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 파리에 둥지를 틀다>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은 코펜하겐에서 미술잡지를 통해 파리 화단을 지속적으로 관망하며 앵그르와 그의 위대한 적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보았다.
당시 화단에는 두 대가를 축으로 평행을 달리는 두 화파가 있었다.
앵그르 파는 회화에 있어 선의 중요성을 강조한 반면 들라크루아 파는 선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색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는데, 선은 색과 색의 만남에서 절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선이 우선이다 색이 우선이다 하는 두 화파의 대립을 평론가들은 이상주의 대 사실주의의 대립으로 간주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을 포함한 젊은 화가들은 들라크루아의 강렬한 감정 표현의 화풍을 따랐고 보수적 성향의 드가와 르누아르는 화면을 단정하게 하고 화가의 감정을 자제하는 앵그르를 좇아 프랑스 회화의 전통을 계승하려고 했다.
드가와 르누아르의 회화는 부분적으로만 인상주의에 속할 뿐 인상주의 회화는 들라크루아의 과격한 색의 사용에서 진전된 경향이다.
고갱은 중간 입장을 취하지만 성격상 들라크루아의 회화에 기울어져 있었다.
고갱은 슈페네커에게 들라크루아의 <돈 주앙의 난파선 Shipwreck of Don Juan>(고갱 67) 복사본을 보내달라고 청하면서 들라크루아를 프랑스 화가 가운데 최고 화가라고 극찬했다.
힘찬 율동과 격정적 표현, 색의 명도와 심도의 강렬한 효과를 추구한 들라크루아는 세부 묘사나 극적인 표현의 문학적 서술에 치우치지 않으려고 했으며, 내면을 고양시켜주는 원천인 실재성을 드러내려고 했다.
모로코 여행을 통해 근동 지방의 강렬한 색채와 풍속에서 감동을 받은 들라크루아는 동방 취향의 그림을 그렸다.
고갱은 들라크루아의 표현적인 색채를 찬양하면서 극적으로 묘사하는 회화방법에 경의를 표하고 그의 상상력에 탄복하며, 색을 자율적으로 사용하면서도 실재 세계의 본질을 충분히 드러내는 기교에 감동했다.
슈페네커에게 보낸 같은 편지에서 들라크루아를 가리켜서 “그분에게는 야수의 기질이 있네.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잘 그릴 수 있는 거라네. 그분의 필치는 늘 힘 있고 유연한 호랑이의 동작을 연상하게 하네”라며 감탄의 톤을 높였다.
캔버스 제조회사의 영업사원으로 일하도록 처가에서 직장을 마련해주었지만 괴팍한 성격 때문에 고갱은 처가와 불화했다.
처가 사람들은 그가 너무 거만하다고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다.
코펜하겐에서 지낸 기간은 고갱에게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최악이었다.
피사로에게 보낸 편지에서 “피사로 선생님, 어쩌다 제가 이런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까?”라고 적었으며, 1885년 5월에 다시 보낸 편지에서는 “저는 용기도 돈도 모두 떨어졌습니다. … 고갱은 다락방으로 올라가 밧줄에 목을 매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날마다 엄습해옵니다. 제 발목을 잡는 건 오직 회화뿐입니다”라고 적었다.
“오직 회화뿐”이란 말에서 그가 순교자와도 같은 비장한 각오로 회화에 임했음을 알 수 있으며 남은 생애가 그런 태도로 일관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는 미술사에 길이 이름을 남기는 화가가 되겠다는 각오와 자신감으로 스스로를 물질적·정신적 곤경에서 구해낼 수 있었다.
고갱은 1885년 6월 메테와 네 자녀를 처가에 두고 여섯 살 난 클로비만 데리고 파리로 돌아오면서 경제적으로 성공하면 데리러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약속은 영원히 지켜지지 않았다.
그는 메테에게 자신이 수집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팔아 생활비에 보태더라도 세잔의 작품만큼은 팔지 말라고 당부했다.
파리로 와서 클로비를 누이 마리에게 맡기고 그는 디에페에 있는 슈페네커의 집에 몸을 의탁했다.
마리는 칠레인 상인 후안 우리베와 결혼했는데 고갱은 매형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고갱은 석 달을 머물면서 그와 함께 작업하며, 노르망디 해변에 위치한 디에페로 가서 보트와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을 배경으로 바닷가 장면을 그렸다.
슈페네커는 실직한 뒤 학교에서 회화를 지도하며 생계를 꾸려가고 있었지만 넉넉한 편이 못 되어 고갱이 그의 집에 오래 머물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갱은 사업의 가능성을 알아보기 위해 1885년 8월에 런던으로 갔으며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음을 알고 10월 초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소장품 몇 점을 뒤랑 뤼엘에게 팔아 그 돈으로 카이 가 10번지에 작은 방을 세 얻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워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해 겨울에 클로비가 천연두에 걸렸다.
두창 혹은 마마라고도 하는 천연두는 공식적으로 1977년에야 퇴치되었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전 세계인이 가장 두려워한 전염병 중 하나였다.
이집트의 파라오 람세스 5세(기원전 1156년에 사망)의 미라 머리에서 천연두에 걸린 증거가 발견된 걸 보면 이 질병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인류를 위협했음을 알 수 있다.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고갱은 포스터 붙이는 일을 해서 하루에 5프랑을 벌었다.
가난한 생활이 지속되자 건강이 나빠졌으며 클로비를 양육할 능력이 없어 어린 것을 메테에게 보내야 했다.
클로비는 매우 병약해 스물한 살 때 관절수술을 받은 뒤 패혈증으로 사망하게 된다.
메테가 클로비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으므로 고갱은 죽을 때까지 아들의 죽음을 모르게 된다.
곤궁한 생활 속에서도 고갱은 그림을 그리느라 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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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중에서

물 같은 성격과 불 같은 성격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는 우리에게 한 쌍으로 기억된다.
두 사람이 함께 작업한 적이 있고, 회화에 관해 논쟁하다가 서로 미워한 적이 있으며, 쌀쌀맞은 고갱의 태도에 화가 치밀어 고흐가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자신의 귓불을 잘라 창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해프닝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사람에 의해 회화가 전통과 단절하고 근대에 들어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리에는 전통과 권위를 자랑하는 최고의 미술학교 에콜 데 보자르가 있었고, 명망 있는 대가의 문하생들도 많았지만, 가난하고 충분히 교육을 받지 못한 아마추어 두 화가가 그들 모두를 제치고 근대회화를 보여준 것은 여간 통쾌한 일이 아닐뿐더러 두 사람의 노력이 피땀으로 얼룩져 있어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전율이 생긴다. 
두 사람의 성격은 물과 불 같아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기질이다.
고흐보다 5살 많은 고갱은 인습타파주의자였으며, 빈정거리는 말을 했고, 냉소적이었으며, 궤변을 일삼았고, 무심하며, 상대방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너무 성격이 강한 사람이었다.
반면 고흐에게는 북유럽 특유의 거친 면이 있었지만 천성이 열심히 노력하는 기질이었고, 동료에게 격정적인 애정을 쏟는 불같은 사람이었으며, 우정을 위해서는 목숨이라도 내어줄 듯하지만 버림을 받게 되면 자신을 괴롭히는 매우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장 발장과 수도승의 자화상
두 사람이 주고받은 자화상을 보면 성격과 화풍을 동시에 알 수 있다.
고갱의 <자화상>을 보면 성난 모습으로 고뇌에 찬 순교자와도 같다.
자신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에 비유했다. 사회를 위해 헌신하지만 지명수배를 피해 끊임없이 도망치는 신세였던 장 발장과 마찬가지로 자신도 회화를 위해 헌신하지만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그는 분노했다.
그는 <자화상>에서 “예술가의 영혼을 타오르게 만드는 격렬한 화염을 묘사하고자 했다”고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자화상>과 편지를 받고 고흐도 자신의 모습을 그려 고갱에게 답례로 보냈는데 <자화상(폴 고갱에게 바침)>이다.
고흐는 일본 판화에서 승려를 보고 자신의 머리를 깎았다. 그는 자신이 회화의 세계에서 도를 구하는 수도승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갱은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장 발장이었고 고흐는 회화를 위해 도를 구하는 수도승이었다. 근대회화는 장 발장과 수도승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자화상에서 눈과 코 부분을 때어내 화풍을 비교해보자.
고갱은 살색을 칠했고, 눈썹 가장자리를 어두운 색으로 테를 둘렀으며, 물감 위에 연필이나 목탄을 사용해 드로잉의 효과를 첨가한 데 비해 고흐는 물감을 2~3mm 정도로 두텁게 사용하면서 눈썹을 삼차원적으로 표현하고 볼 또한 거친 붓자국으로 물감을 거칠게 두텁거나 얇게 칠하면서 살색이 아닌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적이고 상징적인 색을 사용했다.
두 자화상에서 기법의 차이가 매우 상이하게 나타나 두 사람의 독특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수수께끼 정물화
고갱과 고흐의 공통점은 열악한 환경에서 스스로 혹독한 훈련을 통해 화가가 된 것이다.
고갱은 컵을 화면에 크게 부각시키며 테이블 너머의 사람들을 배경으로 정물화를 그렸고 고흐는 성경과 소설을 주제로 정물화를 그렸는데, 수수께끼 정물화는 두 사람의 미학을 비교하는 열쇠가 된다.
여기에 나타난 회화적 경향은 이후 두 사람의 작품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
둘 다 전통을 무시한 창작이었고, 상징주의 요소가 강하게 나타났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말해준다. 
고흐의 <펼친 성경이 있는 정물>에서 펼친 성경은 구약 이사야서 35장 ‘종의 노래’이다.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은 훗날 그리스도의 전형이 되었다.
성경 앞의 낡은 소설은 에밀 졸라가 1884년에 쓴 <삶의 기쁨>이다.
커다란 성경은 권위를 나타내는 데 비해 작은 소설은 그러하지 못하지만 밝게 빛난다.
고흐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를 이어 목사가 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아버지가 과로로 목사관 앞에서 쓰려져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를 추모하며 그린 것이다.
고흐는 목사가 되어 집안의 대를 이으려고 했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그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신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할 수 없어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화하고 희망을 주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와 고갱의 그림을 상징주의로 분류하는 것은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이 상징적 의미를 표현하기 때문이다.
표현이 강렬해서 두 사람의 작품을 표현주의로 분류할 수도 있다.
소설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고흐의 정물화가 무엇을 상징 혹은 표현하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삶의 기쁨>은 매우 진지한 철학적 의문을 내포한 책으로 저자는 전통 신앙이 부재한 가운데서 우리가 삶의 모든 비극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의미 있는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지 독자들에게 묻는다.
고흐는 신앙이 삶의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고갱의 <정물이 있는 실내>는 매우 복잡하고 특이하게 구성되었다.
화면 하단 테이블 위에는 커다란 오브제들이 널려 있고 중앙에 가구가 어렴풋이 보이며 배경의 사람들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으로 인해 실루엣으로 나타난다.
사람을 그린 것을 인물화라 하고 사물을 그린 것을 정물화라고 하는데 그는 이 둘을 합쳐서 인물화와 정물화의 장르 구분을 없앴다.
사물이 화면에 더 크게 부각되었으므로 정물화라고 한 것이다.
공간에 대한 배분도 수수께끼인데 침대가 유난히 높고 카드놀이를 하는 테이블은 침대보다 낮으며 5명이 보이지만 그들이 어떤 관계인지 짐작할 수 없다.
화면 앞 테이블에는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나무로 제작된 커다란 컵 탱카드가 있는데 이 컵은 그의 그림에 종종 등장한다.
컵 너머로 문이 열린 방안의 장면을 그린 것인지 아니면 테이블 뒤 벽에 걸린 거울에 비친 장면을 그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정물의 전문적 요소와 개인적 주제가 혼합된 이 정물화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외로운 죽음
고흐에게는 간질병이 있었다. 간질 증세가 나타날 때 그는 소리를 듣고 영상이 눈앞에 어른거린고 했다.
작가 귀스타브 플로베르는 “진주는 조개의 병의 결과이며 스타일은 대단한 고통의 산물이다”라고 했는데 고흐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그는 발작하게 되면 공간이 보인다고 했는데 그 공간이 작품에서 노란색으로 나타났다.
노란색은 그가 즐겨 사용한 고흐의 색이다.
노란색의 상징적 의미를 알면 그의 회화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격리되기 전 1888년 12월과 이듬해 초 그의 그림에서 노란색이 배경으로 현저하게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고흐는 1년 동안 요양원에 격리되었고 병세가 호전되어 파리 근교 오베르로 갔다.
그는 10년 동안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동생 테오가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생이 결혼하고 자식을 낳자 형을 보양하기 어려워졌다.
고흐는 동생에게 경제적으로 부담을 주는 데 대해 늘 괴로워했고 결국 동생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1890년 7월 27일 오베르 근교 성곽 뒤로 가서 권총으로 자신을 쏘았다.
총알이 심장에 박혔다. 그가 어디에서 권총을 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37해 생을 쓸쓸히 마감했고 오베르 공동묘지에 묻혔다. 
고갱은 문명이 인간성을 파괴한다고 비판하면서 생의 후반을 프랑스 식민지 타히티 섬에서 지냈다.
말년에 걸작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를 그렸는데, 이 물음은 그가 평생 자신에게 그리고 관람자에게 물었던 화두였다.
그림에는 신생아로부터 늙은이까지 인생의 파노라마가 펼쳐져 있다.
인생의 수수께끼를 상징하는 대작이다. 그는 1903년 8일 동안 집에 혼자 있었는데 4월 30일 갑자기 어지럽고 경련을 이기지 못해 커다란 소리로 이웃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밤낮을 구별하지 못하고 헛소리를 지르다가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섬의 공동묘지에 묻혔고 묘비도 세워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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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중에서 

아마추어 화가에서 전업작가로


시가상자 뚜껑의 추상풍경화
성격이 외곬수인 폴 고갱은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고 망설임 없이 실천에 옮기는 행동의 화가였습니다.
늘 신념에 차 있고 매사에 자신만만했으며 선뜻 행동을 취하고는 후회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이는 분명 단점이지만 개성을 존중하는 예술에서는 장점이 될 수 있습니다.
돌출적인 그의 거친 태도는 동료 예술가들과 반목하게 했지만 그보다 나이 어린 예술가들에게는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었으므로 지도자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선각자 혹은 스승으로 여기며 따르는 화가들이 그의 주변에는 많았습니다.
1888년 9월 어느날 폴 세뤼지에가 고갱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를 따라 들로 나갔습니다.
고갱은 연못가를 산책했고 세뤼지에가 뒤를 따랐습니다.
고갱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이 나무가 어떻게 보이느냐?”
“노랗게 보입니다.”
“그럼, 네가 생각하기에 가장 적합한 노란색을 칠해라!”
“ … ”
“저 연못에 비친 나무들은 어떻게 보이느냐?”
“파랗게 보입니다.”
“그렇다면 두려워 말고 순수 파란색을 칠하거라.”
“잎들은?”
“주홍색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주홍색을 칠해야겠지.”
고갱의 지시대로 세뤼지에는 작은 시가상자 뚜껑에 풍경을 그렸는데,
아주 과격한 형태와 색의 대비로 나타났으며 평편하게 칠한 색들은 거의 완전추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화구는 들고 나갔지만 캔버스를 가지고 간 것이 아니라서 시가상자에 그린 것입니다.
풍경을 보고 강렬하게 느끼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형태와 색을 고갱의 지시대로 신속하게 그린 추상풍경화입니다.
구체적인 형태와 수많은 유사한 색조를 생략해도 우리는 이 그림이 연못 건너편을 바라보고 그리면서 건너편 나무들이 연못에 투영된 장면을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란색과 주홍색이 주로 사용한 데서 단풍이 든 가을풍경이란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연못을 주위를 돌아 화면 중앙 상단에 보이는 나무 아래로 걸어갔을 거라고 짐작도 할 수 있습니다.
추상화라고 해도 이만큼의 정보를 제공해준다면 이는 매우 성공적입니다.
세뤼지에는 기분이 좋아 이 그림을 파리로 가지고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했는데 정말 그가 고갱의 지시대로 그린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와 유사한 그림을 이후에 그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작품에 대한 칭찬은 고갱의 몫이어야 합니다.
세뤼지에는 작품의 제목을 <부적>이라고 했습니다.
<부적>을 아카데미 쥘리앙에서 함께 수학하는 친구들에게 보여주었고 모리스 드니는 “우리는 <부적>을 보자 모든 미술품을 변조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훗날 술회했는데
그만큼 회화에 자신이 생긴 것입니다.
형태와 색을 상징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 과거 화가들이 그린 것보다 훨씬 다르게 그릴 수 있다는 자신이 생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뤼지에와 드니는 친구들과 함께 ‘나비파 Nabis’ 그룹을 결성했는데 나비스Nabis는 히브리어로 예언자들이란 뜻으로 스스로를 회화의 예언자들임을 자처했고 당시 막 성행하기 시작한 아르 누보 발전에 한 몫을 했습니다.
여기서 잠시 세뤼지에가 누구이고 아르 누보가 무엇인지 살펴본 후 고갱의 이야기를 계속하겠습니다.
폴 세뤼지에Paul Serusier(1863~1927)는 파리에서 철학을 공부한 뒤 아카데미 쥘리앙에 입학했습니다.
회화에 관한 이론가이기도 한 그가 고갱을 만난 건 1888년 퐁타방에서였고 고갱의 상징주의 회화에 곧 매료되었습니다.
고갱을 만난 뒤 화가로서 눈이 열렸다고 말할 정도로 그는 고갱이 형태와 색을 상징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드니, 보나르, 뷔야르 등과 함께 ‘나비파’ 그룹을 창설한 후 그는 드니와 더불어 그룹의 이론가로 활약했습니다.
그는 1921년에 『회화의 ABC』를 출간했는데 색의 대비와 비례에 관한 체계를 정리한 책입니다.
아르 누보Art Nouveau는 ‘새 예술’이란 뜻으로 1880~1910년 유럽 전역에서 유행한 장식미술 양식을 일컫는 말입니다.
오늘날 유행하는 모든 디자인이 이 양식에서 출발하여 발전한 것입니다.
가구, 책에 사용되는 판화와 삽화 그리고 표지, 포스터, 벽지, 장신구, 보석, 유리제품, 부엌 용기, 건물 외부장식, 실내장식, 램프, 의상 등 우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세련된 디자인으로 보기 좋고 아름다우며 더욱 실용적이 되게 하는 양식이 성행하기 시작했는데,
‘나비파’ 그룹도 이런 디자인 분야에서 왕성하게 활약했습니다.
디자인이란 상징과 추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최소한의 선과 함축적 혹은 추상적 형태 그리고 상징적인 색으로 대상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호감이 가게 표현하는 것으로 고갱이 강조한 상징과 추상을 ‘나비파’ 그룹 외에도 초기 아르 누보 디자이너들이 활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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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중에서

천치가 아니면 천재일 거야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파리에서 태어났는데,
이 날은 ‘2월 혁명’으로 프랑스의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된 날로 거리에는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고 총격전이 벌어졌습니다. 고갱의 아버지 클로비는 『르 나시오날』 신문 정치부 기자로 혁명군을 지지했습니다.
혁명이 성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클로비는 페루로 망명하던 도중 페루의 수도 리마로 가는 배에서 10월 30일 동맥류파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한 살밖에 안 된 고갱은 아버지를 잃은 채 두 살 난 누나 마리, 어머니와 함께 리마에 도착했습니다.
어머니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외삼촌에게 자신과 어린 남매를 의탁해야 했습니다.
외할아버지가 따뜻하게 보살펴주었으므로 고갱은 부유한 환경에서 5년 동안 지냈습니다.
1854년 말 어머니는 남매를 데리고 프랑스로 돌아와 시아버지가 남긴 오를레앙의 유산을 인수하고 살았습니다.
이듬해 고갱은 오를레앙의 예수회 소속 학교에 입학하여 프랑스어를 배우며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했습니다.
훗날 고갱은 이 시절을 회상했습니다.
오를레앙에 살던 숙부는 키가 아주 작았고 이름은 이지도르였는데 사람들은 그분을 ‘지지’라 불렀다.
숙부는 종종 내가 페루에서 돌아와 할아버지 집에 살던 때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칼로 단도 손잡이를 깎아 조각을 새겨넣기도 했다.
어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작은 꿈들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웃의 노인이 놀라 소리쳤다.
“이 아이는 훌륭한 조각가가 될 거야.”
불행하게도 그분의 예언은 적중하지 못했다.
훗날 나는 오를레앙의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학교 선생님이 말했다.
“이 아이는 천치가 아니면 천재일 거야.”
하지만 나는 둘 중 어느 편도 아니었다.
생에 대부분을 화가로 살았으므로 조각가가 될 것이란 노인의 예언이 적중하지 못했다고 고갱은 술회했지만 말년에 나무를 깎아 제작한 조각품들은 매우 우수했으므로 선생님의 예언은 정확했습니다.

덴마크 여인과 결혼하다
유산을 다 소비한 후 고갱이 11살 때 어머니는 리세로 이주해 모자제조 공장에서 일했습니다.
고갱은 리세의 생메밍 신학교로 전학해야 했는데 규율이 매우 엄한 학교였습니다.
졸업 후 해군이 되기 위해 예비학교에 입학했고 어머니는 아들의 뜻을 꺾지 않았습니다.
그가 학교를 졸업한 건 17살 되던 1865년 12월이었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해군사관학교에 입학되지 못하고 상선대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해야 했습니다.
선실에서 근무했고, 그가 탄 배는 남아메리카로 항해했는데 한 살 때 아버지와 함께 페루로 향했던 항로였습니다.
1866년에 2등 항해사로 진급했으며 그가 승선한 배는 13개월 동안 지중해와 북극해 등 세계 전역을 누볐습니다.
고갱이 어머니의 타계소식을 접한 건 1867년 인도의 어느 항구에서였습니다.
어머니는 “주위 사람들의 거부감이 심해 언젠가 넌 고립되고 말 테니 모쪼록 하는 일에 정진하기 바란다”는 유언을 아들에게 남겼습니다.
아들이 타협을 모르고 자기 신념대로 행동하는 기질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끊임없이 노력할 것을 당부한 것입니다.

고갱은 1868년 해군에 입대했고, 프랑스 왕 나폴레옹 3세가 1870년 프로이센을 공격하면서 보불전쟁을 일으키자 그는 제롬 나폴레옹호를 타고 노르웨이와 덴마크 국경 근처에서 복무하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3세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켜 유럽에 맹위를 떨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입니다.
그의 장담과는 달리 프랑스는 전쟁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전쟁에 패한 프랑스 경제는 이후 여러 해에 걸쳐 매우 극심하게 나타나 실업자가 크게 증가했습니다.
1871년 4월에 제대하고 파리로 돌아온 고갱은 생클루 거리에 있는 집이 모두 불에 타 사라져버린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브레다 가에 사는 대부 귀스타브 아로사를 찾아갔는데 아로사는 어머니와의 친분으로 고갱과 마리의 후견인이기도 했습니다.
금융업자이면서 사진작가이기도 한 아로사는 현대화를 수집했는데 소장한 작품 중에는 들라크루아, 코로, 쿠르베, 용킨트, 피사로 등의 작품도 있었습니다.
그의 친구 중에는 유명한 사진작가 펠렉스 나다르도 있었으며 나다르는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전시회를 위해 자신의 작업실을 빌려준 사람입니다.
아로사는 고갱에게 베르텡의 은행에서 주식중개에 관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직장을 마련해주었고,
고갱은 부동산 처분과 주식을 사고파는 일을 했으며,
곧 유능한 사원으로 인정받았습니다.
25살 되던 해 고갱은 아로사 집안과 알고 지내던 23살의 덴마크 여인 메테 소피 가트를 만났습니다.
미모와 지성을 갖춘 메테는 자유분방하며 거침없는 성격으로 고갱과 비슷하지만 매우 합리적인 생활방식이 몸에 벤 여인이었습니다.
고갱이 메테를 만난 건 고갱의 조각가 친구 장 폴 오베의 아내가 운영하던 하숙집에서였습니다.
메테는 코펜하겐의 실업가 헤고르의 권유로 파리를 여행하던 중이었습니다.
고갱과 메테는 수개월에 걸친 연애 끝에 1873년 11월 22일 소샤 가에 있는 루터교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만 해도 메테는 고갱에게 화가로서의 재능이 있는 줄 몰랐고 또 작품을 수집하는 데 흥미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메테는 다만 파리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메테는 1874년 8월에 첫 아들 에밀을 낳고 3년 후 딸을 낳았는데 이름을 고갱의 어머니 이름 알린으로 지었습니다.
메테는 2년 간격으로 아들 클로비(1879년), 장 르네(1881년), 폴-롤라(1883년) 셋을 더 낳았습니다.
고갱은 알린을 무척 사랑했으며 타히티에 거주할 때 알린이 20살로 요절했다는 비보를 받고 몹시 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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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 중에서

고갱의 <누드 습작, 바느질하는 수잔>
 
고갱은 인상주의 그룹전을 관전한 후 회화에 더욱 정진하기 위해 파리의 서북쪽 퐁투아즈에 있는 피사로의 아틀리에로 가서 수학했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이 평소 존경한 좋아한 세잔을 만나 자신보다 9살 많은 그와 어울렸습니다.
고갱은 25살 때인 1875년 <퐁레나 다리와 퐁 드 그레넬레 다리 사이 파리의 센 강>을 그렸습니다.
문명이 자연에 어울리지 않다는 점을 시위라도 하는 것처럼 보이며 어머니 손을 잡고 걸어가는 어린 아들의 모습을 그려넣어 평화스러운 자연을 의도적으로 찬양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법으로 말하면 인상주의 특유의 쓱쓱 문지르는 붓질을 사용했습니다.
인상주의 방법은 한 마디로 빛이 사물에 닿아 부서지거나 굴절하며 반사하는 것을 영롱한 무지개색으로 묘사하는 것인데 이는 화가 자신의 시각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과학적 사실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갱이 1876년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은 보수주의자들의 심사를 통과하고 입선되었습니다.
살롱전에 입선하자 고무되어 더욱 회화에 전념하면서 화가로 전업할 것을 고려했습니다.
피사로는 고갱에게 인상주의 화가들을 소개했고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고전주의 화법을 완전히 버리고 자신의 고유한 기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고갱은 1879년 4월에 열린 제4회 인상주의 그룹전에 초대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 외에도 자신이 수집하고 있던 피사로의 작품 세 점도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이 전시회는 성공적이었으므로 아마추어 화가 고갱에게는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 해 여름 퐁투아즈에서 피사로와 함께 사과나무를 여러 점 그렸습니다.
그는 피사로의 영향을 받아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형적인 구성과 기법으로 그렸으며 야외에서 드로잉한 것을 작업실에서 완성했습니다.
그는 이 작품과 그 외의 작품들을 1880년 제5회 인상주의 그룹전에 출품했지만 평론가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룹의 리더 모네와 르누아르가 불참하고 고갱과 같이 덜 알려진 화가들이 많이 참여했기 때문에 작품의 질이 전반적으로 떨어져 평론가들이 전시회에 별로 비중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카미유 피사로(1830~1903)
교사로 유명하며 세잔과 고갱을 지도한 카미유 피사로는 1830년 7월 10일 덴마크의 식민지 미국 플로리다 주 남쪽 세인트 토마스(버진 아일랜드의 수도)에서 유대교 신자 가정의 프랑스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파리로 유학을 와 여러 학교에서 수학한 뒤 1847년에 세인트 토마스로 돌아갔다가 1855년에 다시 파리로 와서 영주했습니다.
그는 1859년에 모네를 만났으며 이후 두 사람은 인상주의 그룹의 리더가 되었습니다.
피사로만 여덟 차례에 걸친 인상주의 그룹전에 모두 참여했고 나이로 보나 정신적인 면에서 그룹 화가들에게 어버이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보불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으로 피신했는데 파리의 집에 있던 작품들이 모두 파괴되었습니다.
영국으로 피신한 모네를 그곳에서 만났으며, 두 사람은 영국의 풍경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고, 특히 터너와 컨스터블의 작품에 감동했습니다.

피사로는 1866~69년에 체류한 적이 있는 퐁투아즈에 1872년에 안주했고 근처 오베르에 살고 있던 세잔과 가까이 지내면서 수년 동안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1895년경 시력이 나빠져서 야외에서 그리는 것을 중단하고 실내에서 그렸으며 파리에서 그린 많은 작품이 창을 통해 바라본 풍경이었습니다.
그가 타계할 무렵에는 시력을 완전히 잃은 상태였습니다.

고갱은 집을 따로 세 얻어 아틀리에로 사용하면서 도자기를 제작하는 데 열의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공예가이면서 보석가인 장-폴 오베와 조각가 줄 어네스트 부일로에게서 조각을 배우면서 부일로의 아틀리에에서 처음 아내와 아들의 흉상을 석고와 대리석으로 제작했습니다.

고갱이 처음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린 작품은 <누드 습작, 바느질하는 수잔>(1880)으로 에드가 드가의 기교가 부분적으로 엿보여 그가 드가의 영향을 부분적으로 받고 있었음을 알게 합니다.
그는 빛의 강렬함을 영롱한 색조와 명암으로 묘사하며 빛에 의해 흩어지는 밝은 색들을 나타내기 위해 붓질을 짧게 했는데 바로 이런 점이 인상주의 화법인 것입니다.
그러나 빛의 흐름이 캔버스 전체로 확대되지 않은 걸로 봐서 이런 화법을 부분적으만 수용하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을 제6회 인상주의 그룹전에 출품했는데, 에밀 졸라의 제자이면서 상징주의 작가인 유이스망의 호평을 받자 매우 기분이 들떴습니다.

누드화를 그린 동시대 화가들 중 현실의 음조를 이보다 더 격렬하게 다룬 화가가 없다고 난 감히 단언할 수 있다.

그런데 옷을 모두 벗고 바느질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왜 누드로 그렸을까요?
이는 그리스 시대부터 내려온 전통입니다.
고대 그리스인은 전투를 하거나 운동하는 남자를 누드로 제작했는데,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전통이 르네상스 시대에 받들어져 미켈란젤로의 조각을 보면 다윗이든 예수 그리스도이든 누드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자크 루이 다비드가 이런 고전주의를 계승했으며 이를 신고전주의라고 해서 르네상스와는 구별하는데,
그는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그릴 때도 벗은 모습을 상상하고 스케치한 후 옷을 입히는 방법으로 그렸습니다.
인체를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화가와 조각가들이 미술공부를 할 때 누드를 그리거나 제작하는 이유는 인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서이며 인체를 통해 그 사람의 정신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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