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경계
야쿠마루 가쿠 지음, 남소현 옮김 / 북플라자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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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 나서 그랬다. 상대는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나보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범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와다의 대답을 듣자 온몸에 열이 확 솟구쳤다.

"아카리 씨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겠지만..."

나보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라면 상대는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죽을 뻔했다니. 게다가 아카리를 구하려다가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범인은 아카리의 몸과 마음에 큰 상처를 입혔을 뿐만 아니라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책감까지 안겨 준 셈이었다.         p.59


휘황찬란한 불빛으로 가득한 거리는 금요일 밤이라 그런지 엄청난 인파로 가득했다. 20대 직장인 아카리는 생일을 맞이해 유명 레스토랑에서 남자 친구 코헤이와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며 약속을 취소 당한 참이다. 아카리는 속상한 마음에 그대로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가까운 케이크 가게에 가 보기로 한다. 마침 신호가 바뀌었고 수많은 인파가 일제히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문득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치고 그렇게 무차별 흉기 난동 사건의 피해자가 되고 만다. 그날 약속이 취소되지 않았다면, 그냥 집에 바로 가기만 했더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저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기분이 나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해치는 범죄가 벌어지는 세상에 살고 있다.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이 끔찍하고 무서워졌다. 그날 이후 아카리의 세상은 색을 잃어 버린다.  


그 사건으로 한 남자가 죽고, 두 여자가 중상을 입게 된다. 아카리는 여러 군데 깊은 상처를 입고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일주일 만에 겨우 깨어난다. 마지막 순간에 범인을 막아선 한 남자 덕분에 아카리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것이다. 아카리를 구한 남자는 “약속은 지켰다고… 전해 줘….”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고 만다. 마지막에 남긴 그 한마디는 누구에게 하는 말이었을까. 이 작품은 묻지마 범죄의 피해자가 생명의 은인이 마지막 순간에 남긴 미스터리를 풀어 가는 과정과 가해자의 배경에 관심을 갖고 취재하는 기자의 시점을 교차로 진행하며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특히나 자식을 낳아놓고 방치하거나 학대하는 부모의 이야기를 개인의 잘잘못을 넘어서 사회적인 문제로 해석하고 있어 인상적이었다. 그들이 한 행동만 보자면 부모라고 불릴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라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사실 우리는 그들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사정도 모르면서 무조건 비난만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을,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사회적인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나는 일면식도 없는 범인한테 공격당해서 크게 다쳤잖아. 아키히로 씨는 목숨을 잃었고. 그런 일이 생기는 걸 보면 세상에 나랑 상관없다고 단언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 않나 싶더라."

"그야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일에 깊이 관여하고 싶지 않아. 아카리 네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으면 좋겠어."

아카리 역시 그런 무서운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p.308~309


사회파 추리의 강자 야쿠마루 가쿠의 신작이다. 매번 묵직한 미스터리를 그려내는 작가답게, 이번 작품에서도 묻지마 범죄를 시작으로 현대 사회의 병폐를 짚어 내고, 사건의 피해자와 그 주변인들이 겪게 되는 것들에 대해 사실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묻지마 범죄는 여전히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다. 우리 중 누구라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사고로 인해 가족을 잃어 버리거나, 살 곳을 잃고 길거리에서 방황하거나, 하루하루 먹고살기도 힘든 상태가 되어 절망할 수도 있다. 이 작품 속에서는 그렇게 힘든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여럿 등장한다. 각자의 사정은 모두 다르지만, 모두 삶이 의미없어지고, 바닥까지 절망한 상태라는 점은 같았다. 하지만 그 속에서 어떻게 대처하느냐는 모두 달랐다.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탓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바꾸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생을 비관하고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누구나 크든 작든 저마다의 불행을 안고 살아간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았더라도, 좋은 부모 밑에서 자랐더라도, 좋은 직업을 가지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더라도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반대로 어린 시절부터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고, 기본적인 교육도 없이 주위와 단절된 환경에서 학대 당하면서 살았다면, 물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범죄를 저질러도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그러한 환경이 다른 인생을 선택할 수 없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간이기를 포기하지는 말아야 한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죄의 경계를 넘지는 말아야 한다. 이 작품은 가해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아무런 이유 없이 범죄를 당한 피해자의 시점에서 각각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죄의 경계'에 대해서 담담하게 질문을 던진다. 현실을 생생하게 담아낸 이 작품을 통해서 현대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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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Special 오타니 쇼헤이 Who? Special
스토리랩 지음, 리버앤드스타 스튜디오 그림, 김양희 감수 / 다산어린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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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움직이는 만화 캐릭터 같은 존재가 바로 오타니 쇼헤이아닐까. 그는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선수', '다른 세계에서 온 피조물' 이라는 수식어가 전혀 과장이 아님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세계 유일의 투타 겸업 메이저리거, 한 시즌에 홈런 44개를 쳐서 리그 홈런왕이 되었고 투수로는 선발 10승을 세워 상징적인 두 자리 승수를 기록한 오타니 쇼헤이. 게다가 웬만한 만화 주인공보다 더 잘생긴 외모에 성실하고, 예의바르고, 험난한 프로스포츠계에서도 인성 좋기로 유명하다. 


지난 WBC를 통해서 국내팬들도 오타니 쇼헤이의 경기를 처음 보았던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일본의 WBC 우승 또한 오타니 쇼헤이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오타니 쇼헤이가 야구를 시작하게 된 어린 시절부터 점차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만화로 보여주고 있다.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떻게 했는지, 위기의 순간을 어떻게 극복하고 이겨냈는지, 메이저 리그에 가게 된 과정과 그곳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성공을 거두기까지의 스토리가 쉽고, 재미있게 펼쳐진다. 


특히나 야구와 관련된 다양한 지식들이 담겨 있어, 아직 야구를 잘 모르는 어린이들도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야구를 이해하게 될 것 같다. 야구의 역사, 기본적인 야구 용어, 야구 선수에게 필요한 능력, 그리고 일본 프로 야구 NPB 리그와 메이저 리그 MLB에 관한 정보들이 알차게 담겨 있다. 




오타니 쇼헤이하면 또 유명한 것이 바로 만다라트 계획표가 아닐까 싶다. 만다라트 계획표는 일본의 경영 컨설턴트인 마쓰무라 야스오가 개발하고 디자이너 이마이즈미 히로아키가 발전시킨 사고 기법이다. 표의 중앙에 핵심 목표를 적고, 그 주변에 세부적인 목표를 적어, 활짝 핀 연꽃 모양처럼 아이디어가 뻗어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만다라트(mandalart)는 '목표를 달성하다(manda+la)'와 '기술(art)'을 결합한 단어로, 목표를 달성하는 기술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오타니는 고교 시절에 작성한 만다라트 계획표의 많은 것들을 실제로 이뤄 냈다. 


이 책을 구매하면 꿈을 이루어 주는 만다라트 계획표를 특별 부록으로 받을 수 있다. 오타니가 고등학생 시절 세운 뚜렷한 목표와 계획을 꾸준히 실천한 것처럼 직접 자신의 목표와 미래 계획에 대해 만다라트 계획표를 채워 보면 좋을 것 같다. 실제로 오타니가 세웠던 만다라트 계획표도 책에 수록되어 있으니 살펴보면서 참고해 보자. 




오타니의 성공 비결 중 하나는 '한결같음'이다. 이름이 알려지고, 돈이 많아졌다고 해서 뭔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운동장에서는 열심히 달리고, 밖에서는 바르고 선한 사람인 채로 매일을 보내고 있으니 말이다. 그는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은 그걸 해 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무슨 일이든 그렇겠지만, 중요한 것은 과정, 그리고 그것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재능은 단 하나뿐이라고,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할 수 있는 재능이라고 말한다. 오타니가 말하는 그 '재능'은 무엇인가를 좋아한다면 누구나 자신으로부터 찾을 수 있는 재능일 것이다. 이 책을 읽는 어린이들에게도 각자 자신만의 그 '재능'이 있다는 것이다. 


야구를 좋아하는 어린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누구나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이 책을 읽고 오타니 같은 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마음 먹는 어린이가 있다면 더 좋을 것 같고 말이다. 오타니가 걸어간 길을 이 책과 함께 따라 가보면서, 자신만의 길을 찾는 시간을 가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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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퓨테이션: 명예 2
세라 본 지음, 신솔잎 옮김 / 미디어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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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불가피한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대가, 하원의원으로 산다는 것의 이면. 염산 테러에 대비해 책상에 물을 챙겨놓는 것. 지역구민들을 만나기 전에 칼을 소지한 사람은 없는지 소지품 검사를 하는 것, 손이 닿는 범위 내에 항상 비상 버튼을 두는 것, 현관에 추가 잠금장치가 필요한 것, 자전거로 퇴근할 때면 내 몸에 퍼지는 두려움을 진정시켜야 하는 것, 미행당할까 봐 늘 겁에 질려 있는 것... 이 모든 것 중에 정상적인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p.108


전편에서 엠마는 자신의 지하 주방에 한 남성이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남성은 의식이 없었고, 가파른 계단에서 추락한 것으로 보였다. 머리에 치명상을 입은 그 남성은 저널리스트인 마이크 스톡스로 평소 엠마와 잘 아는 사이였고, 신뢰하는 동료이기도 했다. 사실 마이크는 '우리 집에서 만나요. 4시. 당신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가 있어요.'라는 메시지를 엠마로부터 받았는데, 엠마는 전혀 알지 못하는 내용의 문자였다. 누군가 그녀인 척 가장해서 문자를 보낸 것이 분명한데, 상황은 점점 엠마에게 불리해져가고 있었고, 결국 그녀는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심판대 위에 오르게 된다. 


그렇게 엠마가 쌓아온 명예는 산산조각 나버린다. 찰나의 부주의로, 누가 슬쩍 한번 쿡 찌른 것으로. 엠마는 일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인기와 성공을 모두 거머쥔 여자였고, 늘 청중의 박스갈채와 관심을 받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이제 명예가 산산조각 나는 게 어떤 것인지 배우는 중이다. 여러 신문에서 재판 시작 소식을 대문짝만하게 알렸고, 헤드라인들은 잔인했다. '하원의원이 연인을 밀어 사망에 이르게 하다, 하원의원이 999에 신고 못 해, 하원의원이 연인의 죽음을 두고 거짓 진술.' 등등 자극적인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전직 교사이자 4년차 하원의원, 남편과 이혼 후 10대 딸을 홀로 키우고 있는 워킹맘으로 일주일에 6일을 열여섯 시간씩 일했던 엠마는 대체 뭘 잘못한 걸까. 그녀는 명예라는 것이 가장 위태로운 무언가라는 것, 오랜 시간 쌓아도 단 몇 초 만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는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자신과 명예를 절실하게 지키고 싶었다. 이 작품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무엇까지 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엠마 웹스터가 거짓말을 한 이유는, 조금이라도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 여성들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기 때문이었고, 이미 세간의 주목을 받는 여성이 살인 혐의를 받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극심한 공황 상태였던 피고인이, 일어난 일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고 해서 살인 혐의에 대한 유죄 판견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p.235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내 놓을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위험에 처했을 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까지 할 수 있을까. 무슨 일까지 해낼 수 있을까. 누구나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한 두가지쯤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이고, 사랑이고, 재산과 건강, 정의, 도덕, 행복일 것이고, 우리의 주인공 엠마에게는 그것이 '명예'이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이 드라마는 술술 잘 읽히지만,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하기 전까지 절대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 반전보다는 과정이 더 중요한 작품이지만, 후반부의 반전 또한 백미이니 말이다.



넷플릭스 TV 시리즈 전 세계 1위 <아나토미 오브 스캔들>로 유명한 세라 본은 세라 본은 11년간 정치부에서 경력을 쌓은 베테랑 기자 출신으로 현장에서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권력과 특권 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써 왔다. 이번 신작은 실제로 영국 노동당 하원의원이 온, 오프라인에서 많은 위협을 당하고 있어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했다고 밝힌 기사에서 시작되었다. 수많은 협박과 극단적 혐오 표현에 노출된 삶을 사는 그들은 집 현관에 잠금장치를 여러 개 설치하고, 테러에 대비한 패닉룸(대피소)를 마련하며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특히나 그녀가 저널리스트로 일해온 경험이 권력의 불균형과 공인의 자격, 대중과의 역학 관계 등에 대해 현실적이고,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도록 바탕이 되어 주었다. 다양한 인물 캐릭터들은 생생하고 입체적이고, 속도감있고 다채로운 스토리 또한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 주는 작품이다. 법정 미스터리로도, 정치 드라마로도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이니 놓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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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퓨테이션: 명예 1
세라 본 지음, 신솔잎 옮김 / 미디어창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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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원의원의 딸로 사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지속적인 스트레스 외에 - 염산과 총, 칼이 엄마를 공격하는 장면이 떠오르면 혼자서 계속 내기를 하며 성공하면 엄마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 사람들이 그녀가 부유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힘들었다. 상류층. 거만한 아이. 엄밀히 말하면, 초등학교 때 알던 사람들이 그녀를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부모님을 두면 이런 오해를 산다.            p.87


엠마 웹스터는 요즘 가장 핫한 젊은 여성 정치인이다. 하지만 너무 열심히 일만 하느라 결혼 생활은 파탄 났고, 사랑하는 딸과의 관계도 서먹해졌고, 커리어를 쌓느라 자기 삶이란 없다. 게다가 최근 한 언론 인터뷰의 사진은 노동당 하원의원이라기보다 오스카 수상 후보에 오른 배우처럼 보일 정도로 아름답고, 성적 매력과 권력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도록 나왔고, 악플러들을은 그걸 트집고 온라인에서는 온갖 성희롱 댓글이 달린다. 페미니스트 캠페인을 벌이고,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들에 대해 발언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고 있지만, 매일 같이 협박 편지를 받고, 스토킹에 시달리고 있다.


엠마의 딸인 플로라는 엄마의 트위터 피드에서 본 공격들에 사로 잡혀 새벽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고, 집으로 도착한 협박 편지에 불안에 떨며, 매일 같이 엄마가 폭발물에 다치거나, 흉기에 찔리거나, 총에 맞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는 너무 바쁘고, 일에 지나치게 열정적이라 여유가 없었고, 딸의 불안한 마음까지는 헤아리지 못했다. 엄마는 자주 뉴스에 등장했고, 그런 하원의원의 달로 사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빌미로 플로라를 괴롭히는 몇몇 친구들과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이야기는 엠마와 플로라, 그리고 동료 기자인 마이크, 전 남편의 아내인 캐럴라인의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그러던 어느 날, 엠마의 집에서 시체가 발견되고, 모든 것이 잘못되기 시작한다.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 하나로 정치인으로서의 명예를 인생 1순위로 삼고 살았던 엠마는 과연 그 명예를 끝까지 지킬 수 있을까. 





하지만 나는 다른 선택을 했다. 도움을 요청하지 않고 어떻게든 혼자 해보려 했다. 그럼 네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이 도발적인 말은 나 혼자 대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저기요." 분명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대담한 척 말했다. "저기요, 누구 있어요?" 발소리가 들리는 걸까. 단단한 밑창이 바닥을 디디는 소리가, 삐걱거리는 구두 소리가 났다. 그때 일이 벌어졌다. 모든 것이 잘못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p.220~221


세라 본은 넷플릭스 TV 시리즈 전 세계 1위 <아나토미 오브 스캔들> 원작자이다. 이번 신작 역시 넷플릭스 제작팀에 의해 영상화가 확정되었다고 한다. 세라 본은 11년간 정치부에서 경력을 쌓은 베테랑 기자 출신으로 현장에서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권력과 특권 등을 소재로 한 작품들을 써 왔다. 이번 신작은 실제로 영국 노동당 하원의원이 온, 오프라인에서 많은 위협을 당하고 있어 그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했다고 밝힌 기사에서 시작되었다. 수많은 협박과 극단적 혐오 표현에 노출된 삶을 사는 그들은 집 현관에 잠금장치를 여러 개 설치하고, 테러에 대비한 패닉룸(대피소)를 마련하며 현실을 살아가고 있다. 특히나 그녀가 저널리스트로 일해온 경험이 권력의 불균형과 공인의 자격, 대중과의 역학 관계 등에 대해 현실적이고,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가 한 두가지쯤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가족이고, 사랑이고, 재산과 건강, 정의, 도덕, 행복일 것이고, 우리의 주인공 엠마에게는 그것이 '명예'이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내 놓을 수 없는 단 한 가지가 위험에 처했을 때, 그것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까지 할 수 있을까. 무슨 일까지 해낼 수 있을까. 법정 미스터리로도, 정치 드라마로도 대단히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다양한 인물 캐릭터들은 생생하고 입체적이고, 속도감있고 다채로운 스토리 또한 페이지 넘기는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 준다. <아나토미 오브 스캔들>의 명성을 이을 작품이 궁금하다면, 사실적이고 시의성있는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적극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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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환자, 로젠한 실험 미스터리 -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무너뜨린 정신의학사의 위대한 진실
수재나 캐헐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북하우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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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과학자들은 우주를 탐사하고, 심장을 이식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달팽이관을 이식하여 청력을 선사했다. 의사들은 호지킨 림프종 환자에게 다른 여성의 골수를 이식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고했다. 유방촬영술이 개발되어 비침습적 방법으로 몸 안을 들여다보며 유방암을 감지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우리는 세계의 커다란 수수께끼들을 하나씩 풀어갔다. 우주, 암, 불임을 정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래의 질문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절한 대답을 하지 못했다. 정신질환이란 무엇일까? 혹은 더 적절하게 묻자면, 무엇이 아닐까?           p.196


이 책의 저자인 수재나 캐헐런은 <뉴욕 포스트>의 촉망받는 기자였던 스물네 살 때 정신질환 오진을 경험한다. 병명은 '자가면역 뇌염'이었지만 의사들은 차트에 '조현병'이라고 적었고, 그로 인해 잘못된 정신질환 치료를 받고 결국 정신병원에 강제 수감이 결정된다. 당시 한 의사의 끈질긴 노력으로 정확한 병명을 밝혀낼 수 있었지만, 신체질환을 정신질환이라고 진단한 오진은 그녀의 삶을 완전히 뒤흔들고 만다. 그로 인해 저자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고, '로젠한 실험'이라는 흥미로운 주제와 마주하게 된다. 


정신의학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동시에 가장 큰 논란거리가 된 이 실험은 스탠퍼드 대학의 심리학자가 자신을 포함해 정신질환 병력이 없는 여덟 명의 정상인들을 미국 각지의 정신병원으로 보내 의사들이 가짜 환자들을 가려낼 수 있는지 테스트한 것이다. 충격적인 결과는 진료받은 병원 모두 그들을 정신병자로 오진했다는 것이고, 그들은 평균 20여 일 동안 정신병동에 수감 당해 온갖 비윤리적인 행태와 부당한 대우에 노출되었고, 꼼짝없이 잘못된 정신질환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 실험은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정신의학계의 진단체계와 치료법에 대한 근본적인 논쟁이 시작된다. 과연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에 대해서 말이다. 





신체냐 정신이냐, 뇌냐 마음이냐? 난감한 이 문제가 우리를 영원히 괴롭히고 있다. 이것은 누군가의 생사가 걸린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골대가 옮겨지고 정의가 바뀔 수는 있겠지만 결국에는 같은 이야기다. 우리는 어떤 질병이 다른 질병보다 더 우리의 공감을 살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 이것이 바뀌어야 한다. 변화는 그저 어딘가에 침대를 더 늘리고 사람들을 나 몰라라 하는 것으로 되지 않는다. 한 사람의 삶(과거와 현재)의 토대를 이루는 것을, 그리고 환경이 병과 건강에 관여하는 수많은 방식들을 더 넓은 시야로 보아야 한다.             p.417


정신병원에서 제정신으로 지낸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로젠한을 포함해 총 여덟 명(대학원생, 심리학자 셋, 의사 둘, 화가, 주부로 남자 다섯, 여자 셋)은 동부 서부 해안의 다섯 개 주 열두 곳의 시설에 정체를 숨기고 들어간다. 그들은 의사에게 환청이 들린다고 말했고, 의사들은 이런 증상만을 근거로 모든 '가짜 환자'들에게 심각한 정신질환 진단을 내렸다. 이 중 한 명만 조울증이었고, 나머지는 전부 조현병이었다. 입원 기간은 7일에서 52일로 다양했고, 입원해 있는 동안 총 2100개의 알약(독한 항정신제)이 건강한 사람들에게 처방되었다. 물론 가짜 환자들은 알약을 삼키지 않고 숨겼다가 버리도록 훈련받았지만 말이다. 이쯤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정신병원 시설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당했을지 궁금해진다. 멀쩡한 사람이 정신이상자로 몰린 경우가 얼마나 많았을까. 그저 정상적인 행동을 해도 정신질환의 꼬리표를 달면 비정상적인 것으로 잘못 해석되니 말이다. 


수재나 캐헐런은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역사적 사실 외에 궁금증들을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정신의학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오진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실험 후 가짜 환자들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데이비드 로젠한은 이 실험을 왜 계획했으며, 이는 위대한 사건인가 추악한 사기인가? 이 과정은 웬만한 추리 소설 속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로젠한의 유품에서 시작해, 실험에 참가했던 이들 중에 생존한 인물들과 남아 있는 소수의 자료들을 분석하고, 로젠한이 실험을 계획한 동기와 실험에 참가했던 가짜 환자들의 정체를 드러낸다. 이 책은 이 역사적 실험의 이면을 추적해 정신의학의 맨 얼굴을 전면에 드러내어 보여준다. 우울증, 공황장애, 성인 ADHD, 조현병 등 정신질환이 만연한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은 책이다. 이 책을 통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된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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