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어
서보 머그더 지음, 김보국 옮김 / 프시케의숲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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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름도 책의 존재도 몰랐는데, 얼마 전에 읽은 황정은 작가님의 에세이집 <일기>에서 알게 되어 별로 고민하지 않고 바로 샀다. 추천의 글을 무려(!) 문학평론가 신형철 님이 쓰셨고, 2003년 프랑스 페미나 상 수상했으며, 2015년 <뉴욕 타임스> 올해 최고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존 윌리엄스의 소설 <스토너>를 연상시킨다고 인터넷서점 책 소개 란에 쓰여있는데,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떠올렸다. 찾아보니 서보 머그더와 아고타 크리스토프 모두 헝가리 작가네... 


이야기는 작가인 '나'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남편과 단둘이 살고 있는 '나'는 집안일을 돌봐줄 가사도우미를 찾다가 동네에서 일 잘하기로 소문난 에메렌츠라는 여성을 알게 된다. 과연 소문대로 일은 잘했지만, 보통의 가사도우미와 달리 무례하고 때로는 괴팍하기까지 하며 자기만의 규칙이 많은 에메렌츠에게 '나'와 남편은 잘 적응하지 못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여러 사건들을 겪으면서 '나'는 에메렌츠가 어떤 삶을 살았고 그 결과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를 점차 이해하게 된다. 나아가 교육받은 지성인이자 저명한 작가이자 성실한 교인이라고 믿었던 자신이 얼마나 나약하고 모순적인지를 깨닫는다. 


거칠게 요약하면 '나'와 에메렌츠의 20년간의 우정을 그린 소설이지만, 자세히 보면 그 이상의 교훈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아마도 나를 비롯해 이 책을 읽는 독자의 대부분은 '나'에 가까운 사람일 것이고, 일상에서 에메렌츠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겉으로는 공손하게 대해도 속으로는 불쾌함을 느낄 것이다. 자신이 세운 규칙은 곧 죽어도 지켜야 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는 에메렌츠. 상대가 고용주라도 할 말은 해야 하고 안 하고 싶은 일은 절대 안 하는 에메렌츠. 이런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정말 피곤하고 힘들 것이다. 


하지만 에메렌츠가 관통해온 삶을 안다면 생각이 바뀔지 모른다. 생각이 바뀌지는 않더라도, 에메렌츠가 그토록 자신의 신념을 내세우며 주체적으로 살기를 바라는 이유를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 에메렌츠는 지옥을 보았고, 또다시 지옥을 보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른 나이에 깨달은 사람이다. 배웠다는 사람이, 신을 믿는다는 사람이, 실제로는 어떤 불합리와 부도덕을 저지르는지를 똑똑히 목격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배운 척, 믿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지 않고 일하며 믿지 않고 행하는 삶을 사는 에메렌츠를 오해한다는 건 얼마나 큰 오만인가.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싶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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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 : 처음이라 그래 며칠 뒤엔 괜찮아져 띵 시리즈 10
배순탁 지음 / 세미콜론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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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콜론 '띵' 시리즈 신간이자 애정하는 유튜브 채널 중 하나인 <무비건조>의 패널 배순탁 작가님의 책이다. 주제가 평양냉면이니까 작가님의 개인적인 평양냉면 맛집 순위나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음식점에 대한 평가 등등이 주를 이룰 줄 알았는데(나오기는 한다), '띵' 시리즈의 다른 책들도 그렇듯이, 주제인 음식에 관한 내용보다는 저자 자신의 이야기가 훨씬 더 많다(그래도 '띵' 시리즈의 다른 책들에 비하면 음식 이야기나 맛집 정보가 꽤 많은지도...). 


이 책의 경우에는 배순탁 작가님의 본업인 음악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게 진짜 재미있다. 언젠가 배순탁 작가님의 음악 에세이가 나온다면 꼭 읽어 보고 싶다(라고 말하면서 인터넷 서점에서 배순탁 작가님을 검색해 봤는데 아는 책이 나왔다. 2014년에 나온 <청춘을 달리다>. 이 책을 쓰신 분이셨다니!). 방이역 근처에 있는 봉피양에서 냉면 한 그릇 먹고 올림픽공원에서 공연 보는 게 지고의 행복이라고 쓰셨는데, 얼른 팬데믹이 사라져서 이 행복 나도 누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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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영화 없는 날 - 차별을 넘어 차이를 잇는 페미니즘 영화관 쓰담문고 3
김수진.김시원.황고운 지음, 손희정 해설 / 서해문집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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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볼 영화가 많지 않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매주 새롭게 개봉하는 영화가 이렇게 많은데도, 일부러 극장에 가지 않아도 OTT 서비스를 이용해 언제 어디서나 얼마든지 영화를 볼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변한 건 영화가 아니라 나다. 예전에는 흔히 말하는 알탕 영화, 조폭 영화도 잘 봤다. 관객이 천 만 이상 들었다고 하면 아무 생각 없이 보기도 했다. 그 때마다 왠지 모르게 불편하고 찜찜한 이유가,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차별과 혐오 정서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는 볼 영화가 많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싫으냐고? 그럴 리가... 


이 책은 성평등 교육을 실천하는 현직 교사 3인이 함께 썼다. "다름이 불편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며, 교실 안과 학교 밖에서 그 길을 찾다 영화를 만났다."라고, 김수진, 김시원, 황고은 저자는 밝힌다. 책에는 나처럼 볼 영화가 많지 않아서 고민인 독자들에게 추천하는 영화가 소개되어 있다. <벌새>, <우리집>, <툴리>, <당갈>, <야구소녀>, <아이 필 프리티>, <피의 연대기> 등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 새로운 여성 캐릭터의 서사를 그린 영화, 성별에 대한 편견을 깨트리는 영화,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시선에 의문을 던지는 영화 등이다. 


현직 교사들이 공저한 책답게, 영화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과 그에 대한 교사들의 피드백이 실린 점이 좋았다. 여자로 태어났지만 여자로 보이는 게 불편한 소녀 미카엘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톰보이>를 소개하면서, 저자는 학생들과 성별 이분법에 관해 토론한 내용을 들려준다. '여자는/남자는 ~ 하다'는 생각에 익숙한 학생들에게 저자는 자신을 잘 드러내는 성격이나 생김새를 나열해 보게 했다. 파랑을 좋아한다, 핑크를 좋아한다, 운동을 좋아한다, 책을 좋아한다 등. 그러고 나서 나와 같은 특징을 가진 친구들을 찾도록 했더니, 그 중에는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었다. 여자만의 특징이나 남자만의 특징 같은 건 없다는 걸 자연스럽게 알게 한 것이다.


1960년대 미국항공우주국 '나사(NASA)'에서 활약한 세 흑인 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히든 피겨스>를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학생들과 함께 일상 속 불편을 개선한 과학자를 발견하는 시간을 가진 경험을 들려준다. 과학자 하면 대부분 남성일 것 같지만, 와이파이와 수정액, 자동차 와이퍼 등을 발명한 과학자는 모두 여성이며, 음식물 쓰레기 건조기를 발명한 사람은 가사노동 경력 20년 차의 전업주부라는 사실을 알고, 학생들도 놀랐지만 나도 무척 놀랐다. 이 밖에도 영화를 통해 현실에 남아 있는 차별과 편견, 혐오를 발견하고 이를 재생산하지 않기 위해 교사와 학생들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어 좋았다. 영화평론가이자 페미니스트인 손희정 선생님의 해설이 덧붙여져 있어서 시네페미니즘(시네마+페미니즘)을 공부하기에도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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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인 타임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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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고 다양한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영화도 좋지만 원작 소설이 영화보다 훨씬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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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일드 인 타임
이언 매큐언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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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 영화 <차일드 인 타임>의 원작 소설을 읽었다. 영화가 2017년에 개봉했기 때문에 소설이 그보다 몇 년 전에 나왔을 줄 알았는데, 무려 1987년에 나왔다고 해서 놀랐다. (그럼 이언 매큐언은 대체 언제 데뷔한 거야? 찾아보니 1975년이다...!) 그래서 그런지 작품 자체는 발표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완성도가 높은데, 과거의 과학 기술 수준이 지금과 비슷했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 작품 곳곳에 나온다. 마트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더라면 아이를 그렇게 황망하게 잃어버리지는 않았을 테고, 스마트폰이 있었더라면 등장인물들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기가 좀 더 수월했을 텐데... 


이야기는 아동문학 작가인 스티븐이 어린 딸 케이트를 마트에서 잃어버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아이를 잃어버린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로는 김영하 작가의 단편 <아이를 찾습니다>가 있는데, <차일드 인 타임>은 그보다 훨씬 복잡한 내용을 다룬다. 딸 케이트를 잃어버린 후, 스티븐과 아내 줄리는 케이트의 부재를 견딜 수 없어서 별거를 택한다. 혼자가 된 스티븐은 영국 정부로부터 제안받은 아동 보육에 관한 위원회 일도 하고 차기작 집필도 해보지만 잘되지 않는다. 이 와중에 자신을 아동문학 작가로 만들어준 출판사 사장이자 촉망받는 정치인인 친구 찰스가 모든 사회적 지위를 내려놓고 은퇴하겠다고 선언한다. 


처음에 스티븐은 찰스의 은퇴를 충동적인 결정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찰스는 원래의 생활로 돌아오지 않고 과거의 자신, 정확히는 과거의 자신이 원했던 자신의 모습이 된다. 스티븐은 그런 찰스를 쉽게 이해하지 못하지만, 일련의 사건들을 겪으며 사람마다 자신의 시간이 있고 그것은 외부에서 함부로 간섭하거나 통제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외부에서 억지로 간섭하거나 통제할 경우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도...) 나아가 스티븐은 과거의 어머니가 미래의 스티븐을 만났던 것처럼, 언젠가는 자신도 케이트를 다시 만나게 될 거라고 믿게 된다. 시간은 결코 직선적으로 흐르지 않고 모두가 같은 방식으로 경험하지도 않는다는 깨달음은, 스티븐에게 다시 삶을 시작할 용기를 준다. 


어떤 사람의 눈에는 스티븐이 스스로 희망 고문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니고, 영원히 사라졌다고 해서 다시 만날 수 없는 게 아니라고 믿는 마음을 무의미한 희망이나 미련으로 치부할 수 있을까. 인간의 앎은 아직 완전하지 않으므로, 일어날 법하지 않은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믿는 편이 오히려 더 현명한 게 아닐까. 평행우주나 영원회귀 같은 어려운 말은 잘 모르지만, 진리는 결코 하나가 아니고 인간은 오직 지금 이 순간만을 산다는 명제에는 동의한다. 이 소설이 전하는 주제도 같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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