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는 심리학 - 자본주의를 읽는 키워드, 에리히 프롬 병든 사회를 변혁하고 ‘인간의 시대’를 열다
김태형 지음 / 서해문집 / 201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서평] 김태형 저 <싸우는 심리학>을 읽고 / 2014. 10., 400쪽, 서해문집

돈을 많이 버는 것만이 행복의 지름길인가? 먹고 살만 하면 자유롭고 행복할 것 같은데 왜 그렇지 않을까? 왜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눈 앞에 보이는 진실과 불의를 왜 외면할까? 사람들이 잘못된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알면서 그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물음들은 끝이 없다. 사회와 집단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는데, 개인의 삶과 생각, 일부 사람들의 의지와 노력만으로 살펴보아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이 책은 그런 질문에 대해 해답을, 또는 해답으로 가는 길을 제시한다. <불안증폭사회>와 <트라우마 한국사회>에 이어 김태형 사회심리학자가 내놓은 세 번째 '한국사회 심리분석 보고서 시리즈’이다. 
저자는 이미 두 저작을 통해 심리학을 대중적이고 실질적인 학문으로 쇄신하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다. 보통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이라고 하면 ‘에고’나 ‘리비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등 어려운 개념이나 번역 때문에 꺼려지는 데. 저자의 심리학은 쉬우면서 정교해 보인다.

전작인 <불안증폭사회>에서 저자는 자본주의 체제와 신자유주의 시대을 살아가는 현대 한국인들의 불안심리와 한국사회가 한국인들의 불안을 어떻게 증폭시키고 있는지 분석했다. <트라우마 한국사회>에서는 지난 100여년 한국현대사를 통해 사회와 역사가 한국인들에게 끼쳐 온 역사적, 집단적, 계층적 트라우마를 자세하게 분석하여 보여주었다.
시리즈 마지막 편인 이번 책 <싸우는 심리학>은 <불안증폭사회>와 <트라우마 한국사회>에서 시작한 한국사회 그리고 한국인의 심리를 체계적 학문으로 보여 준다. 그가 분석한 한국인의 심리가 어떤 학문적 연구 과정에서 도출된 것인지 드러낸 것이다. 어쩌면 저자가 <불안증폭사회>와 <트라우마 한국사회>를 펴낸 과정에서 연구, 분석한 과제들을 통해 자신의 심리학을 정립할 필요를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에리히 프롬의 심리학에서 실마리를 찾았고, 그 출발은 "인간은 사회적 존재(동물이 아니라)이며, 사회적 존재는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라는 다소 익숙한 명제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라는 측면에서 동물과 구분되는데, 이를 확고히 다져야 할 심리학이 그동안 '생물학적 존재'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서구의 주류심리학은 사람을 ‘개인적'인 존재이자 '생물학적' 존재로 국한하여 심리현상을 분석해 왔다.

“프롬이 주장하는 인본주의적 정신분석학의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신분석학의 비판 정신을 계승하여 전투성을 유지한다. 둘째, 사람의 무의식에 계속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진다. 셋째, 정신 건강을 해치는 잘못된 사회를 비판한다. 인본주의적 정신분석학은 소외, 불안, 고독, 심각한 공포의 감정, 활력 및 기쁨의 상실 등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원인이 병든 사회에 있다고 믿는다. 따라서 어떤 사회를 병든 사회라고 하는지, 또 병든 사회가 인간의 정신을 어떤 방식으로 병들게 하는지 그 매커니즘을 밝혀내야 한다. 넷째, 병든 세상에 대한 적응이 아닌 변혁을 권장하며, 변혁을 위한 이론을 탐구한다. 병든 세상에 순응하거나 적응해서 얻을 것이라곤 오직 정신병뿐이다. 따라서 인본주의적 정신분석학은 전통적인 정신분석학처럼 세상에 적응할 것을 권장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병든 세상을 변혁하는 사람이 되도록 사람들을 고무해야 하며, 그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론을 연구해야 한다.”(31쪽)

저자는 이제라도 올바른 심리학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에리히 프롬의 혁명성을 온전히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러한 길로 인도하는 것이 심리학 본연의 의무라고 말한다. 
특히 심리학이 단순히 개개인의 '힐링' 또는 '자기계발'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최근의 경향을 비판하면서 심리학자들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한다.

저자는 ‘싸우는 심리학’을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후계자인 에리히 프롬(1900~1980)으로부터 찾았다. 
<자유로부터의 도피> <사랑의 기술> 등으로 유명한 프롬은 애초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정통했으나,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아 전통적인 정신분석학과 결별한 뒤 ‘인본주의적 정신분석학’이라 불리는 자신의 심리학을 이끌어 냈다. 저자가 프롬에게 주목한 결정적 이유는 그가 인간을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로 바라본 최초의 심리학자였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것을 대놓고 부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동물은 먹기 위해 살지만 사람은 살기 위해 먹는다. 그러나 성욕을 인간 존재의 근간으로 봤던 프로이트로부터 인간의 뇌와 컴퓨터를 거의 동일하게 취급하는 최근의 기계론적 실험심리학까지, 이 단순한 명제에 입각해 인간의 본질을 따져묻는 심리학은 없었다.

“프롬은 프로이트처럼 단지 지지를 표명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존재(구체적으로는 경제적 하부구조)가 어떻게 사회적 의식(구체적으로는 정치적 상부구조)을 규정하는지를 심리학적으로 명확히 밝히기를 원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 경제적 기초가 어떻게 해서 이데올로기적 상부구조로 변환하는지를 밝히지는 않았다. 내 생각으로는, 정신분석의 무기를 사용함으로써 마르크스의 학설에 있는 이 간극을 메울 수 있고, 경제적 하부구조와 상부구조를 결부시키는 메카니즘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36쪽)

저자는 그동안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이 인간의 본질을 ‘생물학적 존재’로만 인식해왔다고 비판한다. 
그는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인식한다면 그에 따라 인간의 본성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본성이며 생물학적 존재의 본성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본성은 무엇일까? 
그것은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려는 속성, 세계를 목적의식적으로 개조하고 변혁하는 속성, 의식을 이용해 세계와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스스로 지휘·통제하는 속성” 등을 세가지 근본 속성으로 꼽을 수 있다. 

“프롬은 마르스크주의가 해결하지 못한 인간 본성의 문제를 그 나름대로 심리학적 차원에서 해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첫째로 인간 본성이 존재하며, 둘째로 인간 본성은 생물학적 속성이나 특정한 시기의 사회적 환경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것도 아닌 사회,역사적 산물이며, 셋째로 인간 본성에는 불변의 요소들이 있어서 그것이 사회역사의 발전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48쪽)

그렇다면 인간은 과연 자신의 본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저자는 프롬의 견해를 빌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본성에 어긋날 뿐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인위적인 동기’를 추구하도록 강요하는 ‘병든 사회’라고 진단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인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사람의 병적인 동기를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절대 다수의 심리학자들조차 진정한 동기와 인위적 동기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으니 일반인들은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수의 현대인들은 몹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것이 인간의 본성적 동기의 좌절에서 비롯된 것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으며, 인위적 동기를 진정한 동기로 착각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근현대인들은 ‘자기가 바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환상 속에 살고 있으나, 실제로는 바라도록 되어 있는 것을 바라는 데 불과하다는 프롬의 지적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125쪽)

“진정한 동기와 병적인 동기를 구분하는 것은 올바른 심리학의 첫째가는 임무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강요하고 있는 병적인 동기가 사람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폭로해야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다’ ‘사람은 원래부터 탐욕스럽다’는 따위의 잘못된 대중적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에 의해 정신적으로 불구화되어 있는 사람의 특성을 인간 본성으로 간주하는 오류에서 벗어나야, 사람에 대한 냉소적이고 허무적인 태도를 극복하고 ‘사람이 희망이다’라는 말에 공감할 수 있게 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126쪽)

현대인에게 만연한 고립감, 무력감, 권태감 등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개인들을 자발적 노예로 만들기 위해 강요해온 ‘인위적 동기’에 휩쓸리며 살아온 결과물이다. 이에 따라 현대인들은 대체로 권위주의적(무력한 자의 심리), 대세추종적(고립자의 심리), 쾌락지향적(권태로운 자의 심리), 시장지향적(인간 상품의 심리) 성격을 보인다. 
그렇다면 이처럼 병든 마음을 고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그 원인을 제공하는 병든 사회를 변혁해야만 해소될 수 있다.

“좀 과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프롬은 ‘진실에 대한 지식은 거의가 다 무의식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무엇보다 사람이 진실을 억압하는 까닭이 진실을 인식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진실이 가져올 후폭풍을 두려워하는 데 있음을 의미한다.”(156쪽)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삶의 경험을 통해 그 사회가 사람을 결코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것을 의식하고 저항하면 온갖 불이익과 탄압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기에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뿐이다.” 
“의식화는 새로운 진실을 외부에서 주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본질은 누군가가 삶을 통해 이미 말고는 있지만 명확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진실을 의식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의식화의 성공 유무는 억압을 지탱해주는 원인을 제거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의식화는 본질적으로 그가 이리미 알고 있는 진실이 의식에 떠오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억압을 제거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프롬에 의하면 억압의 주요한 원인은 공포이다. 따라서 개인 치료든 사회 치료든, 의식화는 공포가 완화될 때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를 우리 사회에 적용해보면, 한국인들에게 가장 심각한 공포인 극우보수세력에 대한 공포를 완화하거나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의식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열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157쪽) 

저자는 사람의 본성을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건전한 사회’를 상정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프롬이 말한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로 나아가자고 제안한다. 
프롬은 “물질주의적 목표를 추구하고 인간의 정신 개조를 경시했다”며 옛소련 사회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사람이 경제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은 버리지 않는다. 되레 그는 “중요한 것은 생산수단의 (형식적인) 소유권이 아니라 경영과 결정에 (실질적으로) 참가하는 것”이라며 훨씬 높은 수준의 사회주의를 주창했다. 

저자는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가 아니라 로봇화(자본주의와 옛소련 공산주의)냐 인본주의적·공동체주의적 사회주의냐”를 묻는 프롬의 문제의식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말한다. 
또 참여 민주주의를 실질화하기 위해 서로 얼굴을 맞댈 수 있는 ‘대면 집단’을 중심으로 권력을 구성하자든가, 인간 존재의 존엄 유지를 위해 기본소득과 유사한 최저생계비 제도를 만들자는 제안 등 프롬에게서 오늘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가져오자고 제안한다.

“근본적인 사회주의, 사람을 중심에 두는 사회주의를 프롬은 ‘인본주의적 사회주의’ 혹은 ‘민주사회주의’로 명명했다. 그렇다면 프롬이 생각했던 건전한 사회, 인본주의적 사회주의의 구체적인 특징은 무엇일까?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는 무엇보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된 사회이다. 그러러면 모든 영역에서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란 말 그대로 '백성이 주인이 되는 것’이니까.”(365쪽)

이 책은 독자들이 한국인들뿐 아니라 오랫 동안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에서 살아온 지구인들의 심리와 행동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단순한 이해를 넘어서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나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에게 투표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푸는 데서도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도움이 된다. 물론 대다수 한국인들의 사회심리적 상태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더할 나위가 없이 훌륭해 보인다.
따라서 이 책은 심리학자나 사회학자들 뿐만 아니라 정치인이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 그리고 한국인의 심리가 궁금한 모든 이들에게 꼭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싸우는 심리학>에 대해 단원별로 공부한 내용을 블로그(http://blog.daum.net/hy2oxy/8692613)에 올렸으니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은 참고하기 바랍니다.

-심리학자 김태형의 강연 동영상
1부 인간본성은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https://youtu.be/W9JgdaGisZY
2부 자본주의 사회에서 행복할 수 있을까? https://youtu.be/4jqVZja4Zzo

[인상 깊은 문장]

“물론 사회와 부모의 학대로 화가 난 아이들도 나름 반항을 하기는 하는데, 그 방식은 아주 다양하다. ‘예의범절을 무시하는 태도, 너무 먹지 않거나 너무 먹는 행위, 공격과 사디즘, 그리고 수많은 자기파괴적인 행위 등이 그것이다. 반항은 흔히 일종의 전면적 태업(세계에 대한 관심의 소거, 태만, 수동에서부터 가장 병적인 형태의 완만한 자기 파괴에 이르기까지)으로 나타난다.’(프롬)”(279쪽)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 아이들의 가장 일반적인 반항 형태는 소극적 반항이다. 요즈음 아이들 사이에서는 세상에 대한 완벽한 무관심, 완전한 의욕 상실, 나태함, 무의식적인 자기 학대와 파괴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아이들의 태업 역시 자신을 훈계하는 나이 든 어른에게 쌍욕을 하며 대드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학대자에 대한 반항의 한 형태이지만, 태업이 반항보다 예후가 더 나쁘다.”(280쪽)

"사람은 본성적으로 선하다. 현대인이 권위주의적, 대세추종적, 쾌락지향적, 시장지향적 성격을 갖고 있음에도 아직까지는 그들 중 다수가 악마가 되지 않은 것은, 악을 행하는 것에 대해 인간 본성이 고통으로 응답하기 때문이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사람은 선을 택한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악성 정신병자가 되면 더 이상 선을 선택할 수가 없게 된다. 따라서 진정한 악이란 곧 정신병이다. 정신 건강을 보통 이상으로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진정한 악인이 아니므로, 그가 '특별한 이유'와 맞서 싸울 용기만 낸다면 언제라도 선을 선택할 수 있다. 불이익과 위험을 감수하고 '양심 선언'을 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용기를 낸 사람들이다. 그리고 정신병과 결합된 악인이야말로 진정한 악인이다."(285쪽)

“사람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사회적 존재이다. 프롬도 동의했듯이, 사람에 관한 모든 중요한 문제는 그가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로부터 파생된다. 사람은 완전한 사회적 존재가 되기를 원할 뿐 자궁 속이나 동물로 되돌아가려는 동기 따위는 없다.”(301쪽)

“인류는 완전한 사회적 존재가 되기 위해 줄기차게 싸워왔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권위주의적, 대세추종적, 쾌락지향적, 시장지향적 성격을 강요함으로써 현대인을 정신적 사망에 이르도록 강제했다. 그리하여 인류는 완전한 사회적 존재가 되기 이해 계속 전진하는가, 아니면 정신적으로 완전히 사망함으로써 파국을 맞이하는가 하는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다.
프롬의 착각과는 달리 인류의 싸움은 우리의 마음속에 내재해 있는 ‘동물 대 사람’의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현대 자본주의를 변혁하려는 ‘다수’와 인류를 멸종 위기로 몰아붙이고 있는 현대 자본주의를 사수하려는 ‘소수’ 사이의 피할 수 없는 싸움이다.”(302쪽)

“만약 사람을 사람으로서 사랑하지 못한다면, 즉 인간 본성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군가에 대한 사랑은 필연적으로 그의 인간 본성을 파괴하게 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대인들 사이의 사랑이 빈번하게 서로를 파괴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우선 상대방의 부와 성공을 사랑한다. 상대방을 상품으로서 사랑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사코 우기지만 무의식적 차원에서는 그것이 사랑이 아님을 알고 있다.”(310쪽)

“이렇게 현대인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박탈한 첫째가는 범인은 병든 사회이다. 병든 사회는 현대인을 권위주의적, 데세추종적, 쾌락지향적, 시장지향적 성격자로 만듦으로써 그에게서 사랑의 능력을 박탈한다. 그 결과 현대인은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되었고, 점점 더 병적인 사랑을 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현대인은 더 이상 인간 본성을 실현하면서 살아가는 사회적 존재가 아니므로 사랑의 능력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인간 본성이 억압되지 않은 사회적 존재의 능력이므로, 한두 가지의 심리적 특성이나 기술 계발로는 사랑의 능력을 가질 수 없다. 연애 특강을 통해 사교술을 제아무리 익혀도 사랑의 능력이 생기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사랑의 능력은 오직 전체 심리를 변혁해 완전한 사회적 존재를 향해 나아갈 때에만 가질 수 있다. 프롬이 <사랑의 기술> 서문에서 말하려고 했던 바가 바로 이것이다.”

“‘사랑은 기술인가? 기술이라면 사랑에는 지식과 노력이 요구된다’는 프롬의 충고는 오늘날의 한국인들에게도 유효하다. 사랑은 기술이자 능력이다. 따라서 사람을 사랑하고 싶다면 당장 ‘사람에 대한 지식, 즉 인간 본성에 대한 지식’부터 배워야 한다. 또한 사랑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완전한 사회적 존재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316쪽)

“인간 본성을 실현하면서 살아가야만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으므로 사람에게는 인간적 목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프롬은 인간적 목표를 ‘참된 이상’으로, 비인간적 목표를 ‘거짓된 이상’으로 표헌하기도 했다. 인간적 목표, 즉 참된 이상은 ‘자아의 성장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촉진하는 목표’이다. 반면에 비인간적 목표, 즉 거짓된 이상은 ‘주관적으로는 매혹적인 경험이면서도 실제로는 삶에 유해한 강제적이고 비합리적인 목표’이자 ‘병적인 목표’이다.
그렇다.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람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사람답게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은 사람답게 살 수가 없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람들에게 오로지 쾌락을 위해서, 그리고 밥그릇을 위해서 살다가 죽으라고 강요한다. 하지만 쾌락을 위한 삶, 밥그릇을 위한 삶은 사람에게 그 어떤 기쁨이나 즐거움, 참된 행복도 주지 않는다.”(329쪽)

"대다수의 사람들은 생계를 이어야 하는 단 하나의 목적 때문에, 자기에게는 어떤 이익의 분배도 돌아오는 것이 아닌, 그리고 어떠한 흥미 없는 물건을 만드는 데 자신의 신체 능력이나 지적 능력의 일부분을 고용자에게 팔아넘기고, 소비자로서의 탐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일한다. 불만족, 권태, 즐거움과 행복의 상실, 삶의 허무감 등은 이런 데서 오는 불가피한 결과다.(프롬)”

“프롬은 미국의 심리학자들처럼 애매모호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왜 사회주의여야 하는가?>의 한 대목을 인용하면서, 사람의 참 행복과 인생의 의미는 세상에 기여하는 데 있다고 선언했다. ‘인생을 짧고 위험하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사회에 공헌할 때에만 인생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아인슈타인)”(330쪽)

“프롬은 ‘자신에게만 관심을 집중하고서는 건강하고, 즐겁고, 독립적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면서, ‘세상에 대해 생산적인 관심을 가지고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만이 두 발로 땅에 설 수 있다’고 말했다.
즉 사람은 오직 사회, 세계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인생 목표로 삼고 살아야만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조상 대대로 우리 한국인들이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외쳐왔던 것,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나믹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은 남긴다’는 격언의 참 뜻이 바로 여기에 있다.”(331쪽)

“현대 자본주의가 인류를 멸망의 문턱으로 이끌어가고 있는데도 ‘인류의 생존을 위한 진지한 계획은 전무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인류는 인간 본성을 회복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서야만 한다. 그것만이 인류를 멸망에서 구원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말은 절대적으로 옳다.
인간이 근본적으로 변혁되어야 하는 까닭은 윤리적, 종교적인 요청이나 현대사회이 병적인 특성에 기인한 심리학적인 요구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인류 생존의 조건이기 때문이다.(프롬)”(342쪽)

“프롬은 현 체제 내에서 정치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정신 혁명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정신 혁명에 도움이 된다.
1)우리는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며 그 사실을 안다(사람이 병들어 있음을 자각한다.)
2)우리는 불행의 원인을 인식하고 있다(인간 본성을 유린하는 병든 사회가 불행의 원인임을 안다.)
3)우리는 불행을 극복하는 방법이 있음을 인정한다(사회 혁명과 정신 혁명을 병진하되 우선은 정치 혁명에 집중한다.)
4)우리는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생활 습관을 바꾸어야 하며 어떤 생활 규범을 따라야 하는지 안다(권위주의적, 대세추종적, 쾌락지향적, 시장지향적 성격에 기초하는 삶에서 벗어나 인간 본성에 맞게,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346쪽)

“사람은 권력과 자본의 주인이 됨으로써 최상의 높이에 있어야 하고, 이웃과 공동체를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하고, 양심적으로 살 때 가장 높은 사회적 평가를 받아야 하고, 모든 허위와 불의를 비판하고 마음껏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고, 사람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건전한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하고, 사회에 기여할 기회를 보장받음으로써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혁명적 인본주의는 ‘모든 사회경제적 조치에 있어서 최상의 가치’는 ‘인간’이고, ‘인간의 탄생을 완성시키고 인간의 인간화를 완성시키는 것’을 역사적 목표로 한다. 그것은 사람 중심의 세상을 만듦으로써 사람의 최상의 높이로 발전시키자는 사상인 것이다.”(347쪽)

“건전한 사회는 정치혁명이 성공한 다음에도 자연 개조, 사회 개조, 정신 개조를 비롯한 모든 영역에서 동시적인 변혁을 줄기차게 추진해야만 건설 가능하다. 생산력의 발전, 민중 정권의 공고화와 발전, 만인의 개성화가 모두 충족되어야만 비로소 사람은 완전한 사회적 존재가 될 수 있다. 이것은 한 분야에서만 변혁이 성공하고 나머지 부분이 정체한다면 건전한 사회를 건설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의 통합적인 진보는 한 발자국에 지나지 않더라도 고립된 하나의 영역에서 백 걸음을 나아가는 것보다 인류의 진보에 훨씬 큰 영향을 미치고 오래 지속된다. 수천 년에 걸친 ‘고립된 진보’의 실패에서 인간은 보다 확실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프롬)"(355쪽)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즉 다수의 민중이 완전한 사회적 존재로 성장하지 못한다면 백약이 무효다. 제아무리 좋은 민주주의 제도에서도 우민은 올바른 투표를 할 수 없고, 제아무리 좋은 경제제도에서도 우민은 노동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사회주의를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민중의 주체성과 자발성이 필수적이므로 자연 개조, 사회 개조, 정신 개조, 문화 개조 등을 동시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프롬은 이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경제, 사회, 정치, 문화의 각 분야에서 동시에 변화가 일어난 때라야만 진보가 있을 수 있으며 어느 ‘하나의’ 분야에 국한된 진보는 ‘모든’ 분야의 진보를 파괴한다.(프롬)”(364쪽)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는 최저생계비 제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다. 즉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존엄한 존재이고 모든 인류는 한 형제이자 가족이라는 인간관이다. 이런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는 사회는 인간의 존엄과 행복에 관련된 일에 대해서만큼은 주판알을 튕기지 않는다.
사회는 마땅히 사람에게 사람답게 살아갈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가능하다면 자본주의 제도를 그대로 유지해도 괜찮다. 하지만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저히 실현 불가능하다면, 인류는 인본주의적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인간의 존엄을 위해서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다.”(386쪽)

“열 명의 의인만 있다면 인류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그조차도 없다면 인류는 결국 멸망할 것이다. 나는 프롬이 지적했듯이, 열 명의 의인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물건이 인간을 지배하는 시대’가 끝나고 ‘다가올 세상은 인간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인류는 21세기에 다시 살아나 사람이 원래 있어야 할 최고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389쪽)

[ 2015년 11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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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된 해산 의도된 오판 -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변론기
이재화 지음 / 글과생각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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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이재화 변호사 저 <기획된 해산, 의도된 재판 :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변론기>를 읽고 / 2015. 03., 296쪽, 글과생각

“나는 1년 동안 이 사건(통합진보당 해산심판)을 변론하면서 가슴으로 많이 울었다. 서글퍼서 울었고 분노해서 울었다. 민주화 운동의 주역들이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심판받고 있는 현실이, 전향한 자들이 증인으로 나와 한때의 민주화 운동 동료들을 매도하고 통합진보당 강령을 제멋대로 재단하는 현실이, 1980년대 민주운동 진영이 논의했던 한국사회성격론과 변혁운동론이 북한의 사주에 의한 것처럼 매도당하는 현실이, 민주노동당이 도입한 진보적 민주주의를 북한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우겨대는 현실이 서글퍼서 울었다.”(11쪽)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의 변호인단에 참여했던 저자의 최종 소감이다.

이 책은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사건을 변론한 저자가 위헌결정에 가담한 헌법재판관 8명(박한철 소장, 이정미, 이진성, 김창종, 안창호, 강일원, 조용호, 서기석)의 과오를 역사에 고발하는 책이다. 
저자는 재판과정에 있었던 재판관들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몰역사적 태도, 반공주의에 기초한 사상적 편향성, 편견에 기초한 저급한 발언, 양심 유지의 자유를 침해하는 반헌법적 사고, 편파적 재판진행 등 재판관들이 저지른 역사적 과오에 대해 생생하게 기록했다.

저자는 486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대학생 때에는 학생운동으로 감옥에도 갔고, 월간 <말>지 기자도 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온 후, 1990년대 중반 사법시험을 통해 변호사가 되었지만 '민주화를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라는 법률가단체의 회원으로 이름만 올려놓았다. 그리고 한동안 ‘밥벌이’에 충실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국민들이 이룩했던 한국의 민주주의가 헌법 개정으로 정착되었다고 믿었던 때문이다.
그렇게 진보정치세력이나 사회운동과는 거리를 둔 채, 직업에 충실하고 민주당 등 야당과 호흡했던 그가 어느날 변했다. 민주주의가 급격하게 후퇴하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더 이상 현실에 안주하거나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박근혜-새누리당 정권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해산심판을 청구한 이후, 전 민변 회장이었던 김선수 변호사가 (무료)변호인단 구성을 민변 회원들에게 요청했을 때, 가장 먼저 자발적으로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박근혜 정부가 정당 해산 심판 청구를 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등골이 오싹해지고 머리가 쭈뼛’ 섰다고 한다.
그는 ‘밥벌이’ 변호사 업무를 잠시 중단하고 1년 넘게 정당해산 심판 소송에 전념했고 변호인단의 대변인까지 맡아 최선을 다했다. 민주주의 후퇴를 묵과할 수 없었던 그는 현재 민변의 사법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자를 비롯한 변호인단(김선수 단장, 전영식, 김진, 이광철, 이한본, 이재정, 고윤덕, 윤영태, 신윤경, 최용근, 김종보, 천낙붕, 심재환, 하주희, 조지훈, 김유정 변호사 등 17명)은 헌번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과정과 결과에 대해 ‘최악의 재판’이라고 평가했다. “재판진행 측면에서나 결과 측면에서나 누구도 재판을 이처럼 해서는 아니 된다는 최악의 선례가 될 것”(12쪽)이라고 혹평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재판관들의 행태를 역사에 고발하기 위해 이 책을 쓰기로 했다. “누군가가 재판과정에 있었던 재판관들의 민주화 운동에 대한 몰역사적 태도, 반공주의에 기초한 사상적 편향성, 편견에 기초한 저급한 발언, 양심 유지의 자유를 침해하는 반헌법적 사고, 편파적 재판진행 등에 대해 기록하지 않으면 아무도 재판관들의 역사적 과오에 대해 알지 못할 것이다. 재판관들의 잘못은 사소한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인 것이었다.”(12쪽)

제1부 ‘증거 재판이 아닌 사상 검증’에서는 재판과정에 있었던 이야기가 중심이다. 헌법학이나 헌법 이론, 헌법재판소법이나 법치주의, 민주주의와 증거재판주의 등 법학 관련 내용들을 다루기 때문에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평소 헌법과 법치주의에 관심이 있는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 충분히 판단해 볼 수 있다. 
주요 내용으로 재판관들이 형사소송 절차가 아닌 민사소송 절차로 진행하기로 결정한 진정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재판관들은 왜 사상 초유의 재판을 하면서 허겁지겁 재판을 진행했는지, 정부의 ‘쓰레기’ 같은 증거들을 왜 여과 없이 채택했는지, '숨겨진 목적론'과' 퍼즐 맞추기’ 이론을 받아들인 내막은 무엇이었는지, 재판을 얼마나 편파적으로 진행했는지, 재판이 전향자들의 잔치판이 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실제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에서 활동한 증인들의 증언을 모두 배척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헌법을 수호한다는 재판관들이 왜 헌법이 금지하는 사상검증 방식의 신문을 묵인하고 조장했는지, 재판관들이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는지, 왜 증거재판주의를 외면하고 심증재판을 택했는지, 재판관들이 얼마나 저급한 질문을 했는지, 왜 재판관들은 내내 졸기만 했는지 등에 대해 있는 그대로 기술했다.

제2부 ‘헌법재판소 해산결정의 치명적 오류’에서는 해산결정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비판했다. 이 부분 역시 평소 헌법재판과 법치주의에 관심이 있는 보통 사람들의 상식으로 충분히 판단해 볼 수 있다. 참고로 헌법재판소는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물로서 그해 개정 헌법에 다시 등장했다.(1960년 4월 혁명으로 신설되었다가 1961년 박정희 등의 군사쿠테타로 없어졌음)
주요 내용으로 헌법재판소가 내란음모 사건에 관한 대법원 판결 선고를 기다리지 않고 해산결정을 한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재판관들이 과연 올바른 민주주의관과 헌법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른바 ‘숨은 목적론’과 ‘퍼즐 맞추기론’은 합리적이고 타당한 가설인지, 다수의견이 내세운 이른바 ‘주도세력’ 논리에는 어떠한 문제점이 있는지, 다수의견이 찾아냈다는 주도세력의 숨은 목적은 ‘원석’인지 '가공품’인지, 정말 통합진보당 주도세력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했다는 증거가 있었는지, 다수의견은 수많은 증거를 무시하면서 왜 ‘통합진보당이 추구하는 진보적 민주주의가 북한식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것’이라는 황당한 결론을 내렸는지, 다수의견은 왜 스스로가 마련한 기준마저 어겨가면서 주도세력의 진정한 목적을 만들어냈는지, 통합진보당이 추구하는 민중주권주의와 통일문제를 판단하면서 내세운 논리가 얼마나 허접하고 유치한 것인지, 국회의원 자격상실 결정에 법적 근거가 있는 것인지, 비례성 원칙은 시늉만 낸 것이었는지, 제대로 심사나 한 것인지 등 해산 결정문의 치명적 오류를 분석했다.

대리인단의 비판을 종합해보면, 이 책은 "헌법재판을 이처럼 해서는 아니 된다"는 가르침을 주는 헌법 교과서이자 민주주의 지침서가 된다. 저자는 헌법이론적 관점, 정치적 관점, 민주주의의 관점, 증거재판주의 관점, 헌법의 정신의 관점 등 다양한 각도에서 통합진보당 해산결정문을 세밀하고 예리하게 분석했다. 그리고 다수파의 종북몰이의 광풍과 재판관들의 편견과 싸웠다. 재판관들의 편견과 편파적인 재판진행에 분노했다. 정의는 일시적으로는 패배할 수 있지만 끝내는 이긴다는 신념으로 외롭지만 당당하게 법정투쟁을 했던 것이다.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결정 심판에 대한 17명 대리인단의 결론은 ‘통합진보당 해산은 기획된 것’이었고, ‘해산결정은 의도된 오판’이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부당하게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가치와 당원들의 진정성을 옹호해 준다. 
“통합진보당이 추구한 진보적 민주주의, 자주, 민주, 통일의 가치는 국민들의 가슴 속에서 살아 숨 쉴 것이다. 10만여 당원들과 국민들은 민주주의와 통일을 위한 여정을 여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이 명백한 오판이었음을 증명할 것이고, 그 오판에 가담한 8명의 재판관들을 심판할 것이다. 소수의견을 낸 김이수 재판관의 판단이 옮은 것이었음을 선언할 것이다. 나는 그날이 올 것을 확신한다.”(15쪽)

따라서 이 책은 역사와 민주주의를 퇴행시키고 있는 우리 사회 다수파의 횡포에 맞선 법률가들의 '헌법 지키기 투쟁기록'이라 할 수 있다. 역사의 긴 안목에서 끝내는 민주주의가 이기기 위해, 정의가 이기기 위해 온 몸으로 기록한 '사초(史草)'인 셈이다. 
헌법이 짓밟히고, 법치주의가 조롱당하고,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로 전락하여 민주주의가 찢긴 역사적 사건 현장에서 우리가 나아가야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지침서'가 될 것이다. 

이 책은 2013년 11월 ~ 2014년 12월 헌법재판소에서 정당해산 심판 변론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궁금한 독자들에게 유익할 것이다.
또한 말끝마다 헌법과 법치주의, 상식과 정의를 부르짖던 사람들이 어떻게 헌법과 법치주의 그리고 상식과 정의를 망가뜨렸는지 알게해 줄 것이다.

사실을 잘 모르면서 권력과 정파의 나팔수로 전락한 언론의 이야기에만 의존하는 독자들은 자신들의 생각과 의견이 '주체적'이지 못하다는 걸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그런 독자들이 자신의 입장과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나면 저자가 독자들에게 던져준 과제, 즉 "우리가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약속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당해산 관련 참고 자료>


2.김이수 재판관 소수 의견 요지 http://thesisaviewtimes.com/bbs/board.php?bo_table=m71&wr_id=421

3.정부가 문제삼은 통합진보당 강령 전문 http://www.hani.co.kr/arti/politics/assembly/609906.html

4.통합진보당 해산심판 변호인단 김선수 구술변론 전문 http://www.lawissue.co.kr/news/articleView.html?idxno=16396

[인상 깊은 문장]

“법무부의 정당해산 청구서에 첨부된 정부측의 증거는 허접하기 짝이 없었다. 급하게 인터넷에 구글링해서 증거를 수집한 흔적이 역력했다. 월간조선, 조선일보, 뉴데일리 등 보수인사들의 일방적인 주장이 담긴 신문기사와 칼럼, 민주노동당 창당 이전에 있었던 국가보안법 판결문, 민주노동당 시절 개별 당원들에 대한 형사판결문, 편집에 편집을 거친 정체불명의 블로그 글, 각종 국가보안법 사건에서 법원이 증거능력이 없다며 증거로 채택하지 않은 국가정보원 등 수사기관이 작성한 수사보고서, 누가 언제 작성했는지 확인이 되지 않는 북한 지령문, 남파간첩과 한총련 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인사들이 일방적으로 서술한 책 등이 증거로 제출되었다."(39쪽)

“헌법재판소는 2013년 6월 14일 국회에 ‘헌법재판소법 개정 입법청원서’를 제출한 바 있다. 이 입법청원서는 정당해산심판의 경우 형사소송 절차를 준용하도록 헌법재판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자신이 제출한 위 개정안과 상반된 결정을 한 것이다.”(46쪽)

“(송기춘 교수) 왜 우리가 지금도 북한의 어떤 행위에 의해서 이 국가의 장래가 결정되어야 하나? 북한에서 어떠한 애기를 하건, 우리는 그러한 애기가 헌법적으로 가능한 애기인가 여부로 판단하면 되는 것이다. 북한과 같은 주장을 하더라도 그것이 헌법적으로 가능한 법위에 있다면 그것은 위헌 여부가 문제될 수 없다.”(60쪽)

“증인 곽인수에 대한 반대신문을 통해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에서 사용한 종속적 신자유주의나 예속적 천민자본주의라는 용어는 북한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님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는 다수의견은 결정문에서 ‘피청구인 주도세력은 우리 사회를 외세에 예속된 천민적 자본주의 또는 식민지반자본주의로 보고’라고 판단했다. 질적 차이가 있는 두 가지 개념을 같은 것으로 취급한 것이다. 이는 사회과학적인 기본상식에 반할 뿐만 아니라 명백히 사실을 왜곡한 것이다.”(80쪽)

“정부측 대리인은 제2차 분당 당시에 통합진보당에서 활동하지 않은 증인에게 통합진보당의 사정을 묻고 있고 증인이 추측성 진술을 하는데 재판관들은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고 그것을 듣고만 있었다.”(115쪽)

“증인 이광백은 1991년 원광대 법대 학생회장 출신으로서 민혁당 활동을 하다가 1997년 김영환과 함께 전향한 사람이다. 그는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당원으로 가입한 적이 없다. 그런데 정부측 소송대리인은 증인 이광백에게 통합진보당 강령을 제시하면서 강령에 대해 평가해 달라고 했다.(그리고 재판관들은 이를 허용했다.)”(119쪽)

“김영환은 1990년 전향한 후 민혁당 관계자들이나 통합진보당 관계자들을 만나지 않았고,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 활동도 하지 않았다. 정부측 대리인은 김영환에게 직접 경험한 사실을 물어본 것이 아니라 그의 경험과는 무관한 통합진보당 인사들에 대한 사상검증을 한 것이다. 재판관들 중 누구도 이를 지적하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재판관들은 오히려 김영환이 증언할 때, 평소에 졸던 모습과는 달리 귀를 쫑긋 세우며 그의 진술을 들었다.”(133쪽)

“김창종, 서기석, 조용호 재판관은 18차례의 변론기일 동안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양측 대리인들에게도, 증인들에게도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재판을 시작하기 전에 이미 마음속으로 ‘해산’이라는 결론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148쪽)

“헌법재판소가 심판 결정을 이토록 서두르는 이유가 밝혀지는 데는 고작 34일 밖에 걸리지 않았다. 대법원은 2015년 1월 22일 내란음모 사건을 선고했다. 지하혁명조직 ‘RO’는 없고, 내란음모는 성립하지 않으며, 내란 실행으로 나아갈 구체적인 위험성도 없었다는 것이 판결의 요지이다. 헌법재판소 결정 내용과는 다른 결론이다. 헌법재판소가 대법원 판결 선고를 기다리지 못할 특별한 급박한 사정도 서둘러 결정해야 할 아무런 합리적인 이유도 없었따. 그렇다면 그 이유는,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면 그것과 배치되는 사실을 인정해 위헌결정을 내리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176쪽)

“헌법재판소는 ‘내란음모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서울고등법원의 판단을 배척할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고등법원 판결과 달리 내란음모를 인정해 버렸다. 명백히 증거법칙에 위반하여 ‘거짓 사실’을 사실로 인정해 버렸고, 그 ‘거짓 사실’을 헌법재판소 결정의 ‘기둥’으로 삼았다. 이러한 오류는 헌법재판소 결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누가 보더라도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의도적 오판’이다.”(184쪽)

“헌법 그 어느 조문에도 분단의 특수성 때문에 이러한 민주주의의 보편원리가 수정되어야 한다는 내용은 없다. 따라서 분단이라는 특수한 사정은 헌법해석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헌법재판소 다수의견은 분단이라는 특수한 사정 때문에 대한민국을 ‘보편적 민주주의를 추구할 수 없는 나라’로 선언해 버렸다.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국민의 기본권 제한을 합리화했던 박정희 군사정권의 유신을 부활시킨 것이다.”(189쪽)

“헌법재판소의 다수의견은, 통합진보당의 공식강령은 이른바 허울이나 장식에 불과하다고 판단하고, 강령 이외의 자료를 통해 진정한 목적을 찾아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부터 15년 동안 각종 선거에 참여하여 강령에 따른 정책과 공약을 제시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온 정당을 마치 ‘사기집단’으로 취급했다. 또한 통합진보당을 지지하는 10만 명의 당원과 200만 명의 국민을 거짓 목적에 속아 넘어간 ‘바보’로 취급했다.”(199쪽)

“헌법재판소는 김영환에 의해 민혁당 당원이라고 지목된 자들에게 최소한 소명기회를 줘야 한다. 그런데 헌법재판소는 김영환의 진술을 뒷받침할 다른 증거도 없고, 지목당한 자들이 강력히 이를 부인하고 있음에도 그들에게 최소한의 소명기회도 주지 않은 채, 김영환이 지목한 사람들을 모두 민혁당 당원으로 인정해 버렸다.”(209쪽)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용어는 미국에서 먼저 사용되었다. 20세기 초 미국의 정치학자 허버트 크롤리가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저서를 통해 진보적 민주주의 개념을 처음 사용했다. 한국에서 가장 먼저 진보적 민주주의를 사용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이다. 1945년 4월 11일 의정원 제38회 속기록에 기재되어 있다.”(227쪽)

“헌법재판소는 민주노동당과 통합진보당의 ‘코리아연방제 통일방안’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원 개인적인 발언이나 글을 통해 통합진보당 주도세력의 통일방안을 추론했다. 이는 민주노동당 및 통합진보당이 대통령 선거 때 제시한 공약인 ‘코리아연방제 통일방안’에서는 위헌적인 요소를 찾을 수 없었다는 반증이다. 또한 통합진보당 주도세력이 주장한ㄴ 연방제 통일방안이 어떤 점에서 북한이 주장하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 통일방안과 같은지에 대해 아무런 논증 없이 막연히 동일하다고 판단했다.”(258쪽)

[ 2015년 11월 0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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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체제 만들기
백낙청 지음 / 창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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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백낙청 저 <2013년 체제 만들기>를 읽고 / 2012. 01., 191쪽, 창비


사람들이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힌국사회에서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의 의미는 매우 크다. 특히 안정적인 일자리와 주거를 확보하지 못한 국민들과 주권자로서 자신들의 각종 권리가 박탈된 사람들, 즉 90% 이상의 한국인에게는 더더욱 중요하다. 현행 한국의 사회체제는 정치가 많은 것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세계 최악의 빈부격차와 자살률, 그리고 행복도 최하위의 대한민국을 만든 것은 법과 제도와 행정이었고, 그 법과 제도와 행정을 주도한 것은 선출직 공무원들이다. 그들을 선출하는 제도가 총선과 대선, 그리고 지방선거인 것이다.
부정부패를 양산하는 시스템과 문화도, 부정부패에 면죄부를 주는 사법체계도, 국민들의 일자리와 생존권을 좌우하는 경제와 행정도, 비정규직을 양산하고 농민들의 터전을 붕괴시키고 중소상공인과 영세자영업자를 낭떠러지에 내모는 것도 정치가 직,간접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한국의 정치와 행정이 ‘불량국가’ 수준인 것은 정치가 ‘불량’하기 때문이다. 그 정치가 불량하게 만드는 구조적 역사적 원인은 한국현대사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친일과 분단이다. 일제의 식민지 무력 감정을 환영하고, 그런 일제에게 부역하여 호의호식을 한 자들이 해방 후 분단을 주도했고, 분단이 한국전쟁의 참화를 가져왔으며, 전쟁이 다시 분단을 고착화시키고 군사독재의 명분이 되었다.

친일파들과 군사독재 부역자들이 한국사회의 기득권을 장악한 이후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지 70년이 흘렀다. 그들이 기득권을 장악한 무기가 바로 분단과 반공이었다.
백낙청은 그래서 ‘분단체제’를 강조한다. 그 분단체제는 1948년 분단체제가 아니라 '한국전쟁을 거친 분단체제’다. 그것을 그는 ‘53년 체제’라 규정한다. ‘53년 체제’는 분단과 독재가 핵심구조이다. 두 개는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연관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53년 체제’는 친일과 외세의존, 전시체제와 반공을 주요 이념으로 한다. 경제질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섞여 있다. 
또한 남과 북, 즉 한반도는 주변 열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반도의 분단 과정이 강대국의 냉전구도에 강제된 측면이 강할뿐만 아니라 분단의 유지와 고착화도 외세의 입김에 영향을 받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지리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식민과 해방과 분단의 과정, 그리고 전쟁과 분단고착화의 과정에 주변 열강이 모두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53년 체제’는 외부적인 변수이기는 하지만, 세계적인 갈등구조와 맞물려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남과 북이 주변 열강을 무시하고 임의로 독단적으로 무언가를 추진하기 어렵다. 주변국들의 입장에서 한반도의 통일은 그 자체로 또다른 강대국이 탄생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CIA는 오바마의 재선 후 한반도가 통일되면 세계 5위의 강대국이 탄생할 것으로 전망하는 보고서를 오바마에게 제출했을 정도다.)

‘53년 체제’는 남과 북에 ‘결손국가’를 만들어 버렸다. ‘결손국가’라 함은 자기완결적인 사회체제가 아님을 의미한다. 남과 북은 유엔에 동시에 가입한 ‘독립국가’이면서도 실상은 ‘통일을 지향하는 잠정적인 국가 형태’로 남아 있다. 이는 1972년 남북공동성명의 기본 정신이고, 1992년 남북 기본합의서에 명문화된 이후 지금까지 이어진다. 그럼에도 ‘분단체제’는 남과 북 내부에 분단체제로 인한 기득권이 발생하도록 만들었고, 따라서 각각 분단이 고착화되기를 바라는 집단과 분단을 극복하려는 집단이 존재하게 되었다. 물론 남북 대다수의 주권자들은 분단 보다 통일을 바란다.
남과 북은 ‘결손국가’이기 때문에 그리고 상대방이 통일을 대상이자 주체이기 때문에 상대방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주로 정권과 기득권자들의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측면이 강하다. ‘분단기득권’이 생겨났고 부분적으로 체제 내에 자리잡은 것이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노태우-김영삼 정부는 분단기득권자들이 중심이 된 정권이었다. 그래서 ‘적대적 공생관계’라는 주장도 나오게 되는 것이다.(그 개념을 인정하든 아니든)

정치학자나 사회학자들은 곧잘 ‘87년 체제’를 말한다. ‘87년 체제’는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1961년 군사쿠테타 이후 기본적인 자유와 절차마저 유린되었던 25년 간의 ‘유신독재체제’가 사라졌다는 게 핵심이다. 대통령과 국회의원, 그리고 지자체장을 주권자의 손으로 직접 선출한다는 의미다.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전체주의, 군사주의의 제도를 청산하고 절차와 선거와 협의를 강조하였고, 많은 분야에서 자유권을 신장시켰다. 그 과정에서 민주정부, 즉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이 탄생되었다. 2000년 615 공동선언과 2007년 1004 공동선언은 ‘87년 체제’의 불안정한 구조인 분단체제를 흔들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점은 진보정치의 흥망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백낙청은 ‘87년 체제’가 ‘53년 체제’를 넘어서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53년 체제’의 두 기둥, 즉 분단과 독재에서 독재 하나 만이 무력화되었다는 것이다. ‘87년 체제’로 절차적 민주주의는 도입되었지만, 내용적 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미루어졌다. 더 중요한 것은 ‘87년 체제’가 ‘53년 체제’를 근본적인 면에서 변화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바로 ‘분단체제’가 시퍼렇게 살아 있는 것이다. 그 결과가 분단기득권자들이 분단과 반복 공세를 통해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 책은 2012년 총선과 대선, 양 선거를 앞둔 국내정세에 대한 분석과 김정은체제로 이동하는 북한의 변화와 대북정책에 대한 진단, 그리고 87년체제를 넘어 희망의 2013년체제를 향한 백낙청의 제언과 해법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당시 나도 ‘2013년 체제’라는 개념을 전혀 들어보지 못할 정도로(2012 희망 원탁회의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백낙청의 문제의식과 제안은 한국사회에 널리 퍼지지 못했다.
결국 백낙청이 말한 ‘2013년 체제’는 ‘87년 체제’를 뛰어 넘어 ‘53년 체제’까지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주창하는 ‘2013년 체제'의 주요 요소 중에는 복지사회, 공정·공평사회론, 그리고 생태전환론 등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2013년체제'의 주요한 골자는 무엇보다 6·15선언으로 상징되는 남북관계의 정상화와 진전, 그리고 평화체제 구축이다. 이 내용을 그는 ‘포용정책 2.0’이라고 이름지었다. ‘포용정책 2.0’ 정책은 2013년체제에서 주요한 열쇳말로 제시된다. 이 대목은 87년체제와 가장 대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87년체제의 극복과 2013년체제의 수립이 2012년 양대 선거의 승리로 정권교체나 원내 다수의석 확보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선거승리는 필수적인 요소지만 정권교체 이후의 새로운 체제를 미리 논의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역사의 시간표는 다시 지루한 뒷걸음질을 기록하게 된다는 것이다. 진보진영과 야권이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실패한 이유는 어쩌면 ‘2013년 체제’ 만들기가 아니라 단순히 ‘야권의 승리’, 특정 정치세력의 ‘승리’ 또는 ‘전진'만을 욕심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책을 읽고 나니 2016년 총선과 2017년 대선이 단순히 ‘야권의 승리’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체제적 전환’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기 보다는 기존에 어렴풋이 들었던 여러 생각들이 이 책을 통해서 가닥을 잡아간다는 느낌이다.
물론 백낙청 교수는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에서 자신이 ‘2013년 체제’론을 설파하고 설득하는 것에 실패했다고 인정한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 등 박근혜 정권의 모습이 ‘2013년 체제’는 커녕 ‘87년 체제’마저 후퇴시키는 퇴행이 일어나는 것을 목격하면서 사회 각 분야에서 많은 이들이 ‘적공’을 쌓아야 한다고 말했다. 작금의 정치상황이 ‘87년 체제’를 지키는 것도 여의치 않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53년 체제’라는 관점과 ‘53년 체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여 나타난 박근혜-새누리당 체제를 ‘87년 체제’만을 지키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더 후퇴하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든다.

내가 ‘2013년 체제’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 것은 백낙청의 2015년 신간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이었다. 그후 ‘2013년 체제’와 ‘53년 체제’를 어느 정도 이해하기까지는 이 책 <2013년 체제 만들기>뿐 아니라 <어디가 중도고 어째서 변혁인가>와 <한반도식 통일, 현재진행형>까지 읽어야 했다.

[ 인상 깊은 문장 ]

"지금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원(願)을 크게 세우는 일이라고 믿기에 눈앞의 현실보다 한 발짝 먼 이야기부터 하려는 것이다. 2012년의 선택이 비록 중요하지만, 그해의 양대 선거에 논의가 너무 집중됨으로써 우리가 목표하는 선거 이후의 삶에 관한 사고를 제약하고 때이른 정치공학적 논의에 몰입해서는 곤란하겠기 때문이다." ―제1장 「‘2013년체제’를 준비하자」

"물론 2013년체제가 성립하기 위한 가장 큰 전제조건은 2012년 양대 선거의 승리이다. 지난해 말부터 정치권에서는 대폭적인 지각변동이 감지되는 움직임들이 여럿 있다. 야권통합후보의 서울시장 당선, ‘안철수 현상’, 젊은 세대의 정치 복귀,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의 전열 정비, 박근혜 대세론의 붕괴와 ‘조기등판’ 등이 그것이다. 특히 가장 유력한 대선후보인 박근혜 위원장은 본의 아니게 너무 일찍 선거판에 투입되는 바람에 4월 총선 결과에 따라 정치적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매우 커지고 있다."

"온갖 불확실성 속에서도 2013년체제가 다가오고 있음이 점차 실감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10·26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시민후보’ 박원순이 야권통합후보로 당선된 사실과 이를 전후한 ‘안철수 현상’, 그리고 그 바람에 오랫동안 부동의 여론 지지율 1위를 자랑하던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대세론이 무너지고 드디어 그녀가 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예정에 없던 ‘조기등판’을 하게 된 사정 등이 모두 그런 실감을 더해준다." ―제4장 「다시 2013년체제를 생각한다」

"복지국가론의 기본 취지가 당장에 복지를 전면화하는 것보다 국가모델을 ‘복지국가형’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라면, 더욱이나 여타 국가적·사회적 목표와 결합된 복지모델을 설계해야 한다. 예컨대 기존의 생산과 소비 방식을 생태친화적으로 전환하는 ‘친환경 복지국가’ 모델이어야 하며, 동시에 ‘성평등 지향적 복지국가’ 모델이 되어야 한다. 또한 복지국가이되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하고 협동조합, 시민단체, 그리고 복지수혜자 개개인의 능동적 참여가 극대화되는 ‘민주적 복지사회’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2013년 이후 진전될 남북관계와 어떻게 조화시킬지에 관한 ‘범한반도적 설계’가 긴요하다.” ―제1장 「‘2013년체제’를 준비하자」

"2013년체제와 평화전략을 함께 얘기해야만 하는 이유는 평화체제로의 진행 여부가 2013년체제의 성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 중에서 유독 남북관계나 평화문제만 중요하다는 주장이 아니라, 87년체제가 53년체제라는 토대 위에 세워진 탓에 민주화를 위한 그 긍정적인 동력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교착·혼란·퇴행상태를 겪게 된만큼, 결국 53년체제를 혁파하여 분단체제를 좀더 획기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제8장 「2013년체제와 포용정책 2.0」

"크게 보면 이 모든 것이 상식과 교양 및 인간적 염치의 회복이라는 문제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것이 정권교체나 정치권 주도의 노력만으로 될 일이 아님은 명백하다. 몇몇 인사들의 무교양과 몰상식 그리고 부도덕에서만 문제가 비롯되었다기보다 국민들 다수의 생명경시 습성과 정의감 부족, 그리고 비뚤어진 욕망에 뿌리를 둔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이틀에 바로잡힐 일이 아니며, 세상과 자신을 동시에 바꿔나가는 노력을 각자의 삶에서 꾸준히 진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분위기가 일신될 때 비로소 많은 사람들이 그런 노력을 제대로 시작할 수 있을 터이기에, 아무래도 2013년(또는 2012년)의 결정적인 전환을 꿈꾸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 그러한 전환을 위해 필요한 뼈저린 반성을 할 기회가 지난 3년여 동안 유독 많았다. 그 점에서 우리는 이명박시대에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제1장 「‘2013년체제’를 준비하자」

[ 2015년 11월 0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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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사람들 - 날마다 작은 통일이 이루어지는 기적의 공간
김진향 외 지음 / 내일을여는책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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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 [서평] 김진향 교수 외 공저 <개성공단 사람들>을 읽고 / 2015. 06., 279쪽, 내일을여는책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며 남북의 젊은이들이 총을 마주 겨눈 휴전선(군사분계선).
그 휴전선 판문점에서 불과 2.5km만 북한의 영토로 들어가면 ‘개성공단(개성공업지구)’ 100만 평의 입구가 나타난다.
100만 평 중에서 1단계 5만여 평에서 2004년부터 남한의 중소기업 124개가 5만 3천 명의 북측 노동자들과 함께 각종 상품을 만들고 있다.
2013년, 약 6개월 동안 공단 가동이 중단된 것을 제외하고는 12년째 남과 북의 경제협력으로 경쟁력 높은 제품이 국내외 소비자에게 판매되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참여정부 시절 대북정책을 담당하였고, 이후 개성공단에 장기 체류하면서 관리위원회에서 관리와 실무적인 업무를 처리하였다.

한국인들이 개성공단에 대해 아는 정보는 많지 않다. 보통 정주영 현대 회장의 협력과 김대중 정부 시절 남북간 합의에 따라 시작된 남북 합작 공단이라는 정도다.
언론과 정부여당의 일방적인 소식만을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개성공단이 ‘북한에 퍼주기’이고 개성공단에서 번 돈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 자금원’으로 쓰이며,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남측 사람들의 신변히 위험하다는 이야기들이 기억날 것이다.
그런데 개성공단에서 오랫동안 직접 일했던 저자를 비롯해 남측 기업인, 노동자들은 정반대로 증언한다. 그리고 그들은 개성공단이야말로 ‘날마다 통일이 이루어지는 기적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관리자, 법인장, 기업 대표, 노동자 등 개성공단에서 일하던 15명이 개성공단과 개성공단에서 함께 일하던 북측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 기록이다.

그들은 왜 언론과 정부여당의 말이 틀리다고 할까?

개성공단에서 일하는 5만 3천 명의 북측 노동자들이 받는 월급은 2015년 현재 월 130달러다. 한국돈으로 14~15만원인 셈이다. 남측 제조업 노동자들의 평균 월급여의 10~20분의 1이고, 중국이나 베트남 인건비와 비교해도 1/5 ~ 1/10에 불과하다. 그리고 북측의 노동자들은 언어가 같고, 민족적 문화적 동질성이 높고, 노동의욕이 높고 손재주가 좋다. 더군다나 개성공단의 물류비용은 중국이나 베트남 등 해외공단과 비교할 수도 없이 저렴하다. 매출액은 연간 15~30억 달러 정도라 한다.(“남측 기업 124개의 노동자와 가족, 그리고 협력업체 가족까지 따지면 약 20만 명 이상의 남측 사람들이 개성공단 덕분에 먹고 살고 있죠.” 102쪽)
이 모든 것들이 개성공단의 경쟁력이다. 개성공단에 입주한 국내 중소기업들은 국내에서 기업을 운영할 경쟁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해외로 공장을 이전하는 것보다 유리하기 때문에 개성공단에 들어간 것이다. 개성공단 기업은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보다 훨씬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다. '개성공단 기업이 손해를 본다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것이 개성공단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면 이구동성으로 하는 소리다. 

북측의 노동자들이 매달 받는 130달러 중 중 30% 정도가 제세공과금 명목으로 북측의 정부로부터 공제된다. 연간 1억 달러 규모다. 30% 정도면 보통 국가로서는 그렇게 부당하지 않은 공제금액이다. 북한이 보육과 교육, 주거와 의료 등 대부분을 무상으로 공급하는 것을 감안하면. 나머지 돈으로 북측의 노동자들은 자신과 식구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고 소비생활을 하는데 충분하다.("2000년 처음 개성공단을 합의할 시, 남측에서 협상안으로 마련한 북측 노동자의 월급은 200달러였는데, 25%인 50달러로 확정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었다. 그가 말한 이유는 개성공단에 초기에 들어온 기업이 돈을 벌어야 다른 공단으로 확대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북측 노동자들은 남측 관계자나 관리자들에게 자신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측 기업을 돕고 통일에 이바지하기 위해 일한다’는 생각이 강하다”(57쪽)

이런 구조에서 개성공단은 북측에 ‘퍼주기’가 아니라 남측이 ‘퍼가기’를 하는 곳이다. 북측에 대비하여 남측이 15배에서 30배를 벌어들이는 곳이다. 그리고 개성공단에서 북측 정부가 핵무기 개발로 가져갈 것이 거의 없다. 따라서 개성공단의 기존 합의사항이 이행되지 않고, 축소되고 중단되면 될수록 남축과 기업들의 손해도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들은 왜 개성공단에서 ‘날마다 통일이 이루어진다’고 이야기할까? 

개성공단에서 일해본 관리자들이나 노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남측과 북측이 서로 많이 ‘다르다’고 말하면서 또 많은 부분에서 ‘동질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남북이 분단체제로 제각기 살아온 지 무려 70년이 넘었다. 따라서 같은 ‘한글’이라고 해도 ‘말’의 의미와 사용법이 많이 다르다. 자본주의 생활양식으로 살아온 사람과 사회주의 생활양식으로 살아온 사회경제적, 문화적 차이도 상당하다. 남측 사람들은 북측사람들의 ‘집단주의 생활’이 이해가 되지 않고, 북측 사람들은 ‘돈만 밝히는’ 남측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북측 사람들은 남측 사람들의 개인적인 책임과 개인적인 성과에 익숙하지 못하고, 남측 사람들은 북측 사람들의 ‘집단적 책임’과 ‘집단적 성과’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남측에서는 개인과 가족이 우선이고, 나의 이익과 성공이 먼저이고, 사람들간의 관계는 거래와 ‘기브앤테이크’이지만, 북측에서는 개인보다 집단이, 나의 가족보다 국가 전체의 '사회주의 대가족’이 우선이며, 사람들간의 관계는 ‘신뢰’와 ‘협동’이 기본이다. 남측에서는 북측의 유일수령체제와 세습정권을 용납할 수 없지만, 북측에서는 남측 사람들이 자신들의 지도자와 수령을 폄하하고 조롱하는 것을 참을 수 없다. 자신들에 대한 모독이고 욕설인 것이다.
그래서 개성공단에서는 ‘존중’과 ‘배려’가 가장 중요하다. 남북 당국간 관계가 긴장되면, 남북 관계자나 노동자들은 정치적, 군사적인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아예 ‘금기’가 된다.(평소에도 일대일 관계 이외에는 말을 섞지 않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렇지만 남과 북이 한민족이고 같은 핏줄로 같은 역사를 공유했다는 것은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부정할 수가 없다.
북측 사람들의 관혼상제 풍습과 제사, 자식들에 대한 애정이 똑같다. 그들도 ‘개XX’라는 욕을 하고, 심지어 ‘빨갱이 같은 짓’이라는 비난도 있다. 무언가를 선물하면 꼭 다른 것을 선물한다. 선물은 거래의 대가가 아니라 마음의 표시이자 감사의 표시다. 음주가무를 좋아하고, 운동경기도 좋아한다. 민족적 감정도 닮았다.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측도)북측도 사람 사는 세상이고 그런 면에서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면서 남측 관리자나 노동자들은 “컴맹이나 문맹처럼 우리나라 사람의 99.9%가 북한에 대해 거의 모르는 ‘북맹’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작 북한 사람들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지적하게 된다.
물론 북측 사람들도 남측 사회나 남측 사람들에 대해 상당 부분 잘 모르고 오해하고 있다. 북측 정부의 정보 밖에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도 남측 사람들이 미군에게 일상적으로 감시당한다고 생각하고, 굶어죽는 사람과 노숙자가 길거리에 넘친다고 알고 있다.

따라서 개성공단이 확대되고, 개성공단 같은 남북 경제협력 공간이 확대되면 남과 북의 보통사람들이 서로에 대해, 서로의 삶과 문화에 대해, 같음과 다름에 대해 이해하고 존중하고 대화하고 협력하게 될 것이다. 그만큼 평화가 정착되고 통일이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한결 같이 개성공단에서 ‘날마다 통일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김진향은 개성공단의 진실이자 개성공단의 진정한 의미를 1) 남북간 상생과 경제협력-평화정착 모델이고, 2) 북측의 자본주의 시장경제 학습장이 되며, 3) 남북간 긴장 해소와 평화 진작을 이룰 수 있고, 4) 남북간 평화의 확실한 안전 장치가 되는 것이라 말한다.

그들은 왜 개성공단이 ‘기적의 공간’이라고 이야기할까?

2000년 남북의 정상들이 ‘6.15 공동선언’에 합의하면서 시작된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은, 경제협력 분야에서 남북이 개성공단에서 함께 경제적인 이익을 거두고 남북간 공통점을 찾아가자는 ‘개성공단 조성’과 ‘금강산 관광’ 등에 대한 합의로 결실을 맺었다. 
남북한 합의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북측은 2002년 ‘개성공업지구법’을 제정하여 사회주의 경제양식의 기본 틀을 벗어난 제도를 결정했고, 남측은 2007년 ‘개성공업지구지원에관한법’을 제정하여 헌법과 각종 법률에서 예외를 둔 사항들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했다. 
2007년 남북 정상들의 ’10.4 공동선업’으로 개성공단 확장 등 경제협력의 확대와 정치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각종 합의들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2007년 말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남북의 합의는 삐걱대기 시작했다.
2008년 금강산을 관광하던 관광객이 사망하면서 금강산 관광과 개성 관광이 중단되었고, 2010년 천안함 사건으로 이명박 정부는 ‘5.24 조치’를 취했다. 5.24 조치는 기존의 남북간 합의를 전면적으로 무효화시키고, 남북의 민간 교류 및 협력을 금지하였다. 통일부 장관은 "개성공단이 중단되어도 무방하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이명박 정부 들어선 이후 개성공단을 여러 차례 중단될 위험에 처했다. 2008년 이후 남측의 합의 불이행, 2009년 금강산과 개성 관광 중단, 2010년 5.24조치, 2011년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망, 2013년 2월 북측의 핵실험과 한미 군사훈련, 그리고 대북 삐라 발송 등 남북간 갈등이 격화되었다.
2008년 이후 남측이 기존 합의를 이행하지 않는 것을 항의하던 북측은 2013년 4월 드디어 개성공단을 중단시켰다.
7월부터 시작된 개성공단 재개를 위한 남북간 협상이 진행된 후, 6개월 만인 그해 9월에 개성공단이 다시 가동되었다.
(개성공단 약사는 첨부한 사진 참조)

북측의 군부 강경파와 남측의 분단옹호 세력은 분단체제가 지속되어 자신들의 기득권이 유지되고, 부정부패가 감추어지길 원한다. 따라서 분단체가 유지되어야 하고, 분단을 허물고 통일을 앞당기는 개성공단이 무산되고 없어지기를 바랄 것이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와 박근헤 정부는 보수언론과 결탁하여 연이어 개성공단에 대한 기존 합의를 무시하고, 개성공단에 대한 허위 정보를 국민들에게 유포한다. 지난 8월 휴전선 비무장지대에서 벌어진 포격 사건처럼 이명박-박근혜 정부 내내 남북간에는 군사적 긴장과 정치외교적 갈등이 지속되고 있고, 북-미 갈등도 커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개성공단이 살아남고 유지되는 것은 ‘기적’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개성공단을 부정하고, 남북화해와 협력을 싫어하는 정부여당이 8년찌 집권하는 동안에도 개성공단이 유지되고 이어가는 것은 남북 주권자들과 한민족의 염원과 노력이 계속되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와 취재기자, 그리고 인터뷰에 응한 남측 관리자와 노동자들의 증언 하나하나가 진심이자 진실일 것이다.

"우리는 북한에 대해 '총체적 무지'에 빠져 있다."(25쪽)

"남과 북은 많이 다르다. 그 '다름'을 우리는 '틀림'으로 일반화시킨다. 분단체제가 강요한 획일적 사고와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다른 선악적 구분의 폐해다."
"남측의 '자유'의 개념과 북측의 '자유'의 개념은 다르다. '노동'과 경제, '고용'의 개념도 다르다. 북측에는 '임금'이라는 개념은 아예 없고 다만 '생활비'라는 개념이 있을 뿐이다."(26쪽)

"결국 북한과 관련된 거의 모든 지수나 지표들은 추정에 추정을 더한 매우 많이 가공되어진 것들이다. 다시 말해 거의 신뢰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총체적 무지가 적대적 대북정책과 만나면서 어느 순간부터 북한은 더 이상 평화와 통일의 일 주체도 공존공영할 상대도 대화의 온전한 파트너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결국 전통적인 반공 반북 이데올로기의 연장선에서 북한은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근거한 '악'일 뿐이다. 그것도 아니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찌질이', '완벽한 루저'일 뿐이다."(27쪽)

"평화와 안보는 국민생존권이 걸려 있는 절대국익의 영역이기에 이 문제를 둘러싼 사실관계들은 어느 영역보다 정확하게 국민들에게 알려야한다."(29쪽)

"평화가 통일이고 평화가 대박이다. 그런데 그 평화란 게 너무나 간단하다. 엄청난 국가적 비용도 필요 없고 특별한 국가적 노력과 국민들의 각고의 인내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상호존중'의 정신 하나면 된다. 남과 북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존중하는 자세만 가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30쪽)

"개성공단은 어느 날부터인가 ‘북한 퍼주기’의 대명사처럼 취급되더니, 이제는 아예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개성공단에 입주한 124개의 우리 기업은 천안함 사태와 연평도 포격 때도, 장장 6개월이나 공단이 폐쇄되었을 때도 결코 개성공단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개성공단에서 이윤을 남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기업도 아니다!”라고 잘라 말한다.”(출판사 책 소개)

날마다 작은 통일을 이루는 사람들, 개성공단의 남북의 사람들.

인간 세상에서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방이 적이고 없애야할 대상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전쟁과 학살을 가져온다고 한국현대사는 말해 준다. 현 정부여당의 기본적인 태도이고, 그에 맞선다면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일부 야권의 태도이다. 그런 태도로는 상대방과 대화할 수도, 공존할 수도 없고, 상대를 변화시킬 수도 없을 것니다. 남북이 적대적인 이유도, 여야가 적대적인 이유도, 야권이 늘상 분열하여 갈등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성공단이 한민족과 한반도가 나아갈 방향과 방법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이 아는 '북한'에 대한 모든 정보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서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돌이켜보면 거의 99% 정부와 보수언론임을 알게 된다. 일부는 미국 언론이고. 그런 정보에 근거하여 자신의 머리 속에 형성된 북에 대한 인식과 태도는 합리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 미래에 진보하고 발전하기는 고사하고 상식적인 수준도 못된다.
북한(사람)에 대한 진실에 접근하고 싶다면,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어떤 모습인지 궁금하다면, 한반도의 평화정착과 통일에 이르는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 2015년 10월 30일 ]

* 다른 책에 대한 리뷰가 궁금하신 분은 블로그 http://book.interpark.com/blog/connan 를 찾아가시면 됩니다...^^

* 김진향씨의 동영상 강연은 https://youtu.be/S1W21ITINus 를 참고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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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안아보았나요
조안 말루프 지음, 주혜명 옮김 / 아르고스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서평] 조안 말루프(Joan Maloof) 저, 주혜명 역 <나무를 안아보았나요? Teachong the Trees, Lessons from the Forest >를 읽고 / 2005. 11., 199쪽, 아르고스


동양 사회에서는 옛적부터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 만가지 생명체 중에서 인간만이 소중하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성찰이 존재했다. 아무리 사람들이 생영체로서 무의식적으로 하루하루 살아가기 위해 동물과 식물을 먹고 산다하더라도 '살아 있는 생명은 모두 소중하다'는 명제는 천지의 진리를 파헤치고자 하는 성현들을 통해 대대로 내려온 동양의 세계관인 셈이다.
<나무를 안아보았나요>의 저자 조안 말루프 역시 선현들과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저자는 나무를 사랑하는 식물학자다. 그는 <나무를 안아보았나요>에서 서정적인 언어로 우리를 숲 속 나무 사이로 이끈다. 숲에는 나무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숲은 나무와 새와 곤충, 진균류 등이 어우러져 사는 곳이다. 그는 이들이 서로 어떻게 어우러져 있는지 보여준다.

“숲이 사람들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은 ‘공기'였다!”(15쪽)
저자는 지구상 많은 이들에게 상식이 되어 버린 이야기를 다시금 꺼낸다. 제도교육을 하는 나라들의 경우 보통 위 문장 중에서 ‘공기’가 아닌 ‘산소’로 가르친다. 브라질과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이 지구 전체에 필요한 산소 중 얼마를 생산한다는 식으로. 물론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산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저자가 산소가 아니라 공기라고 표현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 즉 산소 이외에 인간과 생명체의 활동에 소중한 각종 화학물질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본 원소들과 화학 합성물질이 포하된 지구의 공기를 통해 인간은 진화해왔던 것이다.
또한 화학 합성물질의 요소인 질소나 탄소, 수소 등과 같은 기초 원소들 역시 공기와 물, 흙과 바위를 구성하고, 식물과 동물 등 샘명체의 구성 요소이기도 하다.
“연구자들은 숲 속 공기 안에서 120개의 화학 합성물을 찾아냈다. 그러나 그나마 제대로 성분을 분석할 수 있는 화합물은 단지 70개뿐이었다.”(16쪽)

“너도밤나무는 붉은등도룡뇽, 비치드롭, 리스테라 오스트레일리스, 버섯파리 외에도 다양한 진륜류에게 서식처를 제공한다. 사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들은 단지 몇 개에 지나지 않는다. 너도밤나무 씨앗과 그 씨앗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생명체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너도밤나무 열매는 다람쥐, 쥐, 새 등 작은 동물뿐 아니라 곰도 무척 좋아한다.”(54쪽)
사람들은 보통 ‘숲’이라고 하면 으례 ‘나무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저자는 ‘숲’에는 나무만 있는 게 아님을 알려준다. 숲을 구성하는 생명체들은 셀 수조차 없다. 숲은 살아 있는 나무와 죽은 나무, 나무의 수액을 먹고 사는 벌레와 곤충과 딱따구리, 나뭇잎과 열매, 나무에 달려 있는 잎에서 살아가는 벌레, 열매를 먹고 살아가는 벌레와 곤충과 새, 떨어진 나뭇잎 속에 살아가는 수많은 작은 벌레와 균류, 나뭇잎이 흙과 섞여 썩도록 만드는 균류와 박테리아 등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죽은 나무는 하늘다람쥐가 가장 좋아하는 보금자리였다.”(61쪽)

“왜 서양의학은 아직도 숲 속 화학 합성물질의 효과에 대해 연구하지 않는 것일까? 혹시 그것으로 돈을 버는 것이 불가능해서 그런 것은 아닐까?”(18쪽)
“메릴랜드 주에는 대략 80억 그루의 나무가 살고 있다. 놀라운 것은 이 나무들의 95%가 지름 13cm 이하의 작은 나무라는 사실이다.”(79쪽)
“사람들은 대개 현대 과학이 대부분의 식물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농작물이 아닌 대다수의 식물에 대해서는 거의 모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 우리는 달나라에 가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이 뒷마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모르고 있는 것이다.”(94쪽)
저자는 인류가 자신들을 ‘만물의 영장’이라 자화자찬하며 엄청난 과학기술을 자랑하지만, 인간의 수준이라고는 자신의 집 뒷마당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수준임을 명쾌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그 이유가 돈 중심의 세계관, 황금만능주의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발한다.
인류는, 특히 미국이나 유럽같은 선진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자본주의 사회경제체제의 정부와 자본은 오직 돈이 되는, 이윤이 되는, 자본증식이 가능한 분야에만 편향된 과학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결국 자본주의 체제의 미래는 숲과 식물 그리고 생물다양성을 파괴하고, 자연스러운 지구의 생태계를 조작하고 교란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구와 자연, 숲의 생태계를 살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인간은 숲에 대해 그 어떤 것도 할 필요조차 없다며 독자들을 당혹하게 만든다.
“상처받은 땅에 대해 사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풀을 벨 필요 역시 없다. 숲은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연의 선물이다. 좀더 빨리 숲을 보고 싶다면 새들이 쉬어갈 수 있는 3m의 푯대를 세우면 된다. 기다리기만 한다면 자연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준다.”(120쪽)
“식물은 탄산가스를 들어마셔서 세포 안에 가둔다. 그것이 숲을 지키고 나무를 베지 말아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121쪽)

이렇게 <나무를 안아보았나요>는 ‘살아 숨쉬는 나무와 숲 공동체’에 대해 독자들에게 친절하고 꼼꼼하게 설명한다. 그와 동시에 조금이라도 현실을 알고 있는 독자라면 스스로 자본주의의 사회경제체제에 의한 숲 파괴, 숲 생태계 파괴, 생물다양성 파괴, 지구공동체에 대한 파괴를 경고한다.

숲 속 공기 안에 들어 있는 피톤치드 이야기, 소나무에 둥지를 틀고 싶어하는 독수리 이야기, 바구미가 들끓는 도토리를 좋아하는 다람쥐 이야기 등을 읽다보면, 자연과 호흡하며 대화를 나누고자 하는 지은이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자연에 대한 성찰을 담은 릴케의 시와 소로우의 글, 200년 전에 그린 존 애보트의 삽화가 지은이의 경험과 적절하게 어우러져 있는 이 책은 나무에 관한 과학 책이면서도 자연에 관한 수필로도 손색이 없다.

역자는 ‘나무를 껴안는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tree hugger’를 ‘급진적인 환경운동가’로 번역했는데, 적절한지 의문이 든다.

“사람들은 동물의 종들이 계속 변화해왔듯이 식물의 모습 또한 변해왔다는 것은 잘 모르는 것 같다. 꽃을 피우는 식물들은 최근에 진화에 성공한 식물들이다. 공룡 시대의 숲은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에는 꽃을 피우는 식물보다는 양치류와 소철이 더 많았다. 꽃을 피우는 식물과 인간이 지구에 등장한 것은 그 이후다.”(153쪽)

“독수리의 시력은 아주 좋아서 8km 이상 떨어진 곳도 우리가 망원 렌즈를 통해 보는 것만큼이나 선명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독수리는 인간이 땅에 그은 금을 이해하지는 못한다.”(177쪽)

“달팽이, 의갑류, 파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나무들이 숲 바닥에 몸의 일부를 떨어뜨리지 않는다면 이들은 숲에서 살 수 없다. 나는 숲 바닥에서 살고 있는 일부 생물들의 삶에 대해 알고 나서 불필요하게 생명을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 맨발로 숲을 걷는 자이나교 승려들을 존경하게 됐다.”(192쪽)

이 책은 법정스님의 추천 도서 중 서른 일곱 번째였다.

[ 2015년 10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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