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 디!! 어!! 셤이 끝났습니다. 시험공부를 오랫동안 하지말자는 주의기 때문에 딱! 7일 동안만 공부 했습니다. 그리고 뭐 성적은 뭐 (한 백점이 반이상이라고 할 정도? 어머머머)

 짧은시간 공부하고 반반한 성적을 얻은지라 나름 만족하고!! 지금 오자마자 응사를 보고 있습니다! 밤새든 암튼 정주행 ㅇㅇ~~~~

 그런데 제가 공부하는 7일동안 민영화사건도 일어나고 그렜더라고요... 다들 안녕하십니까?

 아무튼 곧 곧 곧 크리스마스입니다. 최근 나온 크레용팝의 노래 '꾸리스마스'의 가사처럼 혼자라서 너무 추운(?) 꾸리꾸리한 꾸리스마스를 맞이하게 될 것 같습니다. ㅋㅋㅋ 그래서 저는 교회나 가려고요. 교회를 바꾼지 얼마 안되서 청년회예배를 아직 안 갔는데 크리스마스를 청년회에서 보내지 않는다는 것은 제 인생 역사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2일전 얼굴에 철판깔고 한번 가볼까 합니다!

 이제 영어책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한국어 책은 이제 너무 어려워요. 계속 같은 수준의 책을 읽을 수는 없고, 1984를 읽다가 진이 빠져버려서 더 어려운책은 시도도 못하겠습니다. 

 월드컵 대진표도 나왔고, 홍명보 감독님 사량함니돠.. ㅇㅇ!!!!

 

 요번 시험준비기간동안 정말 애썼습니다. 스스로가 대견할 정도랍니다. 헿~

 7동안 공부해서 4주동안 공부하는 애들이랑 같이 시험을 보려는 눈만뜨면 공부를 해야 했어요..

 점심시간에 친구랑 도서실 올라가서 공부하다가 쉬는시간 계속 공부하다가 집에와서 공부하다가 뭐 암튼요. 헤 그런데 전 잠을 못자면 공부를 못하는 타입이라 제 친구처럼 4시간씩 자면서 공부를 못해요. 그래서 전 매일 6시간30분씩 자줬지요. 제공부만 7일 안에 끝내는 것도 어려운데 제가 또 한 오지랖 해서 친구들공부까지 도와준다고 설치느라 더 힘들었지요. 그래도 애들 과학 설명해주고 역사 같이 정리해주고 그러다보니까 제가 더 빨리 외울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요~

 

  이제 친구들이랑 연희동가서  토요일밤을 불태울 일만 남았어요! 응사정주행하고 실컷 좀 쉬면서 영어공뷰도 좀 해보려고요!!!!

 

 

 

  알라디너모두 해피뉴이어 쪽쪽ㅉㅉ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람의 화원 2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바람의 화원이라는 책은 역사 픽션이다. 내가 읽은 2권은 조선 최고의 화가인 김홍도와 신윤복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자인 신윤복의 실제 아빠가 죽고, 입양되어 지는 과정에서 성별이 남자로 바뀌어 버리고, 그런 신윤복이 사랑하는 정향이란 여인. 그리고 신윤복을 사랑하는 김홍도. 약간 억지 스럽고 역사 픽션치고 약간 과한 점도 있다. 그러나 대화하는 장면에서 김홍도와 신윤복, 그들의 작품 안에 숨겨진 세상들을 잘 표현해 주었다. 너무나도 유명한 그들의 작품이지만, 김조년의 풀이, 또 화가의 풀이등을 들어보며, 더 깊이 작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화가들의 그림은 내가 그저 휘리릭하고 보고 지나갈만큼 얕은 세계가 아니었다. 그림은 작가의 마음 세계를 비춘 것이며, 그 그림으로 그 작가의 마음을 읽어 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의 시선은 자신을 향하게 하거나 한 폭에 그림 속에 자연스런 대조를 만들어 자신의 가치관을 그림 속에 담기도 한다. 또한 그들이 그림을 그릴 때 얼마나 많은 것들을 고려하며 색상을 선택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노을이 저물어갈 때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는 김홍도에 자제된 색의 사용법, 그리고 햇빛이 밝은 낮에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붉고 화려한 색이 쓰이는 신윤복의 사용법. 이들의 그림에 대해 하나 둘 씩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놀랍고 신비스러웠다. 픽션이기는 하지만 미인도가 자신의 여성인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설정 하였는데, 그것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또 외국처럼 명암이나 입체감을 주는 방법을 사용하지도 않았지만,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화 조선왕조실록 4 - 세종.문종 편
박시백 글 그림 / 휴머니스트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이도 조선 제 4대 왕 (세종)

출생-사망 1397.4.10-1450.2.17

가족 아버지- 이방원(태종)

-양녕대군, 효령대군

특징 훈민정음 창체

정책 왕도 정치 추구, 집현전 설치, 유교 강화

재상권한 강화, 여론 중시, 농업정책 정비

을 위한 정치 , 민본정치를 폈다. 세종은 "민은 나라의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라는 이야기를 종종하였다. 그리고 그는 농민을 위하고, 농업을 발전시키는 정책을 폈다. 수령들에게는 농사철의 요역을 없애도록 여러 차례 지시하였으며, 농사가 발달한 지역의 농업기술을 수집하고, 그 결과를 모은 농사직설을 펴내 새로운 농법과 농기구를 전국으로 확산 시켰다. 그는 공법이라는 제도에 대해 찬반 논쟁이 치열하자, 그 뜻을 여론조사로 백성에게 물을 정도로 백성을 존중하였다.

(시크릿노트) 그러나, 그의 백성들은 행복하지 않았다. 사대로 인해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으며, 잘못된 정책으로 고통을 주기도 했다. 예로는 화폐 정책이 있다. 백성의 편리를 위해 화폐 유통을 적극 추진했으나, 백성들은 화폐의 가치가 유지 될지 우려하여,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세종은 화폐로 매매를 할 경우 가혹한 벌을 내리게 된다. 가산몰수, 벌금, 곤장 등 의 벌을 내렸고, 가산을 몰수당한 사람들은 사채를 빌리다 못해 자살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취재노트-훈민정음을 만든 그를 취재하다.

기자: 안녕하세요? 훈민정음을 만드신 이유가 궁금해서 찾아뵈었는데요, 답변 부탁드려요.

세종: 한자와 우리나라 말이 달라, 같은 글자가 여러 음으로 발음되어, 어려움이 있었네. 뿐만아니라, 한자라는 글자가 워낙 그 수가 많고, 어려워, 백성들이 익힐 수 없어 자신의 의사를 충분히 나타내지 못하는 것이 안쓰러웠지.

기자: 깊은 뜻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기록을 살펴보면 1443년 12월 30일인 훈민정음을 발표한 날 이전에는 훈민정음에 대한 것이 아무 내용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고 하나, 실록에는 분명 임금이 친히 언문28자를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직접 만드신 것이 되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요?

세종: 창제 작업을 공론화 시켰다간 반대 의견에 휩쓸려버렸을 거야. 그래서 비밀리에 작업할 수 밖에 없었네. 그러나 나 혼자 만든것은 아니네. 문종, 정의공주, 수양, 안평들이 나를 도왔지.

기자: 예상대로 반대는 심했습니다. 어떻게 대처하셨나요?

세종: 사대에 어긋난다, 오랑캐와 같아지는 일이다, 라며 나에게 반박을 했지. 특히 최만리가 그랬어. 그래서 내 뜻을 밝히고, 반대를 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처벌을 내렸지. 그랬더니 잠잠해 지긴 했는데 사람들이 즐겨 쓰진 않았어. 효율성은 인정받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모두가 내가 만든 글자를 써 줘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

기자: 좋은 답변 감사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역사 이야기 1 - 고대편 교양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한 세계역사 이야기 1 1
수잔 와이즈 바우어 지음, 정병수 그림, 이계정 옮김 / 꼬마이실 / 200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교양있는 우리 아이들을 위한 세계 역사 이야기]

1-초기 유목민의 생활~ 7-함무라비와 바빌로니아

 

1. 초기 유목민의 생활

유목민은 일정한 거처가 없어 천막이나 동굴 속에서 잠을 자며 먹을 것을 찾아 떠돌아다니거나 방랑하던 사람들을 말한다. 그들은 자기 주변에서 먹을 것을 구했다. 오늘날 우리는 유목민들이 동굴 벽에 그린 동물 그림을 통해 그들삶을 알 수 있다.

비옥한 초승달이라 불리는 지역은 유목민들이 살기 좋은 곳이었다. 각종 식물이 풍부하게 자라 ‘비옥한 땅’ 이라고 불렸다. 이곳에선 먹을 것을 구하기가 쉬웠기에 떠났던 유목민들도 이곳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유목민들은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정착해서 살기로 마음먹었고, 떠돌아다니지 않고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 농사짓는 법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수로를 통해 강에서 물을 끌어 왔고, 그 물을 방아두레박의 일종인 샤더프를 통해 논에 물을 주었다. 정착생활을 하면서 집을 벽돌을 이용해 짓기 시작했다. 또, 그들은 농사를 하기 위해서는 모여 사는 게 적합 할 것이라 판단하고, 마을을 이뤄 살기 시작했다. 농부들은 동물을 길들여 먹을 것을 주고 키우면 고기로 이용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마을은 마을끼리 서로 물건을 교환하며 발전했다. 그러나 그들은 공격을 받거나 강도당할 까봐 마을 주변을 돌로 쌓기 시작했다. 이것이 최초의 도시이다. 최초 도시 중 예리코(여리고)라는 도시는 고대 가장 두껍고 튼튼한 벽을 가진 도시였다.

 

2. 나일 강가의 이집트

나일강은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다. 이 강은 물이 너무 얕아 바닥이 훤히 보이기도 했고, 또 어떤 때에는 물이 너무 많아 농지로 넘쳐흐르기도 했다. 나일강이 하류에서 여러 작은 강으로 갈라져 지중해로 들어가는 곳을 나일 델타라고 한다.

나일강은 매년 범람했다. 우기이면 빗물이 나일강으로 넘쳐흘러 깅물이 강둑을 넘어 경작지를 잠기게했다. 가장 많이 강이 넘치던 곳이 나일델타이다. 그러나 강이 매년 같은 주기로 범람했기 때문에 농부들은 이를 방지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범람하는 강은 충적토라는 비타민과 무기질이 충분한 진흙도 함께 흘렀다. 농부들은 집을 강둑에서 약간 멀리 떨어진 곳에 지었고, 범람한 물을 건기에도 쓸 수 있게 수로를 파 그 끝을 막았다. 나일강을 따라 살던 사람을 이집트사람이라하고, 나일하류를 하이집트라 불르며 이들은 붉은 왕관의 왕의 통치를 받았다. 나일 상류는 상이집트이고, 이들은 하얀 왕관의 왕에게 통치를 받았다. 흰색왕관 왕과 붉은 왕관왕이 싸우고, 흰색왕관의 나르메르가 붉은 왕의 왕관을 뺏어 흰왕관에 붉은 왕관을 겹쳤다. 이 후 이집트 왕은 붉은색과 흰색이 결합된 왕관을 썼다. 이집트가 통일되자, 사람들은 왕을 파라오라고 불렀다. 그리고 사람들은 파라오를 신으로 믿었고, 그러한 파라오를 거역할 사람은 없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파라오 외에 많은 신을 섬겼는데, 태양신이자 최고의 신인 라와 오시리스, 이시스, 호루스, 세트 등이다. 이들은 모두 한 가족이었다고 한다.

 

3. 인류 최초의 기록

이집트 사람들이 인류 최초로 기록을 시작했다. 기록을 할 수 있게 되자 왕국의 여러 지방으로 소식을 보낼 수도 있고, 후손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 줄 수 있었다. 이집트 사람들이 사용한 문자는 상형문자라 불리는 그림으로 이를 통해 말을 전달했다. 처음엔 돌에다 글을 새겼지만 가지고 다니기도 힘들고 쓰기도 힘들었다. 그 때, 이집트 근처 수메르에서 진흙위에 쓰는 것을 발명해 냈다. 진흙위에 쓴 글자를 설형문자라 한다. 몇 백년 뒤 사람들은 진흙대신 종이와 잉크를 만드는 법을 알게 되었다. 이집트 사람들은 나일강둑의 갈대로 파피루스라 불리는 종이를 만들었다. 이 종이는 쓰기도 편했고 말수도 있었으며, 주머니에 넣을 수 있고, 보관도 쉬웠다. 그러나 쉽게 번졌고, 쉽게 부서졌다. 이집트인들이 종이에 새긴 글은 남아있지 않아 그 당시 어떤 일이 벌어졌는 지는 알 수 없다.

 

4. 이집트 고(古)왕국시대

이집트가 통일 한 뒤 부유하고 강력한 왕국으로 성장했을 때를 이집트 고왕국시대라 부른다. 이 시기 이집트 사람들은 미라를 만들기 시작했다. 미라는 죽은 사람의 육체를 썩지 않게 향료와 소금으로 처리한 뒤 세마포로 감싼 것을 말한다. 사람들은 육체 그대로 보존되어야만 내세로 들어 갈 수 있다고 믿어 미라를 만들었다. 미라를 만드는 것은 매우 복잡했다. 내장을 꺼내 향료를 바르고 심장은 붕대로 감는다. 그리고 내장들은 특별한 단지에 넣고 시신을 싼 뒤, 붕대사이 보석도 넣는다. 황금마스트도 씌운다. 시신을 관에다 넣고 무덤으로 들여보낸다. 이집트에 묻힌 많은 왕들과 중요한 사람들의 무덤엔 보물이 가득하다. 도굴범들은 이런 이집트의 무덤을 침입해 보물을 훔쳐갔다. 그러자 이집트 사람들은 석실묘(돌로 만든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라오는 석실묘로 성에차지 않아 피라미드를 만들었다. 사람들은 계단처럼 생긴 피라미드 옆면을 타고 하늘로 가리라 믿었다. 쿠푸는 자신의 피라미드를 20년간 제작하였고, 이 피라미드가 35개의 피라미드 중 가장 크기에 대 피라미드라고 불린다. 이것을 만들기 위해 수천명의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대 피라미드는 여러 방과 미로들도 많았다. 대 피라미드에는 그것을 지키는 대 스핑크스의 상이 서 있다. 쿠푸는 대 피라미드와 대 스핑크스를 세웠지만 도굴범들은 쿠푸를 안치해 논 방을 찾았고, 쿠푸의 보물과 미라까지 훔쳐갔다.

5.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한 사르곤

진흙판을 만들어 썻다던 수메르도 이집트처럼 처음엔 하나의 나라가 아니었다. 농사짓는 마을이 커져 도시가 되었고,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성벽을 쌓았다. 그런 도시국가들은 서로 싸움을 일삼았다. 사르곤은 이런 도시들을 하나의 나라로 반들고 싶어 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전체를 정복하기 위해, 50회 이상의 전쟁을 치뤘고, 마침내 티그리스와 유플라테스강 사이의 모든 나라를 지배하게 되었다. 사르곤은 아카드라하는 수도를 정하고, 이 제국을 아카드제국이라 했다. 그러나 아카드의 많은 도시들은 아카드의 일부가 되기를 원치 않았고, 이들을 통치하기 위해 사륻곤은 군대의 힘으로 모든 도시들이 그의 법을 따르게 했다. 군사 독재를 앞세운 사르곤의 제국은 몇 년밖에 유지 되지 못했다.

 

6. 유대민족

사르곤이 지배하던 메소포타미아의 많은 도시들 중 우르라는 도시에 아브람과 그의 아버지 데라가 함께 살았는데, 바빌론이 우르를 공격한다는 소리에 아브람의 아내 사라와 함께 가나안으로 떠나는 중 신의 음성을 듣는다. 신은 90세인 사라가 아들을 갖을 것이라 하였고, 그들이 낳은 아들은 이삭이며 이삭의 아들 야곱은 또 12아들을 낳았다. 야곱은 그 중 요셉이란 형제만 예뻐 하였고, 이에 11명의 형들은 분노하여 요셉을 이집트 상인에게 팔았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노예로 지내다가 왕의 꿈을 해석하게 되면서 곡식을 관리하는 파라오 다음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요셉은 흉년에 곡식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다가 자신의 형제들을 만났고, 요셉의 가족 모두가 이집트에서 살게 되었다. 유대민족은 점점 번성했고, 그들은 유일신만을 믿었다.

 

7.함무라비와 바빌로니아

메소포타미아는 평화롭지 못 했다. 도시들끼리의 싸움이 끊이질 않았다. 바빌론의 왕 함무라비는 메소포타미아의 작은 땅을 통치했지만 곧 주변 큰 땅을 정복해 나갔다. 결국 그는 메소포타미아 남쪽 전체를 지배하고 바빌로니아라고 이름지었다. 함무라비는 자신의 군대를 앞세워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제국을 법으로 다스리고 싶어했고, 함무라비 법전을 만들었다. 이 법전은 최초의 성문법(문자로 표현되고 문서의 형식을 갖춘 법전)이다. 함무라비는 신앙심이 강했고, 신들의 함무라비 법전의 내용을 그에게 전해 준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많은 신전과 사원을 다시 세웠고, 백성이 신에대해 더 많이 공부하도록 하였다.

그 당시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별의 움직임으로 신의 뜻을 알아낼 수 있다고 믿고, 하늘을 연구하는데 많은 시간을 드렸다. 그 결과 별자리와 행성을 알아냈고, 지구가 태양 주위를 회전하는 것도 알아 내었으며, 1년 12달 하루24시간 한시간 60분을 나누었다.

 

 

 

 철학 통조림처럼 7단원씩만 정리 해 보려고요. 제가 친구들이랑 같이 세계사 공부를 해보려고 6명 아주 참신한 애들과 그냥 서로 책 한 부분씩 요약하기로 했거든요. 그러면 책 한 권을 다 요약하지 않아도, 요약본을 얻을 수 있다는 놀라운 장점이 있거든요!!! 제 친구들이라 믿음직 스럽고요, 후후훗!~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식을 위한 철학통조림 - 고소한 맛 1318을 위한 청소년 도서관 철학통조림 4
김용규 지음 / 주니어김영사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포스트 모던한 로티. (로티의 유대성) 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 근대성에서 벗어나는 내용을 가진 문화나 사상들을 아울러 뜻하는 말.

 

리처드 매케이 로티- 1931년 미국에서 출생. 듀이의 제자이자 당시 저명한 실용주의 철학자 훅과 절친한 친구인 저널리스트 제임스가 그의 아버지 였음. 아버지의 영향으로 문학소년이었으나, 대학에서 철학전공, 웨스트칼리지와 프린스턴에서 철학교수로 지냄. 1982년부터 버지니아대학에서 인문학 교수로 활동하였다.(위키백과에 따르면 2007년 6월 8일 사망.)

 

로티의 신실용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 진리나 객관적 지식에 대한 믿음을 해체해 버린 황무지 위에 실용주의를 부활시킨 것. (실용주의: 현실생활을 조준하고, 지식이나 도덕은 실제 생활에 유용할 때만 받아들이겠다는 미국 순수 사상.) 로티는 실용주의자들의 진리=유용한신념이라는 주장을 받아들임.

 

비트겐슈타인, 철학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아닌 언어의 의미를 명확히 하는 ‘활동’이라는 주장+쿤, 과학은 객관적 지식의 탐구가 아닌 패러다임을 이끌어 나가는 ‘활동’이라는 주장 = 과학이란 발견하기가 아닌 만들기에 불과함. 진리나 객관적지식에 대한 질문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음. 지식이란 단지 신념일 뿐이며, 그것에는 오직 더 유용한 것과 덜 유용한 것의 구분만 있을 뿐이다.

---> 플라톤의 선분의 비유의 지식의 위계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과학이 문학이나 예술보다 실재에 가깝다는 망상을 버릴 수 있다.

그의 주장: 우리의 질문을 지식이 실재에 관한 것이냐, 현상에 관한것이냐 하는 것이 아니고, 역망을 충족시키기에 좋은 행동습관이야 아니냐는 것이다.

(지식과 실제는 대응=강한대응설, 지식이 현상과 대응=약한대응설 --로티, 대응설에 반발)

로티가 내놓은 객관성의 대안- 유대성(solidarity:-)) ≒ 쿤의 패러다임 :특정한 사회가 탐구의 어떤 영역에서 인정하는 유용성.

객관성VS유대성

1. 객관성- 탐구하는 개인에 의해 발견. 유대성-대화하는 공동체와의 합의에 의해 발견.

2, 객관성- 실재와 대응을 전제로 함. 유대성-오직 유용성만을 전제로 함.

 

로티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진리나 유토피아와 같은 미리 준비 된 장소를 설정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유대성을 유지하면서 보나 나은 세계관과 도덕 이상, 예술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가 갈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남은 문제: 과학이 실재와의 대응이 아니라면, 과학이 가진 자연현상을 예측하는 능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또 실대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예측하고 통제 할 수 있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과학적 발전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