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악한 자매
카렌 디온느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20년 8월
평점 :
나는 곰 인형을 가슴에 꼭 안고 인형의 털에 얼굴을 묻었다. 곰 인형이 마치 나를 잡아 주는 닻인 것처럼, 생명줄인 것처럼, 숨조차 쉴 수 없는 실패와 절망이라는 망망대해 속으로 빠져들지 않게 해 주는 유일한 수단인 것처럼 인형에 간절히 매달렸다. 내가 희생해 왔던 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니. 내가 믿었던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었다니. p.40
열한 살 소녀 레이첼은 총기실에서 라이플을 만지다가 놀라서 총을 내려놓으라는 어머니의 외침에 시키는대로 내려놓는다. 그리고 커다랗게 탕 소리가 들리고 어머니가 쓰러진다. 아버지가 와서 비명을 지르고 충격과 공포가 어린 눈으로 레이첼을 쳐다본다. 그리고 자신에게 라이플을 겨눈다. 탕 소리가 또 난다. 여기까지가 레이첼의 기억이다. 그녀는 자신 때문에 부모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15년 동안 담고 살아 왔다. 죄책감으로 고립을 택했고, 악몽에 시달렸으며, 사회와 단절된 채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그런데 아주 우연한 계기로 그 사건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다. 레이첼은 어머니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사 보고서에 따르면 그녀는 총을 쏜 적조차 없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레이첼은 부모의 사고 이후 실종되었다가 2주 만에 사람들에 발견되었고, 사고부터의 기억을 전혀 하지 못했었다. 다만 자신의 기억 혹은 환상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죽는 모습을 끊임없이 보았고, 그 끔찍한 일을 품고 살아 왔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환상과 수사 보고서 사이에 생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진실을 찾기 위해, 그 곳으로 향한다. 미시간주 어퍼 반도의 외딴 숲속에 있던 그들의 집,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고, 그녀의 부모가 살해된 사건이 일어난 그 곳으로 말이다.
사이코패스라니. 그 끔찍한 단어를 듣고 나는 눈을 감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 나도 바보는 아니다. 나 역시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다이애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알아보았고, 이게 결국 우리가 감당해야 할 결론이란 걸 알았다. 하지만 메리트 박사의 전문가적이고 객관적인 저 입술에서 그 말이 들려오자 그만 정곡을 찔려 버리고 말았다. 내 딸이 사이코패스일 리가 없어. 그럴 리 없다고. p.138
이야기는 현재 레이첼의 시점과 과거 그녀의 엄마 시점으로 교차 진행된다. 레이첼의 엄마 제니에게는 다이애나라는 딸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여덟 살이었던 다이애나는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통제할 수 없는 분노와 충동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 부모가 통제하기 어려운 아이였다. 게다가 자기보다 작고 약한 생물에게 품는 공감능력과 호의가 없었고, 거짓말도 잘하고, 잔인한 행동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자신의 아이가 사이코패스라는 걸 옆에서 보면서 깨닫게 되는 부모의 마음이란 어떨까. 제니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 때문에 벌을 받는 기분을 매순간 느끼며, 그럼에도 아이를 사랑하려고, 아무도 아이를 해치지 못하고, 아이가 아무도 해치지 못하게 하려고 애쓴다.
한편 저지르지 않은 범죄 때문에 15년 동안 스스로를 정신병원에 감금하고 있었던 레이첼은 지난 세월이 억울하다. 대체 왜 언니 다이애나와 샬럿 이모는 그 사실을 자신에게 알려주지 않았을까. 아홉 살 차이가 나는 다이애나와 샬럿은 외모도, 성격도 너무 다른 자매였다. 다애아나가 큰 키에 금발, 푸른 눈의 모델처럼 아름다운 미인이었다면, 샬럿은 갈색머리에 갈색 눈을 지닌, 눈에 잘 띄지 않는 평범한 외모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다른 자매였지만 야생 한 복판에 있던 외딴 집에서 서로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었기에 그들은 자라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들의 어린 시절은 레이첼의 시점으로, 엄마 제니의 시점으로 다시 회상되면서 독자들을 경악시킨다. 당시에는 어려서 몰랐지만 사이코패스 언니가 어린 동생을 어떻게 대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떤 경험을 하며 자라왔는지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리고 사이코패스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야기들은 무섭기도 했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카렌 디온느는 3년 전에 <마쉬왕의 딸>이라는 작품으로 만났던 기억이 난다. 탈옥한 아버지를 쫓는 딸의 여정을 매혹적으로 그려냈었는데, 새로운 여성 영웅 캐릭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전작에 이어 이번 작품 역시 사이코패스와 가족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굉장히 가독성이 뛰어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특히나 범죄를 저지르는 성인 사이코패스에 비해서, 스스로 범죄라는 걸 인식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가 사이코패스라는 점때문에 벌어지는 상황들은 소름끼치게 오싹하고, 무시무시했다. 누구나 한번 읽기 시작하면 마지막 페이지까지 멈출 수 없을 것 같은 치명적인 독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를 만나보고 싶다면 이 작품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