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프리카
곤 사토시 감독, 푸루야 토루 외 출연 / 소니픽쳐스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파프리카라는 것은 고추 품종의 하나인 파프리카의 씨를 빻아서 만든 향기로운 향신료로서 우리 인간이 먹는 식단에서 달콤한 입맛을 선사하는 식물이다. 그런 향기로운 향기를 가진 파프리카처럼 콘 사토시 감독의 파프리카는 과연 어떤 달콤하고 향기로운 맛을 주는가라는 의문에 대해 이미 제목부터 묻고 있다.

우선 파프리카라는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들어가기 이전에 우리는 이 작품을 만든 콘 사토시 감독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콘 사토시는 분명 일본 애니메이션 감독이다. 또한 일본 애니메이션은 흔히 저패니메이션이라고 하여 상업 애니메이션을 추구하는 거대한 문화산업이다. 하지만 상업 애니메이션이라고 하여 그곳에 자본력만 융통되는 단순한 영상콘텐츠가 아니다. 그 상업성 내에 거대한 담론과 예술이라는 큰 가치가 향유하고 있다.

그런 작품을 만들고 제작하던 사람이 바로 콘 사토시다. 특히 일본 최초 사이버펑크 애니메이션인 “아키라”를 만든 오오토모 카츠히로가 상당한 작가주의적인 애니메이션 메모리즈(memories)라는 옴니버스 시리즈로 제작한다. 그때 오오토모 카츠히로 감독과 함께 각본을 짜던 사람이 바로 콘 사토시다. 이 작품을 본다면 일본 근대 자본주의사회와 더불어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 그리고 획일화적인 교육과 사회관념, 거기에 태어난 비인간성, 조직관료 체계 안에 갇혀 아직도 그런 못에 박힌 사고를 지닌 일본 근현대 사회를 비판했다.

오오토모 카츠히로 감독과 같이 작업한 이상 그의 작품은 단순히 재미와 흥미를 주기 보다는 철학과 사상이 깊이 파고든 하나의 예술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작품관을 가지고 퍼펙트블루와 망상대리인 천년여우, 도쿄 갓파더즈 등의 작품에 직접 제작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서 이 파프리카는 피할 수 없는 재미와 감동 그리고 심오한 담론을 펼친다. 왜 그럴까?

일단 감독에 대한 간단한 이력을 말한 후에 그가 보여주고 싶은 세계가 과연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우리는 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파프리카가 인간에게 향신료와 같은 달콤한 존재라면 이 제목과 더불어 작품 내의 주인공이 파프리카는 과연 어떤 향신료처럼 달콤하고 향기롭게 되고 싶은가이다. 우선 이 작품의 간단한 스토리는 이렇다.

누군가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런 지배를 바로 눈 앞에서 실현하기 보다는 인간이 모르는 사이에 지배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그런 인간의 의식구조에서 만약 당신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당신은 이제부터 나의 명령에만 따르게 됩니다.”라고 한다면 당신은 분명히 그것을 거절할 것이다. 또한 대부분 인간은 시각과 청각 중에서 특히 시각적으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기가 용이하다. 하지만 그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시각의 정보가 차단된 상태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파프리카 작품 내에서 이런 인간의 이성이 살아있는 의식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잠들어 숙면상태에 있는 무의식이라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기계 DC라는 꿈 모니터링 컴퓨터 장치의 도난에서 시작된다. 게다가 의심 가는 용의자는 의식불명이고, 다른 사람들은 자살을 시도하며, 계속 이상한 사건들이 일어나서 통제가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거기에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참여한 토나카와 형사가 가세하면서 사건을 오히려 미궁에 빠진다.

그러나 모든 서사구조를 가진 작품처럼 이 애니메이션 역시 작품 내의 수수께끼와 사건을 차례차례 해결해 나간다. 그렇다면 이미 서사 앞부분에서 DC장비의 분실과 연구원들의 실종과 의식불명이 있었다면 작품의 필연적인 상황에 따라 인과관계가 연계되어 여기에 따른 최종 마무리로 결말을 짓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단순히 우리는 여기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을 통해 무엇을 나타내고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이다.

이 작품에서 인간은 2가지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현실의 나, 그리고 하나는 현실이 아닌 나라는 점이다. 현실에 있든지 혹은 현실이 아니든지 다른 나라고 하여도 그 나라는 존재는 결국 한명으로 귀결된다. 그럼 나라는 자아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나누어지고 혹은 일치하는가이다. 인간은 자신의 무의식적인 세계에 막대한 영향을 받는다. 그런 무의식적으로 남는 기억은 인간 본인에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 어떤 행동과 말을 하게하며, 심지어는 그것이 하나의 당위성까지 가지게 된다.

또한 의식과 무의식은 하나는 전자는 직접 감지하여 사고할 수 있으나 후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후자의 세계를 통제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그런 후자를 통치하게 된다면 아무리 이성이 인간을 받치고 있더라도 인간의 이성한계가 무의식의 힘을 이기지 못하면 결국 우리는 무의식의 세계에서 모든 지배를 받을 것이다.

그런 무의식 세계가 얼마나 작품 내에서 큰 영향을 주는지 우리는 충분히 알 수 있다. 특히 2명의 인물에서 이런 부분을 잘 볼 수 있다. 작품의 제목처럼 파프리카라고 하는 여성은 10대의 미모를 지닌 미인으로 상당히 밝고 긍정적인 사고를 지닌 인물이다. 그렇지만 이 여성은 현실세계의 사람이 아니라 비현실세계의 여성이다. 오로지 꿈의 세계 즉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만 존재하는 인간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꿈의 장치로 통한 현실왜곡으로 그녀가 실제 현실에서 나오는 것처럼 설정된다. 그렇다면 이 꿈의 세계에 등장하는 여성의 몸주인은 누구인가? 그녀는 바로 치바 아츠코라는 연구원으로 평소에 매우 날카롭고 이성적이며 상당히 딱딱한 느낌을 주는 전형적인 연구실에만 살아가는 여성상이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어긋난 꿈과 현실의 그녀들이 왜 이리 되었을까?

우리 인간에게는 욕망이 있다. 그 욕망은 이성적 사고를 나타내는 대화와 문장으로 나타내기 보다는 차라리 허상 즉 이미지의 세계로만 충족할 수 있다. 물론 이미지를 기표로 삼아 그것의 기의를 찾아 해석하는 기호학은 있으나, 적어도 기표라는 이미지는 욕망덩어리를 보여주기에는 상당히 좋은 존재이다. 그렇듯이 아츠코는 평소 말이 없고 조용하고, 외적인 모습에도 안경을 쓰고 머리까지 묶는 전형적인 차가운 스타일이다.

그런 차갑고 이성적인 그녀에게서 파프리카라는 열정이 넘치고 활달한 소녀가 나온다. 결국 파프리카라는 소녀는 치바 아츠코가 가지지 못한 하나의 선망적인 존재이다. 현실에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입장에서 이룰 수 없는 욕망을 파프리카가 대신 해결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파프리카는 그런 그녀의 이성에 억압된 잠재의식이 폭발한 것처럼 꿈을 모니터링하는 세계에서 종횡무진으로 활약한다. 마치 그 세계에 새로운 영웅으로서 말이다.

하지만 꿈이라는 것은 자신의 욕망에 대한 한시적인 스트레스를 풀어버리는 것이 그 자체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치바 아츠코처럼 자신의 의식에 눌린 무의식을 폭발하는 파프리카가 있다면 이와 반대되는 사람은 있지 않을까? 그렇다. 그런 인간은 존재한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고 솔직하고 욕심이 없을 사람일 것이다. 우리 인간은 분명히 부와 명예를 가지고 있어도 자신의 욕망에 목이 말라 계속 신기루 속의 오아시스를 찾아  다닌다. 하지만 진정한 오아시스는 바로 코앞에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욕구가 아닌 욕망의 동물이다. 일반 동물은 한번 그때 만족하면 그것으로 끝이나 인간은 그것이 아니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계속 누군가와 마주하면서 타인이 욕망하는 것을 결국 자신이 욕망하여 결국 그것을 성취해도 다른 욕망이 계속 존재하기 때문이다.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인간에게 고뇌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이에 반해 이런 고뇌와 불만족은 인간 그 자체를 성숙시키고 문명의 발전을 안겨주는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인간이 가진 욕망의 굴레에서 가장 행복하게 나온 사람이 누구냐고 한다면 이 작품에서는 토키타 코사쿠라는 천재박사이다. 그는 치바 아츠코와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고, 같은 연구소의 연구원이다. 하지만 토키타 박사는 치바와 달리 냉정하거나 이성적이거나 딱딱하지 않다. 오히려 어린아이가 처음 동물원에 가서 많은 동물들을 보고 놀라는 그 느낌을 가진 존재이다. 즉 그는 세상 모든 것에서 신기하고 재미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찾아가는 사람이다.

특별히 돈과 명예에 관심도 없고, 단순히 놀이기구도 좋아하고 인형도 좋아하고 광대행진도 좋아한다. 여기에 평소 즐기는 것은 단순한 식탐에 의한 간식사냥이다. 그는 성욕에도 크게 지배받지 않는다. 자기의 마음은 언제나 솔직하고 그 기분에 따라 움직이며, 게다가 타인에게도 친절하다. 물론 겉모습은 뚱뚱하고 둔하여 남자로서의 매력은 없다. 그래도 세상에 자신에게 부족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 남자에게 꿈과 현실은 그야말로 모두 놀이기구다.

놀이기구를 좋아하여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여 어른이 되어서도 놀이에 흠뻑 빠지고, 근무시간에 일을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과도한 노동으로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장난감을 만들어서 이용한다고 하는 기분일 것이다. 역시 그는 꿈과 현실 모두가 놀이터이고, 재미있는 세상이다. 그런 그에게 자신 스스로가 만든 위기가 있을까? 없다. 그렇지만 이 작품에서는 위기가 터진다. 그것은 어긋난 꿈의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의식이 있는 이성 아래에서 타인을 지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성의 사고가 있는 과정에서 자신의 심신을 판단할 수 있는 자율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율성이 없는 꿈의 세계에서 그것을 강제적으로 꾸준히 교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작품에서 내가 소개한 치바와 토키타는 서로 어긋난 현실과 꿈을 가지고 있으나 적어도 각자의 꿈을 소중하게 여긴 사람이다. 단지 그 꿈의 발현되어 느끼는 것이 다르지만 말이다.

그럼 역으로 그 꿈을 소중함을 알기에 그것을 이용하려는 존재에 대해 어떻게 우리는 생각해야 할 것인가? 이 작품의 최고의 악은 자신의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행동들을 반대로 꿈에서 보상받으려 한다. 그런데 웃기게도 꿈이라는 자유를 지나 방종의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다. 꿈은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절대 불간섭적인 존재다. 단지 그 꿈이 어떻게 변형되고 왜곡되게 나오는 것은 하나의 인자로서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꿈의 세계를 억압하고 현실을 지배할 욕망은 품은 인간에서 보이는 오류는 타인의 꿈은 부정하고 통제하면서 결국 자기가 욕망하는 것 자체 역시 꿈이라는 세계다. 꿈이 현실을 지나친 돌출을 원하지 않으면서 결국 자신의 욕망을 돌출시키는 모순적인 행동이 보인다. 그런 행동을 보인 암흑의 존재는 큰 실수를 저지른다. 그것은 이른바 인간이 가진 무의식적인 콤플렉스를 자기 역시 당면하기 때문이다.

음모의 배후에 숨은 자는 현실에서 가질 수 없는 심적 박탈감을 꿈의 세계에서 대신 누리려 한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서는 꿈을 볼 수 있는 기계를 물리적으로 현실 속에서 다룰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그 배후의 하수인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 하수인에게 큰 맹점이 있었다. 꿈을 억압하는 것을 반대하는 파프리카의 원본 치바를 사랑하던 것이다. 그러나 꿈의 세계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치바를 제거할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치바를 죽일 것인가? 아니면 독점할 것인가?

여기서 권력을 가진 아버지같은 존재를 치고, 여자를 가질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포기할 것인가? 보통 하나의 세계를 만든 신화를 본다면 신화의 주인공은 아버지로부터 권위를 받아가기 보다는 아버지가 없이 자신의 권위를 만들고, 그 권위의 최종 과업 종결점은 여자와의 결혼이다. 결국 피는 이어지지 않았으나 무의식적인 욕망에 의해 아버지와 아들로 경쟁하는 음모자들은 서로 자기의 세계를 차지하기 싸운다.

그 세계란 자기가 가지지 못한 현실에서 느낀 박탈감을 채우기 위한 욕망의 공간이다. 우리는 흔히 꿈을 꾼다고 하면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먼 미래 자신이 되고 싶은 하나의 존재인지 혹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머릿속에서 나타나는 미지의 세계인지 말이다. 어떻게 되었든 그 세계는 현실의 자신이 가진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자신이 원한 것을 이미지화한 것이다. 그런 인간의 욕망을 담은 꿈, 그것을 보여주는 파프리카에서 우리는 우리의 꿈을 어떻게 봐야하는 것일까?

ps. 콘 사토시 감독의 명복을 빕니다. 그곳에서 행복한 꿈을 꾸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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