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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 - 지식의 대통합 ㅣ 사이언스 클래식 5
에드워드 윌슨 지음, 최재천.장대익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5년 4월
평점 :
나와 이 책의 처음 인연은 2009년 아는 사람에게 선물하면서 부터이다.
당시 나는 ’통섭’이라는 생소한 단어를 접하면서 ’관념적이 사변적인 이야기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선물만 해주고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작년 말에 독서모임의 책을 블로그에 담으면서 독서모임에서도 이 책을 교재로 하여 토론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책의 정보에 대해 알아보았고 읽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결국, 이 책은 연말에 런던에 가서 하루하루 일정을 마친 후 칠흙같은 영국의 밤을 벗삼아 읽었다.
21세기 현재 인류의 지식과 지성을 지배하고 있는 서구식 사회와 대학의 지식,학문들은 수 백, 수 천가지의 갈래로 나누어져 있다.
인류는 그 지성이 탄생한 이래 16세기 르네상스 시대까지 모든 지성이 한 데 어우려저 탄생하고 교류하고 발전하였다.
저 멀리 서구의 소크라테스, 아이작 뉴턴에서부터 가까운 이웃나라 공자와 노자, 이 땅의 정도전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16세기를 지나면서 서구에서부터 통합되었던 학문은 한 갈래 씩 갈라져 나오기 시작했다.
서구식 사상과 문화의 특성인 ’나누기’와 ’쪼개기’는 자연과학에서 원자, 양성자, 미립자까지 나아갔고 인문사회 분야에서도 수 많은 세부 학문들로 세분되었다.
20세기 후반부터는 지식,학문같지도 않은 것들까지 버젓이 대학의 학과로 편성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흐름은 ’전공’과 ’전문화’라는 이름으로 시대의 대세로 인정되었고 중세기부터 약500년 동안 지속되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전문화는 각 분야의 깊숙한 수준까지 연구,분석을 용이하게 한 긍정적인 측면과 동시에 각 분야의 소위 전문가들이 자신이 전체 인류에서, 전체 사상과 지식에서 어디까지 왔는지 돌아보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전문화는 각 분야 전문가들이 전체와 동떨어지게 만들었고 학문 뿐 아니라 사회와 역사, 사람과 자연으로부터도 철저하게 분리되도록 한 큰 원인이 되었다.
옆 방에서, 다른 학문과 학과에서, 근처 대학에서, 이웃 나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게 만들었고 각자의 학문과 연구가 점점 더 관념적이고 사변적으로 만들게 한 부작용도 점점 커지고 있다.
결국, 서구의 사상과 학문은 20세기 말을 지나 21세기에 들어오면서 ’나누기’와 ’전문화’의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을 서구에서도 인식하기 시작한다.
나 역시 의무교육 시절과 대학 시절에 국어, 국사, 수학, 과학, 사회, 경제, 도덕, 음악, 미술 등으로 나누어진 교과 체계에 별다른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지만, 어렴풋하게나마 사람이 서로 연관되어 있듯이, 도시와 농촌이, 국가와 국가가, 하늘과 땅이, 인간과 자연이 연관되어 있듯이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은 가지고 있었다.
대학에서 초보적이나마 철학과 역사, 사회와 자연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런 심증은 커졌지만, 세상에 대한 기본 지식이 부족했던 나로서는 기본 지식을 늘리는 것이 더 큰 관심사였다.
몇 년 전부터 부족한 나의 소양을 키우기 위해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후, 지식이나 학문 사시의 연관성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아마 이 책은 그런 나의 내재된 관심을 일깨우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저자는 사회생물학 분야를 탄생시킨 학자 중 하나다.
지난 30년 동안 진행된 사회생물학 논쟁은 학문적 논의 안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기존의 형이상학적 사고를 180도 뒤집었다.
그런 진전은 사회생물학, 진화심리학, 인간행동유전학 등의 ‘통합 과학’들을 발전시켜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을 사회적, 생물학적 존재로서 온전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 주기 시작했다.
저자는 <인간 본성에 대하여(On Human Nature)>, <생명의 다양성(The Diversity of Life)> 등을 출간하여 인간 본성에 대한 ‘통합 과학’적 이해를 대중적으로 확산시켜 왔다.
이 책의 주제는 저자의 서문대로 ’지식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통일성’에 대한 이야기다.
책 속에는 ’사회생물학’의 태동 이래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이라는 ‘두 문화’ 사이에 놓인 거대한 틈을 메워 온 저자의 노력이 집대성되어 있다.
그는 이 책에서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자들이 인간의 지식이 본질적으로 통일성을 가지고 있다는 전망을 바탕으로 협력, 연구해야 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20세기의 물리학 혁명이 그랬던 것처럼 통일된 연구 속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진실한 이해와 인간 외부 세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에 근거한 21세기적 지식 혁명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전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 서구 학문의 큰 줄기에서 갈라져 나온 다양한 가지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 가지들 속에 숨어 있는, 그렇지만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간과했던 지식 통합의 가능성을 찾아내 명확하게 보여 준다.
서구 학문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세계관에서 출발하여 근대 학문과 과학의 모체가 되었던 계몽주의를 거쳐 현대 자연과학, 사회과학, 예술, 종교 이론에까지 이르기까지 지식의 대통합이라는 전망 속에서 인간의 지적 모험을 통시적, 공시적으로 아우르는 이 책은 그의 하버드대 동료 교수인 제럴드 홀턴의 말대로 “파편화되어 있는 오늘날 지식 세계의 풍경을 진정 새로운 방식으로 조망하고 이해할 수 있는 높은 고지대로 이끌어 준다.”
’통섭’은 대만 중화 학술원에서 펴낸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과 일본 학자 모로하시 데쓰지(諸橋轍次)가 편찬한 [한화대사전(漢和大辭典)]에 비교적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큰 줄기’ 또는 ‘실마리’라는 뜻의 통(統)과 ‘잡다’ 또는 ‘쥐다’라는 뜻의 섭(攝)을 합쳐 만든 말로서 ‘큰 줄기를 잡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또한 “삼군(三軍)을 통섭하다.”는 경우와 같이 ‘통리(統理)’ 즉 ‘장관’이라는 뜻을 지닌 정치 제도적 용어이기도 하다.
그럴 경우에도 그 뜻은 “모든 것을 다스린다.” 또는 “총괄하여 관할하다.”이므로 그런대로 잘 들어맞는 것 같다.
사실 저자는 “사물에 널리 통하는 원리로 학문의 큰 줄기를 잡고자”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니 그의 consilience에는 전자(通涉)와 후자(統攝)의 개념이 모두 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말로 ‘통섭’이라고 할 때에는 구태여 이 둘을 구별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혼동을 줄이기 위해 역자는 후자를 택했다.(옮긴이 서문 에서)
"설명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Enarro, Ergo Sum)"
저자는 르네 데카르트의 언명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의 대안으로 새로운 구절을 제시한다.
그동안 인류가 ’생각하는 뇌’를 들여다보기에 바빴으나, 앞으로는 ’설명하는 뇌’를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명하는 뇌’는 ’생각하는 뇌’와 ’느끼는 뇌’가 보다 긴밀하게 협조하는 관계 속에서 존재하리라 예측하는 것이다.
책을 모두 읽고 난 후 느낌은 "많이 어렵다"는 것...^^
저자가 일반일들도 쉽게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는 것이 책 속에 종종 드러나기는 하지마, ’통섭’의 역사나 필요성, 관련 분야의 현황 등을 학문적으로 정리하여 설명하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내용이 어려울 수 밖에 없어 보인다.
나는 원칙적으로 한국어 ’통섭’이든, 영어 ’Condilience’ 등 모든 학문이 통해야 하고 서로 연관되어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데 동의,공감한다.
어떻게 보면, 유사 이래 동양에 전반적으로 통용되는 ’태극’이나 ’음양’처럼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모든 사물에는 동전의 양면이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내가 큰 거부감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는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서구에서는 역사적으로 그러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일원론’과 ’시비론’만이 존재했기 때문에 수 백년, 수 천년에 걸쳐 먼 길을 돌아 학문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것은 아닐런지...
아무튼, 자연과학과 인문사회학을 ’통섭’시키기 위해 장구한 서구 학문을 연구하여 그 이론적 기반을 닦으려는 저자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 책 속의 문장
- 인간 사고에 대한 단순한 결정론은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사고 과정은 명확한 인과 관계를 통해 몸과 분자의 운동을 기술하는 물리 법칙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다. 이렇게 개인의 마음을 완전히 파악하고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의 자아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자유 의지를 갖고 있다고 믿을 수 있다.(p.222)
- 우리가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은 세상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게 만들고 특정 행동들을 상대적으로 더 잘 배우게 만드는 신경 형질들이다. 유전적으로 대물림되는 형질은 모방자, 즉 문화의 단위가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종류의 기억 요소들을 고안해 내고 전달하는 방식이다.(p.268)
- 과학과 예술이라는 두 영역은 모두 창조적 정신을 요구한다는 면에서 유사하기는 하지만 그 목표와 방법에 있어서는 그원적으로 다르다. 예술과 과학 간 교류의 핵심은 ’혼성화’, 즉 ’과학적 예술’이나 ’예술적 과학’과 같은 떨떠름한 혼합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과학 지식과 미래에 대한 그 지식의 독점적 감각으로 예술에 대한 ’해석’을 되살리는데 있다. ’해석’은 과학과 예술 간의 통섭적 설명이 가질 수 있는 논리적 통로이다.(p.365)
- ’통섭 세계관’의 핵심은 모든 현상들이 비록 길게 비비 꼬인 연쇄이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물리 법칙들로 환원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p.461)
- 현존 기술과 최근의 소비 및 낭비 수준을 유지하면서 나머지 세계의 생활 수준을 대부분의 선진국 수준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은 수학적 불가능에 도전하는 꿈일 뿐이다. 오늘날의 소득 불균형을 평준화하려면 선진국의 생태적 발자국을 줄여야 한다.(p.484)
[ 2011년 1월 18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