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즐거움 - '공부도둑' 장회익의
장회익 지음 / 생각의나무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와 살아온 시대나 집안 분위기가 달라서 그런지 나는 어렸을 때 부모나 주위 어른들로부터 공부를 방해받지는 않았다. 차라리 저자처럼 공부를 하고 싶은데 필요한 교재나 참고서, 독서용 책이 부족했을 뿐이다. 초등학교~고등학교까지 학교 도서관에는 읽을만 한 책이 제대로 갖추어 있지 않았다. 내 기억으로 쓸만한 도서관을 갖춘 학교도 초등학교 정도에 불과했고 그나마 그리스,로마신화와 고전 몇 종, 자연과학 관련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중,고등학교의 경우 도서관이라는 팻말이 달려 있는 교실이 있었지만 그곳은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공간이 아니라 수험공부를 하는 ’특별한 장소’일 뿐이었다. 학교에서 성적이 좋은 일부 학생들만 이용할 수 있도록 정하고 그곳에서는 수험공부만 할 수 있었다. 도서관의 구색을 갖추기 위해 고전 시리즈와 일부 교과서 이외의 책들이 책장에 꽂혀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책을 읽지 않았고 읽으라고 권하는 선생도 없었다.
 
저자와 나의 나이 차이가 대략 20년 정도 되었지만, 책 속에서 저자가 어린 시절을 보내던 50년대나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내던 70년대는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그나마 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저자는 한국전쟁 와중에 학교를 몇 번 옮기면서 학업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고 중학교마저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나는 큰 장애없이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를 다녔다는 것이다. 하지만, 가정과 학교, 국가의 교육 시스템, 교사의 질, 교과목, 공부에 대한 개념은 50년대와 70년대가 별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우리 세대 역시 어느 누구에게로부터도 공부란 무엇인지, 왜 공부를 하는지, 인생과 공부는 어떤 관계인지,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 명쾌하게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초,중,고등학교라는 학제 시스템에 이끌려 ’당연히’ 학교에 다니고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고 진급할 뿐이었다. 물론, 20세기 후반부터는 그 부적절하고 부족했던 교육시스템과 교사 문제, 교과과정, 공부개념이 더욱 악화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뿐더러 사교육 시장에 휘둘리고 있는 형편이 되었다.
 
이 책은 저자의 ’공부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전한다. 저자가 어려서부터 살아 온 경험을 기초로 어렵게 공부를 접하였지만 역으로 그 어려운 과정이 저자의 창조력과 학구열, 공부의 질과 욕구를 더 높여 주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저자 자신이 살아온 과정이 즐겁고 신나게 지적 욕구를 충족하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주면서 현재 가정과 학교, 대학과 국가의 공부에 대한 관념과 태도, 방식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지적하고 있다.  

첫째 이야기. [창고에 갖힌 도둑] 조선 전기의 문신 사숙제私淑齊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이 쓴 글 중에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도자설'을 통해 커다란 곤경을 겪으면서 터득한 기술이나 방법이야말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으며 그래야 대가를 이룬다는 교훈이다. 저자는 이 옛 이야기를 자신의 공부과정에 빗대어 여러 번의 곤경을 겪으면서 저자 스스로가 공부하는 법과 자신의 앎을 세워나갔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둘째 이야기. [인삼과 산삼] 할아버지의 반대에 의한 학교 중퇴, 종교에 대한 경험, 개인적인 학습 노력의 과정에서 주어진 조건과 시스템에 의한 공부가 아니 스스로의 학습법에 의한 공부야말로 '인삼'이 아닌 '산삼'이 되는 과정임을 이야기한다.
 
셋째 이야기. [교실 안과 교실 밖] 저자는 자신의 독립적인 공부가 청주공업고등학교 입학과 졸업에 큰 도움이 되었고, 독자적인 물리학 입문과 학교 밖을 활동을 통해 스스로 학습법이 효율이 컸음을 말한다. 이런 현장은 강도와 깊이는 다소 다르더라도 우리 세대 역시 비슷하게 겪은 것으로 기억한다. 대부분 과목의 경우,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서 교사로부터 배운 내용보다는 학생들이 개별적으로 참고서, '정석' 또는 '성문종합영어'를 스스로 학습하는 경우가 많았다.
 
넷째 이야기. [방황과 모색] 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에 입학하였지만 기대와는 달리 대학 교과과정은 저자를 만족시키지도 못했고 배움도 얻지 못하게 되면서 교과과정에 있어 '자동차 조립론'이 아닌 '송아지 사육론'의 타당성을 제기한다. '자동차 조립론'이란 교과과정이 교양과목과 전공과목 모두 세부적으로 교양과 전공을 나누어 분절적으로 가르친 후 나중에 종합하는 방식이고 '송아지 사육론'이란 송아지 사육처럼 처음부터 교양이나 전공에 대한 전체적인 모습을 그려나간 후 점점 뼈대와 살을 붙여가는 방식을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스스로 전공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상대성이론' 등 최신 물리학 이론을 접하면서 철학적인 사고의 필요성을 느끼고 철학과에서 강의를 듣기도 했다.
 
다섯째 이야기 [앎의 되새김질] 저자는 서울의 공군사관학교에서 교관으로 3년간의 국방의 의무를 마쳤는데 사관생도에 대한 강의 준비를 하면서 자신의 앎으로 생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자신의 전공인 물리학을 '되새김질'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을 통해 물리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음을 이야기한다.
 
여섯째 이야기 [물질에서 생명으로] 결혼하고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을 졸어한 이후 저자는 생계와 공부의 연장을 위해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 리버사이드 캠퍼스에 입학한다. 저자의 지도교수는 아인슈타인과 함께 연구를 했던 유진 위그너 교수의 제자인 캘러웨이 교수임을 밝히면서 은근히(?) 아인슈타인의 학문 계보를 이은 느낌을 가졌음을 고백하기도 한다.(실제로 저자는 아인슈타인 이후의 흐름이 '야생학풍'이었음을 지적하고 한국식 학계의 '계보'에 대해 비판한다.) 대학원 과정을 진행하던 중, 저자는 생물학을 전공하는 한국인 유학생을 통해 처음 DNA를 접하면서 생물학과 생명에 대한 지적 자극을 받았음을 이야기한다.
 
일곱째 이야기 [학문과 등산] 저자는 학문은 경쟁이 아님을 강조한다. 따라서 학문을 '경주'보다는 '등산'에 비유한 것이다. 실제로 저자는 서울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메타과학과 협동과정, 자연과학기초론 등의 교과과정을 개설하는데 참여하고 오랜 기간 동안 학생들에게 강의를 진행하였다. 개인적으로 나는 대학 1학년 때 교양필수 과목이었던 '물리학 개론'과 '화학 개론'을 수강하였는데 내 기억에 저자의 강의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과목에 해당하지 않아 접하지 못했다. 내가 당시에 저자의 강의를 들었다면 이후의 내 삶이 조금이라도 바뀌었을까?라고 생각해보면 90% 이상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정답일 것이지만...^^
 
여덟째 이야기. [가르침과 깨달음] 저자는 일반적으로 진행되는 현재의 교수 및 교사의 교습법, 학습법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한 후, 저자의 물리학과 철학,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섭 학문으로 연구 결과를 발표했던 '온생명'에 대해 설명한다. 지구상의 개별 생명체들은 자체로 소중한, 그렇지만 홀로 생존할 수 없는 '낱생명'이며 지구의 자연과 태양, 달은 '낱생명'과 함께 엮어진 '보생명'이고 '낱생명'과 '보생명'이 한데 어우려저 '온생명'을 이룬다.
 
아홉째 이야기. [오래 묵혀둔 과제] 저자는 서구의 자연과학과 물리학에만 의존하는 동양과 한국의 세태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피력하면서 자신의 족보상 선조인 조선시대 선비 장현광張顯光에 대해 이야기한다. 장현광은 16세기 중엽에 태어나 <우주설宇宙說>이라는 책을 썼는데 그 안에 자연과학과 우주론에 대한 이론이 들어있다. 저자는 서울대 재직 중 장현광의 '우주론'을 연구한 바 있다.
 
열째 이야기. [녹슬지 않은 배턴을 넘기기 위해] 저자는 "진정한 삶을 살아간다는 자기 자신에 대해 최대한의 충실을 기한다는 것이며, 이는 다시 자신의 내면을 뚫고 들어가 끝없이 자신의 깊이를 되새기는 일이다"라고 결론을 내리면서 삶이 일종의 이어달리기 이므로 후손들에게 '녹슬지 않는 배턴' 넘기기 위해 앎을 향한 자신의 노력을 끝까지 경주할 것을 다짐한다.  

 1950~80년대 한국은 말 그대로 격동의 시기였다. 분단과 한국전쟁, 전쟁의 폐허와 기아, 생필품 부족과 빈곤, 국가주도 경재개발 및 재벌경제 시스템... 그 고난의 시기에 대부분 저자 혼자 힘으로 공부의 길을 개척하고 유학을 떠나고 물리학과 철학까지 학습해 나가는 과정을 보면 한국의 물리학과 학문간 통합을 주도해가는 저자의 모습이 당연하게 보이기도 한다. 저자보다 한결 나은 형편과 조건에서 학업을 해온 내가 부족한 점과 미처 깨닫지 못한 점을 반성하고 배우는 계기가 될 것 같다.
 
저자가 공부해온 과정, 삶의 여정은 사람들에게 열심히 살아가는 데 있어 필요한 자세와 태도를 엿보게 해준다. 주어진 조건과 위기를 기회로 삼는 자세, 스스로 이해하고 깨달으려는 모습, 지식과 지혜를 향한 끊임없는 탐구정신... 그러한 자세와 태도가 지금의 장회익이라는 걸출한 인물을 만들어 낸 것이다. 비록 저자가 살아온 인생의 조건과 과정이 우리세대와 또 지금의 10대나 20대와 현격한 차이가 있지만, 원칙적으로 저자와 같은 자세와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많은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행복한 사람’에 속하는 소수에 해당한 것 같다. 삶과 우주에 대해, 사회와 세계에 대해 저자 만큼 알고 있으면서 특별한 물리적, 정신적 어려움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평생하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일 것이다. 버트런드 러셀이 <행복의 정복>에서 과학자 집단이 다른 학문집단, 또는 다른 직업군보다 행복지수가 높다고 지적했지만 장회익교수의 글을 읽다보면 실제로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저자가 글을 쓴 의도는 알고 있고 그래서 이 책이 보여주는 일정한 한계는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저자의 글은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이미 저자가 살아온 조건과 독자들이 살고 있는 조건이 무척이나 다른 점을 고려한다면 독자들이 저자와는 또 다른 역경 속에서 어떤 자세와 태도, 방법론을 가지고 공부를 해나가는 것이 돌파구가 될 수 있을지에 대한 단초를 책 속에서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간)자서전 같기도 하다. 서문 말미에 "한평생 공부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한 살매가 어떻게 가능한지 알고 싶은 독자에게 이 책을 드린다"에서는 일부 독자들이 약 올라 하고 짜증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책 속의 문장
- 나는 성경 자체가 나쁜 책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성실하지만 불완전한 사람들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하느님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일 수 있다. 그리고 고의로 거짓저술을 했다기보다는 잘 몰라서 혹은 그런 형식 밖에 빌릴 수가 없어서 오늘 우리가 보기에 부적절한 내용들이 담긴 것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일단 내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나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유지하되, 제도화된 기독교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사도신경’을 강요하는 기독교와는 결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p.170)
 
- 요즈음은 가히 경쟁만능 시대라 부를 만큼 모든 것을 경쟁에 맡겨야한다는 생각들이 만연한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잘못된 생각이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더구나 그렇다. 학문은 기여이고 협동이지 결코 경쟁이 아니다.(p.282)
 
- 학문하는 일을 바둑에 비기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장거리 경주에 비기기도 하지만, 학문은 역시 등산에 비기는 것이 가장 적절하리라 생각한다. 바둑이나 경주와는 달리 등산은 승부에 매달리지 않고 경쟁을 조장하지도 않는다. 자기 능력과 취향에 맞게 목표를 정하고 자기 흐름에 따라 걸음을 조정할 뿐이다.(p.301)
 
- 우리가 지금까지 ’생명’이라 생각했던 것은 진정한 의미의 생명이 아니라 이것의 한 부분인 ’낱생명’이었으며, 이것이 생명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것의 밖에 있는 이것 못지않게 본질적인 존재인 ’보생명’과 함께해야 하는 것이고, 이렇게 함께해서 진정한 의미의 생명 구실을 하는 그 전체가 바로 ’온생명’이라는 이야기다.(p.330)
 
[ 2011년 5월 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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