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 劍
박흥용 지음 / 포이에마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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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흥용!

 

  아마 이 이름 석자 때문에 이 책을 사게 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과 내 파란 세이버를 통하여 박흥용의 작품을 만난 사람들이라면 십중 팔구는 그리할 것이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다. 포이에마라는 출판사 때문에 기독교적인 색채가 강할 것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박흥용이라는 이름 석자 때문에 몇번을 망설인 끝에 이 책을 구매했다. 그리고 앉아서 단숨에 읽어 내렸다. 다만 책을 읽어 내리는 속도를 생각의 속도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말이다.

 

  구름을 벗어난 달처럼에서 조선 최고의 칼잡이와 그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아직은 설익은 주인공 칼잡이의 이야기는 한편의 성장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그가 그리는 칼잡이들의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뿌듯하고, 한편으로는 가슴 한켠이 아렸다. 또한 시대의 모순에 천착하면서 칼잡이의 인생으로 풀어가는 그의 집요한 서술 방식은 혁명의 정당성과 과격성, 실패한 혁명의 씁쓸함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들었다. 다만 아쉽다면 영화화 되면서 그가 가지고 있었던 그 진지함과 집요함이 영화의 단순화라는 목적을 위해서 삭제되었다는 점이다.

 

  이 책은 박흥용의 초창기 작품으로 보인다. 그의 그림체가 확연히 살아있기는 하지만 묘사의 디테일이 많이 생략된 점에서 그가 느꼈을 아쉬움이 손에 잡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토리는 여타 그의 작품에서 유지되고 있는 진지함과 성찰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이상과 삶의 문제! 기독교인 박흥용의 관점에서 보자면 신앙과 삶의 문제, 머릿말에서 그가 했던 이야기를 빌리자면 작품과 빵의 문제! 이 책은 끊임없이 이 부분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그 안에서 무엇을 택해야 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이상과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고 그 간극을 발견하다보면 어느샌가 그 둘은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만나고 하나가 된다. 삶에 대한 진지함은 이상 없는 삶은 존재할 수 없으며, 삶을 무시한 이상은 이상이 아니라 허상임을 발견하게 만든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왜 그렇게 욕을 먹고, 교회가 지탄을 받는가? 빵과 작품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 때문이 아닌가?

 

  주인공은 묘하게도 아름다움이나 돈을 추구하는 환도를 만들지 않는다. 그는 오직 직검만을 만든다. 찌른다는 검 특유의 속성을 위해서 날카로운 직검을 만들기 위하여 애를 쓴다. 그런 그를 아무도 동정하지 않고 오히려 미쳤다고 손가락질한다. 그는 그렇게 직검에 미쳐서 살았다. 아버지의 직검을 보면서 끊임없이 직검에 몰두한다. 그에게 사람도, 부도, 명예도 아무 것도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것들이 없어서 힘들고 어렵지만 그는 오직 직검만을 연구하고, 마음에 새기고 손으로 직검만을 만든다. 그런 그가 절름발이 아이를 만나고 그를 위하여 아버지의 직검으로 난생처음 검이 아닌 다른 도구를 만든다. 그가 평생 추구했던 이상과 꿈이 담긴 아버지의 직검이 사라지는 순간 그는 자기 인생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가 아버지의 직검을 포기하는 순간 그렇게도 찾았던 직검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미쳤다고, 사기꾼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자기 영혼에 새겨진, 그리고 평생을 추구했던 직검을 향한 여행을 시작한다. 그 여정에 그를 사로잡던 수많은 갈등과 고민은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는 예수의 말로 끝이 난다. 어찌보면 다 이루었다는 말은 예수만의 말이 아니라 평생 직검을 추구했던 주인공의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검이라는 그의 만화는 초창기 작품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신앙에 대한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곱씹어 볼수록 난해한다. 한권의 철학책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깊이가 느껴지는 신앙서적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서 여러가지 해석도 가능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도 달라진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책에 담긴 그의 고민은 말장난이 아니라 그의 삶의 근간을 붙잡고 흔드는 고민과 번민의 결정체라고 하겠다.

 

  직검을 추구했던 주인공은 박흥용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며, 진지하게 신앙에 대해 고민하는 나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번민하는 세상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박흥용! 그는 인생을 칼로 푸는 사람이다.

빵과 만화와 죽음-

작품이냐, 양식이냐!
만화가 중에는 그림 그리는 일에 대해 의식주를 해결해주는 `직업`으로서의 의미보다는 `자기 존재를 느끼고 표현하는 작업`으로서의 의미에 더 큰 비중을 두는 부류가 있습니다. 그들은 그런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신념의 담장을 더욱 높이고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땅으로 성역화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많은 이들이 나이가 들면서 자기가 그리고 싶은 만화를 덮고 당장 양식을 구할 수 있는 만화를 그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기 싫은 그림을 그리는 고통보다는 배고픔의 고통이 더 비참하다는 것을 잠깐의 창작 경험으로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불평을 늘어놓으며 원치 않는 작업을 하다 간혹 병이나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것에 익숙해져 창작욕구는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어느덧 무덤덤한 생활인으로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어떤 동료들은 빵과 만화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결국 그림 그리는 일을 포기하기도 했고, 또 K 형처럼 삶을 포기하기까지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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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 이덕일의 역사특강 2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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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는 변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그렇지만 현실은 가끔 이렇게 당연한 이야기와는 엇박자를 보일 때가 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이 그렇다.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대는 변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각은 변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2014년 대한민국의 지형도를 살펴보자. 남과 북으로, 동과 서로 갈라져 있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이 갈라져 있고, 노와 소가 갈라져 있다. 왜 그럴까? 그 누구도 자기의 생각을 잠시 접고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흔히 부모님 세대가 자녀 세대들에게 하는 말이 있다.

 

  "아버지 어렸을 때는 그렇지 않았어!"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우리 부모님 세대가 살아왔던 시대는 분명 우리가 사는 시대와 다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우리 자녀 세대와는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바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우리의 사고와 사고 방식을 바꾸려고 하지 않는다. 한 예를 들어보자. 몇년전 MB가 청년 실업 문제를 이야기하면서 외쳤던 말이 있다. 젊은이의 생각을 바꿔라. 젊은이의 생각을 바꾸고 눈 높이를 조금만 낮추면 우리 주위에 얼마나 일자리가 많은가? 말 자체는 잘못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누구도 이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이 말에 동의하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자기 자녀에 대해서만큼은 이 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시대가 바뀌었고,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과거 우리 부모님 세대에는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절실한 문제였다. 그것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당시 대학을 나온 사람은 인구의 한줌도 되지 않던 시대였다. 학교에서 부모님들의 학력을 조사하던 때의 일이다. 부모님 가운데 두분 모두 고졸만 되어도 많이 배우셨다고 놀라던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요즘은 고졸이라는 학력은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고등학교 졸업자의 80% 이상이 대학에 가는 시대에 고졸은 학력 계급의 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부모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자기 자녀들을 수백만원짜리 등록금을 내면서 대학교에 보내는 이유가 최소한 자기들보다는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희망 때문이 아니겠는가?

 

  특히 정치 지도자들은 이 부분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자신들이 학생 시절을 떠올리면서 요즘 대학생이 눈이 높아졌다, 배가 부르다, 혹은 역사 의식이 없다고 비판하고 깎아 내리는 것은 "나 무식한 사람이요, 시대의 변화도 모르는 사람이요."라고 자인하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정치 의식은 또 어떤가? 과거에는 대통령을 무슨 대단한 사람이라고, 왕처럼 떠받들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대통령은 대통령이지, 왕은 아니라는 생각을 누구나 하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 되는 사람은 자신이 충분히 욕을 먹고 웃음거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과거 왕처럼 군림하려고 한다면, 대통령에 대한 비웃음이 도를 넘었다고 엄포를 놓는다면 개그의 소재가 될 뿐이다.

 

  이성계와 이방원만큼 이 사실을 담백하게 보여주는 경우는 없다. 흔히 우리는 이성계와 이방원을 해석하면서 이방원은 세종의 태평성대를 열기 위하여 온갖 악역을 자신이 감당한 결단의 군주로, 이성계를 자식 사랑에 치우쳐서 시대의 변화에 반동하는 사람으로 이해한다. 과연 그럴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덕일씨가 지적한 것처럼 이성계의 시대에도, 이방원의 시대에도 개혁을 진핸하는 가운데 부족한 점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속한 시대 속에서,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해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다. 다만 우리가 이성계에 대해서 그렇게 역사의 흐름에 반동한 인물로 해석하는 것은 그가 자기의 사고를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유연하게 갖고 가지 못한데 그 이유가 있다.

 

  이성계의 시대에는 고려의 멸광과 조선의 창업, 이 안에서 조선이라는 국가의 기틀을 어떻게 놓을지가 정치 판단에서 가장 고려할 사항이었다. 조선의 창업을 뒤흔든다면 아무리 명이라고 할지라도 충분히 대항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방원의 시대는 창업에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 창업을 어떻게 이어갈 것이며, 어떻게 발전의 단계로 나갈 것인가를 더 고려해야할 시대였다. 더군다나 명이 주체라는 강력한 권력자를 황제로 맞아들였다면 이 부분을 변수로 놓고 모든 것들을 판단해야 한다. 이성계는, 그리고 그의 정치적인 동반자였던 정도전은 이 부분을 간과했다. 자신들의 시대가 변화하는 것처럼 명도 변화하고 있는데 여전히 명을 과거의 명으로 판단하고 대처하고 있다. 괜히 민족적인 자존심을 가지고 그때 조선이 명과 한판 했더라면 요동을 재탈환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만약이라는 역사관과 미련은 말 그대로 미련일 뿐이다.

 

  이성계와 이방원 모두 시대의 흐름을 기민하게 알아챘다. 다만 두 사람이 파악한 시대라는 것 자체가 너무 다르다는데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이성계도 이방원도, 심지어는 존재감조차 없었던 정종도 나름대로 시대의 흐름을 따라갔기 때문에 세종의 시대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인조반정처럼 정말 시대의 흐름을 역행하는 바보는 아니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비극적인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지만 조선이 발전의 단계를 밟을 수 있었던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변화하는 시대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나 어릴 때는, 내가 말단일 때는, 내가 청년일 때는 이런 말들로 훈계를 남발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다 보니 나라가 온통 분열과 갈등 투성이가 아닌가? 진보도 보수도 훈계질을 그만두고 시대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먼저 살펴봐야 할 것이다. 나는 이성계파요, 나는 이방원파요 편가르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시대는 우리에 대해서 입을 다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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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4-11-07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덕일씨의 새 책인가봐요. 구해서 읽어볼 책이네요. 이성계-이방원의 시대와 거사에 대한 단순한 이분법이 아닌 나름대로의 이유를 분석한 듯 합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꾸 자신의 옛시절을 지금 세대와 비교하여 평가하는 것은 꼰대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이런 사고를 통해 지금 세대가 우리보다 힘들겠구나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소위 `배부른 소리한다`라고 결론짓는 사람들이 더 많죠.

끊임없이 변하는 시대와 세월에 뒤쳐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독서는 그런 의미로 매우 중요한 행위라고 생각하네요.

saint236 2014-11-07 17:28   좋아요 0 | URL
제일 확실한 꼰대짓은 ˝내가 해봐서 아는데˝죠...^^ 이덕일씨의 역사특강 시리즈 같습니다. 나온지는 몇달 되었고요..
 
페르시아 전쟁
톰 홀랜드 지음, 이순호 옮김 / 책과함께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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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잘빠진 남정네들이 떼거리로 몰려나와서 "This is sparta!"라는 말을 우렁차게 외치며 전투를 벌이는 영화! 매번 전쟁에서 지면서도 압도적인 물량과 비열한 꼼수로 그리스군의 숨통을 죄어 오면서 "나는 관대하다!"를 외치는 이상하게 생긴 페르시아 왕! 우리가 300이라는 영화를 통하여 만나게된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피상적인 모습이다.

 

  영화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관심이 있고, 그래서 영화 외적인 요소들까지도 찾아보는 사람들이면 이 영화가 당시 논란이 많이 됐었던 영화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에 이란과의 핵무기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던 시기였기 때문에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300이라는 영화는 서구의 대표를 자처하는 미국과 페르시아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란의 대리전 양상을 띄게 되었다. 멋있고, 용기있는,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거는 스파르타는 미국을, 괴상한 외모를 가지고 있고, 비열하며 저열한, 그러면서도 자존심만 가득한 페르시아는 이란을 은연 중에 상징하게 되었다. 이런 설정이 확고해 졌으니 이제 스파르타의 패배는 단순한 패배가 아니라 장렬한 옥사로 미화가 된다.

 

  다만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후속편 격인 300: 제국의 부활이 그리 흥행헤 성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리스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 것이 300의 모티브가 된 테르모필레 협곡 전투가 아니라 살라미스 해전이었음에도 말이다. 아마도 300에서는 대군 앞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전쟁을 벌이는 비장미가 느껴지는 반면, 후속편에서는 페르시아와 맞먹는, 아니 오히려 능가하는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 야비함 때문이 아닐까?

 

  영화 뿐만이겠는가?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 안에도 알게 모르게 이러한 사고 방식에 물들어 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함이다. 요즘은 한국사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만해도 세계사와 국사는 필수 과목이었다. 그런데 세계사를 수업시간에 배워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철저하게 서구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조금 어려운 말로 오리엔탈리즘이라 부르지만 쉽게 말하자면 서구는 선, 미, 진리이고 이와 대척점에 동양을 놓고 악과 추, 야만으로 규정한다. 이러다 보니 서양애서 동양을 침략하는 것은 문명화를 위한 당연한 것이 되고, 동양에서 서양을 침범하는 것은 문명이 파괴되고 세상의 종말이 오는 것과 같은 수준의 재앙으로 여겨지게 되는 것이다. 훈족의 이동과 몽골족의 침입 앞에 서양의 여러국가들이 어떠한 태도를 취했었는지, 그리고 드라큘라 전설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좀더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렇게 책에 관한 리뷰를 시작하기도 전에 주저리주저리 이야기를 늘어 놓는 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입장도 기본적으로 이와 동일하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침공은 자신을 신의 사자라고 생각하는 오만하고 미련한 절대 군주가 일으킨 불필요한 사건이요, 이에 대한 그리스의 반격은 자기 삶의 터전을 지키고 민주주의라는 절대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것으로 표현한다. 물론 직접적으로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는 않다. 스파르타라는 나라가 끼어 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그렇게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책의 행간에 스며있는 내용들을 곱씹어 보면 직접적으로 말한 것보다 더 많은 분량을 이것을 위하여 할애하고 있다. 보다 객관적으로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사료를 제공하고 판단하게 하겠다는 의도와는 달리 그 사람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생각은 어쩔 수 없나보다.

 

  이런 시각이 던져주는 불편함, 많은 분량, 문체의 딱딱함, 낯선 이름들의 등장, 각 나라들의 역사를 개별적으로 설명하는 것들은 이 책을 읽는 일에 난해함을 더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읽은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페르시아 전쟁에 관한 사료들 자체가 상단히 한정적이고, 그러한 책들의 대부분도 대체로 살라미스 해전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살라미스 해전뿐만이 아니라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그리고 페르시아가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성장하게 되었고, 그렇게 성장한 국가들이 왜 격돌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마라톤이라는 중요하지만 거의 언급이 없는 전투에 대해서도 어던 맥락 가운데, 어떤 양상으로 진행이 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 페르시아에 대해서 좀더 공부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단 오리엔탈리즘의 불편함을 걷어내야 한다는 수고로움은 따르겠지만 말이다. 마지막에 9.11 테러와 페르시아 전쟁을 연관시켜 생각하는 역자의 생각은 책을 덮는 순간까지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으로 그리스와 스파르타, 그리고 살라미스 해전에 관한 책들을 소개한다.

 

 

살라미스 해전 / 스파르타이야기 / 헤로도토스 역사 / 완전한 승리 바다의 지배자(차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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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립간 2014-10-31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학창시절, 세계사의 관점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고. 친구와 이것이 세계사인가, 서구 역사인가라고 이야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서구 사람들이야 자신들의 입장에서 그렇게 생각한다지만, 우리가 서구의 관점을 따를 필요는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saint236 2014-11-01 18:30   좋아요 0 | URL
어릴 때부터 몸에 배어온 습관이라는 것이 무섭지요. 또한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소구 유학파들이 결국 가지고 있는 베이스가 철저히 서구적이니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정도전과 그의 시대 이덕일의 역사특강 1
이덕일 지음, 권태균 사진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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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포세대라는 말이 있다. 혹시 알고 있는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말이다. 청년들의 현 주소가 어떤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다. 88만원 세대라는 말도 있다. 청백전(청년 백수 전성시대)이라는 말도 있다. 이태백(이십대의 태반은 백수)이라는 말도 예전 말이고 요즘은 이구백(이십대의 90%는 백수)이라는도 이젠 시절이 지난 말이다. 이 외에도 토익 폐인을 나타내는 토폐인, 사회 생활을 하다가 다시 학교로 돌아오는 유턴족,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듯이 어렵게 취업한 학생을 나타내는 낙바생, 부모의 등골을 뺀다는 등골탑에, 청년의 태반이 실업자와 신용불량자라는 청년실신 등 인터넷에서 약간만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면 청년들의 열악한 현실을 나타내는 말들이 줄줄이 나온다.

 

  실제로 우리나라 통계로 볼 때에도 최근에 14년 만에 청년 실업율이 최악을 기록했다고 한다. 10.9%란다. 청년 100명 중 11명은 백수라는 뜻이다. 게다가 대학 졸업생 10명 중 4명이 백수라고 한다. 실업율을 어떻게 통계내는지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아는 사람들은 웃기시네라면서 썩소를 한번 날려 줄 것이다.

 

  이렇게 심각한 청년 실업 시대에 어떤 이들은 청년들이 배가 불렀다고 한다. 우리 때는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힘들었다 일할 수 있는 것은 뭐든지 했다는 말을 하면서 훈계를 한다. 대표적으로 전 대통령은 청년들에게 눈 높이를 낮추어서 직장을 잡으면 될 문제라고 하면서 자신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구구절절 이야기한다. 현 대통령이 해 본것이 너무 없어서 문제라면 전 대통령은 해본 것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힘들어 하는 이들에게 왜 짱돌을 들지 않는가라면서 청년개새끼론을 들먹인다. 어떤 이들은 아프지 괜찮아 원래 젊은은 아픈거야라면서 책 장사에 몰두한다. 모두다 청년들의 현실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잘났다는 말을 하면서 청년들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꼰대짓을 열심히 한다. 나는 그나마 곤대짓도 할만한 위인이 안되어서 그냥 답답한 마음에 안스러워 할 뿐이다.

 

  책의 리뷰에 왜 이렇게 암울한 청년 실업 이야기를 꺼내는가? 청도전과 그의 시대 가운데 이덕일씨가 끊임없이 지적했던 부분들이 이 부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덕일씨가 청년 실업을 이야기했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가 했던 논의에서 토지에 관한 문제를 청년 실업의 문제라는 말로 바꾸어 버려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이덕일씨는 정도전의 시대를 토지 문제의 시대라고 규정한다. 고려 말기를 지나면서 우리가 국사책에서 배웠듯이 한토지의 주인이 3~4명이나 되고, 권문 세가들은 토지의 경계를 산천으로 삼고 있었다. 권력이 있는 자들은 자기의 땅을 한뼘 더 늘리기 위하여 애를 썼고, 이 과정 속에서 가난한 자영농들은 몰락하여 노비가 되는 방법 밖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군인들에게 봉급으로 내어줄 토지가 없으니 국방이 문란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요, 세금을 납부할 자영농이 없으니 국가 재정이 파탄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문제 해결 방법은 하나 뿐이다. 왜곡된 토지 소유를 바로 잡는 것! 그렇지만 당시 권력층의 주류들은 왜곡된 토지를 바로 잡는 것을 결사 반대했다. 문제가 있다고 느낀 일부 권력층들도 토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건드리기 보다는 약간만 수정하면 될 것이라고 한다. 청년 개새끼론을 외치는 이들이나, 괜찮아 아픈만큼 성숙하는 거야라면서 위하는 척하는 이들이 모두 문제의 핵심은 건드리지 않고 청년들에게 뽕을 놔주는 것처럼, 그들 모두 토지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현상 유지로 일관했다.

 

  토지 문제를 그대로 내버려 두고는 해결책이 없다고 생각한 정도전은 이성계와 손을 잡고 이 문제를 손보게 된다. 이 과정에서 정도전은 꼼짝도 하지 않는 고려의 왕권을 무너뜨리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건립하게 된다. 태종 이방원에 의하여 많이 왜곡되었지만 이덕일씨는 이렇게 왜곡된 부분들을 하나식 벗겨내면서 토지 문제를 통한 사회 개혁이라는 관점으로 정도전을 재해석하고 있다.

 

  이덕일씨의 책이 재미있기 때문에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토지 문제를 청년 실업 문제로, 비정규직 문제로, 세월호법 문제로 치환하여도 그의 결론은 꽤나 설득력이 있기 때문이다. 무릇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백성들이 처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근본적으로 고치려고 하지 않고 기득권 유지에 급급하면 그 체제는 머지않아 몰락하게 될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발전해 왔고, 그렇게 흘러왔다. 우리 사회도 그러한 방향으로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그 과정 속에서 우리 사회가 치르게 될 대가들이 너무 크다는 데 문제가 있다.

 

  나라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했으면 좋겠다. 고려의 근간이 토지이듯이, 다음 세대의 근간은 청년이다. 그들을 착취해서, 비정규직으로 내 몰아서 이득을 취한다 한들 그것이 이 사회를 얼마나 유지시켜 나가겠는가? 청년 실업자와 그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심각하게 고민하고 해결책을 모색해도 시원찮을 판에 50대 정규직 8000명을 자르면 청년 백수를 2만명 넘게 고용할 수 있다는 수치를 내세우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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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 1~8 박스세트 - 전8권
허영만 지음 / 월드김영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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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마드가 유행이다.

  학문의 노마드, 사상의 노마드....

  심지어는 자게서도 노마드를 강조한다. 어찌보면 우리에게 노마드는 로망인지도 모르겠다. 어쩔 수 없이 한 곳에 정주할 수 밖에 없는 현대인들에게 노마드는 꿈에나 그리는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가? 칭기스칸에 관한 책들이 많이 나온다. 그 책들은 대부부느 칭기스칸의 성공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칭기스칸이 어떻게 대제국을 건설했는가, 그가 성공한 요인은 무엇인가, 우리가 그를 어떻게 배워야 하는가 등등... 칭기스칸에 관한 여러가지 책들이 있지만 선뜻 읽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이 책도 그런 이유로 읽지 않았다. 하나하나 안되니 이젠 만화도 나오나 싶었다. 게다가 난 허영만씨의 만화는 날아라 슈퍼보드와 망치를 최고로 치는 편인지라 그가 다루는 역사 만화는 더 읽고 싶지 않았다. 내가 이 책을 읽은 이유는 순전히 이 책이 알라딘 중고 매장에서 판매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권씩 사모은 책이 이젠 한질이 되었다. 순서도 뒤죽박죽이고, 새로운 책을 구할 때마다 또 읽어서인지 이 책을 서너번 읽게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 가지에 놀란다. 허영만씨가 이 책을 그리기 위해서 상당히 오랜 시간을 들여서 자료를 수집했다는 것이다. 자료 수집을 위해서 몽골을 여행했다는 지점에 이르러서는 이 분이 덕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해본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이 책은 상당히 디테일한 부분까지 다루고 있다. 무기라든지, 갑옷이라든지 당시의 복식과 문화에 대해서 꽤나 소상하게 다루고 있다. 심지어는 전통 음식까지도 철저하게 자료를 바탕으로 그리고 있다. 사극으로 치자면 전통 사극이라고 하겠다. 퓨전 사극이라는 말도 안되는 주장을 하면서 역사적인 사실마저도 바꾸어 버리는 기존의 사극을 보면서 진저리나던 내게 이 책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온 것도 이런 이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번째로 놀라는 점은 칭기스탄의 업적이 아닌 칭기스칸 개인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 이런 역사책들, 그리고 걸출한 주인공을 중심으로 그리는 만화나 책들은 다른 것들을 다 무시하고 그 부분에 집중하기 마련이다. 일례로 명량을 들어보자. 명량의 여러가지 정치적인 부분이라든지, 역사적인 맥락은 다 거세해 버리고 걸출한 이순신의 원맨쇼에 집중했던 명량을 보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사람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명량은 그냥 이순신 원맨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한편의 재미있는 전쟁 영화일 뿐이다. 이것이 영웅을 그리는 사극의 한계이다. 이러한 관점을 벗어나서 이순신의 고뇌와 정치적인 상황 같은 것들을 고려하기 시작하면 영화는 산으로 간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러한 전쟁보다는 칭기스칸이라는 개인사에 집중한다. 그가 어떤 고난을 겪었고, 그 가운데에서 어떤 마음을 품었으며, 안도에 대해 느끼는 서운한 감정과 신뢰, 어쩔 수 없이 격돌하게 될 때의 그러한 안타까움이 책의 곳곳에 묻어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전쟁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전쟁이 주가 되는 느낌은 많이 약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웅 칭기스칸이 아닌 개인 칭기스칸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책이라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몽골인들은 어린 시절부터 죽는 순간까지 말에서 내려오지 않는다고 한다. 말과 함께 태어나지는 않지만 말과 함께 자라고, 말과 함께 죽는다고 한다. 약간 과장하면 말 위에서 숙식을 해결한다고 한다. 이렇게 말과 함께 생활하는 몽골인들을 당시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그 결과 덩치를 자랑하던 유럽의 기사들은 비웃던 몽골 군단에 의해서 박살이 난다. 그렇지만 이 아픈 기억은 로마인들이 한니발에게 배워 보병과 기병을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전술을 발전시킨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몽골인에 대한 공포와 충격에 사로잡혀서 몽골인들을 배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유럽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기사가 전쟁을 대변하는 존재로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하게 된다. 화약을 사용하는 신무기가 등장하기까지 말이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어떤가? 새로운 변화와 도전 앞에서 우리는 그것을 직시하고 배우기보다는 공포와 충격에 빠져서 거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우고 해체하고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려고 하지 않는가? 세월호 사건이 우리를 성찰할 기회로 삼는 것이 아니라 해경을 해체하고, 시간 끌기로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려고 하지 않는가? 윤일병 살인 사건이, 병사들의 자살과 구타 폭행 사건이 우리를 충격과 공포에 빠지게 하자 똑같은 행동 패턴을 취하지 않는가? 요즘 농담처럼 군에 입대할 친구들에게 말한다. 조금만 기다려라 군대 안갈지도 모른다. 문제가 되니 해경도 해체하는데 군대라고 그냥 놔두겠는가? 조만간 군대도 해체한다고 할 것이다. 물론 농담이다. 듣는 사람도 농담으로 듣는다. 그렇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변화를 거부하는 한국 사람들의 태도, 지도층의 태도 앞에 몽골기병과 같은 충격이 또 안오리라고 누가 보장할 것인가?

 

  말로만 노마드를 외치지 말자. 몽골 기병과 같은 사건들은 로망이 아닌 현실이다. 그 현실이 우리 눈 앞에 다가왔을 때 외면하고 무시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억 속에서 지우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직면하자. 거기에서부터 노마드는 시작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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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4-08-27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마드'라는 말이 주는 '자유로움'이나 '구속받지 않는' 듯한 느낌 때문에 더욱 유행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한동안 자계서나 강사들이 추구하는 꿈에서 '노마드'가 빠지지 않던 것이 기억나네요. 말보다 실행은 훨씬 어렵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