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13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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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도제도의 앤티가 섬에서 나고 자란 열 살 소녀 애니 존은 외동딸로서 엄마 아빠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애니는 엄마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아빠보다 엄마를 더 좋아하는데, 이제 제법 머리가 컸는데도 애니는 여전히 엄마와 떨어져 지내는 걸 상상할 수 없고, 조금이라도 상상하려고 하면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 애니에게 제2차 성징이 찾아온다. 애니를 항상 만지며 예뻐해 줬던 엄마는, 언제부터인가 애니를 만지지도 않고 애니가 엄마에게 달려들면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고 타이른다. 그런 엄마에 대한 반감 때문에 점점 더 엇나가는 애니와 그런 애니를 가만두고 볼 수 없는 엄마의 갈등이 심화된다.


카리브해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자메이카 킨케이드의 첫 장편소설 <애니 존>은 작가의 대표작 <루시>의 프리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설정이나 전개가 비슷하다. 두 작품의 줄거리를 거칠게 요약하면 카리브해에 위치한 영국령 섬나라 출신의 어린 흑인 소녀가 성장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데, 먼저 읽은 <루시>가 10대 중후반의 주인공이 섬에서 나와 미국에 도착해 입주 보모로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야기라면, 이번에 읽은 <애니 존>은 이제 막 10대에 접어든 주인공이 일련의 사건을 겪고 가족의 품에서 벗어나 섬을 떠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루시>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내용 위주인 데 반해 <애니 존>은 추상적이고 일견 비현실적으로도 보이는 내용이 많다. 이를테면 병을 앓는 루시가 환각을 보거나 이상 행동을 보이는 대목이 그렇다. 실제로 이런 체험을 하거나 행동을 보이는 사람이 있기도 하겠지만, 내 생각에는 신체 나이는 청소년의 그것이지만 정신적인 연령은 아직 유아기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애니의 몸과 마음이 그동안의 부조화를 극복하고 마침내 비슷한 수준에 이르는 과정에서 일어난 착란이 아닐까 싶다. 책 뒷부분에 실린 해설에 따르면 프로이트 심리학과 관련이 있다고 하는데 이런 해석도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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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리스트 마르틴 베크 시리즈 10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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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스웨덴 스톡홀름. 이제 막 시작된 하루를 맞이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가운데 한 남자가 불시의 습격을 받고 쓰러진다. 남자의 아내가 시체를 발견해 경찰을 부르고, 현장에 도착한 경찰은 남자가 생전에 주로 나이 어린 여성들을 대상으로 도색 영화를 찍었던 영화 감독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사를 맡은 스웨덴 국가수사범죄국 살인수사과 책임자 마르틴 베크는 남자가 찍은 영화에 출연한 여자들 또는 그들의 주변인들이 원한을 품고 복수심에 그를 살해했다고 추정하고 범인 찾기에 나선다. 과연 이 남자를 죽인 범인은 누구일까.


북유럽을 대표하는 미스터리 소설 '마르틴 베크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테러리스트>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교차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소설 초반에는 테러 방지 기술을 배우기 위해 라틴 아메리카 국가로 출장 간 스웨덴 경찰이 테러 공격을 받는가 하면, 얼마 전 스웨덴 전역을 떠들썩하게 한 은행 강도 사건의 범인으로 오인 받아 재판을 받게 된 가난한 미혼모 레베카 린드의 이야기가 펼쳐지는가 싶더니, 전술한 영화감독 살인 사건이 흥미진진하게 진행되고, 중간중간에 마르틴 베크의 새로운 연인인 레아와의 이야기가 삽입된다.


어느 이야기도 큰 줄기로 여겨지지 않아서 중반까지 갈피를 못 잡고 읽다가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흥미를 확 느끼고 집중해서 읽었는데, 그 시점이 어디인지는 이 소설을 읽어본 사람들만이 나눌 수 있는 이야기인 것 같다. 요약하자면, 여느 미스터리 소설과는 형식이 약간 다른데 계속 읽다 보면 작가가 왜 이렇게 산만하게 이야기를 전개했는지 이해가 되니 계속 읽어보시라... 아무튼 2017년 시리즈 제 1권 <로재나>가 출간되었을 때부터 해마다 열심히 읽은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끝나서 시원섭섭하다.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 시리즈 이전에 북유럽 미스터리의 부흥을 이끌었던 명작을 읽는 동안 기쁘고 즐거웠다. 이들의 명성을 이어 받을 시리즈는 무엇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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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울지 않는 밤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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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외곽에 위치한 모델하우스 분양대행사무소에서 근무하는 '나'는 동료 직원들로부터 공공연하게 따돌림을 당한다. 따돌림의 이유는 '나'가 소장의 처제이기 때문인데, 단순히 소장의 친인척이라서가 아니라 소장이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어서 뭐라도 항변도 못하는 상황이다. 이 와중에 업무상 사무소를 드나드는 서형찬이라는 남자가 '나'에게 친근한 태도를 보인다. '나'는 서형찬에게 틱틱거리면서도 점점 호감을 느끼는데, 그러다 서형찬이 부러 밝히지 않았던 어떤 진실을 알게 되면서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2023년에 출간된 소설가 김이설의 소설집 <누구도 울지 않는 밤>에는 총 열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일견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사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단편들이 죽음 전후를 그리는 것이 인상적이다. 먼저 소개한 <모면> 정도가 예외적이고, 이어서 등장하는 <내일의 징후>는 4년 동거한 커플이 헤어지는 장면으로 시작해 등장 인물 중 한 명이 죽임을 당하면서 끝나고, <축문>은 1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워 하는 남편과 그들의 두 딸 이야기를 그린다. <환기의 계절>은 오래 전 가족을 떠난 아버지가 죽음을 앞두고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면서 생기는 일들을 담고 있다.


자매도 많이 나온다. <모면>을 비롯해 <축문>, <환기의 계절>, <치유정원에서>에 나오는 자매들은 같은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보이며 갈등을 빚고 (아마도) 결국 화해에 이른다. 이 책에 실린 단편 대부분이 밝고 즐거운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반 뗀 라 지?>는 내용이 상당히 어둡다. 베트남에서 시집 온 엄마와 한국인 아빠를 둔 두연은 한 집에 사는 고모의 아들 지혁에게 지속적인 학대와 성폭행을 당한다. 피해와 고통을 호소해도 2차 가해를 당할 뿐이다. 한국 사회의 그늘진 곳까지 꼼꼼하고 세심하게 시선을 드리우는 작가의 태도가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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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의 분위기
박민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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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사 논문 제출을 앞두고 있는 유미는 대학 도서관 열람실에서 매일 같이 논문을 쓴다. 열람실에는 유미처럼 각자의 공부에 집중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인데, 단 한 사람만은 자신이 해야 하는 공부가 아닌 다른 대상에 집중하는 것 같다. 그 대상은 바로 유미이고, 문제의 인물은 유미의 옆자리에 앉는 남자다. 처음에는 유미도 자신이 요즘 너무 바쁜 탓에 평소보다 예민해져서 착각하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라기에는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떻게 매번 그렇게 유미의 옆자리에 앉는지, 유미를 지켜보는 느낌이 드는지... 이 느낌이 착각이 아닌 또 다른 근거는 유미의 과거와 관련이 있다. 


2020년에 출간된 소설가 박민정의 소설집 <바비의 분위기>에는 총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전술한 이야기는 표제작 <바비의 분위기>의 줄거리이다. 이 소설은 유미의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외동딸인 유미는 형제자매가 없는 대신 사촌 오빠와 가깝게 지냈다. 사촌 오빠의 방에는 신기한 장난감도 많고 만화책도 많았는데, 어떤 것들은 지금도 생각날 만큼 유미의 어린 시절 기억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착한 범생이 오타쿠인 줄로만 알았던 사촌 오빠에게서 조금씩 이상한 점이 발견되었고, 결국 유미는 친오빠처럼 따랐던 사촌 오빠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기에 이른다.


이 밖에도 인터넷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 불법 촬영물이 게재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담은 <모르그 디오르마>, 미국에서 외국인들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그 모습을 담은 영상이 인터넷에 퍼져 곤욕을 치르는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세실, 주희>, 한 여성이 외국으로 입양된 사촌 자매들의 방문을 통해 아들 딸 차별이 심했던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시절을 떠올리는 이야기인 <신세이다이 가옥> 등 여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성적 대상 혹은 재생산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과 그들로 인해 벌어지는 문제들을 다룬 작품들이 실려 있다. 지금의 한국 사회를 살고 있는 여성이라면 무관하지 않고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많아서 잘 읽혔고, 읽은 후의 여운도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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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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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월드컵의 열기로 뜨거웠던 2002년의 여름. 한 여고생이 공원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여고생을 범인 죽인으로 두 남학생이 지목되는데, 한 명은 여고생이 죽기 전 함께 차를 타고 있는 모습이 목격된 남학생이고, 다른 한 명은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두 사람을 목격한 남학생이다. 경찰은 이중에 한 명을 범인으로 추정하지만 강력한 증거는 없다. 그렇게 끝내 범인을 밝히지 못한 채 4년의 시간이 흐르고, 죽은 여고생과 같은 반이었던 여학생이 자신이 다니는 대학교 계단에서 뜻밖의 얼굴을 보게 된다. 죽은 여고생과 닮은 듯 다르게 보이는 여자 후배의 정체가 그를 놀라게 하고, 그렇게 또 다시 시간은 흐른다.


권여선 작가가 2019년에 발표한 장편소설 <레몬>은 (제목만 보고 상큼한 이야기를 예상했던 나로서는) 뜻밖에도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물에 가깝다. 평범한 구성도 아니다. 이 소설은 크게 사건이 발생한 2002년, 사건이 재조명되는 2006년, 관련자들의 후일담이 펼쳐지는 2015년 이후의 이야기로 나뉜다. 각각의 이야기는 사건의 중심에 있는 세 여성 - 다언, 상희, 태림 - 의 시점이 번갈아가며 등장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를 통해 각 인물이 감추고 있는 진실과 거짓을 다양한 각도로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사건의 실체도 다각도로 볼 수 있는 점이 흥미로웠다.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물에 가깝다고 평했지만, 이 소설의 목적이 범인 찾기에 그치는 건 아니다. 사건의 피해자인 여고생은 뭇 남성들이 동경하고 여성들은 질투하며 그를 낳은 엄마마저 두려워할 정도로 엄청난 미모의 소유자였다. 예쁘다는 건 그 자체로 나쁜 일은 아니지만, 주변 사람들의 감정에 동요를 일으키고 그로 인해 관계를 망가트릴 위험성이 있다는 점에선 그저 좋다고만 할 수 없다. 실제로 피해 여고생은 자신의 외모를 특별하게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의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행동으로 주변 사람들을 당황시키고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 소설에서 '목소리'로 등장하는 세 명의 여성 - 다언, 상희, 태림 - 은 어떻게 보면 사건의 가해자이거나 방관자이지만, 피해자인 면도 있다. 아름다운 인간의 존재는 그 자체로 주변 인간들을 덜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고 그들의 가치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제목이 겉보기엔 아름답지만 속에 담긴 건 달콤하지 않고 시큼한 레몬인 걸까. 레몬처럼 거리를 두고 보면 아름답고 가까이 가면 향기롭지만 맛을 보면 시거나 쓴, (미모뿐 아니라) 인간이 탐내는 많은 가치들과 그것들의 위험성을 신선한 방식으로 표현한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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