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오리에의 호평에 대한 빈센트의 반응>


시인이자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는 1890년 1월 상징주의 예술가들의 잡지 <메르퀴르 드 프랑스> 첫 번재 호에 '소외된 사람, 빈센트 반 고흐'란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으므로 빈센트의 이름은 이제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빈센트가 이 글을 읽고 동생에게 피력한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순진하고 진정한 화가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소개한다.

다음은 오리에의 평이다.

빈센트 작품의 특성은 대체로 넘쳐나는 힘, 넘쳐나는 신경과민, 과도한 표현 등으로 정의된다.
사물에 대한 맹목적 단정, 종종 발견되는 과감하게 단순화한 형태, 태양을 정면으로 대하는 오만함, 스케치와 채색에 나타나는 격정적 열정, 가장 사소한 부분에서도 드러나는 강렬한 형상, 이런 것들은 남성적이며 과감하고 거의 야수성을 지니고 있지만 매우 섬세하다.
이처럼 자연주의자의 예술 저변에 베어있는 진정 이상적인 경향을 부정해버린다면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작품의 큰 부분은 도저히 이해되지 못한 채로 남게 될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경우 농부들의 모습을 어떻게 그처럼 당당하고 수선스러우며 야성적일 정도로 빛나는 이마를 가진 사람들로 묘사할 수 있을까?
빈센트는 늘 그들의 외모, 몸짓, 노동에 매혹되어 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석양 무렵의 불그스레한 하늘 아래서, 때론 활활 타오르는 정오의 황금빛 대지 한가운데 있는 그들의 모습을 쉬지 않고 그리게 한 것이다.
우둔하고 산업지상주의에 젖은 우리의 속성이 망령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힌 고정관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씨 뿌리는 사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섬세하면서도 영광스러운 태양신화와 관련된 이야기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그의 집착을 이해하지 않고서 어떻게 하늘에서 빛을 발하는 둥그런 태양, 그가 쉴새없이 반복해서 편집광적으로 그려낸 화려한 해바라기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빈센트는 오리에의 호평을 읽고 소감을 테오에게 적었다.

네가 보내준 오리에가 쓴 평론을 읽고 깜짝 놀랐다.
내 작품이 그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 글을 통해 앞으로 내가 어떻게 그려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 평론은 정정해야 할 결함을 아주 잘 지적했다.
그래서 필자가 나뿐 아니라 모든 인상파 화가들이 올바른 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 위해 썼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나는 물론이려니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는 공동의 이상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토록 불완전한 내 작품 여기저기에서도 장점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격려하는 말이어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며 기회가 되면 사의를 꼭 ㅍㅅ허고 싶구나.
하지만 그 과업을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내 등이 넓지 않다는 걸 확실히 밝혀두어야겠다.
그가 내 그림을 중심으로 썼으므로 감언이설을 듣는 것 같더구나.
(1890년 2월 2일 테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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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고갱의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절망에 빠진 폴 고갱은 1897년 12월 자살하기 위해 모아두었던 비소를 먹었으나 다 토해내고 고통 속에서 깨어났다.
1898년 2월 고갱은 파리에 있는 친구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난 달에 편지를 쓰지 못한 데 대해 미안하다면서 그럴 용기가 없었다고 적었다.
그는 또한 몽프레에게 자살하려고 집을 나서 산으로 갔고 그곳에서 죽을까 했는데 그렇게 되면 개미들이 자신의 시신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울 것이라고 했다.
독약을 많이 마셨지만 심하게 토하느라 독약이 도로 밖으로 나왔는지 그날 밤 지독한 고통을 겪다가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자살을 시도하기 전에 고갱은 거의 4미터 가량 되는 커다란 캔버스에 인생의 불가사의함을 묘사했다.
그에게는 유언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고갱은 몽프레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은 1896년 12월부터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를 그리기 시작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죽기 전 구상하고 있는 큰 그림을 완성시키려고 하며 한 달 내내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밤낮으로 작업에 열중하고 있네.
오 하나님,
내가 그리고 있는 건 퓌비 드 샤반이 실재 삶으로부터 드로잉한 만화같은 그런 따위의 준비과정을 통해 그린 것과는 다르네.
매듭과 주름진 캔버스 바탕 위에 붓끝으로 직접 물감을 칠하는 것으로 대단히 거칠게 나타나는 그림이네.
사람들은 사려 깊지 못하고 미완성이라고 말할 걸세.
자신의 작품을 판단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그간 내가 해온 것들을 초월하는 것으로 이와 같거나 이보다 더 나은 그림을 난 그릴 수 없을 것 같네.
죽기 전에 나의 모든 에너지와 고통스러운 가운데서도 열정을 다 쏟으려고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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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별이 빛나는 밤>처럼 강렬한 느낌을 주는 작품을 반 고흐가 과거에 그린 적이 없었다.
이 작품에 관해 그는 조금밖에 언급하지 않았고 언제 그렸는지도 밝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성경의 창세기나 계시록에서 영감을 받아 그렸다고 말하기도 하고 졸라와 도데로부터 디킨스, 위트만 혹은 롱펠로 등에 이르기까지 작가들의 작품에서 아이디어를 구한 것이라고 말한 사람들도 있다.

반 고흐는 1889년 6월 초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1888년 아를에서 그린 <론느 너머 별이 빛나는 밤>을 곧 있게 될 앵데팡당전에 출품하라면서 "이 작품이 어떤 사람에게 내 것보다 나은 밤의 장면을 그리는 데 아이디어를 제공해줄 것이다"고 했다.
또한 "비록 고갱과 베르나르의 최근 작품을 보지는 못했지만 이 두 습작 <별이 빛나는 밤>과 <올리브 과수원>이 두 사람의 작품과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된다"(1889년 6월 9일자)고 적었다.
테오는 <론느 너머 별이 빛나는 밤>과 <아이리시스> 두 점을 9월 3일부터 10월 4일까지 개최된 앵데팡당전에 출품했다.
6월 18일자 편지에는 "결국 난 올리브나무가 있는 풍경을 그렸으며 또한 별이 빛나는 하늘에 대한 새로운 습작을 했다"고 적었다.

<별이 빛나는 밤>은 높은 데서 내려다본 마을 풍경인데 실재가 아니라 상상의 풍경이다.
반 고흐는 근래에 그린 사이프러스를 하늘을 찌를 듯이 왼쪽에 그려넣었으며 오른쪽에는 과수원을 그렸다.
그는 하늘을 넓게 구성하고 별들의 드라마를 상상하여 묘사했다.

작품에 나타난 장소는 생레미의 어느 곳일 수도 있겠지만 반 고희 고향 누에넨의 풍경일 수도 있는 것이 네덜란드의 뾰족한 교회 지붕이 보이기 때문이다.
북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고딕 건물이 프랑스의 풍경에 삽입되었음을 본다.
반 고흐는 테오에게 <별이 빛나는 밤>을 9월 19일에 보내겠다고 약속했지만 9월 28일에야 보냈다.
테오는 이 작품을 "달빛 속의 동네"라고 부르면서 관심을 보였다.
테오는 이 작품을 1890년 4월에 열린 앵데팡당전에 출품했는데 카탈로그에는 "No. 832, Le Cypres"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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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과 반 고흐의 상징주의 그리고 표현주의


상징주의는 1885년경~1910년경에 성행했던 문학과 미술운동으로 사실에 충실한 재현을 거부하고 환기와 암시의 방법을 선호했다.
상징주의는 19세기 말 폭넓은 반물질주의, 반합리주의 조류의 한 부분이었고, 특히 인상주의의 자연주의적 목표에 대한 반동이었다.
화가의 감정적 경험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상징주의 회화는 색채와 선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상징주의는 강렬하고 신비적인 종교적 감정을 특징으로 하며, 에로틱한 것과 병적인 것도 중요하게 다뤘다.
상징주의 화가들은 평면화된 형태와 넓은 색면을 지향했다.

예술이 곧 표현이라는 생각은 고갱과 반 고흐에게서 이미 나타났고 이를 분명하게 글로 밝힌 것은 20세기에 들어서였다.
서양미술에서 표현을 중시하게 된 것은 천재의 개념과 함께 낭만주의 시대에 수립되었다.
천재는 어떤 분야에서건 정신적인 세계, 즉 절대에 대해 보통 사람들보다 우월한 통찰력을 가지며, 따라서 그는 자신의 우월한 인성을 표현함으로써 자신보다 열등한 사람들을 어느 정도 자신과 유사한 수준의 통찰로 이끌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에 근거하여 예술작품의 가치가 예술가의 가치에서 비롯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고갱과 반 고흐의 작품에는 상징주의와 표현주의의 요소가 함께 내재해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하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자화상 그리고 정물화, 풍경화, 인물화 등에서 이런 점을 발견하기란 쉽다.

고갱이 반 고흐에게 보낸 자화상 <레 미레제라블: 베르나르의 초상이 있는 자화상>(고갱 16)을 보면 성난 모습이다.
그는 자신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 발장에 비유했다.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한 그는 <자화상>을 통해 “예술가의 영혼을 타오르게 만드는 격렬한 화염을 묘사하려고 했다”면서 1888년 10월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에 적었다.

“동심 어린 꽃송이와 소녀 같은 배경이 우리의 예술적 순수성을 나타낸다네.
장 발장에 관해 말하자면, 사회의 억압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사랑과 힘이 부랑자처럼 달라진 것이라네.
우리 인상주의 화가들도 마찬가지이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나 자신을 장 발장으로 묘사함으로써 스스로를 넘어서 사회에서 비참하게 희생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을 그리려고 한 것이네.”

고갱은 자신을 고뇌하는 순교자의 모습으로 묘사하면서 순진한 모습의 에밀 베르나르의 초상화를 배경에 삽입해 일그러진 자신의 얼굴과 대조되게 하고 꽃무늬를 후광처럼 장식해 자신의 얼굴을 장 발장으로 상징하며 두드러지게 표현했다.

이 작품과 편지를 받고 반 고흐도 답례로 <자화상 (폴 고갱에게 바침)>을 고갱에게 보냈다.
그는 일본 판화에서 승려를 보고 자신의 머리를 깎았다.
그는 자신이 회화 세계에서 도를 구하는 수도승과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고갱은 사회를 위해 희생하는 장 발장이었고 고흐는 회화를 위해 도를 구하는 수도승이었다.
반 고흐는 1888년 6월에 수도승이 등장하는 피에르 로티의 소설 <마담 크리상템>을 읽었고 일본 판화 복사본을 수집하고 있었는데, 이런 것들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자화상에서 물과 불 같은 성격이 드러났는데 고갱은 인습타파주의자였으며, 빈정거리는 말을 했고, 냉소적이었으며, 궤변을 일삼았고, 무심한 면이 있었다.
반면 반 고흐에게는 북유럽 사람의 기질인 거친 면이 있었으며, 천성이 열심히 노력하는 기질이었고, 동료에게 격정적인 애정을 쏟는 불 같은 사람이었다.
반자연주의적인 혹은 상징주의 그림을 주로 그린 두 사람은 지성이나 관망한 사물로부터가 아니라 개인적인 감성에 기초하여 그렸다.

두 사람의 자화상에서 눈과 코 부분을 때어내 화풍을 비교할 수 있다.
고갱은 살색을 칠했고, 눈썹 가장자리를 어두운 색으로 테를 둘렀으며,
물감 위에 연필이나 목탄을 사용해 드로잉의 효과를 첨가한 데 비해 고흐는 물감을 2~3mm 정도로 두텁게 사용하면서 눈썹을 삼차원적으로 표현하고 볼 또한 거친 붓자국으로 물감을 거칠게 두텁거나 얇게 칠하면서 살색이 아닌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적이고 상징적인 색을 사용했다.
두 자화상에서 기법의 차이가 매우 상이하게 나타나 두 사람의 독특한 감각을 느낄 수 있다.

화가의 감정적 경험을 나타내는 상징주의와 화가의 우월한 인성을 드러내는 표현주의는 종종 모호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예를 두 사람의 정물화와 인물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반 고흐가 1885년 그린 <펼친 성경이 있는 정물>은 세 가지 오브제 현대소설, 펼친 성경, 촛대로 구성되었다.
이런 오브제들은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 종종 등장한 것들로 반 고흐의 오브제 선택에는 새로운 점이 없다.
이 정물화의 특징은 크고 작은 것의 대비로서 커다란 성경과 작은 소설, 펼쳐진 책과 닫힌 책, 단색조의 책과 밝은 색상의 책을 꼽을 수 있으며 그래서 모호한 느낌을 준다.
펼쳐진 성경은 구약 이사야서 35장, 유명한 ‘종의 노래’가 기록된 페이지로 이사야가 시적으로 예언한 장차 오실 메시야의 역할로 해석되는 구절이다.
메시야는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고난 받는 종으로 훗날 그리스도의 전형이 되었다.
소설은 에밀 졸라가 1884년에 쓴 <삶의 기쁨 La Joie de vivre>이다. 진리를 상징하는 성경은 커서 권위의 느낌을 주고 소설은 작지만 밝은 노란색으로 시선을 끈다.
<삶의 기쁨>은 매우 진지한 철학적 의문을 내포한 책으로 졸라는 전통 신앙이 부재한 가운데서 우리가 삶의 모든 비극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의미 있는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지 독자에게 묻는다.
반 고흐는 이 정물화를 통해 신앙이 삶의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반 고흐가 실재를 신성화하는 신성한 사실주의라 할 수 있는 경향으로 나아갈 때 고갱의 작품은 초자연적 이상주의로 변하고 있었다.
이런 변화가 심화되어 고갱은 말년에 악마숭배 및 엑소시즘의 그림을 그리게 된다.
고갱의 대표작 <설교 후의 영상>은 1888년 9월 중순 퐁타방에서 그린 것이다.
그는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는 장면을 바라보는 시골뜨기 여인들이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 사이에서 환희를 경험하는 순간을 모티프로 삼았다.
반 고흐의 <해질녘 씨 뿌리는 사람>이 개신교 입장에서 본 새로운 종교화라면, <설교 후의 영상>은 가톨릭 입장에서 본 고갱의 환상적인 새로운 종교화라고 할 수 있다.
반 고흐의 환상이 실재적인 데 반해 고갱의 환상은 비실재적이다.
반 고흐의 작품이 물리적이며 자연주의적인 데 반해 고갱의 것은 형이상학적이며 초자연적이다.
고갱이 <설교 후의 영상>을 팔지 않고 브르통의 한 성당에 기증하고 싶어 한 것이 흥미롭다.

상징주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알베르 오리에는 1891년 3월에 발표한 ‘회화에 있어 상징주의 운동’에서 고갱의 작품으로 상징주의를 설명했다.
오리에는 상징주의 성격의 작품에는 다섯 가지 내용이 필히 구비되어야 하는데 고갱의 작품에는 그것들이 있다고 주장했다.

1. 아이디어가 표현되어야 한다.
2. 상징적이어야 함은 고유한 표현이 아이디어에 있기 때문이다.
3. 추상적이어야 함은 일반적 의미 속에서 형태와 부호가 기록되기 때문이다.
4. 주관적이어야 함은 객관은 객관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주관자에 의해 관망한 부호가 되기 때문이다.
5. 장식적이어야 함은 이집트인, 그리스인, 원시인들이 예술적으로 장식했으며 그것들은 주관적, 추상적, 상징적, 이상적이었기 때문이다.

오리에의 다섯 요소는 고갱의 미학을 적절하게 설명했으며 20세기 미술의 특징으로 나타날 표현주의의 성격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학자들은 반 고흐와 고갱을 표현주의 예술가들의 선조로 찬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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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에의 호평에 대한 빈센트 반 고흐의 반응
 

  시인이자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는 1890년 1월 상징주의 예술가들의 잡지 <메르퀴르 드 프랑스> 첫 번재 호에 '소외된 사람, 빈센트 반 고흐'란 제목으로 글을 기고했으므로 빈센트의 이름은 이제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빈센트가 이 글을 읽고 동생에게 피력한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순진하고 진정한 화가인지 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글을 소개한다.

다음은 오리에의 평이다.

빈센트 작품의 특성은 대체로 넘쳐나는 힘, 넘쳐나는 신경과민, 과도한 표현 등으로 정의된다.
사물에 대한 맹목적 단정, 종종 발견되는 과감하게 단순화한 형태, 태양을 정면으로 대하는 오만함, 스케치와 채색에 나타나는 격정적 열정, 가장 사소한 부분에서도 드러나는 강렬한 형상, 이런 것들은 남성적이며 과감하고 거의 야수성을 지니고 있지만 매우 섬세하다.
이처럼 자연주의자의 예술 저변에 베어있는 진정 이상적인 경향을 부정해버린다면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작품의 큰 부분은 도저히 이해되지 못한 채로 남게 될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의 경우 농부들의 모습을 어떻게 그처럼 당당하고 수선스러우며 야성적일 정도로 빛나는 이마를 가진 사람들로 묘사할 수 있을까?
빈센트는 늘 그들의 외모, 몸짓, 노동에 매혹되어 있다.
그것이 그로 하여금 석양 무렵의 불그스레한 하늘 아래서, 때론 활활 타오르는 정오의 황금빛 대지 한가운데 있는 그들의 모습을 쉬지 않고 그리게 한 것이다.
우둔하고 산업지상주의에 젖은 우리의 속성이 망령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힌 고정관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씨 뿌리는 사람>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섬세하면서도 영광스러운 태양신화와 관련된 이야기에 대한 지칠줄 모르는 그의 집착을 이해하지 않고서 어떻게 하늘에서 빛을 발하는 둥그런 태양, 그가 쉴새없이 반복해서 편집광적으로 그려낸 화려한 해바라기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빈센트는 오리에의 호평을 읽고 소감을 테오에게 적었다.

네가 보내준 오리에가 쓴 평론을 읽고 깜짝 놀랐다.
내 작품이 그 정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단지 그 글을 통해 앞으로 내가 어떻게 그려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 평론은 정정해야 할 결함을 아주 잘 지적했다.
그래서 필자가 나뿐 아니라 모든 인상파 화가들이 올바른 곳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 위해 썼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나는 물론이려니와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그는 공동의 이상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토록 불완전한 내 작품 여기저기에서도 장점을 볼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격려하는 말이어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며 기회가 되면 사의를 꼭 ㅍㅅ허고 싶구나.
하지만 그 과업을 짊어질 수 있을 만큼 내 등이 넓지 않다는 걸 확실히 밝혀두어야겠다.
그가 내 그림을 중심으로 썼으므로 감언이설을 듣는 것 같더구나.
(1890년 2월 2일 테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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