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 - 지식의 대통합 사이언스 클래식 5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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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이 책의 처음 인연은 2009년 아는 사람에게 선물하면서 부터이다.
당시 나는 ’통섭’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접하면서 ’관념적이 사변적인 이야기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선물만 해주고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작년 말에 독서모임의 책을 블로그에 담으면서 독서모임에서도 이 책을 교재로 하여 토론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책의 정보에 대해 알아보았고 읽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결국, 이 책은 연말에 런던에 가서 하루하루 일정을 마친 후 칠흙같은 영국의 밤을 벗삼아 읽었다.
 
21세기 현재 인류의 지식과 지성을 지배하고 있는 서구식 사회와 대학의 지식,학문들은 수 백, 수 천가지의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인류는 그 지성이 탄생한 이래 16세기 르네상스 시대까지 모든 지성이 한 데 어우려저 탄생하고 교류하고 발전하였다.
저 멀리 서구의 소크라테스, 아이작 뉴턴에서부터 가까운 이웃나라 공자와 노자, 이 땅의 정도전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16세기를 지나면서 서구에서부터 통합되었던 학문은 한 갈래 씩 갈라져 나오기 시작했다.
서구식 사상과 문화의 특성인 ’나누기’와 ’쪼개기’는 자연과학에서 원자, 양성자, 미립자까지 나아갔고 인문사회 분야에서도 수 많은 세부 학문들로 세분되었다.
20세기 후반부터는 지식,학문같지도 않은 것들까지 버젓이 대학의 학과로 편성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흐름은 ’전공’과 ’전문화’라는 이름으로 시대의 대세로 인정되었고 중세기부터 약500년 동안 지속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전문화는 각 분야의 깊숙한 수준까지 연구,분석을 용이하게 한 긍정적인 측면과 동시에 각 분야의 소위 전문가들이 자신이 전체 인류에서, 전체 사상과 지식에서 어디까지 왔는지 돌아보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문화는 각 분야 전문가들이 전체와 동떨어지게 만들었고 학문 뿐 아니라 사회와 역사, 사람과 자연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분리되도록 한 큰 원인이 되었다.
옆 방에서, 다른 학문과 학과에서, 근처 대학에서, 이웃 나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게 만들었고 각자의 학문과 연구가 점점 더 관념적이고 사변적으로 만들게 한 부작용도 점점 커지고 있다.

결국, 서구의 사상과 학문은 20세기 말을 지나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나누기’와 ’전문화’의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서구에서도 인식하기 시작한다.
  
나 역시 의무교육 시절과 대학 시절에 국어, 국사, 수학, 과학, 사회, 경제, 도덕, 음악, 미술 등으로 나누어진 교과 체계에 별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사람이 서로 연관되어 있듯이, 도시와 농촌이, 국가와 국가가, 하늘과 땅이, 인간과 자연이 연관되어 있듯이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은 가지고 있었다.
대학에서 초보적이나마 철학과  역사, 사회와 자연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런 심증은 커졌지만, 세상에 대한 기본 지식이 부족했던 나로서는 기본 지식을 늘리는 것이 더 큰 관심사였다.
 
몇 년 전부터 부족한 나의 소양을 키우기 위해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후, 지식이나 학문 사시의 연관성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아마 이 책은 그런 나의 내재된 관심을 일깨우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저자는 사회생물학 분야를 탄생시킨 학자 중 하나다. 
지난 30년 동안 진행된 사회생물학 논쟁은 학문적 논의 안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기존의 형이상학적 사고를 180도 뒤집었다.
그런 진전은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인간행동유전학 등의 ‘통합 과학’들을 발전시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을 사회적, 생물학적 존재로서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기 시작했다.
저자는 <인간 본성에 대하여(On Human Nature)>, <생명의 다양성(The Diversity of Life)> 등을 출간하여 인간 본성에 대한 ‘통합 과학’적 이해를 대중적으로 확산시켜 왔다.

이 책의 주제는 저자의 서문대로 ’지식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통일성’에 대한 이야기다.
책 속에는 ’사회생물학’의 태동 이래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이라는 ‘두 문화’ 사이에 놓인 거대한 틈을 메워 온 저자의 노력이 집대성되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자들이 인간의 지식이 본질적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망을 바탕으로 협력, 연구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20세기의 물리학 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통일된 연구 속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진실한 이해와 인간 외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근거한 21세기적 지식 혁명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전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 서구 학문의 큰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다양한 가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 가지들 속에 숨어 있는, 그렇지만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간과했던 지식 통합의 가능성을 찾아내 명확하게 보여 준다.
서구 학문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세계관에서 출발하여 근대 학문과 과학의 모체가 되었던 계몽주의를 거쳐 현대 자연과학, 사회과학, 예술, 종교 이론에까지 이르기까지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전망 속에서 인간의 지적 모험을 통시적, 공시적으로 아우르는 이 책은 그의 하버드대 동료 교수인 제럴드 홀턴의 말대로 “파편화되어 있는 오늘날 지식 세계의 풍경을 진정 새로운 방식으로 조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높은 고지대로 이끌어 준다.”
 
’통섭’은 대만 중화 학술원에서 펴낸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과 일본 학자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가 편찬한 [한화대사전(漢和大辭典)]에 비교적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큰 줄기’ 또는 ‘실마리’라는 뜻의 통(統)과 ‘잡다’ 또는 ‘쥐다’라는 뜻의 섭(攝)을 합쳐 만든 말로서 ‘큰 줄기를 잡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삼군(三軍)을 통섭하다.”는 경우와 같이 ‘통리(統理)’ 즉 ‘장관’이라는 뜻을 지닌 정치 제도적 용어이기도 하다.
그럴 경우에도 그 뜻은 “모든 것을 다스린다.” 또는 “총괄하여 관할하다.”이므로 그런대로 잘 들어맞는 것 같다.
사실 저자는 “사물에 널리 통하는 원리로 학문의 큰 줄기를 잡고자”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니 그의 consilience에는 전자(通涉)와 후자(統攝)의 개념이 모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말로 ‘통섭’이라고 할 때에는 구태여 이 둘을 구별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혼동을 줄이기 위해 역자는 후자를 택했다.(옮긴이 서문 에서) 

"설명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Enarro, Ergo Sum)"
저자는 르네 데카르트의 언명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의 대안으로 새로운 구절을 제시한다.
그동안 인류가 ’생각하는 뇌’를 들여다보기에 바빴으나, 앞으로는 ’설명하는 뇌’를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명하는 뇌’는 ’생각하는 뇌’와 ’느끼는 뇌’가 보다 긴밀하게 협조하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리라 예측하는 것이다.  

책을 모두 읽고 난 후 느낌은 "많이 어렵다"는 것...^^
저자가 일반일들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것이 책 속에 종종 드러나기는 하지마, ’통섭’의 역사나 필요성, 관련 분야의 현황 등을 학문적으로 정리하여 설명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내용이 어려울 수 밖에 없어 보인다.
 
나는 원칙적으로 한국어 ’통섭’이든,  영어 ’Condilience’ 등 모든 학문이 통해야 하고 서로 연관되어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데 동의,공감한다.
어떻게 보면, 유사 이래 동양에 전반적으로 통용되는 ’태극’이나 ’음양’처럼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모든 사물에는 동전의 양면이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내가 큰 거부감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는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서구에서는 역사적으로 그러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일원론’과 ’시비론’만이 존재했기 때문에 수 백년, 수 천년에 걸쳐 먼 길을 돌아 학문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은 아닐런지...
 
아무튼, 자연과학과 인문사회학을 ’통섭’시키기 위해 장구한 서구 학문을 연구하여 그 이론적 기반을 닦으려는 저자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 책 속의 문장
- 인간 사고에 대한 단순한 결정론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사고 과정은 명확한 인과 관계를 통해 몸과 분자의 운동을 기술하는 물리 법칙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이렇게 개인의 마음을 완전히 파악하고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의 자아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자유 의지를 갖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p.222)  
 -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은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게 만들고 특정 행동들을 상대적으로 더 잘 배우게 만드는 신경 형질들이다. 유전적으로 대물림되는 형질은 모방자, 즉 문화의 단위가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종류의 기억 요소들을 고안해 내고 전달하는 방식이다.(p.268)
-  과학과 예술이라는 두 영역은 모두 창조적 정신을 요구한다는 면에서 유사하기는 하지만 그 목표와 방법에 있어서는 그원적으로 다르다. 예술과 과학 간 교류의 핵심은 ’혼성화’, 즉 ’과학적 예술’이나 ’예술적 과학’과 같은 떨떠름한 혼합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과학 지식과 미래에 대한 그 지식의 독점적 감각으로 예술에 대한 ’해석’을 되살리는데 있다. ’해석’은 과학과 예술 간의 통섭적 설명이 가질 수 있는 논리적 통로이다.(p.365)
- ’통섭 세계관’의 핵심은 모든 현상들이 비록 길게 비비 꼬인 연쇄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물리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p.461)
- 현존 기술과 최근의 소비 및 낭비 수준을 유지하면서 나머지 세계의 생활 수준을 대부분의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수학적 불가능에 도전하는 꿈일 뿐이다. 오늘날의 소득 불균형을 평준화하려면 선진국의 생태적 발자국을 줄여야 한다.(p.484)

[ 2011년 1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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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즐거움 - '공부도둑' 장회익의
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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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 살아온 시대나 집안 분위기가 달라서 그런지 나는 어렸을 때 부모나 주위 어른들로부터 공부를 방해받지는 않았다. 차라리 저자처럼 공부를 하고 싶은데 필요한 교재나 참고서, 독서용 책이 부족했을 뿐이다. 초등학교~고등학교까지 학교 도서관에는 읽을만 한 책이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 쓸만한 도서관을 갖춘 학교도 초등학교 정도에 불과했고 그나마 그리스,로마신화와 고전 몇 종, 자연과학 관련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의 경우 도서관이라는 팻말이 달려 있는 교실이 있었지만 그곳은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공간이 아니라 수험공부를 하는 ’특별한 장소’일 뿐이었다. 학교에서 성적이 좋은 일부 학생들만 이용할 수 있도록 정하고 그곳에서는 수험공부만 할 수 있었다. 도서관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고전 시리즈와 일부 교과서 이외의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책을 읽지 않았고 읽으라고 권하는 선생도 없었다.
 
저자와 나의 나이 차이가 대략 20년 정도 되었지만, 책 속에서 저자가 어린 시절을 보내던 50년대나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내던 70년대는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그나마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저자는 한국전쟁 와중에 학교를 몇 번 옮기면서 학업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고 중학교마저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나는 큰 장애없이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를 다녔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정과 학교, 국가의 교육 시스템, 교사의 질, 교과목, 공부에 대한 개념은 50년대와 70년대가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우리 세대 역시 어느 누구에게로부터도 공부란 무엇인지, 왜 공부를 하는지, 인생과 공부는 어떤 관계인지,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쾌하게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초,중,고등학교라는 학제 시스템에 이끌려 ’당연히’ 학교에 다니고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고 진급할 뿐이었다. 물론, 20세기 후반부터는 그 부적절하고 부족했던 교육시스템과 교사 문제, 교과과정, 공부개념이 더욱 악화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뿐더러 사교육 시장에 휘둘리고 있는 형편이 되었다.
 
이 책은 저자의 ’공부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전한다. 저자가 어려서부터 살아 온 경험을 기초로 어렵게 공부를 접하였지만 역으로 그 어려운 과정이 저자의 창조력과 학구열, 공부의 질과 욕구를 더 높여 주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저자 자신이 살아온 과정이 즐겁고 신나게 지적 욕구를 충족하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주면서 현재 가정과 학교, 대학과 국가의 공부에 대한 관념과 태도, 방식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지적하고 있다.  

첫째 이야기. [창고에 갖힌 도둑] 조선 전기의 문신 사숙제私淑齊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쓴 글 중에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도자설'을 통해 커다란 곤경을 겪으면서 터득한 기술이나 방법이야말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며 그래야 대가를 이룬다는 교훈이다. 저자는 이 옛 이야기를 자신의 공부과정에 빗대어 여러 번의 곤경을 겪으면서 저자 스스로가 공부하는 법과 자신의 앎을 세워나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둘째 이야기. [인삼과 산삼] 할아버지의 반대에 의한 학교 중퇴, 종교에 대한 경험, 개인적인 학습 노력의 과정에서 주어진 조건과 시스템에 의한 공부가 아니 스스로의 학습법에 의한 공부야말로 '인삼'이 아닌 '산삼'이 되는 과정임을 이야기한다.
 
셋째 이야기. [교실 안과 교실 밖] 저자는 자신의 독립적인 공부가 청주공업고등학교 입학과 졸업에 큰 도움이 되었고, 독자적인 물리학 입문과 학교 밖을 활동을 통해 스스로 학습법이 효율이 컸음을 말한다. 이런 현장은 강도와 깊이는 다소 다르더라도 우리 세대 역시 비슷하게 겪은 것으로 기억한다. 대부분 과목의 경우,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서 교사로부터 배운 내용보다는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참고서, '정석' 또는 '성문종합영어'를 스스로 학습하는 경우가 많았다.
 
넷째 이야기. [방황과 모색] 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에 입학하였지만 기대와는 달리 대학 교과과정은 저자를 만족시키지도 못했고 배움도 얻지 못하게 되면서 교과과정에 있어 '자동차 조립론'이 아닌 '송아지 사육론'의 타당성을 제기한다. '자동차 조립론'이란 교과과정이 교양과목과 전공과목 모두 세부적으로 교양과 전공을 나누어 분절적으로 가르친 후 나중에 종합하는 방식이고 '송아지 사육론'이란 송아지 사육처럼 처음부터 교양이나 전공에 대한 전체적인 모습을 그려나간 후 점점 뼈대와 살을 붙여가는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스스로 전공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상대성이론' 등 최신 물리학 이론을 접하면서 철학적인 사고의 필요성을 느끼고 철학과에서 강의를 듣기도 했다.
 
다섯째 이야기 [앎의 되새김질] 저자는 서울의 공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3년간의 국방의 의무를 마쳤는데 사관생도에 대한 강의 준비를 하면서 자신의 앎으로 생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의 전공인 물리학을 '되새김질'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을 통해 물리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음을 이야기한다.
 
여섯째 이야기 [물질에서 생명으로] 결혼하고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을 졸어한 이후 저자는 생계와 공부의 연장을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리버사이드 캠퍼스에 입학한다. 저자의 지도교수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연구를 했던 유진 위그너 교수의 제자인 캘러웨이 교수임을 밝히면서 은근히(?) 아인슈타인의 학문 계보를 이은 느낌을 가졌음을 고백하기도 한다.(실제로 저자는 아인슈타인 이후의 흐름이 '야생학풍'이었음을 지적하고 한국식 학계의 '계보'에 대해 비판한다.) 대학원 과정을 진행하던 중, 저자는 생물학을 전공하는 한국인 유학생을 통해 처음 DNA를 접하면서 생물학과 생명에 대한 지적 자극을 받았음을 이야기한다.
 
일곱째 이야기 [학문과 등산] 저자는 학문은 경쟁이 아님을 강조한다. 따라서 학문을 '경주'보다는 '등산'에 비유한 것이다. 실제로 저자는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메타과학과 협동과정, 자연과학기초론 등의 교과과정을 개설하는데 참여하고 오랜 기간 동안 학생들에게 강의를 진행하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대학 1학년 때 교양필수 과목이었던 '물리학 개론'과 '화학 개론'을 수강하였는데 내 기억에 저자의 강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과목에 해당하지 않아 접하지 못했다. 내가 당시에 저자의 강의를 들었다면 이후의 내 삶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을까?라고 생각해보면 90% 이상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정답일 것이지만...^^
 
여덟째 이야기. [가르침과 깨달음] 저자는 일반적으로 진행되는 현재의 교수 및 교사의 교습법, 학습법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한 후, 저자의 물리학과 철학,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섭 학문으로 연구 결과를 발표했던 '온생명'에 대해 설명한다. 지구상의 개별 생명체들은 자체로 소중한, 그렇지만 홀로 생존할 수 없는 '낱생명'이며 지구의 자연과 태양, 달은 '낱생명'과 함께 엮어진 '보생명'이고 '낱생명'과 '보생명'이 한데 어우려저 '온생명'을 이룬다.
 
아홉째 이야기. [오래 묵혀둔 과제] 저자는 서구의 자연과학과 물리학에만 의존하는 동양과 한국의 세태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피력하면서 자신의 족보상 선조인 조선시대 선비 장현광張顯光에 대해 이야기한다. 장현광은 16세기 중엽에 태어나 <우주설宇宙說>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안에 자연과학과 우주론에 대한 이론이 들어있다. 저자는 서울대 재직 중 장현광의 '우주론'을 연구한 바 있다.
 
열째 이야기. [녹슬지 않은 배턴을 넘기기 위해] 저자는 "진정한 삶을 살아간다는 자기 자신에 대해 최대한의 충실을 기한다는 것이며, 이는 다시 자신의 내면을 뚫고 들어가 끝없이 자신의 깊이를 되새기는 일이다"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삶이 일종의 이어달리기 이므로 후손들에게 '녹슬지 않는 배턴' 넘기기 위해 앎을 향한 자신의 노력을 끝까지 경주할 것을 다짐한다.  

 1950~80년대 한국은 말 그대로 격동의 시기였다. 분단과 한국전쟁, 전쟁의 폐허와 기아, 생필품 부족과 빈곤, 국가주도 경재개발 및 재벌경제 시스템... 그 고난의 시기에 대부분 저자 혼자 힘으로 공부의 길을 개척하고 유학을 떠나고 물리학과 철학까지 학습해 나가는 과정을 보면 한국의 물리학과 학문간 통합을 주도해가는 저자의 모습이 당연하게 보이기도 한다. 저자보다 한결 나은 형편과 조건에서 학업을 해온 내가 부족한 점과 미처 깨닫지 못한 점을 반성하고 배우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저자가 공부해온 과정, 삶의 여정은 사람들에게 열심히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자세와 태도를 엿보게 해준다. 주어진 조건과 위기를 기회로 삼는 자세, 스스로 이해하고 깨달으려는 모습, 지식과 지혜를 향한 끊임없는 탐구정신... 그러한 자세와 태도가 지금의 장회익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비록 저자가 살아온 인생의 조건과 과정이 우리세대와 또 지금의 10대나 20대와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원칙적으로 저자와 같은 자세와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많은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행복한 사람’에 속하는 소수에 해당한 것 같다. 삶과 우주에 대해, 사회와 세계에 대해 저자 만큼 알고 있으면서 특별한 물리적, 정신적 어려움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평생하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이 <행복의 정복>에서 과학자 집단이 다른 학문집단, 또는 다른 직업군보다 행복지수가 높다고 지적했지만 장회익교수의 글을 읽다보면 실제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저자가 글을 쓴 의도는 알고 있고 그래서 이 책이 보여주는 일정한 한계는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글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이미 저자가 살아온 조건과 독자들이 살고 있는 조건이 무척이나 다른 점을 고려한다면 독자들이 저자와는 또 다른 역경 속에서 어떤 자세와 태도, 방법론을 가지고 공부를 해나가는 것이 돌파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단초를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간)자서전 같기도 하다. 서문 말미에 "한평생 공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한 살매가 어떻게 가능한지 알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드린다"에서는 일부 독자들이 약 올라 하고 짜증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책 속의 문장
- 나는 성경 자체가 나쁜 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성실하지만 불완전한 사람들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일 수 있다. 그리고 고의로 거짓저술을 했다기보다는 잘 몰라서 혹은 그런 형식 밖에 빌릴 수가 없어서 오늘 우리가 보기에 부적절한 내용들이 담긴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일단 내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유지하되, 제도화된 기독교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사도신경’을 강요하는 기독교와는 결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p.170)
 
- 요즈음은 가히 경쟁만능 시대라 부를 만큼 모든 것을 경쟁에 맡겨야한다는 생각들이 만연한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더구나 그렇다. 학문은 기여이고 협동이지 결코 경쟁이 아니다.(p.282)
 
- 학문하는 일을 바둑에 비기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장거리 경주에 비기기도 하지만, 학문은 역시 등산에 비기는 것이 가장 적절하리라 생각한다. 바둑이나 경주와는 달리 등산은 승부에 매달리지 않고 경쟁을 조장하지도 않는다. 자기 능력과 취향에 맞게 목표를 정하고 자기 흐름에 따라 걸음을 조정할 뿐이다.(p.301)
 
- 우리가 지금까지 ’생명’이라 생각했던 것은 진정한 의미의 생명이 아니라 이것의 한 부분인 ’낱생명’이었으며, 이것이 생명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것의 밖에 있는 이것 못지않게 본질적인 존재인 ’보생명’과 함께해야 하는 것이고, 이렇게 함께해서 진정한 의미의 생명 구실을 하는 그 전체가 바로 ’온생명’이라는 이야기다.(p.330)
 
[ 2011년 5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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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법정 스님 전집 7
법정 지음 / 샘터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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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름다운 마무리>와 <산방한담>에 이어 법정스님의 저서를 세 번째로 읽었다.
이 책도 서점에 나온 스님의 책 중에서 초창기(1993년~1996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책은 아래와 같은 스님의 말씀으로 요약할 수 있다.
"새가 깃들지 않은 숲을 생각해보라.
그건 이미 살아 있는 숲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생기와 그 화음을 대할 수 없을 때,
인간의 삶 또한 크게 병든 거나 다름이 없다.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스님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우리들 각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적 현상의 그림자'라고 이야기한다.
즉, 우리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가 바로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이 세상의 상태라는 것...
'우리 시대(근대 이후)에 이르러 물질적인 풍요만을 추구한 나머지 인간의 심성과 생활환경이 말할 수 없이 황폐화 된 것은, 누구의 탓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이 저지른 재앙이다.
흙과 물과 나무와 공기와 햇빛의 은혜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들이 그와 같은 고마운 자연을 끊임없이 허물고 더럽힌다.'고...
 
예전 같은 경우, 큰스님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시면 으레 동양적인 철학으로서 '그런 마음과 자세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이구나'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이제는 그 말들이 구체적으로 느껴지곤 한다.
예를 들어, 나 뿐 아니라 내 주변을 둘러보아도 돈에 대한 생각, 차에 대한 생각, 아이들이나 어른들에 대한 태도, 생활질서, 쓰레기 버리기, 물적인 욕심과 낭비, 편리함만의 추구, 단기간의 이익추구, 사회와 이웃에 대한 무관심 들이 일상적인 모습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과 태도들이 결과적으로 무모한 권력에 눈이 먼 정권과 정치인이 나타나도록 하고 전사회와 계층이 황금만능주의에 물들게 되고 도로에 차가 넘치고 차도를 중심으로 하는 도로교통체계가 수립되고 아이들을 입시교육에 내몰고 어른들을 무시하고 방치하고 시내 곳곳에 쓰레기가 넘쳐나고 책보다 게임이 대중화되고 무궁화열차가 사라지는 대신 KTX 밖에 탈 수가 없고 한 쪽은 흥청망청, 다른 쪽은 밥먹기도 벅찬 삶이 존재하고 온갖 비리와 부조리가 판을 치게 하는 뿌리가 되었다.
이명박과 같은 대통령을, 안상수와 같은 국회의원, 공정택같은 교육감, 땅투기 선수인 장관 후보, 4대강 망치기 등등...
이 모든 말도 안되는 현실이 누구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자문해 본다.
 
스님 말씀대로 일찍이 동양의 신앙은 산하 대지를 신성한 존재로 여겨 귀의의 대상으로 삼았었다. 그래서 인간과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서양의 백인들은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여기고 환경의 지배를 추구했다. 그 결과 과잉 소비와 포식 사회를 이루어 오늘날과 같은 온갖 질병과 환경 위기를 불러들인 것이다.
삶의 원천을 망각한 채 도시화와 산업화로 줄달음치면서 날로 인간의 설자리가 사라져가고 있다.
이제 우리 사회가 새삼스럽게 삶의 질을 문제 삼을 만큼, 그 동안 우리들이 추구했던 그 풍요가 한낱 허구임이 드러나게 되었다.
현재와 같은 우리들의 잘못된 생각과 생활 습관이 고쳐지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지구는 황량한 사막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봄이 와도 꽃이 피어나지 않고 새들도 찾아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는 생물인 인간도 살아갈 수 없다.
 
제레미 리프킨이 <엔트로피>나 <수소혁명>, <육식의 종말>, <유러피안 드림>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법정스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서구적인 언어와 표현으로 변형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리프킨이 작년에 <공감의 시대>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이론에 대한 정립을 시도해보지만 그다지 여의치 않았던 것은, 동양적인 철학과 사고방식이 부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내가 스님처럼 모든 인연을 끊고 홀로 산속에 들어가 자연과 벗하며 자연 속에서 살아갈 자신은 없다.
하지만, 스님의 말씀처럼 작은 부분에서부터 점차 소유와 소비를 줄이고 육식과 포식을 줄이고 자연과 벗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담배가 제일 문제...ㅋ)
 
또, 스님은 '무엇을 읽을 것인가'에서 나의 독서 태도에 대해서도 일침을 가하신다.
'우리가 책을 대할 때는 한 장 한 장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자신을 읽는 일로 이어져야 하고, 잠든 영혼을 일깨워 보다 값있는 삶으로 눈을 떠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펼쳐 보아도 한 글자 없지만 항상 환한 빛을 발하고 있는 그런 책까지도 읽을 수 있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스님은 음악에 대해, 존재에 대해, 종교에 대해, 책에 대해, 직업에 대해,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안내한다.
 
* 책 속의 문장
- 좋은 음악은 무디어지거나 녹슬기 쉬운 인간의 감성을 맑고 투명하게 다스려준다.(p.32)
- 사람이 무엇 때문에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지, 그리고 순간순간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는 저마다 자신이 선택해야 할 삶의 과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들 가자가 이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독창적인 존재라는 사실이다. 단 하나뿐인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자기 자신답게 사는 일이 긴요하다. 개체의 삶은 제멋대로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삶과 조화를 이룰 때에만 그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p.34)
- 우리는 굳어진 고정관념 때문에 기왕에 알려진 것만을 받아들일 뿐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험과 인식이 부족하다. 고정관념의 틀에서 벗어나 맑은 눈으로 찬찬히 살펴보면 아름다운 생명의 신비가 바로 우리 곁에 수없이 깔려 있다.(p.64)
 
- '양관 화상 良寬和尙'의 시
  욕심이 없으면 모든 것이 넉넉하고
  구하는 바 있으면 만사가 궁하다
  담백한 나물밥으로 주림을 달래고
  누더기로써 겨우 몸을 가린다
  홀로 살면서 노루 사슴으로 벗하고
  아이들과 어울려 노래하고 논다
  바위 아래 샘물로 귀를 씻고
  산마루의 소나무로 뜻을 삼는다.(p.66)
 
- 관세음觀世音이란 세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는 뜻. 다시 말해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임이다. 바깥 소리가 자기 내면의 소리와 하나가 되도록 자극하게 귀를 기울이다 보면 마침내 귀가 활짝 열린다.(p.79)
- 절이나 교회에 종교가 있다고 잘못 알지 말아라. 어떤 종교든지 일단 조직화되고 제도화되면 종교 본래의 길에서 벗어나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만다. 그때 그 종교는 더 이상 신이나 진리로 가는 길이 아니라 독선과 아집에 대한 변명이 되어 버린다. 종교의 틀 속에 갇힌 사람들은 어떤 의식이나 상징을 종교로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종교가 다른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고 싸우고 죽이기까지 한다. 그러나 신은, 부처와 진리는 이런 곳에는 없다.(p.82)
- 무엇이든지 많이 알려고 하지 말라. 책에 너무 의존하지 말라. 성인의 가르침이라 할지라도 종교적인 이론은 공허한 것이다. 그것은 내게 있어서 진정한 앎이 될 수 없다. 남한테서 빌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겪은 것이 아니고, 내가 알아차린 것이 아니다. 남이 겪어 말해 놓은 것을 내가 알은체할 뿐이다. 진정한 앎이란 내가 몸소 체험한 것, 이것만이 참으로 내 것이 될 수 있고 나를 형성한다.(p.84)
- 공부가 됐건 일이 됐건 전적으로 하라. 어중간한 것은 사람을 퇴보시킨다. 하다가 그만두지 말라. 안 한 것만 못하다. 남에게 폐가 되지 않는 한 무슨 일이든지 전력을 기울여 하라. 그때 자기 안에서 어떤 변혁이 일어난다. 그 변혁의 과정에서 참된 자기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p85)
 
- 분수 밖의 욕구인 탐욕은 목마른 허욕일 뿐 근원적으로 내 것이 될 수는 없다. 본래 내 것이란 없는 법이니까. 어떤 개인의 소유라 할지라도 크게 보면 이 우주의 선물이다. 개인의 소유란 그 사람이 한 때 맡아 가지고 관리하는 것이다.(p.130)
- 우리가 행복하고 보다 뜻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불필요한 것인지, 그때 그때 자신의 분수와 처지에서 냉정하게 생각을 가다듬어야 한다. 불필요한 것들에서 벗어나 소유를 최소한의 것으로 제한하는 것은 정신생활을 보다 자유롭고 풍요롭게 하는 요체다. 자신의 분수를 망각한 채 소유에 마음이 빼앗기면 눈이 흐려져 인간적인 마음이 움트기 어렵다.(p.132)
- 어떤 직종에서 무슨 일에 종사하건 간에 자신이 하는 일을 낱낱이 지켜보고 자신의 역할을 자각하는 것이 곧 명상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으면 자기 자신을 안팎으로 냉철하게 살펴보면 된다.(p.139)
- 꽃은 단순히 눈요기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곱고 향기롭고 부드러운 우리 이웃이다. 생명의 신비와 아름다움과 조화를, 거칠고 메말라가는 우리 인간에게 끝없이 열어 보이면서 깨우쳐 주는 고마운 존재다.(p.143)
 
- 아이들은 텅 빈 물통이 아니라 하나의 씨앗, 한 개의 도토리다. 어떤 식물학자나 정원사도 도토리에게 참나무가 되는 방법을 말해 줄 수는 없다. 그 작은 씨앗 속에서 거대한 참나무로 자라서 수백 년을 살고 수백만 개의 도토리와 나뭇잎과 줄기를 만들어 낼 그런 힘이 들어있다.(p.163)

- 자연은 부처나 예수, 모하메드나 간디보다 더 위대한 스승이다. 왜냐하면 그들도 자연의 제자이기 때문이다.(p.163)
- 꿀벌은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면서 어느 꽃에도 해를 입히지 않고 조금씩 꿀을 모은다. 그러나 사람들은 땅에서 무엇을 얻어내려고 할 때, 계속해서 빼앗기만 하여 그것이 소진되고 고갈되어 자원이 끝장날 때까지 간다. 우리는 꿀벌한테서 조금만 얻어 오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p.163)

- 삶에는 이유도 해석도 붙일 수 없다. 삶은 그저 살아야 할 것, 경험해야 할 것, 그리고 누려야 할 것들로 채워진다. 부질없는 생각으로 소중하고 신비로운 삶을 낭비하지 말 일이다. 머리로 따지는 생각을 버리고 전 존재로 뛰어들어 살아갈 일이다. 묵은 것과 굳어진 것에서 거듭거듭 떨치고 일어나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 새로운 시작을 통해서 자신을 새롭게 이끌어내고 형성해갈 수 있다.(p.174)
- 작은 것과 적은 것이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답고 고맙다. 귀하게 여길 줄 알고, 소중하게 여길 줄 알고, 아름답게 여길 줄 알며, 또한 감사하게 여길 줄 아는 데서 맑은 기쁨이 솟는다.(p.196)
- 자기가 낳은 자식이라 할지라도 그 아이는 부모의 것이 아니다. 그럴 만한 인연이 있어 그 부모를 거쳐서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동물이건 식물이건 간에 그 자체가 하나의 독립된 신성한 우주다.(p.202)
 
- <삼국유사> 5권에는 혜통 스님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혜통이 출가하기 전 세속에 있을 때, 그의 집은 남산 서쪽 기슭인 은냇골 어귀에 있었다.
어느 날 집 근처 시냇가에서 수달 한 마리를 잡게 되었다.
고기는 끓여서 먹고 그 뼈는 뜰가에 버렸다.
이튿날 아침 뜰가에 나가 보니 그 뼈가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게 여기고 자세히 살펴보니 웬 핏자국이 띄엄띄엄 나 있었다.
그 핏자국을 따라가 보니 전날 수달을 잡았던 그 근처 보금자리에 수달의 뼈가 고스란히 다섯 마리 새끼를 안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그는 크게 놀랐다.
자신의 행동을 자책한 끝에 그는 마침내 속세를 등지고 출가 수행자의 길로 떠났다."(p.204)
이것은 지극한 모성애와 영혼의 작용을 의미하는 이야기라 한다.
 
- 인간끼리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에 천한 직업은 없다. 다 필요에 의해서 벌어진 일들이기 때문이다. 직업에 귀천은 없지만 천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웃과 사회에 덕이 되는 것은 좋은 직업이고, 해독을 끼치는 것은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천하게 만든다.(p.244)

- 자기 자신이 참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면, 그는 그 일을 통해 삶의 기쁨과 보람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 그러나 하기 싫은 일을 마지못해 생활의 한 방편으로 하고 있다면, 그의 삶은 날로 생기를 잃어갈 것이다.(p.245)
- 근원적으로 죽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변화하는 세계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미 우리 곁을 떠나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그들은 다른 이름으로 어디선가 그답게 존재하고 있다고 눈 밝은 현자들은 말한다.(p.251)
- 우리를 지금의 우리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바로 우리 마음이다. 내 마음이 악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지옥을 만들고, 내 마음이 착한 일에 머물면 그것이 곧 천국을 만든다. 누가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그렇게 지어서 만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이라 한다.(p.264)

- 마하마트 간디가 말했다. "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우리의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이다."(p.296)
- 힌두교 성전인 <우파니샤드>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인간의 욕망이 바로 그의 운명이다. 왜냐하면 그의 욕망이 다름아닌 그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의지가 곧 그의 행위이며, 그의 행위가 곧 그가 받게 될 결과물이다. 극섯이 좋은 것이든,나쁜 것이든"(p.304)
- 현재 우리가 마음속에 지니고 있는 한 생각이나 입에 담는 말, 그리고 몸으로 하는 행동은 지금 한때로 그치지 않고 이 다음의 나를 형성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 삶은 내가 선택하고 결단한 의지력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지 누가 대신해서 해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마다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질 수밖에 없지요.(p.307)
- 삶을 충만케 하는 길이 책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책을 넘어서서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이 독자적인 사유와 행동을 쌓아감으로써, 사람은 그 사람만이 지니고 누릴 수 있는 독창적인 존재가 된다.(p.321)

[ 2011년 1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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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을 넘어서 - 물리학자 장회익과 철학자 최종덕의 통합적 사고를 향한 대화
장회익.최종덕 지음 / 한길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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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이라는 단어에서 두 저자는 ’물리학 : 철학’이나 ’자연과학 : 인문학’, ’동양: 서양’, ’현대 : 전통’을 떠올리겠지만, 나에게 있어 ’이분법’은 전혀 다른 단어의 대립을 떠오르게 한다. 바로 ’친북 : 반북’, ’좌파 : 우파’, ’애국 : 매국’, ’민주 : 독재’, ’성공 : 실패’와 같은 단어들이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합 또는 통섭을 사고하는 학자들과 국내 사회 현상을 사고하는 나와 같은 사람들의 차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여러가지 방식과 계기로 반대 개념을 사고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밤과 낮, 삶과 죽음, 물질과 의식, 남과 녀, 남극과 북극 등등... 처음 언어와 단어를 배우기 위해서 익혔든, 영어 외우기와 시험공부를 위해 익혔든 어려서부터 반대 단어와 개념들은 쉽게 우리들에게 다가왔고 어른들과 선생들, 언론과 각종 매체들은 일상생활에서 일상생활에서 쉽게 살아가기 위해, 또는 각 개인가 집단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런 언어와 개념들을 사용하고 강요해 했다. 결과적으로 ’이분법’은 수 십, 수 백년 간 인류에게 커다란 사고의 틀로 자리잡게 되어 사람들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사물과 현상을 인식하는 것을 방해해온 셈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지난 100년 간의 근현대사를 통해 극단적인 대립 단어들로 수 많은 고통과 억압을 당해온 바 있고 아직도 그 폐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친일과 반일은 일제시대부터 시작하여 21세기 이른 현재 시점까지 극복하지 못했고, 통일과 분단은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이 땅에서 민족의 염원이자 정치가들의 전략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또한 전쟁과 평화는 현실적인 위협과 두려움으로 이 땅에 존재하고 있고, 친북과 반북, 친공과 반공은 여전히 가공할만 한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무기로 남아있으며, 10년 만에 군사독재의 악령은 이명박 정권을 통해 사람들에게 되살아 났다.
 
이 책은 이번 주 공부모임의 교재로 선택되었지만, 나 역시도 ’이분법’이라는 단어는 20대 시절부터 늘 머리 한 구석에 남아있는, 나 스스로도 & 내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숙제였다. 그래서 세미나의 교재임에도 며칠 밤 동안 졸린 눈을 비벼가면서 한 줄, 한 줄 읽어나갔다. 2008년 4월 이 책을 한 번 읽고 독후감까지 남겼지만, 이번에 또 다시 읽으니 대부분의 책 내용이 새롭게 다가왔다. 지난 3년 간 내 나름대로 독서를 거듭한 과정이 있었음을 느끼는 것은 처음보다 책장을 넘기는 것이 조금 더 수월하다는 것과 중요한 물리학과 철학 개념, 학자, 이론이 낯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들의 논의가 내가 가장 관심있는 분야를 대상으로 하지 않았지만, ’이분법’이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이유가 저자들의 관심사와 나의 관심사와는 상관 없이 공통적으로 흐르는 사유와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관심 있게 읽었다.
 
제1장 [과학과 철학의 만남]에서는 두 저자가 어떻게 물리학과 철학, 자연과학과 인문학이라는 학문의 두 영역을 넘나들게 되었는지에 대해, 어떤 고민과 성찰 속에서 다른 학문분야를 연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안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다. 그리고 대상적 지식과 성찰적 지식, 즉 ‘세계에 대한 질문’(물리학&자연과학)과 ‘삶에 대한 질문’(철학&인문학)이 궁극적으로 같은 물음이라는 전제에서 통합적 사유의 실마리를 찾는다. 또 학문 간의 소통을 펼쳐진 합죽선에 비유해 모든 부챗살이 모이는 공동영역인 연결고리 쪽에 관심을 두는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제2장 [지식의 누적과 전환]에서는 뉴턴의 고전역학에서 20세기 물리학의 눈부신 성과라 할 수 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그리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로 대표되는 양자역학을 중심으로 사유 틀의 확장과 지식의 전환에 대한 문제를 논의한다. 특히, 불확정성이론이 마치 반이성과 탈이성의 과학적 도구이론으로 오용됐던 문제를 지적하고, “이것은 분명 합리적 이성의 승리이지 붕괴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나아가 양자역학은 불확정적이고 고전역학은 확정적이라는 이분법, 그리고 상대성이론은 상대적이고 고전역학은 절대적이라는 단순도식도 잘못되었음 말한다.

제3장 [생명에 대하여]에서는 “생명이란 것을 빼놓고 물질만 얘기해서는 반쪽 과학”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온생명 이론]을 중심으로 물질현상과 생명현상을 이원적으로 보려는 시각을 지양한다. ‘생명의 자족적 존재 단위’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라는 개념으로 정의되는 온생명은 가이아 이론과도 구별됨을 설명한다. 또한 생명과 물질의 구분은 대상과 대상의 구분이 아니라 ‘대상의 한 존재양상’(생명)과 ‘대상을 구분하는 소재’(물질)의 구분으로 본다. 수십억 년간 이어져온 진화와 변화라는 기간을 고려하지 않고 생명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진화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제4장 [동양과 서양]에서는 흔히 서양은 합리적인 방식으로 사물을 이해했고 동양은 신화적이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사물을 이해했다는 이분법적 고정관념의 오류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과도한 서구화에 대한 반감으로 맹목적인 동양 우월주의도 경계할 것을 강조한다. 그런 바탕 위에 대생(對生)지식 개념과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나타난 - 항상 삶(生)과의 연관 속에서 사물을 파악하려 했던 - 동양적 인식방법을 살펴보았다. 한편 [노자]가 서양에 소개되는 과정과 뉴턴 고전역학을 공부했던 혜강 최한기의 예에서 동서양의 학문 수용과정의 어려움도 짚어보았다.

제5장 [의식과 물질]에서는 의식과 주체, 정신과 물질, 마음과 신체, 그리고 그것 사이의 관계들, 즉 심신 이원론이냐 일원론이냐, 유물론이냐 유심론이냐 같은 오랜 주제들을 폭넓게 고찰하고 있다. 장구한 생명의 역사가 시작하는 시점에서 물질의 원형으로부터 의식이 생기고, 문화와 언어를 통해 더 고양된 의식이 생기게 되었다는 자연주의적 접근의 의미를 되새겼고, 물질은 주체적인 내적 측면(의식)과 물리적인 외적 측면(신체)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일원(一元) 속의 양면성에 주목했다. 그리고 자연의 변화, 생명의 진화, 의식의 고양에 대한 접근은 항상 입체적이고 메타적으로 고찰해야 함을 강조한다.

제6장 [대립과 화해, 물러섬과 나아감]  지식인으로서의 사회 참여행위에 대한 ’물러섬’과 ’나아감’의 문제를 성찰한다. 궁극적으로 올바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회의 속에서 생겨나는 이러한 고민은 단순한 배중률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깊은 본성이라는 것이다. “물러섬 없는 나아감은 맹목이고, 나아감 없는 물러섬은 허상”이라는 말로 귀결되는 둘의 관계는 갈등이 아니라 균형과 조화의 관계다. ‘참여’를 유가의 도덕생명에, ‘은둔’을 도가의 자연생명에 비유하지만, 결국 그 역시 인간 삶의 양식이라는 큰 스펙트럼의 양단일 뿐이니 둘 중 하나를 가르는 논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책을 읽다가도 나에게도 ’이분법’과 ’이원론’식 사고방식이 남아 있다는 것을 문득 느끼게 된다. 이분법이나 이원론, 양자택일의 문제는 독선과 자만에서 출발하기 쉬운 법... 독선과 자만을 늘 경계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쉽지는 않은 듯 하다.
 
저자들은 대립되는 단어나 개념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는 전제를 인정하면서도 결국 겉으로는 대립되는 개념들이 이분법, 즉 ’이원성’에 빠지지 않고 ’일원양면론(一元兩面論, 하나의 존재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성격의 발현)’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위해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관점과 ’이해의 틀’이 중요하게 된다.(아쉽게도 상대방이나 상대방의 주장을 이해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에 대한 대안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이원성’과 ’이분법’을 극복하고 두 가지 상반되어 보이는 개념과 주장을 통합하기 위해 필요한 관점 중 하나가 ’연속성’이다. 특히 물질과 의식의 경계,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 동양과 서양, 현대와 전통은 모두 한 가지에서 뻗쳐나온 양쪽의 극단이라고 설정하고 양 극단이 서로 이어져 있으면서 경계나 구분을 나눌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연속성’은 시간을 빼놓고는 성립될 수 없다. 자연과 물질에서 인간과 의식이 나타나는 과정이 없이, 전통에서 현대가, 동양에서 서양이, 자연과학이, 그리고 인문학이 연속적일 수 있는 것은 ’시간’이 그 속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학문적 깊이를 온전히 따라잡기 어려워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저자들이 학문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 개념들만 다루는데 그쳐 실제 한국사회에서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이념적, 계급적, 정치적 편향들의 이론적 기초를 분석하거나 허구성을 파악하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 책 속의 책 :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프리로프 카프라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장회익 <물질, 인간, 생명>, 프리고진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펜로즈 <황제의 새 마음> 
  
[ 2011년 5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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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서평 ] - " 물리학과 철학의 만남 "
 
 이감사님이 최근에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친히 이 책까지 빌려주셨다. 처음 이 책을 받을 때는 제목이 ’이분법을 넘어서’였기 때문에 한국의 국내상황이나 세계적인 문명출동 상황에 대해 무언가 의미있는 메시지가 있을까하고 기대했는데 실제 책을 모두 읽고나니 구체적인 사회상황보다 자신들이 몸 담고 있는 학문세계의 ’이분법’과 ’자연과 인간의 충돌’에 대한 논의가 주제여서 조금은 실망했다.
 
 저자 중 장회익교수는 ’온생명’이라는 생명이론 주창자이고 현재 대안학교인 녹색대학 총장을 역임한 학자이며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서울대 교수로 지내면서 오랫동안 학문의 통합과 소통에 깊은 관심을 두면서 과학자의 시선으로 인문학적 주제들을 연구해왔다. 최종덕교수는 학제간 통합의 주창자이고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과학철학을 전공한 철학자이다. 그의 연구는 한의학과 생물학, 동양과 서양의 학문 영역에 걸쳐 자연데 대한 철학적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책의 제목처럼 학문과 사상에 걸쳐 심각하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이분법’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다. 책의 소단원들도 1. 과학과 철학의 만남, 2. 고전과 현대, 3. 생명에 대하여, 4. 동양과 서양, 5. 의식과 물질, 6. 대립과 화해(물러섬과 나아감)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최소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히려고 노력하고 있고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 자체가 이미 문제해결의 문지방을 반을 넘어선다고 판단하고 있다. 물론 저자들이 물리학과 철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했기 때문에 핵심적인 문제의 도출은 과학과 철학의 만남에 대해서이다.
 
 근대 이후 자연과학이나 서구사상이 한국이나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자연을 이해하고 인간의 이익을 도모하는데 큰 기여를 해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자연계의 모든 현상에 양면이 있다는 것이 사람들이 존재가 있으면 비존재가 있고 유한이 있으면 무한이 있을 거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익숙하게 되어 버렸다. 지금 한국을 비롯한 지구상 어디에서나 일상화되어버린 선과 악, 아군과 적군, 승자와 패자, 이익과 손실, 경쟁력과 도태, 전쟁과 평화, 정의와 불의가 애초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넘어서서 타인을 대상화시키고 타인을 짓누르고 자연을 파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저자들은 이를 ’언어의 소산물인 개념을 자연계의 범주처럼 생각하는 일종의 믿음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특히 한국인은 개념이 낳은 이분법의 아픔을 가장 많이 절감하는 사람들이고 그것은 ’현대와 전통’, ’동양과 성양’, ’남과 북’, ’민주와 반민주’, ’남과 북’, ’동과 서’라는 역사의 오랜 갈등으로 나타난다.
 
 저자들은 이러한 새태의 출발점을 짚어내기 위하여 학문적으로 접근한다. 저자들이 대화 방식을 통해 ’이분법’의 역사와 구조를 짚어내려 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들까지 이어가지는 못한다. 물론 애초에 저자들의 의도 역시 현실적인 문제까지 나아가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안다는 것’에 대해서부터 따지고 분석해 들어간다. 우리가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 속에서 설정된 앎의 틀 안에 앎의 내용이 자리잡는 것"을 말하며 새로운 지식이나 상황을 접했을 경우 등 달라진 상황에 따라서는 이 틀의 조정 또는 확대가 필요하다. 이들은 자연과학 전공자로서 이런 ’앎의 틀’과 ’앎의 방식’을 자연과학의 역사로부터 이해시키고 있다. 오래전 과거 그리스 수학과 과학, 즉 유클리드 기하학과 당시의 과학 수준으로는 뉴튼의 역학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뉴튼의 고전역학의 개념의 틀 안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뉴튼의 고전역학은 3차원 공간과 별도의 시간으로서 자연을 바라보고 해석하는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공간과 시간이 동일한 4차원 시공간 내에서 구성되기 때문이고 더불어 뉴튼의 고전역학은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설정하지만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이 모두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천재였지만 자신이 양자역학을 처음 접하고 죽을 때까지 50~60년간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했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과 상대성 이론의 ’실재성’에 대해 새로운 사유의 틀을 도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틀은 철학적인 사유가 동반되어야 한다.
 
 단적으로 표현하여 서양의 학문 추구방식은 ’분석적’이다. 철학과 자연과학에서 시작하여 의학이나 통계학까지 하나하나 분리내고 분석하여 더이상 분해할 수 없을 때까지 개별화시키면서 그 구조와 개별물질의 성질과 법칙성을 밝혀내려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동양의 학문 추구방식은 통합적,종합적이다. 세세하게 개별적으로 분리하고 분석하기 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파악하고 사물간의 연관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미래의 학문이나 사상은 동양이나 서양이 추구하는 각자의 방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렵고 따라서 더 큰 차원의 사유의 틀을 가지고 이들을 통합시켜야 한다. 특히 그러한 인식과 방향성에 큰 계기가 된 것이 쿠르트 괴델의 ’불완정성 정리’와 양자역학이다. ’불완전성 정리’는 서구 이성이 추구하는 방식과 논리는 더 이상 증명이나 합리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이성의 한계를 규정지었고 양자역학은 ’존재’와 ’실재성’에 대한 서구 자연과학의 인식과 학문의 한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대과학을 접하면서 장회익교수는 ’온생명’ 이론을 창안한다. ’온생명’ 이론이란 동물과 식물, 인간 등 살아있는 모든 개체생명과 개체생명이 살아있을 수 있도록 놓여있는 지구와 태양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자 이론이다. ’온생명’은 ’온생명’을 구성하는 모든 개체생명(낱생명)과 주변 물질이 서로 분리되거나 한쪽이 파괴도면 전체 ’온생명’ 역시 위협받는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온생명’ 이론은 당연히 환경운동과 생명운동으로 연결되고 일부에서는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아우를 수 있는 비전으로 보고 있다.
 
 이 책을 통하여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이나 철학과 같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데 필요한 관점이나 방법, 방향성의 맥을 잡는 데 도움을 받았다. 내가 지금 쌓고자 하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에 대한 접근방식을 다시한번 재검토하여 향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영역을 잡고 책을 구하고 공부해나갈 지 참고할 만한 모델이 제시되어 있다. 또 하나, 저자들이 스스로 고백하건데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이해하는데 몇 십년이 걸렸다고 한다. 따라서 나 역시 몇 개월, 1년도 안되는 공부량으로 ’어렵다’고 스스로에게 투정부린 것이 자연스러운 현실인 것 같다...ㅋㅋㅋ
 
[ 2008년 4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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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지음, 마이클 매커디 판화, 김경온 옮김 / 두레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작년 7월 법정스님의 저서 < 내가 사랑하는 책들 >에 소개된 책 50권 중 <소로우의 무소유 월든>, <농부철학자 피에르 라비>, <오래된 미래>, <무탄트 메시지>, <성장을 멈춰라>, <꾸뻬씨의 행복여행>에 이어 일곱 번째로 읽은 책이다. 
 
이 책은 20세기 초 프랑스 프로방스의 고산지대에서 일어났던 실화를 바탕에 둔 글이다.
처음 이 글이 발표된 것은 1953년(미국 잡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처음...)이며, 그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13개 언어로 옮겨져 전세계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져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일으키며 시청되고 있다.
영화제목은 책과 같은 [나무를 심은 사람]이며, 주인공의 거룩한 삶에 큰 감명을 받은 세계적인 화가 프레데릭 바크가 그리고 캐나다 국영방송국(CBC)이 제작을 맡아 나오게 되었다.
(저자인 장 지오노 역시 엘제아르 부피에의 묵묵한 노력과 그 결과에 감동을 받아 세계적인 작가로 거듭나게 된다...)
 
옮긴이는 이 책이 전세계 독자들에게 공감을 받는 이유를 이 조그만 책이 ’깊은 문학적 향기’와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평한다.
전세계에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자본주의가 지구 전체를 뒤엎기 시작한 19세기 이래 3세기에 걸쳐 인류의 현실은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 패권주의와 종교근본주의의 어두운 먹구름이 덮고 있다.
그런 현실에서 이 작품은 이기주의를 버리고 자기의 이익이 아니라 자연과 다른 사람을 위해, 공동의 선을 위해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일하는 고결한 인격을 지닌 한 사람의 불굴의 정신과 실천이 이 땅에 기적같은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그 메시지는 인류에게 자연을 되살릴 수 있는 가능성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준다.
 
작품의 줄거리는 아주 간단하다.
"나무를 심고 가꾸는 한 사람의 끈질긴 노력 -> 새로운 숲의 탄생 -> 수자원의 회복 -> 자연으로의 사람들의 복귀 -> 희망과 행복의 부활"이 그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추악한 다른 측면과 대조를 이룬다.
인간의 이기심과 무절제한 탐욕, 앞날을 조금도 내다보지 못하는 무지, 나무를 마구 베는 자연파괴, 그리고 사람이 사람을 살육하는 두 차례의 전쟁의 모습...
 
이 이야기는 앞으로 우리의 문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가르쳐주고 있는 현대를 위한 한 편의 탁월한 ’우화’이기도 하다.
어른이나 어린이나 독자들은 한 인간이 만들어낸 기적에 관한 이 이야기를 읽고 큰 감동과 용기를 느낄 것이다.

그리하여 위기를 맞고 있는 우리의 지구를 살리는 과업이 우리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신음하는 자연을 구하기 위해 저마다 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나 하나의 노력으로 무엇이 변할까?"라고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렇게 우리 각자가 회의하고 포기하면서 자연파괴와 과소비, 빈부격차와 인간소외를 모르는 척 하게되면 그 결과는 우리들의 후손들에게 참혹하게 다가올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자그마한 노력들이 한 데 모여서 큰 강을 이루고 바다로 향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을 통해 겉으로 보기에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사람일지라도 순수한 품성과 자신의 강한 의지, 그리고 끈질긴 노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고 고결한 인품으로 평가받고 역사에 길이 남을 수 있음을 배웠다.
 
나도 올 해부터는 매년 반드시 나무 한 그루씩을 심어야겠다...^^ 

[ 2011년 1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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