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분법을 넘어서 - 물리학자 장회익과 철학자 최종덕의 통합적 사고를 향한 대화
장회익.최종덕 지음 / 한길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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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이라는 단어에서 두 저자는 ’물리학 : 철학’이나 ’자연과학 : 인문학’, ’동양: 서양’, ’현대 : 전통’을 떠올리겠지만, 나에게 있어 ’이분법’은 전혀 다른 단어의 대립을 떠오르게 한다. 바로 ’친북 : 반북’, ’좌파 : 우파’, ’애국 : 매국’, ’민주 : 독재’, ’성공 : 실패’와 같은 단어들이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통합 또는 통섭을 사고하는 학자들과 국내 사회 현상을 사고하는 나와 같은 사람들의 차이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은 어려서부터 여러가지 방식과 계기로 반대 개념을 사고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밤과 낮, 삶과 죽음, 물질과 의식, 남과 녀, 남극과 북극 등등... 처음 언어와 단어를 배우기 위해서 익혔든, 영어 외우기와 시험공부를 위해 익혔든 어려서부터 반대 단어와 개념들은 쉽게 우리들에게 다가왔고 어른들과 선생들, 언론과 각종 매체들은 일상생활에서 일상생활에서 쉽게 살아가기 위해, 또는 각 개인가 집단들의 정치적,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그런 언어와 개념들을 사용하고 강요해 했다. 결과적으로 ’이분법’은 수 십, 수 백년 간 인류에게 커다란 사고의 틀로 자리잡게 되어 사람들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사물과 현상을 인식하는 것을 방해해온 셈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지난 100년 간의 근현대사를 통해 극단적인 대립 단어들로 수 많은 고통과 억압을 당해온 바 있고 아직도 그 폐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친일과 반일은 일제시대부터 시작하여 21세기 이른 현재 시점까지 극복하지 못했고, 통일과 분단은 지구상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이 땅에서 민족의 염원이자 정치가들의 전략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또한 전쟁과 평화는 현실적인 위협과 두려움으로 이 땅에 존재하고 있고, 친북과 반북, 친공과 반공은 여전히 가공할만 한 ’사상의 자유’를 탄압하는 무기로 남아있으며, 10년 만에 군사독재의 악령은 이명박 정권을 통해 사람들에게 되살아 났다.
 
이 책은 이번 주 공부모임의 교재로 선택되었지만, 나 역시도 ’이분법’이라는 단어는 20대 시절부터 늘 머리 한 구석에 남아있는, 나 스스로도 & 내 힘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숙제였다. 그래서 세미나의 교재임에도 며칠 밤 동안 졸린 눈을 비벼가면서 한 줄, 한 줄 읽어나갔다. 2008년 4월 이 책을 한 번 읽고 독후감까지 남겼지만, 이번에 또 다시 읽으니 대부분의 책 내용이 새롭게 다가왔다. 지난 3년 간 내 나름대로 독서를 거듭한 과정이 있었음을 느끼는 것은 처음보다 책장을 넘기는 것이 조금 더 수월하다는 것과 중요한 물리학과 철학 개념, 학자, 이론이 낯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들의 논의가 내가 가장 관심있는 분야를 대상으로 하지 않았지만, ’이분법’이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이유가 저자들의 관심사와 나의 관심사와는 상관 없이 공통적으로 흐르는 사유와 인식의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관심 있게 읽었다.
 
제1장 [과학과 철학의 만남]에서는 두 저자가 어떻게 물리학과 철학, 자연과학과 인문학이라는 학문의 두 영역을 넘나들게 되었는지에 대해, 어떤 고민과 성찰 속에서 다른 학문분야를 연구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안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다. 그리고 대상적 지식과 성찰적 지식, 즉 ‘세계에 대한 질문’(물리학&자연과학)과 ‘삶에 대한 질문’(철학&인문학)이 궁극적으로 같은 물음이라는 전제에서 통합적 사유의 실마리를 찾는다. 또 학문 간의 소통을 펼쳐진 합죽선에 비유해 모든 부챗살이 모이는 공동영역인 연결고리 쪽에 관심을 두는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제2장 [지식의 누적과 전환]에서는 뉴턴의 고전역학에서 20세기 물리학의 눈부신 성과라 할 수 있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그리고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로 대표되는 양자역학을 중심으로 사유 틀의 확장과 지식의 전환에 대한 문제를 논의한다. 특히, 불확정성이론이 마치 반이성과 탈이성의 과학적 도구이론으로 오용됐던 문제를 지적하고, “이것은 분명 합리적 이성의 승리이지 붕괴가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나아가 양자역학은 불확정적이고 고전역학은 확정적이라는 이분법, 그리고 상대성이론은 상대적이고 고전역학은 절대적이라는 단순도식도 잘못되었음 말한다.

제3장 [생명에 대하여]에서는 “생명이란 것을 빼놓고 물질만 얘기해서는 반쪽 과학”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온생명 이론]을 중심으로 물질현상과 생명현상을 이원적으로 보려는 시각을 지양한다. ‘생명의 자족적 존재 단위’와 ‘자체촉매적 국소질서’라는 개념으로 정의되는 온생명은 가이아 이론과도 구별됨을 설명한다. 또한 생명과 물질의 구분은 대상과 대상의 구분이 아니라 ‘대상의 한 존재양상’(생명)과 ‘대상을 구분하는 소재’(물질)의 구분으로 본다. 수십억 년간 이어져온 진화와 변화라는 기간을 고려하지 않고 생명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진화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제4장 [동양과 서양]에서는 흔히 서양은 합리적인 방식으로 사물을 이해했고 동양은 신화적이고 비합리적인 방식으로 사물을 이해했다는 이분법적 고정관념의 오류와 문제점을 지적하고, 과도한 서구화에 대한 반감으로 맹목적인 동양 우월주의도 경계할 것을 강조한다. 그런 바탕 위에 대생(對生)지식 개념과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나타난 - 항상 삶(生)과의 연관 속에서 사물을 파악하려 했던 - 동양적 인식방법을 살펴보았다. 한편 [노자]가 서양에 소개되는 과정과 뉴턴 고전역학을 공부했던 혜강 최한기의 예에서 동서양의 학문 수용과정의 어려움도 짚어보았다.

제5장 [의식과 물질]에서는 의식과 주체, 정신과 물질, 마음과 신체, 그리고 그것 사이의 관계들, 즉 심신 이원론이냐 일원론이냐, 유물론이냐 유심론이냐 같은 오랜 주제들을 폭넓게 고찰하고 있다. 장구한 생명의 역사가 시작하는 시점에서 물질의 원형으로부터 의식이 생기고, 문화와 언어를 통해 더 고양된 의식이 생기게 되었다는 자연주의적 접근의 의미를 되새겼고, 물질은 주체적인 내적 측면(의식)과 물리적인 외적 측면(신체)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일원(一元) 속의 양면성에 주목했다. 그리고 자연의 변화, 생명의 진화, 의식의 고양에 대한 접근은 항상 입체적이고 메타적으로 고찰해야 함을 강조한다.

제6장 [대립과 화해, 물러섬과 나아감]  지식인으로서의 사회 참여행위에 대한 ’물러섬’과 ’나아감’의 문제를 성찰한다. 궁극적으로 올바로 살고 있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회의 속에서 생겨나는 이러한 고민은 단순한 배중률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깊은 본성이라는 것이다. “물러섬 없는 나아감은 맹목이고, 나아감 없는 물러섬은 허상”이라는 말로 귀결되는 둘의 관계는 갈등이 아니라 균형과 조화의 관계다. ‘참여’를 유가의 도덕생명에, ‘은둔’을 도가의 자연생명에 비유하지만, 결국 그 역시 인간 삶의 양식이라는 큰 스펙트럼의 양단일 뿐이니 둘 중 하나를 가르는 논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책을 읽다가도 나에게도 ’이분법’과 ’이원론’식 사고방식이 남아 있다는 것을 문득 느끼게 된다. 이분법이나 이원론, 양자택일의 문제는 독선과 자만에서 출발하기 쉬운 법... 독선과 자만을 늘 경계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쉽지는 않은 듯 하다.
 
저자들은 대립되는 단어나 개념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존재할 수 있는 전제를 인정하면서도 결국 겉으로는 대립되는 개념들이 이분법, 즉 ’이원성’에 빠지지 않고 ’일원양면론(一元兩面論, 하나의 존재에 대한 두 가지 서로 다른 성격의 발현)’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위해 필요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관점과 ’이해의 틀’이 중요하게 된다.(아쉽게도 상대방이나 상대방의 주장을 이해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에 대한 대안은 제시되어 있지 않다.)
 
’이원성’과 ’이분법’을 극복하고 두 가지 상반되어 보이는 개념과 주장을 통합하기 위해 필요한 관점 중 하나가 ’연속성’이다. 특히 물질과 의식의 경계,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경계, 동양과 서양, 현대와 전통은 모두 한 가지에서 뻗쳐나온 양쪽의 극단이라고 설정하고 양 극단이 서로 이어져 있으면서 경계나 구분을 나눌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또한 ’연속성’은 시간을 빼놓고는 성립될 수 없다. 자연과 물질에서 인간과 의식이 나타나는 과정이 없이, 전통에서 현대가, 동양에서 서양이, 자연과학이, 그리고 인문학이 연속적일 수 있는 것은 ’시간’이 그 속에 잠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의 학문적 깊이를 온전히 따라잡기 어려워 내용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저자들이 학문적으로 상대할 수 있는 개념들만 다루는데 그쳐 실제 한국사회에서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이념적, 계급적, 정치적 편향들의 이론적 기초를 분석하거나 허구성을 파악하지 않아 아쉬움이 남는다.
 
* 책 속의 책 : 슈뢰딩거 <생명이란 무엇인가?>, 프리로프 카프라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 장회익 <물질, 인간, 생명>, 프리고진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펜로즈 <황제의 새 마음> 
  
[ 2011년 5월 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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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서평 ] - " 물리학과 철학의 만남 "
 
 이감사님이 최근에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친히 이 책까지 빌려주셨다. 처음 이 책을 받을 때는 제목이 ’이분법을 넘어서’였기 때문에 한국의 국내상황이나 세계적인 문명출동 상황에 대해 무언가 의미있는 메시지가 있을까하고 기대했는데 실제 책을 모두 읽고나니 구체적인 사회상황보다 자신들이 몸 담고 있는 학문세계의 ’이분법’과 ’자연과 인간의 충돌’에 대한 논의가 주제여서 조금은 실망했다.
 
 저자 중 장회익교수는 ’온생명’이라는 생명이론 주창자이고 현재 대안학교인 녹색대학 총장을 역임한 학자이며 물리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서울대 교수로 지내면서 오랫동안 학문의 통합과 소통에 깊은 관심을 두면서 과학자의 시선으로 인문학적 주제들을 연구해왔다. 최종덕교수는 학제간 통합의 주창자이고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과학철학을 전공한 철학자이다. 그의 연구는 한의학과 생물학, 동양과 서양의 학문 영역에 걸쳐 자연데 대한 철학적 이해를 추구하고 있다.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책의 제목처럼 학문과 사상에 걸쳐 심각하게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이분법’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다. 책의 소단원들도 1. 과학과 철학의 만남, 2. 고전과 현대, 3. 생명에 대하여, 4. 동양과 서양, 5. 의식과 물질, 6. 대립과 화해(물러섬과 나아감)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보다 최소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히려고 노력하고 있고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 자체가 이미 문제해결의 문지방을 반을 넘어선다고 판단하고 있다. 물론 저자들이 물리학과 철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지속했기 때문에 핵심적인 문제의 도출은 과학과 철학의 만남에 대해서이다.
 
 근대 이후 자연과학이나 서구사상이 한국이나 전 세계적으로 사람들이 자연을 이해하고 인간의 이익을 도모하는데 큰 기여를 해왔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자연계의 모든 현상에 양면이 있다는 것이 사람들이 존재가 있으면 비존재가 있고 유한이 있으면 무한이 있을 거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사고에 익숙하게 되어 버렸다. 지금 한국을 비롯한 지구상 어디에서나 일상화되어버린 선과 악, 아군과 적군, 승자와 패자, 이익과 손실, 경쟁력과 도태, 전쟁과 평화, 정의와 불의가 애초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넘어서서 타인을 대상화시키고 타인을 짓누르고 자연을 파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저자들은 이를 ’언어의 소산물인 개념을 자연계의 범주처럼 생각하는 일종의 믿음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특히 한국인은 개념이 낳은 이분법의 아픔을 가장 많이 절감하는 사람들이고 그것은 ’현대와 전통’, ’동양과 성양’, ’남과 북’, ’민주와 반민주’, ’남과 북’, ’동과 서’라는 역사의 오랜 갈등으로 나타난다.
 
 저자들은 이러한 새태의 출발점을 짚어내기 위하여 학문적으로 접근한다. 저자들이 대화 방식을 통해 ’이분법’의 역사와 구조를 짚어내려 하기 때문에 현실적인 문제들까지 이어가지는 못한다. 물론 애초에 저자들의 의도 역시 현실적인 문제까지 나아가려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들은 ’안다는 것’에 대해서부터 따지고 분석해 들어간다. 우리가 ’안다는 것’,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 속에서 설정된 앎의 틀 안에 앎의 내용이 자리잡는 것"을 말하며 새로운 지식이나 상황을 접했을 경우 등 달라진 상황에 따라서는 이 틀의 조정 또는 확대가 필요하다. 이들은 자연과학 전공자로서 이런 ’앎의 틀’과 ’앎의 방식’을 자연과학의 역사로부터 이해시키고 있다. 오래전 과거 그리스 수학과 과학, 즉 유클리드 기하학과 당시의 과학 수준으로는 뉴튼의 역학을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뉴튼의 고전역학의 개념의 틀 안에서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뉴튼의 고전역학은 3차원 공간과 별도의 시간으로서 자연을 바라보고 해석하는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 공간과 시간이 동일한 4차원 시공간 내에서 구성되기 때문이고 더불어 뉴튼의 고전역학은 절대공간과 절대시간을 설정하지만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이 모두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는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은 천재였지만 자신이 양자역학을 처음 접하고 죽을 때까지 50~60년간 양자역학을 이해하지 못했다. 양자역학은 고전역학과 상대성 이론의 ’실재성’에 대해 새로운 사유의 틀을 도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새로운 틀은 철학적인 사유가 동반되어야 한다.
 
 단적으로 표현하여 서양의 학문 추구방식은 ’분석적’이다. 철학과 자연과학에서 시작하여 의학이나 통계학까지 하나하나 분리내고 분석하여 더이상 분해할 수 없을 때까지 개별화시키면서 그 구조와 개별물질의 성질과 법칙성을 밝혀내려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동양의 학문 추구방식은 통합적,종합적이다. 세세하게 개별적으로 분리하고 분석하기 보다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파악하고 사물간의 연관성과 통일성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미래의 학문이나 사상은 동양이나 서양이 추구하는 각자의 방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렵고 따라서 더 큰 차원의 사유의 틀을 가지고 이들을 통합시켜야 한다. 특히 그러한 인식과 방향성에 큰 계기가 된 것이 쿠르트 괴델의 ’불완정성 정리’와 양자역학이다. ’불완전성 정리’는 서구 이성이 추구하는 방식과 논리는 더 이상 증명이나 합리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이성의 한계를 규정지었고 양자역학은 ’존재’와 ’실재성’에 대한 서구 자연과학의 인식과 학문의 한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대과학을 접하면서 장회익교수는 ’온생명’ 이론을 창안한다. ’온생명’ 이론이란 동물과 식물, 인간 등 살아있는 모든 개체생명과 개체생명이 살아있을 수 있도록 놓여있는 지구와 태양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자 이론이다. ’온생명’은 ’온생명’을 구성하는 모든 개체생명(낱생명)과 주변 물질이 서로 분리되거나 한쪽이 파괴도면 전체 ’온생명’ 역시 위협받는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 ’온생명’ 이론은 당연히 환경운동과 생명운동으로 연결되고 일부에서는 동양철학과 서양철학을 아우를 수 있는 비전으로 보고 있다.
 
 이 책을 통하여 물리학과 같은 자연과학이나 철학과 같은 인문학을 공부하는 데 필요한 관점이나 방법, 방향성의 맥을 잡는 데 도움을 받았다. 내가 지금 쌓고자 하는 자연과학과 인문학에 대한 접근방식을 다시한번 재검토하여 향후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영역을 잡고 책을 구하고 공부해나갈 지 참고할 만한 모델이 제시되어 있다. 또 하나, 저자들이 스스로 고백하건데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이해하는데 몇 십년이 걸렸다고 한다. 따라서 나 역시 몇 개월, 1년도 안되는 공부량으로 ’어렵다’고 스스로에게 투정부린 것이 자연스러운 현실인 것 같다...ㅋㅋㅋ
 
[ 2008년 4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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