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미스터 최 - 사노 요코가 한국의 벗에게 보낸 40년간의 편지
사노 요코.최정호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 남해의봄날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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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사노 요코가 베를린 유학 중 만난 한국인 남성 '미스터 최'(최정호)와 40여 년 동안 주고받은 편지를 엮어서 만든 책이다. 


처음에는 책의 콘셉트에 대해 반감이 없지 않았다. 두 사람이 오랫동안 사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 남은 한 사람이 그 편지들을 세상에 내보인다는 게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책을 읽고 오래전부터 미스터 최가 사노 요코에게 편지들을 모아서 책을 내고 싶다는 뜻을 밝혀 왔음을 알 수 있었고("사노 요코의 편지는 혼자 읽기엔 너무나 아까운, 편지의 모양을 빙자한 하나의 에세이다"), 사노 요코가 세상을 떠난 후라도 출간될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재 정권의 박해를 피해 도망치듯 베를린으로 유학 온 남자. 나이를 먹고 남편이 있어도 미술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여자. 두 사람은 한 송년 파티에서 만나 둘 다 일본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친해졌고, 각자의 나라로 돌아간 후에도 편지를 계속 주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오로지 예술만 생각했던 여자는 일본이 한국에 저지른 만행을 대신 사과하고 한국의 혼란스러운 정치 상황 때문에 고초를 겪는 남자를 진심으로 걱정한다. 나라 걱정과 생계에 대한 부담으로 매사에 심각했던 남자는 여자 덕분에 웃음을 되찾고 인생을 즐기는 법을 배운다. 


40년 동안 친구였다고 해도 실상 자주 얼굴을 본 건 베를린 유학 시절 몇 년이 전부일 텐데, 아무에게나 털어놓기 힘든 내밀한 이야기들도 나눈 걸 보면 우정의 농도가 꽤 진했던 것 같다. 사노 요코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 전 "서투른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라 서투른 글도 쓰고 있"다며 "이러다가 제 에세이집이 나오면 어떡하지요? 사람은 수치를 모르는 동물이에요"라고 걱정한 대목이라든가, 출산과 두 번의 이혼을 겪으며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이야기한 대목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두 사람 모두 틈만 나면 당신의 재능이 부럽다며, 쉬지 말고 책을 쓰라고 독려하는 장면이 자주 나오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사노 요코는 한국어를 못해서 미스터 최가 쓴 책을 읽지 못할 텐데도 그런 말을 하니 재미있었다. 사노 요코가 말년에 한국 드라마에 심취했던 것으로 아는데, 오랫동안 미스터 최를 통해 한국 문화를 간접적으로 접했던 사노 요코의 눈에 드라마 속 한국의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지도 궁금하다. 한국에 늘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던 그가, 한국에서 이토록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작가가 되었다는 걸 알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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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좋아서, 음악을 생각합니다 - 음악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정경영 지음 / 곰출판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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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음악 하면 악기 연주나 노래 등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사물들을 타악기처럼 두드리는 '난타' 공연에서 발생하는 소리는 음악일까. 휘파람이나 박수소리, 새소리, 물소리, 바람에 나뭇잎이 스치면서 나는 소리 등은 음악일까. 쇤베르크의 곡이 음악이라면, 층간 소음이나 아기 울음소리, 공사장에서 나는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을까. 이 책은 바로 이런 생각들, 상상들에 답하는 책이다. 


저자 정경영은 한양대학교에서 음악사, 음악학, 음악과 관련된 교양과목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 책은 '인간과 음악적 상상력'이라는 제목으로 진행해온 교양과목의 내용을 정리하고 보완한 것으로, 타 전공 학생들도 수강하는 수업인 만큼 내용이 어렵지 않으면서도 대학 강의답게 깊이가 있다. 


우리가 음악 하면 떠올리는 음악은 주로 유럽의 클래식(고전주의) 음악에서 출발한 서양 음악 전반을 가리킨다. 이렇게 음악을 정의할 경우, 동양의 음악과 고전주의 이전의 음악이 배제되는 문제가 생긴다. 또한 악보가 존재하지 않는 음악, 악기에 의해 연주되지 않는 음악 등이 무시되고,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은 사람만이 음악 생산자, 음악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식의 인식을 낳는다. 


책에 따르면 음악은 "멜로디, 리듬, 강약 등의 도구를 통해 물리적으로 일정하게 흘러가는 객관적 시간에 적절한 포인트를 주어 그 시간을 나의 것, 즉 주관적 시간으로 만드는" 행위로서, 이 정의에 따르면 음악을 전공하지 않은 비전공자, 일반인도 누구나 음악을 만들거나 즐길 수 있다. 훌륭한 연주나 노래를 듣고 손뼉을 치는 행위, 공연장에서 떼창을 하는 행위 등은 음악을 감상하고 향유하는 행위인 동시에 연주자, 공연자와 '함께' 음악을 만들고 완성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음악은 "특별한 경험을 갖춘 사람들만의 경험"이 결코 아니다. 친구나 연인과 좋아하는 음악을 공유했던 기억, 카페나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감동했던 기억, 등하굣길이나 출퇴근길에 음악을 들으며 힘을 내거나 위로받았던 기억, 좋아하는 뮤지션의 콘서트나 연주회에 갔던 날의 기억 등등 누구에게나 잊지 못할 음악에 얽힌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런 기억들을 떠올리게 해주는 유익하고 흥미로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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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트 투스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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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시대에 한 젊은 여성이 영국 정보부의 요원이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소설이라고 해서 존 르 카레의 <리틀 드러머 걸>을 상상했는데 설정만 비슷하고 전개는 전혀 다른 소설이다. 결말에 반전이 있으므로 스포일러에 주의하시기를(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없습니다). 


1972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졸업을 앞둔 세리나 프룸은 영국 정보부에서 일하는 연상 애인의 지도를 받아 MI5에 취직한다. 사무직 말단으로 몇 달을 보낸 후 처음으로 중요한 임무를 맡게 되는데, 임무의 내용은 '문화 전쟁'의 일환으로서 자유진영을 옹호하고 공산진영을 비방하는 내용을 담은 글을 쓰는 작가들을 지정하고 후원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세리나는 위장 신분으로 신예 작가 톰 헤일리에게 접근하게 되고, 몇 번의 만남 후 둘은 사랑에 빠진다. 


이 소설에는 세 개의 큰 비밀이 있다. 첫 번째는 세리나가 톰에게 감추고 있는 비밀이고, 두 번째는 세리나를 MI5에 취직시킨 전 애인에 관한 비밀이다. 세리나는 톰을 속이면서 톰과 연애하는 동안 남몰래 전 애인에 대해 조사한다. 과연 그는 나를 이용하기만 한 걸까, 아니면 진심으로 사랑하기도 한 걸까. 세리나를 오랫동안 괴롭힌 이 질문은 얼마 후 세리나 자신에게 돌아온다. 누가, 어떻게 그 질문을 되돌려 보내는지가 바로 이 소설의 세 번째 비밀. 


플롯이 기발하고, 로맨스와 스릴러, 첩보가 더해져 있어서 그런지 책장이 쭉쭉 넘어간다. 문화 전쟁을 소재로 하고 작가가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만큼 문학의 기능과 작가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볼 만한 점들도 많이 언급되어 있다. 영화화를 기대해 봐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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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하여 - 작가가 된다는 것에 관한 여섯 번의 강의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박설영 옮김 / 프시케의숲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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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이지만 주제가 진지하고 내용이 철저해 체계적으로 마련된 대학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는지, 무슨 계기로 작가가 되었으며 작가가 된 후 어떤 고민을 했는지 등도 알 수 있어 팬으로서 유익하고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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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대하여 - 작가가 된다는 것에 관한 여섯 번의 강의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박설영 옮김 / 프시케의숲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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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애트우드가 2000년 <눈먼 암살자>로 부커상을 수상한 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의 의뢰를 받아 여섯 번의 대중 강연을 한 내용을 엮은 책이다. 대중을 상대로 한 강연이지만 주제가 진지하고 내용이 철저해 체계적으로 마련된 대학 강의를 듣는 기분이었다. 


책에는 작가란 무엇인지, 누구를 위해 글을 쓰는지, 왜 글을 쓰는지 등등에 관한 이야기가 자세히 나온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은 물론, 단테, 셰익스피어, 에밀리 디킨슨, 에이드리언 리치, 뒤라스, 톨킨 등 수많은 작가들의 작품이 언급되고 분석된다. 인용된 작품 수가 어마어마해서 그동안 작가가 얼마나 많은 작가들과 작품들을 섭렵했는지 일부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작가는 뛰어난 영감을 지닌 예술가인 동시에 먹고살아야 하는 생활인이다. 또한 남다른 재능을 가진 천재로 숭배받는 동시에 먹고사는 데 하등 쓸모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한량으로 경멸 받는다. 저자는 이런 식의 이중성, 이중적인 시각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되었는지 설명한다. 나아가 이러한 모순 또는 분열에 대한 고민이 카프카, 오스카 와일드, 앨리슨 먼로, 스티븐 킹 같은 작가들의 작품에 어떤 식으로 반영되어 있는지 소개한다. 캐나다 문학이 식민지 문학으로 치부되는 것에 대한 복잡한 마음을 토로하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마거릿 애트우드가 어떤 유년 시절을 보냈는지, 무슨 계기로 작가가 되었으며 작가가 된 후 어떤 고민을 했는지 등도 알 수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1939년 캐나다 오타와에서 태어나 캐나다 북부 지역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고 캐나다 북부 지역은 인적이 드문 관계로 저자는 유년 시절 내내 사람을 많이 보지 못했다. 그 대신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지 않는 오빠와 둘이서 놀 때가 많았는데, 오빠와 함께 이야기를 짓고 연극 놀이를 한 경험이 글을 쓰고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회고한다. 


페미니스트 작가답게 같은 주제에 대해 남성과 여성의 경우를 나누어 분석한 점이 돋보인다. 가령 남성 작가는 사생활이 활동에 지장을 주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여성 작가는 결혼하거나 임신만 해도 작가로서 끝났다는 말을 듣는다. 남성 작가는 사회적 물의를 빚거나 범죄를 저질러도 별 탈 없이 활동하고 심지어 불명예가 명성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여성 작가는 사소한 실수조차 경력 단절로 이어진다. 비단 작가뿐일까. 마음이 착잡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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