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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비웃는 숙녀 ㅣ 비웃는 숙녀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7월
평점 :
돋가시의 지적은 타당했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철렁했다.
순간 아소는 들판에 피는 꽃을 떠올렸다. 꽃은 지고 없어도 씨를 날리고 또 다른 땅에 자신과 같은 꽃을 피운다. 가모우 미치루도 그처럼 사악한 씨앗을 남겼고, 그것이 노노미야 쿄코라는 독을 품은 꽃을 피운 것은 아닐까....
아소는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지나친 생각이야. p.127
나카야마 시치리의 <비웃는 숙녀> 그 속편이다. 이 시리즈는 법의학, 음악, 코지 미스터리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선보였던 그가 처음으로 쓴 이야미스 소설이다. 이야미스란 인간의 어두운 심리를 주요 소재로 삼는 일본 추리소설의 한 장르로 보통 작품을 읽고 나면 불쾌해지거나, 기분이 찝찝해지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 시리즈에는 타고난 미모와 훌륭한 언변으로 사람들의 욕망과 심리를 조종하는 역대급 악녀가 이야기의 중심에 있다.
악녀가 등장하는 일본 미스터리하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과 '환야'가 먼저 떠오른다. 주위의 모든 것을 희생시키고 이용하는 한 여자와,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지켜주는 한 남자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미스터리였다. 자신의 아름다움을 이용해 각종 비즈니스를 성공시키고 승승장구해가면서, 자신의 과거를 캐려는 사람들에게는 가차없이 응징하고, 짓밟으면서 욕망에 충실한 여자. 세상물정에 밝고, 아름다움이 권력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또 이용할 수 있는 그녀는 어떻게 보면 무서운 팜므 파탈이지만, 그만큼 매혹적이기도 하다. 그에 비해 나카야마 시치리가 그려내고 있는 악녀 캐릭터는 다소 분위기가 다르다. 분명한 목적과 동기가 있는 악행과 이유를 알 수 없는 악행은 분명히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그 속을 짐작할 수 없기에, 주인공 악녀의 동기나 목적이 보여지지 않아서 더 오싹하고, 더 무섭다.
상대에 맞춰 가장 적합한 계획을 세운다. 그 선택이야말로 쿄코의 악마 같은 모습이었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속기 때문에 자존심 강한 인간일수록 괴로워하게 된다. 돈뿐만 아니라 자신감과 자긍심까지 잃어서 그 타격은 두 배 세 배가 된다.
"스스로를 높게 평가하는 인간만큼 속이기 쉬운 부류도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를 아무 근거 없이 높게 평가하니, 자신의 무능함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절망감은 더욱 큽니다."
높이 날수록 추락할 때 충격이 크다는 뜻인가. 그 또한 악마 같은 발상이다. p.285
비영리법인 ‘여성 사회활동 추진 협회’의 사무국장 후지사와 유미는 기부금과 회비가 줄어들어 수익이 나지 않자, 협회에 유보해 둔 자금을 투자로 불리기로 한다. 미모의 투자 자문사 노노미야 쿄코를 소개 받아 그녀의 권유로 운용자금 1억 2백만 엔을 어렵게 구하지만 교코는 돈을 받자마자 잠적해 버린다. 사이비 종교단체인 쇼도관 부관장 이노 덴젠은 신자 수가 늘지 않아 걱정이다. 그는 프리랜서 자산운용사라는 쿄코를 소개 받아 그녀의 제안대로 신자들을 상대로 출판 사업을 해보기로 한다. 자신의 맨션까지 담보로 삼아 가며 자금을 마련하지만, 정작 출간된 원고는 교단을 폭로하는 내용이었고, 교단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살해되고 만다. 그리고 국회의원 야나이 고이치로의 후원회 회장이자 부동산 업자인 구라하시 효에, 야나이 고이치로의 비서 사키타 아야카까지.. 모두 교코의 감언이설에 속아 사기를 당하고,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게다가 이상한 것은 각각의 사기 행각에서 쿄코 자신은 아무런 사리사욕을 챙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운용자금 1억 2백만 엔을 그냥 외환거래로 날려 버리고, 교단을 폭로하는 책을 출간했을 때에도 인쇄비와 제본비로 1억 천만 엔은 인쇄소 계좌로 들어갔다. 수고를 들여 일을 진행했으나, 전혀 물질적인 이익이 없었다는 거다. 그렇다면 교코는 대체 왜 생면 부지의 이 사람들을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뜨리려고 하는 것일까. 쿄코는 돈은 전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피해자들만 궁지에 몰아넣었으며, 게다가 자신의 손을 더럽히지 않고 상대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 머리를 짜내는 목적이 오로지 사람을 절망에 빠뜨리기 위해서 뿐이라는 사실은 너무나도 비인간적이고, 비정하고 악랄하지 않은가. 자, 전작에 이어 되살아난 희대의 악녀를 만나 보자. 네 사람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과 사상 최악의 악녀가 보여주는 무시무시한 공포가 눈을 뗄 수 없게 만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