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과 나 - 배명훈 연작소설집
배명훈 지음 / 래빗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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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에는 붉은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화성은 지구보다 훨씬 작은 행성이어서 지평선도 부쩍 가까워 보였다. 외딴 행성 위에 살고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하는 장면이었다. 이사이는 화성이 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반지로 만들어서 손에 끼면 얼마나 예쁠까. 물론 그 반지 위의 삶은 고달팠다. 춥고 위험하고 황량하고 쓸쓸했다. 심지어 자유롭지도 않고 낭만적이지도 않았다. 화성은 아직 원시 문명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이사이는 그 행성을 사랑했다. 다른 많은 화성인들과 마찬가지로.                 - '위대한 밥도둑' 중에서, p.98~99


행성을 집어삼킨 커다란 모래 폭풍과 태양계 전체를 휘감는 압도적인 규모의 항성풍이 몰아치던 밤, 오벨리스크가 세워진 작은 마을에서 사람이 죽은 채로 발견된다. 인구 2,400명의 화성 초기 정착 단계에서 일어난 첫 살인이었다. 피해자는 온실 책임자였고, 피의자는 광물학자였다. 화성에서는 알리바이를 꾸미거나 흉기를 은닉할 공간조차 없었으므로, 그는 범행을 부인하지 않았고, 모든 것은 투명하게 모두에게 공유되었다. 온실 책임자는 언젠간 오벨리스크를 타고 지구로 돌아갈 사람이었고, 반대로 광물학자는 오래오래 화성에 남을 사람이었다. 자, 이제 그로 인한 갈등으로 벌어진 살인 사건을 해결 해야했다. 문제는 지구의 규칙이 아니라, 화성에서 살인 사건을 처리하는 방법을 새로 개발해야 한다는 거였다. 지구에서 옮겨 온 사람들은 어떻게 '붉은 행성의 방식'을 만들어 낼까.


이사이는 어려서부터 입이 짧아 많이 먹지도 않았고, 먹고 싶은 것도 별로 없었다. 그래서 서른 살이 되어 화성 이주자 예비 명단에 들어 화성행 우주선에 올랐을 때, 그런 성향이 아주 도움이 되었다. 화성에는 식재료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먹고 싶은 게 아니라 먹을 수 있는 걸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음식이 아니라 식량으로 몇 년을 버텨야 한다는 사실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색을 했지만, 이사이는 어차피 음식에 대한 갈망 자체를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억누를 식욕이 아예 없었다. 음식에 초연한 그 성격 덕에 1년 차에 기지 운영위원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그런데, 지구와 화성이 태양을 사이에 두고 가장 멀리 떨어져 있을 무렵 어느 날, 갑자기 이사이에게 변화가 일어난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낯선 열망에 사로잡힌 것이다. '아, 망했다. 간장게장이 먹고 싶어.'  평생 한 번도 뭔가가 먹고 싶었던 적이 없었는데, 게다가 지구에서도 좋아해본 적 없는 간장게장이라니. 과연 이사이는 식재료를 구하기 어려운 화성에서 간장게장이 먹고 싶다는 열망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바로 그때 가로등이 일제히 꺼졌다. 주변 건물까지 전기가 나가지는 않아서 완전한 어둠 속에 갇히지는 않았지만, 큰 걸음으로 성큼 다가서는 우주의 공포는 목덜미를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어디선가 우주선 문이 철컥 닫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분명 환청이었지만, 기억에서 건져 올린 생생한 환청이었다. 오래된 로켓에 실려 우주로 발사된 것처럼 손발을 버둥거리는 밤. 덜컥 무언가가 내려앉는 소리.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중력이 너무 무겁고 비에 갇힌 신세가 참담했다. 터무니없이 강력한 폭풍 앞에 존재는 더없이 왜소해졌다.             - '행성 탈출 속도' 중에서, p.231


현 시점에서 인류의 화성 진출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스페이스X일 것이다. 물론 지난 4월에 있었던 첫 지구 궤도 시험비행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그들의 목표는 2029년에 로켓을 통해 사람을 화성까지 운송하고, 화성을 식민지화해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6년 뒤, 정말 인류는 화성에 갈 수 있게 될까. 2015년에 개봉했던 영화 <마션>을 볼 때만 하더라도, 화성은 절대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구와 가장 유사한 태양계 내의 행성이긴 하지만, 우주 방사선과 각종 유성우·운석 충돌 등 ‘우주적’ 문제들은 차지하고 화성은 지구처럼 생명체 친화적이지 않고, 대기도 희박한데다 극저온이라 어떻게 보더라도 사람이 살 수 있는 환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인류가 화성에 가는 것이, 그리고 화성에서 살아가는 것이 예정된 미래처럼 느껴진다. 특히나 배명훈 작가의 신작을 읽고 나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외교학을 전공하고 SF소설을 쓰는 배명훈 작가는 지난 2020년부터 2년간 외교부의 의뢰를 받아 화성의 행성정치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그리고는 본격적으로 화성 이주에 관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여섯 편의 연작소설이 완성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여섯 편의 이야기들은 모두 화성 이주가 본격화된 미래를 배경으로 화성에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어떤 세계가 들어설 것인지에 대해 보여주고 있다.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등장할 법한 화성이 아니라, 지구로 오가는 정기 우주선이 다니고, 거주민 정착지의 개발 제한 구역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지며, 정치를 하고, 미래 식자재 도입 계획을 세우는 등 일상의 냄새가 나는 장소로서의 화성을 만날 수 있는 정말 특별한 작품이다. '국내 최초 화성 이주 연작소설'이라는 문구처럼,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화성'에서의 생활을 간접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언젠가 인류가 화성에서 살 수 있게 된다면, 그때 꼭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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