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있는 사람들 법정 스님 전집 1
법정(法頂) 지음 / 샘터사 / 2001년 3월
평점 :
절판


<아름다운 마무리>와 <산방한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오두막 편지>, <산에는 꽃이 피네>에 이어 법정스님의 저서를 여섯 번째로 읽었다. 이 책은 1978년 봄 초판이 발행되었고 법정스님이 1973년부터 1977년까지 쓴 글을 모은 것이다. 그 시대는 우리가 상상하기도 힘든, 1972년 유신을 필두로 시작된 한 층 더 암울했던 박정희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한국 사람들 전체가 누구도 할 말을 할 수 없고 쓰고 싶은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숨막힌 때 써 내려간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이 기간 중에 법정스님은 세속을 떠나 송광사 불일암에 정착하셨다.
 
스님은 불교적 세계관에 뿌리내린 불교 본연의 가르침뿐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사물과 소재들에도 남다른 통찰력과 깊은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남녀노소를 초월하여 폭넓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는데, 이 책에서 그 깊이와 단단함이 곳곳에 드러나 있다. 스님이 이 책을 발간한 이유와 책의 제목을 <서 있는 사람들>로 정한 이유는 서문에 나와 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우리 둘레에는 '서 있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출퇴근 시간의 붐비는 차 안에서만이 아니라 여러 계층에서 제자리에 앉지 못한 채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똑같은 자격으로 차는 탔어도 자리가 없어 자신의 두 다리로 선 채 끝도 없이 실려가고 있다. 서 있는 사람들은 우리 이웃들이다. 오염된 근대화의 공기를 마시면서 갈수록 구겨져만 가는 이 시대의 풍속권 안에서 함께 앓고 있는 선량한 시민이다. 그들의 체질은 유달라, 이웃이 겪는 고통을 모른체 하지 않고 같이 신음하면서 앓는다. 앉은 자가 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차마 앉을 수 없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눈매에는 달무리 같은 우수가 깃들기도 한다."

즉, 이 책은 마땅히 자리잡고 있어야 할 자리에 앉지 못하고 방황하고 절망하는 현대인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책이다. 1970년대 개발, 독재시대에 집필된 이 책은 당시의 억압적 상황, 급격한 산업화가 가져오는 자연 파괴와 인간성 상실에 관한 사색의 글이 특징이다. 비겁한 지식인의 허상, 불신사회, 물질만능주의, 부도덕한 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자연 친화적인 메시지를 담은 책들과는 뚜렷하게 구별될 뿐 아니라 종교인이면서도 이념과 현실을 뛰어넘어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늦추지 않은 스님의 구도자로서의 자세도 돋보인다.
 
[서울은 순대속(1977)]이라는 글에서 스님은  도로 체증, 택시 잡기의 어려움, 정류장마다 늘어선 긴 줄, 출퇴근 시간대의 사람들의 물결을 보면서 서울이란 곳이 갈데 없는 순대 속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서울 시민들이 순대 속처럼 되었다고 느낀다. 당시 박정희정부가 검토하던 '임시행정수도'를 만들겠다고 한 구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그 때로부터 어언 35년이 지난 지금의 서울 모습도 비슷하다. 서울의 면적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서울은 순대속이고 사람들은 너무 많이 모여 산다. 많은 것은 귀하지 않은 것이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 시민들은 집단으로부터, 서로 간에 귀하게 대접받지 못한다.
 
[무관심(1975)]에서 스님은 당시 버스 안에서의 안내양과 라디오 소음이 승객들을 피곤하고 짜증스럽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운전기사에게 아무 말 없이 내버려두는 무관심을 지적한다. 승객들이 홀로 생각 잠길 수 있는 출퇴근 시간에 소음으로 소중한 시간을 빼앗기면서 멍들고 머리가 비게 된다고...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버스 안의 냉난방은 강력해지고 안내양이 지르는 소리는 사라졌지만 라디오 소음은 여전하다. 대신 승객들은 너도 나도 MP3와 핸드폰에서 이어폰을 귀에 연결한다. 음악을 듣는 사람, TV를 보고듣는 사람, 가만히 창밖을 응시하는 사람들... 사람들의 무관심은 생각과 소통 대신 기술의 발달과 상품의 대중화로 개별적인 관심으로 바뀌었다.
 
[외화도 좋지만(1973)]에서 스님은 박정희정부의 외화벌이의 폐해를 지적한다. 당시에 일본 관광객이 상당히 많이 늘어나 숫자상의 관광수지가 큰 흑자를 보았음에도 그 관광객들 대부분이 '기생파티'에 최대의 관심을 가지고 들어온다는 것... 잘 살아야 함을 인정하지만 그것은 아무 기준도 없이 양만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떳떳하고 당당하게 잘 살아야'한다는 것이다. 당시 박정희정부가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한면서 겉으로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임을 내세우지만 버젖이 행해지는 기생파티를 알면서 모른체하는 세태를 질타한 것이다. 지금도 정부는 외국 자본을 유치하겠다고 국민의 혈세가 투입된 은행과 기업을 헐값에 매각하려 하고 있고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서 지자체는 수백억을 경쟁적으로 낭비하고 있다.
 
[90도의 호소(1973)]에서 스님은 당시 국회의원 합동연설회에 나선 입후보자들이 유권자들에게 90도로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을 보면서 감동보다는 비웃음을 보낸다. 그들이 평소에 하는 행동과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이 글을 읽으면서 한나라당 이재오의원이 생각났다. TV에서 그 특유의 90도 인사를 보면서 그 사람이 MB정권의 실세 중 한사람으로서 집권 이후 지금까지 소통을 거부하고 국민들의 뜻과 요구를 저버리고 강압적이고 무단으로 정치과 정책을 집행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은 그렇게 국민들을 우롱하고 있다.
 
[우리 시대를 추하게 하는 것들(1973)]에는 37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시대를 추하게 하는 것들이 만연함을 알 수 있다. 서로 돕고 사랑해야 할 인간끼리 물고 뜯으며 싸우는 전쟁이, 분배의 불균형이, 가진 자와 없는 자의 차이가 인간의 유대를 끊어 놓는 것이, 정치권력의 횡포가 우리를 추하게 만드는 것이다. 물질만능의 풍조, 서로에 대한 불신 풍조, 비겁한 지식인의 모습이 또한 추하게 한다. 물질 만능의 폐해를 읽으면서 이반 일리히의 <성장을 멈춰라>가, 비겁한 지식인의 모습을 읽으면서 리영희선생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 이외에도 [제비꽃을 제비꽃답게]에서는 각자의 개성 있는 삶을, [그 눈매들]에서는 인간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눈을, [혼돈의 늪에서]에서는 사회 내의 대화와 소통을, [말없는 언약]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믿음을, [공동체의 윤리]에서는 인간 회복과 생명 존중에 대한 종교의 기능을, [무공덕]에서는 달마대사를 통한 종교인의 자세를, [선문답]에서는 구도에서의 자유의 길을 말씀하신다.
 
 이렇듯 우리는 한 글자 한 글자의 압축된 절제미와 상징적인 표현들을 따라 읽다보면, 당시의 암울한 시대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로부터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에 읽어도 당시의 가르침과 메시지가 퇴색하지 않고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점에서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외형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족한 삶을 살고 있지만 숨겨진 억압이나 산업화가 가져오는 소외감, 정체성의 혼돈이 더욱 심화된 요즈음, 스님의 글은 조금도 바래지 않은 청정한 목소리로 인간 본연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스님은 특유의 곧고 또렷한 음성으로 우리가 서 있어야 할 곳이 우리 바깥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마음 풍경에 있음을 일갈하고 있다.   
  
[ 2011년 2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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