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에드가 드가와 폴 고갱


고갱은 인상주의 화가 중에 특히 드가와 교분이 두터웠습니다.
드가는 고갱보다 14살이 많았습니다.
동료 화가들이 “불평꾼 드가와 잔소리꾼 에드가”라고 할 정도로 독설가로 악명 높았던 그가 성미가 고약하고 불손해서 동료 화가들이 가까이 하기를 꺼려한 고갱을 돌보며 평생 호의를 베푼 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는 화가로서의 고갱의 재능을 인정했기 때문이며 그는 고갱의 재능을 알리고 후원하는 데 앞장을 서게 됩니다.
그는 1881년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을 주로 구입하고 전시회를 열던 화랑 주인 뒤랑-뤼엘에게 고갱의 작품을 구입할 것을 강력하게 권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도 구입하여 고갱의 경제적 어려움을 덜어주었습니다.
뒤랑-뤼엘은 고갱의 작품 세 점을 1,500프랑에 샀는데 아마추어 화가의 그림을 한 점에 500프랑을 주고 산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히 크게 배려한 일이랍니다.
전업작가 모네와 르누아르 작품이 때로는 50프랑 미만에 팔리기도 했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비싸게 팔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에드가 드가(1834~1917)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에드가 드가의 성은 de Gas인데 두 단어를 붙여서 Degas로 사용했습니다.
1855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앵그르의 제자 루이 라모스로부터 수학했는데 앵그르는 다비드의 제자로 프랑스의 전통을 이어받은 대가입니다.
나이 많은 앵그르는 라모스의 아틀리에를 방문하다 젊은 드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보고 “젊은이, 선으로 그림을 그리게. 선을 회화의 생명으로 여기게”라고 충고해주었습니다. 드가는 앵그르가 자신에게 해준 말을 친구들에게 자랑했고, 선을 중심으로 그리면서 프랑스 전통을 이었습니다.

드가는 현대인의 삶을 소재로 삼았으며 특히 경마, 발레, 극장, 서커스, 리허설, 카페, 세탁소 장면 등을 주로 그렸습니다.
당시 산업혁명으로 도시가 비대해지고 경마장, 극장, 카페, 음악연주실, 세탁소 등이 신흥업소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문명의 레크레이션을 즐기는 현대인의 삶을 묘사하는 것이 당시에는 현대화였습니다.
시인 샤를 보들레르도 마네에게 현대인의 삶을 그리라고 충고했듯이 현대화는 현대인의 삶을 소재로 그린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보통이었습니다.

드가는 인상주의 그룹전에 일곱 차례나 참여하여 주요 멤버가 되었지만 마네와 마찬가지로 인상주의 화가로 불렸더라도 그들과는 상이한 그림을 그렸습니다.
당시에는 인상주의라는 개념이 정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 전혀 다른 그림을 그린 고갱과 반 고흐도 자신을 지칭할 때 “우리 인상주의 화가들은 …”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의미에서의 인상주의가 아니랍니다.
드가가 풍경화를 별로 그리지 않은 것만 봐도 그는 인상주의 화가가 아닙니다.
빛과 대기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었고 자연을 직접 그리지 않았습니다.
아카데미 배경을 가진 드가는 숙련된 기교를 사용하면서 돌발적이고 무의식적인 행위, 예정되지 않은 장면 등에 관심을 갖고 잘못 찍은 사진처럼 가장자리에서 인물이 잘리는 등 친숙하지 않은 장면을 재현했습니다.
이런 방법은 사진과 일본 판화에서 받은 영향입니다.

1880년부터 모델을 왁스로 제작하면서 조각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흥미롭게도 그는 생전에 조각을 한 점 소개했을 뿐이며 그것이 <열네 살의 발레리나>입니다.
그는 조각에 실재 발레리나의 의상 튀튀tutu를 입힌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것은 그가 사망한 후에야 청동으로 완성되었습니다.
1890년대에 시력을 상실할 것을 우려하여 더욱 작업에 박차를 가했는데 말의 다양한 동작, 목욕하는 여인의 다양한 행동, 누드 댄서 등을 재구성했으며 이것들 역시 그가 사망한 후 청동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말년의 20년은 거의 실명한 상태가 되어 속세를 떠난 사람처럼 쓸쓸하게 지냈습니다.
르누아르는 조각에서의 드가의 위상을 오귀스트 로댕보다 더 높게 평가했으며 피사로는 드가를 당대의 최고 예술가로 꼽았습니다.

고갱은 드가의 과격한 화면 구성에 늘 감탄했습니다.
그가 1881년에 그린 <화가의 집 내부, 카르셀 가>를 보면 모델이 뒤에 있고 테이블과 꽃병이 화면 앞에서 관람자의 시야를 가리는데 드가의 구성을 상기시킵니다.
피아노를 연주하는 메테의 모습을 묘사하면서 관람자로 하여금 그녀의 얼굴을 절반만 볼 수 있도록 하고 자신은 관람자를 향해 등을 돌린 채 아내의 연주를 감상하는 포즈를 취했습니다.
이것은 그의 회화적 의도가 두드러지게 나타난 작품 중 하나입니다.
메테는 이 작품이 마음에 들어 팔지 않고 1917년까지 자신의 소장품으로 아꼈습니다.

고갱은 1882년 제7회 인상주의 그룹전에 <화가의 집 내부, 카르셀 가>를 포함한, 유채와 파스텔로 그린 작품 12점과 조각 한 점을 소개했습니다.
출품작이 늘어난 데서 미술에 대한 그의 자세가 더욱 진지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듬해 초 그는 피사로와 오스니로 가서 휴가를 보내며 함께 작업했습니다.
종이 한 장에 피사로가 고갱의 초상을 그리고 고갱이 파스텔로 피사로의 초상을 그린 드로잉은 이때 그려진 것입니다.

1882년 11월 주식시장이 붕괴되면서 프랑스 경기가 침체의 늪에 빠졌습니다.
실업자가 대량으로 발생했고 고갱과 슈페네커도 1883년 직장을 잃었습니다.
고갱이 피사로와 친구 화가들에게 전업작가로 나서겠다고 선언하자 회화에 대한 고갱의 열정을 잘 아는 그들은 당연한 선택이라고 생각했지만 작품을 팔아 생계를 꾸려간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염려했습니다.
피사로는 친구들에게 고갱이 “분발한다면 화가로서 안정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잘 해나갈 것으로 믿는다”고 했지만
정작 아들 루시앙에게는 전업작가가 되겠다는 고갱을 가리켜 “예상 외로 고지식하구나”라고 본심을 털어놓았습니다.
하지만 고갱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행로로 진입하는 것으로 화가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보다는 이번 기회에 전업작가로 나서지 않는다면 평생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자신감과 행운은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낙천적인 성격이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용이하게 해주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직업을 주식거래인이 아닌 화가라고 적기 시작한 건 1883년부터였습니다.

막내 폴-롤라를 막 출산한 메테는 남편이 전업작가로 나서겠다고 하자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메테는 남편의 결심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자 살아갈 길이 막막했습니다.
벌어놓은 돈은 이내 바닥나고 말았습니다.
고갱은 루앙에서 주식거래를 시도해보았지만 경기가 매우 침체된 상태라서 주식 파는 일이 작품을 파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임을 알았습니다.
고갱은 1884년 1월 임신중인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생활비가 적게 드는 루앙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메테는 루앙으로 이사한 여섯 달만에 아이들을 남겨두고 코펜하겐 친정으로 가버렸고 고갱은 다음달 아이들을 데리고 처가로 갔습니다.
그는 코펜하겐에서 프랑스 회사로부터 방수외투를 수입해서 팔아보았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코펜하겐에 체류하면서 다락방에서 자화상 <이젤 앞의 고갱>을 그렸는데 자신감과 고뇌가 엇갈려 스스로를 달래기 어려운 표정입니다.
우울한 표정의 자화상입니다.
화가가 자화상을 그릴 때 거울을 보고 그리게 되는데 그는 거울 속에서 이런 모습을 보고 마음이 몹시 착잡했을 것입니다.
이젤 앞에 앉아 붓을 든 모습으로, 자신이 전업작가라는 점을 내세우려고 하지만 자신감이 없고 매우 위축되었으며 얼굴에 닿은 빛으로 생긴 명암이 그를 고뇌하는 것으로 보이게 합니다.
비스듬히 내려온 대들보와 의자가 맞닿아 다락방이 협소함을 알 수 있으며 이국의 아파트 다락방에서 그린 것이라서 그런지 편안해보이지 않습니다.

<만돌린이 있는 정물>에서는 자신이 소장한 아르망 기요맹의 풍경화를 배경으로 사용했는데 1881년 여름 그는 기요맹과 함께 작업한 적이 있었습니다.
프랑스 풍경화가이자 판화가인 기요맹은 매우 가난했고, 토목건설 공무원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1892년 복권에 당첨되어 10만 프랑을 탄 후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회화에 전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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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드가에게는 야수 기질이 있네


코펜하겐에서 고갱은 미술잡지를 통해 파리 화단을 지속적으로 관망했으며 앵그르와 그의 위대한 적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보았습니다.
당시 프랑스 화단에는 두 사람을 축으로 평행을 달리는 두 화파가 결성되어 있었습니다.
앵그르는 회화에 있어 선의 중요성을 강조한 데 반해 들라크루아는 색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두 사람의 선과 대립을 평론가들은 이상주의와 사실주의의 대립으로 보았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을 포함한 젊은 화가들은 들라크루아의 화풍을 따랐고 드가와 르누아르는 앵그르를 좇아 프랑스 전통주의를 계승하려고 했습니다.

고갱은 슈페네커에게 들라크루아의 <돈 주앙의 난파선> 복사본을 보내달라고 청하면서 그를 프랑스 화가 가운데 최고 화가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는 들라크루아의 색채주의를 찬양하면서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그리는 표현주의 방법에 경의를 표하고 상상력에 탄복했으며, 색을 자율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실재 세계의 본질을 충분히 드러내는 기교에 감동했습니다.
슈페네커에게 보낸 같은 편지에서 그는 들라크루아를 가리켜 “그분에게는 야수 기질이 있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잘 그릴 수 있는 것이라네. 그의 필치는 늘 힘 있고 유연한 호랑이의 동작을 연상시키네”라며 감탄의 소리를 높였습니다.

외젠 들라크루아(1798~1863)
프랑스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기본 교육은 루브르 뮤지엄에 가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가운데 절로 이루어졌는데 그는 루벤스와 베네치아 화가들의 작품에 매료되었습니다.
들라크루아가 처음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1822년의 살롱전에 <단테의 배>를 출품하고부터였습니다.
이 작품을 정부가 구입했습니다.
2년 후 그린 <키오스의 대학살>이란 역사화로 그의 성공은 분명해졌습니다.
친구 화가 그로는 이 작품을 보고 “회화의 대학살”이라고 했으며 시인 보들레르는 “운명과 구제 불가능한 고통을 영화롭게 하는 지독한 찬송”이라고 했습니다.

들라크루아는 1832년에 모르네이 백작과 모로코를 방문하면서 이국적 장면들에 감동을 받았고 이때의 감동이 후기 작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1830년대 후반부터 그의 양식과 기교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색을 붓을 쓸듯이 하여 사용했고 또한 색을 쪼개 칠하는 기교를 사용했는데 이런 색의 효과를 와토가 이미 극대화하면서 색을 회화적 구조로 만들었습니다.
와토의 방법은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회화의 가능성이었습니다.

들라크루아의 색을 중시하는 방법은 다비드의 제자 앵그르의 선을 중시하는 방법과 첨예하게 대립했으며 두 사람을 추종한 화가들에 의해 두 학파간의 불화가 심했습니다.
선이 우선이냐 색이 우선이냐 하는 문제가 프랑스 화단의 쟁점이 되었는데 인상주의 화가들은 들라크루아의 방법을 진전시켰으며 반 고흐를 위시한 후기인상주의 화가들도 들라크루아의 채색주의를 회화의 본질로 받아들였습니다.

들라크루아가 타계한 후 그의 아틀리에에는 9천 점에 이르는 유화, 파스텔화, 드로잉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5층 건물 창문 밖으로 떨어지는 사람을 땅에 떨어지기 전에 스케치할 수 없다면 결코 기념비적인 작품을 제작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그의 말은 젊은 화가들에게 교훈이 되었습니다.

처가에서 캔버스 제조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일하도록 직장을 구해주었지만 고갱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처가 사람들과 불화했습니다.
처가 사람들은 그가 너무 거만하다고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코펜하겐에서 지낸 기간은 고갱에게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최악이었습니다.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에 “피사로 선생님, 어쩌다 제가 이런 곤경에 처하게 되엇습니까?”라고 적었고, 1885년 5월에 다시 보낸 편지에 적었습니다.

“저는 용기도 돈도 모두 떨어졌습니다. … 다락방으로 올라가 목에 밧줄을 매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날마다 엄습해옵니다. 제 발목을 잡는 건 오직 회화뿐입니다.”

‘오직 회화뿐’이란 말에서 그가 회화에 대해 순교자와도 같은 비장한 각오로 임했음을 알 수 있으며 남은 생애가 그런 태도로 일관되었음을 보게 됩니다.
그는 미술사에 길이 남을 화가가 되겠다는 각오와 자신감으로 스스로를 곤경에서 구해낼 수 있었습니다.

1885년 6월 고갱은 메테와 네 자녀를 남겨두고 여섯 살 난 클로비만 데리고 파리로 돌아오면서 경제적으로 성공하면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영원히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고갱은 메테에게 자신이 수집한 작품을 팔아 생활비에 보태더라도 세잔의 작품만큼은 팔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7월에 클로비를 마리에게 맡기고 자신은 디에페에 있는 슈페네커의 집에 의탁했습니다.
마리는 칠레 출신 상인 후안 우리베와 결혼했으며 고갱은 매형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슈페네커는 학교에서 회화를 지도하며 생활하고 있었지만 넉넉한 편이 못 되어 고갱이 그의 집에 오래 머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고갱은 그의 집에 석 달 머물면서 그와 함께 작업했는데 노르망디 해안가에 위치한 디에페로 가서 보트와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해변을 그렸습니다.

그해 겨울 클로비가 천연두에 걸렸습니다.
고갱은 메테에게 “클로비가 천연두에 걸렸는데 내 주머니에는 20상팀 밖에 없구려”라고 적었습니다.
궁지에 몰린 그는 포스터 붙이는 일을 해서 하루에 5프랑을 벌었습니다.
가난한 생활이 지속되자 건강이 나빠졌고 클로비를 양육할 능력이 없어 메테에게 보내야 했습니다.
클로비는 매우 병약해 스물한 살 때 관절수술을 받은 뒤 패혈증으로 사망했습니다.
메테가 클로비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으므로 고갱은 죽을 때까지 아들의 죽음을 몰랐습니다.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그는 그림을 그리느라 밤을 새기가 일쑤였습니다.

드가는 다음해 1886년에 열릴 제8회 인상주의 그룹전을 준비하면서 고갱에게 참여하라고 권했습니다.
전시회는 봄에 라피테 가 모퉁이에 있는 메종이라는 유명한 식당에서 열렸습니다.
고갱은 19점을 출품했는데, 조각은 나무를 깎아 만든 한 점뿐이어서 그가 조각보다는 회화에 전념했음을 알게 해줍니다.
빈곤한 상태에서 캔버스와 물감을 사서 18점이나 그릴 수 있었던 건 회화에 대한 열정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출품한 작품들 중에는 1885년에 그린 <디에페의 일광욕하는 사람들>과 <소가 있는 풍경>이 포함되었습니다.

전시회 카탈로그에는 미국인 메리 카삿과 고갱의 아틀리에 주소만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카삿은 여자이기 때문에 관례상 주소를 명기할 수 없었지만 고갱의 경우는 아틀리에가 없었기 때문에 명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평론가 펠릭스 페네옹이 고갱의 작품을 호평했으므로 작품이 몇 점 팔려 다행히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페네옹은 “폴 고갱은 유사한 색을 사용했는데 폐쇄음과도 같은 조화를 이루었다”고 적었습니다. 
 
고갱은 메테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습니다.
다른 예술가들에 비하면 내 작품은 성공적이었소.
판화가 브라크몽이 한 점을 250프랑이나 주고 사면서 나를 도예가에게 소개했소.
도예가가 나더러 용기를 몇 점 만들라고 했소.
내가 만든 조각을 보더니 이번 겨울에 여러 점 제작하라면서 그것들을 자기가 팔 경우 돈을 절반씩 나누자고 하는구려.
그렇게만 된다면 수입이 괜찮을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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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가난뱅이에게 파리는 사막과도 같소


고갱은 열심히 조각을 제작했지만 팔리지 않자 생활에 싫증이 났습니다.
그는 새로운 영감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어떻게 창작을 계속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미적 고갈을 느낀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서도 동시에 프랑스 화단에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말년에 쓴 냉소적인 비평의 글은 프랑스 화단에 대한 그의 태도 일면을 말해줍니다.

몇 개의 작은 길이 만나는 곳에서 아무런 사상도 없는 시골뜨기가 무언가를 찾는다.
그건 피사로의 작품일 것이다.
바닷가에서 우물 하나, 화려한 잡색 줄무늬 의상을 걸친, 분명 야망에 굶주린 듯한 파리의 몇몇 사람들이 메마른 우물에서 갈증을 풀어줄 만한 물을 찾는다.
온통 색종이 조각들.
그건 시냑의 작품일 것이다.

여자 분뇨 수거인, 싸구려 포도주, 목 매단 사람의 집.

더이상 쓸 재주가 없으므로 최선의 방법이란 그런 것들을 보러가는 것이다.
과일이 담긴 광주리에 익은 포도가 삐져나와 있으며,
천 위에는 푸른 사과와 분홍빛 붉은 사과가 한데 어울린다.
흰 것이 푸르고 푸른 것이 희다.
세잔이야말로 진정 최고의 화가이다.

고갱에게는 대상과 사람을 파악하는 탁월한 눈이 있었습니다.
그의 방랑벽은 방랑을 위한 방랑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거부 또는 반발이었습니다.
현실 속에 있으면서 현실을 방치하기 어려워 또다른 현실로 가서 차라리 문외한이 되는 편이 그에게는 나았습니다.
1886년 7월 중순 풍타방으로 내려갈 때 그는 돈을 빌려왔는데 제때 먹지 못하는 생활이 지속되자 진력이 났습니다.
그는 아직 원시의 삶이 남아 있는 열대지방으로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3월 말에 아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진정 바라는 건 파리를 벗어나는 것이오.
가난뱅이에게 파리는 사막과도 같소.
화가로서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지만 사흘을 굶은 적도 있다오.
그렇게 굶으면 몸도 상하고 의욕도 없어지오.
건강과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해 거친 자연이 있는 파나마로 가서 미개인처럼 살려고 하오.
태평양에 있는 타보가라는 작은 섬을 알고 있소.
파나마 근처로 인적이 뜸하고 자유로우며 기름진 땅이라오.

고갱은 퐁타방에서 만난 젊은 화가 샤를 라발과 함께 1887년 4월 파나마로 향하는 배에 승선했습니다.
파나마에는 프랑스 회사가 운하를 건설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이 탄 배는 4월 10일 마르티니크의 카리브 섬에 도착했습니다.
그가 1887년 4월 말 슈페네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파나마의 생활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슈페네커,
내가 섬으로 온 게 완전한 오판이었다면 자네가 믿을 수 있겠나?
파나마 지협을 뚫는 공사가 시작된 뒤로 이곳 생활도 사막 한가운데서처럼 어려워졌네.
산 위에서 생활하는 인디언들은 농사도 짓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땅을 한 뼘도 내놓으려 하지 않네.
정말이지 생활비가 싸게 먹히고 살기 좋은 곳으로 마르티니크밖에 없는 것 같네.
진작 그곳으로 갔어야 했는데.
거기였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챙길 수 있었을 텐데 말일세.
매형한테는 이제 더이상 도움을 받을 처지가 못되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너무 어리석었고 게다가 운도 따르지 않았어.
이대로 앉아 있을 수만은 없지.
어리석음을 만회해야겠네.
돈 벌기 위해 두 달 동안 운하에서 일할 생각이네.
그러고 나서 마르티니크로 떠나려 하네.

고갱과 라발은 운하개발회사의 노역자로 취직했는데 노역자들에 대한 회사 측의 부당한 처우에 몹시 실망했고 그나마 대량 해고바람이 불자 두 사람은 보름 후 해직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 회사는 파나마 운하를 먼저 개발했지만 개발과정에 문제가 생겨 1889년에 파산하고 말았습니다.
후임으로 미국 회사가 선임되어 보다 개량된 다이너마이트와 기술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운하를 완공했으며 1914년, 처음으로 배가 운하를 통과했습니다.
6월 중순, 두 사람은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서 통나무집에 거주하며 그곳을 낙원으로 여겼습니다.
고갱은 슈페네커에게 마을에서 2km 떨어진 농장에서 오두막을 발견했으며 화가가 탐낼 만한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진 곳이라고 했습니다.

고갱은 열대의 빛나는 다양한 색과 공간 등에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사용한 적이 없는 아주 밝은색을 사용해 섬 풍경을 그리면서 원주민들을 모델로 삽입했습니다.
이곳에서의 작업에 관해 슈페네커에게 적었습니다.
날 가장 사로잡는 건 원주민들일세.
빛 바랜 원색 의상을 입은 섬의 여인들이 우아하고 다양한 몸짓으로 매일매일 오고 가네.
난 여태컷 그림을 그렇게 투명하고 선명하게 그려본 적이 없었네.
고갱은 열대에서는 모든 것이 천천히 움직인다는 점과 풍성한 몸매를 한 검은 피부의 여인들에게서 천연의 우아함을 발견했습니다.
이국 풍경을 그리면서 피사로의 인상주의 기법을 자연스럽게 버릴 수 있었으며 더이상 인상주의자의 눈으로 자연을 바라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태양이 작열하는 열대에서는 구태여 빛이 사물에 닿아 일으키는 작용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었으므로 색을 토막내어 칠하지 않아도 되었고,
원색들이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오히려 색을 평편하게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했습니다.
빛과 색, 공간과 부피에 대한 새로운 개념이 생긴 것으로 이는 화가에게 매우 중요한 깨우침이었습니다.
그는 색을 평편하게 칠하면서 색들이 대조를 이루게 했으며 부드럽고 유연한 아라베스크 선으로 사물을 단순화해서 표현했습니다.
열대로의 여행은 고갱에게 큰 수확이었습니다.
2년 후 그는 시인 친구 샤를 모리스에게 말했습니다.
“마르티니크에서의 경험은 내게 아주 중요했네.
온전히 나 자신과 직면할 수 있었네.”
그러나 고갱과 라발은 말라리아와 이질, 그리고 간질환으로 심하게 앓았습니다.
고갱은 1887년 8월 25일 슈페네커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일주일 내내 겨우 일어나 음식물만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심하게 앓았네.
지금은 뼈만 남은 해골일세.
당장 바닷가로 달려가 고국 땅을 밟아야만 나을 수 있는 병이네.
자네가 무슨 일로 내게 적대감을 가졌는지 모르지만 제발 부탁인데 250~300프랑 보내주게.
내 작품을 40~50프랑에 팔고 다른 작품들도 헐값에 팔아주게.
그렇지 않으면 난 여기서 개처럼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네.
지금 난 이 모든 고난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려고 신경이 예민해져 있네.
하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고 몸조차 움직일 수 없다네. 제발 부탁이네.
슈프(슈페네커의 애칭), 날 위해 수고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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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에서

반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


반 고흐는 1888년 2월 20일 프랑스 남쪽 끝 아를로 갔다.
파리에서 일 년 반 지내면서 파리의 화가들과 불화했고 일본 회화의 영향을 받아 남쪽의 빛이 더욱 찬란한 곳에서 창작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를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안톤 모베의 타계소식을 들었다.
반 고흐는 헤이그에서 한때 모베로부터 수학했는데,
헤이그 화파를 이끈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모베는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로부터 영향을 받아 꾸밈 없는 진솔한 주제 예를 들면 해변의 모래언덕, 강변의 낮은 풀밭, 바닷가 등을 작은 크기로 그리면서 밝고 은빛색을 즐겨 사용했다.
그의 진지함과 조심스러운 태도는 반 고흐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아내의 사촌이었던 반 고흐는 모베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특히 밀레에 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반 고흐는 그때부터 밀레의 작품을 모사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씨 뿌리는 사람에 관해 강한 집착을 보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장-프랑수아 밀레는 초기에 전통적인 신화와 일화, 그리고 인물화를 그렸다.
그는 전원의 장면들을 그리고부터 이러 장르에 집착했으며 농부 화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전원에서의 농부들의 우수적인 장면들을 강조했으며, 들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감상적으로 표현했다.
평론가들은 그를 사회주의자라고 불렀지만 그는 정치적이기보다는 미학적으로 전원의 생활을 주제로 삼아 농부들의 삶에서 숭고함을 느낄 수 있도록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했다.
1849년에 바르비종에 안주했으며 말년에는 그곳 바르비종 화파의 리더이자 가까운 친구 테오도르 루소의 영향을 받아 순수 풍경화를 그렸다.
밀레는 가난 속에서 생활했으며 오십이 된 1860년대에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남긴 많은 드로잉들에서 그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다.
반 고흐 외에도 조르주 쇠라와 카미유 피사로가 멜레의 작품을 매우 좋아했다.

모베의 타계소식은 반 고흐로 하여금 초자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었고 그의 죽음으로 촉발된 죽음과 영원에 대한 사고가 결국 <씨 뿌리는 사람>의 상징주의로 나타났다.
1888년 6월 몇 주 동안 그는 이 작품에 전념하면서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씨 뿌리는 사람>은 자신이 “갈망하던 영원”에 대한 시각적 표현이며, 이런 문제는 1850년대 네덜란드의 신학적 최대 이유였음을 지적했다.

반 고흐는 1888년 6월 중순 <해질녘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리면서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현대화된 형태로 변형시키면서 자신이 존경해마지 않는 들라크루아의 종교화에 사용된 대비채색법을 응용했다.
밀레의 주제에 들라크루아의 암시적 색을 응용했다.
또한 태양과 태양의 빛남을 주로 노란색으로 묘사하고 들에는 보색인 보라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물감이 캔버스에 거칠게 남아 있도록 두텁게 칠했다.
옥수수를 모두 뽑은 후 씨를 뿌리는 게 상식인데 그는 옥수수를 뽑지도 않은 밭에 씨 뿌리는 사람을 그려넣었다.
그러니까 씨 뿌리는 사람은 실재 모습이 아니라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여기에 삽입된 것이다.
그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 작품에 관해 적었다.


“이제 막 일주일 동안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작업을 마쳤다.
옥수수 밭과 풍경,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을 그렸다.
경작하는 들판, 지평선까지 보랏빛이 뭉실뭉실한 밭에 파란색과 흰색으로 씨 뿌리는 사람을 그렸다.
타작한 후의 옥수수 밭을 지평선에 닿도록 했다.
지평선 끝에 작열하는 노란 태양과 노란 하늘을 그려넣었다.
그림에서 색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단다.”

반 고흐는 화가가 자연과 알 수 없는 영원 사이에서 중재자가 될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현대 신학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신성 전체를 환기시키는 특권과도 같은 신성한 힘이 화가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자연의 모든 것이 말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회화에서의 표현적 힘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그 자신은 자연에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왜 모든 사람이 보고 느끼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데, 자연 혹은 신은 귀와 눈을 가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적었다.
그는 화가로서 행복을 느끼는 이유가 자신이 본 것을 표현할 수 있고 표현하자마자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말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반 고흐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회화를 통해 사람들을 교화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였기 때문에 그도 가업을 이어받아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삶을 살려고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그는 신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도저히 합격할 수 없음을 알고 포기했다.
렘브란트의 성화를 본 그는 화가가 되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판단해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화가는 목사에 비해 전혀 다른 직업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을 교화시킨다는 의미에서 볼 때는 동일한 직업이었다.
반 고흐의 작품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를에서 그는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리는 데 전념했는데, “갈망하는 영원”과 “사후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며 자연과 영원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그는 “요람에서의 어린 아이와 같은 눈으로 바라보면 영원이 눈에 보인다”고 했다.
자연에 대한 이런 그의 사고가 나타난 <씨 뿌리는 사람>은 자연 안에서 “이상과 추상”으로부터 “가능성과 진실”을 구분하려는 그의 노력의 첫 결실로 이해할 수 있다.

반 고흐는 6월에 그린 <해질녘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구성을 달리 해서 10월에 다시 그렸다.
그는 동일한 제목으로 달리 구성했는데, 배경을 보면 알필레와 폐허가 된 몽마주르 대수도원이 바라보이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반 고흐의 말로 “작고 불분명하다.”
이 작품에는 상징적 의미를 시사하는 요소가 없고 열심히 공을 들여 그렸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야외에서 그리면서 신속하고 자신감을 갖고 인상주의 방법으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들에 있는 한 농부의 모습이 아니라 상징적인 이미지이다.
이는 그가 해석한 예수 그리스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그릴 때 밀레의 농부와 들라크루아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들라크루아의 그리스도에서 원형으로 빛나는 후광에 감동하면서 “색 자체가 상징적 언어로 말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레몬과 같은 밝은 노란색을 보고 해와 달의 무리처럼 보인다고 했다.
들라크루아의 노란색은 그에게 매우 강렬하게 느껴졌으며 하늘의 별처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고 매력적이라고 감탄했다.
반 고흐는 그리스도의 빛나는 후광의 효과를 씨 뿌리는 사람의 머리 뒤에 빛을 발하는 태양으로 대신했다.
그는 테오에게 들라크루아의 그리스도의 역할을 <씨 뿌리는 사람>에 적용하겠다고 적었으며, 베르나르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에서도 종교화에 관해 언급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거룩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미학적 힘으로까지 확대 해석했으며 “창조 행위”의 힘을 가졌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믿었다.
예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설교했는데,
반 고흐는 예수 자신을 “순수한 창조력”을 가진 씨 뿌리는 사람으로 현대적 상징으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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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에서

서양화에 대한 일본화의 영향


일본화는 1800년대 중반의 유럽 예술가들에게 폭넓게 영향을 주었다.
외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고조될 때 항구를 통해 들어온 일본 공예품, 의상, 판화 사본들은 유럽인의 호기심을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1891년 평론가 로저 막스는 일본 미술은 모더니즘에 있어 중요하다고 했으며, “일본은 우리의 스승이다”라고까지 말한 사람도 있었다.

1867년 파리에서 개최된 만국박람회를 통해 소개된 일본 미술은 유럽인에게 큰 파란을 일으켰는데 마치 일본이 미술의 폭탄을 파리에 떨어뜨린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기모노를 입는 여인들의 수가 늘었고, 판화 사본을 벽에 장식하는 살롱과 카페가 늘었으며, 일본 차를 마시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
프랑스인에게 우키요에 화파의 대가들 호쿠사이, 히로시게, 우타마로의 목판화는 익히 알려져 있었다.
그들의 풍경화, 초상화, 정물화가 프린트의 발달로 대량생산되었으므로 많은 사람이 구입해 수집했다.
빈센트 반 고흐(1853~90)도 일본 판화를 모사하며 일본 화가들의 화풍과 구성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는 몽마르트르 근처에 있는 상점에서 판화 사본을 구입했으며 그것들이 수백 점에 달해 얼마나 일본화에 심취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아틀리에 벽은 일본 판화들로 장식되었으며 그것들을 그림 배경에 사용하기도 했다.

반 고흐는 히로시게의 <꽃이 핀 오얏나무>와 <비 오는 날의 다리>를 모사했다.
그가 1888년 4월에 그린 <꽃이 만개한 배나무>는 <꽃이 핀 오얏나무>를 응용하여 그린 것이며, 한 해 전에 그린 수채화 <람파르 근처 거리>는 <비 오는 날의 다리>를 응용하여 대각선으로 구성한 것이다.
그가 1890년에 그린 <꽃핀 아몬드나무>도 일본화의 영향 하에 그린 것이다.

반 고흐는 1888년 8월 말에 <이탈리아 여인>을 그렸는데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경쾌한 작품이다.
모델은 카페 탬버렝의 주인 아고스티나 세가토리로 보이며, 여인의 넓적한 코와 큰 입술, 그리고 카네이션이 두드러진다.
이 작품에서 그는 일본화의 영향으로 여인의 성격을 나타내기보다는 장식적으로 그리면서 시각적으로 즐거움을 주는 색들을 사용했다.
그림이 평편하게 나타난 것과 화면 위와 오른편 장식은 일본화의 영향이다.

1888년 여름 반 고흐가 아를에서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나의 모든 작품은 일본인들로부터 받은 영향이다.
일본 미술은 본토에서는 쇠퇴하고 있지만 프랑스 인상주의에서는 뿌리를 내리고 있다.”

1887년 2~3월 카페 탬버렝에서 일본 화가들의 판화 전시회가 열렸을 때 반 고흐도 관람했다.
이 카페는 1885년 4월에 개점했다.
클리시 대로에 있는 이 카페의 여주인은 과거 모델을 한 적이 있는 아고스티나로 반 고흐의 애인이 되었다.
친구들의 말로는 반 고흐가 이 카페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작품으로 지불했다고 한다.
반 고흐는 예술가들이 주로 출입하는 이 카페를 자신이 모사한 일본 판화들로 장식했다.
그는 아고스티나의 초상을 <카페 탬버렝의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여인>이란 제목으로 그렸는데 오른편 가장자리 벽에 일본화가 걸려 있다.
그가 1887~88년에 그린 <페레 탕기의 초상>의 배경에도 일본화가 장식되어 있다.
이 두 점의 초상화는 반 고흐가 탕기로부터 의뢰를 받아 그린 것들다.
탕기는 클로젤에 미술품 재료를 파는 상점을 갖고 있었고 그곳은 화가들이 만나는 곳이기도 했다.

클로드 모네(1841~1926)도 일본화의 영향을 받아 1876년에 <일본 소녀>를 그렸다.
실재 사람의 크기로 그린 이 작품의 모델은 카미유로 화려한 일본 의상 기모노에 붉은색이 감도는 금발 가발을 쓰고 관람자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이것은 일본화를 모방한 것이다.
모네는 열일곱 살 때부터 일본 판화를 수집했다.
카미유가 입고 있는 기모노와 둥근 부채는 일본 제품이며 포즈 또한 일본 여인의 모습이다.
사람들이 모네가 인물화를 더 이상 그리지 않는다고 불만을 토하자 이에 대한 응답으로 그린 것이다.
반 고흐가 1887년에 모사한 <고급매춘부(기생)>(열린미술관 174)의 포즈가 방향만 다를 뿐 모네의 <일본 소녀>와 유사하다.

모네는 이 작품을 포함하여 18점을 제2회 인상주의전에 출품했다.
전시회는 1876년 4월 파리의 플레티에 가에 위치한 뒤랑-뤼엘 화랑에서 개최되었다.
이 전시회에 모네를 비롯하여 피사로, 르누아르, 시슬레, 드가, 그리고 홍일점 여류화가 베르테가 주요 작가로 참여했다.

에두아르 마네(1832~83)가 1868년에 그려 그해 살롱전에 출품한 <에밀 졸라의 초상>은 자신의 작품에 호평해준 졸라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벽에 걸려 있는 일본 씨름선수, <올랭피아>, 벨라스케스의 <바쿠스>의 시선이 모두 졸라에게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씨름선수 판화는 쿠니아키의 것으로 <아와 지방의 씨름선수 오나루 토 나다에만>이다.
졸라는 그것들에 무관심한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벽을 장식한 그림들과 책상 위의 잡다한 의도적으로 올려놓은 오브제들을 통해 마네의 회화적 의도를 파악한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은 <라 지롱드>(1868.6.9)에 살롱전에 관한 글을 기고하면서 “이 작품은 인간에 관한 표현이라기보다는 소위 말하는 정물화에나 속한다”고 평했다.
르동은 마네가 사실적 화법을 사용했을 뿐 작품의 내용은 정물화와 마찬가지로 오브제들을 의도에 합당하게 연출하여 그린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보수주의를 옹호한 후퀴에르는 잡지 <르 나시오날>에서 전통적인 사실주의 회화를 두둔하면서 조형주의를 창조한 마네의 지나친 자유를 비난했다.
“이 작품의 배경은 관망적이 아니며, 졸라가 입고 있는 바지는 천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마네가 이 작품을 졸라에게 주었을 때 졸라는 그다지 흡족해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화의 영향은 마네에게도 두드러졌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거리의 가수>에서도 일본화의 영향이 엿보인다.
마네를 포함하여 유럽 화가들은 일본 판화를 연구하면서 독특한 요소들을 그들의 작품에 응용했다.
일본 대가들의 판화에 나타난 광택 있는 평면과 힘 있는 색, 과감하게 단순화된 외곽선과 가파르면서 날카롭게 각진 형태, 평면적인 디자인, 대담한 칼자국 등은 유럽 화가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마네가 <거리의 가수>에서 종 모양으로 둥글게 한 드레스를 평편하게 이차원적으로 채색하고 가장자리를 밝은 색으로 칠하여 여인의 모습이 배경으로부터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한 효과는 일본 판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이다.

<거리의 가수>는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무명 여가수를 묘사한 작품으로 살롱전에 받아들여졌다.
마네는 화실 근처 프티트폴로뉴 동네를 거닐다가 여가수가 카페 밖으로 한 발 내딛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림의 모델은 그가 선호한 빅토린 뫼랑이다.
빅토린은 마네의 작품에서 다양한 역할을 했는데 여기서는 가난한 여가수의 모습으로 연출되었다.
빅토린은 기타를 든 손으로 땅까지 닿는 기다란 드레스를 살짝 들어올렸고 버찌를 입가에 대고 수줍은 표정을 지었는데 입가의 붉은 버찌가 왼손에 들고 있는 노란 종이, 갈색, 회색, 초록색의 드레스와 대조가 되었다.
배경을 어둡게 하여 빅토린의 환한 얼굴이 뚜렷이 나타나게 했는데 이런 점은 마네 작품에 나타나는 독특한 요소로서 그가 의도적으로 구성한 연출이다.

당시 화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과감한 생략과 사선구도 등은 일본 판화에서 받은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이용한 것들이다.
특히 모네는 대각선 구도의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 모네가 그린 풍경화와 해양화에서 나타난 파도가 치솟는 형태 등은 히로시게와 호쿠사이 판화의 특징적인 요소들이다.
유럽 화가들은 이렇게 자신들의 작품에 일본 판화의 요소들을 응용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판화를 작품의 배경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일본화의 영향은 고갱의 작품에서 색을 평편하게 사용하고 대각선으로 구성하는 데서도 발견되며, 작품의 배경으로 사용한 데서 그가 일본 화가들의 판화를 소장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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