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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 



반 고흐는 노란집의 아래층을 아틀리에로 사용했고 2층에 있는 두 개의 방 가운데 큰 길로 난 창이 있는 방은 고갱이 사용하게 했으며 자신은 복도 옆의 방을 사용했다. 2층에는 방이 두 개뿐인데 방들은 문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1888년 11월 반 고흐와 고갱은 룰랭 부인을 아틀리에로 오게 해서 각각 다른 위치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그렸다. 고갱은 그녀를 자신의 풍경화가 걸린 벽을 배경으로 그렸고, 반 고흐는 밖이 내다보이는 창을 배경으로 그렸다. 고갱이 그린 <룰랭 부인>의 배경에 나타난 풍경화는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를 그릴 때도 배경에 삽입되었다.
반 고흐는 이 시기에 보통 사람의 초상을 전통적인 후광으로 나타낸 “영원함의 느낌을 주는” 색으로 그리는 것에 관해 말하곤 했다. 그는 룰랭 부인이 얼마 전에 출산한 마르셀은 안고 있는 모습을 두 점 그렸다. 첫 번째 그린 그림은 도상을 따라 그린 것으로 성모 마리아가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제사장들에게 혹은 관람자들에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그렸다. 배경의 노란색이 금색을 칠해 거룩한 공간 혹은 정신적 공간을 나타낸 전통을 상기시킨다. 12월 초에 이 작품을 그린 후 그는 좀더 큰 캔버스에 동일한 모티프를 확대해서 그렸다. 고갱은 풍경화를 그리다 말고 룰랭의 아기를 스케치북에 두 점 그렸다. 반 고흐의 <마르셀은 안고 있는 롤랭 부인>은 피카소에게 영감을 주어 그로 하여금 1901년에 <어머니와 아기>를 그리게 했다.
지누 부부도 종종 포즈를 취해주었다. 12월에 마리 지누의 남편 요제프-미셀 지누가 아틀리에로 와서 반 고흐와 고갱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반 고흐는 지누가 코 아래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모습으로 그렸는데 흉악범처럼 보인다. 반 고흐는 그의 머리를 각이 지게 그렸는데, 12월 초 요제프 룰랭의 초상을 그릴 때도 이런 식으로 그렸다. 배경을 노란색이 감도는 푸른색으로 밝게 칠하여 활력이 넘치는 기운 속의 모습이 되게 만들었다. 고갱도 같은 날 지누의 초상을 좀더 작은 캔버스에 옆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그렸다.
마리 지누는 라마르텡 거리에 있는 가르 카페의 여주인이다. 반 고흐는 5월부터 라마르텡 2번지 노란집에 살았으므로 거의 매일 그녀를 보았지만 정작 그녀에게 모델이 되어달라고 청한 것은 고갱이었다. 반 고흐는 그녀가 너무 늙고 매력적이지 않아 모델로 그리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갱과 동갑내기로 마흔 살이었고 결혼한 지 겨우 2년 되었다.
지누 부인이 포즈를 취하기 위해 노란집으로 온 것은 11월 4일로 추정된다. 그녀는 외출할 때 입는 정장차림으로 왔다. 아틀리에로 사용하는 노란집 아래층으로 와서 두 사람을 위해 의자에 앉았다. 의자는 팔걸이가 있는 것으로 반 고흐가 고갱이 사용하도록 사둔 것이다. 지누 부인은 왼쪽 팔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등을 서쪽 벽을 향했다. 주먹을 쥔 손에 볼을 대고 얼굴을 약간 왼편으로 기울었다. 그녀는 고갱을 바라보고 포즈를 취했고 반 고흐는 옆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그렸다. 아틀리에 동쪽으로 난 창문은 몽마주르 가를 향하고 빛이 아주 잘 들었다. 고갱은 이날 드로잉을 그렸고 반 고흐는 황마에 유채로 그렸으며 작품을 완성한 것은 이튿날이었다.(고흐 390) 그는 이듬해 2월에 고갱의 화법으로 <아를 여인>을 다시 그렸다.
반 고흐는 12월에 지누 부인의 초상과 같은 포즈의 그림을 다시 그렸다. 그는 고갱의 방법으로 초상화를 그리면서 배경에 자신이 좋아하는 레몬 노란색을 사용했다. 반 고흐가 처음 그린 지누 부인의 초상에 비해 두 번째 것은 좀더 사려 깊게 채색되었으며 색과 선에서 긴장감을 느낄 수 있다. 고갱이 그해 12월에 그린 1867년 7월에 타계한 어머니의 사진을 토대로 그린 어머니의 초상화를 보면 노란색을 넓고 평편하게 사용하는 법을 반 고흐로부터 영향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2월 들어 반 고흐와 고갱 사이에 회화에 관한 논쟁이 부쩍 격해졌는데 이는 고갱의 강압적인 태도에 대한 반 고흐의 반발이 다분히 작용했다. 그동안 반 고흐는 주제와 구성에서 고갱의 강압적 영향을 받고 있었다. 꿈의 이미지를 그리라는 고갱의 주문에 응했고, 그 달에 그린 지누 부인의 초상이 고갱의 <밤의 카페, 아를>와 같아 그때까지 고갱의 영향 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반 고흐의 작품이라기보다는 고갱을 흉내낸 고갱식 그림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이한 점은 고갱은 뒤로 세 명의 매춘부를 배경으로 지누 부인을 포주로 묘사한 데 반해, 반 고흐는 지누 부인의 존엄성을 나타내주려고 한 것이다. 이런 점이 그가 체이블 위 소품으로 사용한 책, 양산, 그리고 장갑에서 확인된다. 인간에 대한 존엄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반 고흐의 미학은 고갱의 미학과 차이가 있다.
12월 23일 자신의 귓불을 자른 자해사건이 일어나기 며칠 전 반 고흐는 룰랭 부인을 모델로 어머니로서의 자태를 지닌 이미지를 다섯 점을 제작했다. 다섯 점 모두 의자에 앉아 갓난아기 마르셀의 흔들침대에 연결된 끈을 쥔 두 손을 포개고 있는 장면으로 동일한 모티프를 약간만 변형시킨 것들이다. 편안한 자세를 취한 어머니의 모습을 마돈나를 상기하게 하는 이미지로 묘사한 후 제목을 <자장가>라고 했다. 거의 동일해 보이는 여인의 초상을 어머니의 이미지로 반복해서 그렸다. 밝은 색의 벽지를 배경으로 룰랭 부인을 연속적으로 그렸는데, 룰랭 부인은 딸아이의 요람과 연결된 끈을 쥐고 있다. 오래 포즈를 취해야 하기 때문에 아이가 응얼거릴 때는 끈을 잡아당겨 요람이 흔들리게 해서 아기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이다. 1888년 12월 말부터 이듬해 5월까지 이 모티프를 다섯 점 그렸다. 이 시리즈에서 고갱의 영향을 발견하는데 룰랭 부인의 외곽선을 검정색으로 칠했고 한 가지 색을 평편하게 넓게 칠한 것이다. 반 고흐는 고갱의 영향을 거부하지 못하면서도 도전이라도 하듯 그로부터 받은 영향을 자신의 독특한 양식으로 변형시키려고 했다.
다섯 점 모두 정면에서 바라본 모습으로 벽지를 배경으로 한다. 다만 색채가 조금씩 다르고 붓질이 다르며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소장품의 경우 손이 반대로 포개진 것이 특기할 만하다. 룰랭 부인의 모습을 단순화하고 집약적으로 표현하려고 했으며 머리, 어깨, 몸통을 검정색 외곽선으로 부분적으로 평편하게 하여 그대로 도려낼 수 있는 느낌을 생기게 했다. 그녀의 스커트를 분리시킨다. 외곽선과 외곽선 사이를 한 가지 색으로 칠했는데, 타일이나 돌로 깔린 바닥을 주홍색으로 칠했고 여인의 몸통을 청록색으로 칠하여 붉은색과 푸른색을 대비시켰다. 색을 평편하게 칠하고 대비시키는 방법과 인물과 사물을 검정색으로 외곽의 윤곽을 드러내게 하는 방법은 고갱이 선호했던 것으로 고갱의 양식을 모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양식은 클루아조니즘으로 중세 스테인드글라스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고갱이 진전시킨 양식이다.
반 고흐는 어머니의 포근한 사랑을 찬양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광채의 통일, 보색으로 위안을 주는 그림으로 미화시키려고 했다고 테오에게 전했다. 그는 전통적인 종교화처럼 위안과 표현적인 힘이 나타나는 그림을 구상했다. 그는 <자장가>를 세 폭 제단화 중앙에 위치하는 성모상처럼 구상하면서 양편에는 빛을 발하는 횃불과 같은 효과를 주기 위해 해바라기 그림들을 걸려고 했다. 이는 마리아를 평범한 여인의 모습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을 현대적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창안한 그는 마리아를 또한 룰랭 부인의 포근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재해석하려고 한 것이다.
또한 이 작품은 고갱에 대한 반발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예술이 궁극적으로 추상이라고 주장한 고갱은 눈에 보이는 실재보다는 기억과 상상에 의존해서 그릴 것을 반 고흐에게 누누히 강조했다. 반 고흐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여 <에텐 정원의 추억>을 그리기도 했지만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그릴 수 없었던 그는 고갱에 대항하기 위해 실재 인물을 모티프로 삼았다. 그에게는 실재를 보고 그리는 것이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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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뿌리는 사람



빈센트 반 고흐는 1888년 2월 20일 프랑스 남쪽 끝 아를로 갔다. 파리에서 일 년 반 지내면서 파리의 화가들과 불화했고 일본 회화의 영향을 받아 남쪽의 빛이 더욱 찬란한 곳에서 창작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를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아 안톤 모베의 타계소식을 들었다. 반 고흐는 헤이그에서 한때 모베로부터 수학했는데, 헤이그 화파를 이끈 주요 인물 중 하나인 모베는 프랑스 화가 밀레와 코로로부터 영향을 받아 꾸밈 없는 진솔한 주제 예를 들면 해변의 모래언덕, 강변의 낮은 풀밭, 바닷가 등을 작은 크기로 그리면서 밝고 은빛색을 즐겨 사용했다. 그의 진지함과 조심스러운 태도는 반 고흐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의 아내의 사촌이었던 반 고흐는 모베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특히 밀레에 대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반 고흐는 그때부터 밀레의 작품을 모사하기 시작했으며 특히 씨 뿌리는 사람에 관해 강한 집착을 보였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장-프랑수아 밀레는 초기에 전통적인 신화와 일화, 그리고 인물화를 그렸다. 그는 전원의 장면들을 그리고부터 이러 장르에 집착했으며 농부 화가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전원에서의 농부들의 우수적인 장면들을 강조했으며, 들에서 작업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감상적으로 표현했다. 평론가들은 그를 사회주의자라고 불렀지만 그는 정치적이기보다는 미학적으로 전원의 생활을 주제로 삼아 농부들의 삶에서 숭고함을 느낄 수 있도록 노동의 신성함을 강조했다. 1849년에 바르비종에 안주했으며 말년에는 그곳 바르비종 화파의 리더이자 가까운 친구 테오도르 루소의 영향을 받아 순수 풍경화를 그렸다. 밀레는 가난 속에서 생활했으며 오십이 된 1860년대에야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가 남긴 많은 드로잉들에서 그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다. 반 고흐 외에도 조르주 쇠라와 카미유 피사로가 멜레의 작품을 매우 좋아했다.
모베의 타계소식은 반 고흐로 하여금 초자연주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었고 그의 죽음으로 촉발된 죽음과 영원에 대한 사고가 결국 <씨 뿌리는 사람>의 상징주의로 나타났다. 1888년 6월 몇 주 동안 그는 이 작품에 전념하면서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씨 뿌리는 사람>은 자신이 “갈망하던 영원”에 대한 시각적 표현이며, 이런 문제는 1850년대 네덜란드의 신학적 최대 이유였음을 지적했다.
반 고흐는 1888년 6월 중순 <해질녘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리면서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을 현대화된 형태로 변형시키면서 자신이 존경해마지 않는 들라크루아의 종교화에 사용된 대비채색법을 응용했다. 밀레의 주제에 들라크루아의 암시적 색을 응용했다. 또한 태양과 태양의 빛남을 주로 노란색으로 묘사하고 들에는 보색인 보라색을 주로 사용하면서 물감이 캔버스에 거칠게 남아 있도록 두텁게 칠했다. 옥수수를 모두 뽑은 후 씨를 뿌리는 게 상식인데 그는 옥수수를 뽑지도 않은 밭에 씨 뿌리는 사람을 그려넣었다. 그러니까 씨 뿌리는 사람은 실재 모습이 아니라 밀레의 <씨 뿌리는 사람>이 의도적으로 여기에 삽입된 것이다. 그는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이 작품에 관해 적었다.
“이제 막 일주일 동안 작열하는 태양 아래서 작업을 마쳤다. 옥수수 밭과 풍경, 그리고 씨 뿌리는 사람을 그렸다. 경작하는 들판, 지평선까지 보랏빛이 뭉실뭉실한 밭에 파란색과 흰색으로 씨 뿌리는 사람을 그렸다. 타작한 후의 옥수수 밭을 지평선에 닿도록 했다. 지평선 끝에 작열하는 노란 태양과 노란 하늘을 그려넣었다. 그림에서 색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단다.”
반 고흐는 화가가 자연과 알 수 없는 영원 사이에서 중재자가 될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현대 신학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신성 전체를 환기시키는 특권과도 같은 신성한 힘이 화가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자연의 모든 것이 말하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는 회화에서의 표현적 힘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았다. 그 자신은 자연에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고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왜 모든 사람이 보고 느끼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데, 자연 혹은 신은 귀와 눈을 가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적었다. 그는 화가로서 행복을 느끼는 이유가 자신이 본 것을 표현할 수 있고 표현하자마자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런 말은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반 고흐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회화를 통해 사람들을 교화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목사였기 때문에 그도 가업을 이어받아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삶을 살려고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그는 신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도저히 합격할 수 없음을 알고 포기했다. 렘브란트의 성화를 본 그는 화가가 되어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다고 판단해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화가는 목사에 비해 전혀 다른 직업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을 교화시킨다는 의미에서 볼 때는 동일한 직업이었다. 반 고흐의 작품은 이런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아를에서 그는 <씨 뿌리는 사람>을 그리는 데 전념했는데, “갈망하는 영원”과 “사후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며 자연과 영원 사이에 교량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했다. 그는 “요람에서의 어린 아이와 같은 눈으로 바라보면 영원이 눈에 보인다”고 했다. 자연에 대한 이런 그의 사고가 나타난 <씨 뿌리는 사람>은 자연 안에서 “이상과 추상”으로부터 “가능성과 진실”을 구분하려는 그의 노력의 첫 결실로 이해할 수 있다.
반 고흐는 6월에 그린 <해질녘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구성을 달리 해서 10월에 다시 그렸다. 그는 동일한 제목으로 달리 구성했는데, 배경을 보면 알필레와 폐허가 된 몽마주르 대수도원이 바라보이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반 고흐의 말로 “작고 불분명하다.” 이 작품에는 상징적 의미를 시사하는 요소가 없고 열심히 공을 들여 그렸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야외에서 그리면서 신속하고 자신감을 갖고 인상주의 방법으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씨 뿌리는 사람>은 들에 있는 한 농부의 모습이 아니라 상징적인 이미지이다. 이는 그가 해석한 예수 그리스도이기도 하다. 이 작품을 그릴 때 밀레의 농부와 들라크루아의 그리스도의 모습에서 영향을 받았다. 그는 들라크루아의 그리스도에서 원형으로 빛나는 후광에 감동하면서 “색 자체가 상징적 언어로 말을 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레몬과 같은 밝은 노란색을 보고 해와 달의 무리처럼 보인다고 했다. 들라크루아의 노란색은 그에게 매우 강렬하게 느껴졌으며 하늘의 별처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낯설고 매력적이라고 감탄했다. 반 고흐는 그리스도의 빛나는 후광의 효과를 씨 뿌리는 사람의 머리 뒤에 빛을 발하는 태양으로 대신했다. 그는 테오에게 들라크루아의 그리스도의 역할을 <씨 뿌리는 사람>에 적용하겠다고 적었으며, 베르나르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에서도 종교화에 관해 언급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거룩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미학적 힘으로까지 확대 해석했으며 “창조 행위”의 힘을 가졌기 때문에 가장 위대한 예술가라고 믿었다. 예수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로 설교했는데, 반 고흐는 예수 자신을 “순수한 창조력”을 가진 씨 뿌리는 사람으로 현대적 상징으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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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와 초상화




1888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자신의 귓불을 자르는 소동을 벌인 후 반 고흐는 생폴 드 모솔 요양원에 1년 동안 입원해야 했다. 그는 입원 중 네 차례의 발작을 일으켰다. 당시 요양원에는 서른 개의 병실이 비어 있었으므로 그 중 하나를 아틀리에로 사용할 수 있었다. 그는 작업할 때 환자들이 괴성을 지르며 벽을 두드리고 발광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환자들의 계속되는 광적인 고함소리, 곰팡이 냄새, 보잘 것 없는 음식 등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환청과 환각증세를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품 때문에 낙담하기도 했는데 “그림이 원하는 대로 그려지지 않을 때 엄청난 자책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닥터 페이롱은 테오에게 보낸 1889년 5월 26일자 편지에서 반 고흐가 처음에는 고통스러운 악몽을 꾸고 몹시 성을 냈지만 이제 많이 나아졌다고 보고했으며, 페이롱은 6월 5일 반 고흐에게 요양원 바깥에서 그림 그리는 것을 허락했다.
반 고흐는 9월 초 테오에게 다른 환자들과 어울리지 않으려고 작업실에 들어앉아 있으며 다만 간병인들 가운데 책임자인 트라부만 정기적으로 만난다고 했다. 9월 3일자인 듯한 이 편지에서 트라부에 관해 언급했다. 트라부는 환갑에 가까운 나이였고 1896년 9월 25일 생레미에서 사망했다.
“어제 간병인 중 책임자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의 아내의 초상도 그리게 될지 모르는데 이들 부부는 요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작은 집에 살고 있다. 트라부의 얼굴은 아주 흥미 있게 생겼으며 ...”
반 고흐는 트라부의 얼굴을 르그로의 <스페인 최고 귀족>(고흐 552)에 비유했다. 그는 트라부가 콜레라가 빠르게 확산될 무렵 두 차례에 걸쳐 마르세유의 병원에 근무하면서 고통당하고 죽어가는 많은 사람을 지켜봤기에 그의 얼굴에는 차분함이 있다고 적었다. 그는 트라부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귀조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했는데, 귀조는 제임스 드롬골 린턴이 1872년에 그린 <프랑스의 두 베테랑 정치가: 티에르와 귀조>(고흐 553)에서의 키 작은 사람을 말한다. 그는 이런 얼굴은 평범한 사람의 대표적인 얼굴이라고 했다. 트라부의 초상은 자신의 얼굴과 비교된다면서 반 고흐는 그의 초상을 그리기 전날 <자화상>(고흐 554)을 그렸다.
반 고흐는 닷새 동안 트라부의 초상을 두 점 그렸는데 한 점은 트라부가 의자에 앉은 실제 모습을 그린 것으로 현존하지 않고 테오를 위해 복제한 것만 남아 있다. 빠르게 복제하면서 배경을 청록색과 핑크색으로 대충 칠했다. 그는 자화상을 그린 지 닷새 후 <트라부 부인의 초상>(고흐 555)도 그렸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부인의 모습도 의자에 앉은 실제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것 또한 현존하지 않고 복제한 것만 남아 있다.
트라부 부부의 초상화는 생레미에서 반 고흐가 성취한 수준 높은 작품이다. 환자들을 돌보는 트라부의 깡마른 얼굴을 묘사하면서 줄무늬 옷이 그의 성격을 나타낼 수 있도록 상징적 요소로 부각시켰다. 사실적 방법으로 묘사한 얼굴과 상징적 옷이 한데 어울려 트라부는 극중 인물처럼 나타났다.
후기 인상주의의 주요 인물로 세잔, 고갱, 반 고흐를 꼽을 수 있다. 이들 세 명은 인상주의에 대해 매우 다양하게 반응했는데, “인상주의를 미술관 속의 그림처럼 단단하고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한 세잔은 회화의 구조에 몰두했으며, 고갱은 “자연주의의 지독한 결점”을 버리고 색채와 선의 상징적 사용을 탐구했다. 반 고흐의 자유로운 감정의 폭발은 표현주의의 원천이 되었다. 후기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로저 프라이가 1910~11년 런던의 그래프턴 화랑에서 자신의 기획으로 열린 ‘마네와 후기 인상주의전’의 명칭으로 1880년경부터 1905년경 인상주의로부터 발전된 혹은 그에 대한 반동으로 발생한 다양한 회화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반 고흐가 1890년 7월 29일 자살로 37해의 생을 마감한 후 20년 동안 그의 영향은 프랑스 표현주의 혹은 야수주의와 독일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매우 컸으며 특히 반 고흐의 초상화가 그들에게 표현을 위한 장르로 즐겨 사용되었다. 1905년 야수주의를 이끈 앙리 마티스가 그린 <마티스 부인의 초상>(고흐 913)은 반 고흐의 표현적인 채색의 영향이었고, 물감을 짧게 끊어서 사용한 것 외에도 색을 표현의 언어로 사용한 것 또한 반 고흐의 영향이었다. 마티스는 이런 표현적인 색의 언어를 풍경화에도 적용했다. 색이 좀더 밝아진 것은 마티스의 개성에 의한 것이지만 색의 문법은 반 고흐의 것을 그대로 따른 결과이다. 마티스의 밝은 색 사용은 그를 따른 젊은 화가들에 의해서 확산되었으며 앙드레 드랭과 모리스 블라맹크도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아 색을 표현의 수단으로 사용했다. 두 사람이 그린 상대방의 초상과 자화상에서 그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고흐 914, 915, 916)
반 고흐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친 것은 1905년 파리에서 개최된 반 고흐의 회고전을 통해서였다. 45점의 유화와 드로잉이 함께 소개된 이 회고전은 파리의 화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의 계기가 되었다. 회고전을 보고 충격을 받은 블라맹크는 “난 반 고흐를 나의 아버지보다 더 사랑한다”고 했다. 마티스는 베른하임 화랑에서 반 고흐의 작품을 보았는데 그곳에서 블라맹크와 드랭을 만났다. 세 사람 모두 반 고흐를 자신들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마티스는 새로운 회화가 들라크루아로부터 반 고흐와 고갱으로 이어지고 있었으며 폴 세잔이 최종적으로 볼륨 있는 색을 선보였다면서, 이들로부터 색을 감성적 힘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익히게 되었다고 말했다.
반 고흐의 영향은 독일 화가들에게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1896년 독일 뮌헨으로 이주해온 러시아 화가 알렉세이 야블렌스키는 파리의 회화 경향에 정통했으며 프랑스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반 고흐의 강렬한 감성을 나타내는 색의 사용에 영향을 받았다. 그가 1905년에 그린 <곱추>(고흐 917)에서 반 고흐의 영향을 볼 수 있다.
반 고흐를 자신의 선구자로 삼고 다리 그룹을 결성하여 조직적으로 독일 표현주의를 표방한 독일 화가는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 에리히 헥켈, 칼 슈미트-로틀루프였다. 세 사람 모두의 <자화상>은 반 고흐의 영향을 노골적으로 보여준다.(고흐 918, 919, 920) 가브리엘 뮌터는 바실리 칸딘스키와 함께 조금 늦게 새로운 미술운동 청기사 그룹에 속했으며 그녀도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고흐 921) 20세기 표현주의는 공교롭게도 같은 해인 1905년 마티스를 중심으로 야수주의 화가들과 키르히너를 중심으로 한 다리 그룹 화가들에 의해 프랑스와 독일에서 동시에 미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 표현주의는 양식이 아니라 미술운동이었다.
1912년 드레스덴과 뮌헨에서 반 고흐의 작품 125점이 소개된 후 그의 영향은 독일 화가들에게 매우 크게 작용했다. 야블렌스키가 1912년에 그린 <자화상>(고흐 922)에서는 독일의 어느 화가보다도 반 고흐의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때 받은 영향이 야블렌스키로 하여금 향후 표현주의 화가가 되게 했다. 반 고흐의 영향은 북유럽 화가들에게 크게 작용했으며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도 그의 영향을 받았으며 평생 표현주의 그림을 그렸다.
피카소는 1907년에 <자화상>(고흐 923)을 그렸는데 반 고흐의 자화상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그리면서 자신 특유의 각이 진 입체주의 방법을 혼용했다. 피카소는 영화에서 클로즈업하듯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서 조명한 것처럼 묘사하면서 반 고흐와 마찬가지로 단번에 그렸다.
1913년 리투아니아에서 파리로 온 러시아 화가 샤임 수틴은 반 고흐, 아프리카 조각, 세잔에게서 영향을 받았으며, 초상화에서 반 고흐의 영향이 두드러진다. 그의 <모이세 키슬링의 초상>(고흐 925)은 반 고흐의 <요제프 룰랭의 초상>(고흐 343)에서 영감을 받아 그린 것이다. 파리 보헤미아 화가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 꼽히는 수틴은 야수주의와는 별도로 밝은 색을 사용하는 표현주의 회화를 추구했으며 색을 거의 추상적으로 사용했지만, 붓질을 짧게 그리고 거칠게 사용하는 것은 반 고흐의 영향이었다. 이후 수틴이 그린 초상화에서 감동을 주는 표현적인 색채는 반 고흐의 영향을 나름대로 추상적인 색으로 진전시킨 것이다.
클림트, 쉴레와 더불어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오스카 코코슈카도 일찍이 반 고흐의 영향을 받았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아 현대인의 정신분열을 모티프로 즐겨 삼은 코코슈카에게 반 고흐의 강렬한 색채의 사용은 관심 밖일 수 없었다. 그가 1907년에 그린 <늙은 히르시그>(고흐 926)는 그가 아직 색을 거칠게 사용하기 전의 작품으로 조심스럽게 반 고흐의 채색법을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그는 반 고흐의 다양한 색의 효과를 응용하여 자신의 모티프를 강렬한 이미지로 만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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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별이 빛나는 밤>처럼 강렬한 느낌을 주는 작품을 반 고흐가 과거에 그린 적이 없었다.
이 작품에 관해 그는 조금밖에 언급하지 않았고 언제 그렸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성경의 창세기나 계시록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다고 말하기도 하고 졸라와 도데로부터 디킨스, 위트만 혹은 롱펠로 등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구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들도 있다.

반 고흐는 1889년 6월 초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1888년 아를에서 그린 <론느 너머 별이 빛나는 밤>을 곧 있게 될 앵데팡당전에 출품하라면서 "이 작품이 어떤 사람에게 내 것보다 나은 밤의 장면을 그리는 데 아이디어를 제공해줄 것이다"고 했다.
또한 "비록 고갱과 베르나르의 최근 작품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 두 습작 <별이 빛나는 밤>과 <올리브 과수원>이 두 사람의 작품과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된다"(1889년 6월 9일자)고 적었다.
테오는 <론느 너머 별이 빛나는 밤>과 <아이리시스> 두 점을 9월 3일부터 10월 4일까지 개최된 앵데팡당전에 출품했다.
6월 18일자 편지에는 "결국 난 올리브나무가 있는 풍경을 그렸으며 또한 별이 빛나는 하늘에 대한 새로운 습작을 했다"고 적었다.

<별이 빛나는 밤>은 높은 데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인데 실재가 아니라 상상의 풍경이다.
반 고흐는 근래에 그린 사이프러스를 하늘을 찌를 듯이 왼쪽에 그려넣었으며 오른쪽에는 과수원을 그렸다.
그는 하늘을 넓게 구성하고 별들의 드라마를 상상하여 묘사했다.

작품에 나타난 장소는 생레미의 어느 곳일 수도 있겠지만 반 고희 고향 누에넨의 풍경일 수도 있는 것이 네덜란드의 뾰족한 교회 지붕이 보이기 때문이다.
북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고딕 건물이 프랑스의 풍경에 삽입되었음을 본다.
반 고흐는 테오에게 <별이 빛나는 밤>을 9월 19일에 보내겠다고 약속했지만 9월 28일에야 보냈다.
테오는 이 작품을 "달빛 속의 동네"라고 부르면서 관심을 보였다.
테오는 이 작품을 1890년 4월에 열린 앵데팡당전에 출품했는데 카탈로그에는 "No. 832, Le Cypres"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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