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
백낙청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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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백낙청 저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를 읽고 / 2009.08., 403쪽, 창비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는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중요 주제로 삼은 백낙청 교수의 네 번째 책이다. 백 교수는 1994년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을 시작으로 한반도 분단체제를 주제로 연구 결과물을 발표하였다. 두 번째는 1998년 <흔들리는 분단체제>이고, 세 번째는 2006년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이다. 국내 정치학자나 사회과학자 중에서 한반도 분단체제에 대해 이렇게 수십 년 간 꾸준히 연구하면서 결과물을 발표한 전문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또한 그는 615 남측위원회 공동대표로서 활동하는 등 '분단체제의 체계적 인식과 실천적 극복’에 매진해 온 지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백 교수는 전작인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에서 분단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고 선언하고 한반도의 통일 방식은 흡수통일 방식인 독일식이나, 전쟁 방식인 베트남식, 그리고 상층 일부 정치집단만의 합의 방식인 예멘식도 아닌 제3의 방식일 수밖에 없고, 제3의 방식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남북이 1972년 7.4 공동성명에서부터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로 이어진 한반도식 통일 논의가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한반도식 통일은 남북이 화해와 교류, 협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하고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이 양측 정부 당국뿐 아니라 시민사회세력이 주도적으로 동참하는 가운데 - ‘시민참여형 통일 - 시나브로 통일이 이루어지는 '과정으로서의 통일’이다.

<어디가 중도며 어째서 변혁인가>는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이 출간된지 3년 후에 발간되었다. 2007년 6.15 공동선언을 기반으로 하여 남북의 정상이 10.4 남북공동선언을 재차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2009년의 한반도 상황은 여러 가지로 악화되어 있는 상태였다. 2008년 극우보수세력으로의 정권교체 이후 촛불시위,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북의 2차 핵실험 등 파국으로 내닫는 혼미한 정국 속에서 대한민국은 경제, 민주주의, 남북관계에 걸쳐 심각한 위기상황을 겪고 있었다. 북한과 미국의 군사적, 정치적 긴장과 갈등은 커졌고, 그 여파로 북한은 핵실험을 강행하였고,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정세도 불안정해졌다. 설상가상으로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주도해야 할 남측에서 6.15 공동선언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이명박 정권이 등장함으로써 오히려 남북 대결을 추구하며 한반도와 동북아의 긴장에 앞장서고 있었다.
저자는 이명박 정권의 등장 이후 악화된 동북아와 한반도 정세로 인해 자신이 견지해 온 ‘흔들리는 분단체제’와 ‘한반도식 통일’에 대해 시민사회 여러 곳에서 터져나오는 우려 섞인 절망적인 분위기에 대한 입장을 밝히기 위해 이 책을 발간한 것으로 보인다.

시민단체 및 시민운동가들과 가까웠던 저자는 서문 ‘시민참여 통일과정은 안녕한가’에서 먼저 시민운동에 대해 적극적인 조언과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국내 시민단체들이 "남한 사회의 특정 개혁과제에 몰두해온 것은 시민운동의 성격상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시민운동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 때문에 유달리 시야가 좁아진 면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당면 개혁과제에 골몰하는 ‘시민적’ 관심이 강한 사람들일수록 "통일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한반도적 시각의 부재는 시민운동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이른바 ‘민중진영’에서도 "지나치게 반북적이거나 상당수 진보학자와 시민운동가들의 ‘후천성 분단인식결핍 증후군’을 공유하는 정파가 엄존하며, 한반도적 시각을 강조하지만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하고 심지어 북측 당국의 해법을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다른 한 정파와 묘한 짝을 이루고 있다”(19쪽)고 평가한다. 그리고 시민운동에서 한반도적 시각이 부재한 이유는 “민중적 의제, 민중적 정서에 대한 시민운동가들의 거리두기와도 무관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한 이유에 대해서는 “시민운동은 도덕적 순수성이 생명이긴 하지만 활동가들이 손에 때묻히지 않고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자기 운동만 하려는 일종의 결벽증을 드러내는 것은, 어찌 보면 6월 항쟁 이후로도 여전히 협소할 수밖에 없었던 활동공간에 알게모르게 순응해온 결과요 87년 체제의 수혜집단으로서의 타성이랄 수 있다”(20쪽)고 지적한다.

저자의 지적과 비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동안 절대 다수의 국민들이 최소한의 정치적, 경제적 민주주의의 헤택을 누리지 못하면서 OECD 국가 중 최악의 사회적 현실에 직면해 있는데,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중산층과 고학력, 기술자 계층의 이익만 대변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민주주의도, 생존도, 평화도 위협받는 한국사회의 현실이 분단체제라는 엄존한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노력에 치열하지 못한 채 선진국에서 유행하는 환경운동, 마을운동, 생태운동 등에만 집중하는 시민단체는 오히려 중산층 이하 민중들에게 위화감과 적대감만을 양산시키고 있음을 느낀다. 
‘회원 없는 시민단체’, ‘회비만 걷어 활동가만 활동하는’시민단체’, ‘정치에 입성하기 위한 시민단체’라는 지적과 비난에서 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다수의 저소득층과 소외계층에게 나타나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이 시민단체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2008~2009년의 제3차 북핵위기의 특성을 ‘남한발’이라고 규정짓는다. 2009년 상황은 북미 갈등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오바마 정부의 선제적 대북강경노선 탓이라기 보다 다분히 남한 정부가 남북갈등을 선도한 데에 따른 위기로 분석한다. “이명박 정부가 6.15 선언을 존중하고 10.4 합의사항 이행에 성의를 보였다면 애당초 제3차 핵위기 자체가 없었으려니와, 최근 위기의 진행을 보더라도 한국 정부의 태도가 사태악화에 얼마나 큰 작용을 했는지 실감할 수 있다.”(27쪽)
이런 저자의 분석과 평가는 북핵 위기를 무조건 북측 정권의 책임이라고 단정지으면서 미 행정부나 극우보수 세력의 반북 공세에 편승하려는 국내 시민사회 진영 일부와 진보진영 일부의 무지하고 무책임한 행보와 대비된다.
6.15, 10.4 공동선언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긴장 사태가 악화된 것에 대해 저자는 “분단체제의 속성상 적어도 ‘제1단계 통일’로써 그 극복의 길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언제든지 남북화해를 역전시킬 수 있는 동력과 매커니즘이 내재하기 때문”(35쪽)이라 평가한다. 그의 ‘분단체제론’인 87년 체제가 53년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럼에도 “대결상태의 재연이 분단체제의 재고착화를 뜻하지는 않는다. 흔들리는 분단체제의 안정회복을 꿈꾸는 인사들이 남북간에 적지 않을지 모르나 그것은 세상의 변화를 무시한 일방적인 꿈일 뿐이다.”(35쪽)고 주장한다. 그가 전제하고 있는 ‘흔들리는 분단체제’의 큰 구조와 흐름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자는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에서 잠시 언급한 ‘변혁적 중도주의’를 본격적으로 제장한다. 그가 ‘변혁적 중도주의’를 제창하는 이유는 “‘중도’가 아니고서는 광범위한 연대가 불가능한데다가, 무원칙한 ‘중도 마케팅’이 아닌 줏대 있는 중도세력이 되려면 한반도 차원의 변혁과 국내의 개혁작업을 결합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혁’의 핵심은 1980~90년대식 혁명이 아니라 ‘분단체제의 변혁’에 가깝다. “분단체제라는 용어를 굳이 안 쓰고 그 개념을 명시적으로 공유하지 않더라도 분단체제의 변혁에 실제로 기여하는 쪽으로 기운을 모을 필요가 절실한 것이다."(55쪽)
그렇다고 저자가 ‘변혁적 중도주의’가 쉽게 구현되리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의 변혁이 중도세력의 동원과 개혁적 성과의 축적을 요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실제로 한국사회의 다수가 이런 변혁적인 개혁운동에 합류할지는 따져볼 문제로 남는다. 그런 일이 벌어지려면 상당한 수준의 중도 공부와 변혁 공부가 필요할 텐데, 아직도 한국사회, 특히 지식인사회는 참 중도의 연마에 무관심하고 분단체제 극복으로서의 변혁에 대한 인식이 태부족한 경우가 많”(56쪽)기 때문이다. 
그는 2008년의 촛불군중과 2009년에 고 노무현 대통령을 애도한 대중이야말로 지식인들보다 변혁적 중도주의에 오히려 가까이 다가섰다고 믿는다. 그 이유는 당시 대중들이 “이명박 정부의 퇴행에 대해 단호하게 거부할 뿐 아니라, 급진 자주파나 급진 평등파의 주장도 가볍게 일축하는 형국”이라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백낙청, 대전환의 길을 묻다>(2015 창비)에서 관심을 두기 시작하여 알게 된 백낙청 교수의 ‘분단체제론’과 ‘한반도식 통일론’은 많은 면에서 크게 공감이 된다. 한반도의 현대사는 지구상 유례가 없었다. 일제 식민지 -> 외세에 의한 분단과 친일파 집권 -> 내전/국제전 -> 분단체제 재구축 -> 사대주의 군사독재체제로 이어지다가 1987년 6월 항쟁과 1990년대 초 동서냉전 붕괴를 통해 분단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세계사적 관점 그리고 한반도적 관점은 국내의 진보민주세력에 중요한 시각이다.
다만, 분단체제 극복과 ‘한반도식 통일’을 ‘변혁’으로 규정 짓고, 이념적 스페트럼이 모호한 ‘중도주의’를 규정짓는 ‘변혁적 중도주의’를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변혁과 중도라는 개념이 모두 이전에 사용되는 개념과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튼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한반도 전역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와 인민주권, 그리고 최소한의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새로운 세상으로 변화시키는 데 백낙청 교수의 사상과 실천이 도움이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인상 깊은 문장-

“분단체제가 괴물이란 말을 더러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분단체제가 괴물이라면 분단체제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우리 모두가 마음 속에 괴물 하나씩을 갖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점을 성찰하면서, 바깥의 괴물을 이겨내는 일과 내 마음속 괴물의 퇴치를 어떻게 동시에 수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훨씬 더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141쪽)

“핵무기 반대는 대원칙이며 당연히 북핵에 대해서도 끝까지 폐기를 주장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원칙적인 반대는 미국 등 기존 핵보유국을 동시에 겨냥하는 철저함을 보여야 합니다. 동시에 현실적으로는 한국의 시민사회든 정부당국이든 북의 핵보유를 방지하거나 철회시킬 실력이 없다는 점을 냉정하게 인식해야 합니다.”(142쪽)

“근본적으로 북조선은, 남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베트남이나 중국과 같은 수준의 독자성을 지닌 사회단위라기보다는 한반도 분단체제 속에 포섭되어 있는 매우 특수한 사회 즉 분단사회이기 때문에, 중국이나 베트남의 개혁,개방 선계를 그대로 따르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면 해결책이 뭐냐? 저는 유일한 해결책은 남북연합이라 봅니다. 전혀 다른 두 체제를 무리하게 통일하지 않으면서도 지금처럼 남북이 연합조차 안한 채 분립하는 게 아니라, 북이 중국이나 베트남과는 다른 방식으로 최소한의 안정성을 보장받은 상태에서 필요한 개혁을 하고 개방을 할 수 있게 하는 겁니다.”(202쪽)

“분단체제 극복을 역설하며 이 목표를 위해 훌륭하게 헌신해온 통일세력이 있는데, 이들 중 상당수도 분단을 의식하기는 하되 분단현실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는 문제점을 드러낸다. 한반도의 분단이 원래 외세에 의해 강요된 것은 사실이지만, 분단체제가 성립한 데에는 한반도 내부세력의 작용도 있었고 전쟁보다는 분단이 낫다는 주민들의 실감도 가세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월이 흐를수록 분단현실에서 이들을 보는 특권층이 남과 북 양쪽에 상당한 기반을 갖게 되었다. 분단체제의 이런 범한반도적 성격을 무시하고 남녘의 극우세력과 주한미군만 사라지면 자주통일이 된다고 믿는 것은, 북쪽의 정권만 무너뜨리면 자유민주주의 통일이 된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공상적이다.”(270쪽)

“진보의 이름을 걸고 전통적 통일운동세력의 진보성을 부인하는 지식인, 활동가, 정치인 가운데도 분단현실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사례는 수두룩하다. 그중 일부는 ‘반북좌파’라 일컬음직한데, 분단체제 전체에 돌려야 할 책임마저 오롯이 북한 정권에게 귀속시킨다는 점에서 수구세력의 북한 때리기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분단체제는 한반도의 남과 북 외에 세계체제의 주요 행위자들까지 관련된 복잡한 체제이니만큼 그 특정한 국면에 대한 책임규명은 실로 복잡하고 다양하기 마련이다.”(271쪽)

“반북까지는 아니더라도 북의 존재를 되도록 무시하면서 남한만의 발전을 꿈꾸는 세칭 진보세력이 의외로 많다. 특히 지식인, 학자들의 세계가 그렇다. 이는 한국의 지식계가 이 땅의 구체적인 현실에 뿌리박은 공부보다 분단이 없는 외국의 현실에 연유한 이론의 학습과 전파에 치중한 탓이라 생각하지만, 아무튼 남북의 점진적 재통합을 수반하지 않는 평화국가 또는 평등사회의 수립이라든가 남한의 독자적 사회주의 또는 사회민주주의 건설 같은 주장을 ‘아니면 말고’ 식으로 내던지는 사례를 자주 만난다. 이는 ‘후천성 분단인식결핍 증후군’이라 부른다.”(272쪽)

[ 2015년 10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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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백낙청 지음 / 창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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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백낙청 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을 읽고 / 2006. 05., 284쪽, 창비


‘한민족의 염원’이자 한반도 남북에서 발생하는 주요 문제들의 구조적인 해결방향은 ‘평화적 통일’이다. 한반도의 통일은 독일식도 아니고 베트남식도 아닌 ‘한반도식’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반도식 통일’은 ‘현재진행형’이다. 이것이 저자인 백낙청 교수의 지론이자 전략이자 사상이다. 이 책은 통일담론과 관련한 그의 사회평론집이다.

백낙청은 1980년대 말부터 줄기차게 분단체제론을 전개해 왔고,1998년 <흔들리는 분단체제>라는 제목으로 분단체제의 구조가 흔들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반도의 분단체제는 남쪽에서 그것을 받쳐주던 군사독재가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1987년 6월부터 이미 동요하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 책은 1999년 이후 저자가 <창비> 등에 발표한 글 중에서 주제에 어울린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추려서 연대순으로 배열한 것이다. 2000년 '6.15 공동선언'으로 대표되는 참여정부 중반기의 남북 분단 상황을 점검하고, 이후 남북 관계를 조망하는 글들을 다수 실었다.
그는 이 책에서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은 ‘6.15시대’를 가져왔고 ‘흔들리고 있던’ 분단체제가 드디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고 진단한다.

백낙청은 이 책을 통해 한반도식 통일이 이미 현재진행형 상황에 들어섰음을 주장한다. 
통일을 지금의 분단체제보다 국민들이 더 나은 체제에서 살게 만드는 작업이라는 인식 하에서, 국가연합 형태의 점진적인 분단체제 극복을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보는 저자는 이른바 '6.15 시대'의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전쟁 같은 불가피한 파국을 전제로 하는 일회성 사건으로서의 통일이 아니라면, 통일은 어느 순간 '도둑같이' 찾아올 것이라는 시각이다. 
이러한 시각을 바탕으로 지은이는 남북의 점진적 통합과 연계된 총체적 개혁을 6.15 시대의 목표로 제시하는 등 보다 확장된 주장을 내놓기도 한다. NL(민족해방파, 자주파), PD(민중민주파, 평등파), BD(부르조아민주주의, 온건개혁세력)의 3자결합을 제안하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서 나타난 최장집 교수의 시각을 분단시대에 대한 고려가 간과되었다는 점에서 비판하는 것이 그 예이다.  그 외에 다국적 민족공동체이자 네트워크로서의 한인공동체 건설에 대한 주장, 지속가능한 발전을 대체할 '생명지속적 발전'의 제안 등을 담았다.

이 책에서 크게 공감한 대목은 남한-분단체제-세계체제로 이어지는 구조적 연관성과 ‘한반도식 통일’이라는 개념 그리고 그런 한반도식 통일이 ‘현재진행형’이라는 분석 결과, 마지막으로 6.15 남북공동선언문 제2항의 중요성이다. 
여기서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은 “태생적으로 반민주적이며 비자주적인 분단체제가 지속되는 한 남북 어느 한쪽에서도 온전한 민주주으이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분단시대에 대한 모든 인식을 낡은 민족주의라고 배제한 채, 대한민국을 ‘하나의 자족적인 국가’로 설정하여 북유럽 또는 서유럽의 선진 민주사회의 척도로 재단할 때, 분단시대와 그에 앞선 식민지시대의 억눌리고 찌든 삶을 딛고 이룩해온 한국 민주주의의 눈물겨운 성취를 제대로 평가하기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특히 분단체제의 고착기를 특징지은 "군부독재의 유산을 청산하는 작업이 명쾌하지 못하여 3당합당, DJP연합, 노무현정권의 ‘변형’ 등을 수반하며 구질구질하게 진행되어온 현실은 분단체제의 속성상 당연한 것이고, 여기에 굳이 변형주의라는 외국 문자를 갖대댈 필요도 없다.”(65쪽)

먼저, '세계체제의 하위체제로서의 한반도 분단체제’ 그리고 '분단체제의 하위 구조로서의 남북의 체제’라는 백낙청의 체계 구성은 한반도의 역사적인 과정과 현재 실제로 구성되어 있는 역학구조를 반영했다는 점에서 한국인들의 관점을 확대시킨다.
남북의 정치체제와 한반도 분단체제가 세계체제의 하위체계라 함은, 한반도의 분단과 남북 양쪽에서 ‘결손국가’ - 이 개념은 ‘정상국가'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외세에 의해 분단이 강제된 상태에서 독립과 통일이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회가 자유롭고 자주적이며 평화와 복지가 구조적으로 어렵다는 측면을 강조한 개념이다 -가 탄생되고 유지된 이유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체제간 경쟁과 제국주의(패권주의)와 제3세계 식민지의 저항이라는 세계적인 차원에서의 대결구도 속에서 외세에 의해 분단이 강제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 열강과의 협의와 협조, 관계 개선 없이 남북 간의 노력과 합의만으로 분단체제의 해소가 쉽지 않다는 것이고, 분단체제의 해소 없이 남북 각 정치경제체제가 자율적이고 자주적으로 그리고 대다수 민중의 행복한 삶과 자유, 평등, 평화가 이룩되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한반도식 통일’이라 함은, 한반도 분단의 주체와 형성 그리고 고착화 과정으로 인하여 한반도에서의 통일은 독일이나 베트남, 예멘식으로는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전제한다. 하나의 체제가 붕괴하면서 다른 체제로 흡수되는 독일식 통일은,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국가라는 전제와 그에 따라 분단에 이르는 과정에서 독일 민중의 명시적, 묵시적 동의가 있었다는 점, 그리고 서독과 동독 사이에 내전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분단 과정과는 크게 다르고 고착화 과정 또한 전혀 다르기 때문에 한반도에 적합한 방식이 되기 어렵다. 내전을 통해 일방 체제로의 통일을 이룩한 베트남의 통일 방안 역시 한국전쟁을 치룬 경험이 있는 한민족에게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방안이며, 양쪽 정부의 상층부끼리의 담합에 의한 통일 후 합의가 불괴되어 다시금 몇 년간의 전쟁을 거쳐 통일을 이룩한 예멘의 통일 방식도 절대 다수의 민중의 동의와 참여 과정이 없었다는 점에서 한반도식 통일의 사례라 할 수 없다.
백낙청이 주장하는 ‘한반도식 통일’은 '6.15시대’와 같은 남북 화해와 교류, 경제협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가운데, 다수의 민중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통일 과정을 의미한다. 전쟁을 통하지 않는 통일, 일방의 이념이나 체제를 강요하지 않는 통일, 최종 목표로서의 통일이 아니라 과정으로서의 통일, 남북의 정부와 정치권뿐 아니라 다수 민중과 한민족 전체가 통일 과정에 주체로 참여하는 통일을 의미한다.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전인미답의 길이 바로 ‘한반도식 통일’이 될 것이다.
또한 ‘한반도식 통일’은 한반도가 통일되더라도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앞세운 또 하나의 강국이 탄생할 경우, 설혹 통일 한반도가 자본주의 사회라 한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들의 불안감을 덜어줄 수 있을까라는 점도 충분히 고려한 통일이 될 것이다.

셋째, 통일이 ‘현재진행형’이라는 뜻은, 동서 냉전체제의 붕괴와 1987년 6월 항쟁으로 인한 남한의 군사독재 체제의 극복이 분단체제를 ‘흔들게’ 만들었고 6.15 공동선언을 통해 분단체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 곧 통일이 시작되었다는 의미를 넘어선다. 즉 "분단이 극복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우리가 각기 사는 곳에서 그날그날 수행하는 크고작은 싸움이 모두 분단체제 극복운동의 내용을 이룬다. 통일작업과 직결된 교류확대라든가 민주적 권리의 확보, 대외적 자주성의 신장 등만이 아니라, 생활현장에서의 성차별이나 인권침해, 환경파괴 등을 제거하고 자기 자신부터 그러한 습성에서 벗어나는 갖가지 실천이 곧바로 ‘과정으로서의 통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목표는 ‘일회적 사건으로 이룩되는 분단극복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에, 그리고 우리들 하나하나의 마음속에 온갖 형태로 뿌리내린 분단체제의 극복’이기 때문이다.(84쪽)

마지막으로, 백낙청은 6.15 공동선언의 '남다른 의미’를 강조하는데, 그것은 “남북 정상이 직접 만나 합의하고 서명한 문건”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부분은 선언문 제2항이다.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나가기로 하였다”는 대목에 대해 백낙청은 내용이 두루물싱할뿐더러, 남북 각자가 이제까지 배격해온 상대방 제안에 끌려갔다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 조항의 애매모호한 표현이야말로 6.15공동선언을 빛내는 대화와 타협의 정신, 실현가능한 방안을 찾아내는 실천적 자세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한다.
그는 제2항의 합의정신을 “통일을 하기는 하되 너무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과 어떤 형태의 통일인지를 미리 못박지 말고 지금 가능한 통일작업부터 진행한다”는 것으로 풀이한다. 그리하여 실질적인 신뢰구축 작업을 명기한 공동선언 제4항이 비로소 힘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북의 신뢰구축은 통일을 하지 말자고 해도 불가능하고 ?┥爭貂? 통일하자고 외쳐대도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백낙청은 ‘통일에 대한 개념’을 바꾸자고 제창한다. "단일형 국민국가로서의 ‘완전한 통일’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연합제와 낮은 단계의 연방제 사이 어느 지점에서 남북간의 통합작업이 일차적인 완성에 이르렀음을 쌍방이 확인할 때 ‘1단계 통일’이 이룩되는 것이라는 새로운 발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무엇이 통일이며 언제 통일할거냐를 두고 다툴 것 없이 남북간의 교류와 실질적 통합을 다각적으로 진행해나가다가 어느날 문득, ‘어 통일이 꽤 됐네, 우니라 만나서 통일됐다고 선포해버리세’하고 합의하면 그게 우리식 통일이라는 겁니다.”(21쪽)

이 책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은 백낙청 교수의 2015년 신작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2015 창비)를 읽고서 통일담론과 한국사회 변혁에 대한 그의 담론의 궤적을 알기 위해 읽은 것이다.
거의 10년 전 저서임에도 남북의 민중 모두의 아픔과 고통을 껴안고 통일담론과 한국사회 변혁담론을 이끌어 가는 백낙청 교수의 열정과 의지가 대단하다. 그리고 고맙다. 평론집 중 통일담론과 관련된 대부분의 내용에 공감도 되었고 배운 점도 많았다. 
다만, 제3부 ’14. 박정희시대를 어떻게 생각할까’에서 '지속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로서 박정희를 평가한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결과만 좋다면 과정이 어떻게 하더라도 괜찮다’는 관점이 지난 100년 간 한국사를 망쳐왔기 때문이고, 인간의 본성에도 한국 민중의 성과와 고통에도 맞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기고 싶은 문장]

“선진국이라면 PD와 NL만의 ‘변증법적 결합’을 꿈꾸어봄직하지만, 분단국가에서 분단시대에 대한 인식, 그런 의미에서 ‘NL적 시각’이 빠진 상태로는 탁상공론에 가까운 사민주의 이외의 ‘결합’을 생각하기 힘들다. 다른 한편 PD를 배제한 NL과 BD만의 결합은 민족주의 과잉의 통일 이외의 어떠한 변혁전망도 제거된 반민중적 노선이 되기 십상이며, 그렇다고 NL과 PD의 ‘재결합’ 또한 당위론에 불과함은 민주노동당 및 민주노총 내 양 정파의 ‘내분에 시달리는 동거’가 잘 보여준다. 내분의 ‘재봉합’이야 물론 가능하겠지만, 국민의 신뢰를 얻고 한국 민주주의의 발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려면 개혁정권 및 온개혁세력과의 좀더 확실한 공감대를 바탕으로 정책적으로도 연합하면서도 자신을 차별화하는 전략이 필요하며, 이런 과정을 통해서만 ‘내분’이 ‘건강한 의견차이’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해줄 공감대가 바로 분단체제극복이 현시기 최대의 변혁과제인 동시에 남한사회의 구체적 개혁작업이기도 하다는 인식이다.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작동하는 장치가 곧 분단체제이고 남북 각기 상대적인 독자성을 갖는 사회이긴 하지만 분단체제의 매개작용을 통해 세계체제의 규정력을 받영하고 있다는 인식을 갖는다면, 자주통일론과 세계적 시각을 지닌 계급운동은 한국사회의 구체적 개혁과정에 촛점을 둔 시민운동 및 개혁정당(들)과도 자연스럽게 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68쪽)

“북핵문제 자체에 관해서는 위라가 정부 차원이건 시민사회에서건 할 수 있는 일이 엄연히 한정되어 있다. 핵무기를 배발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북이며, 이러한 북을 공격해서 파멸시킬 수도 있는 무력을 보유하고 그 사용 여부를 결정하는 것도 미국이기 때문이다. 두 당사자 모두에게 한국의 입장은 절대적인 변수가 못 된다.
그 점에서 ‘민족공조’든 ‘한미동맹’이든 모두 상대적인 의미밖에 없다. 한국과 미국이 대등한 맹방이 아님은 너무나 뻔한 사실인에다 오늘날 미국과 대등한 동맹관계에 있는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는 마당에, ‘한미동맹’을 절대시한다는 것은 미국에 대한 맹종을 서약하는 행위 밖에 안 된다. 다른 한편 북측의 핵개발 문제를 한국정부와 협의해서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이 북의 안전을 담보해줄 능력도 없는 마당에 ‘민족공조’를 절대시하는 일 또한 허황되고 무책임한 처사가 되기 쉽다. 우리가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을 단호하고 지혜롭게 해나가야 한다.”(238쪽)

[ 2015년 9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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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88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 지음, 서정록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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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Chernyshevksy, Nikolai) 저, 서정록 역 <무엇을 할 것인가? (상,하)>를 읽고 / 2009. 02., 748쪽, 열린책들

<무엇을 할 것인가>는 러시아의 정치사회 소설의 대표 작가로 평가받는 니꼴라이 체르니셰프스끼(1828-1889)의 대표작이다. 소설 작품임에도 저자는 단락마다 독자와 대화하는 것처럼 주인공과 이야기 전개 흐름에 대해 독자들에게 말을 건다. 별로 접해보지 않은 색다른 방식이었다.

“나는 자유롭고 싶어요!”
소설은 ‘자유’를 향한 베라 빠블로브나의 당찬 외침과 함께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의 외침은 그녀가 처한 현실 앞에서 무기력하다. 
성년이 되었으나 가난하고 비천한 대저택 관리인의 딸, 19세기 중반 러시아에서 그런 여성에게 허락된 삶이란 자신을 구원해 줄 남자를 기다리거나 하급 노동자가 되는 것뿐이다. 이미 정해진 삶만이 강요되는 곳, 누구도 다른 삶의 가능성을 말하지 않는 곳, 베라는 이런 자신의 현실을 ‘지하실’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지하실’에 ‘사랑’이 넘치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바로 이 ‘사랑’이 곧 그녀를 구속하는 지하실의 정체다. 흔히 사랑한다면 상대방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에 불과하다. 
베라의 어머니가 ‘사랑’을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삶을 딸에게 강요하고, 부잣집 아들 이반이 오로지 헌신적으로 남편을 보필해줄 여성을 배우자로 찾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모순투성이의 관계와 억압상태가 지속되는 한 베라에게 자유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베라는 이 ‘지하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전혀 다른 방식의 사랑의 모험을 감행한다. 

베라와 사랑에 빠지게 될 두 남자 로뿌호프와 끼르사노프. 그들은 언제나 자신의 이익에 따라 행동하는 '이기적 유물론자'들이다. 물론 여기서 ‘이익’과 ‘유물'은 화폐적 척도로 계산되는 무엇이 아니라 존재를 충만하게 하고 삶을 고양시키는 선택을 말한다. 이를 위해 그들은 원하는 것들의 ‘무게를 하나씩 달아’보고 ‘그중에서 가장 유리한 것을 선택’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동정, 연민, 희생으로 점철된 관계는 서로를 구속하고 괴롭게 한다. 그러니 오로지 저 자신을 위하여 사랑하고, 일하고, 관계하는 이 이기적 계산법에 따라 베라는 집을 나오고 새로운 시대를 앞당기고자 노력하는 신청년, 로뿌호프와 결혼을 한다.

베라와 로뿌호프의 사랑은 그 자체가 ‘지하실’로부터 탈출하는 일이며, 동시에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일이기도 하다. 두 사람의 부부 관계는 아주 파격적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유지하기 위하여 각방을 썼고, 각방에서도 서로의 자유와 독립을 존중했다. 그러나 그들은 ‘중립의 방’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외부와 소통하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또한 베라는 자신의 꿈을 살려 가난한 여자들과 함께 운영하는 ‘봉제공장’을 만든다. 구성원 모두가 공장의 주인이기에 그들은 각자의 관심과 능력에 따라 소비조합, 공동주택, 배움터 등의 새로운 관계와 생활들을 조직해 간다. 공장은 이제 단순히 생계를 위한 노동의 현장이 아니다. 그곳은 새로운 관계와 실험 속에서 가난한 여성들이 삶을 바꾸고 존재를 충만하게 하는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베라와 로뿌호프는 단지 스스로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그 일련의 행보들이 구체제를 타도하기 위해 바꾸고 외쳤던 바로 그 혁명의 실천이 된 것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 혁명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이제 사회를 바꾸고, 일상을 바꾸는 것을 넘어 존재의 근본적인 고양을 시도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것은 베라와 로뿌호프의 결별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하듯이 이들의 사랑 또한 머무르지 않는다.

19세기 중반 저자가 짜르 치하의 수용소에 투옥되어 있는 동안 집필한 이 소설은 '사회주의 이념을 최초로 구현한 소설’로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레닌, 스딸린, 뜨로츠끼 등 20세기 초반 소련의 혁명가들이 읽고 큰 영향을 받은 책으로도 유명하다. 레닌은 자신의 책 제목을 이 책의 제목에서 따와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살벌한 짜르 체제에 의해 옥중에서 감시와 검열이라는 처지에서 저술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체르니셰프스끼는 자신이 당시의 청년들에게 제시하고자 하는 것을 소설 작품을 통해 우회적으로 전달한 것이다. 이 책은 1860~70년대 러시아의 ‘인민주의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체르니셰프스끼는 베라와 로뿌호프, 끼르사노프와 라흐메또프(그는 이상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데, 자기의 생활을 포기하고 사회로부터 소외되면서도 민족과 사회를 위해 사히적 책임을 다하려는 비판적 지식인이다) 등 러시아의 혁명적인 인텔리겐찌야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주는 모델-새로운 도덕적 정열을 지닌 합리적이고 유물적인 인물들-을 제시함으로써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인텔리겐찌야의 자기 희생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다른 이들의 삶을 함께 변화시키는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모델인 것이다. 또한 비합리적인 아버지 세대에게 '누구의 죄인가'라는 무력한 비판의식이, 아들 세대에 와서는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구체적 행동으로 전화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보여 주는 진보와 인간성에 대한 확고한 신념 그리고 '새로운 인민의 출현'에 대한 확신은, 당대 지식인들뿐 아니라 수많은 청년들을 움직이게 했다. 러시아 지식인들을 움직이게 했던 체르이셰프스끼의 진정한 힘을 이 책을 통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체르니셰프스끼는 1828년 7월 28일 볼가 강 근처의 중부 도시의 한 성직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대학시절 '페트라셰프스키 서클'에서 활동하면서 러시아, 프랑스, 독일에서 출판된 많은 사회학 서적을 섭렵했으며 1853년 당대의 급진적 문학잡지인 <동시대인>에 기고하며 문학적 활동을 시작한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해 1860년대의 급진주의적인 젊은 세대들에게 진보주의적 사상과 미래에 다가올 이상적 사회와 인간상, 그 미래를 준비하기 위한 현재의 삶의 목표와 실천해야 할 점 등을 설파했다. 
1862년 혁명적 사상을 고취하던 잡지 <동시대인>은 출판 정지를 당하고, 진보적 사상 전파의 선봉에 서 있던 체르니셰프스끼는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롭스크 형무소에 투옥된다. 1863년 이 감옥 생활 중 그의 대표적인 사회·정치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동시대인>에 연재하게 된 것이다.

체르니셰프스끼는 애초부터 예술적 형상화라든가 <예술을 위한 예술> 같은 것에는 애시당초 관심이 없었다. 그는 삶(生)을 능가하는 예술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예술의 기능은 인간의 삶에 내포되어 있는 진실과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즐기는 데 도움을 주는 '생의 교과서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인간관을 실천함으로써 사회를 개선시키는 것이었고, 그 실천의 일환이 바로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기 위한 소설쓰기였다. 따라서 이 책은 단순히 소설로만 읽을 책은 아닌 것이다. 문학적으로는 분명히 빈약하기 짝이 없다고 평가받기도 하는 이 소설이 높은 명성을 누려 온 것도 쟁쟁한 혁명가들의 칭송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책은 출간 당시인 1860년대부터 기존의 문화를 전면적으로 거부코자 햇던 젊은 지식인들과 대학생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환영을 받았다. 이는 이 책이 당시 러시아 사회의 지적이고 감성적이고 도한 사회적인 요구에 부응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사회와 문화, 그리고 인민들의 삶이나 생활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필자는 작품의 주인공 베라와 로뿌호프의 말과 행동이 당시 청년들이나 지식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파급력을 미쳤는지 느끼기 어렵다. 다만 19세기 중반 러시아의 상황에 대한 여러 자료들은 '유럽의 산업화가 가져온 프롤레타리아트의 비참한 모습과 귀족과 소시민들의 이기적이고 부패한 사회’라고 지적하는 것을 보면, 이 작품이 큰 파장을 일으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 중반 러시아에 만연한 비참함과 무기력함, 그리고 부정부패와 이기주의는 21세기 한국 사회도 많은 부분 닮았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의 지배층과 기득권 세력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는 것이지만, 진보와 개혁을 주창해왔던 많은 인사들과 지식인들이 베라와 로뿌호프 정도의 헌신과 열정, 그리고 사랑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두 번째로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작품 하나만으로도 체르니셰프스끼는 기나긴 복역과 유배 끝에 1889년 6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나 지금까지도 전세계 청년들과 진보주의자들에게 숭배와 영감의 대상으로 남을 것이다.

[ 2015년 9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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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개럿 하딘(Garrett Hardin) 저 <공유지의 비극 The Tragedy of the Commons > 1968년, 사이언스지

필자가 ‘공유지의 비극’을 접한 것은 경제학과 관련해서였다.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개념은 '지하자원, 초원, 공기, 호수에 있는 고기와 같이 공동체의 모두가 사용해야 할 자원은 사적 이익을 주장하는 시장의 기능에 맡겨 두면 이를 당세대에서 남용하여 자원이 고갈될 위험이 있다’는 정도의 내용으로 통한다.
따라서 이는 시장실패의 요인이 되며 이러한 자원에 대해서는 '국가의 관여'가 필요하다. 아니면 '이해당사자가 모여 일정한 합의를 통해 이용권을 제한하는 제도를 형성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공유지의 비극>은 미국 UCSB 생물학과 교수인 개럿 하딘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으로 1968년 12월 13일자 사이언스지에 실렸던 논문(http://www.sciencemag.org/content/162/3859/1243.full)의 제목이다. 실제로는 과학 잡지에 실릴 정도의 논문이라기 보다 짧은 에세이라고 한다. 한글 번역본도 본문이 11쪽 정도 밖에 안 될 정도로 짧다.

그렇지만 이 짧은 에세이가 불러온 파장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공유지의 비극〉은 학자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이해하기 쉽고 명쾌한 비유였으며, 여러 학문의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훌륭한 예시였기 때문에 생태학과 경제학, 사회학 등 온갖 학문의 논문에서 수시로 인용되었다."
구글에서 검색해보면 The tragedy of the commons(Hardin) 은 무려 24,541회나 다른 논문에 인용되었다고 한다(2014년 10월 기준). 논문이 아닌 곳에서 언급된 것까지 합치면 진짜 어마어마한 인용수를 자랑할 것이다.

하딘의 이론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공유지를 이용해 소를 키우는 목동들이 있는 유럽 어느 장원과 관련된 한 예제이다. 이 예제는 1833년 경제학에 대해 글을 쓰던 윌리엄 포스터 로이드의 팜플릿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딘의 예제에서 목동들의 관심사는 과밀방목으로 인해 공유지가 손상될지라도 소를 공유지에 집어넣는 것이다. 
100 마리의 양을 기를 수 있는 제한된 공유지에서, 100 마리 이상의 양을 기르면 결국 목초지는 과도하게 풀이 뜯겨 재생산이 되지 못하고 점차로 황폐해져 간다는 것이다. 축산업자들은 너도 나도 공유지를 이용할 것이고, 자신의 부담이 들지 않는 공짜이기 때문에, 공유지에 양을 계속 풀어 놓기만 하지 줄이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풀이 없어진 초지에는 양을 기를 수 없어 축산업자들 전체가 손해를 보게 된다. 결국 개인들의 이익 추구에 의해 전체의 이익이 파괴되어 공멸을 자초한다는 개념이다.

〈공유지의 비극〉 이전에 배경이 된 책으로 꼽히는 작품이 있는데, 역시 생태학자인 레이철 카슨이 1962년 발간한 <침묵의 봄>(Silent Spring)이다. <침묵의 봄>은 '사람들의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DDT를 남용하고 있고, 이 결과로 본래 의도했던 잡초나 병충해의 제거 수준을 넘어서 모든 곤충과 나아가 조류와 동물들까지 모두 사라지고 생태계가 파괴되어서 봄이 와도 아무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상황을 우화로 묘사'하고 이것이 우려만이 아니란 것을 실측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현대의 환경운동과 환경윤리학의 시초가 된 책으로, 하딘의 〈공유지의 비극〉 역시 이 연장선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하딘의 경우는 '개인의 이기심과 그에 따른 환경파괴'라는 구조를 '개인들의 이기심과 그에 따른 경쟁적 환경파괴'로 변경시키는 것으로써, 개인의 문제에서 '개인간의 경쟁'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로 이동시키는 것으로 문제의 심각성을 좀 더 부각시킨 것이다.

하딘이 ‘공유지의 비극’을 기고한 후 전세계의 많은 과학자들과 환경운동가 그리고 시민들과 정치가들이 널리 알렸던 것은 인류의 숲과 공기와 물과 바다의 남용에 대해 어느 정도 견제를 하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구상 곳곳에서 숲과 밀림은 파괴되고, 물과 공기는 오염되고 있고, 각종 생물체는 멸종하고, 화석연료와 핵연료 등 지구 자원을 고갈시키는 파괴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인류 전체의 아니 지구상 생명체 모두의 ‘공유자원’임에도 말이다.
50년이 지난 현재에도 ‘공유지의 비극’이 음으로 양으로 지속되는 것은 인간의 탐욕,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근본적 문제점, 다양한 갈등과 감정 때문일 것이다. 이는 그동안 지구촌의 리더를 자임했던 국가들과 정치인들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으며, 국가 권력의 크기와 경제적 부의 크기와 자본주의 체제를 운용한 역사에 비례하여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을 방지하려는 마음가짐은 인류의 후세대와 다른 생명체, 그리고 자연에 대한 존중과 경외심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유한한 생명체로서 인간의 겸허함이 필요한 것이다. 각각의 개인에게도 필요하겠지만, 지구 곳곳에서 이윤 만능, 성장 만능, 개발 만능의 정치경제 체제, 사회문화 체제를 변혁시켜야 가능할 것이다.

<공유지의 비극>은 법정스님의 추천 도서 중 서른 아홉 번째이다.
<공유지의 비극>의 한글번역본 전체는 http://blog.daum.net/hy2oxy/8692910 를 참고.
법정스님의 추천 도서 나머지가 궁금하신 분은 http://book.interpark.com/blog/connan/1816296 를 참고
다른 책에 대한 리뷰가 궁금하신 분은 블로그 http://book.interpark.com/blog/connan 를 찾아가시면 됩니다...^^

[ 2015년 9월 18일 ]


개렷하딘, 공유지의비극, 시장, 국가,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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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 - 큰 적공을 위한 전문가 7인 인터뷰
백낙청 외 지음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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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창비 기획팀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 : 큰 적공을 위한 전문가 7인 인터뷰>를 읽고 / 2015. 05., 351쪽, 창비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와 그 후속 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듯이, 한국 사회는 ‘상식을 초월하는 반칙과 사익추구 행위’가 대대적으로 저질러지는 사회다. 낮부끄러움 없이 거짓말을 해대고 공공연히 적반하장을 해도 무방할 만큼 수구 보수의 기득권이 완강한 사회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한국사회는 이명박 정부 때보다 여러가지 면에서 더욱 후퇴한 듯 하다. 재벌 만능과 독재로 상징되는 과거로 회귀하는 와중에 야당과 진보진영의 대응은 대다수 국민들에게 이명박 정부 때보다 희망이나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 게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이다. 지난 10년가 한국사회가 왜 이토록 후퇴하고 있는지 그 원인조차 불분명하다. 내노라하는 전문가나 학자들조차 합리적인 이유나 방향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사회가 처해 있는 구조적 모순을 밝히고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도움을 받기 위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살펴보다가 한국의 진보적인 지성인 중의 한 명으로 평가받는 백낙청 교수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다. 
물론 최근 모 소설가의 ‘베끼기 논란’으로 '창비’와 백 교수의 신뢰와 이미지는 흔들리고 있다.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 별개로 한국사회의 원로이자 지성인으로서 백 교수가 바라보는 한반도와 한국사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이야기는 도움받을 만한 것이 있을 것이라 믿어 본다.

백낙청은 서장 ‘큰 적공, 큰 전환을 위하여’에서 2012년 말 대선에서 야권이 패배한 이후 책임감을 느끼며 한동안 침묵했다고 전한다. 그의 침묵은 세월호 참사의 발생으로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 이후 “전처럼 살지 않겠다는 공감과 결의만으로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말로는 다 바꾸겠다면서 종전처럼 누리고 사는 삶을 전혀 바꿀 뜻이 없는 이들이 사회의 온갖 요처에서 버티고 있는데다가, 그들을 비판하고 심판하자는 야권의 정치인과 지식인도 여전히 ‘세월호 이전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일쑤”였다. 그는 2012년처럼 여전히 ‘한국사회에 아직도 시대가 요구하는 큰 전환을 이룩할 적공이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세월호 참사는 "제때에 전환을 이루지 못할 경우 나라가 어떤 혼란과 난경에 빠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대참사”였던 것이다.

그는 ‘대전환’을 위해서는 ‘적공’이 쌓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적공(積功)'이란 사전적으로 ‘공력, 공덕을 쌓는다’는 뜻이다. 즉,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한 토대를 준비한다는 의미이며, 이는 곧 우리가 ‘한국사회 대전환’의 목표를 위해 해내야 할 실천적 일감들을 마련하고 연마함을 가리킨다. 여기서 말하는 ‘대전환’이란 곧 87년체제를 넘어서 한국사회와 한반도의 총체적 개혁의 새 지평을 여는 전환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 우리 사회가 여러모로 발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분단체제의 질곡 속에서 여전히 극복되지 못한 문제들이 도처에 남아 있고, 수구적인 사회 기득권구조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단기적·중기적·장기적 개혁과제를 제대로 분별하고 배합하여 총체적인 진전을 이루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2012년 대선의 목표로 ‘2013년 체제 만들기’를 기획했지만 실패했다. 그는 패배의 이유를 “‘희망 2103’을 향한 적공이 부족했다”고 진단한다. 자신의 2013년 체제론은 “87년 체제가 1961년 이래의 독재정권을 종식시킨 뒤에도 독재시대와 여전히 공유한 '53년 체제(정전협정체제이자 분단체제)'라는 토대를 변화시켜야만 87년 체제가 극복될 수 있다는 주장이 중요하게 포함되었지만, ‘2013년 체제’를 구호로 채용한 인사들조차 그 점을 간과하기 일쑤”였다는 것이다.그리고 2013년 체제론의 해김 개념에 해당하는 ‘변혁적 중도주의’가 정작 2012년 선거에 임박해서는 실종되었음을 스스로 토로하면서 성찰한다.
또한 “시대적 전환에 저항하는 기득권 세력이 힘을 과소평가하는 어리석음을 보였”고, 자신을 포함한 많은 이들이 한국 사회의 막강한 수구,보수 동맹에 대한 인식이 충분치 못했다”고 평가한다.(18쪽)

백 교수의 ‘2013년 체제론’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분단체제’인 ‘53년 체제’와 분단체제의 하위 개념인 ‘87년 체제’에 대한 개념 설정이다. 
‘87년 체제’가 군사독재를 무너뜨리면서 한국사회에 일정한 개혁을 가져왔지만, 분단체제인 ‘53년 체제’를 근본에서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에(민주정부 수립과 615 공동선언을 통해 좀더 흔들기는 했지만) 참여정부 중반부터 한국사회의 전 분야에서 과거로의 후퇴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진보적인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87년 체제’는 세계적인 구조나 한반도의 분단체제를 고려하지 않고 남한의 일정한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서 백 교수의 ‘87년 체제’는 일반적인 ‘87년 체제’와는 다르다.

백 교수의 분단체제론에 따르면 “대한민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그렇지만) 분단되지 않은 나라들과 달리 분단체제라는 중간항의 매개를 거쳐서야 근대세계의 ‘국가간체제’에 참여하는 변칙적인 단위”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분석에 의하면, 대한민국이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양쪽 다 ‘결손국가’다.
그는 4.19 혁명 이전의 대한민국은 불량국가였다. 이승만 정권은 "독재정권으로서도 무능하고 지리멸렬한 정권이었으며, 이 시기의 대한민국 자체가 국가세입의 큰 부분을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면서 국가운영도 미국 고문관들의 현장개입에 좌우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26쪽) 따라서 박정희 시대에 들어서야 ‘불량국가'에서 벗어나 결손국가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백 교수는 1987년 이후 한국은 어떻게 진단할꺄?  "대한민국의 획기적 개량은 물론 6월 항쟁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로 87년 체제라는 한결 나아진 사회가 출범했다. 그러나 이때도 결손국가의 결손상태에 대한 ‘근본적인 수리’는 행해지지 않았다”고 진단한다. 이렇게 개량은 되었지만 여전히 위태로운 체제가 노태우~노무현 정부를 거치는 동안 “제때에 새로운 전환을 이룩하지 못하고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 아래 역주행을 거듭하면서 불량국가의 면모가 다시 두드러지게 된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는 것이다.
이런 한국사회의 현실을 종합하면 “원래 별로 나라답지 못한 나라를 국민이 피 흘리고 땀 흘려 살 만하게 만들어놨다. 그것이 근년에 와서 도로 망가진 면이 많아졌다. 그래도 아직 더 망가질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것이다.(26~28쪽)

이와 같은 백 교수의 진단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하고 동의한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철저히 진상규명하자는 국민 500만 명의 요구를 ‘종북좌파’로 몰아붙이는 정권과 일부의 행태, 국가기관의 선거개입과 불법행킹을 ‘국가안보’라는 이름으로 버티는 정부여당, 대법원의 판결마저 뭉개는 재벌의 행태, 무능과 부정부패의 대명사가 된 정보기관과 국방부, 몰상식과 비열함의 극치를 보이는 언론과 사법부, 친일과 독재의 역사를 미화하려는 일각의 움직임은 그의 ‘분단체제론’과 ‘53년체제론’이 아니고서는 해명이 불가능하다.

백 교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전에 경고한 3대 위기, 즉 ‘민주주의의 위기, 중산층과 서민경제의 위기, 남북관계의 위기’가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불행히도 적중했”으며, 이에 더하여 ‘4대강살리기사업’에 의해 전대미문의 국토파괴라는 ‘제4의 위기’도 겹쳤다고 진단하며, 각 위기에 대한 자신의 분석과 해결방향을 제시한다.

서장 이후의 본장에는 백낙청이 인터뷰어가 되어 정치, 경제, 교육, 환경, 여성, 노동, 남북관계의 7개 핵심분야 전문과 차례로 만나 나눈 대담을 엮은 것이다. 이 기획의 키워드는 ‘적공’과 ‘전환’이다. 경제편 대담에서 경제학자 정대영의 한국경제의 구조적이고 고질적인 문제와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맞물리며 민생의 위기가 심해지고 있다는 지적을 시작으로 정치 편의 정치평론가 박성민의 야권 대권주자들의 대한 흥미로운 대담까지 살펴보며 우리 사회가 이뤄내야 할 적공과 전환은 무엇인지 이들의 인터뷰이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한다.
그가 만난 7인의 전문가들의 각자 분야에서 현장에 밀착해 있는 활동가, 연구자들이다. 백낙청은 이들 분야에서 한국사회를 정확히 해석하고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지속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대전환의 상을 마련하고자 한다. 이 대담집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변혁적 중도주의’이다. 편협한 정파적 프레임을 버리고 참다운 변혁과 개혁을 이뤄내기 위해 ‘변혁적’ 관점을 견지하는 것이며 이러한 대전환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교육 등 각 분야에서 입체적인 적공이 이루어져야 한다. 즉, "적공과 전환이야말로 우리 앞에 놓인 위기를 극복하는 해법의 기본 덕목”이다.
7인의 전문가로 책에 등장하는 정대형, 이범, 김연철, 김영훈, 안병옥, 조은, 박성민이 특정 분야에서 나름의 적공을 쌓고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그들 중 백낙청의 ‘분단체제론’과 ‘큰 적공, 큰 전환’론과 교감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특히 이범과 박성민은 ‘분단체제론’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책을 덮으면서 “운동의 방향을 정확히 설정하고 내실있게 적공을 해나가지 않으면 결코 그 뿌리를 건드릴 수 없는 분단체제 아래 우리가 살고 있음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인사가 백낙청”(6쪽)이라는 기획자들의 평가에 동의하게 된다. 그의 진단과 평가와 방향설정에 대해서는 시비가 있을 수 있지만, 그가 제시한 ‘분단체제론’은 한반도와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대전환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백 교수가 이 책을 발간하는 데 사전 공부의 결과라 할 수 있는 <2013년체제 만들기>, <어디가 중도이며 어째서 변혁인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 등을 읽어봐야겠다.

7인의 적공는 어디까지일까.

"우선 ‘경제 편’ 대담에서 경제학자 정대영(송현경제연구소장)은 한국경제의 구조적이고 고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채 세계적인 경기침체와 맞물리면서 민생의 위기가 날로 심화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는 박근혜정부하의 전셋값 폭등, 수출부가가치 부진, 복지 실종 등의 경제문제를 꼽으며 이를 해결할 방책으로 ‘반값집세’ ‘중소기업 육성방안’ ‘법인세·소득세 구조 개선’ 등을 내놓는다. 장기침체가 예견되는 상황에 맞는 중장기적인 경제정책도 중요하다. 그는 전세계적인 성장 패러다임에 그저 순응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를 되물으며 일자리 중심의 ‘생각의 전환’이 필요함을 일깨운다. 또한 기존의 ‘정규직-비정규직’ 대결 프레임이 단지 "조금 나은 서민하고 조금 더 못한 서민 사이의 싸움"일 뿐이므로 좀더 큰 틀에서 구조적 문제해결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상층의 재벌이나 전문직, 고위관료에서 공기업 직원, 대기업 정규직, 대기업 비정규직으로 이어지고 또 중소기업 노동자, 영세자영업자 등으로 내려오는 직업에 따르는 신분의 서열구조를 전체적으로 파악해야 불평등과 차별의 문제를 노동자들 간의 싸움으로 국한시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교육평론가 이범(민주정책연구원 부원장)과의 ‘교육 편’ 대담은 ‘교육문제는 곧 민생문제’라는 범사회적 프레임을 제안하는 대담이다. 이범은 교육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진보진영에서 내세우는 구호에도 통념과 금기의 틀이 있음을 지적하며 초중등 교육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작업을 통해 협소한 시야를 넓힐 것을 주문한다. 대표적으로 지난 10여년간 대학서열화, 학벌주의 위주로 교육문제를 바라보면서 교사들의 일상적인 직업윤리 실천운동이 사라져버린 탓에 자사고 등 비평준화 학교 난립, 과도한 대입경쟁, 불공정한 내신평가 등 학생과 학부모가 피부로 느끼는 문제에 등한해졌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응하여 이범은 보편적 수강신청제, 수평적 고교선택제, 국립대·사립대 통합선발제 등을 내놓는데, 특히 초중등 교육의 입시경쟁 완화를 위해 제시하는 한국형 A레벨 제도는 입시의 공정성을 높이고 사교육 수요를 줄이는 등의 효과를 지닌 획기적 방안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천안함사건 이후 5·24조치로 냉각 일변도에 처한 남북관계는 어떻게 풀 것인가. ‘남북관계 편’에서 김연철(인제대 통일학부 교수)은 군비증강의 악순환을 끊어내고 남북경제협력을 새롭게 모색하는 방도를 제시하며, 중장기적으로 자주적 외교와 국방 정책의 수립, 두만강 등 접경지역 사업 등 한반도 평화체제 디자인에 대해 논한다. 근래 연이어 터졌던 참혹한 병영사고를 두고 ‘징병제와 모병제’에 관해 벌이는 대화는 국방문제가 우리 청년과 부모 세대 모두의 민생문제임을 드러내는 흥미로운 토론이다. 또한 박근혜정부에서 두드러진 군 출신 인사들의 등장이 민주주의 훼손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또한 이를 어떻게 문민통제 해나갈지를 논하는 부분도 주목을 요한다. 

박근혜정부가 최대 과제로 꼽는 ‘공공개혁’의 당사자인 철도노동조합의 위원장 김영훈의 ‘노동 편’은 현 정부가 이전 정부들에 비해 공공부문에 ‘개혁’의 칼을 들이대며 우선적인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공공부문에 이어 민간부문에 대한 공세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을 낳게 하며 이에 따라 공공·노동 부문이 선제적 개혁안을 내놓고 사회복지와 안전망 확충을 요구하는 것이 운동의 활로임을 역설한다. 2013년 철도민영화 시도에 맞서 전사회적 연대를 이뤄낸 경험을 살려 관성적인 구호 대신 다수 국민의 공감을 이끌어낼 안을 내놓는 대목에서는 새로운 노동운동의 패러다임을 기대해보게 된다. 또한 민주노총 위원장 시절 통합진보당 등 정파문제에 대처했던 에피소드 등 그간 털어놓지 못한 속내를 들을 수 있는 기회다. 

후꾸시마 원전사고와 세월호참사 이후 우리는 ‘돈보다 생명’이라는 구호를 절감하고 있다. ‘환경 편’에서 안병옥(기후변화행동연구소 소장)은 ‘생명보다 돈’이라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생태적 전환을 이뤄야 할 시기를 놓치게 되면서 현상유지는커녕 대규모 참극을 불러왔던 사례를 제시하며 ‘월성1호기 재가동 결정’ 등이 어떤 파국을 불러올지를 경고한다. 또한 환경문제의 주요한 관심사 중 하나인 기후문제에서는 "너무 거대한 변화"가 주는 무력감을 떨칠 수 있는 구조적·개인적 해법을 제시한다.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접목, 녹색당의 미래를 논하는 대목은 한반도 분단상황에 입각한 새로운 생태적 비전을 구체화하는 데에 빠질 수 없는 논의다. 두 대담자가 성장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개괄하며 ‘적당한 성장’ 패러다임에 대한 입장 차이를 조율해가는 대목은 성장과 생태가 어느 지점에서 만나야 할지에 대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사회학자 조은(동국대 명예교수)과 함께한 ‘여성 편’은 2010년대 한국사회에서 페미니즘이 처한 예기치 않은 역풍을 다루면서 시작한다. 민주화 이후 여성평등을 위한 노력이 진전되어왔음에도 성폭력·성추행 문제가 끊임없이 이슈화되는데다 근래 들어 IS 가담 청년의 반페미니즘 발언 등 사회적으로 여성에 대한 공격성이 눈에 띌 정도로 강화되었다. 이와 더불어 보수·진보를 불문하고 퍼져나간 ‘출산율이 낮아 국가위기, 이기적 골드미스’라는 이데올로기에 대해 조은은 날카롭게 비판한다. 이는 여성문제를 넘어선 양극화·고용불안정·보육·사교육 문제 해결과 연결지어야 하며 특히 진보진영은 잘못된 생각을 확대재생산하기보다 여성진영과 연대해 대안담론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본인이 참여하는 해고노동자 손해배상가압류 반대모임의 활동을 통해 여성운동과 다른 운동의 연대가 어떻게 실현 가능한지를 차분히 들려준다. 성소수자 문제, 성평등과 남녀조화 문제에 관한 대담자 간의 열띤 공방은 여성문제를 인문학적 차원에서 한층 깊이있게 성찰할 수 있게 해준다. 

2017년 대선에서 누가 어떤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가는 모두의 관심사다. 현 정부에 대한 실망뿐 아니라 야권에 대한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궁금증이다. 정치평론가 박성민(MIN컨설팅 대표)의 ‘정치 편’은 문재인·박원순·안철수·안희정 등 야권의 대권주자들에 대한 분석이 흥미로운 대담이다. SNS가 활성화되면서 유권자들이 정치인에 대해 어느정도 영향력을 갖게 되었지만 그에 비해 관료와 사법권력의 힘이 커지고 이를 통제하는 정치권의 힘이 약화되었다는 분석은 87년체제 말기 한국정치의 한 단면을 선명하게 드러내준다. 박성민은 우리 정치평론이 정치인 촌평을 넘어 중장기적 전망을 갖춰야 정치가 다시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역설하는데, 이는 백낙청이 쓴 서장 [큰 적공, 큰 전환을 위하여]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즉, 선거승리에 집착해서는 선거조차 이길 수 없으며 시대전환에 역행·저항하는 기득권세력의 거대한 힘을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는 주문이다. 상대의 힘을 파악해야 우리가 ‘중도’의 폭을 어디까지 넓힐 수 있을지를 가늠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분단체제 극복을 위해 우리의 시야를 이명박·박근혜 비판에서 근대 한국정치사 전반으로, 남한에서 한반도로 넓히는 일이 필수적이다. 이른바 ‘변혁적 중도주의’에 대한 두 대담자 간의 다면적 공감은 한반도 안보이슈 앞에서 ‘당당하게, 턱턱’ 제 입장을 밝힐 수 있는 담대한 정치인의 탄생을 바라는 바람으로 모아진다."

[ 2015년 9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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