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의 이해와 마음치유 - 선과 시는 어떻게 우리의 마음을 적시는가?
백원기 지음 / 동인(이성모)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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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 선시(禪詩)를 이야기할 때는.

 

또 논리성을 강조해서도 안된다. 선시는 논리성을 넘어섰으므로.

 

일상 언어로 선시를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선시는 오래동안 고민을 하고, 고행을 한 결과 어느 한 순간의 깨우침을 글로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철 스님의 법어로 더 유명해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말을 예로 들면 선시에 대한 이해가 쉬울 것이다.

 

당연히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런데... 어쩌라고?

 

그런데, 이 말을 화두로 삼은 사람이 있단다. 청원선사라고 하는데...

 

청원선사는 '산은 산 물은 물'이라는 공안을 통해 30년간의 수행단계를 세 단계로 압축해 설명하고 있다.

 

첫째 단계: 노승이 30년 전에 참선을 하지 못했을 때에는 산을 보면 산, 물을 보면 물이었소.

둘째 단계: 선지식을 만나 어떤 깨달음의 경지가 있어 산을 보면 산이 아니었고, 물을 보면 물이 아니었소.

셋째 단계: 이제 시고 그친 경지에 이르러, 예전처럼 산을 보니 오로지 (경외로운) 산, 물을 보니 오로지 (경외로운) 물이더라.    298쪽.

 

그러니 선시들에 나온 짧막한 구절들에 담겨 있는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참선을 해야 할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선시의 기원과 특징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한 다음에 고려시대부터 현대까지 선시를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은 선시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청명해지기를 바라고 있다.

 

사실 선시를 읽는다는 행위 자체도 이미 자신의 마음을 비울 준비가 되었다는 얘기가 될테니, 이 책을 읽어가면 마음을 비움과 마음을 채움이 둘이 아니고 하나임을, 적어도 머리 속으로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한 시를 붙들고 그 시를 계속 궁구하든지... 그러다 보면 마음 속에 어떤 깨달음이 올지도 모른다.

 

아니, 깨달음까지는 아니더라도 명상의 단계에까지는 이를 수 있다. 이 책에서 반복하고 있는 말이 있는데, 평상시의 마음이 도라는 말이다.

 

도라는 것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생활에 있다는 말, 그래서 이 책에 나온 선시들에서도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도를 우리와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데, 이 책은 그렇지 않음을, 도는 바로 우리 자신임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많은 선승들과 선시들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니 선시를 읽는 행위 자체가 이미 마음 치유 단계에 들어섰다고 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선시를 통하여 비운 마음에 무언가를 채웠다가 그마저도 비우는 행위를 다시 하기 때문이다.

 

비록 높은 단계에까지는 가지 못하더라도 이 책에 소개된 선시들을 읽는 과정에서, 그 자체에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낄 수는 있으니, 그것이 어딘가.

 

이 선시를 쓴 사람이 누구인가는 논쟁이 되기도 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도 그렇고, 예전부터 나는 휴정(서산대사)의 시로 알고 있었으니, 그렇게 알고... 맘 속에 새긴다. 이 시를.

 

눈 내린 들판을 걸어갈 때 / 모름지기 함부로 걷지 말라

오늘 남긴 내 발자국은 / 뒷사람의 이정표가 될 것이니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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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냐 개혁이냐

 

장마라는 핑계로

땀에 절은 옷들을

통에만 담가 두니

입을 옷이 없어져 간다.

 

빨아야지

세탁기에 넣다 보니

한 번에 들어가지도 않고,

여러 번 빨더라도 널 곳이 없다.

난감하게 세탁기 앞에 서 있는데,

 

혁명이냐 개혁이냐,

해묵은 논쟁이 떠올라

쓴웃음을 짓는다.

빨래처럼 제 때 빨면

그것이 개혁인 것을,

 

할 일이 묵히고 묵혀

쌓이고 쌓여 터지면 혁명임일,

개혁을 미룬 결과가 혁명임을,

돌아가는 세탁기에도

남아 있는 빨래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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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춘수에 관한 책을 읽다가 집에 김춘수의 시집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교과서에서 배운 김춘수는 그야말로 난해시의 대명사였는데... 그가 주장한 '무의미시''의미'로 해석해 내는 것이 바로 학교 국어교육이었으니,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그런데 이 시집을 읽으니 그다지 어렵지 않다. 꼭 '무의미시'라고 할 필요가 없다. 이상하게 '의미'가 잡힌다. 세월이 흘러서인가. 아니면 학교를 넘어서인가.

 

이 중에 '나의 하나님'이라는 시... 요즘 세태와 관련지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나의 하나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다.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시인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손바닥에 못을 박아 줄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어리디어린

순결이다.

삼월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김춘수,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문학세계사. 1993년 초판 1쇄. 59쪽.

 

만약 신이 있다면, 신자들에게는 이런 불경스런 질문이겠지만, 신이 있다면 이 세상이 지금처럼 굴러갈 수 있을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는데, 지금은 음식이 냉장고에서 썩어가고, 먹다 남은 음식들을 버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어디에선가는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상태.

 

농사를 짓고도 남은 것이 없어 작물을 키울수록, 팔수록 더더 손해가 나 결국 눈물을 머금고 작물을 엎어버리는 농민들이 있는데, 몸에 좋은 것이라고 외국의 것을 굳이 들여와 먹는 사람들이 있는 상태.

 

김춘수의 '나의 하나님'을 읽으며 든 생각이다. 정말로 신이 있을까? 나는 기독교 신자들이 쓰는 '하나님'이라는 말보다는 '하느님' 또는 '신'이라는 말이 더 좋은데...

 

이 시에 나오는 하나님은 '늙은 비애, 푸줏간의 살점, 놋쇠 항아리, 어린 순결, 연둣빛 바람'이다.

 

처음에는 부정적인 개념으로부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아니다. 긍정적이다.  '늙은'이라는 얘기는 '낡은, 오래된, 쓸모없는'이라는 말을 연상시키고, 비애는 슬픔을 뜻한다. 결코 긍정적으로 해석하기는 힘들다. 그런데... '늙은'은 '오래된'이고, '비애'는 '슬픔, 연민'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이 '늙은 비애'를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닌 '오래된 연민'이라고 보면 긍정적이 된다.

 

모두를 긍정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인간들에게 오랜 연민을 지니고 있었고, 그래서 그들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라는 표현을 통해, 특히 '커다란'이라는 표현을 통해, 넉넉하게 모두가 먹고 살 수 있게 음식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음식을 담아둘 수 있는 그릇이 필요한데, 신은 역시 이를 외면하지 않았으니, '놋쇠 항아리'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먹을 것을 준 신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세 단계의 변화'라는 글에서 설명하고 있듯이 '어리디 어린 순결''아이'의 단계에 해당한다. 거침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 거리낌이 없이 행동할 수 있다.

 

자, 이런 신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비록 보지 못하더라도 늘 우리 곁에서 '연둣빛 바람'처럼 우리들을 싱그럽게 해주고 있다.

 

그랬으면 좋겠다. 신은 이렇게 우리들의 삶을 풍요롭게, 행복하게 해주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신은 인간이 자신의 뜻에 거스를 때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표출한다. 바로 이런 신이 지금 우리 인간들의 현실을 본다면 '바벨탑'을 무너뜨린 신처럼, 인간의 타락에 분노해서 '대홍수'를 일으킨 신처럼, 불의를 저지른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킨 신처럼... 분노하지 않을까.

 

무언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을까. 정말로 신이 이 시의 '나의 하나님'처럼 존재한다면...

 

불경이라 해도 좋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다고 하니, 창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우리 인간세상을 굽어보고 있다면, 지금의 세상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 많은 신자들, 기독교인, 천주교인, 불교인, 이슬람인, 기타 다른 종교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또는 하느님, 신'은 어떤 존재인가. 한 번 생각해 보고, 자신들이 믿는 신의 뜻을 인간 세상에서 행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한 시다.

 

'무의미시'라고 하는 김춘수의 시를 읽으며 이렇게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제대로 시를 읽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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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맛 - 시에 담긴 음식, 음식에 담긴 마음
소래섭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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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

 

40대가 넘은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리라.

 

그가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언급된 것이 1990년대니, 그 이전에 고등학교를 다닌 40대들은 그를 알기가 힘들다. 사실, 백석만큼 정지용을 모르는 40들도 많으니 무어라 할 말은 없지만.

 

정지용이나 백석은 모두 90년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언급할 수가 없는 시인이었다. 그들은 월북을 했든, 납북을 당했든, 아니면 그냥 북한에 머물렀던 재북이든, 모두 이념의 희생양이 되어 우리 문학사에서 사라져 있었다.

 

아니, 몇몇 학자들에 의해서는 정00, 백0 등으로 언급이 간혹 되기도 하였지만, 전문적인 연구를 하는 학자들에게도 그럴 정도니, 입시에 찌들어 사는 중고등학생들에게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시인이란 존재하지 않는 시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격세지감.

 

어느 새 백석은 중학교 교과서에도 나오는 시인이 되었다. 내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의 시를 교과서에 다뤄주고 있기는 하고, 또 '길상사'와 관련해 체험학습도 하곤 하니, 이제는 많이 알려진 시인이 되었다.

 

많이 알려졌음에도 그의 시는 어렵다. 아니 시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시에 쓰인 말이 어렵다. 사투리, 많이 알려진 사투리라면 정감있게 읽을 수 있겠으나, 함경도 평안도 사투리, 전혀 뜻도 모르는 너무도 생소한 사투리가 쓰였으므로. 읽기가 쉽지 않다.

 

이런 언어가 백석을 청소년들에게서 멀어지게 한다. 우선 글자가 눈에 들어오고 입에 들러붙어야 하는데, 여기서부터 탁 막히니, 백석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한들, 누가 선뜻 그의 시를 읽으려 하겠는가.

 

한 번 시집을 펼치고는 닫아버리기 일쑤인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미 발표한 백석의 시를 다시 고쳐 쓸 수도 없고, 어떻게 해야 백석 시에 친숙하게 다가가게 할 수 있을까.

 

시를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또 시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라면, 여기에 백석의 시를 좋아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이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다 이 책을 발견했다. 살까 말까 많이 망설이다 "알라딘 온라린 중고"에서 구입한 책이다. 백석의 시를 음식을 중심으로 접근한 책.

 

먹는 것, 이것은 누구나 좋아하지 않나. 게다가 백석의 시에는 음식이 너무도 많이 나오니, 음식과 백석의 시를 연결지으면 백석의 시에 더 쉽게 다가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도 굳이 이런 목표를 정하지는 않았겠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청소년들을 비롯해 일반인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수정·보완' (8쪽)했다고 하니, 백석 시에 쉽게 다가가게 하는 일종의 안내서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각 장의 처음에 백석의 시를 소개하는데, 그 소개시의 표기를 고형진의 "정본 백석 시집"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가능하면 원어를 살리되, 현대 표기에 맞게 했고, 어려운 사투리는 밑에 주석으로 처리를 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는 이렇게 당부한다.

 

'작품을 읽을 때 처음 한 번은 가급적 주석을 보지 않고 읽어보기를 바란다.'(7쪽)

 

왜냐하면 시는 의미해석도 중요하지만 입에 감기는 말의 맛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는 음악과 친하기 때문이기도 한데, 의미 해석에 막혀 시의 맛을 느끼지도 못하고 접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백석의 시를 소개하고, 그의 시에 나오는 음식을 중심으로 백석 시에 접근해 간다. 그 저근이 상세하고 설득력이 있다. 학위 논문을 수정한 것 답게 나같은 사람이 읽어도 쉽게 이해가 된다.

 

그러니 청소년들이 읽어도 별 무리가 없겠다 싶다. 여기에 백석에 관한 이야기와 음식에 관한 이야기를 부록처럼 수록해 놓고 있어서, 시만이 아니라, 백석 당시의 사회 모습도 어느 정도 알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백석 시의 의미를 갖고 끙끙댈 필요가 없다는 것, 음식이 왜 백석 시에서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할까를 읽다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이 책의 장점이다.

 

이 책을 읽고 백석에게 흥미가 생겼다면 그의 시집을 사서 읽으면 될 일이다. 아니면 음식이 갖는 사회 · 문화 · 역사 · 정신적 의미에 관심이 생겼다면 음식에 관한 더 많은 책을 찾아서 읽어도 좋고.

 

덧글

 

사실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

 

26쪽. 그는 85세인 1995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66쪽. 1995년(84세) 사망한 것으로 언론에 추정 보도됨.

 

그렇다면 아주 단순한 오타인데... 그래도... 그가 1912년생이라고 하니, 26쪽을 84세로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249쪽. 백석의 시가 노래가 된다면

이 책이 2009년판인데, 언제인지 모르지만 백창우, 김현성 등에 의해서 백석 시에 곡이 붙여져 노래로 불려지고 있다. 비록 많이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관심있는 사람들은 백창우나 김현성을 찾아서 들어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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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세상을 바꾸다 - 세상을 움직이는 미술의 힘
이태호 지음 / 미술문화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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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 근대에 들어서 소수의 집 안으로 들어와 버렸다. 지금도 미술은 전문가들만이 하는 것인양,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고 있다.

 

솔직히 우리나라에서 미술하면 몇몇 대학이 생각나고, 그 대학에 가기 위해서 초중고 때 얼마나 치열하게 공부를 하는가.

 

다양한 공부를 하면서 미술에 대한 폭을 넓히고 깊이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대학에 가기 위한 기술 연마에 몰두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렇게 교육을 받아 미술대학에 가고, 미술대학을 나와도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 왜냐하면 미술이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기 때문이다.

 

사회로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향유되는 것이 아닌, 돈이 있는 사람들에게서만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미술은 어느덧 소술의 예술이 되었다.

 

그러나 미술은 소수의 예술이 아니다. 옛날에 미술은 집 안에 있는 것이 아닌 모두가 볼 수 있는 공공의 장소에 있었다. 함께 생활하는 곳에 함께 존재했다. 생활과 함께 하던 미술...

 

이제 미술은 사회 속으로 나와야 한다. 소수가 아닌 많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지내야 한다. 우리나라도 공공미술과 벽화그리기 등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요즘이지만, 아직도 미술은 소수의 손에 있다고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 책은 소수의 미술이 아닌, 우리 모두의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 미술이 세상도 바꿀 수 있음을 세계 각지의 사례를 들어 보여주고 있다.

 

이 책에서 미술은 사진도 포함이 되는데, 처음 시작을 사진으로 시작한다. 사진으로 우범 지역의 아이들에게 희망을 준 사람, 그들이 찍은 사진으로 그들의 모습을 보게 한 사람, 그래서 자신들의 삶이 마냥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사람, '슈팅 백 프로젝트'로 시작한다.

 

여기에 이어 브라질의 벽화그리기를 통한 함께 함을, 낙서화라고 불리는 그라피티로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주는 뱅크시를, 미술 교육의 방법을 바꾸어 삶의 방향을 바꾸게 한 사람, 할렘가에 직접 들어가 살며 그들을 작품으로 만들어낸 사람 등등,

 

2부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차별에 저항하거나, 진실을 드러내거나, 68혁명과 같은 문화적 변혁 시기에 미술로 참여한 사람들 이야기, 이어 3부에서는 그 시대에 드러난 미술, 우리 미술이 가야할 길을 이야기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미술이 사회 속에 있어야 함을, 그래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음을, 변화시켰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여 이 책을 읽으면 미술은 집 안에 고이 모셔놓는 존재가 아니라 사회 속으로 나와 사람들과 함께 할 때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런 미술이 순수미술과 더불어 계속 존재해 왔고, 우리나라 역시 그런 전통이 있음을 알게 된다. 다만, 형식적으로 흐르는 벽화그리기나 공공미술 운동은 경계해야 한다고 주의를 당부하고 있다.

 

미술, 이제는 사회 속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 모두와 함께 해야 한다. 미술이 사회 속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해 준 책이다.

 

덧글

 

부끄럽게도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일인데... 서울대 문양이나 연세대 문양에 대한 글이 이 책에 실려 있다.

 

이럴 수가? 우리나라를 대표한다는 서울대 문양이 서양의 문양을 흉내낸 것에 불과하다니...게다가 연세대의 경우 프린스턴 대학의 문양과 왜 이리 비슷한지... 연세대야 선교사가 세웠다 해도, 서울대는 해방이 되고 나서 국립대학으로 출발하지 않았나.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것이 문양에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다니... 이 책을 읽고 이건 아니다 싶었다. 어느 정도 비슷한지 궁금하다면 이 책 251쪽부터 257쪽을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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