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좌파의 상상력 : 세계적 차원에서 본 1968 - 컬리지언총서 6
조지 카치아피카스 지음, 이재원 이종태 옮김 / 이후 / 1999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현대사회를 보고 있으면 이른바 탈(脫)정치 내지 탈(脫)이데올로기 화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떻게 본다면 우리는 더욱 심각한 정치적인 영향 내지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고 있을 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그렇게 보는 이유는 다른 선험적 내지 경험적인 혜안을 실은 인문학 도서에서 많이 찾기도 하나, 더욱 중요한 사실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게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더욱 난항한 방법으로 가고 있다.

 

가령 이전에 내가 본 에티엔 발리바르의 “정치체의 대한 권리”를 읽어보자. 흔히 프랑스라고 한다면 자유, 평등, 인권을 중시한 나라에다가 철학과 예술의 파리도시를 꿈꾼다. 그러나 막상 파리에서 일어난 일들이나 혹은 알제리 내지 외국과 그 나라의 국민 또한 소수민족과 이방인들에게 펼친 파시즘적인 부분은 매우 끔찍하다.

 

오히려 자신들이 자유를 위해 싸우고 쟁취했다는 그 사실에 의한 탈파시즘이 오히려 자신들을 더욱 파시즘으로 몰고 가는 파국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런 문제를 어떻게 우리는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을까? 1945년 세계 제2차 대전은 끝났다. 프랑스에서는 독일군도 물러갔고,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던 독립 세력들은 정치에 대한 권리를 찾아 새로운 나라를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막상 평화를 위해 자유를 위해라는 슬로건을 걸은 그들이었지만, 오히려 자유를 막는 억압과 사람을 차별화는 불평등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1960년대에 들어오게 되자 사회적 큰 변화를 주게 되었다. 그것은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이다. 프랑스에서는 1789년 파리에서 일어난 루이왕권의 몰락을 생각했으나, 사실 그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아니 1776년 세계 최초 내지 최고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세웠다는 미국 역시 자유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오히려 자유라는 이름을 통한 억압의 시작이었다. 이런 문제들을 어디서부터 시작하고 있을까? 인간의 자유와 평등, 인권, 그리고 사회관계들 이 모든 것들의 시작은 하나의 관문을 넘어서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사고방식이다. 어떻게 보자면 진보와 미래를 추구하는 시작이 이제는 극도의 보수와 폐쇄로 이어졌다.

 

생각해보자? 미국이란 나라는 자유민주주의국가이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흑인들이 계속 인종차별로 노역에 시달리고, 밥 먹는 자리나 버스 타는 자리나 심지어 길 걸어가고 있는 보도가 아닌 차도에 걷도록 횡포를 당한다. 이런 나라에서 자유 내지 평등을 외치는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가치를 묻고 그들이 정당하다고 하는 게 과연 진정한 자유인가? 평등인가? 이런 문제들은 수시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계속 발현되고 있었다.

 

과연 인간의 관념 속에서 자유와 평등은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어디로 흘러가는가? 지금 읽어본 <신좌파의 상상력>이란 도서는 우리가 기존에 생각하던 좌파와 그리고 반대되던 우파를 넘어 좌우 이데올로기를 뛰어넘는 하나의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인간의 근본에 대해 묻고 거기에 응답하고 많은 대학생, 노동자, 여성, 심지어 고등학생과 어린이까지 다양한 계층들이 자신의 인간존재성을 보이기 위한 하나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민주사회 내지 자유사회, 그리고 평등적인 사회 관념을 배우는 공간에서 이런 이야기는 묻혀진 이야기다. 사실 돌이켜본다면 나폴레옹은 프랑스를 집권하여 전쟁의 열기에 빠지게 하거나 혹은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와 독일과의 전쟁으로 국력을 기울게 하여 국민들을 위기에 빠지게 하였고, 국민들이 1871년 2월 자발적인 정부를 세우려했는데, 프랑스 권력자들은 타국의 군인들을 내국으로 들여 파리 시민들을 무참히 살해하였다.

 

물론 1848년의 2월 혁명도 역시 많은 피와 희생이 있었으나, 진정한 시민이 주인이고, 진정한 정치참여권에 대한 의지는 여기서 부터이다. 그러나 그것을 쉽지도 않고 머나먼 길처럼 보였다. 사실 유럽의 근대사는 매우 어지러웠다. 많은 전쟁과 음모, 혁명, 개혁, 반정 등등 이 모든 것이 폭풍처럼 휘말려갔다. 그런 상황에서 세계 1차와 2차 대전 그 후에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까지 말이다.

 

사실 미소 냉전 시대에는 세계는 2원화적인 정치상황이라고 말하여도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2가지에 동의하지 않으면 모두 배척당한다면, 그 배척을 받아들여 그것을 하나의 가치관으로 올린다면 상당한 전환점이 아닌가 싶다. 사실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는 분명히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는 볼리비아 산악지방에서 가슴에 총알에 박힌 채 죽었다. 그런데 그는 미국 CIA의 명령받은 군조직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들은 이래 생각할 것이다.

 

미국의 반대를 하였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체 게바라의 죽음과 투쟁에서는 당시 소비에트 연방에 대한 이질감이 있었다. 오히려 소비에트 연방은 체 게바라가 제3세계의 독립과 민주화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면 소비에트 연방은 피곤해질 뿐이다. 이미 두 강대국은 서로의 힘겨루기를 은연중에 인정하고, 힘을 나누어 기득세력이 이익을 누릴 하나의 진리 아닌 진리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런 억압된 부분들은 세계 어디에 가도 존재했다. 그것은 노동자에 대한 탄압이오, 학생들의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대한 억압이다. 이것에 분노하여 일어난 것이 프랑스 5월 혁명이다. 그것은 당시 전쟁에 대한 반전시위이고, 외국인 차별에 대한 인종평등주의이며, 여성과 노동자 심지어 어린이까지 인권을 중시하는 운동이었다. 정치적인 이념노선을 떠나 인간 그 자체의 생존을 위해 모두 투쟁을 하였다.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과 낭테르 대학에서 모든 대학은 노동자에게 24시간 공개되어야 한다는 것은 곧 지식과 권리에서 소외된 자들에게 다가 가려는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열정이었다. 비록 혁명은 실패라고 하나 이듬해 드골정부는 실각하게 이르게 된다. 이런 운동은 1970년 미국에서 5월 혁명을 일으킨다.

 

여기서는 나는 매우 친숙한 이름을 보게 된다. 그 사람은 미국의 언어학자이면서 세계 최고의 지식인(세계지식인지도 1장을 장식한) MIT공대 언어학과 교수 노암 촘스키였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통킹만사건 조작(미군 스스로 통킹만 공작을 함에도 베트남이 했다고 하여 베트남을 침공하였으며, 후에 공작이란 사실이 폭로됨)과 동시에 전쟁으로 죄 없는 현지 국가의 인명과 자국의 군인까지 죽는다고 했다.

 

독재국가의 정치인에게 뒤에 몰래 군사자금과 무기를 제공하여 독재를 이어가게 하고, 그 독재자인 샤, 마르코스, 뒤발리에가 자국민을 무참히 살해하는 것을 동의했다. 특히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인들이 벌인 레바논전쟁의 대학살은 인간이 과연 어떤 존재인가라는 의문까지 들게 했다(영화 아리 폴만의 바시르와 왈츠를). 바로 신좌파라는 존재는 기존의 구좌파를 벗어난 존재였으며, 오히려 구좌파와 대립을 하였다.

 

이런 점은 당시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을 주도하던 상황주의자들은 기존 체계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연방 국가에게 전문을 보내 그들마저 부정했다. 그들은 오로지 인간을 억압하는 것 자체를 거부했던 것이다. 이런 거부는 기존의 세계에 가진 낡은 생각을 버리게 했다. 물론 미국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5월 혁명들은 실패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에게 자유로운 존재가 되기를 나처럼 타인들도 인권을 가진 존재로 평등해지기를 바란 것은 엄청난 파장이었다.

 

이른바 eros effect라는 삶에 대한 충만한 의지가 여기서 실현되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미국에서 열리는 우드스탁이란 대규모 락공연, 그리고 많은 저항문화가 일어났다. 우리가 잘 아는 불멸의 블루스락 기타리스트인 지미 헨드릭스도 그 반문화에서 자유와 생존에 대해 불을 붙인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모이고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사실 흑인들을 차별하던 미국에서는 흑인들이 춤과 노래를 하는 것을 반대했다.

 

춤과 노래를 하면 사람들이 서로 모이고 서로 기쁨과 슬픔을 나누게 되는 교감의 장이 되기 때문이다. 자유롭게 마음이 가는대로 움직이는 것이 결국 신좌파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다. 이 책에서 우리나라도 자유에 대한 열정을 다루고 있었다. 3.15부정선거에 대한 저항, 군부독재에 대한 저항이었다. 지금도 저항은 일어나고 있으나, 조금 나는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 이 책에서는 프롤레타리아 즉 노동자와 약자에 대한 삶의 의지를 외쳤으나, 그런 사람들을 공격한 사람들이 룸펜 프롤레타리아 내지 그냥 프롤레타리아였다.

 

흑인들이 평등과 자유, 그리고 인권보장을 위해 인종차별 반대시위를 할 때 다른 흑인 노동자들이 와서 공격했다. 그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다. 그래도 억압받던 주체들은 자신들이 억압받는 사실이 당연하게 여기게 되던 헤게모니적인 상황에서 크게 벗어났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와 평등,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살아가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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