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무거운 나날들이었다.

 

세상에 나서 무언가를 이루고 세상을 떠나야 하는데, 그럴 틈도 없이 어느 순간 세상을 뜨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더 이상 무엇을 할 수도 없는 상황.

 

이승과 저승이 참 멀리도 있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한 순간 이곳이 바로 이승이고 저승이구나 하게 만드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메멘토 모리!"

 

한 순간만 방심해도 죽음은 이렇게 우리에게 다가와 자신을 잊지 말라고 강요한다. 도저히 잊을 수 없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나는 바로 이 곳에 있다고 늘 죽음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죽음에게 벽을 쌓고, 마치 죽음은 이 곳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다 순간, 그 벽이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 다시 죽음을 이 곳에서 만나게 된다. 경계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이승의 길을 열심히 달리고 있었는데, 죽음의 길은 전혀 다른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승의 길을 달리다 보니 죽음의 길이 바로 눈 앞에 있었다. 아니, 죽음의 길로 들어서 있었다.

 

이런 일들...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더 많이 겪게 된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하루하루 죽어간다는 것. 이승의 길을 많이 달리고 달려 죽음의 길을 만나게 된다는 것.

 

그렇기에 이승의 길을 달릴 때 더욱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 한 순간 길을 바꿔버린 사람. 그런 사람을 애도하며, 다시 한 번 "메멘토 모리!"

 

경계, 무너짐

-삶과 죽음

선이 있다고

명확한 경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삶을 충실히 살고,

죽음을 향해 가야 한다고,

한 면과 다른 면이

같지 않다고,

만나지 않는다고,

선을 넘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안과 밖이

하나임을,

한쪽을 달리다 보면

이미

다른 쪽에 와 있음을

선과 선이

엉켜있음을,

삶이 곧 죽음인 것을

나이들어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런 일들과 더불어...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너무도 많이 일어나고 있으니, 이번에 읽은 황규관의 시집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에는 이런 죽음에 대한 시들이 있다. 그게 현실이니...

 

죽음들

귀신 따위는 믿지 않던 내게도

얼굴의 핏기를 싹 빼앗긴 이들이

매일매일 찾아온다

반복은, 심장을 두려움으로

천천히 진화시키는 힘인가

하얀 알약을 한 움큼 털어 먹고 죽고

유독가스를 울음처럼 울쩍이다 죽고

일가족을 태운 채 강물에 뛰어들어 죽고

고전적으로 공중에 목을 매단

숱한 죽음들이, 조간신문처럼

꼭 눈을 뜨면 찾아온다

전쟁을 치른 어머니의 공포가

유전된 것도 아닐 텐데

심지어 맞아 죽고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떠밀려 죽고

몽땅 방화된 죽음도 섞여 있다

비슷비슷한 내력으로

별다를 게 없는 설움으로

굴욕에 무너진 식은땀으로

자꾸 내 삶에 부벼대는 것이다

오늘도 부산의 조선소에서

어제는 집에서 멀지 않는 전자공장에서

그제는 강 건너 허름한 재개발 지역에서

그리고 물고기가 모여 사는 냇물에서

식어버린 몸들이 매일매일 찾아온다

 

황규관,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실천문학사. 2011년. 96-97쪽

 

개인적인 죽음이든, 사회적인 죽음이든 죽음은 우리에게 슬픔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언제까지 슬픔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다. 이 슬픔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다시는 이런 죽음이 없게. 비록 죽음은 늘 삶에 따라오는 그림자 같은 존재지만, 그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게 우리의 삶을 잘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잘 살자, 그것이 잘 죽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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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선거를 보면서 든 생각. 녹색당을 찍으면 사표가 된다고, 의미 없는 투표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수 정당에 투표를 하면 안된다고... 될 만한 정당을 찍어야 한다고. 최선이 아닌 바에야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고.

 

그러나 그렇다고 자신들의 목소리를 언제까지 남들에 의탁해서 내려고 하는가? 

 

비록 소수 정당이라고 하더라도 꾸준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야 하고, 적은 수의 사람이라도 지지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는데... 투표가 끝난 다음 녹색당의 득표가 얼마나 될까 궁금해서 찾아 보았다.

 

2년 전에 녹색당의 득표율이 0.48%, 103,811표였다. 정당이 해산되었다가 정당법의 개정을 거치는 우여곡절 끝에 다시 녹색당의 이름을 걸고 지방자치 선거에 도전했는데...

 

몇 %인지는 계산을 해보지 않았다. 선관위에 들어가 광역시비례대표 득표수를 계산해 보았더니, 170,522표가 나왔다. 2년 전보다는 7만표 정도 더 얻었는데,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급진적인 정당은? 또는 가장 좌파인 정당은?이라는 질문을 하면 대답이 각양각색으로 다양하겠지만, 우리나라 정당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고 알고 있는 사람은 그에 대한 답을 "녹색당"이라고 한다.

 

녹색과 좌파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지만, 사실 녹색은 지금 체제를 부정하면서 우리가 살 길을 찾아야 한다는, 근본부터 다시 살펴야 한다는 가장 급진적인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녹색이 편안함을 주지만, 그 편안함은 바로 우리가 자연과 사람과 함께 할 때만이 서로가 함께 공존할 때만이 주어질 수 있음을 녹색당은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공약을 내걸고 광역자치단체 비례대표로 출마를 했다. 정당의 이름으로. 지난 번보다는 더 나은 결과를 얻으리라는 생각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지금 이 시대에 녹색당을 알린다는 목표로, 이런 정당도 있다는 것을, 녹색당의 정책을 알린다는 목표로 나왔다고 하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

 

광역자치단체 어느 곳에서도 5%이상을 득표를 하지 못해 아마도 비례대표를 내지는 못했을 거 같은데, 그래도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그 나아감을 보며 황규관의 시집 "패배는 나의 힘"이 생각났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 중에 녹색당과 어울리는 시들이 많이 있고, 또 제목이 된 '패배는 나의 힘'은 지금의 녹색당을 너무도 잘 말해주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시를 보자.

 

패배는 나의 힘

 

어제는 내가 졌다

그러나 언제쯤 굴욕을 버릴 것인가

지고 난 다음 허름해진 어깨 위로

바람이 불고, 더 깊은 곳

언어가 닿지 않는 심연을 보았다

오늘도 나는 졌다

패배에 속옷까지 젖었다

적은 내게 모두를 댓가로 요구했지만

나는 아직 그걸 못하고 있다

사실은 이게 더 큰 굴욕이다

이기는 게 희망이나 선(善)이라고

누가 뿌리 깊게 유혹하였나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다시 싸움을 맞는 일

이게 승리나 패배보다 먼저 아닌가

거기서 끝까지 싸워야

눈빛이 텅 빈 침묵이 되어야

어떤 싸움도 치를 수 있는 것

끝내 패배한 자여

패배가 웃음이다

그치지 않고 부는 바람이다

 

황규관, 패배는 나의 힘, 창비 2014년 초판3쇄. 72-73쪽

 

이 시에서 말하고 있듯이 녹색당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래서 이들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패배를 웃음으로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녹색당의 싸움은 배제가 아니라 품는 것에 있다. 이들은 모든 것들을 품으려 한다. 그래서 모두 함께 살자고 한다. 그런 지난한 싸움... 녹색당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황규관의 또 다른 시 '품어야 산다'를 보면 아마도 이런 자세가 바로 녹색당이 지향하고 있는 자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비록 미미하지만, 정당법, 선거법을 개정해서 녹색당이 자신의 목소리를 당당히 내면서 남들을 품는 정책을 펴기를 바란다.

 

적어도 이런 정당이 우리나라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

 

 

품어야 산다

 

어머니가 배고픈 아기에게 젖을 물리듯

강물의 물살이 지친 물새의 발목을

제 속살로 가만히 주물러주듯

 

품어야 산다

 

폐지수거하다 뙤약볕에 지친

혼자 사는 103호 할머니를

초등학교 울타리 넘어온 느티나무 그늘이

품어주고,

 

아기가 퉁퉁 분 어머니 젖가슴을

이빨 없는 입으로 힘차게 빨아대도

물새의 부르튼 발이

휘도는 물살을 살며시 밀어주듯

 

품어야 산다

 

막다른 골목길이 혼자 선 외등을 품듯

그 자리에서만 외등은 빛나듯

우유배달하는 여자의 입김으로

동이 트듯

 

품는 힘으로

안겨야 산다

 

황규관, 패배는 나의 힘, 창비 2014년 초판3쇄.  104-1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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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자치 단체장 선거가 끝나고, 광역단체장과 기초단체장, 광역의원, 기초의원, 교육감이 뽑혔다. 이들은 이제 4년간 지방자치를 실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단체장이라고 하면 남 앞에 나서서 남들을 이끌어야 할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 거꾸로 공무원이 국민의 종이라면, 단체장은 시민의 뜻을 대변해서 행하는 대리인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들은 군림하는 자들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몇 천 년 전에 살았던 맹자의 말에 의하면 군주는 배고, 백성은 물이라고 했다 배가 제 맘대로 가는 것 같지만, 물이 없으면 배가 갈 수 없고, 또 배가 제대로 가지 않으면 물이 배를 엎어버릴 수도 있다는 그런 말.

 

하여 이번에 뽑힌 지방자치 단체장들은 자신들이 바로 물 위에 위태롭게 떠 가는 배라는 생각을 하고, 물의 흐름을 거스리지 않는 정책을 펼 수 있기를 바란다.

 

우연히 황규관의 시집을 읽게 되었다. 꼭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와 맞물리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집에 첫번째로 실린 시가 눈에 확 들어왔다.

 

내가 세운 뜻

 

나이 서른을 몇 년 넘기고서야 뜻 하나 세운다

뭐 그리 큰 뜻은 아니고

인적도 드문 벌판 한 가운데

나무 한그루로 서는 것이

이제사 슬며시 바래보는 소망이다

저 울울창창한 산자락의 숲이

얼마나 보기 좋으냐, 하지만

아무래도 내 자리는

가끔 지나는 새가 한번씩 앉아 쉬고 

그늘이라고 해야 듬성듬성 뙤약볕 내리쬐는

못난 그림자 한 뼘 있으면

좋겠다는, 뜻 하나 세운다

정말 아무래도 그 모습이 내 본모습인 것 같아

나도 가슴이 서늘해지지만

부는 바람에 다른 세상 소식 귀동냥하고

새의 낯빛으로

내 벗들 근황 읽어내면 그만이지

나이 서른을 몇 년 넘기고서야

뜻이라고 세워본다

혼자 묻고 혼자 답하고

내 잎에게

땅 속 벌레 얘기 전해주는 뜻,

이제사 슬며시 세워본다

 

황규관, 물은 제 길을 간다, 갈무리. 2000년. 9쪽-10쪽 

 

이렇게 소박하게 자신의 위치를 소망하는 사람. 남 앞에 서되, 남 위에 군림하지 않고 남과 함께 가는, 그래서 남에게 작은 그늘이나마 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내지 않고 작은 것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소망, 참 작은 소망같지만 너무도 큰 소망이다. 이런 사람이 되기가 얼마나 힘든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단체장이 되면 이런 작은 소망을 세웠어도 지키기가 힘들다. 이것이 작은 소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단체장들, 정말로 남에게 그늘이 되어 줄 수 있는 그런 정책을 펴는,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감추어도 남들은 편안해질 수 있는 그런 정책을 펴겠다는 소망을 세웠으면 한다.

 

하여 그런 소망은 이렇게 이루어내야 한다. 그는 '폭포'라는 시에서 말한다.

 

폭포

 

물이 비명을 지른다

 

곤두박질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먼바다로 가는 길에

꼭 맞아야 할 제 운명에

물이 소리를 지른다

공포에 질린 괴성이 아니라

온몸을 던져 저를 부수는 파열음이다

숲도 그 소리에

한결 더 푸르러진다

떨어져야 하는 운명 없이

누구도 빛나는 바다에 다다르지 못한다는 걸

물은 아는 것이다

물은 제 비명에 담긴

운명에 대한 남김 없는 사랑을

쉴새없이 내지른다

날벌레 한 마리까지 비추는 마음도

자신에 대한 아득한 사랑부터라고

 

황규관, 물은 제 길을 간다. 갈무리, 2000년. 15쪽-16쪽

 

남에게 작은 그늘이 되고 싶다는 소망,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겠다는 소망, 결코 작은 소망이 아니다. 이 시에서 말하는 '빛나는 바다'다. 이 '빛나는 바다'에 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온전히 내던져야 한다. 자신을 내던지는 울음소리, 온몸이 내지르는 소리를 자신이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살 때 나 자신도 잘 살게 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

 

이 두 시를 읽고 마음에 새기는 단체장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소수의 이익을 위해서 정책을 펼 수는 없으리라. 그들은 약한 사람을 위해서, 힘든 사람을 위해서,무언가가 필요한 사람을 위해서 정책을 펼칠 수 있으리라. 그러면 그들은 '빛나는 바다' 즉 자신이 가고자 했던 곳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시인 김수영은 이 시와 같은 제목의 시에서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고 했다. 물은 저 혼자 흐르지 않는다. 함께 흐른다. 함께 흐르면서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그래서 물은 곧 시민이다. 국민이다.

 

새로 출범하는 자치단체장들... 시민이 물임을, 자신들은 물 위에 떠 있는 배에 불과함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그들은 거창한 정책이 아니라 시민들이 자유롭게, 언제든지 편하게 쉴 수 있는 그늘을 마련해주는 일에 '폭포'처럼 온몸을 던져 나서주었으면 좋겠다.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지켜보는 존재, 길을 알고 제 길을 가는 존재, 그것이 바로 우리 '시민들'이니... 우리 역시 두 눈 똑바로 뜨고 우리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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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마음에 와 닿는다. "아직은 저항의 나이"

일과시 동인 제7집이란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내가 찾을 수 있는 건 2005년에 나온 일과시 동인 제8집이 있다. 이것까지만 보면 8집까지 이들이 함께 시집을 내었다는 말이 된다.

 

일과시라는 동인들 이름도 맘에 든다. 인간에게 일은 삶을 이루는 필수 요소이듯이 시 또한 우리네 삶에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시가 특정한 사람들만이 향유하는 문학이 아니라 일하는 사람들도 누릴 수 있는 문학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좋고...

 

무엇보다도 일하는 사람들이 시인으로서 시를 쓴다는 것, 일과시가 동떨어지지 않고 하나로 존재한다는 사실이 좋다.

 

여기에 저항이라는 말이 주는 느낌이 좋고. 저항을 잃으면 과연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저항을 할 수 있다는 얘기는 자유가 있다는 얘기고, 그 자유를 자신이 의식하고 있다는 얘기도 되고, 자유를 억압하는 것들에 대해 주체적으로 나설 수 있다는 얘기가 되니, 저항의 나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을 수밖에.

 

그냥 죽어지낼 수 없는 시대에, 저항하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몸부림 아니겠는가. 저항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속된 말로 "남자는 군대 갔다 와야 사람 된다", 또 "군대 갔다 와서 사람 됐다"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한 사람이 지니고 있었던 저항의식을 군대에서 없애 이제는 고분고분 시류에 편승하는 사람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는다.

 

저항정신을 잃은 순응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군대를 마친 사람이고, 그 다음부터는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나서지 마라, 나서 봤자 네 손해다라는 말이 팽배해지게 된다.

 

그러므로 저항을 잃은 나이는 사람으로서의 존재감을 잃은 나이가 되고, 이는 주체성을 잃은 남이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

 

이 사회에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의 생각을 잊고, 잃고 남이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 자신이 출세하기 위해서 자신의 판단을 모두 유보하고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옳고 그름에 대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오로지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는 사람 등등.

 

저항을 하지 못하는 시대... 저항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은 시대. 그런 시대가 과연 좋은 시대일까? 행복한 시대일까?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하는 것도 일종의 저항일진대, 우리는 지금 말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무엇에 대한 저항이어야 하는지, 무엇을 위한 저항이어야 하는지 알아가야 할텐데.

 

2002년이면 이미 10년이 지난 시집이다. 시의 내용은 그보다 더 오래 되었을텐데...이 시집에서 말하는 일들이 왜 오래 전의 일같지 않고, 지금 벌어지는 일 같은지...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동안 강산만 변하게 한 건 아닌지... 그 때 어렵게 살던 일하던 사람들, 지금도 힘들게 살고 있는데.. 이제는 그런 일도 잃고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아직은 저항의 나이"가 아니라 "지금은 저항의 나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런지. 우리가 저항을 잃으면 사람으로서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를 잃은 것일테니... 

 

나이에 상관없이 우리는 모두 "저항의 나이"에 속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 모두 저항의 나이에 머물러 있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의 모든 나이에 저항하지 않을, 저항하지 못할 나이는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 생각하고 행동하기.. 이것이 바로 저항이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행동하기... 이것이 저항이다. 우리는 모두 "저항의 나이"에 속해 있다. 저항해야 할 것에 저항하는 것. 그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이다. 

 

아직은 저항의 나이

 

 

                              - 문동만

 

눈꽃

너는 피어라 나는 네 안에 지마

그래도 울지 않으리

이마 위에 아이 눈썹 만한 눈이파리

예수가 죽어 간 나이

시인이 요절한 나이

초월하지도 못했네 순응하지도 않았네

아 아직은 저항의 나이

내가 쓴 길도 내가 지운 길도

덮고야 마는 단호한 눈발이여

앞선 발자국 하나 없이 내 흔적을 남겨서

당신에게 가야 하네

눈꽃 피는데, 당신에게 닾기도 전에

눈꽃만 피는데,

우두둑 솔가지 부러지고

나는 먹먹한 눈물 한 방울로

길을 녹이네

 

문동만 외, 아직은 저항의 나이.  삶이보이는창, 2002년초판. 22

 

(그런데 창비에서 나온 문동만의 시집 "그네"에 실려 있는 이 시는 맨 마지막 행이 수정되어 있다.   '길을 녹이네 -> 뵈지 않는 눈길을 녹이네'로)

 

 일과시 동인들, 이 시집에 시를 수록한 시인들 모두 귀한 분들이다. 아직도 우리에게 저항의 정신을 잃지 말라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본모습에 대해서, 우리들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으니 말이다.

 

이 시집에는 문동만, 조태진, 오도엽, 송경동, 손상열, 서정홍, 김해화, 김해자, 김용만, 김기홍 시인이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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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넘도록 충격에 휩싸여 지내고 있는데... 그래서 무언가를 털어놓아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겠다 싶어 "털어놓기와 건강"이란 책을 집어들고 읽었는데...

 

얼마 전에는 국민을 미개하다고 한 사람이 나타나질 않나(국민들 힘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우리나라인데, 그렇게 민주화를 이루어낸 국민이 미개하다면, 그 국민들로 하여금 민주화를 하게 한 정치인들은 도대체 어느 정도 수준인지... 미개보다 못한 수준은?), 또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나 참으로 한심하다.

 

"가난한 집 애들이 설악산이나 경주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가면 될 일이지, 왜 배를 타고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다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 어느 목사의 말.

 

부끄러워서 실명을 거론하기조차 싫은 그런 말이다. 이게 말이 되나? 목회자란 사람이. 도대체 이 사람이 진정 종교인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교인이라면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위로해주어야 하지 않나?

 

종교인이라면 사람들의 영혼을 파 먹는 것이 아니라, 황폐화된 영혼을 사랑으로 가득차게, 기쁨으로 가득차게 해 주어야 하지 않나?

 

존 러스킨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란 책에서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행복한 사회를 꾸리는 모습을 상상했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가 꿈꾸던 세상이고, 모든 종교인이 꿈꾸는 세상 아니던가.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다니.. 그것도 종교인에게서. 이렇게 종교인이 사람들의 영혼을 파먹어도 되는 것인지... 답답하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위안과 행복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도록 사람들을 이끄는 존재가 바로 종교인 아니던가. 오강남의 역설적인 제목이 붙은 책이 생각나는 나날들이다.

 

"예수는 없다"

 

예수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종교인들에게는 예수는 없다. 그들은 예수가 가장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동등한 대우를 해주었다는 사실을, 예수는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사랑으로 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들에게 과연 예수가 있을까? 하여 오강남이 쓴 또 다른 책이 생각난다. "예수가 외면한 그 한 가지 질문"

 

진정한 종교인이란, 우리의 영혼을 충만하게 하는 종교란 어떤 것일지... 우리를 동등한 사람으로 대우해주는 종교 아니던가. 하느님 아래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존재. 모두가 사랑을 받아야 할 존재. 그것이 바로 우리 사람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는 종교인들이 많고, 종교도 많다. 이들이 굳이 언론이 드러낼 필요가 없어서 그렇지, 세상에는 훌륭한 종교인들이, 진정한 종교가 많다.

 

이제는 이들도 좀 드러났으면 좋겠다. 영혼이 맑아지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매번 이렇게 내 영혼을 갉아먹는 소리를 이제는 언론을 통해서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알고 있기로 60-70년대 그 험악했던 시절에 진정한 종교인으로 살아간 사람들이 많았으니 말이다. 강원룡 목사 같은 분도 있었고, 김재준 목사 같은 분도, 문익환 목사 같은 분도... 지학순 주교 같은 분도, 김수환 추기경 같은 분도... 함석헌, 유영모 같은 그런 종교인들... 우리의 영혼을 채워주었던 그런 종교인들이 많았으니,

 

강원룡 목사(강원용이라고 나온다. 그럼에도 나는 강원룡이라는 이름에 더 친숙하다)의 자서전인 "역사의 언덕에서1-5"를 읽고 얼마나 마음이 따뜻해졌던가. 어떻게 지내야 진정한 종교인의 자세인지를 알게 되었던가.

 

다시는 내 영혼을 파 먹는 소리를 하는 종교인, 내 귀를 씻게 만드는 종교인, 그런 사람들 소리가 안 들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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