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
클라우스 슈밥 지음, 송경진 옮김 / 메가스터디북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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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남지 않은 대통령 선거. 토론회를 몇 번 보다 한 후보가 4차 산업혁명에 대해서 전문가인 양 말하는 것을 듣고, 또 다른 후보가 그 후보를 반박하면서 사람이 빠져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도대체 4차 산업혁명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지녀야 할지 몰라, 그에 관한 책 한 권을 골랐다.

 

삶창에서도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한 책을 언급하고 있고, 클라우스 슈밥이 다보스 포럼의 창시자라고 하니, 경제 쪽에서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가 쓴 책을 고르게 됐다.

 

내용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간력하게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해서 소개하고 있는 책인데, 무엇보다도 제4차 산업혁명에 대해 칭송 일변도로 나가지 않고 장단점을 또 예측불가능한 점을 모두 언급하고 있는 것이 좋았다.

 

우리가 아무리 거부한다고 해도 산업은 발전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욕망이란 무언가를 하고자 하고, 그것이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합리화하면서 추진하는 사람들이 꼭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4차 산업혁명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간에게 좋은 쪽으로 가게 하느냐가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슈밥도 그런 점을 언급하고 있고, 그래서 책의 뒷부분에 나온 제4차 산업혁명 시기의 지도자가 갖춰야 할 덕목에 공감이 가는 부분이 많았다.

 

그는 상황 맥락 지능(정신), 정서 지능(마음), 영감 지능(영혼), 신체 지능(몸)을 고루 갖춘 사람이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는 첨단 기술에 대한 지식 여부가 들어 있지 않다. 시대와 사람에게 공감하고 협동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지금 자기가 적임자라고 하는 대통령 후보들에 적용해 보면 된다. 이 4가지 기준에 미달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정작 중요한 4차 산업혁명 시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장점보다는 단점이 발현되는 재앙이 닥칠지도 모른다.

 

결국 아무리 산업이 발전해도 사람에게는, 특히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소통 능력, 공감 능력, 협동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자신의 건강 또 다른 사람의 건강을 챙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고.

 

우리는 흔히 4차 산업혁명 하면 IT전문가가 필요하지 않나 하는데, 그런 전문가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자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와는 상관이 없다. 그 점을 이 책을 읽으며 확인했다고나 할까.

 

이 책은 제4차 산업혁명에 관한 입문서라고 할 수 있다. 간략하게 4차 산업혁명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그렇게 시대가 변해감을 전문가들의 견해를 인용해 보여주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의 정의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그것을 이끄는 기술에 대해서 물리학, 디지털, 생물학 기술로 언급을 하고 있다. 다음에 4차 산업혁명의 영향력으로 경제, 기업, 국가-세계, 사회, 개인을 예로 들어 설명해주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나타날 예측가능성과 장점 단점 등을 설명해주고 있다.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에서는 2025년을 티핑 포인트로 잡아 설명하고 있다. 결코 먼 미래가 아니다. 겨우 8년 뒤다. 그런데, 이 4차 산업혁명의 결과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책을 쓴 슈밥조차도 어떤 결과가 나타날지는 알 수 없다고 하고 있으니...

 

그래서 준비를 해야 한다. 적어도 기술들이 윤리적으로 쓰일 수 있도록 하려면 우리들이 준비를 하고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냥 아무 생각없이 기술발전의 흐름에 맡겨두었다가 어ㅡ, 하는 사이 4차 산업혁명의 순간이 다가와 우리 일상생활에 그것들이 광범위하게 들어와 버리면, 그 다음엔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다.

 

그래서 이 책에 나와 있는 몇 가지 기술들에 대해서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친절하게도 장점과 단점,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상황까지 제시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를 토대로 좀더 심도 있는 논의가 사회적으로, 세계적으로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한다.

 

기술만능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기술을 전적으로 부정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기술들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인간에 의해 실행된다는 점이다. 그 점을 명심하고 사회적 논의가 이루어지도록 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하면서 읽은 책이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정리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으니, 읽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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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국민 -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둘러싼 근대 국가의 법과 과학 RICH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총서 5
홍양희 엮음, 한양대학교 비교역사문화연구소 젠더연구팀 기획 / 서해문집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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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차별은 사라졌을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이 책을 읽으면. 아직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여성이 동등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이런 차별의 뿌리는 깊고도 깊다는 것을 이 책이 말해주고 있다.

 

이 책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일제시대부터 시작을 한다. 법 규범이 근대적으로 확립되기 시작한 시기부터 여성이 법에서 어떻게 규정되었는지를 살핀 책이다.

 

여러 논문들을 모아 놓은 책인데, 법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이 얼마나 차별을 받았는지, 여성을 독자적인 존재로 인식하지 않고 사회 구성원이나 가족 구성원의 일부로만 인식했음이 이 책에 잘 나와 있다.

 

가령 이 책에서 이야기한 간통죄를 보면, 지금은 다행히 폐지되었지만, 여성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법이었다고 한다.

 

배우자가 있는 여자에게만 간통죄가 성립되었고, 간통죄로 고소를 하면 반드시 이혼을 해야 했으니 경제적으로 자립할 능력이 없는 아내들은 남편의 간통을 알고도 고소를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반대로 남편이 아내와 이혼을 하고 싶은 경우,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고 싶은 경우에는 아내를 간통죄로 고소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참으로 여성에게 불리한 법이었다.

 

만인에게 평등한 법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음행매개죄나 혼인빙자간음죄 등에서도 '음행의 상습이 없는 부녀'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온전한 인격체로 다루지 않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해방이 되고 나서 국적을 취득하는 과정에서도 여성에게 불리한 법 적용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지금은 폐지된 호주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아야 하는데, 가족을 남편을 중심으로 보았듯이 국적 역시 남편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에서 동성동본금혼법도 문제가 되는데, 개인이 사랑을 하고 결혼할 자유를 구태의연한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옥죄고 있었던 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법에 의해 남성들보다는 주로 여성들이 고통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지금은 이런 법들은 폐지가 되어 다행이지만 이런 법들이 유지되어 왔던 관계로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차별의 잔재들이 남아 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남성에 비해 여성이 월급을 적게 받는다든지, 취업을 할 때 불이익을 받는다든지, 육아휴직을 하고 재취업을 할 때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든지, 가사노동과 직업노동을 병행하는 일을 도맡게 된다는지 하는 등등 여전히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지낸다고는 할 수 없다.

 

여기에 마직막 부분 배아복제로 인한 난자 제공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성의 몸에서 나오는 난자를 여성과 동떨어진 어떤 사물로 취급하고, 이것을 국가주의에 환원시킨 그때의 열광이 여성에게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국익을 위해서 개인의 몸을 희생하라는, 그것도 여성의 몸을 희생하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논리인데, 그것이 먹혀들었던 때가 있었음을, 적어도 이러한 과학 연구는 여성을 떠나서 생명이라면 모두가 존중받아야 함을, 신성불가침한 생명권이 있음을 망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논의들이 쌓여 세상이 조금더 평등한 쪽으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단지 남성과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 남성이 되고 싶은 여성, 여성이 되고 싶은 남성 등 다양한 성정체성이 있음을, 그것을 인정해야 발전된 사회임을 생각하게 한다.

 

이제는 법 쪽에서는 남녀가 많이 평등해졌다고 본다. 세상에 자신의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는 아내들에 관한 법이 있었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아직 완전히 나아지지는 않았다. 남성과 여성만이 아니라 그 사이에 있는 많은 젠더들에 우리는 아직도 법적으로 또 암묵적으로 차별을 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해 봐야 한다.

 

법 뿐만이 아니라 내 일상생활에서 이런 차별이 일어나고 있는지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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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평론 알베르 카뮈 전집 20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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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실린 글들은 시사성을 지닌다. 시사성을 지닌다는 말은 그 시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 시대상을 알지 못하면 이해하기 힘들거나 또는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런 이해 말고도 시사성이 있는 글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면 글의 효용성이 사라지고 말 가능성이 있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이미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때 주장한 내용들이 현재에는 맞지 않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카뮈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이 책에 실린 카뮈의 시사평론들은 주로 1940년대의 글이다. 독일이 프랑스에서 물러가기 시작한 때로부터 종전이 되고 1950년이 되기 전까지의 글.

 

그러니까 지금 우리 시대와는 너무도 먼 거리에 있는 글들이다. 지금 시대와는 많이도 다르기 때문에 카뮈의 글 중에 지금은 무의미한 글도 꽤 있다.

 

가령 공산주의에 관한 글들... 1990년대 들어 공산주의권이 몰락했다. 이제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극소수의 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공산주의 국가는 사라지고 말았다. 공산주의 이념 역시 과거 속으로 사라져 이제는 역사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카뮈의 이 글이 발표될 당시는 공산주의가 막 자리잡는 시기, 소련이라는 일국 사회주의를 넘어 동구권들이 공산화된 시기이기도 하고, 유럽 지식인들 중에서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지식인들이 제법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대립하기 직전의 시대... 그 시대에 카뮈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글을 신문지상에 발표했다. 그런 글들이 이 책에 실려 있다.

 

이런 혼란의 시기에 카뮈는 질서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전쟁을 마무리하면서 사회가 안정되기 위해서는 질서가 필요한데, 그에 대한 카뮈의 말을 보면 단순한 질서가 아니다. 이 질서에는 정의가 있어야 한다.

 

사회적 질서란 그러니까 정부와 통치받는 사람들 사이의 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일치는 어떤 상위의 원칙에 의거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에게 있어서 그 원칙은 바로 정의다. 정의 없는 질서는 없고 민중의 이상적인 질서는 그들의 행복 속에 있다.

... 오로지 잘 통치하기 위하여 질서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의미 있는 유일한 질서를 구현하기 위하여 잘 통치해야 한다. 정의를 강화하는 것이 질서가 아니라 질서에 확신을 주는 것이 정의인 것이다.  61쪽.

 

이런 사회를 그는 바란다. 정의가 관철되는 사회. 이 정의 앞에서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이념은 수단에 불과하다. 정의가 없는 자본주의, 공산주의 이 모두를 카뮈는 비판하고 있다.

 

그렇기에 그는 1940년대는 이미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라고 한다. 군사력이 너무도 커지고 강해졌기에 혁명을 통해서 사회를 변혁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희생이 따른다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희생, 이것은 목적을 위해 수단을 희생한다는 것인데... 수단을 돌아보지 않고 목적만을 추구하는 방식에 대해 카뮈는 부정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부조리한 사회가 유지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인데, 부조리한 사회가 유지되길 바라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바로 '반항'을 해야 한다. 아닌 것을 아니라고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피를 피로써 뒤엎는 것이 아니라, 피를 거부하되 다른 방식으로 거부하는 것, 그런 반항을 하는 것, 그것이 카뮈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반항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 또 어떤 효과를 낼 것인지는 잘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이 반항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카뮈같은 작가는 작품으로 반항을 할 수 있다. 글로 반항을 할 수 있다.

 

정복자가 똑같은 것으로 평준화하는 바로 거기에서 예술가는 서로 다른 것을 구별하려고 노력한다. 육체와 정념의 차원에서 살고 창조하는 예술가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복자는 타자가 존재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의 세계는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즉 주인들이 있고 노예들이 있는 어떤 세계인 것이다. 예술가의 세계는 살아 있는 저항과 이해의 세계다. 273쪽.

 

바로 자신과 같은 예술가들이 반항하는 길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보기에 세상에는 모든 작가들이 품어 마땅할 또 다른 야망이 한 가지 있는 듯하니 그것은 바로 힘이 닿는 한, 우리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우리와 마찬가지로 얽매여 사는 사람들을 위해서 증언하고 소리 높여 외치는 것이다. 259쪽.

 

이렇게 카뮈의 글이 시대성을 띠고는 있지만, 시대를 넘어 보편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게 하는 글들이 바로 이런 글들 아닌가 한다.

 

예술가들, 또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겠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이 서로 협력하며 자유롭고 평등하게 지내는 것, 그것이 바로 평화를 이루는 길이고,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

 

그 길을 가로막고 있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를 고치기 위해서 반항해야 하는 것, 그런 점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지금 우리 시대, 예술가들, 지식인들,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글들이 꽤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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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의 모든 기록 - 고문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위험을 무릅쓴 기적의 6주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간디서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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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9월 11일, 아픈 역사가 시작되었다. 결코 2001년 9월 11일이 아니다. 앞의 것은 미국을 등에 엎은 군부들이 일으킨 칠레에서 일어난 쿠테타이고, 뒤의 것은 바로 미국에서 일어난 테러이다.

 

날짜는 같지만, 우리는 뒤의 날짜를 기억한다. 역사적 사건으로서. 이슬람을 테러와 동일시하게 된 사건으로서. 최근의 사건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앞의 9.11은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앞의 9.11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이고 날짜이다. 남아메리카에 있는 '칠레'라는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 날짜는 몰라도 그 나라 사람, 한 명은 우리가 잘 기억한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바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시인 파블로 네루다.

 

시인으로서 알려져 있지만 이 네루다가 정치인이기도 했다는 사실, 그가 대통령 후보로 나오려 했으나 자신보다 더 당선 가능성이 높은 아옌데를 지지하면서 후보 사퇴를 했다는 사실, 아옌데 정권에서 대사로 근무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우리나라에서는 정치인 네루다보다는 시인 네루다를 더 기억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물론 칠레에서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네루다는 정치인보다는 시인으로 더 추앙받고 있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그럼에도 네루다가 칠레에서 시인으로서 추앙을 받게 된 이유는 그의 정치적 입장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단지 '사랑'을 노래한 시인이 아니라 그 '사랑'이 민중에 대한 사랑이었음을 사람들이 알기 때문이라는 생각.

 

이런 네루다가 양보한 '아옌데'는 누구인가. 그는 결국 쿠테타로 죽음에 이르렀지만 살아서 대통령 궁을 나오지 않고 죽어서야 비로소 대통령 궁에서 나온, 자신의 신념을 죽을 때까지 지켰던 사람이다.

 

그의 죽음 이후 칠레에서는 피노체트의 기나긴 군부독재가 이어지고,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랐는데... 특히 진보진영 쪽에 섰던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탄압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다.

 

우리나라에서도 지금 문화예술계에 블랙리스트가 존재해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고 있지만, 이 당시 칠레에서 블랙리스트는 '살생부'라 할 만했다. 거기에 이름이 올라간다는 것은 죽음이거나 또는 추방이었으니.

 

그런 상황에서 아옌데 선거운동을 하고, 또 '칠레극장' 감독으로 일하던 미겔 리틴도 해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가 어떻게 죽음의 상황에서 벗어났는지는 합리적인 이유로 설명이 안 되는 극적인 부분이 있다. 그 장면도 이 책에 나와 있으니... 반면 칠레의 음악가였던 '빅토르 하라'는 살해당하고 말았으니, 그가 살아난 것은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외국에 살게 되고, 귀국이 영구적으로 금지되었던 그가 칠레에 몰래 잠입해 촬영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 책이다.

 

망명자의 신분으로 칠레에 다시 들어가 그 당시 상황을 촬영해 영화로 만들어내는 일, 그것은 목숨을 건 일이었을테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이탈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팀을 꾸려 각자 그러나 같이 촬영하게 하고, 현지에서 칠레 촬영 팀까지 조직했으니.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조국을 잊지 못했고, 독재로 점철되는 피노체트 정권에 분노했으며, 이런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젊은이들에게 미래를 보고 있었다.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하면 어떡하겠는가 하는 것이 감독인 그의 생각이었고 열정이었다.

 

여러 차례 위기 상황도 겪지만 자신이 계획했던 것들을 필름에 담아 무사히 반출한 다음에 영화로 만들어냈던 감독 미겔 리틴...

 

그의 경험을 책으로 만들어낸 마르케스... 이 책의 화자는 나로 - 바로 감독인 미겔 리틴으로- 나오지만 글은 바로 '백년 동안의 고독'을 쓴 마르케스가 쓴 것임을 밝히고 있다.

 

마르케스가 여러 차례의 면담을 거쳐 그의 목소리를 글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 썼느냐보다는 당시 엄혹했던 칠레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 항거하는 사람들을 우리에게 전달해주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부러운 점... 칠레 사람들은 공과를 떠나서 정치인 아옌데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를 대통령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점, 그것은 그가 죽어서도 그의 신념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신념이 젊은이들을 통하여 면면히 전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적인 면에서는 네루다라는 산이 있어서 그들이 기억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이 책에서도 계속 나오고 있다. 즉,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마음 속에 심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칠레를 군부독재의 어둠에서 벗어나게 하는 힘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마칠레가 군부독재에 신음하고 있던 당시, 우리나라 역시 군부독재에 신음하고 있었으니, 칠레의 이야기가 꼭 남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칠레의 9.11을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겠고. 후일담 비슷하게 글이 쓰였기에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오는 장면들이 꽤 있고, 목숨을 건 활동을 하면서도 이렇게 허술하게 할 수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도 있다.

 

그만큼 감독인 미겔 리틴에게는 칠레는 자신의 조국이기도 하고, 고향이기도 하고 삶이기도 했으리라. 감정이 이성을 앞설 때가 바로 그런 때 아닌가 싶은 장면이 많이 나온다.

 

이제는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그런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기억을 해야 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는 기록을 해야 한다. 그 기록, 바로 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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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우쓰미 아이코 지음, 이호경 옮김 / 동아시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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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끄러운 일이다. 조선인 전범 문제에 대해 이 정도로 무지했다는 사실이. 그리고 우리나라 정부도 일본 정부도 애써 눈감으려 했다는 사실이.

 

소녀상에 대한 문제로 일본과의 관계가 껄끄러운데, 그것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끌려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우리 정부에 대해 도대체 이 나라에 국민이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다.

 

나라는 국민의 생명과 생활을 보장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게 바로 나라 아닌가. 그런데 그 나라 국민이 겪은 비극을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어떻게 나라일 수가 있는가? 나라라는 것이 실체가 없다면 어떻게 국민들의 비극, 희생을 나 몰라라 하는 존재가 정치인일 수 있는가. 나라를 운영한다는 행정부일 수 있는가 이렇게 질문을 할 수가 있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지 10년이 되어간다. 그 동안 사실 조선인 전범으로 사형을 당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그들이 무슨 일을 해서 사형까지 당했는지 알지 못했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았고, 학교 역사 교육에서 다뤄주지도 않았기 때문에 완전히 관심 밖이었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10년 전쯤에 방송에 다큐멘터리로도 나갔다고 하는데, 그 때 본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책으로 읽어서 더욱 암담한 현실을 느꼈다고나 할까.

 

책이 나온 지 10년이 지났는데, 강제동원된 위안부 문제도 제대로 해결을 하지 못했는데, 포로수용소 감시원으로 간 사람들 문제야... 그들이 나중에 전범이 된 문제를 제대로 해결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더욱이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 전범을 A,B.C로 분류하는데 난 그것이 전쟁에 가담해서 책임져야 할 비중의 정도를 등급으로 나눈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참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래서 조선인 B급 전범이 왜 사형을 당했지 하는 생각만 했었는데...

 

이 책에 그 구분이 명확히 나와 있다. 보자.

 

'A급 전범이 '특정 지역을 불문하고, 연합군에 속한 모든 정부가 내리는 공동 결정에 따라 처벌해야 할 중대 범죄인'임에 반해, B·C급 전범은 일본이 점령했던 '대동아공영권'(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이 아시아 대륙에 대한 침략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건 정치 표어-옮긴이) 각지에서 열린 전쟁범죄재판 법정에서 형을 받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곧 특정 지역에서 '통례의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각국의 군사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을 말하며, 뉘른베르크 재판과 달리, 일본의 경우에는 B급과 C급을 구별하지 않았다.'  (8쪽)

 

한마디로 BC급 전범은 동남아시아에서 네덜란드나 호주, 영국 등에 의해 재판을 받은 사람을 의미한다고 보면 된다. 그렇게 전범이 된 사람이 148명이고 그 중에서 23명이 사형을 당했다고 한다. (8쪽)

 

또 그곳에는 일본군에게 포로가 된 네덜란드, 호주, 영국 군인들이 많았고, 이들을 감시하기 위해 일본 군부는 조선인들을 고용(? - 참 문제 많은 단어다. 일본 정부는 지원을 받아 이들에게 월급을 주고 고용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당시 조선인에게는 징용이나 징병을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것을 피하는 길, 그것도 2년이라는 기간을 약속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포로 감시원이었던 것. 징병도 피하고 돈을 벌 수 있는 길... 과연 이것을 고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들에게 어떤 선택지가 있었을까...)한 것이다.

 

이 책에서 강조하는 포로에 대한 관념 차이가 있다. 서양인들에게 포로란 명예로운 군인이라면, 일본인에게 포로란 수치스러운 존재라는 것. 일본인들은 포로가 되느니 차라리 자결하라고 했다고 하니, 그들이 포로를 보는 눈이 어땠을지, 포로를 어떻게 대했을 지는 알고도 남는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기들 손에 직접 피를 묻혔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들은 장교와 하사관들이고, 포로들과 직접 마주치는 존재들은 바로 조선인 포로 감시원이었던 것.

 

군대라는 명령계통에서 명령불복종은 곧 죽음인데... 명령을 거부할 권한도 개선을 건의할 권리도 전혀 없었던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이 일본 패망후 포로들에 의해 전범으로 기소된다.

 

포로들 관점에서는 일본인 장교나 조선인 감시원이나 같은 존재였을 것이고, 그들의 학대는 딱히 장교의 책임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으나, 조선인 감시원 입장에서는 명령을 거부할 수도 없었고, 자신들이 포로들을 딱히 악랄하게 대하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 그리고 식민지인으로서 어쩔 수 없었다는 생각. 이 차이가 꽤나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런 차이에 대해서 이 책도 조심스레 제기하고 있다. 이런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포로 감시원이 된 것을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모두 죽일 놈이라고까지도 할 것은 없다. 그들 역시 살기 위해 선택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유대인 학살에 가담한 아이히만에 비유할 수도 있겠지만, 아이히만과는 좀 다르다. 아이히만은 자발적으로 학살에 가담했다면, 이들은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가담했다는 차이가 있다. (모두가 그렇다고 단정할 수만은 없지만 대다수는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 ㅇ낳았다면 감시원으로 모집된 3,000명 중에 129명만이 전범이 될 이유가 없다. 그 129명도 오랜 시간 포로들과 생활해서 얼굴과 이름이 알려진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들 포로를 특별히 적대시 하거나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9쪽 참조)

 

물론 그 차이가 책임을 면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목숨을 빼앗을 정도의 책임인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보다 더한 위치에 있던,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했던 일본의 고위급 전범들이 살아남아 전쟁 뒤 일본의 고위 정치인이 된 현실과 비교해보면 정작 책임져야 할 존재들 - 특히 일본의 히로히토 천황과 같은 - 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고, 힘없고 돌봐줄 나라가 없는 존재들이 더 많이 당했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그것만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들은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제대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지금도 제대로 해결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선 이들을 희생자로 규정했다고 하는데...그렇다고 해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졌다고는 볼 수 없고, 이들의 영혼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책임을 명확히 가리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이런 책이 소중하다. 역사를 기억하게 해주니까. 역사를 기억해서 그런 비극이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도록 하니까. 다만, 이 책이 1982년에 일본에서 처음 나왔다는데... 그때까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전쟁에 대한 책임과 사죄, 용서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일본은 다시 군국주의로 가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에 대해서 명확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지, 읽으면서 분노하고 한탄하고 씁쓰레한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읽어야만 하는 책이다. 이런 비극을 잊지 않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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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2 09: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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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02 13: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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