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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민은 채식주의자 ㅣ 짧아도 괜찮아 4
구병모 외 지음 / 걷는사람 / 2018년 11월
평점 :
얼마 전 고위 공직자가 "민중은 개, 돼지로 취급하면 된다."라고 말해서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다. 국민의 종복인 공무원이 국민을 조롱하고 폄하한 사실에 분노하는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나라에서 개와 돼지가 어떤 대접을 받기에 분노하는 마음이 들까. 인간이 개나 돼지보다 낫다는, 나아야 한다는 근거는 뭘까. 인간과 개와 돼지가 모두 잘 사는 세상을 만들 순 없을까.
<무민과 채식주의자>는 도서출판 걷는사람이 기획한 테마 소설 시리즈 '짧아도 괜찮아'의 네 번째 작품집이다. 이번 작품집의 주제는 '동물권(animal right)'이다. 인권에 비견되는 동물의 생명권을 의미하는 동물권은 동물이 고통을 피하고 학대 당하지 않을 권리, 인간과 마찬가지로 적절한 서식 환경에서 살아갈 권리, 인간의 유용성 여부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지 않을 권리 등을 포함한다. 이 책에는 최근 작품 활동이 활발한 작가 중에서도 평소 동물에 대한 깊은 애정을 보인 열여섯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가나다순으로 구병모, 권지예, 김봄, 심서령, 김연희, 김은, 박상영, 위수정, 이순원, 이장욱, 이주란, 정세랑, 최정화, 태기수, 하명희, 황현진 등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동물들의 모습은 사랑스럽기보다는 처연하고 안타깝다. 어떤 개는 전쟁터에서 탱크 폭발 작전에 이용되고(구병모, <날아라 오딘>), 어떤 햄스터들은 불어나는 새끼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아이들의 손에 죽는다(박상영, <이상한 꿈을 꿨어>). 동물이 불행하면 인간도 불행해진다. 공무원이던 사촌 오빠는 AI 판정을 받은 동물들을 살처분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고(이주란, <겨울은 가고>), 채식주의자 애인과 헤어진 후 환장한 듯이 고기를 먹어치운 사람은 냉장고에 넣어둔 동물의 머리통에 달린 눈을 보고 심한 죄책감을 느낀다(이장욱, <무민은 채식주의자>). 개고기를 먹은 선조들을 오늘날 다수의 한국인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것처럼, 육식을 즐긴 선조들을 몰상식하다 생각하는 미래인들의 이야기도 나온다(정세랑, <7교시>).
좋아하는 작가들의 단편을 읽는 것 이상의 가치와 의미가 있는 책이라서 좋았다. 이 책을 읽고도 동물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을까. 동물의 살점과 피를 먹고, 동물의 털과 가죽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는 일에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당장 오늘부터 채식주의자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일부러 고기를 사 먹지는 않으려고 한다. 동물이 불행한 세상에선 인간도 불행할 테고, 동물이 행복한 세상에선 인간도 행복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