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그림자의 춤 앨리스 먼로 컬렉션
앨리스 먼로 지음, 곽명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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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남자가 일하기에는 아주 좋다. 남자가 일감을 가져오는 집은, 말끔히 청소가 되어 있고 일하기에 딱 좋도록 남자 중심으로 새로 배치할 수도 있다. 남자에게는 일이 있다는 걸 누구나 알아준다. 따라서 으레 전화를 받는 일도, 어디 두었는지 모를 물건을 찾는 일도, 아이들이 왜 우는지 알아보는 일도, 고양이 먹이를 주는 일도 기대하지 않는다. 방문을 닫아걸어도 무방하다... 여자에게 집이란 남자와 같은 곳이 아니다. 여자는 누구들처럼 집에 들어와서 이용하고 마음대로 나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여자는 곧 집이다. 떼려야 뗄 수 없다.      - '작업실' 중에서, p.13

 

어느 날 저녁, 그녀는 셔츠를 다림질하다 말고 남편에게 말한다. 아무래도 작업실을 얻어야겠다고.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너무 허황된 소리가 아닌가, 잔뜩 제멋에 겨워 유난을 떠는, 같잖은 요구처럼 들리지는 않을까, 그녀는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글을 쓰는 데는, 타자기나 연필 한 자루와 종이 몇 장에 책상과 의자만 있으면 그만이니 말이다. 쾌적하고 널찍하고 바다가 훤히 보이는 데다 정원까지 있는 전망 좋고 넓은 집을 놔두고 굳이 글을 쓰기 위한 작업실이 필요했던 이유를, 아마도 대부분의 여자들은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혼한 여성에게 그저 우두커니 앉아서, 허공을 응시한 채 남편도, 자식도 바라보지 않는 시간이란 게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그러니 가족들과 집안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단 집 밖으로 나가야만 한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숨 쉬고 사유할 수 있는 사적인 공간과 '작업실'이라는 단어에서 풍기는 위엄 있고 안온한 분위기가 그녀에겐 필요했다. 물론 아직은 '작가'라고 부를 수 없는, 그저 습작을 하는 단계였지만 말이다.

 

남편의 반승낙을 받고 그녀는 타자기와 책상, 의자 등 꼭 있어야 할 가구만 갖추고 빈 사무실을 구한다. 하지만 집주인 남자가 매일 같이 찾아와 편의를 봐준다는 명목으로 각종 선물을 가져 오면서, 작업실에 어물쩍 눌러앉아서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간절하게 필요해서 구한 작업실인데, 그는 결국 그녀의 공간을 침해하고 위협하기에 이른다. 평범하게 살림을 하며 아이들을 키우고 남편의 치다꺼리를 하며 살았던 주부가 가정에만 얽매여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 비로소 자신의 자아를 찾아보려고 했으나 예상치 못했던 벽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과연 그녀는 자신의 작업실과 혼자 있는 시간을 지킬 수 있을까. 이 소설집에 수록된 제일 첫 번째 작품 <작업실>의 이야기이다.

 

 

나는 그런 소리를 듣고도 어떻게 얼굴 들고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었을까? 그것은 내가 겪은 불행이 끔찍하면서도 매혹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세상만사란 게 다 그렇지 않던가. 내가 그것을 즐겼다는 건 아니다. 나는 자의식이 강한 소녀였고 그 사건이 동네방네 소문나면서 상당히 큰 곤욕을 치렀다. 그러나 그 토요일 밤에 벌어진 사건들에 나는 매혹되었다. 파렴치하고 터무니없고 철저히 부서뜨리는 부조리를 살짝 맛보고 나서 소설은 아니어도, 삶의 이야기를 즉석에서 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하여 나는 눈을 돌릴 수 없었다.     - '하룻강아지 치유법' 중에서, p.177~178

 

앨리스 먼로 문학 세계의 정수를 담은 세 작품이 '앨리스 먼로 컬렉션'으로 새롭게 옷을 갈아입고 출간되었다. 앨리스 먼로의 첫 소설집인 <행복한 그림자의 춤>, 그녀의 열 번째 소설집인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그리고 앨리스 먼로의 필력이 정점을 찍었다고 평가 받는 <런어웨이>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행복한 그림자의 춤>으로 총 열다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아이를 키우고 살림을 하는 와중에 글을 쓰는 주부가 혼자만의 방을 꿈꾸는 <작업실>, 두 소녀의 동화 같은 스토리 <나비의 나날>, 학교에 적응을 잘 못하고 있는 소녀가 참석한 댄스파티 이야기 <붉은 드레스 - 1946>, 신도시의 주택단지를 배경으로 집값이 떨어지는 걸 걱정하는 지역주민들이 등장하는 <휘황찬란한 집>, 경제 공황의 영향으로 외판원 일을 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린 <떠돌뱅이 회사의 카우보이> 등등 각각의 짧은 이야기 속에 '삶에서 마주치는 직관의 순간들'이 그려져 있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들은 주변 사람들의 행동과 말을 관찰하고, 경험하고, 판단하며 자신만의 삶을 꿈꾼다. 사는 게 다 비슷한 모습을 띠고 있으면서도, 가까이 가서 보면 모두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누구나 그렇게 먼로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삶을 읽어 내게 될 것이다. 곪아터진 상처와 흉터, 여인이면서 사람이기도 한 하나의 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정. 우리의 머릿속에서 매일 같이 떠오르는 감정과 생각들이지만 한번도 제대로 입 밖으로 표현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콕 집어 글로 새겨놓은 문장들이야말로 내가 앨리스 먼로의 작품을 사랑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유려하고 단단한 문장들은 생생하고, 아름답게 가슴으로, 머리로, 귀로 삶을 체감하게 만들어 준다. 먼로의 이야기들은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문장마다, 낱말마다 마법처럼 많은 이야기가 빼곡히 담겨 있다. 그래서 작가들이야말로 진정, 나이가 들수록 더 현명해지고, 더 깊어지며, 더 섬세하게 빛나는 존재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노 작가의 섬세하면서도 예리한, 심장을 쿡쿡 찌르는 문장들을 만나 보자. 왜 앨리스 먼로가 단편 작가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는지, 어떻게 장편소설의 그림자에 가려진 단편소설을 가장 완벽하게 예술의 형태로 만들어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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