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이덕일 지음 / 만권당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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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덕일 교수 최신작 <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2015 만권당)

“(한국 주류)역사학계가 중국 지도를 표절했다! ‘동북공정’ 지도를 통째로 베낀 <동북아역사지도>에 묻는다!”

2015년 4월 17일 여의도 국회 회의실에서 국회동북아역사왜곡대책특별위원회(동북아특위, 위원장 대리 김세연 의원)에서 '<동북아역사지도> 편찬사업 관련 논의'가 진행되었다.
이 사업은 국민 세금 47억원을 받은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김용덕 ~2008년/ 정재정 2012년/ 김학준 ~현재)의 주관 아래 동북아역사지도편찬위원회를 구성하여 2008년부터 진행된 국책사업이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은 2006년 9월, 한국과 중국, 일본 등 다른 동북아시아 지역 나라들 사이의 역사분쟁에 대처하기 위한 상설기구 설립에 대한 법률에 의거 기존의 '고구려연구재단'과 통합되어 만들어진 교육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47억여 원의 세금을 쏟아붓고 60여 명의 학자들이 8년 여에 걸쳐 작업한 동북아역사지도 프로젝트 결과물 일부가 국민 앞에 공개되었다.
동북아특위 회의에 처음 공개된 동북아역사지도는 충격적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저자와 특위 위원들은 편찬위원회(참석자 서울교대 임기환)가 제출한 '동북아역사지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지도의 핵심적인 문제점은 고대사와 독도에 집중되어 있었다. 고구려와 한나라 국경선이 세로로 무 자르듯 뚝 잘려 있다. 편찬의원회의 ‘실수(?)’로 독도가 증발했다. 또한 4세기를 나타낸 지도에 신라와 백제가 쏙 빠져 있다.
저자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지도들의 놀라운 비밀을 폭로한다.

이 책은 저자가 <동북아역사지도>가 왜 엉뚱하게 제작되었는지 지도의 제작 배경과 편찬위 참석자들의 전후 행적 등을 분석하였다. 국회 동북아특위 속기록도 담았다.
그는 제작 과정의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대단히 치밀하게 의도적으로,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지도라고 평가한다.

저자는 동북아역사지도가 “중국 동북공정을 추종하고, 일본 극우파의 침략사관을 그대로 따르는 지도”임을 현장감 있게 조목조목 설명한다. 지도 속에 배어 있는 식민사학의 관점들을 지적하며 고조선과 한사군, 위만조선, 임나일본부, 그리고 독도 문제까지 1차 사료를 근거로 총괄적으로 짚어감으로써 논란만 있고 논쟁이 없는 국내 사학계에 또다시 경종을 울린다.
그는 한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한반도 북부가 중국사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위나라 조조가 경기도 일대까지 점령했다고 그려놓았으며, 일제 식민사학이 발명한 ‘<삼국사기』>초기 기록 불신론’에 따라 4세기까지도 한반도 남부에는 백제도 신라도 없었다고 주장하는 지도”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기에 식민사관에 젖어 있는 한국 주류 역사학계의 현주소를 고발한 것이다.

그런데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이런 지도를 도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동북아역사재단에서 2013년까지 이 지도의 제작을 담당했던 사람은 ‘실제로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입증하는 자료와 논리가 아주 허술하고, 간도 영유권 주장이 허술하다’고 주장하던 학자였다.
단군을 신화의 영역으로 보내버리는 등 고조선사 죽이기에 앞장서온 교수(), 독도와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논리와 자료가 허술하다고 주장하는 교수()들. 한민족사를 부정하는 논문과 주장을 펼치는 학자를 감싸는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김학준).
이런 사람들이 동북아역사지도를 만든 실무자들이었다. 고양이에게 생선가게 맡긴 격이다. 동북아역사지도가 그런 꼴로 나온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일제시대 한민족사를 왜곳 조작했던 조선사편수회의 후예들이었다. 친일파 사학자와 일제 극우사학자의 제자들로 똘똘뭉친 '식민사학자'인 것이다.

저자는 식민사학자들이 ‘실수’ 따위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명백하게 의도를 가지고 지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하늘 같이 떠받들어온 조선사편수회발 ‘한사군 한반도설’, ‘임나일본부설’, 그리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에 치밀하게 입각한 지도를 만든 것이다.
한민족사의 시간과 공간, 사람들을 축소, 폄훼하여 자신들의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조선총독부 사관에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도 식민사학자들은 추종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하고 일본이 역사왜곡을 강행하는 데에는 믿을만한 한국내 동조자가 있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 한국일보 : [이덕일의 천고사설] 독도 도발, 일본이 믿는 구석 http://www.hankookilbo.com/v/597abde549c34412b9ebdf7c9e576ffa)

한국의 주류사학계에 도전장을 던진 이덕일의 정체성만큼 이 책 역시 역사학 분야의 인사가 아니라면 도발적이인 내용이다. 물론 한국에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고, 일본에 아베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일 역사전쟁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지만, 21세기까지 국내에 일종의 ‘적군’ 또는 ‘스파이’ 같은 자들이 암약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가히 충격적이다.

안타까운 점은 국내외에서 각종 사고를 치며 식민사학 연구기관으로 비난받는 고구려역사재단과 동북아역사재단이 참여정부 임기 중에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참여정부의 교육부와 국회, 그리고 교육관계 공무원들이 선발을 하고 연구용역을 발주했는데, 어째서 저런 친일식민매국 사학자들이 사업을 장악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근현대사 왜곡에 앞장서는 뉴라이트도 참여정부 기간에 탄생하기 시작했다. 설마 당시 정부여당도 한통속이었나?
이처럼 식민사학의 뿌리는 강고해 보인다.  그런 식민사학과 뉴라이트가 친일과 독재 후예들이 장악한 이명박 정부 이래 교학사 교과서 파동과 '역사교과서 국정화’라는 퇴행을 일으키고 있다. 역사의식이 남아 있는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7~80년대로 퇴행하는 한국사회의 내면을 공부하고픈 욕심에 근현대 이전의 한국사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로 했다. 역사를 일제시대와 독재시대로 퇴행시키려는 범죄적 행위는 청와대나 국회뿐 아니라 이미 역사학계에 암적으로 도사리고 있는 듯하다.

이주한 교수의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2015 역사의아침)을 시작으로, 이덕일 교수의 <사도세자의 고백>(1999 푸른역사)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2000 김영사)까지 읽었다. 덕분에 3년 전에 읽었던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1997 석필)도 다시 훑어보았고,
이 책 다음에 읽으려고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2009 역사의아침)과 <조선 왕을 말하다 1,2>(2010 역사의아침)도 준비해 놓았다. <우리 안의 식민사관>(2014 만권당)은 그 다음에..

[ 2015년 12월 0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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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 1980년에서 90년대 초까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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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는 전두환 일당의 1979년 12.12 군사쿠테타 및 1980년 광주민중 학살과 뒤이은 광주민중항쟁에서 시작하여 1990년 김영삼이 역사의 대역죄인으로 등장하는 '3당 합당'까지 이어진다.
1980년대의 출발은 미국과 전두환 일당에 의해 민중들의 흥건한 피와 처참한 패배주의로 시작된다. 하지만 민중들과 새로운 세대는 한국전쟁 후 한 세대에 걸친 선배들의 헌신적인 투쟁과 희생을 목격하면서 스스로 역사의 주인임을 자각하기 시작하여 조금씩 투쟁의 돌파구를 열어가다가 마침내 역사적인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일구어낸다.
비록 1987년 양 김씨와 민족민주운동의 분열로 인해 외세의존적인 군사독재 일당이 재집권에 성공하고 1990년 또다시 김영삼 등의 배신으로 보수대연합에 국가권력을 찬탈당하지만, 민중들과 민족민주운동 진영은 서서히 역사의 주인으로 발돋움하고 있음을 이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저자 박세길은 1941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태평양전쟁과 한민족 말살책동, 이에 굴복한 수많은 지식인들의 변절과 친일행위를 딛고 중국과 만주, 국내에서 끈질기게 저항하여 8.15 해방에서부터 굴곡되고 ??겨진 한민족의 삶을 다루었다. 북한의 역사 또한 공개된 자료와 정보를 중심으로 균형있게 다루었다.

박세길의 한국현대사 서술 관점은 한국전쟁 이후 1990년대 초까지 국내 역사학자와 지식인 어느 누구도 바라보지 않았던 한민족 전체의 관점, 분단체제를 극복하고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관점, 지배자들이나 기득권자들의 입장이 아닌 민중들의 입장을 중심으로 하였다.
따라서 기존의 국사 교과서나 언론, 주류 지식인들이 감추거나 외면했던 남북한 전체의 모습,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러시아-미국-일본의 음모와 움직임, 민중들의 역동성에 그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1940년대 초에서 1960년까지의 한국현대사 1단계와 1961년부터 1979년까지의 한국현대사 2단계의 공통된 특징은 '냉전대결'과 '소련봉쇄'라는 세계최강 제국주의인 미국의 동북아 군사패권전략에 한민족과 남한 민중이 철저하게 희생된 것이었고, 그러한 특징은 한국현대사 3단계까지 이어졌다.
군사쿠테타와 광주민중학살을 통한 전두환 일당의 등장과 전국민적인 6월 항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반란 세력의 단죄 없이 1987년 헌법이 개정되고 '광주 5적' 중의 하나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보수대연합 '3당 합당'은 동북아시아에서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미국이 얼마나 철저하게 친일파 후예들과 군사독재 잔당과 결탁하여 남한의 정치,경제,군사,문화 전반을 관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 동기이자 결과라 할 수 있다.
반면에 자주, 민주, 통일과 '일하는 사람이 주인되는 세상'을 원하는 민족민주운동 진영과 민중들은 분단체제 극복과 반외세 반독재 전선으로 단결하고 연대하지 않고는 외세와 친일-친미 군사독재 후예들의 간교한 분열책동과 무력탄압, 언론조작과 경제적 수탈에 맞서 최소한의 기본권과 생존권도 이루기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주요 고비마다 분단체제를 이용하여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치공작과 여론조작, 파쇼탄압과 야권분열, 기득권 유지를 획책해 온 미국과 냉전수구세력들의 지배전략은 2013년인 지금도 여전히 강력하다는 점에서 민중들과 민주진보진영에 가장 큰 숙제로 제기된다.

1961년 미국의 지지와 지원 아래 민주당 장면 정권을 군사쿠테타로 무너뜨린 박정희 군사독재체제는 1978~1979년 YH무역 노동자 등 민중들의 투쟁과 대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유신 철폐투쟁의 힘이 부마항쟁으로 폭발하였고, 이에 따라 발생한 지배집단 내부의 분열이 김재규 등의 저격으로 무너졌다.
박정희의 사망과 유신체제의 붕괴에 대해 다수의 민중들은 환호했지만, 미국과 친일-친미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리는 것에 불안감을 느꼈고, 야당과 민주세력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박정희 체제에서 성장한 일단의 정치군인 집단인 '하나회'가 주축이 되어 또다시 군사쿠테타를 일으켰다. 미국의 지원과 보호를 바탕으로...

박정희와 달리 전두환 일당은 그동안 성장한 민중들의 힘을 탄압하여 말살하려 하고, 민주세력의 분열을 공작,조장하면서 언론과 행정체제를 장악하였고, 6개월 뒤 2차 5.17 군사쿠테타를 자행했다. 여기에는 무능한 보수여당인 김대중-김영삼 세력과 '5.15 서울역 회군'으로 상징되는 비겁한 학생운동 지도부가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전두환 일당은 5.17 군사쿠테타 이후 유일하게 군사독재에 저항하는 광주시의 대학생과 민중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였고, 광주민중들은 결사항전으로 맞섰다.
광주민중들의 결사항전 소식은 남한 전역에 소리소문 없이 번져나갔고, 학생들과 민중들은 미국과 전두환 일당의 폭압통치를 뚫고 7년 만인 1987년에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을 만들어냈다.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은 전두환 국가반란 세력을 법으로 처단하지 못한 한계와 재벌체제를 혁파하지 못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해방 이후 처음으로 정당하고 정상적인 절차를 거쳐 유신헌법을 민주헌법으로 개정하였고 직선제로 정권을 선출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외세와 군사독재 일당의 청산이라는 민중들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전두환 일당의 분열책동에 말려든 김대중-김영삼 보수정치세력과 민족민주운동 세력은 분열을 거듭하여 광범위한 관권,금권 부정선거를 자행한 노태우 일당에게 정권을 빼앗겼다.

그렇지만 민족민주운동(진보) 진영과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 지식인 등 민중운동 진영은 분열의 아픔을 딛고 자주적인 대중조직을 광범위하게 결성하여 새로운 대체세력으로 거듭났고, 김대중 중심의 정치세력보다 세력 규모가 약하지만 권력에 대한 탐욕은 더 강했던 김영삼은 민중운동 진영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미국과 노태우 군사독재 잔당들의 꼬임에 넘어가 김종필 유신잔당과 함께 '3당 보수대연합'을 만들어냈다. 
민족민주운동 진영과 민중운동 진영은 보수대연합을 토대로 금권, 관권 부정선거를 더한 김영삼 일당에게 1992년 선거에서 패배했다.

1980년대 남한의 경제사정은 외세의존적, 수출의존적, 매판재벌 중심으로 운영된 박정희의 부실한 경제정책의 연장선에서 노동자, 농민들의 피땀으로 전후 30여 년동안 그나마 일으켜 세운 경제성과마저 외세와 매판재벌에게 빼앗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결과는 전두환 일당의 무능함과 수동적 경제정책, 외국자본의 수탈구조, 저임금-저곡가의 민중수탈 경제구조의 원인이면서도 더 심하게 왜곡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나마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이후 남한 전역에서 노동자들 스스로의 힘으로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이루어내었고, 산업 전분야와 사회 각분야의 민중들이 수탈당하는 정도를 줄여가면서 소득 수준을 높여갈 수 있었다.

1987년을 계기로 이후 민중들의 조직과 민주진보진영이 강력하게 성장하였고 이에 기반하여 민주개혁성향의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창출하여 정치,경제개혁과 남북화해, 평화통일로 한 걸음 더 전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2007년과 2012년 연속 외세 의존과 친일파-군사독재-매판재벌 잔당이라는 특징을 가진 냉전수구세력들에게 정권을 탈취당한 이유가 무엇일까.
앞으로 1990년대 이후 20년간 한국현대사에 대해  공부하고자 하는 목적이다.

*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3 > 중에서 인상적인 대목을 블로그에 정리했습니다. http://blog.daum.net/hy2oxy/8691710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 1, 2, 3권 전체에 대한 주요 내용은 http://blog.daum.net/hy2oxy/8691548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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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 휴전에서 10.26까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2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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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시리즈 3권 중 제2권은 한국전쟁 직후부터 친일 군사쿠테타범 박정희의 사망까지를 다루고 있다. 한국현대사가 1945년 8.15 해방에서부터 한국전쟁까지가 첫번째 커다란 획을 그었다면, 한국전쟁 이후 이승만과 박정희로 이어지는 기간은 예속과 굴종, 부정과 부패, 압제와 착취라는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자리잡는 두번째 단계라 할 수 있다.
한국현대사의 두번째 커다란 획을 가르는 과정은 미국에 의한 정치군사적, 경제적 종속과 이승만, 박정희로 이어지는 친일파 출신의 범죄자들의 압제와 착취, 그리고 미국과 친일파 권력집단에게 기생하는 매판자본가들의 육성으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1953년에서 1979년에 이르는 한국현대사를 다시 공부하면서 몇 가지 특징과 교훈을 재발견하였다.

특징은 첫째, 한국의 정치 및 군대가 외세(미국)에 반영구적으로 종속되었고 미국은 자신들의 군사패권전략을 위해 끊임없이 한미일 군사동맹체제를 시도했다는 점. 둘째, 한국의 경제 역시 미국과 일본, 특히 1970년대로 갈수록 일본에 의해 구조적으로 철저하게 종속되었다는 점. 셋째, 한국의 자본은 그 속성상 매판자본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 넷째, 그 과정에서 친일/친미파 집단의 대리인이자 권력중심인 이승만과 박정희 일당은 미국의 사전 승인, 동의 하에 집권하거나 집권을 연장하였다는 점. 다섯째, 집권세력은 단 한번도 부정선거를 저지르지 않은 적이 없으며 부정부패와 정경유착, 정치자금과 뇌물이 구조화되었다는 점. 여섯째, 한국 내 정치경제 상황은 미국의 세계 정치경제군사전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 일곱째, 친일 군사 독재의 압제권력의 무기는 반공반북 이데올로기와 부정부패에 의한 뇌물이라는 점. 여덟째, 한국의 민중들은 어떠한 탄압에도 굴함없이 저항하며 스스로 국가와 자기 삶의 주인이 되기 위해 나선다는 점이다.

교훈은 특징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첫째, 미국과 일본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종속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국가적, 민중적 수탈이 지속된다는 것. 둘째, 특히 군 작전지휘권 환수와 미군 일변도의 무기, 군사전략, 시스템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주국방은 요원하며 항상 미군의 군사패권전략에 좌우되어 위험을 초래한다는 것. 셋째, 기술자립과 금융독립성을 유지해야만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국내경제를 관리할 수 있다는 것. 넷째, 정치 군사 경제 언론 학계에서 친일파와 그 후예들은 청산해야만이 자주국방도 자립경제도 가능하다는 것. 다섯째, 정경유착과 부정부패의 고리를 끊어내는 것이야말로 정치발전과 경제발전의 근본이라는 것. 여섯째, 반공반북 이데올로기를 끝장내기 위한 남북화해와 평화통일 노력이 광범위하게 전개되어야 한다는 것. 일곱째, 민중들의 불굴의 의지와 본성을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현대사의 두번째 과정을 구조적으로 규정했던 기본 요소는 참혹했던 한국전쟁의 결과였다. 한국전쟁이 남한에 끼친 최악의 결과 중 한 가지는 저자의 주장처럼 '저항세력의 괴멸과 권력에 대한 굴종'이었다. 
"미국과 이승만, 친일파는 한국전쟁을 통해 남한에 존재하는 일체의 항일독립세력과 저항운동의 씨앗을 말려 버리고자 했다. 그 결과 이땅의 항일세력과 민중운동은 괴멸적 타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미국은 휴전과 동시에 남한을 자신의 요구에 맞게 개조시키는 작업을 서둘러 진행시켰다."(p.13)

그리고 한국전쟁은 남한의 정치 및 군대가 외세에 반영구적으로 종속되는 구조를 정착시켰다. 
"한국전쟁을 경과하면서 남한에 대한 외세의 지배가 고정화된 가장 중요한 징표는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이라고 할 수 있다. 주한미군은 1949년 6월 일시 철수하였지만 한국전쟁을 계기로 다시 이 땅에 밀려들어 오게 되었다. 주한미군의 영구주둔을 공식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1953년 10월 한미 양국간에 체결괸 한미상호방위조약이다. 가장 중요한 조항인 제4조에 따라 미국은 우리 민중의 의사는 물론이고 남한 정부의 아무런 협의 없이도 자유자재로 자신의 병력을 이 땅에 주둔, 배치시킬 수 있는 특별한 권한을 지니게 되었다."(p.14)

또한 한국전쟁 이후 한국의 경제는 미국에 의해 철저하게 종속되었다. 그것은 미국과 이승만 일당에 의해 원조경제와 잉여농산물, 부실한 농지개혁을 통해 이루어졌다. 이승만 일당은 미국의 원조와 잉여농산물, 권력기구 등을 통해 불법 정치자금과 뇌물을 무수히 수령하여 악용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미국이 남한 땅에 쏟아부은 원조액은 31억 달러를 넘었지만 사실 이 액수는 한국전쟁 중에 미국이 파괴한 남한 재산의 총액을 간신히 넘어서는 것이었다.[한국경제의관점, 이내영] 물론 이러한 원조조차 대부분이 국방비에 충당되었다."(p.22)

미국은 자신들의 정치군사적, 경제적 이익이 보장되는 한 이승만 일당의 반민족성, 반민주성, 반통일성, 반민중성 어느 하나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이익이 조금이라도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판단되면 그들이 장악하고 있던 군사적, 경제적 물리력을 가차없이 휘둘렀다.

1952년 한국전쟁 와중에 부산 정치파동을 통해서 불법적으로 집권연장을 꾀했던 이승만은 불과 2년 뒤인 1954년 대규모 부정선거를 감행한 후 폭력을 동원해 '사사오입' 개헌을 강요했다. 이윽고 1955년 대통령 선거에서 또다시 부정선거를 통해 조봉암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그런 후에 진보당과 조봉암씨에 대한 사법살인을 자행한 것이다.
이승만은 1948년 5.10 단독선거에서부터 1952년, 1954년, 1956년, 1960년까지 모두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즉, 이승만 정권은 정통성은 커녕 정당성도 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진보역량과 민중역량이 궤멸되어 산발적인 저항과 반발 수준에 머무르던 민중들은 단 7년 만에 다시금 역사의 주인으로 일어서기 시작했다. 운명의 순간은 1960년 3월 15일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 벌어졌다. 이승만은 부정선거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총칼로 짓밟으려 했고, 마침내 이승만 정권은 민중들의 질풍노도와 같은 4.19 혁명에 의해 무너졌다.
그러나 4.19 혁명은 미완성이었다. 살인마이자 범죄자 이승만은 미국의 품으로 도망갔고, 이승만 정권 아래서 수많은 범죄를 저지른 친일파 군부, 정치인, 관료, 매판재벌은 아무도 처벌, 청산되지 않았으며(폭력경찰 일부만 처벌), 각종 악법과 제도도 그대로 존속하였던 것이다. 결국 기존 친일파들이 잔존하는 가운데 의원내각제와 장면 내각이 출벌하였다. 장면 내각은 혁명도, 개혁도 어느 하나 이루어내지 못한 채 이승만 정권과 똑같이 부정부패했고 미국은 경제기술원조협정을 통해 한국경제를 직접 좌우하기 시작했다.
4.19 혁명 이후 압제와 탄압이 약해진 틈을 뚫고 민중들과 시민들은 스스로 각성되어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한 투쟁을 벌였고, 친미와 반공을 사슬을 끊고 민족통일의 열망을 끌어올렸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핵과 유엔, 그리고 달러를 독점적으로 지배하면서 천하무적을 자랑했던 미국도 195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뚜렷한 쇠퇴의 기미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소련의 경제,군사력이 강력해졌고, 동아시아(중국, 한반도)에서 불붙기 시작한 민족해방운동의 기운은 1950년대를 넘어서면서 순식간에 중동 아랍과 남미, 아프리카 등지로 확산되어 갔다.
195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남한의 이승만 정권처럼 미국의 원조정책이 흔들리면서 붕괴되거나 궁지에 몰리는 친미 독재정권이 속출하고 있었다. 베트남의 고딘 디엠, 터키의 멘데레스 정권 등이 그 예이다. 이와 함께 이라크처럼 반제국주의적인 정권이 등장하기도 했다. 사태가 이렇게 발전하자 미국은 이들 나라에 깊숙히 개입하여 허약한 정권은 갈아치우고 반미 정권은 허물어뜨리는 방법을 통해 보다 강력한 친미 정권을 세우는 조치를 단행했다. 아울러 해당 나라 민중의 자주적 독립과 사회의 민주적 개혁에 대한 열망은 무참하게 짓밟혀졌다. 이같은 조치는 대부분 반동적인 군부를 매수하여 쿠테타를 종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961년 박정희 친일파 정치군부의 5.16 군사쿠테타는 이러한 세계사적 배경과 미국의 군사패권전략 아래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박정희 군사정권 등장 이후, 한일국교정상화와 한국군이 베트남 파병이 미국이 주도 하에 하나의 군사적 목표를 위해 동시에 추진되었다. 한일국교정상화는 일본의 자본과 군대를 남한에 진출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동북아시아에서의 일본의 반혁명적인 역할의 강화를 보장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서의 의의가 있었다.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중국 포위 및 공격을 위해 저렴한 비용과 자국군의 희생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추진되었다.
박정희 일당은 민족적, 국익적 관심은 전혀 없이 굴욕적, 망국적 한일국교정상화와 베트남 파병을 폭력적으로 강행했고, 그에 따른 군인 월급과 군수물자산업 그리고 일본 원조와 차관에서 개인적인 뇌물과 정치자금 조성에만 골몰했다. 그리고 그렇게 손에 넣은 거액의 자금을 바탕으로 박 정권은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방대한 억압기구를 통해 반대세력을 감시하고 억압하거나 매수함으로써 자신의 통치기반을 결정적으로 강화시켜 나갔다. 박 정권은 엄청난 자금력을 동원함으로써 1967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후 3선 개헌을 강행하는 데 성공했다. 그 과정은 비상계엄 발동과 주한미군의 사전 허락 하의 군대투입을 남발하면서 이루어졌다.

1950년대 말부터 시작된 미국의 경제원조 감소는 원조에 의해 지탱되고 있던 한국의 경제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이승만 정권 말기부터 본격화된 이러한 위기는 장면 시대를 거쳐 박 정권에 이르러서도 수습되지 않은 채 도리어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모로 보나 1960년대 초까지 한반도의 남북에서 전개되었던 상황은 명백히 남쪽이 열세로 나타나고 있었다.
이처럼 날로 악화되는 위기를 수습하고 실추된 위신을 회복하기 위하여 미국은 '경제개발'이라는 무기를 치켜 들었다. 물론 미국은 남한에서의 경제개발을 추구하면서 단순히 위기를 수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본격적 수탈이라는 더욱 큰 이익을 목표로 삼고 출발했다.
결국 1960년대 경제개발은 남한의 경제가 원조로부터 탈피하여 자립성을 획득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주장과는 정반대로 제국주의에 의한 본격적인 수탈의 길을 여는 것에 다름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경제개발은 한국군 유지에 필요한 비용을 남한 민중의 어깨 위로 떠넘기고자 하는 미국의 의도를 반영하고 있었다. 미국의 직접적인 주도 하에 이루어진 이른바 경제개발이 최우선적으로 역점을 둔 것은 차관과 금융지원에 의한 '매판자본'의 육성과 불평등무역과 직접투자에 의한 민중에 대한 수탈이었다.
한일국교정상화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이 때에 밀려들어 온 일본 자본은 미국과는 또 다르게 한국경제의 요소요소를 장악해 들어가면서 궁극적으로 이 나라 민중에 대한 무자비한 수탈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1960년대 후반 베트남전쟁에서 실패를 맛본 미국은 심각한 정치경제적 위기에 직면함과 동시에 도덕적 위신마저 실추되는 결정타를 얻어맞게 되었고, 휘청거리며 내리막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69년 닉슨은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주한미군 일부를 철수하고 군사원조도 중단했다. 물론 이를 대체하기 위한 목적으로 핵무기 추가배치를 서둘렀다.
이에 발맞추어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을 시작으로 학생, 농민, 도시빈민 등 민중들의 민주주의와 생존권을 위한 저항이 촉발되었다. 그 영향으로 1971년 대통령 선거와 총선에서 민주역량이 높아졌다. 광범위한 폭력 부정선거로 인해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베트남 전쟁의 패배로 미국은 중국 전복을 포기하고 소련 봉쇄로 전환했다. 1970년대 초 미국은 중국과 국교를 정상화시키고 나아가 중국을 반소진영에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한반도에서의 대결상태를 일시적인나마 은폐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그것은 박정희 일당으로 하여금 기만적인 남북대화에 나서도록 사주했다. 이름하여 7.4 남북공동성명이 채택된 것이었다.
남북의 민중이 흥분과 열광으로 공동성명을 맞이한 것은 한편으로 볼 때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공동성명 문안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남북화해와 평화통일을 부정하고 미국과의 사전 협의 후 곧바로 유신체제라는 더 광폭한 독재로 치달았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하는 등 박정희 일당의 반공 소동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완전 패배하고 철수한 1975년 4월에 한층 노골적인 모습을 취했다.
1970년대 들어 미국은 남한을 전면적으로 핵기지하고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 수 있는 한국군 지사병력을 대폭적으로 증강시키며 여기에 덧붙여 일본군을 보다 적극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이 주도하는 한-미-일 삼각동맹체제를 구체화시켜 나갔다. 미국은 한국군을 보다 직접적인 형태로 미군의 휘하에 편입시키기 위한 노력이 일치감치 시도하였다. 1971년 7월 주한 미 제1군단과 한국군 일부를 포함한 한미합동 제1군단이 창설되었다. 지휘권은 당연히 주한미군사령관이었다.[1970년대 한국일지, 청사 편집부] 부분적으로 시도되던 주한미군의 한국군에 대한 직접적인 장악은 1978년 한미연합사령부가 발족된 이후 전면화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의 전쟁정책에 편승하면서 급속한 성장을 자랑했던 남한 경제는 몇 걸음 못가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미국은 국제수지 적자와 실업자 증대로부터 벗어나고자 1971년 10월 한미섬유협정의 체결을 강요함으로써 미국에 대한 섬유수출을 제한하였다. 그 결과 남한은 협정 체결 이후 5년간에 걸쳐 약 8억4천만 달러의 수출손실을 감수해야 했다.[민족분단과 통일문제, 김병오]
종전을 향해 치닫던 베트남전쟁 역시 전쟁물자 공급에 크게 의존하던 남한의 수출시장에 먹구름을 드리우는데 일조했다. 또한 1971년 한 해 동안 200개 이상의 차관기업이 일제히 파산하는 등 차관에 의존한 경제는 밑바탕에서부터 금이 가고 있었다.[프레이저 보고서, 미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이와 함께 급격한 유가인상 역시 원유의 전부를 해외에 의존하고 있던 남한 경제에 심대한 타격을 안겨다주었다.
미국의 압력에 의해 박 정권은 1972년 8월 이른바 '8.3 조치'라고 불려지는 긴급명령을 기습적으로 발표하였는데, 파산 직전에 놓여진 차관기업들은 가까스로 구출되었지만 이들 기업에 사채를 빌려주었던 소자산가들은 순식간에 재산을 강탈당해야만 했고, 은행대출의 증가에 따른 물가상승의 압박은 고스란히 민중의 어깨 위로 떠넘겨지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미국과 박 정권은 외국인투자와 차관도입에 의존한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하지만 모든 공업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기계, 부품, 소재 등은 제쳐놓고 값싼 숙련노동에 의존하는 최종 조립단계에만 치중한 것이다. 그 결과 부품, 소재 등은 계속해서 일본 등의 수입에 의존해야만 했고 따라서 전체 수입액은 계속적으로 증가했다. 또한 애초부터 경제성과 무관하게 추진되었다. 그리고 설비판매를 노린 외국자본의 박 정권에 대한 뇌물공세, 박 정권의 정치자금 획득을 겨냥한 차관도입 욕망, 그리고 기업을 담보로 금융특혜를 기대하는 국내 매판자본의 요구 등이 뒤엉키면서 중화학공업화는 시장수요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가운데 과잉, 중복투자가 행해졌다.

1970년대 내내 유신독재는 어느모로 보나 이성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1973년 8월 탄압을 피해 일본에서 망명투쟁을 벌이고 있던 전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이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강제 납치, 귀국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 지식인, 언론인들의 투쟁이 다시 일어났지만 박정희 일당은 민청학련 사건 날조로 맞섰다. 이에 대해 다시 거대한 저항이 시작되었고 박 정권은 동아일보사 탄압, 인혁당 재건사건 관련 피고인 8명 사형, 4대 전시입법을 제정하여 탄압에 나섰다.
1975년 4월 서울대 김상진 열사의 저항을 계기로 민주진영 전체는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이에 몹시 다급해진 박 정권은 5월 13일 기어코 악명 높은 긴급조치 9호를 발동시켰다. 긴급조치 9호에 대한 가장 처절한 투쟁은 1977년 9월에 있었던 청계 노동자들의 '노동교실 사수' 투쟁이었다. 그러나 청계 노동자들의 죽음을 각오한 투쟁은 그동안 긴급조치 9호에 억눌려 침체되었던 각계 민주세력에게 새로운 활력을 주었다.
1978년에 접어들자 상황은 보다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이 해에도 투쟁의 도화선은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 즉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투쟁과 함평 농민투쟁으로 학생들의 유신철폐투쟁 또한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학생들과 재야인사, 해직기자, 해직교수들까지 저항에 나섰다.
1979년에 들어서자 재야 민주화운동세력, 농민들의 감자 피해보상 투쟁과 오원춘씨 납치 사건 규탄, yh무역 노동자 신민당사 농성투쟁으로 이어졌고, 박 정권은 급기야 김영삼 의원을 제명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대학생들의 거센 저항이 이어졌고 시민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하기 지가했다. 박정희 일당은 부산과 마산에서의 강력한 저항을 비상계엄과 군대 동원으로 막아보려 했지만 민중들은 개의치 않고 연이어 거대한 저항으로 맞섰다.

그러던 중 10월 26일 유신정권의 괴수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었다. 10.26 사건의 진상은 아직도 여전히 흑막에 가려져 있다. 다만 몇 가지 단편적인 사실들이 사건의 배후에 미국이 존재했음을 암시해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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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 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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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에 대한 의존, 민주주의와 상식의 실종, 헌법 유린, 기득권끼리 장난치는 정치, 공직자들의 파렴치, 95% 가까운 국민의 민생파탄, 분단체제의 고착화, 남북화해와 평화와 통일에 대한 혐오...
이 모든 것들이 일제 강점 후 100년이 지나서도, 해방 후 68년이 지나서도, 한국전쟁 종료 후 65년이 지나서도, 1987년 6월 항쟁 후 26년이 지나서도 계속되고 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외형적인 민주적 절차와 경제규모는 OECD 10위권으로 인정받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내실과 국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근혜 정권의 안하무인을 목격하면서 드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한국현대사에서 찾아보기 위해 이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1945년 해방에서 1950년 6월 한국전쟁 직전까지 다룬 한국현대사 1편은 2013년 한국사회의 뿌리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기존의 편견과 상식과 제도권 정보에 의존했던 기억과는 달리 해방 후 5년간 한반도에서는 아주 잠깐의 희망과 열정, 그리고 그 뒤를 이은 5년간의 끔찍한 학살과 탄압과 파괴가 이어졌던 것이다.

저자는 방대한 기초자료와 언론기사, 증언과 인터뷰 등을 취합하여 한국현대사를 새롭게 재조명하였다. 일제의 식민사관이나 친일파 출신의 국사편찬위원회, 제국주의자 미국의 관점이 아닌 오로지 한민족과 민중의 관점에서 기존의 사건과 사실을 재발견하고 재해석했다.

저자의 결론은 한민족과 민중 스스로의 일제로부터 해방과 통일된 자주독립, 평등평화 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음에도, 미군정의 군화발과 친일파들의 부역 아래 아래 한민족과 민중의 염원은 처절하게 꺽여나갔던 것이다. 한민족과 민중은 해방 후 5년 동안 자주독립과 평화통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미군정과 친일/친미파 앞잡이들과 끝없는 항쟁을 이어나갔다는 것이다.
나 역시 책을 덮은 후 저자의 결론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친일과 사대주의, 부정과 부패의 뿌리는 오래 전부터 자라나고 있었고, 도려내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현대사 1편을 읽고 나면 아래와 같이 정리하게 된다. 좀 더 자세한 정리내용은 개인 블로그(http://blog.daum.net/hy2oxy/8691548)를 참조하면 유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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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파편들 - 도널드 그레그 회고록
도널드 P. 그레그 지음, 차미례 옮김 / 창비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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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 대사의 < 역사의 파편들 Pot Shards: Fragments of a Life Lived in CIA, the White House, and the Two Koreas >를 읽고 / 2014. ., , 창비

미국 정부에서 퇴직한 후 남북 화해와 동북아시아 평화체제 구성을 위해 일정 부분 역할을 하고 있는 그레그 전 미국대사의 회고록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무척 궁금했다. 그가 백악관과 CIA에서 주로 근무했다는 것과 특히 그의 재직 중 한국에서 근무한 기간이 제법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뿐 아니라 베트남과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을 오랫동안 담당했고, 그 개인적으로도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박정희 군사독재체제, 광주항쟁과 87년 6월 항쟁, 남북관계와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으며 어떤 식으로든 직간접적으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출판사와 언론은 이 책을 그레그 개인의 역사이자 동시대 미국과 한반도 역사에 대해 진술하는 내용으로 홍보한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가족을 위주로 한 개인사와 그 가치를 중시하는 저자의 시선이 회고록 전체에 일관되게 나타난다. 즉 개인의 회고록이 핵심인 셈이다.
물론 그는 1973년 미 중앙정보국(CIA) 한국 지국장으로 부임한 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아시아 담당관과 조지 H. W. 부시 부통령 안보보좌관을 거쳐 1989~93년 주한 미국대사를 역임했다. 그는 두차례 김대중 구명에 관여했고, 노태우 정부의 주한미군 전술핵 철수, 팀스피릿 한미군사훈련 중단 결정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따라서 그레그는 이 책에서 미국의 주요 외교현장에서 일한 자신의 회고를 통해 1950년대 이후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의 실상을 말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접한 사건과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도, 60여년간의 외교경험과 통찰력으로 20세기 후반 베트남전, 이란 콘트라 스캔들, 쿠바 핵위기 등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힌다.

그레그는 철저한 미국의 공무원이지만 최소한의 양심과 합리성을 지닌 보수주의자로 보인다. 이런 점은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그의 회고와 평가 부분을 읽어보면 느낄 수 있다. 
그는 1962년부터 64년까지 워싱턴에서 베트남 담당부서 책임자로 근무하고, 1970년부터 72년까지 싸이공 외곽의 지역담당관으로 일하면서 베트남전을 몸소 체험한다. 2만명 수준의 소규모 주둔에서 50만명의 미군 전투병이 실전에 배치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내부자의 시각에서 왜 미국이 베트남에서 실패했는가를 진솔하게 토로한다. 정책 결정자들의 오만과 편견, 관료적 편의주의, 일방주의적 사고가 정보와 정책 면에서 참담한 실패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의 베트남에 대한 이해 부족, 베트남 민족해방의 성격에 대한 무지도 날카롭게 짚어낸다. 그레그는 호찌민의 경우와 더불어 미국이 사담 후세인, 김정은에 대해 악마화라는 오류를 범하는 것에 우려를 표한다. 
“우리가 싫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외국지도자나 집단을 무조적 악마화하려는 경향이 우리를 끊임없이 곤경에 몰아넣는 원인이라는 점이다. (…) 그 결과는 악선전과 선동정치에 의해 커져버린 상호적대감, 관련된 모든 상대에게 돌아가는 피해뿐”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지적은 대다수 한국인들에게도 해당될 것이다.

그의 회고를 통해 확인한 것 중 한 가지는 박정희 군사정권의 김대중 납치사건과 전두환정권의 김대중 사형집행을 막아낸 일화이다. 그는 당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상부 지시를 의도적으로 위반하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실장 박종규를 찾아가 압박했다고 토로했고, 결과적으로 당시 권력실세인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해임에 이르게 하는 과정을 기술했다.
그 이외에도 그가 미국의 정보요원이자 외교관으로 한국에 긍정적인 역할을 한 사례는 많다. 1991년 무엇보다 한국에 전진배치됐던 전술핵 철수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와 더불어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로버트 리스카시 장군과 더불어 워싱턴을 설득, 1991년 12월 팀스피릿 한미군사훈련을 전격적으로 중단시킨 바 있다. 그 결과 ‘남북한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체결되는 등 남북한관계에 중대한 전환점을 가져왔다. 그뿐만 아니라 남북한 유엔 동시가입, 한소 수교 등에도 결정적 공헌을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도 한국인으로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레그는 미국의 대북 정책에 대해 “북한문제는 미 정보국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되어온 실패 사례다”, “이념적이고 오도된 접근방식은 그동안 한국과 미국(부시)정부가 합작해서 북한과의 새로운 관계를 위해 마련했던 뜻깊은 발전을 비극적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부당하게 중단시켜버렸다”라고 평가한다. 그리고 그 실패의 근원에는 미국정부가 북한의 지도자를 ‘악마화’하는 데 있다고 단언한다.
그는 2009년 공직 퇴임 이후에도 대북관계 개선의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최근에 국내 언론들에 소개되었듯이 2009년 여름 김정은이 평양의 공개무대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며 한반도의 중대 변화가 임박했음을 알렸을 때, 조지 바이든 부통령에게 김정은을 미국으로 초빙하자고 편지를 썼다가 거절당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그레그는 민간외교를 계속하며 남북 그리고 북미 간의 평화를 구축하는 데 자신이 기여할 바를 찾아가는 중이다.

“한반도의 분단은 끝낼 수 있고 또 반드시 끝내야 하는 비극이다. 그것은 서로 계속하고 있는 악마화가 대화로 바뀌고 화해가 이뤄질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는 말로 회고록 전체를 마무리한다. 이는 그가 회고록을 펴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것임을 알게 해준다.

사실 이 책을 통해 내가 무척 궁금했던 부분은 얻지 못했다. 내가 궁금했던 부분은 한국전쟁과 박정희의 5.16 군사쿠테타, 한국 중앙정보부 창설에 대한 미국 CIA의 개입, 유신쿠테타에서 미국의 역할, 김재규의 저격과 12.12 군사쿠테타에서 미국의 개입 정도,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었다. 대부분 사건의 경우 그레그는 정책 결정과 집행 체계 선상에서 근무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한미 간의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미국정부의 공식 입장으로 일관할 뿐이다. 
어찌 보면 한 나라의 고위 정부 관료로써 취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취해야 하는 입장인 셈이다. 이런 점에 대해서 나는 이 책에서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얻지 못했지만 저자에게 특별한 불만은 없다.

한국사회에서는 자신의 이념적 견해에 따라그레그를 ‘책략가', ‘자유주의자’ 또는 ‘친북인사인’라고 평가한다. 이 책의 발문에서 문정인 교수는 그에 대해 세가지 전혀 다른 이미지로 간략하게 정리했다. 
"첫째, 미 CIA 출신으로 미국의 배타적 국익에만 충실했던 외교관 이미지다. 둘째, 한국 민주주의와 대북포용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온 자유주의자 이미지다. 셋째로 북한을 여섯번이나 다녀오고 북한 입장을 옹호, 대변하는 ‘반정부·친북’ 인사 이미지”다.
즉 오랫동안 그와 교유해온 문정인 교수에 따르면 그레그는 보수반동도 아니고 친북인사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나라 미국을 사랑하고 국익을 중요시하는 애국자이며, 그에게 미국의 국익은 민주주의·인권·평화라는 가치의 신장이다. 그가 한국 민주화와 한반도 평화를 위해 애쓴 노력 또한 근대 이래 인류가 지켜온 보편적 가치들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다는 것이다. 문정인 교수의 평가에 대해 나도 동의한다. 독자들도 이 책을 읽은 후 자신만의 평가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출판사는 이 책에 대해 "개인의 기억을 중시하면서도 객관적 진실에 다가가려는 노력, 뛰어난 감성과 유머감각을 겸비한 이야기 솜씨는 흡입력을 더해준다. 무엇보다 과거형에 머무르지 않는 미래지향적인 시선은 여타의 회고록들과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라고 평가한다.
저자가 책 속에서 ‘객관적 진실’에 다가가려고 노력한다는 점은 나도 인정하지만, 객관적 진실은 개인 한 명의 기억에 의존해서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과 박정희의 5.16 군사쿠테타, 한국 중앙정보부 창설에 대한 미국 CIA의 개입, 유신쿠테타에서 미국의 역할, 김재규의 저격과 12.12 군사쿠테타에서 미국의 개입 정도, 광주학살에 대한 미국의 개입 등에 대한 객관적 사실은 미국이 아직 공개하지 않은 국방부, 국무부, CIA의 비밀문서가 어느 정도 말해줄 것이다. 즉 2050년부터 부분적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럼에도 그레그가 ‘미래지향적’인 시선을 갖고 있다는 점은 크게 공감한다. 냉전 시대에 미국과 한국, 미국과 조선(북한)이 겪었던 상황은 이제 과거의 역사다. 미래에 한반도에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남북이 화해와 협력, 통일로 진전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대결과 갈등에 머물지 않고 후손들을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미국 역시 남북전쟁을 겪었지만 화해와 협력으로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 바로 ‘역사의 교훈’일 것이다.

[ 2015년 11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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