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폴 고갱(1848~1903)은 말년에 타히티에서 외롭게 지내면서 많은 산문을 썼다.
더러는 반항적인 태도로 썼지만 그의 지성의 깊이와 인생관을 파악하기에 적절한 산문도 있다.
“인생이란, 사람이 의지를 갖고 실천하는 것에 따라서, 아니, 최소한 그 사람이 지닌 의지만큼만 의미를 갖는 것이라 생각된다.
미덕, 선, 악 따위는 말뿐이다. 사람들이 그런 것들을 깊이 캐묻고 부서뜨려서 어떤 건물을 세우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실행할 방법을 모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아무 의미가 없다. 창조주의 손에 일신을 맡기는 것, 그것은 소멸되는 것이며 죽는 것이다. ...
누구도 선하지 않으며 누구도 악하지 않다.
존재방식은 다르더라도 모두가 같다.
지도자의 모사들이 그 반대의 말을 했는지 어떤지는 말할 것도 없다.
인간의 생애는 부질없이 짧더라도 위대한 일을 하기에는 충분하다.
그것은 모든 인간이 참여하는 공동의 일에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회화와 문학은 작가의 자화상이다.
사상은 작품을 위해서만 눈을 갖고 있을 뿐이다.
모든 사람에게 신경을 쓰면 작품은 짜부러지고 만다.“
1897년 4월 고갱은 아내로부터 편지를 받았는데 사랑하는 딸 알린이 전염성 폐렴으로 여러 날을 앓다가 그해 1월 19일에 사망했다는 비보였다.
그는 알린의 사진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으며 스무 살의 딸이 타계했다는 비보를 받고 몹시 울었다.
이 소식은 한동안 그를 괴롭혔고 자살을 생각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늘어가는 빚과 결막염 등 악화된 건강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딸의 죽음이 그를 절망으로 떨어뜨렸다.
고갱은 1897년 12월 자살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비소를 먹었으나 다 토해내고 고통 속에서 깨어났다.
또한 자살하려고 집을 나서 산으로 갔고 그곳에서 죽을까 했는데, 그렇게 되면 개미들이 자신의 시신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것 같아 독약을 많이 마셨는데 심하게 토하느라 독약이 도로 밖으로 나왔는지 그날 밤 지독한 고통을 겪다가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자살을 시도하기 전에 거의 4m 가량 되는 커다란 캔버스에 인생의 불가사의함을 묘사했다.
그에게는 유언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파리에서 자신의 작품을 관리 매매하는 다니엘 드 몽프레에게 1897년 12월부터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죽기 전에 구상하고 있는 큰 그림을 마치려 하며 한 달 내내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밤낮으로 작업에 열중하고 있네.
오 하나님, 내가 그리고 있는 건 퓌비 드 샤반이 실재 삶으로부터 드로잉한 만화 같은 그런 따위의 준비과정을 통해 그린 것과는 다르네.
매듭과 주름진 캔버스 바탕 위에 붓끝으로 직접 물감을 칠하는 것으로 대단히 거칠게 나타나는 그림이네.
사람들은 사려 깊지 못하고 미완성이라고 말할 걸세.
자신의 작품을 판단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그동안 내가 해온 것들을 초월하는 것으로, 이와 같거나 이보다 더 나은 그림을 난 그릴 수 없을 것 같네.
죽기 전에 나의 모든 에너지와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열정을 다 쏟으려고 하네.”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은 타히티에서 그린 것들 중 가장 탁월하다.
작품에는 고갱의 글이 적혀 있다.
“모두 비례에 어긋나 이그러진 거대한 모습 그리고 의도적으로 들어올린 두 팔, 두 경악스러움을 응시하며 누가 감히 자신들의 우명을 생각하는가.”
상징주의 시인 앙드레 퐁테나에게 보낸 편지에 고갱은 자신이 창조한 불확실한 모습의 자연과 모호함, 그리고 그것들의 추상성과 음악적 요소를 강조했다.
“저의 꿈은 무형의 것이고, 우화적인 것이 아니라 말라르메가 말한 음악적인 시이며, 대본은 필요 없습니다.”
고갱은 부인했지만 작품에 나타난 상징주의 요소들은 분명히 일반적인 의미를 시사했다.
그는 인생과 초자연적인 불가사의함이 윈시주의의 모습으로 관찰될 수 없게끔 몰입시키며 인생의 주기를 출생에서 죽음까지 우화적으로 보여주었다.
인간의 숙명을 암시한 이 작품은 암울한 시대에 철학적 명상의 기진맥진함을 시위하며 동시에 인생에 대한 수수께끼이기도 하다.
작품 제목은 그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문학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질문은 이미 철학과 종교에서 기원전부터 제기되었고 오늘날에도 제기되고 있다.
고갱은 이 작품의 의미에 관해 1898년 2월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이미지는 드 샤반의 벽화에서 보듯 추상적이며 이야기처럼 서술적이거나 전통을 좇은 문학에서의 상징주의 그림과는 달리 추상적이고 모호하다고 적었다.
그는 인간의 근본, 존재, 운명의 문제와 언어와 자각을 넘어서 무한한 신비스러운 것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려고 했다고 적었다.
고갱은 관람자가 그림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인간이 태어나고 살다 죽는 과정을 묘사했다면서 잠든 아기와 세 여인으로부터 그림을 읽게 된다고 적었다.
아기 발치에 있는 한 쌍의 여인은 1880년대 후반 고갱이 보로부두르에서 본 릴리프 시리즈의 한 장면으로 부처를 따른 여인들의 모습이다.
고갱은 릴리프에서 영감을 받았다. 팔로 턱을 괴고 관람자를 바라보는 여인의 모습은 <꿈>에서도 나타난다.
한 쌍의 여인 오른편 옆 등을 관람자를 향한 여인은 옷을 걸치지 않은 모습이며 브라운색과 황금색이 혼용된 강한 색조이다.
쇠처럼 단단해 보이는 색조가 한 쌍 여인의 따뜻한 느낌을 주는 색조와는 심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얼굴에는 순진함과 청순함이 나타나 있다.
앉아 있는 세 여인 위 왼편에 자주빛 드레스를 입은 두 여인이 있다.
두 여인은 다정한 모습으로 산책하며 “감히 자신들의 운명을 생각하고 있고” 그들 옆 왼편에 왼팔로 땅을 집고 오른팔을 위로 올려 손을 머리에 닿은 관람자를 향해 등을 돌린 “거대한 웅크린 모습의 여인은 비례에 맞지 않게 큰데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왼편 옆 화면의 중앙에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려 과일을 따는 사람이 있다.
이 남자는 왼손에 과일을 움켜쥐고 있으며 눈은 거의 감은 상태이다.
그의 목과 머리가 유난히 크며 두 팔은 강인해 보이고 조각처럼 서 있다. 팔과 얼굴에 명암이 두드러진 이 남자의 목과 가슴은 따뜻한 느낌을 주는 오렌지빛 색조이며 이 색조가 두 다리로 반복된다.
허리에는 흰색 천을 둘렀고 천의 윤관을 프러시안 블루로 표현했다.
이 남자는 유럽과 아시아의 합성물로 얼굴은 인디언의 모습처럼 보이지만 포즈는 렘브란트식(고흐 821-3, 822)으로 이와 같은 포즈의 드로잉을 고갱은 루브르에서 보았다.
렘브란트식 드로잉에는 남자의 얼굴이 오른쪽을 향하고 있는데 반해 고갱은 얼굴이 왼쪽을 향하게 했다.
1897년 2월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고갱은 이 작품 왼편 절반에 관해 적었다.
“아이 곁에 고양이 두 마리와 흰 염소도 한 마리 볼 수 있지.
신상이 하나 있는데 신비롭고 리듬 있게 두 팔을 쳐들고 내세를 가리키는 듯한 모양일세. ...
그리고 죽음이 임박한 듯한 늙은 여인이 있네.”
고갱이 언급한 신상은 여신 히나로서 꽃처럼 생긴 둥근 대좌 위에 서 있는데, 불교와 힌두교 조각에서 이런 형태는 일반적이다.
하나는 프러시안 블루와 흰색을 섞어 칠해졌고 빛이 환하게 비추어지게 구성했다.
히나의 왼쪽 발과 오른쪽 발은 각각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다.
빛이 아래에서 위로 향한 것처럼 히나의 몸 전체는 밝고 히나의 턱과 왼족 볼 일부는 빛나지만 얼굴의 나머지 부분은 그늘이 져서 명암의 대조가 두드러진다.
히나 뒤에는 두 개의 커다란 초록색 광륜이 있고 이는 아시아 조각에서 흔히 나타나는 것으로 만돌라와 같은 기능을 뜻한다. 달의 여신답게 히나는 달빛에 광채를 나타낸 모습이다.
왼편 끝에는 죽음에 다다른 늙은 여인이 좌절하고 두려움에 빠진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운명에 맡긴 듯한 모습이라네.
그녀의 발치에 낯선 흰 새 한 마리가 두 발로 도마뱀을 움켜쥐고 있네.”
절망과 무력감에 빠진 노인의 몸은 낡은 가죽색이며 올리브와 붉은색이 몸의 일부에 강조되어 있다.
눈은 거의 감겨진 상태이고 다리는 거의 검정색으로 죽어가는 신체의 일부처럼 보인다.
여인은 페루의 미라처럼 보이는데 고갱은 이런 미라를 1880년대에 본 적이 있으며 이런 형상을 나무 릴리프로 제작한 적이 있다.
고갱은 신상 오른편으로 걸어가는 여인과 공작처럼 생긴 새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고갱은 1901년 9월 마르키즈 제도의 도미니카에 정착했고 2년 후 그곳에서 타계했다.
지역 주교와의 불화 때문에 교회장은 거행되지 못했으며 몇몇 작품은 음란한 것으로 간주되어 불태워졌다.
남태평양에서 지낸 기간에도 고갱은 프랑스에서 잊혀진 인물은 아니었지만, 그가 사망할 당시에 자신에 대해 내린 “나는 위대한 예술가이며,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고통을 감내해 왔다”는 평가에 동의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1906년 파리의 살롱 도톤에 고갱의 작품 227점이 전시되자 그의 명성은 확고해졌다.
고갱의 업적을 포괄적으로 조망할 수 있었던 이 전시회는 마티스, 드랭, 뒤피와 같은 젊은 화가들에게 대담하고 비자연적인 색채의 사용과 장식적인 단순성을 통해 감동을 주었다.
그들은 고갱을 통해 자연주의의 속박에서 해방될 수 있었고, 양식과 도상의 범주 안에 이국적, 원시적 요소를 도입할 수 있었다.
이런 점들은 고갱이 20세기 화가들에게 남긴 소중한 유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