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의 ‘유쾌한 날’>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유쾌한 날 Nave nave mahana(Jour delicieux)>에는 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왼편 화면 앞에 아이가 앉아 있고, 그 뒤로 멀리 여인이 앉아 있으며, 오른편 뒤에도 땅만 바라보고 있는 여인이 있다.
중앙에는 다섯 여인이 다양한 포즈를 하고 서있다.
튜닉, 혹은 파레우를 입는 중앙의 여인들은 고대 그리스의 파르테논 릴리프에서 볼 수 있는 여사제들의 모습을 상기시키는데, 고갱은 이런 사진을 갖고 있었다.
고갱이 타계하고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른 뒤 이 작품을 리옹의 미술관이 구입했으며 프랑스 미술관으로는 처음이었다.

일부 학자는 <유쾌한 날>을 산드로 보티첼리의 <봄 Spring>과 관련짓기도 한다.
보티첼리의 작품에서 여인들은 각각의 포즈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회화적으로 상호관련이 있는 것처럼 고갱의 작품도 이런 식의 구성임을 강조한다.
퐁타방의 고갱의 아틀리에에는 보티첼리, 프라 안젤리코, 마네, 퓌비 드 샤반, 일본 화가 우타마로 등의 작품을 모사한 것들이 벽에 걸려 있었으며, 고갱은 중세 태피스트리와 같은 보티첼리의 <봄>을 특히 좋아했다.

고갱은 잘못 그려진 캔버스를 재활해 사용했다.
<두 번 다시, 오 타히티 Nevermore, O Taiti>의 경우 풍경화가 실패하자 물감이 두텁게 칠해진 윗부분을 잘라내고 캔버스를 다시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므로 그가 의도적으로 잘 사용하지 않는 기다란 캔버스가 되었다.
여기에 침대에 길게 누운 누드를 그렸는데, 1892년에 그린 <저승사자>와 유사한 구성이지만 여인이 좀 더 우수에 젖어 있고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상징주의 작품이 되었다.
침대 위 누드 뒤로 누드를 바라보는 새가 한 마리가 보인다. <저승사자>에서의 모델은 테하마나이지만 이 작품의 모델은 현재의 동거녀 파후라이다.
침대는 고갱이 상상해서 그린 것으로 짐작되며 두 작품 모두에서 침대 머리가 둥근 형태인 것은 특기할 만하다.
빛이 대각선으로 위에서 아래로 비치는 조명을 사용했으며 거기에 어울리는 몸의 섬세한 명암을 묘사했다. 그는 단순히 미개인 누드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려고 했다.
의도적으로 침대 커버와 배경을 꽃으로 장식하여 누드의 아름다움을 더욱 드러내려고 했다.
이 작품을 볼라르가 고갱 생전에 작곡가 프레데릭 델리우스에게 팔았다.


고갱은 악마숭배 사상과 원시주의 종교에 관심이 많았으며, 원주민들의 인생을 그들의 악마숭배 사상과 종교를 통해 이해하려고 했다.
<신상 Rave Te Hiti Aamu(The Idol)>도 이런 노력의 일환 가운데 하나이다.
한때 평론가들은 이 작품에 나타난 신상이 원주민들이 섬긴 신 티키 또는 타카이라고 믿었지만 나중에서야 고갱이 창작한 이미지인 줄 알게 되었다.
괴물처럼 생긴 신상의 얼굴은 산송장과도 같은 얼굴에 젖가슴을 드러낸 여인의 몸으로 앉아 있다.

<신상>은 고갱의 자포자기와 재활하려는 의지가 동시에 나타난 상징주의 작품이다.
그는 자신을 야만인이라고 불렀는데, 자조적인 이 말은 알량한 유럽의 문명인들 특히 파리 사람들에 대한 빈정거림이기도 하다.
고갱은 자신에게서도 발견되는 유럽인의 이기심을 추악한 것으로 인지하면서 원시문화를 통해 문명의 죄를 말끔히 씻어내기 바랐다.
그에게 있어 <신상>은 괴물의 모습이며 사람들을 파괴와 죽음에 이르게 하는 능력을 가진 존재인 동시에 사람에게 성을 부여하는 조화로운 신이기도 하다.

<꿈 Te Rerioa(The Dream)>은 1897년 2월 말과 3월 초에 신비로운 방 안에 있는 한 쌍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하단 왼편에 아기가 잠들어 있고 그 위로 고양이가 보인다.
방 내부 두 벽을 낯선 이미지들로 장식했는데 과거에 그린 그림과 조각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벽의 이미지들은 평면적이기보다는 삼차원으로 릴리프와 같은 입체감을 느끼게 한다.
왼쪽 벽 하단을 동식물의 형태들로 띠가 되게 장식했다.
벽에는 남자와 여자가 끌어안고 있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남자는 방 모퉁이를 바라보고 있다.
아담과 이브를 묘사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 뒤로 보이는 벽에는 히나 여신의 이미지가 보인다. 벽에 그려진 이미지와 부부로 보이는 한 쌍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꿈>이 아기의 것인지 부부의 것인지, 혹은 고갱 자신의 것인지 가늠되지 않는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아기가 잠자고 있는 요람인데 이것은 고갱 자신이 제작한 상상의 조각처럼 보인다.

<가난한 어부 Poor Fishman>는 <꿈>과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타히티의 아침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카누 옆에 남자가 무릎 꿇은 자세로 반으로 쪼갠 코코넛에 담긴 즙을 마시고 있고 남자 옆에 아기가 카누를 붙들고 배의 내부를 바라보고 있다.
카누 뒤로 여인은 해변에 누운 채 오른손에 든 과일을 막 먹으려고 한다.
이들 뒤 서쪽으로 무레아 섬이 보이고 노란색 바다 수평선에 떠오르는 해가 보인다.
카누가 대각선으로 화면을 양분하고 화면 앞에는 야자수와 남자의 팔, 몸체가 수직으로 구성되었다.
남자 옆에는 도끼가 놓여 있다.
타히티 어부의 페시미즘을 나타낸 그림으로 보라색, 파란색, 핑크색을 주로 사용하여 아주 화려해보이지만 울적한 느낌을 준다.

<가난한 어부>와 <꿈>에 등장하는 아기는 파후라가 낳은 고갱의 딸로 병에 걸려 곧 죽었다.
두 작품은 어쩌면 고갱이 상상한 가족의 모습으로 자신과 파후라를 모델로 한 상상화일 것으로 짐작된다.

<꿈>은 몽프레에게 보내졌고 몽프레는 표면이 조금 망가졌음을 고갱에게 알렸다.
무엇이 원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랜 항해에서 선박 내의 공기가 너무 건조해 생긴 일이 아닌가 짐작된다.
캔버스를 여러 개 둘둘 말아 보냈기 때문에 서로 붙어서 생긴 손상이었을 것이다.
이런 손상은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유화가 다 마르기도 전에 급히 보내느라 일어난 손상이다.
<꿈>을 조르주 소데가 복원하기로 하자 고갱은 몽프레에게 복원할 때 캔버스 뒷면에 접착제를 사용하고 열을 가한 후 앞면의 물감을 눌러 캔버스에 부착되게 하라고 지침을 주면서 반 고흐가 준 작품을 자신이 그런 식으로 복원했음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했는데도 균열이 남는다면 그거야 어쩔 도리가 없지 않느냐고 첨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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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그리스도의 탄생(신의 아기)’>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신의 아기) The Birth of Christ(Child of God)> 또한 타히티 여인을 모델로 성서적 장면을 표현한 것으로 <왕후>와 마찬가지로 올이 거칠게 짜진 캔버스에 그린 것이다.
이국적 침대에 누워 잠든 여인은 파란 파레우를 걸쳤으며 별 모앙의 금색 무늬가 조금 보인다. 4년 전에 테하마나가 침대에 엎드린 모습을 그린 <저승사자>에서 침대 시트를 밝은 노란색으로 했는데, 여기에서도 레몬 빛 노란색 시트가 시각적으로 강렬하다.
눈길을 끄는 건 누운 여인의 머리 뒤에 <왕후>에서 여인이 들고 있는 부채 모양으로 노란색 후광을 그려 넣은 것이다.
<왕후>와 이 그림에 침대가 사용되었지만 이는 고갱의 회화적 의도에 의한 것으로 타히티인은 침대를 사용하지 않았다.
침대 뒤로 왼쪽에 초록색 후광을 한 신의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이고 그녀 뒤로 파란 의상의 여인이 보이는데 그녀는 초록색 날개를 달고 있어 천사를 표현했음을 알게 한다.

<그리스도의 탄생(신의 아기)>을 고갱의 딸을 낳은 파후라를 모델로 그린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파후라는 1896년 말에 딸을 낳았고 신생아는 몇 주 후 사망했다.
이 작품은 고갱이 1896년 7월 파리에서의 전시회를 위해 보낸 작품들 속에 끼어 있었다.
그렇다면 파후라는 그때 임신 중이었다.
파후라가 임신을 하자 <그리스도의 탄생(신의 아기)>으로 자기 자식의 출생을 그리스도의 탄생에 비유한 것이다.
오른편에 가축을 그려 넣어 그리스도의 탄생에 등장하는 상징적 동물들을 대신하고 아이의 머리에 후광을 그려 넣어 신의 자녀임을 상징한 것이다.
고갱이 타히티 여인을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로 표현하려고 의도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그의 작품들은 상징적이었으며 좀 더 사변적이었다.

파리의 친구들에게 자신에게 지불할 돈을 곧 보내줄 것을 청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주문이 들어왔다.
파페에테 근처 커다란 저택에 살고 있는 변호사 오귀스트 구필이 자신의 딸 잔느의 초상을 그려줄 것을 청한 것이다.
잔느의 타히티 이름은 바이테이다. 1891년에 수잔 뱀브리지와 타히티 여인의 초상을 꽃이 장식된 벽지를 배경으로 그린 적이 있는데 잔느의 초상도 꽃이 그려진 벽지를 배경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렸다.
<잔느 구필의 초상 Portrait de Jeune Fille Vaite Goupil>을 보면 잔느가 보통 선교사들이 입는 것에 비해 사이즈가 넉넉한 원피스를 입고 있다.
이런 옷에는 무늬가 있는 경우도 있지만 잔느는 단색의 원피스 차림이다.

<잔느 구필의 초상>은 한동안 잊었던 반 고흐에 대한 기억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배경의 벽지를 꽃으로 장식한 그림을 반 고흐가 아를에서 그린 적이 있고 고갱은 그와 함께 지내면서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반 고흐가 보내준 그런 그림을 고갱은 『노아 노아』의 잡록 표지에 수록했습니다.
반 고흐는 1888~89년 룰랭 부인의 초상 <자장가>를 연속적으로 그릴 때 벽지를 화려한 꽃으로 장식했다.
<잔느 구필의 초상>은 반 고흐의 <자장가>와 닮은 점이 있는데, 장식적 벽지 외에도 왼손을 오른손 위에 포갠 제스처 또한 그렇다.
잔느의 손에는 걸려 있는 가방 끈은 룰랭 부인이 아기의 요람과 연결된 끈을 쥐고 있는 것과 유사다.
고갱이 반 고흐의 그림을 참조하여 구성했음을 알게 해준다.

<골고다 근처의 자화상 Self-Portrait at Near Golgotha>은 파페에테 병원에서 그린 것이다.
1896년 7월에 복사뼈를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가 입고 있는 것은 병원 가운으로 보인다. 배경에 어렴풋이 알아 볼 수 있는 여인을 그려 넣어 수도자와도 같은 자신의 모습을 극적으로 강조했다.
그가 자발적으로 남태평양으로 온 것이지만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하며 강제로 구속된 사람처럼 보인다.
스스로 문명사회를 거부했지만 그는 사회가 자신을 버렸다고 분노를 표출하고 있다.
화가의 길을 선택한 것조차 현명하지 못한 판단이었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고갱은 문학에서의 상징주의와 회화에서의 상징주의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는 “회화는 서술적인 것보다는 암시하는 요소를 추구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낯선 이미지들을 창조하며 더러 과격한 장면을 시위했지만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나무를 깎아 제작한 작품에서 그런 점이 현저하게 나타났습니다.
<뭐! 질투하니?>, <왜 화가 났니?>, <어디 가니?>, <신비롭게 보이는>, <언제 결혼하세요?> 등 그가 사용한 제목을 보면 반 고흐와는 달리 인생의 문제들을 서술적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지만 상징주의 작가들이 소설과 시에서 실험하듯 은유적으로 나타났다.

1896년 여름에서 이듬해 3월 사이에 불과 몇 점밖에 그리지 않았지만 훌륭한 작품도 있다.
1897년 2월 몽프레에게 작품을 보낸다고 적은 여섯 점 가운데 <왜 화가 났니?>와 <유쾌한 날>이 포함되어 있었다.
두 작품의 특징은 주제가 되는 인물이 따로 없고 관련 있는 몇 사람이 있는 풍경을 묘사한 것들이다.

<왜 화가 났니? No te aha oe riri?(Why are You Angry?)>에서는 배경의 야자나무와 화면 앞 풀밭 위에 차가운 느낌을 주는 진한 초록색이 두드러지고 <유쾌한 날>에서는 지면과 인물들의 옷이 다양한 붉은색으로 두드러진다.
두 작품 모두 색의 균형이 완벽하다. <왜 화가 났니?>는 4년 전에 그린 <뭐! 질투하니?>와 <어디 가니?>와 유사한 일상 언어를 제목으로 한 것으로 동요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이 특징으로 몸도 동요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감정도 동요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제목은 어떤 사건이 발생한 데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시사하는데, 고갱은 작품을 통해 타히티인이 외적이기보다는 내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을 역설하려고 한 것으로 추정된다.
왼편 가장자리에 관람자 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아 있는 여인을 향해 오른편에 우아한 모습으로 서있는 여인이 “왜 화가 났니?”하고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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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은 1889년 가을 <감람산의 그리스도 Le Christ au Jardin des Olivers>를 그렸는데, 부패한 세상과 그가 상상한 초월적인 세상을 대비시킨 작품이다.
이는 고갱의 신학적 구성으로 누가복음에서 그리스도가 체포되기 전 제자들을 뒤로 하고 홀로 감람산에서 고뇌하는 장면을 상상하여 그린 것이다.
중앙의 나무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세계와 부패한 세계를 양분시켰다.
특기할 점은 파란색과 갈색을 주로 사용하여 그리스도의 머리와 수염을 아주 밝은 붉은색으로 두드러지게 한 것이다.
고갱은 초자연적인 분위기를 나타낼 때 붉은색을 사용했다.

고갱은 훗날 평론가에게 “자화상을 그렸다”고 했는데, 자신을 그리스도로 형상화한 것이다.
이 시기에 그는 경제적으로 미학적으로 고통스러웠으며 자신이 가난과 빚, 그리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적었는데, 그리스도의 형상은 그 자신의 고통스럽고 고뇌하는 형상이다.
1889년의 전시회에서 한 점도 팔지 못하고 아를을 떠난 뒤 오직 한 점을 925프랑에 팔았을 뿐이었으므로 그는 좌절과 불안 속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1889년 11월 8일 반 고흐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이 작품에 관해 언급하면서 스케치와 함께 근래 나무를 깎아 제작한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Be in Love and You Will Be Happy>에 관해서도 언급했다.

감람산에 있는 그리스도일세.
빛나는 하늘은 푸른빛이 감도는 파란색이고, 나무는 모두 기울고 심홍색이며, 땅은 보라색이고, 그리스도의 모습은 밝은 붉은색 머리와 진한 호아토색으로 되어 있네.
이 그림이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을 것 같아 내가 오래 가지고 있으려 하네.

반 고흐는 편지를 받고 두 점이 어울린다고 했고, 테오는 매우 훌륭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고갱은 반 고흐에게 “금년에 나는 전례가 없는 노력을 다 쏟았네”라고 적었는데, 특별히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의 완성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 작품은 물질과 정신의 문제를 놓고 고투한 끝에 얻어낸 성과물이었다.
그는 <파도 속에서>와 <삶과 죽음>을 통해 이런 문제에 집착해왔다.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에는 이런 문제 외에도 그의 성적 욕구가 분출되었다.
그는 반 고흐에게 이 나무 릴리프에서 힘과 조화를 모두 나타냈으며 여태까지 제작한 것들 가운데 최고라고 자신하면서 “매우 부조리한 작품”이라고 했다.
그는 구스타프 쿠르베 양식의 몹시 슬퍼하는 여인의 누드가 상단 왼편 성서 시대 바빌론의 도시와 아래 상상의 꽃과 여우 사이에 있다고 했다.
바빌론 도시란 음란을 상징하고 여우는 “인디언들 가운데 심술궂은 숙명적 동물”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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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황색 그리스도’>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반 고흐가 1889년 1월 22일에 보내온 편지에 답장하면서 고갱은 물고기로 상징하는 글자 ‘Ictus’를 적어 예술에 있어 자신과 반 고흐가 여전히 형제임을 시사했다.
그는 종이에 수채와 유채를 혼용하고 콜라주를 첨가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Ictus>에도 이 글자를 적었다.
그는 루브르 미술관에서 본 이국적인 조각의 이미지를 이용했는데, 앉아 있는 사람의 포즈는 이집트·그리스·아시아 조각의 요소를 혼용한 합성물의 결과로 그리스도와 이집트인의 신 호루스의 이미지를 융합시킨 것이다.
‘Ictus’는 그리스어 앞 글자들에서 딴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뜻이다.

고갱은 아를에서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에 관한 주제로 작품을 제작할 생각을 갖게 되었으며, 그의 스케치북에는 ‘Ictus’ 외에도 기독교와 관련된 ‘Incas’, ‘Serpent’, ‘Saul’, ‘Paul’, ‘Sain d’Esprit, Saint Esprit’ 등의 글자가 적혀 있다.
반 고흐가 1889년 겨울에 고갱에게 보낸 편지에 ‘Ictus’란 글자를 그림문자 물고기와 함께 적었다.
‘Ictus’는 초대교회에서 크리스천들의 신앙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고갱은 동양 문화에서 감동을 받아 니르바나(열반)의 개념에 기독교와 동양의 종교적 도상을 혼용했다.
그는 동양인처럼 보이는 누드모델을 연꽃과도 같은 제스처를 취한 모습으로 묘사했다.
오른팔은 십자가에 못 박힌 형상으로 왼팔은 부처의 제스처로 각각 상징하면서 기독교를 동양의 상징주의와 동등하게 취급했다.
이런 혼합주의 그림을 오딜롱 르동Odilon Redon(1840~1916)이 이미 그리고 있었고 고갱은 르동의 그림에 관해 알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한 보이는 것의 논리’를 사용하려는 환상적·상징적 회화 경향으로 초현실주의의 선구자가 된 르동은 쇠라와 함께 1884년에 앙데팡당전의 창설위원이 되었으며, 앙리 팡탱 라투르에게서 석판화 기술을 배워 1879~99년에 <꿈속에서 In the Dream>를 비롯하여 13종의 우수한 석판화집을 발표했다.
르동은 제8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했으므로 함께 참여한 고갱은 자기보다 여덟 살 연상의 그를 잘 알고 있었다.

고갱은 1889년 9월에 <황색 그리스도 The Yellow Christ>를 그릴 때 퐁타방 근처 작은 마을 트레말로의 교회에 걸려 있는 17세기에 나무로 제작된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를 사용했다.
교회에 걸려 있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황색이 아니라 아이보리색이지만 벽의 침침한 색으로 인해 노란색처럼 보였다.
그는 예수의 모습을 반자연적인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배경에 퐁타방의 언덕을 삽입하고 십자가 아래에는 브르통의 의상을 입은 여인들로 구성했다.
이 작품도 <설교 후의 영상>과 마찬가지로 공간이 시각적으로 측정되지 않는다.
이런 방법은 초자연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설교 후의 영상>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브르통 여인의 모습이 화면 왼편 가장자리에서 잘렸다.
두 작품 모두 은유적인 영상으로 나타나며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시골뜨기 브르통 여인들이 사모하는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화면 상단을 가로지른 십자가는 초자연적 분위기를 창출하며 노란색의 그리스도는 상상 속에서나 존재할 이미지이다.

<황색 그리스도>에 관해 피사로가 말했다.

내게 있어 고갱의 작품이 비난받는 이유는 그의 추상이 근래 우리의 철학·사회적·반권위적·반신비적인 점들과는 무관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그의 작품은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한 발 후퇴한 것이다.
고갱은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 못된다.
그는 그저 교활한 자일뿐이다.

고갱은 1889년 가을에 다시 그리스도를 그렸는데 <푸른 그리스도 Green Christ>이다.
이것을 <브르통 골고다>라고도 한다.
<황색 그리스도>에서 출발한 고갱의 추상은 색을 평편하게 하고, 전체적 구성을 단순화하며, 구체적 요소들을 생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스도 몸의 윤곽을 푸른색으로 칠하면서 입체감을 느낄 수 없도록 평편하게 했으므로 그리스도의 몸이 앞으로 다가서는 느낌이다.
이 작품도 브르통의 기독교 문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그는 니종에 있는 조그만 교회 앞마당에서 돌로 제작된 골고다 조각을 보았다.
골고다 조각은 수직으로 된 것으로 양 날개에는 성 베드로와 성 요한이 있고 그 아래 그 밖의 제자들의 모습도 보인다.
맨 위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가 있지만 고갱은 하단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시신을 안고 있는 세 여인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는 니종의 교회가 마음에 들었으며, 1888년 가을에 그린 <설교 후의 영상>을 이 교회에 장식했으면 하고 희망을 전한 적이 있다.
브르통 주민의 원시적 종교생활에 어울리는 원시적 형태의 성상을 창조한 것이다.

고갱은 <황색 그리스도>를 배경으로 자신의 모습을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with the Yellow Christ>이란 제목으로 그렸다.
배경에 오른편에 삽입된 것은 그해 봄에 제작한 도자기 <자화상 컵 Self-Portrait Mug>이다.
그는 도자기를 “야만인 고갱의 머리”라고 했다.
그는 루브르 미술관에서 본 자바인의 조각과 소아시아인의 테라코타 마스크를 응용했다.
고갱의 놀라운 점은 고대 조각가들과 같은 방법으로 인간의 모습을 제작한 것이다.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을 통해서 고갱은 자신을 기독교와 비기독교 세계의 중재자로 부각시켰다.

고갱은 화가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자 자신이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으며 이런 심리적 억압을 나타낸 것이 피를 흘리는 자신의 얼굴을 묘사한 <자화상 화병 Self-Portrait Vase>이다.
그는 자화상 화병을 <일본 판화가 있는 정물>에 삽입하여 회화적으로 중요한 오브제가 되게 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회화의 배경으로 적절하게 사용하곤 했다.

고갱은 1889년 중반에 양손을 얼굴에 대고 고뇌하며 괴로워하는 여인의 모습을 <브르통 이브 The Breton Eve>란 제목으로 그렸다. 그림의 배경은 르 풀뒤의 해변이다.
<브르통 이브>는 아를에서 반 고흐와 함께 포도원을 배경으로 상이한 주제의 그림을 그린 <아를의 포도 수확(인간의 고뇌) Grape Harvest at Arles(Human Anguish)>과 유사하다.
<아를의 포도 수확(인간의 고뇌)>의 원제는 <포도 수확 혹은 가난한 여인들>이었다.
결이 고운 캔버스가 비쌌기 때문에 고갱은 아를에서 표면이 거칠게 짜진 싸구려 마포 캔버스를 필로 사서 잘라 사용했다.
거친 표면을 물감을 칠해 부드럽게 했지만 부분적으로 거친 질감을 드러나게 해서 그 효과를 구성의 요소로 삼았다.
그는 아를에서 그린 여인의 모습을 변형시켜 <인간의 고뇌 iseres humaines>를 수채화로 그리고 이를 다시 이브의 모습으로 변형시켰으며 다시금 <삶과 죽음 Femmes se Baignant>에서 삶을 상징하는 누드와 병렬해서 사용했다.
그는 페루의 미라를 여러 차례에 걸쳐 드로잉 했는데, 이런 모습을 그의 작품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브르통 이브>는 나무 뒤에 있는 뱀의 위협을 받고 있다.
그는 이브의 몸 외곽을 검정색으로 칠했다.
이것은 <아를의 포도 수확(인간의 고뇌)>와 함께 1889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의 전시장에서 선보였다.
전시장은 볼피니에 의해 아트 카페에 마련되었고 고갱 외에도 베르나르, 라발, 슈페네케, 그리고 그 밖의 화가들도 작품을 출품했다.
전시회 카탈로그 앞면에는 고갱의 <검은 바위 The Black Rocks>가 장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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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귓불을 자른 반 고흐>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은 아를에서 그린 그림을 몇 점 팔았지만 아를에서의 생활에는 진력을 냈다.
이런 기미를 눈치 챈 반 고흐는 자신의 귓불을 자르는 불상사를 일으키기 전날 밤인 12월 23일에 테오에게 적었다.

고갱은 아를이라는 훌륭한 도시, 우리가 작업하는 작은 노란 집, 무엇보다도 내게 약간 싫증이 난 것 같구나.
사실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는 질리게 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물론 그 원인은 우리들 자신들에게 있다고 해야겠지.
말하자면 그는 그냥 떠나버리거나 머물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그에게 결정을 하기 전 깊이 생각해보라고, 또 이익과 손해를 따져보라고 말해주었다.

고갱은 매우 강하고 창의력이 뛰어난 친구다.
그렇지만 바로 그 때문에라도 그에게는 평화로운 환경이 필요하구나.
그가 여기서 평화를 얻지 못하면 어디서 찾을 수 있단 말이냐?
묵묵히 그의 결정을 기다리려고 한다.

고갱은 12월 23일 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이 노란 집을 나섰는데 귀에 익은 발자국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는 것을 알았다.
훗날 고갱의 말에 의하면 빅토르 위고 광장의 정원을 산책하기 위해서였다.
뒤를 돌아보니 제정신이 아닌 듯 반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서있어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다.
반 고흐는 비밀이 탄로 난 사람처럼 허겁지겁 노란 집 쪽으로 달아났다.
고갱은 너무 놀랐으며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날 밤 노란 집으로 가지 않고 호텔에서 묵었다.

이튿날 아침 떠들썩한 소리에 잠을 깬 고갱은 지난 밤 반 고흐가 면도칼로 자신의 귓불을 자른 것을 알았다.
그는 손수건으로 귀를 싸맨 반 고흐를 목격하고 반 고흐가 귓불을 잘라 그것을 라셀이라는 매춘부에게 “이것을 잘 간수해” 하며 주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라셀이 장난삼아 크리스마스 선물로 귓불을 줄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 놀랍게도 반 고흐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귓불을 자른 것이다.

반 고흐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는데 피를 너무 흘렀기 때문이다.
길에 쓰러져 있는 그를 경찰관이 디에우 병원으로 운반했으며 닥터 펠릭스 레가 치료했다.
고갱은 테오에게 연락했고 테오는 서둘러 내려와 형을 아를 시립병원 독방에 입원(감금)시켰다. 반 고흐가 고갱을 찾았을 때 고갱은 아를을 떠난 후였다.
반 고흐는 12월 27일에 정신질환을 일으켰다. 테오와 닥터 펠릭스 레는 반 고흐를 엑상프로방스의 정신병원으로 옮기는 문제에 관해 의논하고, 결국 반 고흐는 1889년 5월 8일에 아를에서 북쪽으로 20km가량 떨어진 생레미의 생폴 드 모솔 요양원에 입원했다.
그는 요양원에 일 년 동안 입원해 있는 동안 네 차례에 걸쳐서 발작을 일으켰다.
반 고흐가 파리로 돌아온 건 1890년 5월 17일이었다.
그는 오베르에서 지내다가 1890년 7월 27일에 권총으로 자신을 쏘았고 29일 새벽 1시 30분에 세상을 떠났다.
테오는 약 7개월 후인 1891년 1월 25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시신은 오베르의 공동묘지에 반 고흐와 나란히 묻혔다.


반 고흐가 귓불을 자른 사건은 파리 화단에 곧 알려졌고 전하는 사람마다 내용을 달리 해서 갖가지 소문이 무성했다.
오늘날 의학명으로 말하면 반 고흐는 간질을 앓았다.
알코올중독과 매독, 그리고 독성 있는 물감을 삼키는 버릇이 그의 건강을 해치고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발작의 주요 원인은 간질이었다.

반 고흐가 자살하자 그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매우 컸으며 사람들은 아를에서의 고갱의 과실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다.
반 고흐에 대한 친구로서의 고갱의 행위가 옳지 않았다는 말이 유포되었다.
고갱은 침묵했지만 말년에 그날의 사건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는 고갱의 입장에서 기억을 되살려 한 해명이다.

물론 우연이기는 하나 나와 교제하거나 의견을 나눴던,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중 소수가 정신병에 걸렸다.
반 고흐 형제가 그들이다.
어떤 자들은 악의에 차서, 또 어떤 자들은 악의 없이 그들의 발작을 내 탓으로 돌렸다.
한 인간이 그 친구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건 확실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발작하게 만든다는 따위의 이야기와는 다르다.

...내가 아를에 도착할 무렵 빈센트는 자아에 직면하고 있었다.
나는 연장자이기는 하나 고갈된 인간이었다.
나 역시 빈센트에게 어떤 힘을 취하고 있었다.
그건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된다는 인식에서 그때까지 갖고 있던 작품에 관한 나의 견해를 한층 굳힌 일이고, 또 곤란할 때는 누구든지 자기보다 더 불쌍한 인간이 있다는 점을 상기해야 된다는 점이었다.

“고갱의 데생은 얼마쯤 반 고흐의 것을 상기시킨다”는 문장을 읽을 때면 난 미소를 짓는다.
저녁때가 돼서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홀로 만발한 월계수의 향기를 맡으러 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집을 나서 빅토르 위고 과장을 거의 벗어날 때였다.
귀에 익은 종종걸음이 갑자기 발작적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돌아본 순간 빈센트는 날이 선 면도칼을 손에 들고 바싹 내게 다가서고 있었다.
그때 내 눈길은 너무도 매서웠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가 우뚝 멈춰 서서 얼굴을 가리더니 집 쪽으로 달아나버렸으니 말이다.

그때 내가 비겁했던 것일까?
그 순간 그의 칼을 빼앗고 애써 그를 진정시켜야만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종종 양심에 묻지만 나 자신을 비난할 일은 조금도 없었다.
내게 돌을 던질 자는 던져라.
그 길로 아를의 훌륭한 호텔로 가서 시간을 물은 뒤 빈방을 부탁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너무 놀라서 새벽 세 시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꽤 늦게 일곱 시 반경에 눈을 떴다.
광장까지 오니 군중이 모여 있었다.
집 옆에는 몇 명의 헌병과 중산모자를 쓴 키 작은 경위가 서있었다.
집 입구에 올 때까지 그런 일이 일어났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
빈센트는 침대에서 모포를 푹 뒤집어쓰고 방아쇠 모양으로 웅크리고 누워서 죽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살며시, 아주 살며시 그의 몸에 손을 대보았는데 온기는 분명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것은 내게 모든 지성과 정력을 되돌려주는 그런 것이었다.
난 나직이 경위에게 말했다.
“제발 아주 조심해서 일으켜주시오. 날 찾거들랑 파리로 떠났다고 말해주시오. 날 보기가 괴로울 테니까요.”
...
그 뒤의 사정은 이 일에 흥미 있는 세상 사람들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새삼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다만 정신병원에 들어가 몇 개월의 간격을 두고는 이성을 되찾아 자신의 모습을 이해하고, 세상이 다 아는 저 경탄할 만한 몇 점의 작품을 폭풍처럼 그려낸 한 인간의 끝없는 고통만은 말해두고 싶다.
마지막으로 내가 받은 편지에는 퐁투아즈에서 가까운 오베르의 소인이 찍혀 있었다.
그는 깨끗이 나아서 나를 다시 만나러 브르타뉴로 오고 싶지만 현재로서는 회복이 불가능함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고 토로했다.
“선생님(전에는 날 이렇게 부른 적이 없었다), 선생님께 이렇게 심려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혼란스럽지 않은 맑은 정신으로 죽는 게 품위를 지키는 길이겠지요.”
빈센트는 자기 배에 권총을 발사했다.
그리고 침대에 누워 몇 시간 동안 파이프 담배를 피웠고 아주 또렷한 정신으로 누구도 원망하지 않은 채 눈을 감았다.
장 돌랑Jean Dolent은 『괴물들 Monstres』에 이렇게 적었다.

“고갱이 반 고흐에 관해 말할 때 그의 목소리는 따뜻하다.”

그는 자세한 진상을 모르고 짐작으로 썼겠지만 그의 말은 옳았다.
그 이유는 독자들도 잘 아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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