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클럽
레오 담로슈 지음, 장진영 옮김 / 아이템하우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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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는 대화 속에서 빛을 발하는 지성이 존중받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존슨, 레이놀즈와 그들의 친구들은 선술집에 모여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때론 논쟁도 벌였고 서로에게서 새로운 무언가를 배워가기도 했다. 처음부터 그들은 정치, 법, 의학, 문화, 예술처럼 중요한 분야에 대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모임에 나오기를 바랐다. 이후에 이 모임은 사람들에게 '문예 클럽'으로 알려졌지만, 그들에게는 '선술집에서 좋은 벗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클럽'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모임을 그냥 '더 클럽'이라 불렀다.    p.21

 

1764년, 당대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인 조슈아 레이놀즈는 비평가이자 걸출한 시인이었던 새뮤얼 존슨의 우울한 심산을 해소시켜주기 위해 작은 모임을 만든다. 런던의 평범한 선술집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모임에서 밤늦도록 먹고 마시고 웃고 떠들면서 논쟁을 벌일 준비가 된 '좋은 벗'만이 이 클럽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 클럽의 멤버들은 모두 당대의 아이콘이었을 뿐 아니라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었다.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 전기 작가 제임스 보즈웰,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 등 그야말로 18세기 후반 문화의 '어벤져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들이 모였다.

 

이 책은 당시 영국을 대표하는 정치, 경제, 역사, 예술, 문학 등 다방면의 엘리트들이 모여 서로 관계를 맺고, 논쟁과 경쟁, 아이디어와 포부 등을 교류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클럽 회원들이 나눈 수많은 대화를 보즈웰이 기록으로 남겼고, 하버드 대학 역사학 교수인 레오 담로슈는 이를 통해 18세기 후반의 영국을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야기로 들려준다.

 

 

보즈웰이 진정 원했던 것은 무엇일까? 시시콜콜한 질문에 대한 문자 그대로의 대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단지 대화를 재미있는 방향으로 이끌고 싶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이것이 그가 진정 원했던 거였다... "호기심은 그 누구보다 보즈웰을 아주 먼 곳으로 이끌었다. 그는 자신이 던진 질문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단지 그 질문을 받은 이가 무슨 말을 할지 혹은 무슨 행동을 할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었다."     p.452

 

50대 초반의 새뮤얼 존슨과 20대 초반의 제임스 보즈웰은 성격도, 외형적인 모습도 너무 다른 사람들이었지만, 특별한 우정을 나눈다. 그들은 더 클럽이 만들어지기 몇 달 전에 만났지만, 곧 서로에게 가장 믿고 의지하는 친구가 되었다. 제임스 보즈웰은 자신의 일생을 꼼꼼하게 기록했고, 그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존슨전>을 발표했다. 이 책에는 더 클럽에서 존슨과 그의 친구들이 나눴던 대화가 많이 담겨 있는데, 그 덕분에 우리가 이백 년이나 지난 뒤에 당시의 클럽 회원들이 밤늦도록 나누던 대화들을 만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반적으로 새뮤얼 존슨과 제임스 보즈웰에 대한 이야기 많아서 그의 '전기'처럼 읽히기도 하지만, 사실 이 책이 다루고 있는 것은 더 폭이 넓다. 그가 살았던 당대의 시대상, 그리고 그들과 함께 더 클럽의 회원들이었던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모두 담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의 우정과 심오한 토론과 그 시대에 쓰인 위대한 작품과 이론, 정책들이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매우 흥미로웠다. 특히나 모든 주요인물의 초상화 및 장소와 사건들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꽤 많이 수록되어 있어 더욱 생생하게 읽을 수 있었다. 덕분에 사람들로 북적이고 소란스러우며 모순되고 폭력적인 18세기 런던의 풍경을 체험할 수 있다. 영국의 사상과 문학에 대해 관심이 있다면, 18세기 영국의 토대를 완성한 쟁쟁한 인물들의 비밀 모임이 궁금하다면 이 책을 만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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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자매
카렌 디온느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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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곰 인형을 가슴에 꼭 안고 인형의 털에 얼굴을 묻었다. 곰 인형이 마치 나를 잡아 주는 닻인 것처럼, 생명줄인 것처럼, 숨조차 쉴 수 없는 실패와 절망이라는 망망대해 속으로 빠져들지 않게 해 주는 유일한 수단인 것처럼 인형에 간절히 매달렸다. 내가 희생해 왔던 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니. 내가 믿었던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었다니.     p.40

 

열한 살 소녀 레이첼은 총기실에서 라이플을 만지다가 놀라서 총을 내려놓으라는 어머니의 외침에 시키는대로 내려놓는다. 그리고 커다랗게 탕 소리가 들리고 어머니가 쓰러진다. 아버지가 와서 비명을 지르고 충격과 공포가 어린 눈으로 레이첼을 쳐다본다. 그리고 자신에게 라이플을 겨눈다. 탕 소리가 또 난다. 여기까지가 레이첼의 기억이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부모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15년 동안 담고 살아 왔다. 죄책감으로 고립을 택했고, 악몽에 시달렸으며, 사회와 단절된 채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아주 우연한 계기로 그 사건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레이첼은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사 보고서에 따르면 그녀는 총을 쏜 적조차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레이첼은 부모의 사고 이후 실종되었다가 2주 만에 사람들에 발견되었고, 사고부터의 기억을 전혀 하지 못했었다. 다만 자신의 기억 혹은 환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는 모습을 끊임없이 보았고, 그 끔찍한 일을 품고 살아 왔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환상과 수사 보고서 사이에 생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진실을 찾기 위해, 그 곳으로 향한다. 미시간주 어퍼 반도의 외딴 숲속에 있던 그들의 집,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녀의 부모가 살해된 사건이 일어난 그 곳으로 말이다.

 

 

사이코패스라니. 그 끔찍한 단어를 듣고 나는 눈을 감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나도 바보는 아니다. 나 역시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다이애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보았고, 이게 결국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결론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메리트 박사의 전문가적이고 객관적인 저 입술에서 그 말이 들려오자 그만 정곡을 찔려 버리고 말았다. 내 딸이 사이코패스일 리가 없어. 그럴 리 없다고.      p.138

 

이야기는 현재 레이첼의 시점과 과거 그녀의 엄마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레이첼의 엄마 제니에게는 다이애나라는 딸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여덟 살이었던 다이애나는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통제할 수 없는 분노와 충동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 부모가 통제하기 어려운 아이였다. 게다가 자기보다 작고 약한 생물에게 품는 공감능력과 호의가 없었고, 거짓말도 잘하고, 잔인한 행동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자신의 아이가 사이코패스라는 걸 옆에서 보면서 깨닫게 되는 부모의 마음이란 어떨까. 제니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 때문에 벌을 받는 기분을 매순간 느끼며, 그럼에도 아이를 사랑하려고, 아무도 아이를 해치지 못하고, 아이가 아무도 해치지 못하게 하려고 애쓴다.

 

한편 저지르지 않은 범죄 때문에 15년 동안 스스로를 정신병원에 감금하고 있었던 레이첼은 지난 세월이 억울하다. 대체 왜 언니 다이애나와 샬럿 이모는 그 사실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아홉 살 차이가 나는 다이애나와 샬럿은 외모도, 성격도 너무 다른 자매였다. 다애아나가 큰 키에 금발, 푸른 눈의 모델처럼 아름다운 미인이었다면, 샬럿은 갈색머리에 갈색 눈을 지닌, 눈에 잘 띄지 않는 평범한 외모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다른 자매였지만 야생 한 복판에 있던 외딴 집에서 서로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기에 그들은 자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어린 시절은 레이첼의 시점으로, 엄마 제니의 시점으로 다시 회상되면서 독자들을 경악시킨다. 당시에는 어려서 몰랐지만 사이코패스 언니가 어린 동생을 어떻게 대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경험을 하며 자라왔는지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사이코패스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야기들은 무섭기도 했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카렌 디온느는 3년 전에 <마쉬왕의 딸>이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기억이 난다. 탈옥한 아버지를 쫓는 딸의 여정을 매혹적으로 그려냈었는데, 새로운 여성 영웅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 역시 사이코패스와 가족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굉장히 가독성이 뛰어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특히나 범죄를 저지르는 성인 사이코패스에 비해서, 스스로 범죄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사이코패스라는 점때문에 벌어지는 상황들은 소름끼치게 오싹하고, 무시무시했다. 누구나 한번 읽기 시작하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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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08-23 1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토리 자체가 매우 강렬 충격적이네요
이런 이야기 자체만으로도 다양한 간접경험을 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장래희망은 이기적인 년 - 날카로운 직감과 영리한 태도로 험난한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
캐런 킬거리프.조지아 허드스타크 지음, 오일문 옮김 / 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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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건 분명히 해두죠. '망할 놈의 예의 따위' 정신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느닷없이 "꺼져!"라고 외치라는 게 아니에요. 타인이 내 영역을 침범할 때 쓸 수 있는 한 가지 전략이에요. 잘못은 그 사람이 먼저 했죠. 이 구역의 멍청이는 그놈이에요. 우리는 그냥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응하는 거고요. 멍청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그들은 상대가 두려워하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자만할 거예요. 내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자고요... 그놈이 성질을 내면서 "나쁜 년!"이라고 외쳐도 우리는 나쁜 년이 아니에요. 우리가 옳으니까요.     p.67~68

 

이 책의 저자인 캐런 킬거리프와 조지아 허드스타크는 전 세계 2천만 명의 구독자를 거느린 화제의 팟캐스트 〈My Favorite Murder〉의 진행자이다. 범죄와 코미디를 주제로 한 이 팟캐스트로 두 사람은 미국 여성들이 믿고 따르는 멘토이자 '센 언니'가 되었다. 캐런은 코미디 작가였고, 조지아는 텔레비전 요리 프로그램의 진행자였다. 그러다 우연히 범죄 사건을 주제로 한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그것이 팟캐스트의 시작이 된다.

 

이들의 이야기는 한 마디로 거침없고, 직설적이면서도 사이다 같은 통쾌함이 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라든가, '망할 놈의 예의 따위', 내지는 '내가 막 살아봐서 아는데', '지랄을 해야 한다'는 식이다. 예의에 대한 사회적인 강박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조지아의 이야기, 캐런의 이야기로 각각 자신의 경험담과 솔직한 고백으로 이어진다. 각각의 이야기 뒤에는 비하인드 스토리라고 해서 같은 주제로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마치 팟캐스트를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이들과 이야기 나누는 듯한 기분을 안겨 준다. 특히나 예의와 친절의 차이에 대한 그들의 이야기가 인상적이었고, 공감도 되었다. 예의는 문화의 산물일 뿐이지만, 친절은 타인에 대한 마음이나 호의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예의는 상상 속 커튼에 지나지 않지만, 친절은 식탁에 차린 집밥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이런 내 말에 그 멘토는 내 뺨을 한 대 후려치려는 듯한 반응을 보였어요. 그리고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진리를 말해 주었죠. "동기 같은 건 필요 없어요. 그 일들을 그냥 해요."
아하! 그래서 난 꾸물거리는 몸을 이끌고 스피닝 수업에 가서 '그냥' 동작을 따라 했어요. 모든 동작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그냥 했죠'. 사실 지금도 매니큐어나 칠하면서 오디오북이나 듣고 싶은데 마감이란 게 있으니까요.... 핵심은 이거예요. 모든 여건이 완벽하게 준비되기를 기다리지 말자.       p.176~177

 

이 책은 파란만장한 과거에 대해 얘기하는 걸 창피해하지 말라고 한다. 굴욕적인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자중할 수 있게 되고, 수치심을 몰아내면 카타르시스가 찾아올 거라고. 어리석었던 과거에서 뭔가를 배울 수 있다고 말이다. 실제 이 책에서 두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섭식 장애, 불안 장애, 우울증, 마약 중독, 알코올 중독, 사이비 종교 등 극단적인 경험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거듭된 실패와 불행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꾸려온 두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라 그런지, 뻔한 위로나 진부한 카운슬링이 아니었다.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다정하고 유쾌했다.

 

무엇보다 어릴 적부터 ‘얌전히, 착하게, 예의 바르게’ 행동하기를 강요 받아 은연중에 자신의 욕구나 안전은 뒷전으로 미뤄왔을 여자들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를 주고, 희망을 주는 글들이라 좋았다. 그리고 범죄의 피해자, 희생자가 된 여자들이 사회적으로 '피해자다움'이라는 편견으로 비난 받는 것에 대해서도 속 시원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누군가 성폭행을 당한다면 피해자가 부주의했거나 노출이 심한 옷을 입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빌어먹을 범죄자가 그 사람을 선택한 것이지. 강간, 성희롱, 폭력 등 여성에게 너무나 나쁜 일이 벌어져도 가해자가 온데간데없는 경우에 분노한 적이 있다면, 이 책을 읽으면서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는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 세상을 진짜 살아본 언니들의 카운슬링을 만나 보자. 당신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망할 놈의 예의 따위' 정신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무기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원치 않는 힘겨운 상황이나 불합리한 상황에서 당당하고 용기 있게 맞설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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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비웃는 숙녀 비웃는 숙녀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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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가시의 지적은 타당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철렁했다.
순간 아소는 들판에 피는 꽃을 떠올렸다. 꽃은 지고 없어도 씨를 날리고 또 다른 땅에 자신과 같은 꽃을 피운다. 가모우 미치루도 그처럼 사악한 씨앗을 남겼고, 그것이 노노미야 쿄코라는 독을 품은 꽃을 피운 것은 아닐까....
아소는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지나친 생각이야.    p.127

 

나카야마 시치리의 <비웃는 숙녀> 그 속편이다. 이 시리즈는 법의학, 음악, 코지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선보였던 그가 처음으로 쓴 이야미스 소설이다. 이야미스란 인간의 어두운 심리를 주요 소재로 삼는 일본 추리소설의 한 장르로 보통 작품을 읽고 나면 불쾌해지거나, 기분이 찝찝해지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리즈에는 타고난 미모와 훌륭한 언변으로 사람들의 욕망과 심리를 조종하는 역대급 악녀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악녀가 등장하는 일본 미스터리하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과 '환야'가 먼저 떠오른다. 주위의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이용하는 한 여자와,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지켜주는 한 남자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미스터리였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해 각종 비즈니스를 성공시키고 승승장구해가면서, 자신의 과거를 캐려는 사람들에게는 가차없이 응징하고, 짓밟으면서 욕망에 충실한 여자. 세상물정에 밝고, 아름다움이 권력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또 이용할 수 있는 그녀는 어떻게 보면 무서운 팜므 파탈이지만, 그만큼 매혹적이기도 하다. 그에 비해 나카야마 시치리가 그려내고 있는 악녀 캐릭터는 다소 분위기가 다르다. 분명한 목적과 동기가 있는 악행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악행은 분명히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그 속을 짐작할 수 없기에, 주인공 악녀의 동기나 목적이 보여지지 않아서 더 오싹하고, 더 무섭다.

 

 

상대에 맞춰 가장 적합한 계획을 세운다. 그 선택이야말로 쿄코의 악마 같은 모습이었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속기 때문에 자존심 강한 인간일수록 괴로워하게 된다. 돈뿐만 아니라 자신감과 자긍심까지 잃어서 그 타격은 두 배 세 배가 된다.
"스스로를 높게 평가하는 인간만큼 속이기 쉬운 부류도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아무 근거 없이 높게 평가하니, 자신의 무능함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절망감은 더욱 큽니다."
높이 날수록 추락할 때 충격이 크다는 뜻인가. 그 또한 악마 같은 발상이다.     p.285

 

비영리법인 ‘여성 사회활동 추진 협회’의 사무국장 후지사와 유미는 기부금과 회비가 줄어들어 수익이 나지 않자, 협회에 유보해 둔 자금을 투자로 불리기로 한다. 미모의 투자 자문사 노노미야 쿄코를 소개 받아 그녀의 권유로 운용자금 1억 2백만 엔을 어렵게 구하지만 교코는 돈을 받자마자 잠적해 버린다. 사이비 종교단체인 쇼도관 부관장 이노 덴젠은 신자 수가 늘지 않아 걱정이다. 그는 프리랜서 자산운용사라는 쿄코를 소개 받아 그녀의 제안대로 신자들을 상대로 출판 사업을 해보기로 한다. 자신의 맨션까지 담보로 삼아 가며 자금을 마련하지만, 정작 출간된 원고는 교단을 폭로하는 내용이었고, 교단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살해되고 만다. 그리고 국회의원 야나이 고이치로의 후원회 회장이자 부동산 업자인 구라하시 효에, 야나이 고이치로의 비서 사키타 아야카까지.. 모두 교코의 감언이설에 속아 사기를 당하고,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게다가 이상한 것은 각각의 사기 행각에서 쿄코 자신은 아무런 사리사욕을 챙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운용자금 1억 2백만 엔을 그냥 외환거래로 날려 버리고, 교단을 폭로하는 책을 출간했을 때에도 인쇄비와 제본비로 1억 천만 엔은 인쇄소 계좌로 들어갔다. 수고를 들여 일을 진행했으나, 전혀 물질적인 이익이 없었다는 거다. 그렇다면 교코는 대체 왜 생면 부지의 이 사람들을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일까. 쿄코는 돈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피해자들만 궁지에 몰아넣었으며, 게다가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머리를 짜내는 목적이 오로지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기 위해서 뿐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비인간적이고, 비정하고 악랄하지 않은가. 자, 전작에 이어 되살아난 희대의 악녀를 만나 보자. 네 사람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과 사상 최악의 악녀가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공포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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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르본 철학 수업 - 세상을 바꾸기엔 벅차지만 자신을 바꾸기엔 충분한 나에게
전진 지음 / 나무의철학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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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집에 부지런히 책을 들여다 놓는 것도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거주의 불안에 시달리는 외국인의 입장에서 이사할 때 제일 번거로운 물품이 책인데도 말이다. 그렇지만 이는 공간을 가장 넓게 점유할 수 있는 방법이지 않을까? 활자 너머의 아득한 세계에 비하면 종이의 두께와 면적이 차지하는 자리는 거저나 다름없어 보인다. 측량할 길 없는 세계로 가는 입장권을 모셔두고 좁은 집에서 우주를 탐험하는 일은 나의 가장 오래된 습관이다. 상상력이 머무는 공간, 그곳을 나는 집이라고 부르곤 했다.     p.83

 

제목만 보고 오해하는 이들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철학'책이 아니다. 사실 책에 대한 정보를 거의 보지 않고 책을 읽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책을 읽기 전에 겉 날개에 있는 저자의 이력부터 보았다. 그런데 고등학교 졸업 후 파리로 가서 어학 코스를 2년 밟고, 파리 1대학 철학과에서 학사를 졸업하고, 올해 가을부터 동대학원에서 공부할 예정이라는 이력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잘못 본 줄 알았다. 철학에 대해서 겨우 3년 공부한 대학 졸업생이 어떻게 철학에 관한 책을 낼 수가 있지 싶었던 거다. 그래서 사실 다소의 의심을 가지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책이 너무 술술 잘 읽히고, 재미있기까지 했다. 읽다 보니 이 책은 철학을 공부한 학생의 유학 수기 내지는 에세이로 분류가 될 것 같았는데, 저자가 글을 참 맛깔나게 잘 쓰고 있었고 '철학'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철학'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러니 철학이 뭔지도 모르고 소르본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겠다고 프랑스 땅을 밟았던 저자처럼, 철학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혹은 관심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이 책을 즐기는 데에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일단 도망가지 않는 것부터 시작하자. TV 화면에 얼굴을 묻거나 한껏 올린 소리로 귀를 막아선 안 되지. 저무는 해가 기웃대는 걸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으니. 그렇다면 드리우는 빛을 조명 삼아 책을 읽는 건 어떨까. 하염없는 기다림 말곤 달리 할 일도 없는걸. 나는 시간을 빠르게 흘러가도록 만드는 책을 선호했다. <돈키호테>였나? <걸리버 여행기>였을까? 페이지를 넘기는 몸만 남겨두고 나를 다른 세계로 불러내는 이야기가 있다. 관성처럼 읽어내는 책. 이런 경우 잠시 덮어야 하는 순간이 고통스럽다. 내가 읽던 책은 저녁을 예고하는 황혼처럼 활자가 빚어내는 세계의 입구였다. 고독이 두려운 어린이가 사라진 무아지경의 세계.       p.220

 

원하는 답을 알아차리는 한국의 '눈치'와 찾은 답을 거부하는 프랑스의 '불온함' 사이에서, 배워본 적 없는 반항적 사고를 새로운 언어로 익히는 공부가 쉬웠을 리 없다. 프랑스에서 공부하려면 불어를 배워야 했고, 한국에서 배웠던 불어는 실전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왕초보반에 배정받으면서 다시 어학을 시작해야 했지만, 어학원은 갑작스레 문을 닫아 버렸고, 몇 달 치 수업료를 환불 받지도 못한 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이 아기가 되는 가장 탁월한 방법이며, 언어를 몸으로 익힌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이란 흥미로웠다. 프랑스는 교육이 자본과 분리된 곳으로, 고등학교 졸업 시험인 바칼로레아를 통과하기만 하면 어느 국립대학이든 지원할 수 있는 평등 교육을 지향했고 학비 또한 저렴했다. 그런데 하필 저자가 공부를 하던 시기에 외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등록금을 16배 인상한다는 소식이 들려 오고, 불합리한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저자의 유학 생활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하다. 단순히 자신의 경험담들만을 가볍게 늘어놓고 있는 게 아니라 소르본 대학의 철학과에서 배웠던 여러 사상가들의 이론에 대한 진지한 사유가 함께 하고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특히나 한국과 프랑스, 두 나라가 서로 당연하다고 여기는 제도가 너무도 다르다는 데서 오는 혼란과 저자의 고민이 와 닿았다. 나를 둘러싼 사회가 만고불변의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졌다는 가난한 유학생의 에피소드는 수많은 젊음들에게 공감과 이해를 불러올 것 같다. 저자는 말한다. 타인과 사회의 욕망에 반발해 이를 악문 도망은 견딜 만하지만, 타인의 욕망으로 형성된 나라면 '와장창'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고. 누군가 질문을 해오는데 자신은 거기 없을 테니 말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온 건지 삶이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면, 사회가 강요하는 온갖 규범 속에서 온전히 나로 존재하는 것이 어려웠다면 이 책이 '내가 될 용기'를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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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0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피오나 2020-08-20 23:3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딱 그런 기분이었어요. 기대도 없이, 정보도 없이 읽었던 책인데.. 너무 괜찮더라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