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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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사마리아인들>, <사다리 걷어차기>, <쾌도난마 한국경제>, <국가의 역할>, 그리고 <개혁의 덫>에 이어 장하준교수의 최근 저서를 읽게 되었다. 출판사의 이벤트에 당첨되어 작년에 선물로 받고서 계속 읽고 싶었는데 어찌하다 보니 이제야 읽게 되었다. 공짜(?)라서 그랬나보다...^^
 
저자는 이제 한국 경제분야의 명필가 중 한 사람으로 우뚝 솟아오는 듯한 느낌이다. 이 책은 4개월째 경제분야 베스트셀러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어 전체 도서 판매 순위에서도 여전히 손가락 안에 꼽혀있다. 사무실 근처 서점에서도 쇼윈도우 속의 10권의 추천 도서에서 빠져나갈 줄을 모른다.
 
저자는 작년부터 ’일부’에서 불황이 끝났다고 성급히 단언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지만 실제 경기가 회복될 지는 아직 불확실한 상황이라고 주장하면서 이야기를 꺼낸다. 고삐 풀린 자유금융 거래에 대한 개혁은 시작하기는 커녕 주요국이 합의에 이르지도 못한 상태이고 2009년부터 각국이 재정 및 통화정책으로 경기침체를 막고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정책으로 인해 세계 금융계에 새로운 거품이 일어나고 있는 반면 실물경제에서는 돈줄이 막혀있다. 이 거품이 터지는 날에는 세계경제가 다시 불황으로 들어가는 ’더블딥’ 현상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런 면에서 최근에 연속해서 읽은 The Economists의 <2011 세계경제대전망>과 삼성경제연구소의 <SERI 전망 2011>, 그리고 김광수경제연구소의 <2011 Global Report>가 비교된다.)
 
’일부’에 해당하는 측은 미국 써머스 백악관 경제고문을 비롯한 주요국의 경제정책 담당자들과 The Economists 같은 언론들, 버냉키 FRB 의장과 같은 금융계 인사들, 위기를 조장하고 예측하지도 못한 멍청한 경제학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는 이명박정권과 기획재정부 윤증현장관, 한국은행 김중수총재, 멍청한 조중동과 KBS/YTN, 국내 경제학자들일 것이고... ’재정 및 통화정책’이라 함은 한국의 경우 이명박정권이 집권 2년만에 350조에 이르는 국공채를 발행하여 부동산 폭락을 끌어안은 것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인플레이션이 눈 앞에 보이는데 금리를 인상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사방에서 목을 억누르는데 주가지수가 대책없이 솟는 이유는 미국과 유럽, 일본의 금리가 바닥을 치고 각국이 재정적자와 통화팽창을 일삼고 있기 때문에 ’돈’들이 갈때가 없어 한국에 모여들기 때문이다. 부동산 거품이 유지되는 큰 이유 중의 하나이고... 그렇다면 자산거품은 언젠가 꺼지기 마련인데 그 시기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고 다만 그 시기가 되면 전세계에서 경기침체로 아비규환이 일어날 것이다. 그 속에서 최대의 희생자는 중하층 서민들...
 
저자는 2008년 전세계 금융위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1980년대부터 세계를 지배해온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이고 그 범죄자들은 자유 시장주의자,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라고 선고한다. 이러한 사태를 30년간 이끌어온 그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 대한 허상을 벗겨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이 책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의 후속격으로 <나쁜 사마리아인들> 이후 그에게 쏟아진 일반 독자의 경제 및 현안에 대한 궁금증을 모아 이에 답을 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이 책을 통해 저자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고, 내가 말하는 ’경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해서 의사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요구하는 데에는 고도의 전문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고 조언하며 다른 사람의 잘못된 결정에 우리가 희생되지 않기 위한 경제학적 혜안을 선사한다.

저자는 우리가 무심코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곤 하는 경제 문제 23가지에 대해 역사적 사실과 주변 사례를 가지고 그 이면을 짚어 준다. 기업은 소유주 이익만 고려하면 되는 걸까? 부자를 더 부자로 만들면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올까? 미국에서 보듯이 경영자들의 보수가 천정부지로 오르는 것은 그만 한 생산성을 보이기 때문일까? 기업에게 유리한 정책은 국가 경제에도 좋은 결과를 가져올까? 정부의 시장 개입과 복지 확대는 경제 발전을 저해할까? 교육을 많이 시키면 나라가 더 부유해질까? 탁월한 경제학자가 없으면 효과적인 경제 정책을 세울 수 없는 걸까? 등의 책 속에 담긴 다양한 질문들 속에는 지금의 잘못된 자본주의가 아닌 ’진짜 자본주의’에 대해 알려 주는 이야기가 숨어있다. 앞서 몇 권의 저자가 발간한 책을 읽어보았음에도 이 책은 다시 한 번 자유시장 이데올로기가 한국에서 벗겨내야 할 유령이자 악마임을 알려준다. 

장하준교수의 여러 저작을 읽을 때마다 몇 가지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그 아쉬움 중 가장 큰 것은 장하준교수의 경제학에 속에는 국가경제는 다루어지지만 국가경제 내 경제주체에 대한 애정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재벌경제의 장점을 옹호하고 주주자본주의의 폐해를 지적하는 것은 괜찮지만, 한국에서 재벌경제의 나쁜 측면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 재벌경제가 한국사회에 필요할 수도 있는 시스템이라면 재벌경제의 단점과 폐해를 제도적으로 방지하고 개선하는 방안도 함께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장하준교수의 눈에는 한국에서의 재벌들이 수 십년 동안 뇌물과 로비로 정치계, 법조계, 언론계를 망치고 독점과 불공정거래로 한국 경제구조 전반을 망가뜨린 점이 보이지 않는걸까?
 
그리고 계속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궁금증이 있다. 그것은 과연 ’성장’만이 능사인가? 서구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자유시장이 아닌 착한 자본주의라 할지라도...) 그 자체에, 그 구조에 경제위기와 부익부인익빈, 공동체의 파괴, 자연파괴, 기아와 범죄증가, 인간성 파괴의 원인이 있는 것은 아닌가?이다...   
  
 
--------------------- 류동민교수의 독후감 ----------------------------------------------------------
 

류동민 충남대 경제학 교수
 
경제학 관련 서적이 한국에서 (이 글을 쓰는 현재) 20만 부 넘게 팔렸다면, 이것은 하나의 신드롬을 넘어 도대체 그렇게 많은 독자들이 무엇을 읽고 싶어했는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얘기다.

언젠가 제법 알려진 경제학자들이 모인 자리에 함께한 적이 있다. 흔히 최근의 주류 경제학이 신자유주의니 시장만능주의니 하는 비판은 많이 있어왔고 나 자신도 그 비판의 대열에 때로 끼곤 했지만, 그렇게 많은 시장중심적 사고를 가진 경제학자들의 실물( ! ) 틈에 앉은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공짜밥은 먹었으되 먹는 내내 그 비싼 밥값을 능가하고도 남는 불편함을 느껴야 했다. 그들에게 시장은 무슨 문제를 들이대더라도 ‘경쟁’과 ‘효율성’을 통해 가볍게 해결하는 만병통치약 같은 것이었다. 그날 들은 얘기 중 최악은 1천만원을 내고서라도 최고의 대우로 맹장수술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에게는 그렇게 해주어야 한다면서 의료 민영화를 지지하는 논리였다. 그나마 덜 놀라웠던 것은 비인기 학과를 졸업해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이들은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개인은 자라면서부터 무한 경쟁에 노출된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스펙’을 쌓아야 하고, 스펙 중 으뜸인 ‘좋은 대학’에 가려면 ‘좋은 고등학교’, 심지어 ‘좋은 중학교’에 가야 하며, ‘좋은 학원’이 있는 ‘좋은 동네’로 이사해야 한다. 이런 스펙쌓기의 모든 비용과 부담, 그리고 그 성공과 실패에 따른 대가는 온전히 개인 또는 그 확장된 형태인 가족의 몫이다.  


극단적 자유주의가 장하준 신드롬 불러
누구나 남들(의 아이)보다 자신(의 아이)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위치를 확보하고, 더 쉽고 편하게 잘살고 싶어하는 것은 뿌리칠 수 없는 욕망이다. 시장만능주의 경제학자들의 기본 입장은 이런 욕망에 기초한 경쟁이 자유롭게만 이루어진다면, 그 결과는 효율성과 경쟁력 향상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그 철학적 근거 중 하나는 인간이 ‘이기적’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실 인간이 경제학 교과서의 가정과는 달리, 때로는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는 것, 최소한 이기적으로만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심리학이나 행동경제학 등의 연구를 통해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시장이 ‘공정한 사회’는 고사하고 ‘효율성’조차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는 ‘시장의 실패’가 발생하는 상황이 충분히 많다는 것 또한 경제학 원론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들이다. 이를테면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운 주류 경제학자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런 것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촌철살인의 주장을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했던가? 한국에서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재벌계 연구소나 경제학자들은 ‘시장의 실패’도 시장에 맡겨두면 해결된다는 해괴한 논리까지 제시한다. 심지어 전경련 이름으로 간행된 미국 교과서의 편집·번역본에서는 ‘시장의 실패’ 단원만 빠트리는 실수(?)를 범한 예도 있다. 스펙쌓기가 결국 질 좋은 노동력을 양성하기 위한 것이라면, 여기에 사활적 이해관계가 걸린 만큼 일정 부분 책임지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본이다. 그러나 스펙쌓기는 시장 메커니즘을 통해 그 책임과 의무를 철저하게 개인에게 전가하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최근 10여 년 사이에 한국의 수많은 학생과 학부모들이 절망적 경쟁에 매달리도록 만든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경제학에서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여러 기준이 있겠으나, 성공과 실패의 책임을 전적으로 개인 탓으로 돌리느냐 아니면 사회적 구조에서 찾느냐도 중요한 기준이 된다. 예컨대 미시경제학 교과서의 분배 이론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한계생산력설은- 시장이 완전경쟁적이라거나 생산함수가 1차동차(투입 규모에 대한 수익 불변)라는 등 경제학자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제약 조건하에서- 결국 ‘네 소득이 적은 이유는 네가 생산에 기여하는 바가 그만큼밖에 안 되기 때문’이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셈이다. 이를테면 한 달에 1억원가량의 높은 수입을 로펌에서 받아 문제가 된 고위 공직자 후보가 사퇴의 변에서조차 우리 사회가 그 정도의 차이는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을 기억해 보라!  그렇지만, 심지어 더 많은 일을 하면서도 급여나 고용의 안정성은 현저하게 떨어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이런 이론은 애초부터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등장하는 부자 나라가 생산성이나 기업가 정신이 높아서 가난한 나라보다 잘살거나, 부자들이 생산에 더 많이 기여하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보다 잘사는 것은 아니라는 단순한 명제들은 이미 현실에서 수많은 실패를 겪었거나 겪을 가능성이 있는 독자들의 답답함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러므로 감히 예상해보건대, 그토록 많은 독자들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를 읽도록 만든 것은, 현재와 같은 시장중심적 자본주의가 최선의 상태는 아니며 무엇인가 다른 삶의 방식이 있다는 메시지 때문일 것이다. 장하준은 학술 논문이나 대중적 발언에서 좌파 또는 우파, 진보 또는 보수라는 단순한 틀로 재단하기에 쉽지 않은 학자다. 그러나 <사다리 걷어차기>나 그 대중적 버전인 <나쁜 사마리아인들>에 비해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구성상 좀더 진보적 입장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느낌이다. 실제로 이 책에서는 마르크스의 명제들도 몇 차례에 걸쳐 활용되고 있으며, 마르크스 경제학자들에게는 익히 알려진 주장들로 이 책을 다시 구성하는 것도 가능할 정도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 시장은 그 출발에서부터 정치적 권력을 필요로 한다(Thing1. 자유시장이라는 것은 없다). 
2. 모든 경제주체가 합리적으로 자신의 이익만을 좇아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Thing5. 최악을 예상하면 최악의 결과가 나온다). 
3. 자본주의 경제에서 금융으로 대표되는 비생산적 부문은 경제 전체의 이윤 생산에는 기여하지 못하며, 오직 생산적 부문에서 생산된 이윤에 기생할 따름이다(Thing4. 인터넷보다 세탁기가 세상을 더 많이 바꿨다/ Thing9. 우리는 탈산업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4. 어느 사회에서 숙련노동과 비숙련노동을 구분하는 것은 생산성 등 객관적 차이 못지않게 사회구조적 요인, 심지어 이데올로기적 요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Thing14. 미국 경영자들은 보수를 너무 많이 받는다).
5. 이윤을 위험을 감수하는 기업가 정신 등으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Thing15.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부자 나라 사람들보다 기업가 정신이 더 투철하다).  
6. 자본에 이익이 되는 것과 사회 전체에 이익이 되는 것은 다르다(Thing18. GM에 좋은 것이 항상 미국에도 좋은 것은 아니다).
7. 선진국과 후진국 간에는 무역 등을 통해 가치의 불평등한 이전이 발생한다(Thing3. 잘사는 나라에서는 하는 일에 비해 임금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장하준이 마르크스를 인용하는 방식은 다소 편의적이라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는 국가가 ‘부르주아계급의 집행위원회’라는 유명한 마르크스주의적 명제를 ‘개별 기업의 자유를 제한하는 규제가 산업 부문 전체의 집단적 이익, 나아가 나라 전체의 이익에 도움이 될 수 있다’(262쪽)고 해석한다. 마르크스의 의도는 국가가 중립적으로 공익을 지킨다는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총자본으로서 사실은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데 있었다. 물론 마르크스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국가의 계급성을 지적하는 명제가 ‘나라 전체의 이익’으로 연결되는 데에는 상당한 논리적 비약이 필요하다.

자신의 전공인 발전경제학의 이슈를 다루었던 장하준의 전작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선진국과 저개발국의 대립 구조를 기본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정책이 성장에 도움이 되느냐가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에서 그것은 더 이상 절대적 기준이 될 수 없다. 예를 들어 복지국가가 오히려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은 입만 열면 포퓰리즘이나 복지망국론을 들먹이며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보수적 입장에 대한 일차적인 반박으로서는 의미를 지니지만, 자칫하면 복지가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입증책임을 떠안을 위험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만약 복지가 성장에 도움이 안 된다면 복지를 포기해야 하는가?
 
성장 담론에 말려들 위험 내포
박정희 시대의 산업정책에 대한 장하준의 긍정적인 평가는 마치 최근 서구의 진보적 학자들이 중국에 대해 갖는 환상적 기대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물론 자유도 없이 굶어 죽는 것은 최악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인권이나 자유주의적 가치가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의 경제성장은 결코 바람직한 것일 수 없다. 더구나 민주주의의 진전 없이는 경제성장의 성과를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가령 재벌의 경영권 승계를 인정해주고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자던 몇 년 전 장하준의 주장은 현실적으로 재벌의 내·외부적 전횡을 견제할 힘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는 무기력한 요구에 그칠 가능성이 크다.

다양한 역사적 반례를 제시함으로써 신자유주의 논리의 허구성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렇다고 적극적 대안이론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출현은 금융을 어느 정도 통제하고 산업자본이나 노동-자본의 협력을 중시하던 이른바 케인스주의가 위기에 처한 결과였음에 주목한다면, 신자유주의로부터 모종의 케인스주의로의 귀환이 문제를 해결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출퇴근 시간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지하철 환승역(신도림역이라도 좋고 교대역이라도 좋다!)을 생각해보자. 개인의 입장에서 압사당하거나 다치지 않으려면 그저 인파 속에 파묻혀 전체가 진행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움직여나가는 수밖에 없다. 혼자서 또는 몇 명만 방향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하나의 올바른 방향으로 빨리 전진하는 것이 목표라면 어깨를 맞대고 좁은 간격으로 천천히 진행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방향이 틀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장하준의 논의는 비유하자면, 환승역 구내의 수많은 사람들을 더 적절한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한 국가의 역할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주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셈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떤 조건하에서 그것이 가능할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현실정치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 치르는 선거를 통해 구성되는 국가를 어떻게 민주적으로 통제할 것인가라는 문제이기도 하다. 상투적인 얘기지만 정권이든 재벌이든, 또는 그 무엇이든 간에 살아 있는 권력을 끊임없이 견제하기 위한 성숙한 시민사회의 역할이 필요하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그런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데 유용한 지침임이 틀림없지만, 지금은 한국 사회가 성장 담론을 벗어나 민주주의와 복지를 새롭게 사고해야 하는 시점이라는 점 또한 분명하다.
rieudm@cnu.ac.kr    

[ 2011년 2월 1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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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지음, 송필용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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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반에 서점에서 <접시꽃 당신> 등 몇 권을 읽은 후로 처음 접하는 도종환 시인의 시집... 이 시집은 그가 지난 30년 동안 발간한 9권의 시집과 그 속의 시들 중에서  자신이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시 61개를 골라 시선집으로 묶은 것이라 한다. 그 시 구절의 바탕에, 시들의 사이에 송필용화백의 어울릴만한 그림들을 그려넣었다.
 
몇 개 맘에드는 시를 소개하면,
[단풍드는 날] "버려야 할 것이 /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 제 삶의 이유였던 것 / 제 몸의 전부였던 것 /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 방하착 / 제가 키워 온, /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 제 몸 하나씩 내려놓으면서 // 가장 황홀한 빛깔로 / 우리도 물이 드는 날..."
나무를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하면 시인이 결국 사람이 언제, 어떻게 아름다워질 수 있는지 말하고자 함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아름답게 불타기 위해서는 자신이 가장 버리기 어려웠던 것들을 버림으로써...
 
"직장인 100만 명이 뽑은 내 인생의 시 한 편" 2009년 한국경제신문이 직장인 103만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이다. 이 조사에서 1위를 차지한 시가 도종환 시인이 쓴 [담쟁이]다.
"저것은 벽 /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 그때 /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톨 살아남을 수 없는 /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않는다 /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 결국 그 벽을 넘는다"
 
남들이 모두 절망하고 포기할 때, 서두르지 않고 한 사람씩 시작하여 주변의 사람을과 함께 나아가면서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무엇이든지 결국 한 사람부터 시작인 것이다. 사람들이 자그마한 사안들부터 그 한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을 때부터, 시작할 때부터 벽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박노해시인의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를 연상시킨다.
 
[여백]에서는 나무들이 아름다운 것은 나무들 뒤에서 조용히 나무들을 받아 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기에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고 말한다. 따라서 여백이 없는 사람,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도 아름답지 않다는 것... 이 '여백'이란 무엇일까...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에서는 살아오면서 지나온 모든 길들이 결국 지금의 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담담하게 술회한다. '가지 않은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고,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던 길'과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로 때로는 쓸쓸하고 때로는 눈시울 젖을 때도 있었지만 그런 길들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더라도 우리는 또 다시 가지 않을 수 없다.
 
작년(2010년) 8월 김해 가야고등학교 학생들에게 한 강연 도중, 도종환 시인은 소통을 먼저 말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언어에 귀를 기울여보라고 했다. "꽃이 말을 하지 않을까요? 짐승은요? 모든 사물은 그들 언어로 소통합니다.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저는 꽃이 항상 향기와 빛깔로 말을 건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은 아름다운 것이 있으면 잠시라도 멈춰 만끽해보라고 했다. 예쁜 게 있으면 보고, 좋은 냄새가 나면 맡고, 즐거운 소리가 울리면 들어보라고 했다. "여러분은 너무 바쁘죠. 공부하고, 학원도 가고, 친구도 만나고. 하지만, 한 번쯤 멈춰보세요. 시인은 멈출 줄 아는 사람입니다." 도종환 시인은 [흔들리며 피는 꽃]을 그렇게 썼다고 했다. 코스모스인 줄 알았던 꽃이 주황색이었고, 주황색 코스모스는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렇게 다가가니 흔들리지 않는 꽃이 없고, 젖지 않는 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사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했다. 이 시는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로 끝난다.

[흔들리며 피는 꽃]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 다 젖으면 젖으며 피었나니 / 바람과 비에 젖으면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겉보기에 아름답기만 한 꽃들도, 새들도, 나무들도 모두가 자연으로부터 흔들리고 젖고 상처받으며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 사람들도 자연에서, 사회에서 온갖 비바람과 상처를 받으면서 자라고 성장한다. 그런 비바람과 상처를 받지 않으려는 삶은, 흔들리지 않고 젖지 않으려 하는 삶은 아름다워지기는 커녕 정상적인 성장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 2011년 2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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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있는 사람들 법정 스님 전집 1
법정(法頂) 지음 / 샘터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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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름다운 마무리>와 <산방한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오두막 편지>, <산에는 꽃이 피네>에 이어 법정스님의 저서를 여섯 번째로 읽었다. 이 책은 1978년 봄 초판이 발행되었고 법정스님이 1973년부터 1977년까지 쓴 글을 모은 것이다. 그 시대는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든, 1972년 유신을 필두로 시작된 한 층 더 암울했던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한국 사람들 전체가 누구도 할 말을 할 수 없고 쓰고 싶은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숨막힌 때 써 내려간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 기간 중에 법정스님은 세속을 떠나 송광사 불일암에 정착하셨다.
 
스님은 불교적 세계관에 뿌리내린 불교 본연의 가르침뿐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사물과 소재들에도 남다른 통찰력과 깊은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남녀노소를 초월하여 폭넓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는데, 이 책에서 그 깊이와 단단함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스님이 이 책을 발간한 이유와 책의 제목을 <서 있는 사람들>로 정한 이유는 서문에 나와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둘레에는 '서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출퇴근 시간의 붐비는 차 안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계층에서 제자리에 앉지 못한 채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똑같은 자격으로 차는 탔어도 자리가 없어 자신의 두 다리로 선 채 끝도 없이 실려가고 있다. 서 있는 사람들은 우리 이웃들이다. 오염된 근대화의 공기를 마시면서 갈수록 구겨져만 가는 이 시대의 풍속권 안에서 함께 앓고 있는 선량한 시민이다. 그들의 체질은 유달라, 이웃이 겪는 고통을 모른체 하지 않고 같이 신음하면서 앓는다. 앉은 자가 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차마 앉을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눈매에는 달무리 같은 우수가 깃들기도 한다."

즉, 이 책은 마땅히 자리잡고 있어야 할 자리에 앉지 못하고 방황하고 절망하는 현대인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책이다. 1970년대 개발, 독재시대에 집필된 이 책은 당시의 억압적 상황, 급격한 산업화가 가져오는 자연 파괴와 인간성 상실에 관한 사색의 글이 특징이다. 비겁한 지식인의 허상, 불신사회, 물질만능주의, 부도덕한 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자연 친화적인 메시지를 담은 책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될 뿐 아니라 종교인이면서도 이념과 현실을 뛰어넘어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늦추지 않은 스님의 구도자로서의 자세도 돋보인다.
 
[서울은 순대속(1977)]이라는 글에서 스님은  도로 체증, 택시 잡기의 어려움, 정류장마다 늘어선 긴 줄, 출퇴근 시간대의 사람들의 물결을 보면서 서울이란 곳이 갈데 없는 순대 속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서울 시민들이 순대 속처럼 되었다고 느낀다. 당시 박정희정부가 검토하던 '임시행정수도'를 만들겠다고 한 구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 때로부터 어언 35년이 지난 지금의 서울 모습도 비슷하다. 서울의 면적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서울은 순대속이고 사람들은 너무 많이 모여 산다. 많은 것은 귀하지 않은 것이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 시민들은 집단으로부터, 서로 간에 귀하게 대접받지 못한다.
 
[무관심(1975)]에서 스님은 당시 버스 안에서의 안내양과 라디오 소음이 승객들을 피곤하고 짜증스럽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운전기사에게 아무 말 없이 내버려두는 무관심을 지적한다. 승객들이 홀로 생각 잠길 수 있는 출퇴근 시간에 소음으로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면서 멍들고 머리가 비게 된다고...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버스 안의 냉난방은 강력해지고 안내양이 지르는 소리는 사라졌지만 라디오 소음은 여전하다. 대신 승객들은 너도 나도 MP3와 핸드폰에서 이어폰을 귀에 연결한다. 음악을 듣는 사람, TV를 보고듣는 사람,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무관심은 생각과 소통 대신 기술의 발달과 상품의 대중화로 개별적인 관심으로 바뀌었다.
 
[외화도 좋지만(1973)]에서 스님은 박정희정부의 외화벌이의 폐해를 지적한다. 당시에 일본 관광객이 상당히 많이 늘어나 숫자상의 관광수지가 큰 흑자를 보았음에도 그 관광객들 대부분이 '기생파티'에 최대의 관심을 가지고 들어온다는 것... 잘 살아야 함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아무 기준도 없이 양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떳떳하고 당당하게 잘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당시 박정희정부가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한면서 겉으로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임을 내세우지만 버젖이 행해지는 기생파티를 알면서 모른체하는 세태를 질타한 것이다. 지금도 정부는 외국 자본을 유치하겠다고 국민의 혈세가 투입된 은행과 기업을 헐값에 매각하려 하고 있고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 지자체는 수백억을 경쟁적으로 낭비하고 있다.
 
[90도의 호소(1973)]에서 스님은 당시 국회의원 합동연설회에 나선 입후보자들이 유권자들에게 90도로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을 보면서 감동보다는 비웃음을 보낸다. 그들이 평소에 하는 행동과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이 글을 읽으면서 한나라당 이재오의원이 생각났다. TV에서 그 특유의 90도 인사를 보면서 그 사람이 MB정권의 실세 중 한사람으로서 집권 이후 지금까지 소통을 거부하고 국민들의 뜻과 요구를 저버리고 강압적이고 무단으로 정치과 정책을 집행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그렇게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다.
 
[우리 시대를 추하게 하는 것들(1973)]에는 37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시대를 추하게 하는 것들이 만연함을 알 수 있다. 서로 돕고 사랑해야 할 인간끼리 물고 뜯으며 싸우는 전쟁이, 분배의 불균형이,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차이가 인간의 유대를 끊어 놓는 것이, 정치권력의 횡포가 우리를 추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질만능의 풍조, 서로에 대한 불신 풍조, 비겁한 지식인의 모습이 또한 추하게 한다. 물질 만능의 폐해를 읽으면서 이반 일리히의 <성장을 멈춰라>가, 비겁한 지식인의 모습을 읽으면서 리영희선생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 이외에도 [제비꽃을 제비꽃답게]에서는 각자의 개성 있는 삶을, [그 눈매들]에서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눈을, [혼돈의 늪에서]에서는 사회 내의 대화와 소통을, [말없는 언약]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믿음을, [공동체의 윤리]에서는 인간 회복과 생명 존중에 대한 종교의 기능을, [무공덕]에서는 달마대사를 통한 종교인의 자세를, [선문답]에서는 구도에서의 자유의 길을 말씀하신다.
 
 이렇듯 우리는 한 글자 한 글자의 압축된 절제미와 상징적인 표현들을 따라 읽다보면,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로부터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 읽어도 당시의 가르침과 메시지가 퇴색하지 않고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점에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외형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족한 삶을 살고 있지만 숨겨진 억압이나 산업화가 가져오는 소외감, 정체성의 혼돈이 더욱 심화된 요즈음, 스님의 글은 조금도 바래지 않은 청정한 목소리로 인간 본연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스님은 특유의 곧고 또렷한 음성으로 우리가 서 있어야 할 곳이 우리 바깥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 풍경에 있음을 일갈하고 있다.   
  
[ 2011년 2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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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뒤르켐의 자살론
에밀 뒤르켐 지음, 황보종우 옮김, 이시형 감수 / 청아출판사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다음 주 공부모임 주교재다. 지난 번 공부모임에서 <영화로 만나는 치유의 심리학>에 대한 세미나가 사뭇 진지하여 그 여세를 몰아 다음 번 공부의 주제도 유사 분야로 정했고 참가자들이 추천하는 책 중에서 이 책이 부교재로 <사회란 무엇인가?>가 부교재로 선정되었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진정한 목적은 공부모임의 취지와는 약간 달랐다. 물론, 책의 제목에서부터 드러나다시피 책의 소재와 주제는 19세기 후반 서구사회에서 ’자살’이 일어나는 원인을 규명하는 것이지만, 당초 저자가 책을 집필한 궁극적인 동기는 그것보다 ’자살’을 주제로 하여 사회가 무엇인지 밝혀내고 학문으로써 사회학을 어떻게 연구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나는 다음 주 부교재인 <사회란 무엇인가?>를 읽은 다음에야 저자의 진짜 목적을 알게 되었다.(그래서 다음 주 공부모임 토론 주제가 조금 애매해지긴 했고...)
 
비록 내가 사회학이나 사회과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저자가 19세기 후반에 사회학을 학문으로 일으켜내기 위해 도입한 사회에 대한 정의와 개념, 사회학의 연구방법론은 아마추어의 시각으로도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1880년대 초반에 이 고전을 발간했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 전에 프랑스, 그리고 서구에서 사회와 국가의 변동흐름을 읽어내고 사회학을 위해 여러 국가의 통계를 이용해 분석해내고 그 데이타로부터 ’자살’의 사회적 원인을 밝혀내는 저자의 학문적 능력은 대단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사회학계에서 저자를 ’사회학의 창시자’로 예우할 만 하다고 생각한다. 
 
몇몇 인터넷에서는 이 책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책을 소개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현대인들의 사망원인 중 하나인 자살에 관한 궁금증을 설명한 책"이라거나 "사회문제가 아닌 현대인의 질병으로 바라보고 다양한 자료와 통계를 분석하여 자살을 사회학적으로 접근하여 풀어낸다."라는 설명이 있다. 첫 번째 설명은 이 책이 단순히 ’자살의 궁금증’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자살의 원인을 사회의 변동과 연관하여 분석한다는 점에서 잘못되었고, 두 번째 설명은 완전히 거꾸로 설명한 것으로 무지와 오해의 극치다. 저자는 자살이 개인들의 질병이 아닌 사회적 원인에 의해 발생한다고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회적 응집력/통합정도가 극단으로 치우칠 경우 자살이 늘어난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19세기 말 프랑스와 프로이센, 작센, 함부르크(모두 현재 독일연방 지역), 스웨덴, 덴마크, 영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의 정부자료를 이용하여 가난과 고통, 권태와 우울증, 혹은 명예를 위해 자살하는 사람들의 원인과 연령과 지역, 기후와 건강, 결혼의 유무에 따른 자살률의 변화와 자살 방지법은 무엇인지 분석한다.

저자는 그 자료들을 활용하여 자살을 선택할 만큼 그 이유가 정말 괴롭고 힘든 것인지, 왜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선택하는지, 비슷한 상황이어도 자살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지 등을 통해 사람들이 흔히 하는 착각, 이를테면 신경쇠약 등의 정신병이 있는 사람들이 자살을 할 것이라든지, 자살을 막으면 그 폭력성이 살인으로 연결된다거나, 경제 부흥보다는 경제 위기 때 훨씬 자살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는 생각 등을 엄격한 자료의 비교와 분석을 통해서 사회적 원인을 규명해낸다.(책 속에서 저자는 자살의 유형을 이기적인 자살, 이타적인 자살, 아노미적 자살로 구분한다.) 공부모임에서 정확한 개념을 정리한 바로는, 사회공동체의 규범과 같은 방향에서의 자살은 이기적 자살로, 다른 방향에서의 자살은 이타적 자살로 정의했다.
 
저자의 결론은, 개인이 그보다 큰 도덕적 실체, 즉 집단적 실체(사회를 의미함)에 지배되고 있다는 것이다. 각국의 국민들은 사망율보다 더욱 확고한 자살률을 보인다. 하루, 한 달, 한 해에 따라 나타나는 자살률의 변화는 사회생활의 리듬을 반영한다는 것. 결혼, 이혼, 가족, 군대, 종교 등의 제도는 명확한 규칙(법칙)에 따라 자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자살의 결론을 통하여 저자는 사회라는 제도를 실재하고 살아 있는 능동적인 세력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런 제도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통해서 제도들이 개인으로부터 독립된 존재임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저자는 사회학이 왜 객관적일 수 있으며 객관적이어야 하는지 분명해짐을 밝힌다. 사회학은 심리학이나 생물학과 마찬가지고 명확하고 실질적인, 사회라는 실체를 연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는 자살을 줄이고 방지하기 위하여 ’조합’을 유력한 대안으로 제시한다. 당시 유럽사회가 중세적인 가족제도와 장원제도, 그리고 종교가 지위와 역할, 사회적인 통합, 커뮤니케이션에서 영향력을 급속히 상실하였고 국가 역시 그 역할을 대신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직업과 교류시간, 통합력과 소통가능성을 고려하여 당시 폭발적으로 늘어가기 시작한 ’조합’이 그런 기능들을 대신해야 하고 따라서 ’조합’을 더욱 확대하고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결론을 내린다. 21세기 한국으로서는 여러가지 이유로 상상도 할 수 없는 관점과 제안이지만, 저자가 ’조합’을 유력한 대안으로 내세운 이유들을 심사숙고하면서 지금의 한국이 어떤 대안을 마련해야 할 지 고민해야 할 때라 생각한다.(공부모임 토론 중,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온 모 참석자는 당시 사회학계와 튀르켐은 노동분업과 그에 따른 조합이 사회적 통합을 가져올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이 책이 현재 한국사회에 필요한 이유는 자살을 사회적인 사실로 받아들이고 사회적인 원인으로 자살을 바라보는 관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국가도 그런 경향이 강하지만, 한국사회 역시 자살을 개인적인 나약함이나 개별적인 조건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자살은 사회(종교,가족,국가,정치등)가 응집력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이다. 응집력의 요소는 의사소통, 감정교류, 세대간 단절, 급격한 가족해체, 이해와 공감, 도덕적 규제 등의 문화적인 것과 사회적 안전망 부족, 급속한 빈부격차 확대, 예기치 않은 실직과 부도 등의 제도적인 것이 모두 포함된다. 사회가 사람들을 자살로 몰고 있다고 애기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사망율, 자살율 통계가 20세기와 21세기에도 이어지는지에 대해서는 따로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21세기 한국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서 최고라는 언론 보도를 통하여 우리사회가 심각한 문제가 있음은 우리 모두가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저자의 분석과 결론을 통해 현대의 한국사회를 바라보면, 결국 21세기 한국사회가 객관적으로 엄중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생각이 든다. 크게 기대하기 힘든 정부와 정치권, 기존 학계에게 기대하거나 기다리기 보다는 외부에서 시민 각자가, 관심있는 사람 하나하나가 연구하고 분석하고 대안을 마련하고 실행하면서 방향과 목표를 세우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지난 1월 뉴스자료에 따르면, 한나라당이 자살방지를 위해 법규에 반영한 것이 고작 ’자살방지센터’를 설치하는 것이다. 열심히 홍보하면 자살이 줄 것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발상!!)

자살을 방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살의 원인에 모두 내포되어 있다. 국가,정치적으로는 제도적인 정비를 서둘러야 하고 사회적으로는 각종 소통과 공감의 조직과 문화가 활성화 되어야 하며(종교도 제 기능을 발휘해야 하고), 가족간의 해체를 줄이고 복원시킬 수 있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 2011년 2월 17일 ]
 
 
-------------------------------[ 자살 관련 통계치와 관련 뉴스 ]-----------------------------------------
 
1. 통계청 사이트 공식 자료
 
한국의 사망 통계와 자살 통계가 궁금한 사람들은 첨부한 통계청의 보도자료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주의해야 할 점은, 통계청이 데이터를 ’마사지’한다는 정황이 강하다는 것...
한 가지 예를 들면, 2006년 통계자료에서는 자살수치가 10만명 당 23.0명인데, 2007년 자료에서는 21.8명으로 바꾸어져 있다.

2009년 통계청 발표자료에서는 10만명 당 무려 42명이다. 한국이 더 문제가 되는 것은 지난 30년간 자살 증가율이 무려 400%에 달한다는 것이다.
 
 
2. DAUM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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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자살률, 2년 연속 세계 1위"’장기 내수불황’으로 5년째 자살 급증, 20~30대 사망원인 1위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5년 연속 높아지며 작년 10만명당 26명을 기록,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2년연속 1위를 차지했다.

자살률 5년째 상승, 하루 평균 6백73명 사망

18일 통계청이 발표한 ’2005년 사망원인 통계결과’에 따르면, 작년 우리나라의 자살률(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은 10년전인 1995년의 11.8명의 2배가 넘는 26.1명으로 OECD 회원국 중 가장 높았다.

우리나라의 연도별 자살률은 1999년 16.1명에서 2000년 14.6명으로 일시적으로 낮아졌다가 2001년 15.5명, 2002년 19.1명, 2003년 24.0명, 2004년 25.2명에 이어 작년까지 5년 연속 수직상승했다. 자살자 급증은 ’장기 내수불황’과 아파트값 폭등으로 ’양극화’가 극심히 진행된 시기와 일치하는 현상이어서, 극심한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확산 등 경제난에 따라 자살율이 급증하는 게 아니냐는 해석을 낳고 있다.

OECD 기준인구로 국가별 연령구조 차이를 표준화한 자살률을 보면 우리나라는 작년 10만명당 24.7명으로 2004년에 이어 불명예스러운 1위를 차지했고, 헝가리가 22.6명(2003년 기준), 일본이 20.3명 등으로 뒤를 이었다. 반면 영국(6.3명), 이탈리아(5.6명), 스페인(6.7명) 등은 자살률이 10명을 밑돌았다.

특히 20~30대의 사망원인 중 자살이 1위를 차지해, 차세대의 이끌어갈 젊은 세대의 좌절감이 심각한 것으로 나타나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률과 더불어 나라 앞날을 어둡게 하는 먹장구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경제난에 따른 자살은 사회적 타살 성격이 짙다"며 "자살 원인을 구조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총체적 해법 마련이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40대 이상은 암이 사망원인 1위

한편 지난해 우리나라의 사망자 수는 24만5천5백11명으로 하루 평균 6백73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성별로는 남자의 사망률이 여자보다 평균 1.2배 정도 높았으며, 50대 남자의 사망률은 여자의 2.85배에 달해 가장 높았다. 40대와 50대 남자의 간질환 사망률은 여자보다 각각 7.45배와 7.26배 높았고 자살률도 여자의 2~3배로 높았다. 남자는 여자에 비해 간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이 3.9배, 운수사고가 2.8배, 자살이 2배 수준으로 높았다. 여자는 고혈압성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이 남자보다 1.8배 정도로 높았다.

연령별로는 20대 미만은 운수사고로 인한 사망이 가장 많았고, 20~30대는 자살이, 40대 이상은 암이 사망원인 1위를 차지했다.

사망 원인별로는 통계조사가 시작된 1983년 이후 22년째 1위를 차지한 암 사망자가 작년에도 전체의 26.7%인 6만5천명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뇌혈관질환 12.7%((3만1천명), 심장질환 7.9%(1만9천명) 순으로 이들 3대 사망원인으로 인한 사망자가 전체의 절반에 가까운 47.3%를 차지했다. 하루 평균으로는 1백79명이 암으로, 86명이 뇌혈관질환으로, 53명이 심장질환으로, 33명이 자살로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자살로 인한 사망자와 당뇨병으로 인한 사망자도 각각 1만2천명에 달했으며, 후천성면역결핍증후군(
AIDS)으로 인한 사망자는 지난해 70명이었다.

사망률 별 증가 사인으로는 암으로 인한 사망률이 1995년 110.8명에서 작년에는 134.5명으로 23.7명 증가해 증가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작년 암 종류별 사망률은 폐암(28.4명), 위암(22.6명), 간암(22.5명), 대장암(12.5명) 순으로 높았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폐암으로 인한 사망률이 9.5명, 대장암이 6.7명, 전립샘암이 2.5명씩 늘어난 반면 위암은 3.9명,
자궁암은 0.6명 감소했다.

반면 교통사고에 의한 사망률은 작년 16.3명으로 10년 전보다 22.4명이나 줄었고 고혈압성 질환은 9.0명, 뇌혈관 질환은 15.4명, 간질환은 12.1명 감소했다.

/ 김홍국 기자 (
archomme@viewsn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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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20 21:55 | 출처 : 본인작성 , [카페] ★가슴~빨★ (가슴성형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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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살 관련법 개정 뉴스
 

"세계 최고 자살국 ’한국’ 자살방지대책센터 설치 추진"

 
입력 2011-01-09 15:15 글자확대글자축소인쇄뉴스퍼가기
 
[경제투데이]
세계 최고 자살국가란 불명예를 떠안는 현실에서 자살예방과 방지에 대한 교육을 실시하고 자살방지대책센터를 설치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김영선 의원은  최근 이러한 내용의  ’국민건강증진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발의했다고 9일 밝혔다.

우리나라에서 지난 2009년 한해 자살에 의한 사망자수는 총 1만4413명으로 하루 평균 42.2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자살률 세계1위 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2000년부터 10년간 자살사망률이 2.38배로 급증하고 있어 사회적 심각성이 날로 높아지는 실정이다. 1990년부터 2006년까지 OECD회원국 대상 자살증가율 조사한 결과 회원국 자살률은 평균 20.4% 감소한 반면 한국은 172.2%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국가적 품격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김 의원은 이번 개정 법률안 발의와 관련, "국민의 생명을 보호해야 할 일차적 책임이 있는 국가가 나서서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예방대책을 강구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자살방지 교육과 자살방지대책센터를 설치해 국민의 자살대책의 중요성에 대한 관심을 증대시키고 국민의 소중한 생명을 보호하고 모든 국민이 건강하고 보람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를 구현하고자 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개정법률안은 김영선 의원이 대표발의하고 김기현, 김정권, 김태원, 김호연, 손범규, 신영수, 안효대, 유승민, 이인기, 이종혁 의원이 공동발의했다. 

http://eto.co.kr/news/view.asp?Code=20110109151551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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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1-10-11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뒤르켐 & 베버 : 사회는 무엇으로 사는가? 지식인마을 19
김광기 지음 / 김영사 / 2007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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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다음 주 공부모임의 부교재(주교재는 에밀 뒤르켐의 <자살론>)다. 공부모임에서는 <자살론>과 이 책으로 ’사회란 무엇인지’, 그리고 ’사회학이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면서 사회&사회학의 개념과 구성원리, 사회의 작동원리를 함께 배우고자 하는 것이다.
 
저자는 출판사의 [지식인 마을 시리즈] 중의 하나인 ’사회란 무엇인가’를 서구에서 출현한 사회학의 두 거장 에밀 뒤르켐과 막스 베버를 비교하면서 풀어낸다. 저자는 사회에 대한 고민과 연구가 출현한 시점을 중세시대가 붕괴하기 시작한 프랑스 혁명으로 본다.(저자의 생각은 곧 현대 사회의 주류 사회학계가 그렇게 인정한다는 뜻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기존의 사회체제가 완전히 붕괴되고 새로운 질서가 성립되는 혼란 속에서 사회학은 탄생했다. 기존의 사회체제의 붕괴는 더 나아가 기존에 당연시되던 모든 것들의 정당성과 도덕성이 도전을 받고 의문시 되었다. 인류는 생각의 자유를 얻었지만, 대신 생각해야 할 의무와 피곤함을 안게 되었다. 중세의 붕괴 이후에는 세상과 사회, 자연과 인간에 대해서 종교가 제공하던 생각의 틀과 질서를 인간들 스스로가 세워야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은 일반인 뿐 아니라 지식인,학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19세기 들어서야 그 모습을 드러낸 사회학이 수천 년의 역사를 지닌 철학, 신학, 과학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학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사회가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성을 찾아내려는 사회학자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밀 뒤르켐은 사회학의 창시자라 불린다. 그는 사회를 "그것 자체로 하나의 독특한 실체를 이루는 현상"으로 보았고 그렇기 때문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를 학문으로 다룰 수 있었다. 그래서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자살을 한 개인의 심리상태나 유전, 또는 질병이 아닌 사회적 통계의 분석을 통한 사회적 원인을 찾은 것이다.(그 원인은 사회의 응집력이었다) 현대 사회학에서는 ’사회’의 중요한 특성을 - 1) 인간 개개인의 외부에 당당히 존재하는 외재성, 2) 사회가 인간들의 밖에 존재한다는 것을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동일하게 알고 있는 객관성, 3) 사회는 외부에 존재하면서 오히려 개별 인간들을 강제할 수 있는 강제성, 4) 도덕적 권위를 갖는 정당성, 5) 개별 인간이나 집단보다 오래된 역사성 - 이라 한다. 그리고 에밀 뒤르켐은 종교에 대한 독특한 정의를 통해 사회는 종교와 결코 다르지 않으며, 종교와 마찬가지로 ’믿음’과 ’제사(행위)’로 유지된다고 주장했다. (뒤르켐은 종교현상을 일종의 ’집단적 광풍’으로 보았고 그 광품을 구성하는 것이 믿음과 제사였다.)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 체계의 출현을 개신교의 윤리와 접목시켜 인과적으로 설명한 막스 베버는 종교가 사회에 미치는 지대한 영향력에 초점을 맞추었다. 나아가 베버는 현대사회를 오랜 기간 역사 속에서 추앙받아온 기존 종교의 절대성이 쇠퇴하고 대신 다양한 가치들이 모두 신의 반열에 올라 그 우열을 가늠하게 되는 이른바 가치의 다신교적 상황의 도래로 묘사했다. 그는 사회 현상에서 인간들의 ’행위의 규칙성’을 찾아 인간의 행위에 담겨있는 의미를 팡가하는 식의 사회(과)학 방법론을 세웠다.
 
막스 베버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부분은 베버가 자신의 사회학을 전개해나가는 데 있어 끈질기게 염두에 두었던 사람이 칼 마르크스였다고 한다. 흔히 이를 두고 비평가들은 "베버가 마르크스의 망령과 부단히 씨름했다"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베버가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현대사회(당시 기준으로)의 자본주의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고 마르크스가 사망한 이후에 그의 저작과 추종자들을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인류역사의 필연적인 단계로 자본주의를 규정하고 전인류가 속한 모든 사회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볍칙으로 보았지만, 베버는 인류의 일반적인 발전단계는 존재하지 않았고 서구자본주의의 발전은 서유럽과 미국에서만 전개되는 독특한 현상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종교를 포함한 정치, 예술, 문화 등을 ’상부구조’라 규정하고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보았지만, 베버는 "상부구조가 하부구조를 결정한다"는 식으로 인식하였다.
 
저자는 이처럼 과거와 현대를 관통하는 사회의 본질을 규명하려 했던 두 명의 지식인 뒤르켐과 베버의 논의를 통해 현재 우리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틀을 제시해준다. 그리고 저자는 책의 말미에 키르키즈스탄의 신붓감 납치 문화와 에티오피아 수르마족 여인들의 입술에 구멍내기 문화, 한국의 황우석사태와 월드컵 응원문화는 "사회란 모두가 미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과 "정상과 비정상은 사회적 정의定義 문제"라고 결론을 내린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사회는 집단적으로 미쳐있음을 인정하면서 사회와 집단이 주어진 모든 것을 매우 당연하게 여기면 살아왔던 사람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태도와 이념, 가치관에 대한 ’회의’와 ’반성’의 계기를 가져야 함을 주장한다. 

사회가 무엇이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이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실제로 내가, 그리고 우리가 사회에 대해,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직접 제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회에 대한 뒤르켐과 베버의 이론과 결론만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단초와 계기는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 출판사가 2006년에 기획하여 시작한 [지식인 마을 시리즈]는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긴 동서양의 대표 지식인 100인의 사상을 소개한 것이다. 이 기획은 분야별, 시대별로 지식인들의 대립, 계승, 영향관계를 비교하여 알아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카이스트 출신으로 동덕여대 교수로 재직 중인 장대익박사가 시리즈를 주도했으며, 현재 37권까지 출간되어 있다. 일반인들이 주요 사상가와 이론가들의 핵심을 엿보는데 유익한 교양서가 될 듯 하다. 
 
[ 2011년 2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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