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 고흐와 초상화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188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신의 귓불을 자르는 소동을 벌인 후 반 고흐는 생폴 드 모솔 요양원에 1년 동안 입원해야 했다.
그는 입원 중 네 차례의 발작을 일으켰다.
당시 요양원에는 서른 개의 병실이 비어 있었으므로 그 중 하나를 아틀리에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작업할 때 환자들이 괴성을 지르며 벽을 두드리고 발광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환자들의 계속되는 광적인 고함소리, 곰팡이 냄새, 보잘 것 없는 음식 등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환청과 환각증세를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품 때문에 낙담하기도 했는데 “그림이 원하는 대로 그려지지 않을 때 엄청난 자책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닥터 페이롱은 테오에게 보낸 1889년 5월 26일자 편지에서 반 고흐가 처음에는 고통스러운 악몽을 꾸고 몹시 성을 냈지만 이제 많이 나아졌다고 보고했으며,
페이롱은 6월 5일 반 고흐에게 요양원 바깥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했다.

반 고흐는 9월 초 테오에게 다른 환자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작업실에 들어앉아 있으며 다만 간병인들 가운데 책임자인 트라부만 정기적으로 만난다고 했다.
9월 3일자인 듯한 이 편지에서 트라부에 관해 언급했다.
트라부는 환갑에 가까운 나이였고 1896년 9월 25일 생레미에서 사망했다.

“어제 간병인 중 책임자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의 아내의 초상도 그리게 될지 모르는데 이들 부부는 요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작은 집에 살고 있다.
트라부의 얼굴은 아주 흥미 있게 생겼으며 ...”

반 고흐는 트라부의 얼굴을 르그로의 <스페인 최고 귀족>에 비유했다.
그는 트라부가 콜레라가 빠르게 확산될 무렵 두 차례에 걸쳐 마르세유의 병원에 근무하면서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을 지켜봤기에 그의 얼굴에는 차분함이 있다고 적었다.
그는 트라부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귀조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했는데, 귀조는 제임스 드롬골 린턴이 1872년에 그린 <프랑스의 두 베테랑 정치가: 티에르와 귀조>에서의 키 작은 사람을 말한다.
그는 이런 얼굴은 평범한 사람의 대표적인 얼굴이라고 했다.
트라부의 초상은 자신의 얼굴과 비교된다면서 반 고흐는 그의 초상을 그리기 전날 <자화상>을 그렸다.

반 고흐는 닷새 동안 트라부의 초상을 두 점 그렸는데 한 점은 트라부가 의자에 앉은 실제 모습을 그린 것으로 현존하지 않고 테오를 위해 복제한 것만 남아 있다.
빠르게 복제하면서 배경을 청록색과 핑크색으로 대충 칠했다.
그는 자화상을 그린 지 닷새 후 <트라부 부인의 초상>도 그렸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부인의 모습도 의자에 앉은 실제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것 또한 현존하지 않고 복제한 것만 남아 있다.

트라부 부부의 초상화는 생레미에서 반 고흐가 성취한 수준 높은 작품이다.
환자들을 돌보는 트라부의 깡마른 얼굴을 묘사하면서 줄무늬 옷이 그의 성격을 나타낼 수 있도록 상징적 요소로 부각시켰다.
사실적 방법으로 묘사한 얼굴과 상징적 옷이 한데 어울려 트라부는 극중 인물처럼 나타났다.

후기 인상주의의 주요 인물로 세잔, 고갱, 반 고흐를 꼽을 수 있다.
이들 세 명은 인상주의에 대해 매우 다양하게 반응했는데,
“인상주의를 미술관 속의 그림처럼 단단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한 세잔은 회화의 구조에 몰두했으며,
고갱은 “자연주의의 지독한 결점”을 버리고 색채와 선의 상징적 사용을 탐구했다.
반 고흐의 자유로운 감정의 폭발은 표현주의의 원천이 되었다.
후기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로저 프라이가 1910~11년 런던의 그래프턴 화랑에서 자신의 기획으로 열린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전’의 명칭으로 1880년경부터 1905년경 인상주의로부터 발전된 혹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발생한 다양한 회화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반 고흐가 1890년 7월 29일 자살로 37해의 생을 마감한 후 20년 동안 그의 영향은 프랑스 표현주의 혹은 야수주의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매우 컸으며 특히 반 고흐의 초상화가 그들에게 표현을 위한 장르로 즐겨 사용되었다.
1905년 야수주의를 이끈 앙리 마티스가 그린 <마티스 부인의 초상>은 반 고흐의 표현적인 채색의 영향이었고, 물감을 짧게 끊어서 사용한 것 외에도 색을 표현의 언어로 사용한 것 또한 반 고흐의 영향이었다.
마티스는 이런 표현적인 색의 언어를 풍경화에도 적용했다.
색이 좀더 밝아진 것은 마티스의 개성에 의한 것이지만 색의 문법은 반 고흐의 것을 그대로 따른 결과이다.
마티스의 밝은 색 사용은 그를 따른 젊은 화가들에 의해서 확산되었으며 앙드레 드랭과 모리스 블라맹크도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아 색을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두 사람이 그린 상대방의 초상과 자화상에서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반 고흐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1905년 파리에서 개최된 반 고흐의 회고전을 통해서였다.
45점의 유화와 드로잉이 함께 소개된 이 회고전은 파리의 화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의 계기가 되었다.
회고전을 보고 충격을 받은 블라맹크는 “난 반 고흐를 나의 아버지보다 더 사랑한다”고 했다.
마티스는 베른하임 화랑에서 반 고흐의 작품을 보았는데 그곳에서 블라맹크와 드랭을 만났다.
세 사람 모두 반 고흐를 자신들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마티스는 새로운 회화가 들라크루아로부터 반 고흐와 고갱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며 폴 세잔이 최종적으로 볼륨 있는 색을 선보였다면서, 이들로부터 색을 감성적 힘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반 고흐의 영향은 독일 화가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896년 독일 뮌헨으로 이주해온 러시아 화가 알렉세이 야블렌스키는 파리의 회화 경향에 정통했으며 프랑스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반 고흐의 강렬한 감성을 나타내는 색의 사용에 영향을 받았다.
그가 1905년에 그린 <곱추>에서 반 고흐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반 고흐를 자신의 선구자로 삼고 다리 그룹을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독일 표현주의를 표방한 독일 화가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에리히 헥켈, 칼 슈미트-로틀루프였다.
세 사람 모두의 <자화상>은 반 고흐의 영향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가브리엘 뮌터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함께 조금 늦게 새로운 미술운동 청기사 그룹에 속했으며 그녀도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표현주의는 공교롭게도 같은 해인 1905년 마티스를 중심으로 야수주의 화가들과 키르히너를 중심으로 한 다리 그룹 화가들에 의해 프랑스와 독일에서 동시에 미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표현주의는 양식이 아니라 미술운동이었다.

1912년 드레스덴과 뮌헨에서 반 고흐의 작품 125점이 소개된 후 그의 영향은 독일 화가들에게 매우 크게 작용했다.
야블렌스키가 1912년에 그린 <자화상>에서는 독일의 어느 화가보다도 반 고흐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때 받은 영향이 야블렌스키로 하여금 향후 표현주의 화가가 되게 했다.
반 고흐의 영향은 북유럽 화가들에게 크게 작용했으며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도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평생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는 1907년에 <자화상>을 그렸는데 반 고흐의 자화상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그리면서 자신 특유의 각이 진 입체주의 방법을 혼용했다.
피카소는 영화에서 클로즈업하듯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서 조명한 것처럼 묘사하면서 반 고흐와 마찬가지로 단번에 그렸다.

1913년 리투아니아에서 파리로 온 러시아 화가 샤임 수틴은 반 고흐, 아프리카 조각, 세잔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초상화에서 반 고흐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그의 <모이세 키슬링의 초상>은 반 고흐의 <요제프 룰랭의 초상>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파리 보헤미아 화가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수틴은 야수주의와는 별도로 밝은 색을 사용하는 표현주의 회화를 추구했으며 색을 거의 추상적으로 사용했지만, 붓질을 짧게 그리고 거칠게 사용하는 것은 반 고흐의 영향이었다.
이후 수틴이 그린 초상화에서 감동을 주는 표현적인 색채는 반 고흐의 영향을 나름대로 추상적인 색으로 진전시킨 것이다.

클림트, 쉴레와 더불어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오스카 코코슈카도 일찍이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현대인의 정신분열을 모티프로 즐겨 삼은 코코슈카에게 반 고흐의 강렬한 색채의 사용은 관심 밖일 수 없었다.
그가 1907년에 그린 <늙은 히르시그>는 그가 아직 색을 거칠게 사용하기 전의 작품으로 조심스럽게 반 고흐의 채색법을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반 고흐의 다양한 색의 효과를 응용하여 자신의 모티프를 강렬한 이미지로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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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폴 고갱(1848~1903)은 말년에 타히티에서 외롭게 지내면서 많은 산문을 썼다.
더러는 반항적인 태도로 썼지만 그의 지성의 깊이와 인생관을 파악하기에 적절한 산문도 있다.

“인생이란, 사람이 의지를 갖고 실천하는 것에 따라서, 아니, 최소한 그 사람이 지닌 의지만큼만 의미를 갖는 것이라 생각된다.
미덕, 선, 악 따위는 말뿐이다.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깊이 캐묻고 부서뜨려서 어떤 건물을 세우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실행할 방법을 모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창조주의 손에 일신을 맡기는 것, 그것은 소멸되는 것이며 죽는 것이다. ...
누구도 선하지 않으며 누구도 악하지 않다.
존재방식은 다르더라도 모두가 같다.
지도자의 모사들이 그 반대의 말을 했는지 어떤지는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의 생애는 부질없이 짧더라도 위대한 일을 하기에는 충분하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참여하는 공동의 일에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회화와 문학은 작가의 자화상이다.
사상은 작품을 위해서만 눈을 갖고 있을 뿐이다.
모든 사람에게 신경을 쓰면 작품은 짜부러지고 만다.“

1897년 4월 고갱은 아내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사랑하는 딸 알린이 전염성 폐렴으로 여러 날을 앓다가 그해 1월 19일에 사망했다는 비보였다.
그는 알린의 사진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스무 살의 딸이 타계했다는 비보를 받고 몹시 울었다.
이 소식은 한동안 그를 괴롭혔고 자살을 생각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늘어가는 빚과 결막염 등 악화된 건강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딸의 죽음이 그를 절망으로 떨어뜨렸다.
고갱은 1897년 12월 자살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비소를 먹었으나 다 토해내고 고통 속에서 깨어났다.
또한 자살하려고 집을 나서 산으로 갔고 그곳에서 죽을까 했는데, 그렇게 되면 개미들이 자신의 시신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것 같아 독약을 많이 마셨는데 심하게 토하느라 독약이 도로 밖으로 나왔는지 그날 밤 지독한 고통을 겪다가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자살을 시도하기 전에 거의 4m 가량 되는 커다란 캔버스에 인생의 불가사의함을 묘사했다.
그에게는 유언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파리에서 자신의 작품을 관리 매매하는 다니엘 드 몽프레에게 1897년 12월부터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죽기 전에 구상하고 있는 큰 그림을 마치려 하며 한 달 내내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밤낮으로 작업에 열중하고 있네.
오 하나님, 내가 그리고 있는 건 퓌비 드 샤반이 실재 삶으로부터 드로잉한 만화 같은 그런 따위의 준비과정을 통해 그린 것과는 다르네.
매듭과 주름진 캔버스 바탕 위에 붓끝으로 직접 물감을 칠하는 것으로 대단히 거칠게 나타나는 그림이네.
사람들은 사려 깊지 못하고 미완성이라고 말할 걸세.
자신의 작품을 판단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그동안 내가 해온 것들을 초월하는 것으로, 이와 같거나 이보다 더 나은 그림을 난 그릴 수 없을 것 같네.
죽기 전에 나의 모든 에너지와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열정을 다 쏟으려고 하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은 타히티에서 그린 것들 중 가장 탁월하다.
작품에는 고갱의 글이 적혀 있다.

“모두 비례에 어긋나 이그러진 거대한 모습 그리고 의도적으로 들어올린 두 팔, 두 경악스러움을 응시하며 누가 감히 자신들의 우명을 생각하는가.”

상징주의 시인 앙드레 퐁테나에게 보낸 편지에 고갱은 자신이 창조한 불확실한 모습의 자연과 모호함, 그리고 그것들의 추상성과 음악적 요소를 강조했다.
“저의 꿈은 무형의 것이고, 우화적인 것이 아니라 말라르메가 말한 음악적인 시이며, 대본은 필요 없습니다.”
고갱은 부인했지만 작품에 나타난 상징주의 요소들은 분명히 일반적인 의미를 시사했다.
그는 인생과 초자연적인 불가사의함이 윈시주의의 모습으로 관찰될 수 없게끔 몰입시키며 인생의 주기를 출생에서 죽음까지 우화적으로 보여주었다.
인간의 숙명을 암시한 이 작품은 암울한 시대에 철학적 명상의 기진맥진함을 시위하며 동시에 인생에 대한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작품 제목은 그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문학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질문은 이미 철학과 종교에서 기원전부터 제기되었고 오늘날에도 제기되고 있다.

고갱은 이 작품의 의미에 관해 1898년 2월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이미지는 드 샤반의 벽화에서 보듯 추상적이며 이야기처럼 서술적이거나 전통을 좇은 문학에서의 상징주의 그림과는 달리 추상적이고 모호하다고 적었다.
그는 인간의 근본, 존재, 운명의 문제와 언어와 자각을 넘어서 무한한 신비스러운 것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려고 했다고 적었다.
고갱은 관람자가 그림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인간이 태어나고 살다 죽는 과정을 묘사했다면서 잠든 아기와 세 여인으로부터 그림을 읽게 된다고 적었다.

아기 발치에 있는 한 쌍의 여인은 1880년대 후반 고갱이 보로부두르에서 본 릴리프 시리즈의 한 장면으로 부처를 따른 여인들의 모습이다.
고갱은 릴리프에서 영감을 받았다. 팔로 턱을 괴고 관람자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은 <꿈>에서도 나타난다.
한 쌍의 여인 오른편 옆 등을 관람자를 향한 여인은 옷을 걸치지 않은 모습이며 브라운색과 황금색이 혼용된 강한 색조이다.
쇠처럼 단단해 보이는 색조가 한 쌍 여인의 따뜻한 느낌을 주는 색조와는 심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얼굴에는 순진함과 청순함이 나타나 있다.

앉아 있는 세 여인 위 왼편에 자주빛 드레스를 입은 두 여인이 있다.
두 여인은 다정한 모습으로 산책하며 “감히 자신들의 운명을 생각하고 있고” 그들 옆 왼편에 왼팔로 땅을 집고 오른팔을 위로 올려 손을 머리에 닿은 관람자를 향해 등을 돌린 “거대한 웅크린 모습의 여인은 비례에 맞지 않게 큰데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왼편 옆 화면의 중앙에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과일을 따는 사람이 있다.
이 남자는 왼손에 과일을 움켜쥐고 있으며 눈은 거의 감은 상태이다.
그의 목과 머리가 유난히 크며 두 팔은 강인해 보이고 조각처럼 서 있다. 팔과 얼굴에 명암이 두드러진 이 남자의 목과 가슴은 따뜻한 느낌을 주는 오렌지빛 색조이며 이 색조가 두 다리로 반복된다.
허리에는 흰색 천을 둘렀고 천의 윤관을 프러시안 블루로 표현했다.

이 남자는 유럽과 아시아의 합성물로 얼굴은 인디언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포즈는 렘브란트식(고흐 821-3, 822)으로 이와 같은 포즈의 드로잉을 고갱은 루브르에서 보았다.
렘브란트식 드로잉에는 남자의 얼굴이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데 반해 고갱은 얼굴이 왼쪽을 향하게 했다.

1897년 2월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은 이 작품 왼편 절반에 관해 적었다.

“아이 곁에 고양이 두 마리와 흰 염소도 한 마리 볼 수 있지.
신상이 하나 있는데 신비롭고 리듬 있게 두 팔을 쳐들고 내세를 가리키는 듯한 모양일세. ...
그리고 죽음이 임박한 듯한 늙은 여인이 있네.”

고갱이 언급한 신상은 여신 히나로서 꽃처럼 생긴 둥근 대좌 위에 서 있는데, 불교와 힌두교 조각에서 이런 형태는 일반적이다.
하나는 프러시안 블루와 흰색을 섞어 칠해졌고 빛이 환하게 비추어지게 구성했다.
히나의 왼쪽 발과 오른쪽 발은 각각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빛이 아래에서 위로 향한 것처럼 히나의 몸 전체는 밝고 히나의 턱과 왼족 볼 일부는 빛나지만 얼굴의 나머지 부분은 그늘이 져서 명암의 대조가 두드러진다.
히나 뒤에는 두 개의 커다란 초록색 광륜이 있고 이는 아시아 조각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으로 만돌라와 같은 기능을 뜻한다. 달의 여신답게 히나는 달빛에 광채를 나타낸 모습이다.

왼편 끝에는 죽음에 다다른 늙은 여인이 좌절하고 두려움에 빠진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운명에 맡긴 듯한 모습이라네.
그녀의 발치에 낯선 흰 새 한 마리가 두 발로 도마뱀을 움켜쥐고 있네.”
절망과 무력감에 빠진 노인의 몸은 낡은 가죽색이며 올리브와 붉은색이 몸의 일부에 강조되어 있다.
눈은 거의 감겨진 상태이고 다리는 거의 검정색으로 죽어가는 신체의 일부처럼 보인다.
여인은 페루의 미라처럼 보이는데 고갱은 이런 미라를 1880년대에 본 적이 있으며 이런 형상을 나무 릴리프로 제작한 적이 있다.
고갱은 신상 오른편으로 걸어가는 여인과 공작처럼 생긴 새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고갱은 1901년 9월 마르키즈 제도의 도미니카에 정착했고 2년 후 그곳에서 타계했다.
지역 주교와의 불화 때문에 교회장은 거행되지 못했으며 몇몇 작품은 음란한 것으로 간주되어 불태워졌다.
남태평양에서 지낸 기간에도 고갱은 프랑스에서 잊혀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망할 당시에 자신에 대해 내린 “나는 위대한 예술가이며,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고통을 감내해 왔다”는 평가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06년 파리의 살롱 도톤에 고갱의 작품 227점이 전시되자 그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고갱의 업적을 포괄적으로 조망할 수 있었던 이 전시회는 마티스, 드랭, 뒤피와 같은 젊은 화가들에게 대담하고 비자연적인 색채의 사용과 장식적인 단순성을 통해 감동을 주었다.
그들은 고갱을 통해 자연주의의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양식과 도상의 범주 안에 이국적, 원시적 요소를 도입할 수 있었다.
이런 점들은 고갱이 20세기 화가들에게 남긴 소중한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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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외젠 들라크루아와 폴 고갱


1888년 11월 16일경 고갱이 아를에서 반 고흐의 노란집에 묵고 있을 때 모호한 구성의 그림을 그렸는데 <건초 안에서, 하루의 열기 속에서>이다.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건초와 돼지가 있는 가운데 누드 여인”이라고 언급했다.
해석하고 읽어내기 어려운 작품이다.
상단 끝에 돌로 된 벽이 조금 보이고 여인은 허리까지 알몸을 드러낸 채 등을 돌렸는데, 등과 어깨는 하얀 피부지만 팔꿈치 아래 왼손은 벌겋게 탔다.
화면 아래 왼편에 핑크빛 오렌지색의 돼지 몸통이 보이고 여인 오른편에도 돼지 뒷부분과 꼬리가 보인다.
여인의 허리 아래 갈퀴가 보여 여인이 작업 도중에 낮잠을 자고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여인의 모습이 모호해서 앉아 있는 것인지 서 있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아를로 오기 전 고갱이 브르타뉴에서 드로잉한 여인의 기억을 되새겨 이 작품에 삽입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인의 모습은 프랑스의 낭만주의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에서의 누드를 상기시킨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은 들라크루아가 영국을 여행한 후 연극에 대한 이해가 한층 많아진 후 그린 것으로 바이런의 희곡 <사르다나팔루스>(1821)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들라크루아는 1828년 살롱전의 소개 책자에 이 작품에 관해 적었다.

“사르다나팔루스는 거대한 화장대 위에 놓인 화려한 침대에 누워 화관들과 궁정의 근위병들에게 그의 처첩들과 시종들 그리고 그가 총애하던 말들과 개들까지 모조리 목을 자르라고 명한다.
그의 쾌락에 봉사했던 그 어떤 것도 그가 죽은 후 살아남아서는 안 되었던 것이다.”

바이런의 희곡은 수도 니네베가 적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감연히 분신자결을 택한 아시리아의 전설적인 군주 사르다나팔루스를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은 아시리아 중심으로 왕 옆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미르하는 두 팔을 활짝 펴고 침대에 엎드린 채 자신의 목을 자르려 다가오는 근위병들에게 등을 내보이고 있는 구성이다.
요란한 살육의 장면들이 적색, 오렌지색, 황색, 갈색 등으로 현란하게 묘사된 이 작품은 고전주의에 대한 형식 파괴를 보여주는 낭만주의의 상징적 작품이 되었다.
당시 화가들은 발루아 지방의 역사 혹은 16, 17세기의 영국의 역사에서 비극적인 사실들을 찾아내어 이런 것들을 극적인 장면들로 묘사했다.
살롱전에 출품된 작품들은 살인이나 전투, 학살장면 일색이었다.
그래서 일부 관람자들은 화가들이 대중을 타락시켜서 방탕함에 짓눌리게 한다고 비난했다.

고갱은 1888년 크리스마스에 아를을 떠나 파리로 간 후 그곳에서 두 달 머물다가 퐁타방으로 갔다.
브뤼셀과 볼피니에서의 전시가 경제적으로 실패하자 빚이 늘었고 우울해졌다.
퐁타방은 돈이 적게 들어 그에게는 제2의 고향과도 같은 시골이었다.
그러나 관광지가 되어버린 퐁타방에 계속 머무는 것도 창작에 도움이 되지 않아 1889년 10월 근처의 르 풀뒤로 갔다.
바닷가의 이 작은 마을은 화가들에게 제2의 브르타뉴로 부상되고 있었다.

그는 그곳에 안주하기 전 그곳을 자주 찾았고 1889년 봄에 <파도 속에서>를 그렸는데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과 <건초 안에서, 하루의 열기 속에서>와 유사한 형식의 작품이다.
여인이 수영하는 장면을 그리면서 파도와 정면으로 마주치게 해서 삶의 즐거움을 맞이하는 의미를 담았다.
고갱은 이원론적 사상을 갖고 있었는데 삶과 죽음,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인 것이다.
그가 르 풀뒤에서 작업한 작품들은 이런 이원론에 근거한다.
등을 관람자에게 돌린 여인의 모습은 <신비롭게 보이는>과 <큄퍼 주전자가 있는 정물>에서도 삽입되었다.

고갱은 르 풀뒤에서의 생활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타히티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가 타히티행을 결정한 것은 1890년 여름이 다할 무렵으로 반 고흐가 자살한 그해 7월 27일이 조금 지난 후였다.
그는 르 풀뒤에서 르동에게 편지를 썼다.

“마다가스카르가 좀더 유럽 가까이 있지만은 타히티로 가려고 하며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려고 합니다.
선생이 좋아하는 저의 예술이 먼 곳에 심어지고 저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원시적이고 야만적인 상태에서 성장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저는 고요와 평화의 상태에서 지내야 만합니다.
사람들이 ‘고갱은 끝났어. 그가 보여줄 것이란 더 이상 없어’라고 말하면서 저의 명예를 훼손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1890.9)

고갱이 타히티로 간 이유 가운데 그의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컸다.
그는 타히티에서는 거의 무일푼으로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1891년 2월 23일 월요일 드루오 호텔에서 작품 서른 점을 경매에 붙여 자금을 마련하기로 하고 한 달반 전부터 언론과 잡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친구들을 동원하여 이 일을 대대적으로 알렸다.
고갱의 친구 모리스가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로 하여금 미술평론가 옥타브 미르보에게 고갱의 작품에 호감을 주는 글을 청탁했다.
미르보의 글이 전시회가 열리기 한 주 전 1891년 2월 16일 <에코 드 파리>에 발표되었고, 사흘 후 일간지 <르 피가로>에 장문의 글이 기고되었으며, 경매 카탈로그에도 기재되었다.
미르보는 고갱을 “화가, 시인, 사도, 악마”라고 적으면서 회화의 그리스도라고 추켜세웠다.
미르보는 잉카의 후예인 고갱의 작품에서 야만적 아름다움과 모호한 상징주의의 요소가 발견되며 절대적인 고립을 위해 마르티니크로 간 적이 있는 고갱은 이제 자신의 꿈의 세계에 좀더 근접한 남태평양의 타히티로 가는 것이라고 하면서 어디를 가든지 그의 여정에 관심을 갖는다고 했다.
고갱은 미르보의 글에 대단히 만족해하며 그에게 직접 감사를 표했다.

시인이며 미술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도 고갱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오리에도 고갱을 회화에 있어서 새로운 상징주의를 개척한 “축복받고 영감을 가진 예언자”라고 극찬하면서 회화에서의 상징주의 선구자라고 소개했다.
이렇게 자신의 명성을 쌓은 고갱은 정부 공무원과 사회적으로 지명도가 있는 인사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청했는데,
그가 편지를 보낸 인사들 중에는 공화당 대변인이자 예술부 장관 안토냉 프루스트와 철학자이며 역사가 에르네스트 르낭도 포함되었다.
고갱은 프루스트에게 ‘타히티에 대한 정부 후원 미션’을 신청했으며 정치인으로 훗날 국무총리가 된 조르주 클레망소는 “타히티의 풍경과 풍물을 그리고 연구”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받게 해주었다.
고갱은 예술원으로부터 마르세유에서 타히티행 배표를 얻을 수 있었고, 식민지 책임자에게 보내는 소개장도 갖게 되었다.

고갱은 1891년 4월 1일 마르세유에서 배를 타고 타히티로 향했다.
그가 탄 배가 누메아에서 일주일 정박하고 타히티에 도착한 것은 6월 9일이었다. 타히티는 남태평양 중부, 프랑스령 폴리네시아의 소시에테 제도 가운데 동쪽 윈드워드 제도에서 가장 큰 섬으로 1767년에 발견되어 프랑스 식민지가 된 후 프랑스 관리와 군인이 통치하던 곳이다.
고갱의 표현으로 하면 “신비스러운 것들이 요염한 조화를 이루는 환희와 적막”을 맛볼 수 있는 타히티에서의 생활에 그는 만족해했다.
그는 그곳에서 <바다 근처>를 그렸는데 등을 돌린 동일한 여인이 삽입되어 있어 그가 실재에 상상의 인물을 삽입했음을 보고 또한 이 이미지에 집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893~94년에 제작한 판화에서도 이 이미지를 삽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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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최후>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이 1902년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들 가운데 <해변의 승마자들 Horsemen on the Beach>은 동일한 제목으로 그린 두 점이다.
동물과 사람의 친근한 관계를 은유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이다.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서 승마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수평선으로 캔버스를 나누었으며 말들의 자유로운 동작으로 사람과 동물, 그리고 자연의 조화를 꾀했다.

<해변의 승마자들>은 마르키즈의 남자와 여자들이 말을 타고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이 장면은 드가가 경마장에서 그린 그림을 상기하게 하는데 고갱은 드가의 작품을 좋아했고 그의 그림을 찍은 사진을 참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갱은 <해변의 승마자들>을 그리고 몇 달 후 쓴 편지에서 “사람들이 드가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리지만 드가는 이를 탓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그는 드가의 작품을 모방하면서도 전혀 색을 달리 사용하여 새로운 그림으로 만들었으며 무엇보다도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창안해냈다.
웃통을 벗은 세 명의 현대 폴리네시아인이 관람자를 향해 등진 모습으로 핑크색 모래사장을 나아가 다른 장소에서 달려온 두 기사와 만나는 장면이다.
백마를 탄 두 사람의 의상은 독특한데 노란색과 오렌지색의 모자가 달렸고 바지는 아주 짧다.
폴리네시아인의 의상이라기보다는 영국인의 의상을 개조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이런 의상의 승마자를 1901~02년 변형드로잉으로 제작한 적이 있다.

고갱은 자신의 작품이든 다른 예술가의 작품이든 응용함으로써 창작에 있어 과거로 거슬러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이 섬에서 제작한 많은 작은 그림에서 초기에 사용했던 모티프를 발견하기란 쉽다.
이는 팔기 쉬운 작품을 볼라르에게 많이 보내려고 한 데서 생긴 일이라고 짐작된다.

1902년 3월 볼라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곧 작품을 배편으로 보내겠다면서 몇 점은 약간 중요한 것들이고 나머지는 그것들을 이용한 소품들이라고 했다.
아파트 공간이 좁아서 소품을 선호하는 사람들을 위해 제작한 것들이라면서 작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 큰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더 힘들다고 엄살을 부리기도 했다.
볼라르는 그에게 캔버스, 접착제, 화선지 등을 보냈고 고갱은 그것들이 사용할 만하다고 답장하면서 특정한 물감이 떨어졌으니 속히 보내라고 했다.
볼라르에게 스무 점을 보냈는데 그 가운데 <붉은 망토를 두른 마르키즈 남자 Marquesien a la cape rouge>와 <일광욕하는 사람들>은 약간 다른 풍경을 배경으로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남자를 주제로 한 것들이다.
붉은 망토를 두른 남자는 신부 하아푸아니로 알려졌다.

1902년 8월 25일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볼라르에게 보낸 큰 캔버스를 언급하면서 “매우 공을 들여 제작했다”고 적었는데 그 해에 제작한 큰 캔버스는 두 점이다.
그중 중 하나가 <부름 The Call>(고갱 902)이다. 강가에 벗은 몸으로 관람자를 향해 등을 돌린 여인은 미역을 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면 중앙에 두 여인이 걸어가는데 가슴을 드러낸 여인은 왼팔을 올려 손가락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시하는데 누군가를 보고 오라고 부르는 모습이다.
걷고 있는 두 여인의 모습은 그의 변형드로잉에서도 발견된다.

<옛날 옛적 이야기 Barbarous Tales>는 고갱이 마르키즈 섬에서 그린 것들 가운데 걸작으로 꼽을 만한 것이다.
화면 중앙에 두 여인이 앉아 있는데 오른쪽 빨간 머리의 여인은 <부채를 든 소녀>의 모델 토호타우아이다.
그녀 옆에 부처의 자세로 가부좌를 튼 여인은 실제 여인이 아니라 고갱이 갖고 있던 보로부두르 릴리프 사진의 인물을 삽입한 것이며, 뒤로 맹수의 발톱과 여우의 붉은 머리와 수염, 신부 복장에 초록색 눈을 한 그로테스크한 합성물의 존재는 1895년에 사망한 친구 화가 메이어 드 한이다.

1903년 2월 몽프레에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이면 과거에 보았던 것, 들었던 것, 생각했던 것들을 머리에 떠올린다고 했다.
그의 그림에서 과거에 대한 회상과 애착이 보인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할 때 술을 마셨고 타계하기 몇 달 전부터 아편을 복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타계한 후 집 옆 우물에서 모르핀이 든 유리병, 주사기, 편두통 치료제가 든 병, 설사와 구토 또는 배앓이를 진정시켜주는 뉴욕 로체스터에서 생산한 ‘뱀 기름’이 든 병 등이 발견되었다.
타계하기 전 몇 달 동안 심한 고통에 몸부림쳤음을 짐작하게 한다.

고갱은 죽기 얼마 전 마지막 글을 남겼다.

야성을 송두리째 잃고 본능과 상상력마저 바닥을 드러냈다.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감히 창조할 자신이 없던 생산적 요소를 찾아 이 길 저 길을 헤매고 다녔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혼자 있으면 소심해지고 당혹감에 빠지는 무질서한 군중처럼 행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고독은 아무에게나 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고독을 견디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기 위해선 끈기가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내게는 하나 같이 걸림돌이 되었다.
그러므로 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무도 내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고 그래서 난 아는 게 별로 없다고!
하지만 조금을 알아도 그것이 나만의 지식이란 사실이 내게는 소중하다.
그 조금을 갈고 닦으면 거기서 위대한 무언가가 생겨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1903. 4

고갱은 4월 중순 작품을 볼라르에게 보냈다.
잠을 청하기 위해 약을 먹고 또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는 8일 동안 집에 혼자 있었는데 4월 30일 갑자기 어지러운 경련을 견딜 수 없어 이웃이 들을 수 있도록 커다란 소리로 도움을 청했다.
그는 이웃에게 목사 베르니에르를 불러달라고 청했다. 베르니에르가 달려와 보니 고갱이 심한 고통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고갱은 밤낮을 구별하지 못한 채 헛소리만 질렀는데 동맥이 터진 것이었다.
고갱을 도와 ‘쾌락의 집’을 지은 이웃의 티오카는 매일 눈여겨보았는데 그가 밤낮으로 헛소리를 하자 5월 8일 아침 베르니에르에게 연락하여 와서 고갱을 보라고 했다.
티오카는 그날 아침 늦게 고갱에게 갔고 고갱은 이미 숨진 상태였다.

주교 마틴이 장례식을 집도했다.
고갱은 마틴을 미워한 적이 있는데 이유는 고갱이 교회의 전속학교 여학생들에게 추파를 던진다고 마틴이 비난했기 때문이다.
마틴은 간소하게 장례식을 마친 후 교인들에게 주보를 나눠주었는데 주보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아무런 흥미 있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고갱이라고 하는 사람의 급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화가이며 신의 적이고,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고갱의 시신은 가톨릭 공동묘지 십자가 아래에 묻혔다.
주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는데 고갱이 묘비를 가질 만한 인물도 못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묘비가 세워진 것은 20년 후다.

행정사무관은 고갱의 유작을 타히티의 수도 파페에테에서 경매를 통해 처분했다.
경매를 담당한 공무원은 화가 한 사람을 고용해 유작을 분류했는데 화가는 유작 대부분을 쓰레기통에 버렸다가 도로 꺼내 경매에서 처분했다.
그 화가의 말로는 작품 대부분이 대가의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춘화와도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여행자와 그곳에 거주하던 프랑스인, 그리고 파리에서 서둘러 온 친구와 화상들이 경매에 참여해 작품을 헐값에 구입했다.
그때 유작들이 모두 팔렸으므로 1965년 고갱이 거주한 적도 없는 파페아리에 고갱 미술관이 건립되었을 때 작품은 없고 사진들만 전시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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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의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은 자신의 집을 ‘쾌락의 집’이라고 부르고 예술품과 장식품으로 꾸몄는데, 창조의 환경을 새롭게 하여 더욱 더 작업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였다.
집 문지방에 ‘열대의 대가’란 팻말을 붙였는데 행정사무관들은 그를 ‘열대의 악당’으로 불렀다.
그는 나무 깎는 일에 열중했는데, 가장 중요한 조각으로는 자신의 집 문 가장자리를 장식하고 색을 칠한 것들이다.
오클랜드에서 마오리족의 주거지를 보고 영감을 받은 그는 다섯 개의 기다란 적색 나무를 이용해 문을 장식했다.
각각의 나무 패널은 폭이 약 38cm이다. 패널에 사람, 동물, 식물을 새기고 전체를 채색했다.
오른쪽 길게 세운 패널 중앙 아래에 정사각형 모양으로 잘라낸 부분이 있는데 자물쇠를 달았던 곳으로 짐작된다.
맨 위에 ‘쾌락의 집’라고 적혀 있는데 성적 즐거움이 내포된 의미로서의 쾌락의 집이다.
글 양쪽에는 두 여신의 얼굴이 왼쪽을 향하고 있고 오른쪽 여신의 얼굴 앞에는 공작새가 있다.
문 양쪽에는 여인의 누드가 장식되어 있다.
아래 양편에는 1889년과 1890년에 그가 제작한 릴리프 조각과 관련 있는 이미지가 있고 왼편에 ‘신비해져라’ 오른쪽에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라는 글이 각각 적혀 있다.
그 밖에도 그가 1902년에 그린 <두 타히티 사람의 머리 Two Tahitian Heads>와 1898~99년 목판화와 조각으로 제작한 이미지들도 부분적으로 보인다.

히바 오아로 온 뒤에도 고갱은 여전히 원주민을 모델로 그렸으며 정물도 그렸다.
<부채를 든 소녀 Girl with a Fan>는 ‘쾌락의 집’에서 찍은 이웃 섬의 원주민 빨간 머리의 토호타우아의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다.
흰 드레스에 가슴을 노출하고 상상의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리면서 배경을 엷은 금색에 빛을 발하게 했다.
토호타우아가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리면서 배경을 장식하지 않고 대부분 여백으로 남기고 그녀의 얼굴에 역점을 두었다.
토호타우아는 미인이지만 얼굴에 우수가 묻어났고 고갱은 한 순간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했다.

몽프레에게 쓴 편지는 화가로서의 자신의 과업에 대한 총평처럼 들린다.

자네는 오래 전부터 내가 무엇을 이루려고 했는지 알지 않나.
그것은 바로 모든 걸 시도할 수 있는 권리였네.
내 능력이 부족해서(이런 일을 하기에는 금전적인 어려움이 너무 컸으므로) 별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기본 원칙은 이미 실천되었네.
대중은 내게 아무 빚도 지지 않았네. 왜냐하면 내 작품은 그들에게 때에 따라서만 유용했기 때문이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자유를 누리는 화가들은 내게 빚을 진 걸세.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자유가 저절로 생겨난 줄 착각하네.
더구나 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뿐더러 스스로 보상받았다고 생각하며 만족해하네.
1902. 10

고갱은 마오리족 옷을 걸치고 살았다.
색이 있는 천을 감아 엉덩이를 가리는 파레우를 입고, 타히티인이 입는 셔츠를 걸치며, 거의 맨발로 지냈고, 초록색 천으로 만든 학생 모자를 착용했다.
그는 보다 원시적인 새로운 환경에서 순수한 마오리의 영혼이 나타난 모습과 풍경을 많이 생산하여 볼라르에게 속히 보내고 싶어 했다.
볼라르는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를 의사 프리즈오에게 팔았고 고갱의 작품을 통해 이윤을 넉넉하게 내고 있었다.

고갱은 그 지역의 남자와 여자들을 그렸으며 1901년 말에 그린 것이 <그리고 금빛 나는 육체 And the Gold of Their Bodies(Etl’ or de leures corps)>이다.
보라 빛 땅을 바탕으로 두 여인의 누드를 구성하면서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잎이 무성한 풍경을 배경으로 했다.
마오리족 마르키즈인의 전형적인 특징을 나타내려고 한 것이다.
마오리 여인은 세계 어느 여인에 비해 남자와도 같은 육체적 비례를 갖고 있다.
그는 마오리 여인이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처럼 넓은 어깨와 좁은 엉덩이를 하고 있다고 적은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의 피부는 황금빛인데, 더러 사람들은 추하다고 말하지만 온몸이 동일한 색으로 누드일 때도 추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노란색 피부를 좋아했으며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에서도 여인의 피부를 이 색으로 한 것이다.

고갱이 이 섬에서 지낸 기간은 약 18개월이다.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따라서 작업에 대한 의지도 감소되었다.
1901~03년 마르키즈에서 지낸 말년은 타히티에서 지낸 기간에 비하면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없었던 시기이다.
1901년에는 왕성한 창작력을 보였지만 이후 병으로 작업하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고 프랑스 공무원들의 지역행정에 반감을 나타냈다.
고갱은 1902년에 92페이지에 달하는 글을 『가톨릭주의와 모던 정신』에 적었다. 『
노아 노아』에서처럼 많은 삽화를 장식하지는 않았지만 삽화를 삽입했고 두 개의 속표지를 4년 전에 제작한 판화를 풀로 붙였으며 바깥 표지를 두 점의 변형 드로잉으로 장식했다.
그가 타계했을 때 그의 집에는 『가톨릭주의와 모던 정신』과 『노아 노아』 외에도 삽화를 곁들인 『마오리의 고대 신앙』도 발견되었다.
그에게 글쓰기는 회화와 조각만큼 중요했음을 알게 해준다.
그가 글쓰기에 전념하게 된 것은 건강이 나빠지고 다리의 통증이 거동을 불편하게 하자 그림과 조각을 제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두 달 이상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글쓰기에만 전념한 적도 있다.

1900년 볼라르와 계약을 맺은 후부터는 더 이상 경제적으로 고통 받는 일이 없어졌으므로 자유롭게 창작에 전념할 수 있었지만 건강이 창작의 발목을 잡았다.
그는 글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만 전하려고만 한 것이 아니라 그런 방법으로 자신을 널리 알리려고 했다.
그는 프랑스 밖으로 자신이 위대한 화가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들라크루아가 모로코를 방문한 기록이 책으로 나와 인기가 있었고, 또한 반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가 잡지 『메르큐르 드 프랑스』에 소개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도 그런 효과를 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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