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헌책방에 들렀다. 가끔 가고 싶기는 하나, 여유가 없다고 해야 하나 그렇게 자주 가지는 못한다.

 

많은 책들이 첫주인을 떠나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 중에서 나와 인연이 닿는 책들은 어떤 것들일지... 그 많은 책들 중에 우연히 또는 이거다 싶게 눈에 들어오는 책이 있다.

 

어떤 책은 작가의 이름만으로, 어떤 책은 제목으로, 또 어떤 책은 평소에 꼭 읽고 싶었던 책인데, 이래저래 미루다 사지 못했는데, 헌책방에서 만나게 되기도 한다.

 

이 책은 제목이다. 아니 작가도 안다. 이 작가의 같은 제목의 책을 읽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당연히 소설가라고만 알고 있었다. 그가 시를 쓰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알고보니 시집을 여러 권 내었다.

 

여러 권 낸 시집 중에 이 시집은 제목이 소설과 똑같다. 또 독일의 작가인 브레히트의 시집 제목과도 같고. 물론 내용은 좀 다르지만.

 

격동의 80년대를 거쳐오면서 겪었던 마음이나 행동들, 그리고 한 사람과의 사랑이 이 시집에 담겨 있다.

 

이미 지난 일들. 80년대... 멀다. 먼데 그런데 그 80년대에 벌어졌던 일들이 버젓이 2010년대에 벌어지고 있으니 참...

 

역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다.

 

세상이 변하지 않고 반복되고 있음을, 비극이 점점 더 심화되고 있음을, 예전에는 가난 속에서도 연대가 있고, 우정이 있고 행복이 있었다면, 이제는 가난은 연대와 우정, 행복을 모두 빼앗아 가고 있음을...

 

그래도 80년대는 미래를 보고, 희망을 지니고 살았던 시대라면 지금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 현재에도 행복을 느끼기 힘든, 미래의 행복은 기대하기 더 힘든 그런 시대가 되지 않았나 싶다.

 

사회 안전망의 해체... 대형사고가 나도 누구도 책임지지 않으려는 모습... 오로지 자신들의 권력을 향해 나아가는 후안무치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래, 이 시집은 80년대 작가 개인의 감수성이 잘 녹아들어 있는 시집이지만... 지금 우리에게도 그러한 감수성이 살아 있어야 함을 생각하게 한다.

 

슬픔에 대한 애도... 그것은 잊음이 아니고 기억이고, 다시는 이런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해야만 할 일이 있다는 인식을 해야겠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다고 브레히트는 그의 시에서 말했지만... 그리고 슬픔에 빠졌지만, 강자든 약자든 살아남은 자는 살아남았기에 해야할 일이 있다.

 

그 일을 찾지 못하면 정말 '살아남는 자의 슬픔'이란 늪에 빠져 계속 밑으로 밑으로만 잠겨들 뿐이리라.

 

이제 살아남은 우리들... 우리들에게 주어진 일을 해야겠다. 그것이 진정한 애도가 될테니...

 

시들이 이미 지난 시절의 감성을 담고 있어서 굳이 인용할 필요는 없겠단 생각이 든다. 다만, 그 제목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들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이제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노래하지 말고, '살아남은 자들이 해야 할일' 또는 살아남은 자들이 할 일'을 노래해야겠다.

 

이것이 진정한 애도다. 애도는 뒤로 가는 것이 아닌, 자신의 슬픔에만 빠져 있는 것이 아닌, 슬픔을 변화의 힘으로 바꾸는 일이다.

 

그러한 '애도'가 필요한 지금이다.

 

덧글

 

이 작가에 대하여 검색해 보면 안 좋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시인이 자신의 시와 행동을 일치시키지 못한 경우... 또는 변절이 된 경우. 어떤 경우일지 모르지만... 여하튼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이제 안녕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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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한 시들이다.

 

그런데 마음이 애잔해 진다.

 

슬프다. 농업은 사람을 살리는 일인데, 정작 그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다.

 

자신의 희생으로 우리들을 살리는 사람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도 예의를 지키지 않고 있지 않은지.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해 농업개방도 거의 이루어졌고, 이제는 쌀 마저도 개방되어 우리나라 식량자급률이 아주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는데...

 

도시는 개발이 되어 빌딩들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점점 솟아오르고 있는데, 농토는 빈 들이 되어 가고 있는 현실.

 

농촌에 가면 놀고 있는 땅 (하긴 어떤 때는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아주 잘했다고 보조금을 지급하던 때도 있었는데...)도 많고, 곳곳에는 폐가가 남아 있는데...

 

여기에 농촌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이라서 50대면 청년이라는 소리를 듣는다는데...

 

그렇게 우리나라 농촌은 점점 황폐해져 가고 있는데... 우리는 아직도 농업에 대해서 제대로 된 투자를 하지 않는다.

 

아니 농업은 투자가 아니라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래야 한다.

 

이 시집은 오래 전에 나왔다. 내가 헌책방에서 구입해 갖고 있는 시집이 1990년에 나온 것이었으니.  90년이 되기 전에도 우리나라 농촌은 이리도 힘들었는데... 그것이 지금도 나아지지 않고 있으니.

 

농업.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우리가 우리의 목숨이라고 생각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일이다.

 

"농민에게 월급을!"이라는 주장... 공허한 주장이 되어서는 안된다.

 

고진하의 시집 중에 한 폭의 수채화같은, 그러나 너무 슬프고 애잔한 수채화 같은 그런 시. '폐가'

 

폐가

 

휘영청 밝은 달빛 쏟아지는

솔고개 마루터

폐가 한 채

반쯤 내려앉은 썩은새 지붕 위엔

올망졸망

쫓겨난 흥부네 새끼들 같은

탐스런 조롱박들이 뒹굴고 있었다

 

고진하,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민음사. 1990년. 13쪽

 

중국 주석인 시진핑이 방한 한 지금. 중국에게 농산물까지 완전히 개방해서 우리 농촌이 더 힘들어진다면 정말로 우리나라 농토엔 무엇이 남을까... 우리는 그 빈들에 집들만 지을까? 공장만 지을까?

 

빈들이 식물들도, 곡물들로, 우리들의 삶으로 차게 해야 할텐데... 이렇게 '폐가'가 늘어나는 농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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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 이야기로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청문회가 아니라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할 사람들(?)이 청문회 대상이 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청문회법을 개정하자는 이야기가 나와 시끄러운 것이다.

 

그런데 잘 이해를 못하겠다. 청문회라는 것이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검증하는 제도 아닌가? 그것도 나라를 좌지우지 한다는 정치권 중에서도 장관급 이상에 해당하는 것 아닌가?

 

조선시대로 따지면 판서급 이상에 대한 청문회를 한다고 하는데, 그 청문회 무용론이 나오질 않나, 아니면 왜 청문회를 하는데 그 사람이 그 자리에 맞는 능력을 지니고 있느냐 있지 않느냐를 따지지 않고, 개인신상에 관한 것들부터 따지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더니, 자신들이 야당인 시절 행정부의 관료들을 엄격한 잣대로 선별해야 한다고 기를 쓰고 청문회법을 만들어 놓더니, 이제 여당이 되니, 그것과 이것은 다른 문제라고 개인의 능력과 비리를 같은 선상에 놓지 말라고 하고, 그런 기준으로는 어느 누구도 통과할 자신이 없으니 청문회법을 개정하잖다.

 

조변석개. 때에 따라 이렇게 행정부 관료들에 대한 기준이 달라져도 되는지 모르겠다. 굳이 옛말을 들먹거리지 않더라도 "수신.제가.치국.평천하' 아니던가.

 

세상에 제 몸 하나 깨끗히 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가정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으며, 또 제 집 하나 다스릴 능력이 없는 사람이 나라를 경영할 수 있으며, 제 나라를 제대로 경영하지 못하는 통치자가 어떻게 세계 평화에 기여하겠는가.

 

물론 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가 순서대로 가진 않겠지만, 적어도 '수신과 제가'는 '치국'에 앞서거나 동시에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사회는 혼란에만 빠지게 된다. 그러니 개인신상에 관한 것들이 청문회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물론 서양의 경우, 청문회에서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 이미 추천과정에서 이런 문제는 다 검증이 되기 때문이다. 청문회에서 언급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검증을 마치고, 이 검증 기준을 통과한 사람만이 청문회 대상으로 추천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청문회에서 굳이 개인의 문제를 다룰 필요가 없다.

 

이미 검증을 거친 것들을 반복할 만큼 시간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시급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때는 자리와 능력이 어울리느냐를 중심으로, 또 정책 비전을 중심으로 청문회를 실시하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기도 전에 우리는 개인 문제로 사회가 시끌시끌하다. 위장전입, 병역미필(가족까지 포함하여), 논문 표절, 전관예우, 부적절한 언행 등이 청문회 대상자들마다 오르내리고 있으니...

 

이래서 청문회장에 가기 전에 이미 까발려질 대로 다 까발려지니 '청문회에 가기도 전에 개인적 비판이나 가족들 문제가 거론되는 데는 어느 누구도 감당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고, 높아진 검증 기준을 통과할 수 있는 분을 찾기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다'(인터넷 한겨레 신문에 난 2014년 7월 1일자 기사 중에서 대통령의 말이라고 한 부분 재인용)는 말이 나온다.

 

이 말이 곧 청문회 검증 기준을 낮춰야 한다는 말로 들리는데... 

 

정작 문제는 청문회 검증 기준이 아니라 그 기준에 미달되는 사람을 추천하는데 있지 않나. 행정부의 장관이 되려는 사람이면 검증 기준이 매우 높아야 하지 않나. 적어도 선비란 개인적인 청렴함이나 가족들의 청렴함은 기본이요, 여기에 능력까지 갖추어야 하지 않나.

 

그러니 청문회의 검증 기준은 낮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아져야 하고, 적어도 자신이 행정부의 장관 정도 하려면 이 높아진 검증 기준을 가뿐히 통과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 정도 기준도 통과 못할 사람은 나와 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에 불과하니 행정부에서 일을 한다는 헛된 욕심을 버리는 것이 자신의 삶과 우리 사회의 삶에 더 도움이 되는 것 아닐까.

 

따라서 청문회 검증 기준은 낮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아져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검증 기준을 통과한 사람만이 진정한 선량(選良)이라는 소리를 듣고 책임있는 자리에 갈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런 사회가 진정 좋은 사회이다.

 

그런데... 이런 당연한 말이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당연과 물론의 세계'(김승희의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자서에서)에 우리는 너무도 물들어 있기 때문에, 이 세계에서 벗어나는 일은 너무도 무거운 싸움이 된다.

 

내가 평소에는 느끼지 못하던 것을 느끼면서 그것을 털어내기 위해서 싸우는 싸움, 결코 쉽지 않은 싸움이고, 너무도 '무겁고 힘든' 싸움이다.

 

나와 같은 보통 사람도 이럴진대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 이 사람들은 이 '당연과 물론의 세계'와 싸우기 위해서는 얼마나 힘들 것인가. 그들에게는 얼마나 엄격하고 높은 잣대가 주어진 것인가. 그걸 알아야 하지 않나.

 

검증 기준을 탓할 것이 아니라 검증 기준을 가볍게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위로 올라갈수록 자신이 말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는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이어야 할테니 말이다. 

 

하여 정치를 한다는 사람, 또 행정부에서 고위관료로 일을 하겠다는 사람, 더 높은 곳에서 나라를 위해서 사람들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사람들은 적어도 '당연과 물론의 세계'에 속해 있으면 안된다. 이들은 끊임없이 이 '당연과 물론의 세계'에서 벗어나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벗어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 주어진다.

 

김승희의 제목과 같은 시를 보자.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1

 

「이 문은 자동도어이오니

개폐를 운전자에게 맡겨주십시오」

 

누군가 나에게 넥타이를 입힌다

그리고 질질 끌고 간다

 

김승희,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1995년. 11쪽

 

하여 우리는 이런 '토끼장의 평화'를 벗어나기 위해서 정말로 또다시 '무거운 싸움'을 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팔복을 빗대어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마치 윤동주의 '팔복'을 읽는 느낌이 난다. 진정 이런 복은(이게 복이라니, 참 무서운 역설이다) 우리가 '무거운 싸움'을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다가오리라.

 

八福(팔복)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땅의 나라가 저의 것이요

 

당연을 따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당연을 따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당연을 따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당연을 따르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토끼장의 평화가 저의 것이라

 

김승희,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싸움, 세계사. 1995년.  8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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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은 세상을 비춘다. 그런데 별은 밤에만 비춘다. 낮에는 별들의 빛이 세상이 닿지 않는다. 아니 닿을 필요가 없다. 별빛이 필요없을 만큼 밝기 때문이다.(사실 별빛은 낮이나 밤이나 같다. 다만 우리의 눈에 보이냐 보이지 않느냐의 차이일 뿐이지만... 그러한 과학적 사실 말고... 우리가 느끼는 진실의 면에서는 이렇다)

 

그렇다면 별은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한다. 결국 별의 바탕은 어둠이다. 어둠이 없다면 별은 제 진가를 발휘하지 못한다.

 

지금 우리나라 청문회 문제로 말들이 많다. 청문회라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직책에 어울리는지를 함께 묻고 답해보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청문회 자리에 나선다는 것 자체는 세상의 별이 되고자 한다는 얘기다. 그는 자신의 빛으로 세상을 조금더 밝게 비추고자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밝아서, 그들의 삶이 대낮이어서 도리어 별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 많다.

 

무슨 무슨 비리 비리 비리......

 

언론에는 그 많은 비리들이 감자를 캘 때 감자들이 줄줄히 딸려나오듯이 나오고 있다. 세상에 그들은 자신의 삶이 너무도 밝아서 그러한 어둠 쯤은 쉽게 감춰질 줄 알았나 보다.

 

그러나 자신의 어둠을 감추었던 밝음이, 그러한 대낮이 청문회라는 자리에서는 결코 대낮이 되지 못한다. 청문회는 어둠이다. 별의 바탕이다.

 

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서야 하는 바탕이다. 청문회라는 바탕에 서 있을 때 그는 진짜 별인지 아니면 별 흉내를 내고마는 가짜 별인지 판명이 된다.

 

청문회라는 바탕, 철저하게 어두운 바탕에서 그 동안 자신을 가리고 있던 낮, 밝음을 제거하면 진짜 별이 되는 사람들은 그 때부터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대낮에 가려져 있던 빛들이 제 구실을 하기 시작한다.

 

반대로 대낮에 가려져 있던 어둠을 지니고 있던 사람들... 대낮을 제거하고 나면 이제는 어둠만이 남는다.

 

그들에게는 청문회라는 어둠에서 자신들의 어둠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빛을 발할 수가 없다. 별이 될 수가 없다. 그냥 묻힐 뿐이다.

 

그런 사람들이 왜 이리 많은지... 이렇게 자신의 대낮에 가려져 있던 어둠이 청문회라는 바탕에 의해 드러나는데도 그걸 한사코 부인하고 '난 별이다. 난 빛이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대낮일 때 자신의 어둠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없애려고 하고, 대낮이라 티가 나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빛을 간직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하는데.. 그래야 정말 별이 될 수 있는데...

 

세상의 별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 청문회라는 바탕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 대낮에는 빛을 발하지는 않지만 결국 빛을 발하게 되는 자신만의 빛을 간직하는 삶을 살기를...

 

자신만의 빛이 없이, 대낮에 겨우 자신의 어둠을 감추고만 있던 이들... 청문회라는 바탕에서 빛은 커녕 자신의 존재조차도 가두어버리는 이들. 반성하길.

 

정진규의 '별'이란 시... 마음에 와 닿는다.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대낮에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별들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에게만

별들이 보인다

지금 어둠인 사람들만

별들을 낳을 수 있다

 

지금 대낮인 사람들은 어둡다

 

정진규, 별들의 바탕은 어둠이 마땅하다. 문학세계사. 1990년. 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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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특집이다.

 

너무도 슬픈.

너무도 참담한.

그러나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는.

 

노아의 방주는 세상 생물의 종말로부터 생명체들을 구해냈다고 하는데, 세월이라는 이름을 가진 배는 청춘들을 비롯한 많은 생명들을 바닷속에 가두어 버렸다.

 

이 배가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배를 둘러싼 사회가, 사람들이 그랬지만... 너무도 어이없고, 너무도 덧없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문제는 일이 일어난 다음에 벌어졌다. 제대로 해결이 되지 않아 지금까지도 미해결의 상태로 남아 있으며, 문제가 발생했는데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고 있으며, 책임져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책임질 자리에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으며, 그 불똥이 온전히 행복한 오늘을 살아가야 할 아이들에게 떨어지고 말았다.

 

수학여행 전면 유보, 더불어 수련회 유보.

 

학교라는 공간을 벗어나 자기들만의 공간과 시간을 갖고자 열망했던 전국의 많은 학생들이 어쩔 수 없이 학교라는 공간과 가정이라는 공간을 벗어날 기회를 놓쳐 버리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의 놀이 시간을 뺏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했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성장은 집과 학교와 같은 자신에게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다른 경험을 함으로써 얻어지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고로 인해서 전국적으로 학생들이 가져야 할 성장의 기회를 교육을 주관하는 교육부에서 박탈한 것이 과연 온당한 것이었는지, 이번 호를 읽으면서 생각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이번 호를 읽으며 생각한 것은 우리가 한 교육이 과연 무엇이었나 하는 것.

 

도대체 17-18세가 된 아이들이 자신들의 생명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음에도 남의 말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가 하는 문제.

 

쥐는 배가 좌초할 것 같으면 먼저 탈출을 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선원들은 쥐가 탈출하는 것을 보고 배의 위험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하는데, 동물들이야 본능적인 직감으로 그렇게 한다고 해도, 사람 역시 동물적인 생존 본능이 있을텐데...

 

쥐를 열등한 동물로 취급하는 우리들이, 정작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쥐만도 못하게 행동하다니...

 

어쩌면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학생들의 이러한 생존본능을 아주 철저하게 죽였던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은 학교를 통해서 순응하는 법만 배웠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판단하는 법에 대해서는 배울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모두가 순응이지 결코 비판적인 사고는 아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듣는 소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똑바로 앉아. 조용히 해. 왜 말대꾸야. 가만히 있어. 제대로 줄 맞춰. 자세 바르게. 나서지 마라 등등.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속담처럼 우리는 남과 다름을 인식하고 다름을 강화하는 교육을 할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같아야 된다는 신념으로 모두가 같아지는 교육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생각까지도 같아지는 교육.

 

그래서 남과 다른 생각, 남과 다른 행동을 하면 눈총을 받고 비판을 받고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는 그런 생활들, 그런 교육들.

 

그 교육의 효과가 바로 이런 사태 아닐런지. 말을 잘 듣는 학생들이 속절없이 자신들의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이런 현실을 낳았던 것은 아닌지...

 

그렇다면 우리들은 이 세월호를 기억하는 일은 이런 교육 현장을 바꿔가는 일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지.

 

남을 보지 말고 우런 나를 보는 연습부터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세월호 사건'을 잊지 않는 길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으니.

 

이번 호에 있는 메르코글리아노의 글 중에 '전자미디어와 이별하기'라는 제목을 단 글이 있는데(78-79쪽) 이 글을 읽으며 세월호와도 연결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에서 최고속 인터넷망이 가장 발달해 있으며, 국민들의 사용량도 세계 최고이고, 스마트폰 사용도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그런 스마트폰을 대부분의 학생들이 지니고 있었음에도 자신들의 생명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것이 제 구실을 전혀 하지 못했음을, 그 기계가 신고는 했을지언정 그 다음 생명의 구조로는 이어지지 못했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어쩌면 아이들은 이 스마트폰을 믿고 승무원들의 방송을 믿으며, 또 교사들의 지시를 따르며 마냥 기다리고만 있지 않았을까. 직접 현실을 볼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스마트폰 화면으로 자신들의 현실을 보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일까?

 

이런 가정은 위험하고 불필요하지만, 그래도 만약, 만약 스마트폰이 없었다면 그 혈기왕성한 나이의 아이들이 배 안에서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었을까... 누군가는 참지 못하고 배 위로 올라가 보지 않았을까. 누군가 올라가 보라고 밖으로 보내 보지 않았을까?

 

스마트폰이 없는 그 시간을 아이들은 절대로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하여 우리는, 아니 나는 '세월호'을 잊지 않겠다. 아니 잊어서는 안된다. 잊을 수가 없다. 그 잊지 않는 방법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늘 생각하겠다.

 

아이들이 지금처럼 자라지 않게, 이렇게 무능하고 어리석은 어른들로 자라나지 않게...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겠다. 그것이 내가 '새월호'을 잊지 않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민들레 93호.

과연 우리는 '세월호'에서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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