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은 퐁타방에서 돈이 필요할 때면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반 고흐와 고갱 두 사람은 가난 속에서 화가로서의 길을 가야 했는데 파리화단에서 입지를 마련하지 못하는 데다 가난 때문에 시골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반 고흐는 파리에서의 생활을 견딜 수 없어 1888년 2월 자신이 '빛의 왕국'이라고 명명한 아를Arles로 떠났는데 같은 달 고갱도 파리를 등지고 브리타니Brittanu와 남서쪽 해안에 위치한 퐁타방Pont-Aven의 작은 마을에 둥지를 틀었다.

아를과 마찬가지로 퐁타방도 지역적으로 종교적 정체성을 찾는 사람들로 종교적 재활의 동향이 일고 있었는데 이는 1870년대 프랑스의 변방 지역에서 흔히 있던 일이었다.
두 사람 모두 아를이나 퐁타방 같은 곳에 예술가들을 위한 공동체를 만들기를 희망했다.

이 시기에 두 사람의 경제작 뒷받침을 담당한 사람이 테오였다.
그는 형 반 고흐에게 매달 혹은 보름 또는 매주 생활비를 송금했는데 한 달 평균 200프랑에서 300프랑을 송금했다.
고갱에게는 매달 작품 한 점을 받고 150프랑씩 지불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고갱은 퐁타방에서 돈이 필요할 때면 과거 직장동료이자 아마추어 화가 에밀 슈페네케Emile Schuffenecker와 젊은 화가 메이어 드 한Meyer de Haan으로부터 돈을 빌려 썼으므로 테오가 매달 지불하는 150프랑은 그에게 매우 요긴했다.
테오가 고갱에게 형과 함께 아를에서 지내도록 한 것은 형이 고갱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고갱의 경제적 어려움을 도와주리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반 고흐와 고갱은 테오의 도움을 받으며 화가로서의 성공을 향해 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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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갱이 나중에 인상주의 기법을 버리고 
 

고갱이 자신의 직업을 '화가 artist-painter'라고 적기 시작한 것은 1883년부터였다.
그는 정기적으로 카페 누벨 아테네Cafe de la Nouvelle-Athenes에 가서 마네, 드가, 르누아르, 피사로 그리고 그 밖의 인상주의 화가들을 만났으며 그들의 작품을 수집했다.
1881년에는 인상주의 작품들을 주로 매매한 아트딜러 폴 뒤랑 뤼엘Paul Durand-Ruel에게 1500프랑에 작품 3점을 팔기도 했다.
이는 아마추어 화가로서 매우 높은 가격으로 직업화가 모네와 르누아르가 자신들의 작품을 50프랑 미만에 판 적도 있을 때였다.
고갱은 1879년부터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룹전에 참여하면서 인상주의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고갱이 나중에 인상주의 기법을 버리고 인상주의 화가들을 강렬하게 비난한 것도 그만큼 그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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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가 고갱을 동생 테오에게 소개했고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빈센트가 고갱을 만난 것은 1886년 가을로 추정된다.
빈센트는 그해 3월에 파리로 왔고 그때 고갱은 파리에 거주하고 있었다.
1886년은 에드가 드가가 주최한 제8회 인상주의전이면서 마지막 전시회가 열린 해이기도 하다.
1886년 가을에 두 사람이 만난 것 같다.

빈센트가 고갱을 동생 테오에게 소개했고 테오는 고갱의 작품을 파리 미술시장에 내다 팔았다.
테오는 1887년 12월 고갱의 그림 4점과 도자기 5점을 위탁판매 형식으로 받아 몇 주 후 그림 <일광욕하는 사람들 The Bathers>을 팔았다.
1888년 1월 테오는 자신이 근무하는 화랑에 전시하기 위해 고갱으로부터 3점의 그림을 구입했으며 또한 그곳에서 고갱의 <목욕하는 두 소녀 Two Girls Bathing>을 소개했다.
그때 중요한 아방 가르드 미술평론가 펠릭스 페네옹Felix Feneon이 그림에 관해 호평했다.

빈센트와 고갱 두 사람이 처음 작품을 교환한 것은 1887년 10월이었다.
파리에서의 우정이 한 해만에 작품을 서로 교환할 정도로 가깝게 진전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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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추상일세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목적없이 바라본 대상
마네와 모네를 선두자들로 삼고 일련의 화가들이 추구한 소위 말하는 인상주의는 카메라의 위협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한 첫 사례로 보아야 한다.
하지만 인상주의는 사실주의에서 벗어난 회화방법이 못되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이 대상에 닿아 굴절하고 흩어지는 순간적인 색채의 변화에 집착했는데 이는 훗날 발명될 좀더 개량된 카메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이었다.
가령 풍경화를 찍을 때 카메라의 조리개는 최대한으로 열어놓고 상응하는 타임스피드는 높인 후 초점을 일부러 맞추지 않는다면 모네와 그의 친구들이 그린 풍경화들과 유사하게 나타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상주의 화가들은 당시의 카메라보다 한 발 앞선 과학적 사실주의를 추구했던 것이다.
모더니티의 의미를 사실주의와의 단절에서 찾는다면 인상주의는 사실주의와 단절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과학적 탐색에 빠지고 말았다.

폴 고갱은 인상주의 화가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모든 걸 접어두고 색채에만 몰입한다.
그들은 장식적 효과를 노림에도 불구하고 자유롭지 못하며 실재에 접근해야 한다는 속박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상징적 허구의 풍경이란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상만을 바라볼 뿐이다.
그들이 본 건 조화롭지만 거기에는 목적이 없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건립한 건물에 탄탄한 토대가 없는 까닭은 감각의 매개를 색채로만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탐구의 주안점을 눈에다 놓을 뿐 신비로운 사고에는 두지 않는다.
자연히 과학적 탐색에 빠지고마는 것이다. 물리학과 형이상학은 별개이다.

그들은 최초의 성공에 눈이 멀어 이를 전부라고 여긴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내일의 관료이다.
어제의 관료보다 더욱 더 살벌한…"

예술이란 추상일세
모더니티의 의미를 사실주의와의 단절에서 찾는다면 예술가들이 예술을 추상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 당시만 해도 인상주의는 모든 화가들에게 적용된 말이었고 따로 구별되는 말이 없었다.
고갱이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를 인상주의 화가라고 칭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는데
고갱을 오늘날 우리들이 알고 있는 그런 의미의 인상주의 화가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후기인상주의로 분류되는 고갱과 반 고흐야말로 예술을 추상으로 인식한 선구자들이었다.
따라서
두 사람을 최초의 모던 아티스트들로 칭송해야 마땅하다.

반 고흐의 유명한 <별이 빛나는 밤>은 누가 봐도 사실주의 그림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묘사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은 우리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밤하늘이 아니라 대기의 강력한 기운을 반 고흐와도 같은 방법으로 상상할 때만 마음 속에 그려볼 수 있는 하늘인 것이다.
추상의 의지로 과장되고 함축된 밤하늘인 것이다.
더욱이
프랑스의 풍경을 그리면서 프랑스에서는 볼 수 없는 북유럽의 뾰족한 탑이 있는 교회가 삽입된 것은 반 고흐가 바라본 풍경을 그린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그린 풍경을 표현한 것임을 말해준다.

예술이 추상임을 고갱은 1888년 8월 14일 친구 슈페네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조했다.
"자네에게 한 가지 충고한다면 자연을 가까이서 바라보지 말라는 걸세.
그보다는 차라리 어떤 걸 창조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예술이란 추상일세.
자연 앞에서 꿈꾸며 추상을 이끌어내는 게 중요하지.
그것만이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비결이며 조물주인 신이 이루어낸 창조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일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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귓불을 자른 건 성을 못이긴 자해공갈이었다 

 
반 고흐는 아를에서 폴 고갱과 함께 생활한 적이 있다.
반 고흐가 자신의 귓불을 자른 건 이때 일어난 일이다.
고갱은 반 고흐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겉으로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존경심을 감춰 반 고흐를 화나게 만들었고
반 고흐는 고갱을 존경하면서도 자신을 알아주지 않자 성을 냈다.
귓불을 자른 건 성을 못이긴 자해공갈이었다.
효과는 반대로 나타나 고갱은 학을 띠고 반 고흐로부터 멀리 달아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미우나 고우나 두 사람을 미술사에서 한쌍의 콤비로 기억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두 아마추어 화가들에 의해서 진정한 현대회화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미술교육을 받지 않고 단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일념을 가진 이 두 성질 고약한 사람들에 의해서 서양회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이다.
당시 아카데미에서 충분히 회화 교육을 받은 화가들이 많았다.
그런데 어째서 원근법도 제대로 못맞추고 색도 제대로 내지 못했으며 남의 그림만 모방하던 이 두 사람이 떠오르는 별이 되었을까?
두 사람의 수준낮은 그림들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초창기의 거의 모든 그림들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 말년에서야 자신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렸고 이런 그림들이 두 사람을 현대회화의 선구자들로 만들었다.

고갱은 가난으로 지치고 마누라한테서도 멸시를 받을 때 친구 슈페네케에게 편지를 썼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말은 훗날 고갱과 반 고흐의 그림을 말해주는 함축된 미학이 된다.
"색은 음악에서와 마찬가지로 진동이고
자연 안에서 일반적인 것들과 가장 모호한 것들을
나타내는 내면의 힘일세.
순수색!
모든 건 이것을 위해 희생되어야 한다네."

고갱과 반 고흐의 성격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고갱은 인습타파주의자였으며
빈정거리는 말을 곧잘 했고
유럽의 현대문명을 냉소했으며
무심한 구석이 있었다.

이에 반해 반 고흐는
북유럽 특유의 기질대로 야성적이었고
천성이 열심히 하는 성격이었으며
동료 예술가들에게 곧잘 격정적인 우정을 표시했다.

반 고흐에게 격정이 있었다고는 하나 이런 격정이 야성적인 기질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수많은 편지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적었다.
"난 눈으로 본 것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기분내키는대로 사용한단다.
난 나 자신을 힘있게 표현하고 싶다."

반 고흐의 그림을 보면 이 두 마디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아까운 건 그가 37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37살로 세상을 떠난 화가들로 반 고흐 외에도
라파엘로, 와토, 툴루즈 로트렉이 있다.
유명해지는 데 37살이면 충분한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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