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환자, 로젠한 실험 미스터리 -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무너뜨린 정신의학사의 위대한 진실
수재나 캐헐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북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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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과학자들은 우주를 탐사하고, 심장을 이식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달팽이관을 이식하여 청력을 선사했다. 의사들은 호지킨 림프종 환자에게 다른 여성의 골수를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고했다. 유방촬영술이 개발되어 비침습적 방법으로 몸 안을 들여다보며 유방암을 감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우리는 세계의 커다란 수수께끼들을 하나씩 풀어갔다. 우주, 암, 불임을 정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래의 질문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신질환이란 무엇일까? 혹은 더 적절하게 묻자면, 무엇이 아닐까?           p.196


이 책의 저자인 수재나 캐헐런은 <뉴욕 포스트>의 촉망받는 기자였던 스물네 살 때 정신질환 오진을 경험한다. 병명은 '자가면역 뇌염'이었지만 의사들은 차트에 '조현병'이라고 적었고, 그로 인해 잘못된 정신질환 치료를 받고 결국 정신병원에 강제 수감이 결정된다. 당시 한 의사의 끈질긴 노력으로 정확한 병명을 밝혀낼 수 있었지만, 신체질환을 정신질환이라고 진단한 오진은 그녀의 삶을 완전히 뒤흔들고 만다. 그로 인해 저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고, '로젠한 실험'이라는 흥미로운 주제와 마주하게 된다. 


정신의학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동시에 가장 큰 논란거리가 된 이 실험은 스탠퍼드 대학의 심리학자가 자신을 포함해 정신질환 병력이 없는 여덟 명의 정상인들을 미국 각지의 정신병원으로 보내 의사들이 가짜 환자들을 가려낼 수 있는지 테스트한 것이다. 충격적인 결과는 진료받은 병원 모두 그들을 정신병자로 오진했다는 것이고, 그들은 평균 20여 일 동안 정신병동에 수감 당해 온갖 비윤리적인 행태와 부당한 대우에 노출되었고, 꼼짝없이 잘못된 정신질환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 실험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정신의학계의 진단체계와 치료법에 대한 근본적인 논쟁이 시작된다. 과연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신체냐 정신이냐, 뇌냐 마음이냐? 난감한 이 문제가 우리를 영원히 괴롭히고 있다. 이것은 누군가의 생사가 걸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골대가 옮겨지고 정의가 바뀔 수는 있겠지만 결국에는 같은 이야기다. 우리는 어떤 질병이 다른 질병보다 더 우리의 공감을 살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이것이 바뀌어야 한다. 변화는 그저 어딘가에 침대를 더 늘리고 사람들을 나 몰라라 하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삶(과거와 현재)의 토대를 이루는 것을, 그리고 환경이 병과 건강에 관여하는 수많은 방식들을 더 넓은 시야로 보아야 한다.             p.417


정신병원에서 제정신으로 지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로젠한을 포함해 총 여덟 명(대학원생, 심리학자 셋, 의사 둘, 화가, 주부로 남자 다섯, 여자 셋)은 동부 서부 해안의 다섯 개 주 열두 곳의 시설에 정체를 숨기고 들어간다. 그들은 의사에게 환청이 들린다고 말했고, 의사들은 이런 증상만을 근거로 모든 '가짜 환자'들에게 심각한 정신질환 진단을 내렸다. 이 중 한 명만 조울증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조현병이었다. 입원 기간은 7일에서 52일로 다양했고, 입원해 있는 동안 총 2100개의 알약(독한 항정신제)이 건강한 사람들에게 처방되었다. 물론 가짜 환자들은 알약을 삼키지 않고 숨겼다가 버리도록 훈련받았지만 말이다. 이쯤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정신병원 시설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을지 궁금해진다. 멀쩡한 사람이 정신이상자로 몰린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까. 그저 정상적인 행동을 해도 정신질환의 꼬리표를 달면 비정상적인 것으로 잘못 해석되니 말이다. 


수재나 캐헐런은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역사적 사실 외에 궁금증들을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정신의학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오진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실험 후 가짜 환자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데이비드 로젠한은 이 실험을 왜 계획했으며, 이는 위대한 사건인가 추악한 사기인가? 이 과정은 웬만한 추리 소설 속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로젠한의 유품에서 시작해, 실험에 참가했던 이들 중에 생존한 인물들과 남아 있는 소수의 자료들을 분석하고, 로젠한이 실험을 계획한 동기와 실험에 참가했던 가짜 환자들의 정체를 드러낸다. 이 책은 이 역사적 실험의 이면을 추적해 정신의학의 맨 얼굴을 전면에 드러내어 보여준다. 우울증, 공황장애, 성인 ADHD, 조현병 등 정신질환이 만연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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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읽는 법 - 파리1대학 교양미술 수업
김진 지음 / 윌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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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퓌슬리의 그림을 보고 어떤 기분을 느끼셨는지요? 두려운 상황과 숨 막히는 고통 속에 잠든 여인에게 이입하기도, 훔쳐보다 들킨 듯한 관음적 시선의 주체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감정적 흔들림을 주는 작품의 힘에 감탄하고, 은밀하지만 강렬하게 암시된 요소에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쾌감을 느끼지는 않으셨나요? 이런 상상에 즐거움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소름 돋는 불쾌감을 느끼지는 않으셨나요? 이는 환희와 두려움의 감정이 공존하는, 숭고의 경험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순수하게 아름답고 편안한 감정을 주는 미美, 즉 아름다움과 숭고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요?             p.40~41


찬란한 골드빛으로 가득한 클림트의 작품들은 대중적으로 굉장히 사랑을 많이 받는 편이다.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클림트의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 <키스> 등의 작품들은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다양하게 변주되어 상품으로 이용되기도 하는 작품들이니 말이다. 클림트의 그림 속 여성들은 뭔가 특별한 점이 있다고 하는데, 뭘까. 구스타프 클림트는 19세기 말, 세기말의 혼란과 공포, 흥분과 긴장감 속에 전통적 회화에 반기를 들고 새로운 예술을 시도한 아티스트였다. 그는 인물의 얼굴은 현실적이고 상세하게 묘사하는 한편, 배경과 의상 등은 기하학적 무늬의 장식을 활용해 2차원과 3차원의 공간감을 뒤섞었다. 덕분에 모던한 감각을 보여주는 동시에 황금빛으로 치장한 신화적 이미지와 함께 현실과 꿈의 경계에 있는 듯한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클림트의 작품들은 팜므파탈적 유혹을 지닌 여성을 섬세한 기교로 표현한 경우가 많다. 그가 표현하는 여성은 남성에게 두려움과 욕망을 동시에 주는 신비한 힘을 가진 존재로 나타난다. 이 책은 그러한 클림트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미지 뒤에 숨겨진 철학적 메세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가 몰두했던 주제인 인간의 삶과 죽음, 사랑과 성, 에로티시즘에 대해 이야기하며, 그림을 더욱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말이다.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철학을 떠올리며 새로운 시선으로 그림을 감상한다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부분을 발견하기도 하고, 색다른 느낌으로 그림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30대 늦은 나이에 직장을 그만두고 미술 공부를 시작한 늦깎이 유학생이었던 저자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꼼짝없이 집에 갇히게 되자,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게 된다. 꼼꼼하게 정리했던 학교 수업 내용을 바탕으로 미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채널 <예술산책>은 무료로 보는 게 아깝다는, 돈 내고 들어야 할 강의라는 반응과 함께 입소문을 타게 된다. 이 책은 바로 <예술산책>을 바탕으로 만들어 졌다. 




오늘날의 미술은 더는 사물이나 풍경을 얼마나 아름답고 정확하게 묘사했는가에 중점을 두지 않습니다. 각 감상자가 가지고 있는 개인의 미학적 개념에 질문을 던집니다. 미학적 개념이란 말은 ‘무엇이 예술인가’라는 철학적 의문을 말합니다. 현대미술 작가들은 우리가 미술관에서 생뚱맞게 쌓여 있는 사탕을 보거나 남자 소변기를 보고 그것이 예술인지 아닌지 스스로 판단하도록 질문을 던집니다. 또 왜 그렇게 느끼는지 곰곰이 생각해보게 합니다. 감상자는 '이것도 미술이야?' '왜 이렇게 한 거지?'라고 스스로 질문하며 작품에 관한 고찰에 빠지게 되지요.         p.193


이 책은 미술 전공자들도 반해버린 화제의 유튜브 채널 〈예술산책〉의 운영자가 직접 유학하며 몸담은 파리1대학 예술 수업에서 실제로 다뤘던 작품을 중심으로, 그 안에 숨겨진 작가의 뒷이야기와 예술계 이슈를 담고 있다. 다빈치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작업한 <모나리자>는 왜 프랑스 파리에 있을까. 현대미술에는 왜 <무제>가 많을까. 위조도 예술이 될 수 있을까. 기괴하고 암울하며 폭력적이고 때로는 잔인한 프랜시스 베이컨의 그림은 왜 천문학적 금액에 팔리곤 할까? 등등 우리가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예술의 숨겨진 모습을 특유의 생생한 스토리텔링을 통해 풀어내고 있다. '파리 유학생 언니가 캠퍼스 뒤편에서 수업 노트를 펴서 들려주는 것 같은, 친절하고 편안한 느낌의 미술책'이라는 추천평처럼, 방구석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들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강의인 셈이다. 




에드바르 뭉크, 구스타프 클림트, 레오나르도 다빈치, 알베르트 자코메티, 프랜시스 베이컨 등 유명한 작가의 뒷이야기부터 요한 하인리히 퓌슬리, 페르낭 크노프, 한 판 메이헤런, 애니시 커푸어 등 조금은 낯선 작가들의 작품을 읽어 보고, 조금은 어렵게 느껴지는 쿠사마 야요이, 백남준 등 현대미술의 숨겨진 진짜 묘미까지 만나볼 수 있다. 거기다 90여 점의 작품 도판이 그림의 이해를 돕고 꼭 알아둬야 할 현대미술 작가 TOP 25를 통해 현대미술에 대한 견문을 넓혀준다. 무엇보다 최고의 예술 인재들이 공부하는 곳에서는 무엇을 가르치며, 그곳의 학생들이 지금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주제는 무엇일지 간접체험하게 되어 즐거운 시간이었다. 예술의 중심지 파리 미술대학 강의실에서 현재 가장 뜨겁게 다루고 있는 주제들이 궁금하다면, 미술에 관심은 있지만 어디서부터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작가가 작품에 남긴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면, 그 순간부터 단순한 구경이 아닌 진정한 감상의 세계가 열릴 테니 말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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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1-30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대로 된 명화감상을 하기위해선 그림 읽는 법을 이해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피오나 2023-12-01 15:15   좋아요 0 | URL
네ㅎㅎ 이 책이 제대로 된 명화 감상법을 알려주고 있답니다.
 
가을비 이야기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비채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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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아름다운 곳인데, 정말 이상한 일이네요." 미하루는 미다가하라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게. ......하지만 진짜 지옥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야... 지옥은 꼭 땅 밑에만 있는 게 아니야. 이 세상 어디에나 있고,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에게 각각 존재하고 있지. 평범하게 사는 사람의 바로 옆에 지옥에 떨어진 망자들이 있는 거야.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조용히…….”              - '아귀의 논' 중에서, p.14


미하루가 다니는 회사에서는 해마다 봄과 가을에 사원여행을 간다. 이번 가을 여행은 다테야마로 와서 케이블카도 타고, 단풍으로 물든 무로도다이라도 산책한 뒤 숙소에서 일박을 하는 중이었다. 새벽에 잠이 깨어 창문을 열고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있는데, 아래쪽에서 낯익은 사람의 뒷모습을 보게 된다. 평소에 마음에 두고 있던 아오타였기에, 미하루는 재빨리 운동복을 걸치고 산책로로 나온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산책을 하게 되는데, 아오타는 아귀의 논이라 불리는 못둑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준다. 평소 괴담이나 공포 영화를 매우 좋아했던 미하루는 관심있게 듣지만, 점점 아오타의 담담한 말투 에서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느낌을 받는다. 급기야 아오타는 자신이 전생에 아귀였다는 뜻밖의 사실을 고백하는데... 설레임으로 시작되었던 두 사람의 산책은 어떻게 될까.


가을장마가 시작되면서 벌서 사흘째 비가 내리고 있는 어느 날, 편집부의 마쓰나미는 원고를 늦게 주기로 유명한 작가인 아오야마에게 독촉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은 것은 아오야마 본인이 아니라 그의 비서 겸 애인인 아키였다. 작가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상태였고, 아키는 컴퓨터를 확인 후 미완의 원고를 보내준다. 그러면서 덧붙이길 자신의 생각에 이 원고는 실화 같다고, 원고를 다 읽고 나면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해달라고 한다. 호러물일 텐데 실화라니, 게다가 작가와 연락이 되지 않는 상태라니 이거 큰일이다 싶은 마음으로 마쓰나미는 원고를 읽기 시작한다. 원고에는 그가 매일 밤 겪은 악몽에 대해 쓰여 있었는데, 기묘한 꿈을 꾸면서 순간이동을 하고, 그러다 아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그에 맞서기로 결심하는 등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점점 더 이상해지는 이야기에 혹시 작가가 정신질환에 걸린 게 아닐까 싶은 마음도 들지만, 직접 작가의 집에 찾아가 그가 사라진 침실을 보고는 말이 안 되는 그 이야기를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하는데... 과연 사라진 작가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물론 대부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매우 드물게 근처를 떠돌던 저급 영혼이나 동물 영혼을 불러내는 일이 있어서, 그런 성공 사례(어디의 개뼈다귀인지 모르는 영혼이 나온 것뿐이지만) 덕분에 고쿠리상은 사라지지 않았다. 또한 드물기는 하지만 가끔 무시무시한 악령을 소환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 고쿠리상은 누군가를 제물로 삼지 않는 한 돌아가지 않아서, 현실에서는 지옥 그림이 펼쳐진다.            - '고쿠리상' 중에서, p.219


정말 오랜 만에 만나는 기시 유스케의 신작이다. <검은 집>이라는 작품으로 최고의 호러소설 작가로 자리매김했던 기시 유스케는 이후 SF 소설, 추리, 미스터리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선보여왔다. 그가 호러 작품을 내놓은 것은 약 9년만이라고 하니, 기시 유스케의 공포소설을 좋아했다면 이번 신작은 놓치지 말아야겠다. 이 책에 수록된 네 편의 공포담은 비명을 지르게 만드는 오싹한 공포가 아니라, 등골이 서늘해지는 공포를 보여준다. 


현실의 고통을 잊기 위해 주술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절망하고, 일상에서 초자연적인 현상과 마주하는 등 현실 속에서 마주할 수 있는 공포 그 자체를 고스란히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일본 설화문학의 진수로 꼽히는 에도시대의 고전 <우게쓰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가져왔다. <우게쓰 이야기>는 아홉 가지 초자연적 이야기의 모음집으로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동명 영화로도 유명하다. 기시 유스케는 이 작품에 영감을 받아 데뷔작 <13번째 인격 ISOLA>를 쓰기도 했는데, 그 너머에 있는 이야기를 '비'를 주제로 해 두 권의 소설집을 쓰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렇게 2009년부터 쓰기 시작한 글들을 2022년이 되어서 마무리하고 출간된 것이 바로 이 작품 <가을비 이야기>이다. 다음 작품인 <여름비 이야기>에서는 또 어떤 공포의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비가 내리는 가을의 스산한 날씨를 배경으로 인간 근원의 감정을 건드리는 네 가지 공포와 네 가지 절망을 만나보자. '진짜 지옥은 우리가 사는 이 세계'라는 사실이 와 닿는 순간, 다차원의 공포를 경험하게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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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과 나 - 배명훈 연작소설집
배명훈 지음 / 래빗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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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는 붉은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화성은 지구보다 훨씬 작은 행성이어서 지평선도 부쩍 가까워 보였다. 외딴 행성 위에 살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하는 장면이었다. 이사이는 화성이 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반지로 만들어서 손에 끼면 얼마나 예쁠까. 물론 그 반지 위의 삶은 고달팠다. 춥고 위험하고 황량하고 쓸쓸했다. 심지어 자유롭지도 않고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화성은 아직 원시 문명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이사이는 그 행성을 사랑했다. 다른 많은 화성인들과 마찬가지로.                 - '위대한 밥도둑' 중에서, p.98~99


행성을 집어삼킨 커다란 모래 폭풍과 태양계 전체를 휘감는 압도적인 규모의 항성풍이 몰아치던 밤, 오벨리스크가 세워진 작은 마을에서 사람이 죽은 채로 발견된다. 인구 2,400명의 화성 초기 정착 단계에서 일어난 첫 살인이었다. 피해자는 온실 책임자였고, 피의자는 광물학자였다. 화성에서는 알리바이를 꾸미거나 흉기를 은닉할 공간조차 없었으므로, 그는 범행을 부인하지 않았고, 모든 것은 투명하게 모두에게 공유되었다. 온실 책임자는 언젠간 오벨리스크를 타고 지구로 돌아갈 사람이었고, 반대로 광물학자는 오래오래 화성에 남을 사람이었다. 자, 이제 그로 인한 갈등으로 벌어진 살인 사건을 해결 해야했다. 문제는 지구의 규칙이 아니라, 화성에서 살인 사건을 처리하는 방법을 새로 개발해야 한다는 거였다. 지구에서 옮겨 온 사람들은 어떻게 '붉은 행성의 방식'을 만들어 낼까.


이사이는 어려서부터 입이 짧아 많이 먹지도 않았고, 먹고 싶은 것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서른 살이 되어 화성 이주자 예비 명단에 들어 화성행 우주선에 올랐을 때, 그런 성향이 아주 도움이 되었다. 화성에는 식재료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게 아니라 먹을 수 있는 걸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음식이 아니라 식량으로 몇 년을 버텨야 한다는 사실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색을 했지만, 이사이는 어차피 음식에 대한 갈망 자체를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억누를 식욕이 아예 없었다. 음식에 초연한 그 성격 덕에 1년 차에 기지 운영위원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런데, 지구와 화성이 태양을 사이에 두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무렵 어느 날, 갑자기 이사이에게 변화가 일어난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낯선 열망에 사로잡힌 것이다. '아, 망했다. 간장게장이 먹고 싶어.'  평생 한 번도 뭔가가 먹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데, 게다가 지구에서도 좋아해본 적 없는 간장게장이라니. 과연 이사이는 식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화성에서 간장게장이 먹고 싶다는 열망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바로 그때 가로등이 일제히 꺼졌다. 주변 건물까지 전기가 나가지는 않아서 완전한 어둠 속에 갇히지는 않았지만, 큰 걸음으로 성큼 다가서는 우주의 공포는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디선가 우주선 문이 철컥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분명 환청이었지만, 기억에서 건져 올린 생생한 환청이었다. 오래된 로켓에 실려 우주로 발사된 것처럼 손발을 버둥거리는 밤. 덜컥 무언가가 내려앉는 소리.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중력이 너무 무겁고 비에 갇힌 신세가 참담했다. 터무니없이 강력한 폭풍 앞에 존재는 더없이 왜소해졌다.             - '행성 탈출 속도' 중에서, p.231


현 시점에서 인류의 화성 진출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스페이스X일 것이다. 물론 지난 4월에 있었던 첫 지구 궤도 시험비행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그들의 목표는 2029년에 로켓을 통해 사람을 화성까지 운송하고, 화성을 식민지화해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년 뒤, 정말 인류는 화성에 갈 수 있게 될까. 2015년에 개봉했던 영화 <마션>을 볼 때만 하더라도, 화성은 절대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구와 가장 유사한 태양계 내의 행성이긴 하지만, 우주 방사선과 각종 유성우·운석 충돌 등 ‘우주적’ 문제들은 차지하고 화성은 지구처럼 생명체 친화적이지 않고, 대기도 희박한데다 극저온이라 어떻게 보더라도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인류가 화성에 가는 것이, 그리고 화성에서 살아가는 것이 예정된 미래처럼 느껴진다. 특히나 배명훈 작가의 신작을 읽고 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외교학을 전공하고 SF소설을 쓰는 배명훈 작가는 지난 2020년부터 2년간 외교부의 의뢰를 받아 화성의 행성정치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화성 이주에 관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여섯 편의 연작소설이 완성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여섯 편의 이야기들은 모두 화성 이주가 본격화된 미래를 배경으로 화성에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어떤 세계가 들어설 것인지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화성이 아니라, 지구로 오가는 정기 우주선이 다니고, 거주민 정착지의 개발 제한 구역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지며, 정치를 하고, 미래 식자재 도입 계획을 세우는 등 일상의 냄새가 나는 장소로서의 화성을 만날 수 있는 정말 특별한 작품이다. '국내 최초 화성 이주 연작소설'이라는 문구처럼,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화성'에서의 생활을 간접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언젠가 인류가 화성에서 살 수 있게 된다면, 그때 꼭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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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주, 지금의 안부 - 당신의 한 주를 보듬는 친필 시화 달력
나태주 지음 / 북폴리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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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쁘지 않은 것을 예쁘게/보아주는 것이 사랑이다//좋지 않은 것을 좋게/생각해주는 것이 사랑이다//싫은 것도 잘 참아주면서/처음만 그런 것이 아니라//나중까지 아주 나중까지/그렇게 하는 것이 사랑이다           - '사랑에 답함' 중에서,


한주에 시 한 편, 우리의 일상을 보듬어 주는 나태주 시인의 친필 시화집이다. 주간달력 형태로 일주일마다 넘겨서 볼 수 있는 탁상 스프링북으로 만들어 졌다. 만년형으로 날짜나 기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 더 오래도록 활용할 수 있다. 1년 52주 동안의 장은 각각 앞면은 시인이 직접 쓰고 그린 시화 작품이, 그 뒷면에는 시인의 시화를 모티브로 한 그래픽 시화가 수록되어 있다. 연말 선물 용으로도 좋은 것이 탁상 시화집과 함께 나의 안부노트, 스티커, 시화 엽서 7종, 2024년 달력 포스터까지 패키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라는 시, '풀꽃'을 쓴 나태주 시인의 시들은 간결하고 단순한 언어와 짧은 분량으로 누구나 쉽고 친근하게 읽을 수 있어 시를 잘 모르더라도, 책을 잘 읽지 않더라도 쉽게 다가오는 것이 장점이다. 시인의 담백한 위로와 따뜻하고 사려 깊은 마음들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시들을 곁에 두고 매순간 나에게 안부를 묻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책상 한 켠에 달력처럼 놓아 두고 빡빡한 일상에 잠시 쉼표를 만들어 주고 싶을 때, 위로와 휴식이 필요할 때 이 예쁜 시화집을 펼쳐보자. 시인이 손수 쓰고 그렸기에 더욱 의미가 있고, 미공개 신작 시도 다수 수록되어 있어 더 특별하다. 





그리운 날은 그림을 그리고/쓸쓸한 날은 음악을 들었다//그리고도 남는 날은/너를 생각해야만 했다.             -'사는 법' 중에서,


시를 읽는 다는 것은 빡빡한 일상에 쉼표를 만들어주는 주는 것과도 같다. 특히나 나태주 시인은 시를 통해서 세상 곳곳에 높여있는 아름다운 것들과 애틋한 사랑에게 안녕을 전하고, 마음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아름다운 것들을 살포시 가져와 시로 써 내려가는 나태주 시인의 시를 좋아한다면, 이번 시화집이 정말 마음에 들 것 같다. 




'쓸쓸해져서야 보이는 풍경이 있고, 버림받은 마음일 때에만 들리는 소리'가 있는 법이다. 우리는 그럴 때 평소에 안 듣던 음악을 찾아 듣고, 시를 읽고, 영화를 본다. 사는 건 매번 만만치 않은 일이고, 사랑 역시 결코 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며,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해서 쉬운 일은 절대 없다. 그래서 우리에겐 시가 필요하다. 


시화집을 하나씩 넘겨 보다가 마음 가는 작품을 찾아도 좋고, 그날의 감정에 맞는 작품을 펼쳐 놓아도 좋겠다. 그러다 보면 달력이지만 넘기고 싶지 않은 날도 생길 것이다. 마음에 드는 시를 몇 주 더 보아도 좋고, 원하는 대로 시를 골라 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시화집의 가장 큰 장점이다. 이제 곧 12월이니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준비하며 가까운 지인들에게 마음을 표현해야 할 경우도 많을 것이다. 소중한 사람들에게 연말선물로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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