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다>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이 반 고흐를 처음 만난 건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직후인 1887년 늦가을 돈도 바닥나고 병든 몸으로 슈페네커의 집에 묵고 있을 때였다.
고갱이 반 고흐와 테오를 만난 곳은 몽마르트르 화랑이 아니면 페티 불바드 전시회였던 것 같다.
혹은 두 곳에서 연거푸 만났을 수도 있다.
반 고흐와 테오는 1887년 12월에 슈페네커의 집으로 고갱을 방문하고 그의 작품을 직접 보았다.
테오가 부소&발라동 화랑에서 작품을 팔아주겠다고 한 것이 고갱에게는 한 가닥 희망이 되었다.
테오는 12월 말경 고갱의 작품을 화랑에 진열하면서 피사로와 기요맹의 작품 옆에 걸었다.
이때 전시된 고갱의 작품은 1885~86년 디에페와 브르타뉴에서 그린 <목욕하는 브르통 소년들>과 근래 마르티니크에서 그린 풍경화 <오고가는 사람들, 마르티니크>, <목욕하는 두 소녀> 등이다.

그때만 해도 고갱에게 반 고흐 형제는 신이 보낸 사자와도 같았다.
테오가 부소&발라동의 몽마르트르 지사에 발령받아 온 건 1886년 봄이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진 그는 영향력 있는 딜러로 곧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커미션을 받는 조건으로 고갱과 거래하고 몇 주 안에 세 점에 대한 값으로 900프랑을 지불했다.
<목욕하는 브르통 소년들>과 다른 한 점은 팔기로 하고 구입한 것이지만, 네 사람이 있는 풍경화 <망고 따기, 마르티니크>는 자신과 형이 수집하려고 구입했다.
반 고흐 형제가 많은 돈을 주고 작품을 구입하기는 이때가 처음으로 <망고 따기, 마르티니크>를 함께 사용하는 아파트의 응접실 소파 위에 걸었다.
고갱은 반 고흐에게 자신의 작품과 반 고흐의 작품을 교환하겠다고 약속했다.
고갱은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 두 점을 받고 1887년 여름에 그린 <연못가에서 At the Pond>를 반 고흐에게 주었다.
반 고흐는 <망고 따기, 마르티니크>와 <연못가에서>를 매우 소중하게 여겼다.
특히 <망고 따기, 마르티니크>가 마음에 들어 에밀 베르나르에게 그 작품이 “대단히 수준 높은 시”라고 했으며, 고갱의 작품에는 “부드럽고 놀라운 기질”이 나타나 있고 시각적 즐거움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으로 느낄 수 있는 “삶의 철학”이 담겨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반 고흐는 파리에서 베르나르와 툴루즈-로트레크와 어울렸지만 두 사람의 작품에는 호감을 가진 적이 없었다.

테오는 훌륭한 화가는 자연을 모방하거나 본 대로 모사하지 않고 자연과 대화하며 관람자로 하여금 스스로 바라보게 만든다고 했으며, 형과 마찬가지로 “고상한 시는 고통 속에서 탄생한다”면서 고갱을 이런 부류의 화가라고 했다.
반 고흐는 장 프랑수아 밀레를 그의 시대의 최고 화가로 꼽고 고갱을 동시대의 최고 화가로 꼽았다.
테오는 드가를 동시대의 최고로 밀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화가로 꼽았지만 반 고흐는 동생과 의견을 달리 했다.
반 고흐는 인간이 처한 상황이 미술에서 가장 훌륭한 주제가 되고 미술가의 최대 과제는 우리가 사는 생의 슬픔과 기쁨을 역사적 맥락에서 구현하는 가운데 희망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았으므로 드가를 칭찬에서 제외했다.

이 시기에 테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는데 형에게 매달 평균 200프랑에서 300프랑을 주고, 고갱에게는 매달 작품 한 점을 받고 150프랑씩 지불하기로 했다.
돈이 떨어지면 슈페네커와 메이어 드 한에게 빌려 쓰던 고갱에게 테오가 매달 지불하는 돈은 매우 요긴했다.
테오는 고갱에게 형과 함께 아를에서 지내도록 권유했지만 그것은 사실 반 고흐의 아이디어였다.
테오는 형의 제안에 동의했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고갱을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구제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테오는 고갱이 빚더미 위에 올라앉아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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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에서

알리스 캉

폴 고갱이 반 고흐와 함께 지내기 위해 아를로 온 것은 나뭇잎이 붉게 물든 1888년 10월 28일이었다. 고갱의 반 고흐의 노란집에 짐을 풀고 반 고흐를 쳐다보니 파리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초췌해진 것이 영락없는 수도승의 몰골이었다. 노란집에는 호두나무 침대 하나, 백송 침대 하나, 매트리스 두 개, 의자 열두 개, 거울이 하나 있었다. 반 고흐는 자신의 방은 수도원의 방처럼 꾸몄지만, 고갱을 위한 방은 해바라기 작품으로 장식하고 “진정 예술성이 풍부한 여인의 방”처럼 신경을 써 꾸며두었다.
고갱은 아를로 오기 한 달 전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 고흐가 시적 모티프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반해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시적 모티프라고 적으면서 감각이 자신을 화가의 지성적 힘이 미치지 않는 시적 상태로 이끌어준다고 했다. 모티프와 화화에 대한 이런 고갱의 철학적, 주관적, 내성적 요소에 관해 반 고흐는 고갱이 아를에 온 지 닷새 후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이 지내고 있는 브르타뉴가 놀라운 풍경의 시골이기 때문에 그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고 적었다.
아를 성벽 밖 남동쪽에는 알리스 캉 혹은 엘리시안 들판으로 불리는 고대의 공동묘지가 있다. 오렐리앙 거리를 따라서 로마인들을 묻었던 곳으로 초기 크리스천들에 의해 신성화되었다. 4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많은 주요 성자들이 이곳에 묻혔고 기적이 발생하는 거룩한 곳으로 널리 알려졌다. 알리스 캉에는 두 개의 예배당이 남아 있어 19세기 말까지 크리스천들이 순례하는 곳으로 알려졌다. 하나는 제뉠리아드 예배당으로 전설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아를의 첫 주교에게 나타났을 때 자신의 무릎 자국을 남겼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생오노라 예배당으로 1880년대까지 원래의 모습대로 남아 있었다. 이 예배당에는 팔각형의 종탑이 있다.
반 고흐와 고갱이 야외로 나가 처음 함께 그린 곳이 알리스 캉 공동묘지였다. 고갱이 아를로 오기 전 반 고흐가 이곳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없고 또한 이곳의 장면을 그린 적이 없어 그도 처음 고갱과 함께 이곳을 찾은 것으로 짐작된다. 길 양편에 포플러가 길게 늘어져 있고 나무 아래에는 석관들이 길게 줄지어 있다. 반 고흐는 10월 31일과 11월 초 사이에 이곳에서 그가 말한 “가을 풍경화” 네 점을 그렸으며 고갱은 두 점을 그렸다.
반 고흐는 생오노라 예배당을 멀리 바라보는 위치에서 캔버스를 세로로 길게 하고 석관과 포플러들이 만든 통로가 중앙이 되게 그렸다. 그는 석관과 포플러에 밝은색을 칠하면서 가장자리를 선으로 명료하게 했다. 가장자리를 선으로 틀이 되게 하는 방법을 그는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용했다. 1884년 누에넨에서도 이와 같은 구성의 <가을의 포플러 길>을 그렸다. 이 작품 역시 일렬로 기다랗게 자란 포플러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길이 생긴 풍경을 캔버스를 세로로 길게 놓고 구성한 것이며 멀리 길이 끝나는 곳에 집이 보인다.
또 다른 <알리스 캉>(고흐 368)은 좀더 가까이서 그린 것으로 역시 <가을의 포플러 길>과 유사한 원근의 구성이다. 애매하게 공간을 열어놓은 이 작품에서는 생오노라 예배당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앞의 그림에서는 사람 한 쌍에 초점을 맞추고 광경을 병렬하여 하나의 그림이 되게 했다. 왼편 나무 사이로 붉은색 지붕이 보이는 건물이 하나의 광경이고 길을 따라 멀리 생오노라 예배당이 또 하나의 광경이다. 그는 동시에 두 곳을 바라본 장면으로 그리면서 왼편 나무를 각이 지게 해서 공장의 굴뚝과 PLM 철도회사 건물이 보이도록 했다. 이 철도회사는 1888년에 건립되었다. 당시 알리스 캉 묘지를 찍은 엽서를 보면 포플러들이 촘촘히 줄지어 있어 반 고흐가 고의로 나무들 사이로 공간을 두고 PLM 철도회사 건물이 보여지도록 구성했음을 알 수 있다.
고갱도 같은 제목으로 그리면서 캔버스를 세로로 사용했는데, 사이즈가 반 고흐의 한 쌍이 있는 작품과 거의 비슷하지만 구성과 내용은 사뭇 다르다. 고갱은 반 고흐와는 달리 양편으로 늘어진 포플러 사이에서 그리지 않고 옆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리면서 복도처럼 나타나는 구성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위로 솟은 나무를 굽이치고 위로 편향되게 그리면서 팔각형의 생오노라 예배당 타워가 좀더 가까이 보이도록 구성했다. 약간 경사진 길 중앙에 세 여인이 있는데, 생기가 없어 보이며 잠시 걷기를 중단하고 화가와 관람자를 향해 똑바로 바라보는 모습이다. 검정색 외투, 보닛, 희색 칼라로 봐서 한눈에 아를 여인들임을 알 수 있다. 반 고흐의 한 쌍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고갱도 세 여인의 외곽을 선으로 분명하게 하지 않았으며 얼굴과 손을 점처럼 한 번의 살색 붓질로 생략하고 다리는 가려져 드러나지 않게 했다. 고갱은 반 고흐와는 달리 색을 가는 선처럼 작고 세로로 칠했는데 세잔의 영향이다. 고갱은 알뜰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줄무늬처럼 사용했다. 반 고흐도 세잔의 기법을 좋아했지만 그와 고갱의 동일한 제목의 그림에서 응용방법이 아주 상이하게 나타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고갱은 오른편 가장자리에 나무줄기를 그려넣어 옆으로 난 가지와 잎이 세 여인의 머리 위에 아치 모양의 덮개가 나타나도록 구성했는데, 이 또한 세잔의 영향으로 그가 반 고흐보다 세잔의 영향을 더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잔은 풍경화에서 곧잘 나무의 무성한 잎이 아치 모양을 이루어 평편한 구성에 대립시켰다.
반 고흐는 세잔의 개인적 진지함에는 영향을 받았지만 고갱과는 달리 그의 기교에 대해서는 비판을 가했다. 아를에서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반 고흐는 세잔의 전형적인 채색법이 고향의 풍물에서 비롯된 것이라면서 “세잔 자신이 시골의 일부분이 되어 그곳 풍물을 매우 친숙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아를을 사랑하게 되어 세잔이 프로방스의 독특한 색채를 발견한 것처럼 아를의 풍물을 독특한 색채로 그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세잔이 발견한 프로방스의 독특한 색채란 반 고흐에 의하면 껄껄한 면, 열에 흠뻑 젖은 하늘, 햇볕에 그을린 시골 풍경 등에 대한 적절한 묘사였다.(고흐 371)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 고흐는 세잔의 방법이 불충분하다고 보았다. 그해 늦여름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세잔의 불충분함으로 “소심하고 신중한 붓질”을 꼽았으며 이를 자신의 효과적인 양식과 비교했다. 평온한 가운데의 붓질보다는 사고의 격렬함을 나타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베르나르에게 물었고 또 무의식적으로 작업할 때 그렇게 규칙적인 붓질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었다.
세잔의 규칙적인 채색법과 반 고흐의 기분 내키는 대로의 채색법의 차이는 곧 고갱의 <알리스 캉>과 반 고흐의 <알리스 캉>의 차이이기도 하다. 행위적으로 붓질을 하느냐 규칙적으로 신중하게 붓질을 하느냐 하는 것이 함께 작업하면서 발견한 회화에 대한 반 고흐와 고갱의 상이한 견해로, 두 사람은 방법론에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고갱은 밀도가 높고 두텁게 색을 칠하는 반 고흐의 방법에 격앙하여 반 고흐의 “난잡하고 단단하게 굳히는” 채색법을 비판했다. <알리스 캉>을 그린 지 몇 주 후 고갱은 베르나르에게 적었다.
“빈센트와 내가 동의하는 것은 별로 없고 회화에 관해서는 특히 동의하는 부분이 거의 없어, ... 색으로 말하면 그는 몽티첼리가 사용했듯이 두텁게 칠하는 가운데 우연히 생기는 효과를 좋아하지만 나는 캔버스에 색을 칠하고 또 칠하는 방법을 혐오한다.”
고갱의 <알리스 캉>을 보면 브르통에서 사용하던 채색법을 아를에 와서도 그대로 사용했음을 본다.반 고흐는 지역에 따라 적당한 채색이 있다고 본 데 비해 고갱은 한 가지 채색법으로 모든 지역의 풍물을 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고갱의 <알리스 캉>에서 즉흥적인 채색이 발견되는데, 나무줄기 외에도 하단 왼편 가장자리에 그려진 흰색 부분이다. 파란색과 푸른색 사이에 물의 흐름을 막은 제방을 흰색으로 처리했다. 이런 비자연적인 요소는 브르통에서 그린 그림에서도 이미 나타난 적이 있다. 반 고흐와 고갱의 <알리스 캉>에는 자연주의를 배척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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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도서출판 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은 죽기 얼마 전 마지막 글을 남겼다


야성을 송두리째 잃고 본능과 상상력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감히 창조할 자신이 없던 생산적 요소를 찾아 이 길 저 길을 헤매고 다녔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혼자 있으면 소심해지고 당혹감에 빠지는 무질서한 군중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독은 아무에게나 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고독을 견디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기 위해선 끈기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내게는 하나 같이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므로 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무도 내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고 그래서 난 아는 게 별로 없다고!
하지만 조금을 알아도 그것이 나만의 지식이란 사실이 내게는 소중하다.
그 조금을 갈고 닦으면 거기서 위대한 무언가가 생겨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1903. 4)

고갱은 4월 중순 작품들을 볼라르에게 보냈다. 잠을 청하기 위해 약을 먹고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8일 동안 집에 혼자 있었는데 4월 30일 갑자기 어지러운 경련을 견딜 수 없어 이웃이 들을 수 있도록 커다란 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그는 이웃에게 목사 베르니에르를 불러달라고 청했다.
베르니에르가 달려와 보니 고갱이 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고갱은 밤낮을 구별하지 못한 채 헛소리만 질렀는데 동맥이 터진 것이었다.
고갱을 도와 ‘쾌락의 집’을 지은 이웃의 티오카는 매일 눈여겨보았는데 그가 밤낮으로 헛소리를 하자 5월 8일 아침 베르니에르에게 연락하여 와서 고갱을 보라고 했다.
티오카는 그날 아침 늦게 고갱에게 갔고 고갱은 이미 숨진 상태였다.
주교 마틴이 장례식을 집도했다.
고갱은 마틴을 미워한 적이 있는데 이유는 고갱이 교회의 전속학교 여학생들에게 추파를 던진다고 마틴이 비난했기 때문이다.
마틴은 간소하게 장례식을 마친 후 교인들에게 주보를 나눠주었는데 주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아무런 흥미 있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갱이라고 하는 사람의 급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예술가이며 신의 적이고,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고갱의 유해는 그곳 가톨릭 공동묘지로 옮겨졌으며 십자가 아래 묻혔다.
주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는데 고갱이 묘비를 가질 만한 인물도 못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묘비912가 세워진 것은 20년 후였다.
행정사무관은 고갱의 유작들을 타히티의 수도 파페에테에서 경매를 통해 처분했다.
경매를 담당한 공무원은 화가 한 사람을 고용해 유작을 분류했는데 화가는 유작 대부분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도로 꺼내 경매에서 처분했다.
그 화가의 말로는 작품 대부분이 대가의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춘화와도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행자와 그곳에 거주하던 프랑스인들, 그리고 파리에서 서둘러 온 친구와 화상들이 경매에 참여해 작품을 헐값에 구입했다.
그때 유작들이 모두 팔렸으므로 1965년 고갱이 거주한 적도 없는 파페아리에 고갱 박물관이 건립되었을 때 작품은 없고 사진들만 전시해야 했다.
고갱의 타계소식이 파리 사람들에게 알려진 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개월이 지난 후였다.
그가 위대한 화가임을 알아본 볼라르는 그동안 구입해온 약 100점의 작품과 드로잉을 1903년 자신의 화랑에서 소개했다.
그는 투자면에서 고갱의 작품을 사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해 몇 년 전부터 다른 화상들이 소유한 고갱의 작품을 구입해왔다.
볼라르는 1906년 그해 창설된 가을전 Salon d’Automne을 통해 고갱을 회고전을 개최하면서, 무려 227점을 소개했다.
1906~7년에 베를린과 비엔나에서 회고전이 개최되었고 1908년에는 모스크바에서 개최되었다.
고갱은 먼저 타계한 반 고흐와 함께 후기인상주의의 대가 한 쌍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다.
고갱이 대중은 자기에게 빚이 없지만 화가들이 자기에게 빚이 있다고 주장한 이유는 창작을 위한 예술가의 자유를 자신이 한껏 확장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원시적인 순진한 표현, 유연한 선의 사용, 밝은 색의 사용, 색들의 대비, 이차원적 화법, 추상에 대한 탐험 등은 그가 확장시킨 예술가의 자유에 대한 구체적인 것들이었다.
20세기 미술의 쌍둥이 아버지라 불리는 마티스와 피카소는 자신들이 원시주의를 20세기 미술에 소개했다고 내세웠지만 원시주의를 먼저 유럽에 소개한 사람은 고갱이었다.
훗날 『태고의 존재』, 『묘석』, 『르네레』 등의 저서를 남긴 빅토르 세갈렌은 스물다섯 살 때 해군 군의관의 신분으로 고갱이 사망한 이듬해 아투오나에 찾아가 고갱의 ‘쾌락의 집’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
그의 글을 통해서 고갱이 마르키즈 군도에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장-폴 고갱은 괴물이었다.
다시 말하면 대부분의 인간을 묘사하는 데 충분한 그 어떤 도덕적·지적·사회적 범주에도 끼워 넣을 수 없는 그런 인간이었다.
범속한 무리에게는 판단이 곧 규정을 의미한다.
당신은 존경받는 사업가이거나, 청렴결백한 공직자이거나, 재능 있는 화가이거나, 가난하지만 정직한 보통 사람이거나, 양가집 규수다. 당신은 ‘예술가’일 수도, 심지어는 ‘위대한 예술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서부터가 까다롭다.
조금이라도 다르게 되는 건 용납되지 않는다.
범주화에 필요한 상투적 문구가 바닥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갱은 괴물이었다.
철저하고 오만한 괴물이었다.
한 가지 면에서만 예외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신체 에너지는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 맴돈다.
일상의 나머지 부분(집안 일, 의례적인 방문, 의무감)에서 그들은 전통적이며 평범하다.
이는 기질의 문제, 육체적인 타성의 문제다.
탁월한 재능을 겸비한 격정적인 작가가 왜소한 교회 관리인처럼 생겼을 수 있다.
천재가 반드시 빈틈없고 정확한 사람처럼 보이라는 법은 없다.
고갱은 이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말년의 그는 야심에 차 있으면서도 고통스러워하는 영혼으로 보였다.
그의 가슴은 올바름을 좇았지만 아무런 보답이 없었다.
그는 본인들이 마다하는데도 약자를 도우려고 했다.
도도했지만 남들의 의견과 판단에 어린애처럼 민감한 반응을 나타냈다.
그는 원시적이었으며 거칠었다.
매사에 변덕스러웠으며 극단적이었다. …
고갱은 문둥병으로 죽지 않았다.
여하튼 그가 걸린 수많은 병명을 일일이 거론한다는 건 부질없는 노릇일 것이다.
그는 단순히 병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병은 내면의 갈등과 패배감으로 악화되었던 것이다. 
어린애 같은 갈등은 사소한 분쟁에 휘말린 이 숭고한 투사를 갉아먹었으며, 소송에서의 패배는 영광으로부터의 추락처럼 이 순수한 예술가가 감내하기에는 너무 벅찼다.
이제 섬의 황량한 심장부로 이어지는 웅장한 계곡은 저승사자의 길처럼 보인다.
부서진 축대 위의 키 작은 판잣집들은 자신들의 토착신이 죽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이제 인간의 죽음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구름 한 점 없는 어느 서늘한 아침, 고갱도 그곳에서 죽었다.
고갱과 가까웠던 티오카라는 친구가 향기로운 꽃송이를 고갱의 머리에 두른 후 관습을 따라 고인의 몸을 모노이 기름으로 닦아낸 다음 구슬프게 뇌까렸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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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 인상주의 화가로 활약하다>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피사로는 고갱에게 대상을 한 장소에서만 관망하지 말고 왼편이든 오른편이든 옆에서 바라보는 장면으로 그리라고 권유했다.
그런 식의 구성은 일본의 무로마치室町 시대부터 에도江戶 시대 말기(14~19세기)에 서민생활을 기조로 제작된 회화 양식인 우키요에浮世繪의 대표적인 인물들 가츠시카 호쿠사이(1760~1849)와 안도 히로시게(1797~1858)의 판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당시 많은 프랑스 화가들이 판화 복사본을 통해 일본화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인물이 부차적으로 중요한 풍경화와 역사화를 주로 그린 호쿠사이는 1826~33년에 <후지 산 36경>을 완성했는데, 이 역작 판화는 후지 산을 배경으로 다양한 삶의 현장을 묘사한 것들이다.
소방대 감독관의 아들로 태어난 히로시게는 호쿠사이만큼 뚜렷한 개성으로 주목받은 화가는 아니지만 차분한 방식으로 그에 버금가는 걸작을 남겼다.
그는 일본 통속화의 전통을 좇아 온화하고 시적인 독특한 풍경화를 창안해냈다.
마네, 모네, 드가, 반 고흐를 포함하여 아주 많은 화가들이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모네의 대성당, 포플러, 건초더미, 수련 연작은 호쿠사이의 연작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1879년은 고갱에게 화가로서 운명을 시험받는 중요한 해였다.
피사로가 인상주의 화가들을 고갱에게 소개하면서 1879년 4월에 열릴 제4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참여하라고 권했다.
고갱은 흥분했다.
프랑스 화단에 입지를 이미 마련한 화가들이 대거 참여하는 전시회에 자신이 포함되는 건 영예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전업화가들이고 자신은 아마추어 화가이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과 자신의 것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벽에 걸리는 건 전업화가와 동등한 대우를 받는 걸 의미한다.
고갱은 작품을 출품하면서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피사로의 작품 세 점을 피사로의 요청으로 함께 출품했다.
전시회에 세잔, 르누아르, 시슬레는 불참했다.
전시회는 성공적이었으며 고갱은 매우 고무되었다.

그해 여름 고갱은 퐁투아즈에서 피사로와 함께 작업하면서 사과나무를 여러 점 그렸다.
<사과나무 Apple Trees>를 4년 전에 그린 어머니가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가는 그림과 비교하면 양식에 변화가 생긴 걸 볼 수 있는데 피사로의 영향이다.
피사로가 1877년에 그린 <퐁투아즈 근처 에르미타주의 황소언덕 The Cote des Boeufs at L'Hermotage, near Pontoise>은 고갱의 주제와는 전혀 다르지만 붓질을 비교하면 고갱이 피사로의 영향을 받았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붓질이 짧아지고 순색이 사용되었다. 피사로의 붓질이 더 정교하며,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도 복잡하고 공간에 대한 깊이감이 있으며 명암이 현저하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스승의 작품이 우수한 건 당연하다.
주제로 말하면 고갱의 작품은 진부하기 짝이 없다.
사과나무 세 그루로 화면에 가득 채웠는데 특별한 형태를 지닌 나무도 아니고 원근이 제대로 묘사되지 못했으며 실루엣의 효과는 충분히 나타나지 못했다.
피사로의 작품에서는 곧게 뻗은 여러 그루 나무가 자연에 커튼을 친 듯한 가운데 뒤로 붉은색 지붕을 한 가옥들이 안정감 있게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보여 삶과 자연의 조화가 적절하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원근은 물론 명암이 미세한 곳에까지 두드러지게 묘사되었다.
과연 풍경화의 대가다운 면모를 보여준다.

고갱은 피사로와 함께 야외로 나가 풍경을 그리면서 그의 영향 하에 사물을 오랜 시간을 두고 치밀하게 관찰하며 빛의 반사에 의해 대상이 다양한 색으로 발하는 걸 보고 색을 섞어 사용하는 색채분할법을 익혔다.
피사로의 둘째 아들 조르주 만자나 피사로가 1881년경에 <인상주의 화가들의 피크닉 Impressionists' Picnic>이란 제목으로 그린 드로잉을 보면 앉아 있는 피사로 왼편에 아르망 기요맹Armand Guillaumin(1841~1927)이 있고, 그 옆에 고갱이 서있으며, 오른편에는 세잔이 이젤 앞에서 풍경을 그리고 있고, 세잔의 아내가 어린 만자나를 보살피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만자나가 여러 해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해서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갱이 피사로 외에 인상주의 화가들과 함께 야외에서 작업했음을 알게 해준다.
기요맹은 상업에 종사하다가 아카데미 쉬스에서 회화를 배웠고, 피사로, 세잔 등과 함께 회화에 전념했다.
1863년 낙선전이 처음 개최될 때 출품했으며, 1874년 제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한 뒤 인상주의 화가로 활약했다.
그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전원과 바다 풍경을 주로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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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의 최후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이 1902년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들 가운데 <해변의 승마자들 Horsemen on the Beach>은 동일한 제목으로 그린 두 점이다.
동물과 사람의 친근한 관계를 은유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승마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수평선으로 캔버스를 나누었으며 말들의 자유로운 동작으로 사람과 동물, 그리고 자연의 조화를 꾀했다.
<해변의 승마자들>은 마르키즈의 남자와 여자들이 말을 타고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 장면은 드가가 경마장에서 그린 그림을 상기하게 하는데 고갱은 드가의 작품을 좋아했고 그의 그림을 찍은 사진을 참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갱은 <해변의 승마자들>을 그리고 몇 달 후 쓴 편지에서 “사람들이 드가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리지만 드가는 이를 탓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는 드가의 작품을 모방하면서도 전혀 색을 달리 사용하여 새로운 그림으로 만들었으며 무엇보다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창안해냈다.
웃통을 벗은 세 명의 현대 폴리네시아인이 관람자를 향해 등진 모습으로 핑크색 모래사장을 나아가 다른 장소에서 달려온 두 기사와 만나는 장면이다.
백마를 탄 두 사람의 의상은 독특한데 노란색과 오렌지색의 모자가 달렸고 바지는 아주 짧다.
폴리네시아인의 의상이라기보다는 영국인의 의상을 개조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런 의상의 승마자를 1901~02년 변형드로잉으로 제작한 적이 있다.
고갱은 자신의 작품이든 다른 예술가의 작품이든 응용함으로써 창작에 있어 과거로 거슬러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이 섬에서 제작한 많은 작은 그림에서 초기에 사용했던 모티프를 발견하기란 쉽다.
이는 팔기 쉬운 작품을 볼라르에게 많이 보내려고 한 데서 생긴 일이라고 짐작된다.
1902년 3월 볼라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곧 작품을 배편으로 보내겠다면서 몇 점은 약간 중요한 것들이고 나머지는 그것들을 이용한 소품들이라고 했다.
아파트 공간이 좁아서 소품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작한 것들이라면서 작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큰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엄살을 부리기도 했다.
볼라르는 그에게 캔버스, 접착제, 화선지 등을 보냈고 고갱은 그것들이 사용할 만하다고 답장하면서 특정한 물감이 떨어졌으니 속히 보내라고 했다.
볼라르에게 스무 점을 보냈는데 그 가운데 <붉은 망토를 두른 마르키즈 남자 Marquesien a la cape rouge>와 <일광욕하는 사람들>은 약간 다른 풍경을 배경으로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남자를 주제로 한 것들이다.
붉은 망토를 두른 남자는 신부 하아푸아니로 알려졌다.
1902년 8월 25일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라르에게 보낸 큰 캔버스를 언급하면서 “매우 공을 들여 제작했다”고 적었는데 그 해에 제작한 큰 캔버스는 두 점이다.
그중 중 하나가 <부름 The Call>(고갱 902)이다. 강가에 벗은 몸으로 관람자를 향해 등을 돌린 여인은 미역을 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면 중앙에 두 여인이 걸어가는데 가슴을 드러낸 여인은 왼팔을 올려 손가락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시하는데 누군가를 보고 오라고 부르는 모습이다.
걷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은 그의 변형드로잉에서도 발견된다.
<옛날 옛적 이야기 Barbarous Tales>는 고갱이 마르키즈 섬에서 그린 것들 가운데 걸작으로 꼽을 만한 것이다.
화면 중앙에 두 여인이 앉아 있는데 오른쪽 빨간 머리의 여인은 <부채를 든 소녀>의 모델 토호타우아이다.
그녀 옆에 부처의 자세로 가부좌를 튼 여인은 실제 여인이 아니라 고갱이 갖고 있던 보로부두르 릴리프 사진의 인물을 삽입한 것이며, 뒤로 맹수의 발톱과 여우의 붉은 머리와 수염, 신부 복장에 초록색 눈을 한 그로테스크한 합성물의 존재는 1895년에 사망한 친구 화가 메이어 드 한이다.
1903년 2월 몽프레에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과거에 보았던 것, 들었던 것, 생각했던 것들을 머리에 떠올린다고 했다.
그의 그림에서 과거에 대한 회상과 애착이 보인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술을 마셨고 타계하기 몇 달 전부터 아편을 복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타계한 후 집 옆 우물에서 모르핀이 든 유리병, 주사기, 편두통 치료제가 든 병, 설사와 구토 또는 배앓이를 진정시켜주는 뉴욕 로체스터에서 생산한 ‘뱀 기름’이 든 병 등이 발견되었다.
타계하기 전 몇 달 동안 심한 고통에 몸부림쳤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갱은 죽기 얼마 전 마지막 글을 남겼다.
야성을 송두리째 잃고 본능과 상상력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감히 창조할 자신이 없던 생산적 요소를 찾아 이 길 저 길을 헤매고 다녔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혼자 있으면 소심해지고 당혹감에 빠지는 무질서한 군중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독은 아무에게나 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고독을 견디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기 위해선 끈기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내게는 하나 같이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므로 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무도 내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고 그래서 난 아는 게 별로 없다고!
하지만 조금을 알아도 그것이 나만의 지식이란 사실이 내게는 소중하다.
그 조금을 갈고 닦으면 거기서 위대한 무언가가 생겨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1903. 4
고갱은 4월 중순 작품을 볼라르에게 보냈다.
잠을 청하기 위해 약을 먹고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8일 동안 집에 혼자 있었는데 4월 30일 갑자기 어지러운 경련을 견딜 수 없어 이웃이 들을 수 있도록 커다란 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그는 이웃에게 목사 베르니에르를 불러달라고 청했다. 베르니에르가 달려와 보니 고갱이 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고갱은 밤낮을 구별하지 못한 채 헛소리만 질렀는데 동맥이 터진 것이었다.
고갱을 도와 ‘쾌락의 집’을 지은 이웃의 티오카는 매일 눈여겨보았는데 그가 밤낮으로 헛소리를 하자 5월 8일 아침 베르니에르에게 연락하여 와서 고갱을 보라고 했다.
티오카는 그날 아침 늦게 고갱에게 갔고 고갱은 이미 숨진 상태였다.
주교 마틴이 장례식을 집도했다.
고갱은 마틴을 미워한 적이 있는데 이유는 고갱이 교회의 전속학교 여학생들에게 추파를 던진다고 마틴이 비난했기 때문이다.
마틴은 간소하게 장례식을 마친 후 교인들에게 주보를 나눠주었는데 주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아무런 흥미 있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갱이라고 하는 사람의 급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화가이며 신의 적이고,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고갱의 시신은 가톨릭 공동묘지 십자가 아래에 묻혔다.
주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는데 고갱이 묘비를 가질 만한 인물도 못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묘비가 세워진 것은 20년 후다.
행정사무관은 고갱의 유작을 타히티의 수도 파페에테에서 경매를 통해 처분했다.
경매를 담당한 공무원은 화가 한 사람을 고용해 유작을 분류했는데 화가는 유작 대부분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도로 꺼내 경매에서 처분했다.
그 화가의 말로는 작품 대부분이 대가의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춘화와도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행자와 그곳에 거주하던 프랑스인, 그리고 파리에서 서둘러 온 친구와 화상들이 경매에 참여해 작품을 헐값에 구입했다.
그때 유작들이 모두 팔렸으므로 1965년 고갱이 거주한 적도 없는 파페아리에 고갱 미술관이 건립되었을 때 작품은 없고 사진들만 전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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