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나무를 찾아서 - 숲속의 우드 와이드 웹
수잔 시마드 지음, 김다히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무가 우리랑 비슷하다고? 그리고 나무가 선생님이라고?" 나는 물어보았다. 진은 어떻게 이런 것들을 알게 된 것일까?

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코스트 세일리시 사람들은 나무들이 공생 본능에 대해서도 가르쳐 준다고 해. 숲 바닥 아래에 나무들의 연대와 강인함을 지켜 주는 진균이 있다고."

얼마나 놀랐는지는 나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하기로 했다. 하지만 내가 진균에 대해 추측했던 바가 이미 자연계와의 인연이 깊은 선주민들 안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보다 더 마법 같은 생일 선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p.118


삼림 생태 학자인 수잔 시마드는 2005년, 다가올 300년 동안의 어머니 나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이는 900킬로미터에 걸친 기후 구배를 포괄하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주의 9개 기후 지역에서 어머니 나무를 모두 절단하는 대신 보전하면 탄소 저장량, 생물 다양성, 삼림 재생력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알아보려는 연구이다. 이 프로젝트는 숲의 구조와 기능을 조사하는데, 관계의 망이 실제 환경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계망이 벌채 방식, 보존하는 어머니 나무 수, 수종이 다양한 방식으로 섞인 조림지 환경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살펴보는 것이다. 현재까지 연구 결과에 따르면 어머니 나무를 많이 보존할수록 숲 바닥의 취약성이 지켜질 뿐만 아니라 지상과 지하의 탄소 저장고도 보호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머니 나무'란 무엇을 말할까.


이 책에 의하면, 나이든 나무는 어떤 묘목이 자신의 친족인지 아닌지 구별할 줄 안다. 그래서 오래된 나무들은 어린 나무들을 양육하고, 음식과 물을 준다. 마치 인간이 아이들을 기르는 것처럼 말이다. 숲속에서 늙은 나무와 젊은 나무가 화학적 신호를 내보내며 서로를 인지하고, 소통하고, 반응한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나무들은 인간의 신경 전달 물질과 똑같은 화학 물질을 사용하고, 이온이 연쇄적으로 진균의 막을 통과해 만들어 내는 신호를 통해서 서로 이어져 있다. 오래된 나무들이 자식 나무들을 엄마처럼 보살피고 있다는 점에서 '어머니 나무'라는 표현이 만들어 진 것이다. 





내게는 나무가 엄마 노릇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오래된 나무들이 어린 나무들을 돌보는 만큼. 맞다, 바로 그거다. 어머니 나무들. 어머니 나무들은 숲을 연결한다. 이 어머니 나무는 주변에 자리한 모종과 묘목의 중심 허브였고, 다양한 진균 종에서 뻗어 나온 갖가지 색과 무게의 실이 나무들을 겹겹이 튼튼하고 복잡한 망으로 연결했다. 나는 연필과 공책을 꺼내 지도를 만들었다. 어머니 나무, 묘목, 모종. 나무들 사이에 선을 그려 보았다. 그림에서 신경 연결망 같은 모양이 떠올랐다. 우리 뇌의 뉴런들처럼 일부 노드가 다른 노드보다 더 많이 연결되어 있었다. 이럴 수가.           p.382~383


어린 시절에 읽었던 <아낌 없이 주는 나무>라는 작품을 참 좋아한다. 어른이 되어서 다시 읽어도 여전히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나무는 사랑하는 소년에게 그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며 행복해하다, 더 이상 줄 게 없을 만큼 세월이 지난 뒤 자신의 나무 밑동울 내어 주며 쉴 수 있게 해준다는 내용이다. 실제 역사를 돌이켜보더라도 나무는 인간과 늘 공존해왔고,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제공해왔다. 인류 문화사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나무와 숲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 왔다. 이번에 수잔 시마드의 <어머니 나무를 찾아서>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인간과 함께 살아가는 나무라는 존재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실 나무는 기적에 가까운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다. 햇빛과 물, 이산화탄소만으로 산소와 영양분을 만들어내고, 이를 뿌리에서 잎사귀까지 자유자재로 이동시킨다. 가시를 돋우고 나무껍질을 벗겨내어 천적에 대항하기도 하고, 뿌리에 공생하는 균을 통해 동료 나무들에게 비상경보를 울리기도 한다. 인간이 월드 와이드 웹이라는 인터넷망을 통해 정보를 주고받듯이 나무들은 뿌리와 진균 등의 균사로 이루어진 네트워크를 탄소를 주고받으며 서로 속삭인다. 저자는 이러한 나무들의 네트워크를 "우드 와이드 웹(The Wood-Wide-Web)"이라고 부른다. 인류가 1989년 월드 와이드 웹을 만들기 수억 년 전부터 나무들은 자신들만의 WWW(우드 와이드 웹)을 만들어 운영해 왔다고 생각하면 새삼 자연의 위대함을 느끼게 된다. 이 책의 저자인 수잔 시마드는 오랜 세월에 걸쳐 자연을 관찰하고, 꾸준한 실험을 통해 나무의 비밀들을 밝혀 왔다. 연구와 결혼 생활을 어렵게 병행해 가다가 유방암과 투병하기도 했던 평범한 한 여성의 삶과 과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더욱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게다가 수잔 시마드의 연구는 제임스 카메론의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영혼의 나무’의 핵심적 모티프가 되었다고 하니,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면 이 책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지구의 또 다른 지적 생명체인 '나무'에 대한 놀라운 비밀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삐에로의 소원해결소
요코제키 다이 지음, 권하영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마디로 제가 범인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래서 중요한 문제라고 먼저 말씀드린 겁니다. 한 지자체의 수장이 용의자라는 결론을 내리려면 저희로서도 아무래도 그만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아무쪼록 수사에 협조해 주셨으면 해서 이렇게 귀한 시간을 뺏는 겁니다."

어젯밤 시시도 시장 외에 아무도 타누마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면, 경찰의 눈이 시장을 향하는 것은 당연하다. 히나코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깨달았다. 유력한 용의자는 시장뿐이다.          p.55


"소원을 하나 말해 보세요." 얼굴에 하얀 분을 칠하고 새빨간 립스틱을 거의 귀까지 이어 그린 삐에로가 사람들에게 말을 건넨다. 소품용 빨간 코에 뽀글뽀글한 가발까지, 어떻게 봐도 삐에로의 모습을 하고 버스 정류장에서, 거리에서, 포장마차에서, 일상의 어디서든 나타나 말을 건네는 모습에 사람들은 당황한다. 슬글슬금 피하거나, 무시하거나, 화를 낼 뿐 누구도 삐에로의 말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지 않는다. 게다가 그는 누구든 자신의 소원을 말하면, 실제로 그들의 고민이나 바라는 바를 도와주고, 현실로 구현시킨다. 대체 삐에로의 정체는 뭘까. 


료는 도쿄에 있는 사립 대학교에 다니는 4학년 학생으로, 6월부터 취업 준비를 해왔지만 아직 한 군데에도 합격하지 못한 상태였다. 도쿄에서 취업하는 데 한계를 느끼고 지난달부터는 고향인 시즈오카현 카부토시로 돌아와 이력서를 내기 시작했지만, 역시나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터미널에 앉아 있는데 삐에로를 만나게 된다. '소원을 하나 말해 보세요.'라며 말을 건넨 삐에로는 자신을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삐에로라고 소개하며 어떤 소원이든 상관없다고 이야기한다. 신종 사기인가 싶어 대충 대답하는 그에게 삐에로는 자신만만하게 밑져야 본전이니 가장 이루고 싶은 소원을 말해보라고 말하고, 료는 그에게 '취직하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삐에로는 료의 이력서를 받고는 한 달 월급이라며 돈을 뽑아 오더니, 그 자리에서 료를 자신의 조수로 고용한다. 이 무슨 황당한 일인가 싶지만, 그렇게 료는 삐에로를 도와 사람들의 고민을 해결하는 일을 하게 된다. 





"타인과의 만남은 중요해. 어쩌면 너도 삐에로 씨를 만난 게 어떤 발단이 될지 몰라."

타인과 만나는 것의 중요성. 전에 삐에로도 비슷한 말을 했다. 생각해보니 요즘은 만남의 연속이었다. 기업 설명회에 가도 만남은 있다. 기업 담당자나 취업 준비생을 만난다. 하지만 삐에로와 어울리며 만난 사람들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인연, 같은 것일까.         p.163


사실 카부토시는 현지 심각한 재정난에 빠진 상태였다. 2년 전 카부토시에서 가장 큰 공장이 다른 나라로 옮기면서 폐쇄되는 바람에 직원 천오백여 명이 직업을 잃었고, 많은 이들이 가족을 데리고 도시를 떠났기 때문이다. 해당 회사의 하청 기업들도 수익이 절반 이하로 떨어지고, 도산한 중소기업은 스무 곳을 넘어섰다. 그 속에서 ‘열린 시정, 만나러 가는 시장’을 슬로건으로 내건 시시도 시장은 자신을 찾아오는 어떤 시민이라도 직접 만나 응대하며 도시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업무 처리 능력은 뛰어났지만 예민한 성격에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편이라, 직원들은 좀처럼 그를 편하게 대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시장과 다툼이 있었던 후원회장이 살해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가 죽기 전 만났던 유일한 사람이 시장이라는 것이 밝혀져 시장이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되는 전대미문의 상황이 만들어 진다. 우연히 삐에로의 조수가 된 료와 정체 불명의 삐에로, 그리고 좌천된 신문 기자가 함께 시장이 결백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나서는데, 그들은 시장의 무죄를 밝혀내고, 이 도시를 지켜낼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재회>, <악연>, 그리고 <루팡의 딸> 시리즈로 국내 독자들을 만나온 요코제키 다이의 신작이다. 에도가와 란포 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요코제키 다이는 주로 범죄 미스터리를 써왔다. 그의 작품들은 불필요한 수식이 많지 않고, 선정적인 사건이 없어도 물 흐르듯 흘러가는 스토리가 묘한 흡입력을 발휘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드라마와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작품들이 많았고 말이다. 이번 작품은 연말에 읽기 딱 좋은 감동 미스터리이다. 평범한 한 사람의 작은 선의가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지, 그 기적 같은 순간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시관을 거닐다 보면 낯설고 먼 땅의 여행자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옆구리를 찌르는 동반자도 없이 혼자서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 도시를 돌아다녀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놀랍도록 몰입하게 되는 경험인지 알 것이다. 가로등, 작은 물웅덩이, 다리, 교회, 1층에 난 창문으로 슬쩍 들여다보이는 광경들에 자신이 녹아서 스며드는 느낌 말이다. 살아 숨 쉬는 듯한 이국적인 디테일은 물론이고 심지어 날개를 퍼덕이는 평범한 비둘기마저 이상하리만치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거리를 걷는다. 어딘가 시적이다. 조심스럽게 미끄러지듯 거리를 누비면 마법은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p.38~39


7만 평의 공간, 300만 점의 작품, 매년 700만 명의 관람객들이 찾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 책의 저자인 패트릭 브링리는 어느 날 다니던 <뉴요커>를 그만두고 이곳에 경비원으로 지원했다. 암으로 투병하던 친형이 스물 여섯이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더 이상 전도유망한 직장이 있는 마천루의 사무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아는 공간 중 가장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렇게 상실감과 슬픔 속에서 도피하듯 미술관의 경비원이 된 그는 매일 다른 전시실에서 온종일 걸작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아름다운 작품들과 그것들을 둘러싼 삶의 이면들을 관찰하며 멈췄던 인생의 걸음을 다시 내딛기 시작한다. 


플립북을 넘기듯 그림들을 스쳐 지나가며 수세기를 넘나드는 경험은 오직 미술관에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스페인에서 프랑스가 되었다가 네덜란드였다가 다시 이탈리아가 되며, 신성과 세속을 오가는 그림 여행을 매일 할 수 있다니 관람객으로 몇 시간 잠깐 구경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이 될 것이다. 미술 애호가들, 관광객들, 뉴요커들은 세상의 축소판과도 같인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터무니없이 짧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바로 그곳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며, 더 이상 짧은 시간에 구애 받을 필요 없이 마음껏 작품들과 함께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뉴욕 평균 크기 아파트 약 3천 개를 합친 면적의 미술관은 너무도 장황하게 펼쳐져 있지만, 매일 다른 전시실에서 수 시간씩 존재하며 저자는 삶과 예술의 의미에 대해서 점차 깨닫게 된다. 





양탄자를 유심히 들여다보다 보니 수만 개의 매듭과 실이 마치 현재와 과거, 현실의 엄청난 밀도를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한때는 이 네 귀퉁이 너머로 펼쳐졌던 세상이 있었다는 걸 떠올린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디테일로 가득한, 모든 찬란하고 평범한 인간 드라마를 위한 무대가... 양탄자를 내려다보자니 초월적인 질문들에 추상적인 답을 구하려는 노력이 바보스럽게 느껴진다. 더 많이 탐구할수록 더 많은 것을 보게 될 테고, 그럴수록 내가 본 것이 얼마나 적은지 깨닫게 될 것이다. 세상은 서로 섞이기를 거부하는 세밀한 부분들로 가득한 것이리라.             p.216~217


예술 작품, 그 중에서도 명화에 대한 책은 정말 다양하게 출간되어 있다. 나 역시 미술사, 그림 읽기, 명화 감상, 미술관 등 여러 주제를 다룬 많은 종류의 책들을 만나왔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미술 전공자가 아닌 저자가 쓴 이 책을 통해 예술을 감상하는 것에 대한 가장 근본적이고도, 깊이 있는 통찰을 만나게 된 것 같다. 모든 그림이 '짠' 하고 커튼을 열어 안을 보여주는 건물 1층의 창문들처럼 보였다는 그는 잔잔하고, 조용하게 작품들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미술관에서는 눈을 감지 않아도 느끼고 싶은 것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위대한 예술은 입을 헤 벌린 채 쳐다보는 것 혹은 눈을 크게 뜨고 뚫어져라 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제는 사람들의 보잘것없는 일상을 숨김없이 표현하려는 시도와 달라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책으로 읽는 것과 예술품을 직접 보는 경험이 얼마나 다른지 다시 한번 느끼고, 예술의 본질적인 특성을 배우게 된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세상에서 빠져나가 온종일 오로지 아름답기만 한 세상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저자가 미술관 곳곳에서 경계를 늦추지 않고 서 있으며, 관람객들을 관찰하고, 그들을 도와주고, 구석구석을 다니며 작품을 바라보면 그 시간들이 손에 잡힐 것처럼 체감이 된다는 것이 신기했다. 날이면 날마다 말없이 뭔가를 지켜보기만 하는 상태를 오래도록 유지한다는 것부터 이 빠른 세상에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그의 선택이 부럽기도 하고,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그랬다. 그렇게 상실감을 극복하고 마침내 세상으로 나아갈 힘을 얻는 이 여정은 일상과 예술의 의미를 발견해간다는 점에서 내밀한 고백이자 예술에 대한 지적인 통찰들을 보여준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아직 가보지 못했더라도, 책을 읽는 내내 마치 가본 것처럼 경험하게 해주는 경이로운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을 통해 미술관이라는 장소가 주는 위로와 감동, 그리고 예술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들을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신세기 사랑 이야기 거장의 클래식 2
찬쉐 지음, 심지연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당연히 알고 있었죠. 여기가 '원앙 보금자리'잖아요. 남녀가 서로 엉겨붙어 있는데 범죄가 안 일어날 리 없죠. 그래서 교도소도 있는 거고요."

"연상 능력이 대단하네요."

"사실 지금 좀 울적해요. 남자를 죽였거든요. 자수해야겠죠? 죽일 때 그 사람이 발버둥 치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아요."

추이란이 진주의 등을 토닥이며 그 남자를 사랑한 거냐고 물었다.  

"그럼요. 난 바보니까. 저 문 좀 열어줄래요?"             p.65


추이란과 웨이보는 1년 전쯤 성매매 업소를 함께 운영하는 온천여관에서 만나 애인 사이가 되었다. 서른다섯의 추이란은 남편이 8년 전에 죽어 과부였고, 마흔여덟의 웨이보는 가정이 있는 남자였다. 어느 날 웨이보는 집에 중요한 일이 있다며 약속을 취소하더니, 그 뒤 두 달이 넘도록 연락도 없고 나타나지도 않았다. 그렇게 헤어진 뒤 자꾸만 웨이보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는 추이란은 그동안 쌓인 휴가를 몰아서 고향을 방문한다. 추이란은 친척 오빠 부부를 찾아가고, 그곳에서 며칠 지내다 죽은 지 벌써 몇 년이나 된 넷째 숙부의 망령을 만난다. 이야기는 추이란의 애인 웨이보, 웨이보의 또 다른 애인이었던 미스 쓰와 접대부 롱쓰샹, 그의 아내인 샤오위안, 추이란에게 치근덕대는 골동품점의 미스터 유, 짝사랑하는 경찰관 샤오허 등으로 이어진다. 


이들 사이에서 사랑은 이리 저리 흘러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떠나 보내고, 빼앗아가는 등 얽혀 있다. 극중 룽쓰샹이 추이란에게 “조신한 여자던데. 우린 그런 말이 별로 달갑지 않더라고. 아무렇게나 막 살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라고 말하자, 추이란이 “나도 아무렇게나 막 살고 싶은데.” 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이 수많은 등장인물들의 사랑관을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쪽에선 사랑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또 다른 쪽에선 영원한 사랑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니냐고 말하는 식으로 지나치게 자유롭고,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사가 전혀 가볍지 않다. 죽은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서 등장해 현실과 환상과의 경계를 넘나들고, 내면을 넘어 심연에 이르는 사유가 세밀하고 감각적이라 묵직한 페이지만큼이나 밀도 높은 작품이었다. 





아쓰는 팔자가 센 여자였다. 어부의 아내도 되지 못했고, 불면증에 걸린 사람처럼 도시의 밤을 배회하는 여자가 되었다. 순간 오한이 들었다. 죽으려고 이러는 걸까? 아니다. 아쓰는 비틀거리면서도 걸음을 내딛었다. 그동안 몇 년씩이나 무언가를 찾아다녔다. 이제 찾은 걸까, 아니면 아직도 찾지 못한 걸가? 아쓰에게 제 웃음소리가 들렸다. 웃음이 나올 법한 상황이 아니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웃음이 멈추질 않았다. 웃음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p.459


꽤 많은 등장인물이 모두 어떤 식으로든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가 서로에게 욕망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세속적으로 느껴진다. 더구나 그들이 스스로의 욕망에 갇혀 있지 않고, 이리 저리 흘러가고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움을 넘어 일종의 방종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험적이고도 환상적인 구조로 짜인 이 작품은 온천을 들락거리는 남녀의 이야기에서 시작하는데, 언뜻 남녀의 욕망을 표면화시켜 보여주는 듯하지만 내면 깊숙한 곳으로 점점 들어가 심연에 도달하는 깊이 있는 전개를 선보이고 있다. 인물들은 모두 상대방의 심연을 불현듯 알아차리고, 집을 가진 사람조차 고향을 찾아 떠돈다. 이들의 이야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계속 이어지고, 어느 순간 작가가 구축한 세계 속에서 완전히 갇혀 버린 듯한 느낌도 드는 그럼 작품이었다. 


이 작품은 매년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되고 있는 찬쉐의 대표작이다. 보르헤스, 칼비노에 견주어지며 자신만의 신화적 세계로 주목받고 있는 작품이다. ‘종잡을 수 없는 전개다’ ‘변화무쌍하다’ ‘수수께끼 같다’는 평을 받곤 하는 찬쉐의 소설을 아직 만나본 적이 없어 어떤 이야기가 그려질 지 너무 궁금했다. 철학적 사유와 난해하면서도 섬세한 묘사, 거침없고 호방하게 뻗어나가는 상상력, 찬쉐의 대체불가능한 스타일, 음란하고 기이한 이야기의 세계, 마술 같은 세계로 빨려드는 환상 스토리 등이 기존 국내에 출간되었던 찬쉐의 작품에 대한 설명들로 그 독특한 매력이 어느 정도 짐작이 되었는데, 실제로 만나보니 왜 찬쉐의 작품에 대해 '현기증 나는 이야기의 세계'라고 표현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체불가능한 스타일로 독보적인 세계를 구현하는 새로운 세기의 사랑 이야기를 만나 보자.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키7 : 반물질의 블루스 미키7
에드워드 애슈턴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익스펜더블이 하는 일이 뭔지는 모두가 안다. 우리는 죽는다. 계속해서 죽는다. 덕분에 당신들이 죽을 필요가 없다. 아마 여러분은 사람들이 그 점을 고맙게 여기리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인간의 두뇌는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본인은 안전하고 건강하게 건물 밖 인도에 서 있으면서 누군가 불길 속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지켜보는 입장이 되면 감사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그럴 때 생기는 건 죄책감이다. 죄책감을 느껴서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 보니 어느 시점에서 사람들은 익스펜더블이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고 여기게 된다.             p.51~52


봉준호 감독의 2024년 SF 기대작 「미키17」의 원작소설로 주목받은 SF 장편소설 <미키 7>의 후속작이 나왔다. 죽더라도 끊임없이 전임자의 기억을 갖고 복제인간으로 되살아나게 되는 미키의 일곱 번째 삶을 소재로 SF의 재미와 철학적 주제를 잘 담아냈던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에서는 궁금증을 자아냈던 니플하임의 토착 생명체인 크리퍼의 실체를 전면에 내세우고, 전작에서 채 마무리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완성한다. 


만약 내가 오늘 죽고 내일 아침부터 다른 사람이 내 삶을 대신 살게 된다면 어떨까. 그 존재는 내가 가졌던 희망, 꿈, 두려움 등 모든 기억을 가지고 있으며, 외모 또한 똑같이 생겼다. 그는 자신이 나라고 생각하고 나의 친구들과 가족들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 정신은 물론 육체까지 완벽하게 복제되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전날부터 계속 존재했던 내가 아니며, 겨우 하루동안 존재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 존재를 나라고 볼 수 있을까? 이 작품은 끊임없이 전 우주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려는 인류가 새로운 행성을 개척하기 위한 꾸린 탐사대에 '익스펜더블'이라는 존재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본질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만들어 준다. 익스펜더블은 가장 위험한 일에 투입되는 존재로, 죽더라도 자신의 예전 기억을 갖고 복제인간으로 되살아난다. 그렇게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익스펜더블에 지원한 반스가 미키 1이 되고, 미키 2가 되고, 미키 7이 되는 것이다. 





살다 보면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온 우주가 작정하고 당신을 엿 먹이는 게 틀림없다고 뼈저리게 절감하게 되는 날.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샤가 나를 쳐다보았다. 호흡기 때문에 표정을 읽을 수는 없지만 '죽일 것 같은' 표정이라는 데에 일주일 치 배급을 걸겠다.

"너희는 폭탄을 안 가지고 있는 거네." 나샤의 목소리는 낮고 단조로웠다.             p.170


전편에서 겨우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났던 미키 7은 은퇴 후 농업부에서 일하며 여자 친구인 나샤와 함께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다른 자신의 복제본을 보게 되는데, 미키 9의 존재에 대해 의심을 하고 있을 무렵 사령관 마샬로부터 호출이 온다. 미키가 2년 전에 숨겨 두었던 반물질 폭탄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는 거였다. 어쩔 수 없이 미키는 반물질을 찾기 위해 니플하임의 토착 생명체인 크리퍼들에게 간다. 인류는 현재 48개의 행성을 점령하고 대략 60광년에 걸친 광활한 우주로 널리 뻗어 나가고 있었지만, 외계 지성과 상호 작용한 역사는 여전히 빈약했다. 그러므로 인류를 위협하는 지적 생명체와 소통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번 작품에서는 크리퍼라는 존재의 실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며 인간에게 적대적인 존재와의 갈등으로 서사에 긴장감을 부여하며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빠르게 만든다. 미키를 끊임없이 압박하는 사령관 마샬과의 반전 결말도 재미를 더해준다. 과연 미키는 사령관의 엄포대로 부활 없이 죽게 될 것인가, 혹은 니플하임의 지적 생명체 크리퍼와의 교섭에 성공해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인가. 


기억을 업로드하고, 몸을 복제하는 방식으로 죽은 뒤에 다시 깨어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기억을 모두 가지고 다시 태어나는 방식이라고 해도, 매번 죽을 때마다 죽음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닐 것 같다. 죽음을 무릅쓰고 위험한 현장에서 일을 해야 하고, 오늘 죽더라도 내일 다시 깨어나 영원히 소멸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 어쩐지 삶 자체가 공허해질 것만 같다. 게다가 다시 깨어날 때마다 숙취에 시달리는 느낌으로 일어나 자신에게 뭔가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 외에 어떻게 죽었는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주변 사람들이 말해주는 걸 믿을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들은 그를 영혼 없는 괴물이거나 영생을 누리는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결코 쉽지 않은 삶이다. 그렇게 여섯 번 죽고, 일곱 번째 생을 살고 있는 미키7이 미키8과 마주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던 첫 번째 이야기와 익스펜더블의 삶에서 벗어난 미키 7의 모험을 그린 두 번째 이야기 모두 굉장히 흥미롭게 읽었다. 게다가 봉준호 감독의 차기작도 너무 기대가 되는데, 로버트 패틴슨, 틸다 스윈튼, 마크 러팔로가 출연을 확정한 것도, 영화에서는 무려 미키 17이라는 점도 궁금증을 더해준다. 영화 <미키17>은 워너브라더스사에 의해 2024년 상반기 중 전 세계 공개될 예정이라고 하니, 영화가 궁금하다면 그 전에 원작을 먼저 만나보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