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 박미옥
박미옥 지음 / 이야기장수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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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가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는 많이 봤는데, 실제로 형사였던 분이 쓴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이 분은 그냥 형사가 아니라 대한민국 경찰 역사상 최초의 강력계 여형사, 최초의 여성 강력반장, 양천서 최초의 마약수사팀장, 강남서 최초의 여성 강력계장 등 엄청난 타이틀을 줄줄이 가진 형사 중의 형사다. 남초 업계에서 보기 드문 여성이라서 인사상의 수혜를 입은 것 아니냐고 의심하기에는 탈옥수 신창원, 연쇄살인범 정남규 사건 수사 등 그가 맡은 사건 하나하나가 굵직하다. 그의 이름은 바로 책 <형사 박미옥>의 저자 박미옥이다.


가난한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난 저자는 대학 갈 형편이 안 되니 취업을 해야 하는데 기왕이면 선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경찰 공무원이 되었다. 교통순경으로 근무했던 저자는 1991년 대한민국 경찰 역사상 최초로 '여자형사기동대'가 창설된다는 소식을 듣고 지원해 합격했다. 이후 23세에 한국 경찰 역사상 첫 강력계 여형사가 되었고, 소매치기부터 절도, 폭행, 마약, 살인, 성범죄 등 다양한 범죄 현장에서 활약했다. 1990년대에 엄청난 히트를 기록했던 방송 프로그램 <경찰청 사람들>에서 여형사가 주인공이었던 회차는 전부 저자의 경험담이라고 한다.


이 책은 저자가 30년 넘게 형사로 재직하며 경험한 일들을 담은 일종의 회고록이지만, 관계자만이 알고 있는 일종의 대외비를 떠벌리며 독자의 호응을 유도하고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는 류의 책은 아니다. 오히려 저자는 범인을 잡으려면 범인의 심리를 이해해야 하고, 범인의 자백을 받아내려면 그를 닦달하거나 겁박하기 보다는 인간 대 인간으로서 대화하고 공감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마음의 내상을 많이 입었다고 고백한다. 인간의 추악한 면을 너무 많이 보다 보니 심신 모두 지쳐서 경찰을 그만두고 스님이 될 생각을 진지하게 한 적도 있다. 그런데도 형사 일을 계속한 건, 결국 모든 인간의 내면에는 일말의 선함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남초 직장에서의 생존법도 나온다. 남자 형사로부터 웬 '냄비(여성을 성적으로 비하하는 은어)'가 왔느냐는 말을 듣고 바로 "주전자는 가만히 계시죠."라고 응수해 입을 다물게 했다거나, "보이시한 외모인데 시집은 가셨냐"는 질문에 "보이시는 산업재해이고 시집은 제집(자기 집)이 있어서 안 갔다"고 호방하게 대답했다는 에피소드가 특히 좋았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신체적으로 약해서 형사를 하기에 힘들다는 편견이 있지만, 잠복 수사를 할 때는 형사 티가 나는 남자 형사보다 형사 같지 않아 보이는 여자 형사가 유리한 면도 있다. 자칫하면 오늘 출동 나갔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경찰의 세계에선 남경과 여경의 구분이 없다는 말도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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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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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아일랜드. 석탄 목재상인 빌 펄롱은 결코 부유하지는 않지만 부족한 것도 없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고 있다. 비록 남의 집에서 하녀로 일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아버지 없는 아이로 자랐지만, 성장 과정 내내 주변 어른들에게 크고작은 도움을 많이 받았다. 열심히 일하다 보니 어느새 일꾼을 몇 명이나 고용한 사업자가 되었고, 아내와의 사이는 원만하고 딸 다섯은 다들 착하고 바르게 자라고 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펄롱의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명확한 계기나 이유는 없다. 그저 남은 생을 계속 이대로 산다고 생각하면 착잡하고, 이대로 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불안하다. 배부른 고민인 걸까.


그런 펄롱이 크리스마스를 앞둔 어느 날 수녀원에 간다. 주문 받은 석탄을 배달하기 위한 수녀원 행이다. 전에도 몇 번이나 가본 적 있는 수녀원인 데다가, 수녀원 옆에 있는 여학교에는 펄롱의 두 딸이 다니고 있다. 그러니 이번에도 평소처럼 석탄을 배달하고 계산을 치른 후 돌아오면 그만이다. 그런데 예상 밖의 어떤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 때문에 안 그래도 심란했던 펄롱의 마음이 심하게 요동친다. 나는 과연 좋은 사람일까. 나는 과연 좋은 아버지일까. 나는 과연 좋은 기독교인일까... 이런 고민들이 펄롱의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그만큼 강렬한 '사건'은, 놀랍게도 실화에 기반한다.


클레어 키건이 2021년에 발표한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결코 길지 않은 분량(114쪽)이지만 내용의 강도와 여파는 여느 장편 소설 못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클레어 키건의 전작인 <맡겨진 소녀>를 무척 좋아해서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결코 실망스럽지 않았다. 두 작품 모두 분량이 짧다는 것 외에 평범한 사람들의 선행에 대한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두 작품 모두 작품의 중심에 가정에서 학대를 당하거나 미혼모라는 이유로 가혹한 대우를 받는 어린 여성들이 있다. <맡겨진 소녀>가 학대 당하는 여성이 타인의 선행을 처음 경험하는 이야기라면,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바로 그 타인이 학대 당하는 여성에게 선행을 베풀기로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다는 점이 다르고 또 닮았다.


배경이 크리스마스 직전이기도 해서인지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진정한 기독교인의 자세'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 대부분은 독실한 기독교(가톨릭)인이다. 그러나 이웃에 대한 사랑이나 약자를 위한 배려, 더 높은 차원의 선을 위한 희생 같은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교리나 미덕을 현실에서 실천하는 인물은 (펄롱 이외에) 별로 없다. 아버지 없이 태어난 예수를 섬기면서 아버지 없는 아이들을 매매하고, 혼자서 아이를 낳은 성모를 모시면서 혼자서 아이를 낳은 여자들을 박해하는 이들을 참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숨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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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 노부인이 던진 네 가지 인생 질문
테사 란다우 지음, 송경은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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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인 '나'는 몇 년째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생활을 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남편은 직장에 보내고 아이들은 등교 시키고, 자기도 출근해서 온종일 바쁘게 일하고, 퇴근 후 집에 오면 쌓여 있는 집안일을 해치우고, 쓰러지듯 잠들면 또 다시 어제와 같은 아침이 펼쳐지는 것이 그의 삶이다. 몸과 마음 모두 휴식을 간절히 원하지만 제대로 쉬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고, 친구들과 수다라도 한바탕 떨면 좋겠는데 다들 비슷하게 바빠서 모이기가 쉽지 않다. 이것이 내 인생인가. 이대로 계속 살아야 하는가... 그런 생각에 빠져 있던 '나'는 홀린 듯 숲으로 향하고 그곳 벤치에서 뜻밖의 노부인을 만난다.


독일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테사 란다우의 책 <숲속 노부인이 던진 네 가지 인생 질문>은 저자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대학 졸업 후 여성지에서 일하던 저자는 결혼과 출산 후 일과 육아, 집안일을 병행하며 엄청난 스트레스와 번아웃에 시달렸고 결국 퇴사했다. 이후 상담심리를 공부하며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을 돕기로 마음 먹은 저자는 2016년 스트레스와 번아웃 컨설턴팅 회사를 창업했다. 2020년에 발표한 이 책은 과거의 저자처럼 번아웃 상태에 놓인 사람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는 네 가지 질문을 담고 있다.


숲속 노부인이 던지는 네 가지 질문은 어떻게 보면 평범해 보인다. 하지만 막상 실천하자면 엄두가 안 나는 것도 있다. 가령 네 가지 질문 중 첫 번째 질문인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뭘까?'는 문장 자체는 단순하고 내용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퇴사나 이직, 전직 같은 인생의 중대한 결정을 앞두고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뭔지 알아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과연 누구나 쉽게 그 답을 찾을 수 있을까(적어도 나는 아니다). 원하는 게 뭔지 알게 된들 그걸 실천하기도 힘들다. 가령 퇴사 후 창업을 하고 싶다고 해서 그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나' 역시 비슷한 의문을 품고 일상을 보낸다. 그런데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뭘까?'라는 질문을 가지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왠지 다르다. 질문을 가지기 전에는 주어진 일상을 의무적으로 꾸역꾸역 해내는 방식으로 살았다면, 질문을 가진 후에는 어떤 일을 하든 이 일을 내가 왜 하는지, 정말로 하고 싶은지 자문하니 선택도 다르고 방법도 다르고 결과도 다르다. 이런 식으로 나머지 세 질문도 '나'의 삶을 바꾸다. 독자인 나의 생각도 조금씩 변했다. 이 책, 얇다고 얕봤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은 사유를 담고 있구나. 그래서 독일 대표 일간지 <슈피겔>의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6개월 이상 머물렀구나. 궁금하다면 읽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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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많은 여름이
김연수 지음 / 레제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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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세상을 떠난 작가들의 작품을 읽는 것도 좋지만, 동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따라 읽는 것도 좋다. 외국 작가의 작품들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는 것도 좋지만, 같은 나라에서 살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내가 속한 세계를 새롭게 보는 것 역시 좋다. 김연수 작가가 2023년에 발표한 소설집 <너무나 많은 여름이>를 읽으며 이 작가와 같은 시대, 같은 장소에 살고 있어서 운이 좋고 다행이라고 느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발견하지 못했을 아름다움과 슬픔이 있기 때문이다.


짧거나 긴 소설 여러 편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글은 표제작 <너무나 많은 여름이>이다. 여러 정황상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보이는 이 글은 작가의 어머니와 사별한 과정을 그린다. 저자는 경북 김천의 한 제과점에서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사실은 부모님이 셋째를 원하지 않았다거나, 어머니가 일본 치바 현 출신이라거나 하는 디테일이 더해지기는 했으나 김연수 작가의 이전 책들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크게 새롭지 않을 내용인데도 읽는 내내 따뜻하고 뭉클했다. 특히 미취학 아동 시절의 저자가 각각 일터나 직장으로 떠난 식구들을 기다리며 집을 지키던 장면에 대한 묘사가 좋았다.


그런 어머니와의 이별을 준비하며 저자가 보낸 시간들에 대한 기록도 좋았다. 저자는 머릿속이 복잡할 때마다 집 근처 호수공원을 달리거나 걸으면서 현실을 잊거나 현실의 다른 면을 보려고 했다. 이 과정에서 다시 보게 된 책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이다. 이 책에 따르면 "나의 소유를 줄일수록 자연은 점점 늘어난다. 무소유란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을 다 가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욕망에 대답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을 돌보는 사람이 되면서 세상 사람들이 가난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에게는 풍요로운 삶이 됐다." (247쪽)


나는 이 대목이 생에 대한 집착 또한 어떤 면에서는 소유이고, 소유를 줄이면 자유를 얻을 수 있듯이 집착을 버리면 고통을 줄일 수 있다는 뜻으로 읽혔다. 다시 말해서 소중한 사람과 헤어지고 싶지 않은 마음, 영원히 살고 싶은 마음 또한 욕심이며, 그러한 마음은 가지면 가질수록 괴로울 뿐이니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면 그 마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딸 열무의 미래를 상상하는 것으로 사별의 고통과 생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데, 이는 저자의 또 다른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담긴, 미래를 긍정하는 힘으로 현재의 고통을 견디는 사람들의 모습과 이어져 있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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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아 I-II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31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민음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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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 독일 뒤셀도르프. 화가가 되기 위한 미술 교육을 받으러 노르웨이에서 온 청년 라스 헤르테르비그는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함께 교육을 받는 동료들은 외국에서 온 그를 따돌리고, 서로 좋아하는 사이인 줄 알았던 하숙집 딸은 엄마와 삼촌의 반대를 핑계로 자신을 멀리한다. 그렇다면 한 눈 팔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하면 좋으련만, 라스는 예술 아카데미의 교수 한스 구데와 만날 약속을 잡았으나 막상 약속 시간이 가까워오자 만남을 피하고만 싶다. 이와중에 눈에는 보여선 안 되는 것이 보여서 자꾸만 시야를 방해하고 정신을 어지럽힌다. 라스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욘 포세의 <멜랑콜리아 I-II>는 19세기 말에 실존한 노르웨이의 풍경 화가 라스 헤르테르비그의 일대기를 그린다. 소설은 라스의 정신 상태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라스는 사람들이 자신을 배척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하숙집 딸 헬레네가 삼촌과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느니, 술집의 웨이트리스가 자신을 유혹했다느니 하는 말들로 점점 더 곤경에 처한다. 급기야 희고 검은 천이 자신의 주위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착란 혹은 환상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린다. 결국 라스는 정신병원으로 옮겨진다.


여기까지가 I부의 줄거리이고, II부는 라스의 누이 올리네의 관점으로 서술된다. 이미 가족의 대부분을 먼저 떠나보내고 자신마저 치매를 앓는 노인이 된 울리네는 자신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라스의 모습과 음성 등을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삶과 죽음, 죽음과 삶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 놓인 인물의 심리 상태를 섬세하게 묘사했다는 점에서 욘 포세의 또 다른 소설 <아침 그리고 저녁>이 떠오르기도 했다. 소설을 다 읽은 후에야 표지 그림이 라스 헤르테르비그가 자신의 고향 풍경을 직접 그린 그림 <보르그외위섬>이라는 걸 알았다. 완독하기가 쉽지 않은 소설이었는데 그림을 보니 다시 읽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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