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 -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동문선 현대신서 40
알랭 바디우 지음, 이종영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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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알랭 바디우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예전에 경희대학교 영미문화전공 이택광 교수님 덕분이었다. 이택광 교수님의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이다. 이른바 좌파라고 단순히 진보와 보수의 2원화적인 대립구도이기 보다는 인문좌파로 통해 보수나 진보나 모두 비판해야 할 하나의 과제를 알려준 도서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처럼 좌우이데올로기가 명확하게 구분되어 상대방의 가치와 논리를 따지기 보다는 무조건 매도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엄청난 착각이라는 점이다. 그런 도서에서 나는 알랭 바디우라는 이름을 본 것이다. 알랭 바디우를 소개한 그 책에서는 좌파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마르크스부터 시작하여 장 폴 사르트르, 루이 알튀세르, 발터 벤야민, 자크 라캉, 슬라보예 지젝, 자크 데리다 등 수많은 학자가 소개되나 그들이 순수하게 마르크스에게 모든 것을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새롭게 해석하거나 혹은 반박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인문좌파라는 것은 다양한 학자를 소개하고 그들의 주요 사상을 소개하여 기존의 체계를 비판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체계를 비판하고 있는 것도 비판하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이런 표현을 하지 않은가? 비판을 위한 비판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온 근대현사를 거치어 우리가 오늘날 살아가고 있는 그 역사적인 흐름에서 많은 담론이 오고 가고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고 많은 담론 중에서 윤리학을 우리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인문학적인 요소에서 윤리학은 제1의 철학이라고 레비나스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윤리학이라는 것은 혼자만의 학문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그리고 생각해 봄으로써 자신만을 위한 에고이스트가 아닌 진정 사람을 사람으로 대할 수 있는 인격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윤리는 다른 철학 내지 혹은 형이상학에서 다루는 부분과 다르게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의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에 크게 관여하고 있다. 그런 부분인 만큼 윤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파악한다는 것은 인간이 살아가는 그 세계 자체를 새롭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윤리라는 것은 어느 시대이나 중요하고 어느 사회나 문화에서도 중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다루던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나 각종 잔혹한 테러들은 왜 멈추지 않은 것인가? 분명히 그런 잔혹한 행동을 하는 무리나 단체 그 존재들도 자신에게 윤리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니 오히려 자신들의 윤리가치가 옳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문제는 그 옳다고 여기는 윤리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지 못할 뿐이다.

가끔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인간은 언어로서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통제할 수 있을 만큼 지능화한 동물이다. 그런 인간이 언어로 통해 논리로서 상대방과 접하면서 그런 이성에서 나오는 논리가 과연 정당한가라는 의구심이다. 오히려 자신들만의 논리가 옳다는 이성 관념이 오히려 논리적이지 못할 경우가 많다. 그런 일들은 분명 유대인을 학살한 독일 나치즘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이전에 마녀사냥, 지금도 일어나는 중동 분쟁 역시 그러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에 의해서 기인하는 것일까? 이 책에서 내가 가장 강렬하게 인상 깊은 문장은 다음과 같다.

<나는 나와 차이나는 자가 정확하게 나처럼 차이들을 존중하는 한에서만 차이를 존중한다. “자유의 적에게 자유란 없다”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차이가 바로 차이를 존중하지 않는 것에 있는 그러한 자들은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처럼 차이나는 자들은, “근본주의적” 이슬람교도와 유사한 모든 자들에 대해 윤리 신봉자들이 지니고 있는 강박한 불쾌감의 대상이 될 뿐이다>

세상에 분명 이런 모순이 있다. 전에 미국 9/11 테러에서 수많은 희생자가 탄생하고 이것으로 미국은 자신들의 국가의 자유와 평화라는 이름으로 오사마 빈라덴 조직과 거기에 관련된 적들을 공격한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미국에게 비극적인 플롯을 선사하여 마치 영화나 소설에서 보이는 narrative처럼 집단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다른 집단을 공격한다.

문제는 이런 사건으로 통해 정말 그 테러조직과 범죄 집단만을 응징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닌 자들도 응징한다. 미국 내에서 살아가는 중동지역 계열 민족이나 혹은 이슬람 문화권에 접한 사람들까지 차별하고 때에 따라서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보복했다는 점이다. 진실의 적은 지구 저편 너머에 있다. 분명히 그들이 응징의 대상들은 거기 내지 혹은 거기가 아닌 곳에서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로 응징해야할 정의적 가치가 어느 순간 잘못된 가치로 나가고 있다. 자유를 지킨다는 그들이 어느 순간 자신들이 내세운 슬로건인 자유를 뭉개고 있다. 진짜 적을 대신하여 가상의 세계 즉 자기 관념 속에서 보이는 적들을 만들어 버린다. 이 서적에서는 그런 현상에 대해 simulacre라 한다. 그것은 인종, 피, 흙, 관습, 공동체로 인해 분리하게 하여 있지도 않은 혹은 본래 없는 것들이 현실화하여 비극을 만들어낸다.

윤리라는 것이 과연 이런 사항으로 인해 하나의 정의를 성립할 수 있는가? 이런 부분은 니체가 제기한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지 마라”라는 것과 같다. 자신들의 울타리 안에서 윤리라는 것이 있다는 자체가 하나의 편을 나누어 상대방을 집어 삼키는 거대한 무기가 되어버린다. 게다가 이런 문제는 기존의 역사에서 볼 수 있다. 1792년 프랑스 혁명과 1917년 러시아혁명 분명 기존 봉건사회에 대한 체계를 전도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노예 없는 주인” 즉 인권을 위해 일어난 사건이다. 그러나 1933년 나치의 탄생에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만 인정했다. 그리고 자신들만이 우수하고 탁월하며 이성적이라고 생각했다. 웃기게도 결과는 가장 비열하고 치사하고 가장 비이성적인 형국으로 변질되었다. 나치즘도 그렇고 파시즘이란 극단적인 자기우월화가 왜 틀렸는가?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가치를 지닌 존재도 자신들에게 윤리나 정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차라리 자신에게 윤리나 정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있을까라고 생각했으면 어떠한가?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신의 모든 의견과 사고가 옳다고 판단한다. 쇼펜하우어가 “인간은 그것을 알기 전에 이미 알고”라고 했듯이 그런 인간이 다수가 되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되어버리면 하나의 거대한 dogmatism이 된다는 점이다. 이런 거대한 dogmatism에 대해 칸트가 인간의 이성 그 자체를 비판하였는데, 사실 그런 문제점이 발생한다면 분명히 그런 오류를 저지르는 인간(혹은 다수) 본인에게 인격 성숙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 남에게 물리적, 정신적, 심리적인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점이다.

윤리학이라는 것을 보면 솔직히 말하여 윤리라는 자체에 대해서는 인간이 살아가는 그 작은  순간에도 혹은 거대한 사건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윤리라는 것을 인간이 바라보는 것은 정말 이것이 옳은가? 혹은 옳지 않은가? 하기 보다는 사회적 통념에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것이 정의로운 윤리가치라는 내세운다. 그렇지만 사실 그런 슬로건을 내밀고 하나의 교조로 보는 경우가 가장 윤리에서 멀어지는 지름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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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입문 - 철학사상총서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 문예출판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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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아주 지옥같이 느끼던 도서 한권이 있었다. 나에게 많은 도서가 지옥 같은 맛을 보여주나 이번 책 역시 정말 무한의 고뇌에 빠져들게 하는 책 한권이 있었다. 그것은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의 “형이상학 입문(形而上學 入聞)”이다. 형이상학이란 단어는 지금 나에게도 몇 권의 관련 도서를 보아도 쉽게 이해가기가 어렵다.

meta-physics 즉 physics이란 물리학(物理學)에서 meta라는 이른바 그 너머의 세계라는 의미인데, 물리학 너머의 세계라는 것에 대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의미는 물리적인 존재에 그 이상의 존재이다. 그런데 문제는 형이상학에서 주요 연구대상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존재적인 탐구이다. 즉 형이상학은 철학(哲學)과 긴밀한 관계 아니 거의 그 자체라 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은 세계를 사유함으로 탐구하는 즉 인간과 자연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본다면 형이상학은 아주 쉬우면서도 어려운 학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언제나 살아가면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말려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형이상학에 대해 깊이 통찰하기 보다는 그저 옆에 있어도 모르는 것뿐이다.

책을 읽다가 약간 떠오른 부분은 옆에 있음에도 있는 것을 알지 못하거나 옆에 있는데도 있다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감지할 수 없음이라는 인간의 사고가 조금 인상 깊다. 형이상학에 대해 논하는 것은 결국 인간 그 자신의 존재자체와 그 주변을 마주한 모든 세계적인 부분이어도 말이다.

그런 인간이 현실 속에 살아감의 알리는 존재(存在, sein)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문제다. 그런 인간 자체의 삶의 근본 존재라는 것을 다루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물리적인 존재가 있어야 하고, 그 존재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하는 생각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여기서 다루는 형이상학 분야는 물리학(物理學)과 논리학(論理學)에 대해서이다.

또 하나의 형이상학의 근본인 윤리학(倫理學)에 대해서는 그렇게 깊이 다루지 않았다. 그것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인 정치적인 존재를 다루기보다는 인간 그 자신의 존재를 다루는 실존주의(實存主義)적인 면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닌가 싶다. 사실 나는 이 책을 보며 늘 궁금한 것은 과연 이 서적은 형이상학이란 그 거대한 학문에 입문용으로 괜찮은가? 라는 것이다.

차라리 입문용이라기보다는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한번 보고 오는 것이 더 이 책을 유용하게 읽지 않을까? 생각만 앞섰다. 읽는 도중 하나하나 지켜보면 계속 “존재와 시간”이 빠지는 법이 없었다. 형이상학 입문은 결국 하이데거가 대학교 강의시간에 학생을 상대로 가르치기 위해 생긴 책이라고 하나, 이 책을 보면서 과연 그런가 싶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나는 하이데거라는 인물을 형이상학, 철학, 사상 등에서 찾아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애니메이션을 보다가 막상 떠올랐다. 어떤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끼리 대화하다가 시공간을 초월하여 계속 반복적인 역사적 흐름에 고뇌하는데, 이때 주인공끼리 이런 대사가 나에게 인상 깊었다. “인간은 시간적인 존재다” 그 말을 한 사람은 하이데거라는 사실 아래서이다. 물론 이런 대사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하이데거에 대한 관심이나 대사의 의미를 마음 속 깊이 염두를 두지 않은 듯했다.

사실 이 작품은 주요점은 인간은 자신의 존재에서 그 자신 그 자체만으로 모든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 자신이 어떤 세계나 다른 접점과 연계되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과관계를 발생하나 선택지가 정해진 것처럼 흘러가기 보다는 작은 선택이 큰 목적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다. 게다가 나비효과까지 나타나 그것을 시간의 흐름을 제어함으로 작품 내의 과업을 달성하는 점에서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에서 존재하는 인간, 반대로 시간을 존재하게 하는 인간이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에서 하이데거의 철학은 조금 알아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만족하기 보다는 오히려 만족감을 얻지 못하게 해버렸다. 단지 인상 깊은 문구는 “왜 있는 것은 도대체 있고 차라리 아무 것도 아니지 않은가?”라는 것이다. 왜 있는 것은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고, 왜 아무 것도 아니야 할 이유가 없는가이다. 따라서 존재의 그 자체가 왜 있으며, 그것이 왜 그렇게 아니면 안되는가이다. 따라서 현실의 있음에 따른 물리적인 세계와 그 인간이 있다는 증거가 있는 언어가 불러지는 순간 논리학으로 이어진다.

어차피 우리 인간의 눈에 앞에 나무가 보인다고 하자. 하지만 그것은 나무이라도 그것이 설사 나무라는 실체를 가지고 있더라도 우리가 나무라고 불러주지 않으면 그것은 나무가 아니다. 결국 나무라 나무로서 존재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사고에서 태어난 결국 언어의 존재이다. 그런데 물리적으로 나무는 존재하나 우리가 나무라고 말하거나 생각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의문가는 점은 언어가 있기 전에 나무가 있었다. 하지만 언어로서 나무를 말해주지 않아 나무라는 것이 관념적으로 탄생하지 않았다. 분명 탄생의 시점은 나무를 나무라고 말하기 전에 있었지만, 그것이 도대체 왜 있는 것이고 차라리 왜 아무 것도 되지 않아야 할 그것은 무엇인가? 사소한 문제일 수 있으나 그것이 하나의 구심점으로 하여 넓게 펼쳐가게 된다면 존재의 근원이 무엇인가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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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프리카
곤 사토시 감독, 푸루야 토루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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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파프리카라는 것은 고추 품종의 하나인 파프리카의 씨를 빻아서 만든 향기로운 향신료로서 우리 인간이 먹는 식단에서 달콤한 입맛을 선사하는 식물이다. 그런 향기로운 향기를 가진 파프리카처럼 콘 사토시 감독의 파프리카는 과연 어떤 달콤하고 향기로운 맛을 주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이미 제목부터 묻고 있다.

우선 파프리카라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들어가기 이전에 우리는 이 작품을 만든 콘 사토시 감독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콘 사토시는 분명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또한 일본 애니메이션은 흔히 저패니메이션이라고 하여 상업 애니메이션을 추구하는 거대한 문화산업이다. 하지만 상업 애니메이션이라고 하여 그곳에 자본력만 융통되는 단순한 영상콘텐츠가 아니다. 그 상업성 내에 거대한 담론과 예술이라는 큰 가치가 향유하고 있다.

그런 작품을 만들고 제작하던 사람이 바로 콘 사토시다. 특히 일본 최초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인 “아키라”를 만든 오오토모 카츠히로가 상당한 작가주의적인 애니메이션 메모리즈(memories)라는 옴니버스 시리즈로 제작한다. 그때 오오토모 카츠히로 감독과 함께 각본을 짜던 사람이 바로 콘 사토시다. 이 작품을 본다면 일본 근대 자본주의사회와 더불어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 그리고 획일화적인 교육과 사회관념, 거기에 태어난 비인간성, 조직관료 체계 안에 갇혀 아직도 그런 못에 박힌 사고를 지닌 일본 근현대 사회를 비판했다.

오오토모 카츠히로 감독과 같이 작업한 이상 그의 작품은 단순히 재미와 흥미를 주기 보다는 철학과 사상이 깊이 파고든 하나의 예술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작품관을 가지고 퍼펙트블루와 망상대리인 천년여우, 도쿄 갓파더즈 등의 작품에 직접 제작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이 파프리카는 피할 수 없는 재미와 감동 그리고 심오한 담론을 펼친다. 왜 그럴까?

일단 감독에 대한 간단한 이력을 말한 후에 그가 보여주고 싶은 세계가 과연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우리는 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파프리카가 인간에게 향신료와 같은 달콤한 존재라면 이 제목과 더불어 작품 내의 주인공이 파프리카는 과연 어떤 향신료처럼 달콤하고 향기롭게 되고 싶은가이다. 우선 이 작품의 간단한 스토리는 이렇다.

누군가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지배를 바로 눈 앞에서 실현하기 보다는 인간이 모르는 사이에 지배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런 인간의 의식구조에서 만약 당신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당신은 이제부터 나의 명령에만 따르게 됩니다.”라고 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그것을 거절할 것이다. 또한 대부분 인간은 시각과 청각 중에서 특히 시각적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가 용이하다. 하지만 그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각의 정보가 차단된 상태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파프리카 작품 내에서 이런 인간의 이성이 살아있는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잠들어 숙면상태에 있는 무의식이라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기계 DC라는 꿈 모니터링 컴퓨터 장치의 도난에서 시작된다. 게다가 의심 가는 용의자는 의식불명이고, 다른 사람들은 자살을 시도하며, 계속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나서 통제가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거기에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참여한 토나카와 형사가 가세하면서 사건을 오히려 미궁에 빠진다.

그러나 모든 서사구조를 가진 작품처럼 이 애니메이션 역시 작품 내의 수수께끼와 사건을 차례차례 해결해 나간다. 그렇다면 이미 서사 앞부분에서 DC장비의 분실과 연구원들의 실종과 의식불명이 있었다면 작품의 필연적인 상황에 따라 인과관계가 연계되어 여기에 따른 최종 마무리로 결말을 짓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단순히 우리는 여기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을 통해 무엇을 나타내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이다.

이 작품에서 인간은 2가지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현실의 나, 그리고 하나는 현실이 아닌 나라는 점이다. 현실에 있든지 혹은 현실이 아니든지 다른 나라고 하여도 그 나라는 존재는 결국 한명으로 귀결된다. 그럼 나라는 자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나누어지고 혹은 일치하는가이다. 인간은 자신의 무의식적인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받는다. 그런 무의식적으로 남는 기억은 인간 본인에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어떤 행동과 말을 하게하며, 심지어는 그것이 하나의 당위성까지 가지게 된다.

또한 의식과 무의식은 하나는 전자는 직접 감지하여 사고할 수 있으나 후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후자의 세계를 통제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런 후자를 통치하게 된다면 아무리 이성이 인간을 받치고 있더라도 인간의 이성한계가 무의식의 힘을 이기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모든 지배를 받을 것이다.

그런 무의식 세계가 얼마나 작품 내에서 큰 영향을 주는지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다. 특히 2명의 인물에서 이런 부분을 잘 볼 수 있다. 작품의 제목처럼 파프리카라고 하는 여성은 10대의 미모를 지닌 미인으로 상당히 밝고 긍정적인 사고를 지닌 인물이다. 그렇지만 이 여성은 현실세계의 사람이 아니라 비현실세계의 여성이다. 오로지 꿈의 세계 즉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만 존재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꿈의 장치로 통한 현실왜곡으로 그녀가 실제 현실에서 나오는 것처럼 설정된다. 그렇다면 이 꿈의 세계에 등장하는 여성의 몸주인은 누구인가? 그녀는 바로 치바 아츠코라는 연구원으로 평소에 매우 날카롭고 이성적이며 상당히 딱딱한 느낌을 주는 전형적인 연구실에만 살아가는 여성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어긋난 꿈과 현실의 그녀들이 왜 이리 되었을까?

우리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은 이성적 사고를 나타내는 대화와 문장으로 나타내기 보다는 차라리 허상 즉 이미지의 세계로만 충족할 수 있다. 물론 이미지를 기표로 삼아 그것의 기의를 찾아 해석하는 기호학은 있으나, 적어도 기표라는 이미지는 욕망덩어리를 보여주기에는 상당히 좋은 존재이다. 그렇듯이 아츠코는 평소 말이 없고 조용하고, 외적인 모습에도 안경을 쓰고 머리까지 묶는 전형적인 차가운 스타일이다.

그런 차갑고 이성적인 그녀에게서 파프리카라는 열정이 넘치고 활달한 소녀가 나온다. 결국 파프리카라는 소녀는 치바 아츠코가 가지지 못한 하나의 선망적인 존재이다. 현실에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입장에서 이룰 수 없는 욕망을 파프리카가 대신 해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파프리카는 그런 그녀의 이성에 억압된 잠재의식이 폭발한 것처럼 꿈을 모니터링하는 세계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한다. 마치 그 세계에 새로운 영웅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꿈이라는 것은 자신의 욕망에 대한 한시적인 스트레스를 풀어버리는 것이 그 자체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치바 아츠코처럼 자신의 의식에 눌린 무의식을 폭발하는 파프리카가 있다면 이와 반대되는 사람은 있지 않을까? 그렇다. 그런 인간은 존재한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솔직하고 욕심이 없을 사람일 것이다. 우리 인간은 분명히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어도 자신의 욕망에 목이 말라 계속 신기루 속의 오아시스를 찾아  다닌다. 하지만 진정한 오아시스는 바로 코앞에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욕구가 아닌 욕망의 동물이다. 일반 동물은 한번 그때 만족하면 그것으로 끝이나 인간은 그것이 아니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계속 누군가와 마주하면서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결국 자신이 욕망하여 결국 그것을 성취해도 다른 욕망이 계속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인간에게 고뇌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이에 반해 이런 고뇌와 불만족은 인간 그 자체를 성숙시키고 문명의 발전을 안겨주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인간이 가진 욕망의 굴레에서 가장 행복하게 나온 사람이 누구냐고 한다면 이 작품에서는 토키타 코사쿠라는 천재박사이다. 그는 치바 아츠코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고, 같은 연구소의 연구원이다. 하지만 토키타 박사는 치바와 달리 냉정하거나 이성적이거나 딱딱하지 않다. 오히려 어린아이가 처음 동물원에 가서 많은 동물들을 보고 놀라는 그 느낌을 가진 존재이다. 즉 그는 세상 모든 것에서 신기하고 재미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찾아가는 사람이다.

특별히 돈과 명예에 관심도 없고, 단순히 놀이기구도 좋아하고 인형도 좋아하고 광대행진도 좋아한다. 여기에 평소 즐기는 것은 단순한 식탐에 의한 간식사냥이다. 그는 성욕에도 크게 지배받지 않는다. 자기의 마음은 언제나 솔직하고 그 기분에 따라 움직이며, 게다가 타인에게도 친절하다. 물론 겉모습은 뚱뚱하고 둔하여 남자로서의 매력은 없다. 그래도 세상에 자신에게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 남자에게 꿈과 현실은 그야말로 모두 놀이기구다.

놀이기구를 좋아하여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어른이 되어서도 놀이에 흠뻑 빠지고, 근무시간에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과도한 노동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장난감을 만들어서 이용한다고 하는 기분일 것이다. 역시 그는 꿈과 현실 모두가 놀이터이고, 재미있는 세상이다. 그런 그에게 자신 스스로가 만든 위기가 있을까? 없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는 위기가 터진다. 그것은 어긋난 꿈의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식이 있는 이성 아래에서 타인을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성의 사고가 있는 과정에서 자신의 심신을 판단할 수 있는 자율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율성이 없는 꿈의 세계에서 그것을 강제적으로 꾸준히 교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작품에서 내가 소개한 치바와 토키타는 서로 어긋난 현실과 꿈을 가지고 있으나 적어도 각자의 꿈을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다. 단지 그 꿈의 발현되어 느끼는 것이 다르지만 말이다.

그럼 역으로 그 꿈을 소중함을 알기에 그것을 이용하려는 존재에 대해 어떻게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인가? 이 작품의 최고의 악은 자신의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행동들을 반대로 꿈에서 보상받으려 한다. 그런데 웃기게도 꿈이라는 자유를 지나 방종의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꿈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 불간섭적인 존재다. 단지 그 꿈이 어떻게 변형되고 왜곡되게 나오는 것은 하나의 인자로서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꿈의 세계를 억압하고 현실을 지배할 욕망은 품은 인간에서 보이는 오류는 타인의 꿈은 부정하고 통제하면서 결국 자기가 욕망하는 것 자체 역시 꿈이라는 세계다. 꿈이 현실을 지나친 돌출을 원하지 않으면서 결국 자신의 욕망을 돌출시키는 모순적인 행동이 보인다. 그런 행동을 보인 암흑의 존재는 큰 실수를 저지른다. 그것은 이른바 인간이 가진 무의식적인 콤플렉스를 자기 역시 당면하기 때문이다.

음모의 배후에 숨은 자는 현실에서 가질 수 없는 심적 박탈감을 꿈의 세계에서 대신 누리려 한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꿈을 볼 수 있는 기계를 물리적으로 현실 속에서 다룰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 배후의 하수인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 하수인에게 큰 맹점이 있었다. 꿈을 억압하는 것을 반대하는 파프리카의 원본 치바를 사랑하던 것이다. 그러나 꿈의 세계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치바를 제거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치바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독점할 것인가?

여기서 권력을 가진 아버지같은 존재를 치고, 여자를 가질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포기할 것인가? 보통 하나의 세계를 만든 신화를 본다면 신화의 주인공은 아버지로부터 권위를 받아가기 보다는 아버지가 없이 자신의 권위를 만들고, 그 권위의 최종 과업 종결점은 여자와의 결혼이다. 결국 피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무의식적인 욕망에 의해 아버지와 아들로 경쟁하는 음모자들은 서로 자기의 세계를 차지하기 싸운다.

그 세계란 자기가 가지지 못한 현실에서 느낀 박탈감을 채우기 위한 욕망의 공간이다. 우리는 흔히 꿈을 꾼다고 하면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먼 미래 자신이 되고 싶은 하나의 존재인지 혹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타나는 미지의 세계인지 말이다. 어떻게 되었든 그 세계는 현실의 자신이 가진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자신이 원한 것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그런 인간의 욕망을 담은 꿈, 그것을 보여주는 파프리카에서 우리는 우리의 꿈을 어떻게 봐야하는 것일까?

ps. 콘 사토시 감독의 명복을 빕니다. 그곳에서 행복한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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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화 예찬 - 정치미학을 위한 10개의 노트
조르조 아감벤 지음, 김상운 옮김 / 난장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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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아감벤의 세속화 예찬이란 책을 보면서 제일 처음 내가 느낀 것은 세속화라는 것은 “전통적 사회에서의 초월적인 가치나 지배구조가 근대 자본주의의 생성에 따라 쇠퇴하여 보다 합리적인 가치나 규범으로 바뀌는 것으로, 신성화(神聖化)의 대립개념이다.”라고 한다. 어떻게 본다면 세속화라는 것은 신성화의 반대개념이라는 점에서 근대 자본주의로 들어서면서 자본주의적인 가치관이 합리적인 것을 추구한다면 세속화는 합리적 그 자체를 받아들이기 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말하는 듯했다.

세속화(世俗化)라는 단어 자체가 그렇게 친숙한 단어도 아닐 뿐만 아니라 세속화를 예찬하고 있다던 책을 보는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역시 세속화에 대한 나의 입장은 친숙하지 못하게 느낀다. 그러나 단지 말하고픈 것은 이 책에서 느낀 부분은 바로 인간의 욕망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전에부터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개인적인 사고방식이 홀로 어떤 논제를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런 의견이나 사고가 과거에 어느 누군가에게 있었구나? 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왔다. 가령 나는 인간의 욕망은 상상세계에 있는 것으로 우리는 상상의 세계에 대해 볼 수 있다. 물론 그 상상의 세계는 우리의 눈으로 보여주기 보다는 가상의 이미지처럼 우리 머릿속에서 그려진다.

그렇지만 그런 욕망의 세계는 글로서 혹은 말로서 적어가기 보다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이미지로 통해 보는 것이 훨씬 욕망을 잘 잡아내는 것이다. 그런 욕망을 하나의 덩어리로 되어 가슴 속에 묻혀야 하는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분출해야 하는가? 그런 점에서 회화나 조각 등과 같은 시각적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 나오면서 인간의 표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존재가 등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시각적인 부분이 너무 흔하고 흔하다면 어떻게 될까나? 인간의 관념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관념 속에 있는 이미지와 존재론적인 부분에서 서로 대립하게 된다면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하나의 구심점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것이 아마 신성화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신성화는 모든 것을 다 배제하고 어느 특정 대상을 기념하게 한다.

따라서 신성화는 각각의 사고방식을 지닌 인간에게 하나의 권위와 통제력을 갖출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진다. 그래서인지 우리에게 대중사회에서 나타나는 미디어 그리고 미디어 이전에 존재하던 정치적·종교적인 이데올로기 이 모두가 대중들을 통제하기 좋은 방법이다. 특히나 인간이 문자를 사용하고 문자보다는 영상이미지로 더욱 친숙하게 다가오면 올수록 거기에 대한 대중들의 통제는 신성화라는 이른바 제의 같은 행위에 스펙타클(Spectacle)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

그런 대중들을 통제하고 대중들에게 미디어가 신성한 하나의 가치관으로 들어서는 것 자체가 대중들이 거기서 얽매이게 하여 대중들을 한 무리의 구경꾼으로 전략하게 하는 스펙타클의 사회처럼 조르조 아감벤은 그런 미디어에 대한 신성함을 비웃으려고 하지 않았는가 싶다. 그런 비웃음에 대한 내용인지 아닌지 모르나 작품 9화에 나온 포르노그래피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프랑스 사진작가 클로에 데 뤼세의 사진작품은 매우 독특한 연출을 보여주었다. 문제는 이 작가는 직접 포르노에 출연했다는 것도 중요하고, 그런 포르노에 출연한 것도 모자라 그 포르노를 가지고 성적인 희롱을 넣어 예술작품으로 승화했다는 점이다. 어느 30대 포르노 배우가 남성과 성행위를 하는데, 상당히 관음적인 요소를 갖추었다.

물론 나체의 모습은 남성의 모습과 카메라 앵글에 따라 감추었지만, 그 감추어진 속에 훔쳐보기가 존재하는 포르노의 새로운 미적 감각을 보였다. 의상은 검정색 스타킹에 가터벨트를 찬 것에서 일반 포르노 여배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배우의 얼굴표정이라는 점이다. 보통 포르노 내지 혹은 성적인 부분을 상품매체로 넘기는 것(여자가수, 배우, 아이돌들도 분명 가진다)에서 화면 아래로 훔쳐보는 관객들이 몰래 본다는 관음적인 요소에 흥분하고 만족한다.

그런데 이 이미지에서 성행위를 하는 여성이 성적인 쾌락 내지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개를 돌려(여성의 자세는 사람이 말흉내를 내듯이 무릎과 손바닥을 지면에 고정), 당신들이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경하는 당신을 구경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보통 Sex라는 것도 정치적인 부분에서 많이 이용된다. 파시즘이 만연한 곳에는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고, 가장 억압된 사회가 가장 음탕한 사회라고 한다.

그런 성적인 부분에서 정치사회적인 것과 연계되어 하나의 억압을 정당화하기 보다는 그 정당화를 오히려 전복하려는 요소를 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라면 10장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6분“에서 재밌는 흑백사진이 나온다. 어느 영화의 시나리오에서 산초판사는 어느 시골 마을 영화관에 들어가 돈키호테를 찾고 있는데, 돈키호테가 영화를 보고 있다면 어떨까?

그런데 그 돈키호테가 고전소설을 원본으로 한 돈키호테 영화를 보고 있다면 어떨까? 내가 나온 것을 내가 보고 놀라고 있다면 말이다. 어떻게 본다면 세속화 예찬은 대중들이 하나의 구경꾼처럼 몰려드는 세상이 아니라 그 구경꾼들을 오히려 역으로 구경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추구하는 것이 아닐까? 기 드보르의 “스펙타클의 사회(Society of the spectacle)에서는 현대사회는 이미지가 매개로 되어 대중들을 수동적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한다.

그런 수동적인 관객을 만들려면 하나의 상징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상징을 지배받음에 따라 대중들이 스펙타클화하는데, 그것에 대해 전복시킨다면 정말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문화라는 것을 이용해 정치적인 신성화를 오히려 세속화하여 대중들 스스로가 보는 것에서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있다라는 것은 하나의 코미디로 되는 기분이다. 이 책을 읽으면 초반과 중반에서 조금 어렵다. 물론 막바지에 가더라도 어렵지 않다는 것은 아니나, 그런 역설적인 영화연출과 여자 포르노 배우의 표정을 본다면 기대감으로 가득한 우리는 뭐라 할 수 없는 기분에 젖게 된다.

사실 현대사회는 욕망을 하는 것을 자신이 욕망하기 보다는 타인들이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여 더욱 사회적인 존재로 되는 듯하다. 따라서 타인들의 기준에 맞추어 그것이 하나의 종교적인 신성화로 되어 교조적인 현상이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은 신성하기 보다는 신성하다고 믿어버리게 한다는 것이 바를 것이다. 아마 그래서 아방가르드 즉 전위예술가들은 그런 신성화된 가치를 전복하기 위해 별로 가치 없는 것들도 가치 있음으로, 혹은 가치 없음을 가치 없음을 나타내었으나 결국 그것이 가치 있음으로 만들어 버려 현대사회에 숨겨져 있는 정치미학을 비웃는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이 책에서는 주석이 달려 있는데, 재미있는 내용과 자료가 많다. 그곳에 있는 도서도 그러나 영화 역시 새롭고 흥미로운 것들이 많다. 정치적 도구인 영화에서 영화의 도구인 정치라는 풍자성이 보이는 것이 있다. 내가 추천해줄 장면은 영화 “자유의 환영”에서 변기통 위에 앉는 장면인데, 사실 화장실이 거실이란다. 그리고 이 영화의 시퀀스는 이어지지 않고 서로 분리되어 있어 정해진 서사구조를 파괴한다. 영화라는 것도 이른바 정치사회적인 이데올로기가 담겨진 하나의 도구라고 생각하고 본다면야 무슨 의미인지 알듯 싶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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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중학생이 보는 금오신화 중학생 독후감 따라잡기 (중학생 독후감 필독선) 46
김시습 지음, 성낙수 엮음 / 신원문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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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를 읽으면서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보통 인문학에서 철학, 문학, 역사학이라는 3가지 대표적인 학문이 떠오르는데, 이 금호신화라는 서적을 보는 것은 결국 이 3사지 부분을 인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먼저 시대적인 배경에 따른 것을 본다면 김시습이란 인물은 1435년(세종 17)~1493년(성종 24). 조선 초기의 학자이며 문인, 생육신의 1사람이었다. 당대 최고의 명군이신 세종대왕 시절부터 시작하여 역사적 풍파와 비극을 앓던 세조시대를 지나 성종을 이어온 사람이다. 그런 그에게 비극이란 역사적 현실을 승화할 방법은 현실에 보이지 않으나 현실의 욕망을 투영하는 신화라는 문학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그런 시대적인 흐름과 그런 역사적인 배경에서 김시습이 만든 금오신화는 많은 요소를 여기저기 배치하였다. 만복사저포기의 이야기를 들어다보면 먼저 서생이란 선비가 있는데, 그는 아주 학문적으로 우수하고 훌륭한 인품을 가졌다. 어느날 절에 가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슬프게 시를 읊었는데, 여기에 어느 아름다운 아가씨가 응답해준다. 그녀와의 첫 만남 그리고 당시 사대부 사회로 도저히 용납되지 않은 뜨거운 사랑, 하지만 이 모든 러브스토리는 허망한 스쳐가는 일이었다.

물론 허생에게는 그렇지 않을 것이나, 사실 허생이 천상배필이라 여기던 그 아름답고 숭고한 여인은 허무하게 억울하게 외적의 침입에 목숨을 잃은 한 많고 외로운 여인이었다. 자신의 청춘과 사랑을 펼치기 전에 꽃다운 나이로 칼에 맞아 그저 저승에 가지 못하고 이승을 외로이 떠돌고 있었다.

그런 허생에게 그런 운명같은 슬픈 사랑이 다가온다. 겉으로 본다면 분명 이 작품은 그냥 러브스토리로 볼 수 있으나 사실 그 이면에는 이 산과 강이 아름다운 이 조선에 외적의 잦은 침입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가족들이 비통하게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가이다. 그런 한이 맺힌 이야기를 두 남녀의 사랑으로 보여준 이야기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여인을 위해 서생은 평생 결혼 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고, 세상 사람들을 피해 먼 산으로 숨는다. 그가 죽은지는 아닌지는 모르나 이 작품 내에서 서생은 아마 김시습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세상의 속세를 잊고 산으로 강으로 떠나 세상의 시름을 잊어가는 그의 방랑자의 인생을 말이다.

이생규장전은 처음에는 매우 애틋하고 열정적인 사랑을 노래하는 신화다. 가세가 기울어진 사대부 남자 이생, 거기에 비해 부잣집에 귀한 양반 규수인 최랑은 분명 당시 사회나 혹은 지금 사회나 이루어지기 힘든 빈부격차를 둔 집안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빈부 격차와는 아무 의미 없이 그저 서로의 인격과 학문, 그리고 자질로서 사랑을 확인했다.

사랑을 하는데 조건은 그저 조건일 뿐이었다. 어떻게 보면 현대사회처럼 모든 물질적인 기준으로 삼는 사랑과 차원이 다른 순수하고 열정적인 그들의 가치였다. 그러나 현실은 무서웠다. 최랑에 빠진 이생은 집에 돌아가는 것을 잊은 채로 며칠 최랑의 집에 살다가 추후 귀가 뒤에 밤과 새벽공기를 마시며 만난다. 세상에는 꼬리가 길면 밟히는 것처럼 그의 행동을 주시하던 이생의 아버지는 아들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어 그를 시골로 보낸다.

그러나 어찌 하오리? 사랑하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이제 막 시작한 순수한 불꽃처럼 타오른 두 사랑을 이토록 멀리 유배생활하게 하여 최랑은 병에 걸리고,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처럼 외동딸을 세상 그 모든 보물보다 아끼던 최랑의 부모님은 자신의 외동딸을 가난한 선비인 이생에게 시집보낸다. 물론 어렵고 긴 어두운 터널로 들어간 심정이었으나, 길고 긴 터널을 지나면 밝고 화사한 풍경이 있었다.

학문도 출중하고 성품도 올바른 이생이 나라님이 계시는 구중궁궐에 들어가서 국무를 보지 않을 소인가? 허나 이런 기쁨도 잠시, 이듬해 홍건적의 침입으로 고려국은 전쟁의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가족과 하인들은 모두 흩어지고, 외로운 아낙네 최랑은 사랑의 기쁨도 잠시 뒤로 한 채 오랑캐의 칼에 한을 품고 죽는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사랑인 이생을 위해 정절을 지켰다.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직접 스스로 성사시킨 사랑인 만큼 모든 것을 승화했다. 그 죽음이란 극단적인 비극으로 말이다.

하지만 죽음은 남아있는 이에겐 절망의 씨앗만 심어줄 뿐이다. 아내 잃은 이생에겐 모든 것이 암흑이다. 그래도 죽어도 죽은 것을 아는 이생이라도 최랑의 혼백은 이생에게는 살아있는 인간과 다름없었다. 죽어나 사나 같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전쟁 통에 죽은 식솔의 차가운 몸과 갈기갈기 찢어져 들판에 뿌려진 최랑을 운구하여 묻으니 저승에 가지 못해 남은 이승의 혼백은 결국 한을 남겨둔 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명계로 떠난다.

이생은 이미 모든 것을 잃은 듯한 마음으로 병들어 죽음을 기다리다 결국 그녀에게 떠난다. 어떻게 보면 김시습의 마음속의 군주 문종과 단종이 죽을지라도 자신은 영원히 그들을 따를 것이라는 깊은 맹세가 있음이 아닐까 싶다.

최유부벽정기는 홍생이란 젊고 잘생기고 학문이 뛰어난 청년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의 이야기보다는 그가 있던 배경이 인상 깊다. 김시습이 살던 조선, 그가 그리던 고조선, 이것은 결국 잃어버린 역사 그리고 그 아름다운 시절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늘의 선녀가 내려와 홍생과의 시를 주고 받으며, 아름다운 그 시절을 추억한다.

그 추모의 시가 오고가자 어느 순간 하룻밤의 꿈처럼 새벽의 닭이 울자 모두 사라져 간다. 홍생은 그 아름답고도 고귀한 고대왕가의 여인을 사모하다가 결국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고 순수히 맞이한다. 고조선을 그린다고 하나 사실 홍생에겐 원래 자신이 있어야 할 공간이 없어진 것에 대한 김시습의 기분이었으랴.

남염부주지는 정말 김시습의 기분일 것이다. 시대적 배경은 세조 11년이고 경주에 박생이란 선비를 두고 말한다. 박생은 학문적인 기질은 훌륭하고 인품 역시 온후하나 정치에 발을 들일 수가 없었고, 세간에 그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은 박생이 그저 거만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좋아했다. 그것은 그가 정말 선비로서 훌륭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현실세계에서는 그는 그저 마음에 깊은 뜻을 품어도 답답하고 원통할 뿐이다. 그의 원대한 꿈은 현실에서 그저 꿈같은 이야기이므로 오히려 꿈의 세계에서 그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랴? 그는 어느날 이상한 세계로 간다. 그곳은 인간의 세계가 아닌 요물과 뜨거운 염화가 불타는 곳이다.

박생은 거기 가서 염라대왕을 만나고, 세상 모든 이치와 존재에 대해 말한다. 이 신화까지 보면 금오신화의 사상적인 배경은 많은 것이 섞여있다. 일단 우리나라는 무속신화에 담겨 있니는 무속신앙, 그리고 불교사상, 조선의 정치이념인 유학, 또한 도교사상까지 깃들여 있으나 아주 복잡 다양한 세계관이 펼쳐져 있다.

그 중에 최고의 가치는 유교사상으로 주공과 공자의 덕을 최고로 여기며, 다음으로 석가의 도를 칭송했다. 유학은 정론적인 학문이고 불교는 사론적인 학문이나 모든 학문의 최종 목표는 사람들을 널리 이롭게 함에서 목적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목적이 있는 사상과 학문이라도 현실에서 임금은 백성의 뜻을 거르고, 오히려 백성을 힘으로 누른다는 말처럼 김시습이 여기는 현실에 대한 원망과 한을 여기서 볼 수 있다.

다행히도 염라대왕은 주자와 공자의 유학이란 덕을 이어 감에 따라 자기의 임기를 채웠고, 이제 새로운 염라대왕을 여기에 앉혀야 한다. 모든 것을 공정하게 봐야할 인물이 필요하고, 그것은 박생이었다. 하지만 박생이 염라대왕이라 함은 결국 김시습이 국록을 먹던 시절에 자신의 군주를 지키지 못한 채 죽어버리게 한 세조와 그의 무리였을 것이다. 결국 현실은 몰라도 저승에서 그들을 심판하겠다고 하는 김시습의 깊은 복수심이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다.

용궁부연록은 위의 이야기와 다르나, 사실 남염부주지와 비교하여 그 내용적인 가치는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용궁에 간 박연이 용왕을 만나 자신의 필력을 넓게 보이고 용왕이라는 엄청난 신에게 예우를 받아 신과 대등한 인간임을 내세웠다. 신이 존경하고 신이 우러러 보는 인간, 그 박연은 결국 김시습 자신의 이야기임이다.

그는 용왕에 가서 진지상과 즐거운 잔칫상을 받고, 용왕의 보배를 본다. 그 보배들은 번개를 치고 바람을 불고 물을 넘치게 한다. 재앙을 부를 수 있는 도구였다. 박연이 그것을 유심히 보는 이유는 아마 당시 살고 있는 현실을 부수고 싶다는 깊은 불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다. 그것이 불가능한 하나의 꿈은 아마 잘 알 것이다.

그런 모양인지 박연이 용궁에서 나올 적에는 비단상장에 보관할 진주와 비단이었다. 현실의 부조리를 없앨 수가 없어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나 그것도 되지 않음에 김시습은 아쉬운 마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지만 진주와 비단과 같은 보배처럼 이것을 그 누구에게 보여주지 않고 산으로 떠난 박연처럼 김시습은 평생 보배 같은 자신의 마음을 지키며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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