막눈이는 책을 펼치고 글자를 들여다보아도 읽지 못하듯이, 어리석은 자연의 인간은 성령에 속한 것을 알지 못한다..."(위그 드 빅토르)  

  책을 좋아하는 이들은 이 책 한권을 소장함으로써 뿌듯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중세의 그 귀했던 책들 못지 않게 이 책은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종이 위에 책의 역사를 서술하고, 선명하고 눈에 부신 아름다운 그림들을 담아낸 하나의 예술작품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고, 이 한 권은 세상을 담고 있다. 책 수집가들은, 애서가들은, 결코 이 책을 지나칠 수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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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03-20 09: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엄청난 지름질 리뷰로 임명합니다ㅠㅠ
그냥 순순히 꾸욱.

마늘빵 2006-03-20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이 책은 절대 안사고는 못배기는 책이에요. 고대와 중세의 책에 관한 모든 역사와 뒷이야기가 담겨있다는. 책을 논하는 책 답게 종이도 최상급입니다. 삽화의 질도 최고최고.

반딧불,, 2006-03-20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댓글로 지름질. 아프락사스님 나뽀요.

마늘빵 2006-03-20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비로그인 2006-03-20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반디북에서 읽었는데요.역자해설도 친절하고, 번역도 잘되었고 갖고싶은책이죠. <독서의 역사>의 오역을 생각하면.. 요시미 순야의 <소리의 자본주의>와 함께 읽으면 연결점이 있어요.책을 낭독하다가 묵독 했는데 현대에는 라디오를 통해서 생각이 전달되는 시대의 변화!!!

하이드 2006-03-20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점에서 봤을때는 재미없어보이던데 =3=3=3

마늘빵 2006-03-20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하이드님 책의 역사를 멋드러진 삽화와 함께 살펴보는 재미라고나 할까요.

드팀전 2006-03-20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두 탱스 투.... 기록한번 세워보삼.

마늘빵 2006-03-2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드팀전님 감사합니다.

stella.K 2006-03-23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 중세시대 교회가 좀 무섭긴 하죠? 저런 글을 써놓다니...그만큼 교회가 책을 중하게 다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비싼 시절이었고...교회 권위라는 것도 있고...하지만 기독교가 책의 발전에 이바지 했던 점도 있지요? 특정 종교 옹호하는 것처럼 들려 조심스럽긴 합니다요.
요즘 인간의 이기심과 이타심이 인류발전에 얼마나 기여했을까 그런 거 생각해 보고 있는 중입니다요.^^

마늘빵 2006-03-23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스텔라님 네 이 책에서도 기독교가 책의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고 있어요. 필사라는 것도 다 수도원에서 시작한 것이니까요.
 
세상은 한 권의 책이었다
소피 카사뉴-브루케 지음, 최애리 옮김 / 마티 / 2006년 2월
구판절판


"그의 빛 깊은 곳에서 나는 보았노라.
우주에 흩어진 모든 것이
사랑에 의해 한 권의 책으로 엮어진 것을"
-단테의 <신곡> '천국편' 中--5쪽

호화로운 수서본을 만들기 위해서는 양피지를 자주색이나 검정색으로 물들여 금색이나 은색으로 글씨를 쓰기도 했다. 가죽은 파피루스나 종이보다 더 견고하고 불에도 잘 타지 않는다. 장정을 하는 데 다시 쓸 수도 있고, 이미 쓴 글씨를 긁어내고 새 글씨를 쓸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덧쓴 수서본을 '팔랭프세스트'라 한다. -18쪽

"이 책은 파리 생빅토르의 소유이다. 이 책을 훔치거나 이 경고문을 숨기거나 지우는 자는 천벌을 받을지어다. 아멘. 이 장서는 프랑스 왕비이며 성왕 루이의 모후였던 블랑슈가 파리 생빅토르 교회에 기증한 것이다." (밑줄그은 이 주 : 13세기 어느 성서에 쓰여진 말)

"이 책을 훔치는 자는 교수형을 당할지어다" -90쪽

책 한권을 소유하거나 빌리는 것, 손에 책을 드는 것, 읽어나가면서 기계적으로 책장을 넘기는 것, 우리 시대에는 대수롭지 않은 이 모든 동작들이 중세에는 극히 드물고 엄숙하기까지 한, 학문이나 재산을 많이 가진 특권층에 국한된 것이었다. 기독교는 책이라는 물건을 거의 신성한 위치에 두어 '책의 문명'을 탄생시켰다. 그리하여 독서란 비록 소수에게 국한되기는 했지만 긍정적인 함의를 지니는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93쪽

"어떤 이들은 신을 발견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그러나 더 큰 책이 있으니 창조된 세계 자체가 그것이다. 사방 위아래를 둘러보고 눈 여겨 보라. 그대가 발견하고자 하는 신은 먹물로 글씨를 쓰는 대신 지으신 만물을 그대 눈 앞에 두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214쪽

스콜라 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은 원죄 이후 불완전한 존재가 되어 세상이라는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래서 신이 인간에게 그 뜻을 계시한 책 곧 성서를 주셨다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이 모든 세상은 신의 손가락으로 씌어진 한 권의 책과도 같다. ... 그러나 까막눈이는 책을 펼치고 글자를 들여다보아도 읽지 못하듯이, 어리석은 자연의 인간은 성령에 속한 것을 알지 못한다..."(위그 드 빅토르)

"인간이 원죄로 타락하면서... 자연이라는 책은 파괴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 책의 뜻을 밝히기 위해 또 다른 책이 필요해졌으니, 그것이 바로 성서이다."(보나벤투라)-214-215쪽

"우리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앉은 난쟁이들과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대인들보다 더 많은 것을 더 멀리까지 볼 수 있지만 그것은 우리 자신의 눈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들의 높직한 어깨 위에 올라앉은 덕분이다."(베르나르 드 샤르트르)-2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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