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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을 넘어 - 정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앤서니 앳킨슨 지음, 장경덕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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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년 대선 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말이 있었다.

 

  "경제 민주화"

 

  도대체 저것이 무엇이냐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아직도 경제 민주화가 무엇인지 제대로 감도 못잡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후자에 많이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만 학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상식 수준으로 생각을 해보고 내린 결론이 이거다.

 

  "돈 많은 사람만 잘 사는 그런 나라가 아니라, 모든 국민들이 최소한의 생존권은 위협받지 않는 분배가 실현되는 것"

 

  좋은 말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이루기가 얼마나 지난한지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경제 민주화의 경자만 꺼내도 빨갱이 취급을 받는 세상에서, 시장(서울 시장이 아니다.)이 거의 신처럼 대우받는 세상 속에서 경제 민주화를 입에 올리는 것이 목숨을 걸고 하는 이야기인지를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가 이를 입에 올렸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갔다. 그러면서도 저러다 말겠지라는 생각도 동시에 품었다. 아무리 노무현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노무현이 이 부분을 넘지 못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 이상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경제 민주화를 공약으로 걸고 나왔다. 그 아버지가 어떻게 했는지는 잠시 깜빡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김종인씨까지 영입하면서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거기에 깜빡 넘어가서 이왕이면 다홍치마, 위대한 영도자 박정희 각하의 영애가 이젠 다른 세상을 열려나 보다라면서 표를 몰아줬다. 다 모아도 절반이 안된다는 패배감을 추스리기도 전에, 그 경제 민주화가 실종되었다.

 

  말은 그럴듯 했지만 김종인씨가 팽당했다. 쫓겨나면서 많이도 억울했나보다. 새누리당이 경제 민주화를 포기했다는 짹 소리를 내면서 갔다. 여기에서부터 신호탄이 되어서 곳곳에서 역주행이 벌어지고 있다. MB처럼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면서 굳건히 그 기조에는 공조하고 있다. 복지도 줄고, 누리 과정도 줄고, 어르신들 수당도 줄었다. 그러면서 솔솔 풍겨나오는 이야기들이 이러다 다 죽는다. 기업이 죽으면 나라도 죽고, 국민도 죽는다고 말한다. 철지난 트리클 다운 효과를 만병통치약처럼 꺼낸다. 너무 기업 편에 서기만 하면 MB와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나 보다. 비지니스 프렌들리를 과감히 탈피하면서 최저임금을 올리면 죽는다는 기업들의 항의를 묵살하고 자그만치 450원이나 올렸다. 이렇게 하면 경제 민주화가 실현될 거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청년들은 죽겠다고 외치는데, 중소 기업들은 힘들다고 하는데, 사교육비가 너무 높다고 외치는데 내가 해봤는데로 말하던 그분처럼은 말은 못하지만(해본게 없으니 못할 수밖에) 귀막고 눈감고 입다물고 지낸다. 어쩌면 국가와 결혼한 대통령은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장님 3년의 시집살이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대통령 임기를 다 마쳐도 채우지 못하는 4년은 어찌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불평등을 넘어라는 책에서는 불평등이 커지는 현상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내버려 두면 경제 정의는 물론이고 사회 정의마저 무너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렇지만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은 깜깜무소식이다. 아마 투철한 안보 의식으로 무장한 그들에게 이 책은 책 제목처럼 빨갱이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이번에 사라진 경제 민주화는 어디에 있을까? 현상금을 걸고 찾을 수만 있다면 찾고 싶다. 소수의견에서 나오는 대목처럼 100원이라고 걸고 찾고 싶다. 파업하는 사람들에게 거액의 배상금을 물려 투신하게 만드는 이 땅에, 6300원으로 황제 식사를 했다는 국회의원이 고개를 들고 다니는 이 세상 속에서, 법인세 감세 효과가 MB정부 4년 동안 30조가 넘는 세상 속에서, 손자학비 증여 금액을 1억까지 비과세한다는 세상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보면서 잘한 일이라고 박수치는 세상 속에서, 215억 7천만원의 연봉(2014년 기준 정몽구 회장/현대제철 퇴직금 94억 9100만원 포함)을 받는 대그룹 총수와 5,210원을 받는 최저 임금자가 공존하는 세상 속에서 실종된 경제 민주화를 찾고 싶다.

 

  경제 민주화야 바지 줄여 놨으니 3년 후에 오지 말고 지금 와라!

 

  고전적인 문구라도 붙여놓고 찾고 싶다. 불평등을 넘어 정의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불평등한 구조만이라도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치고, 우리가 알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목함 지뢰에 폭약이 몇 그램 들어갔는지는 모른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내용은 좋은데 별점을 두개 준 이유는 정말 간단하다. 너무 표가 많다. 저자가 말한대로 도표가 하나씩 등장할 때마다 이 책의 독자들이 줄어들텐데, 이 책의 독자는 과연 얼마나 될까?

 

*이 리뷰는 알라딘에서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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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한국건축 중국건축 일본건축 - 동아시아 속 우리 건축 이야기
김동욱 지음 / 김영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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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하나

 

  어떤 외국인이 한강에 줄지어 있는 아파트를 보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왜 저렇게 멋없이 짓나요? 혹시 저것들은 전쟁 시에 차폐물로 사용하기 위해서 짓는 것인가요?"

 

  믿거나 말거나이지만 한강변을 달리면서 이 말을 떠올려 본다. 너무나 비슷하게, 아니 똑같이 지어진 아파트들을 바라보면서 한국의 건축문화가 무엇인가 생각을 해본다.

 

  생각 둘

 

  제대를 하고 잠실에서 5년을 살았다. 도로는 넓게 뚫려 있고, 고층 빌딩들이 줄지어 서 있다. 역시 강남이구나라는 생각을 해봤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왠지 모를 불편함을 느낀다. 강북에 있는 고궁들, 한옥들이 그립다. 과거 수업을 째고 많이 돌아다녔던 경복궁도 절실하게 그리워진다.

 

  생각 셋

 

  어느 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도대체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왜 관광을 오는지 모르겠다. 일본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중국처럼 거대하지도 않고, 유럽처럼 전원적이지도 않는데 무엇을 보러 오는지...

 

  한국의 건축문화에 대해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이다. 여기에 근거하여 한국에는 건축 문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말이다. 정말 한국에는 건축 문화가 없는 것일까? 강북에 위치한 고궁을 둘러보면 각 궁마다 풍기는 느낌이 약간씩 다르다. 창경궁과 창덕궁이 조용한 전원의 풍경이라면 경복궁은 한껏 단장한 여인의 모습이랄까?

 

  책을 보고 있던 어느날 8살 난 딸과 7살 난 아들이 나에게 물어본다. 아빠 어느 것이 중국 건축물이고, 어느 것이 한국 건축물이며, 어느 것이 일본 것이예요? 일본 것이야 금방 알아챘지만 중국 것과 한국 것은 약간 헷갈렸다. 같은 동아시아의 건축물들이라도 일본 것은 왜 금방 눈에 띄고, 중국 것과 한국 것은 헷갈리는 것일까? 건물 전체가 아니라 지붕만 보고 답한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나는 다른 곳에서 그 이유를 찾는다. 이 책의 저자가 한 말과 일맥 상통하는 것인데, 일본은 중국과 한국의 영향을 받았지만 섬나라라는 특성 때문에 고유한 모습으로 발전했을 것이고, 한국과 중국은 일본보다는 교류가 더 많기 때문이다.

 

  이를 토대로 어떤 사람들은 한국의 건축물은 중국의 건축을 모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를 건축문화가 얼마나 왕성하게 교류했는지를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건축도 문화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주고 받는다. 다만 중화 사상 때문인지 몰라도 한국의 건축 문화는 중국의 건축 문화를 많이 답습하는 차원에서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저자는 한국 건축물의 배치를 보면 중국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평지에 건축하는 중국으로서는 단을 높이는 것은 가급적이면 자제하지만 국토의 70%가 산으로 이루어진 한국에서는 일부러 단을 높여서라도 건물의 배치를 달리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어렸을 적 한옥들이 대체로 높낮이가 달랐던 기억이 난다. 대청 마루가 있던 그곳은 다른 건물에 비해서 약간 높았고, 소를 키우던 외양간은 다른 건물에 비해서 약간 낮았다. 물론 그 옆에 비슷한 높이의 행랑채가 있었고.

 

  중국과 한국, 일본의 건축 문화에 대해서는 이 책을 자세하게 보면 알 것이고,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리고 한국의 건축 문화가 크게 발전하지 못했던 것은 장인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던 한국의 꽉막힌 유교 정신 때문이 아닐까? 실용적인 학문들을 무시하고 자구와 이론에만 매달려 씨름했던 한심함들이 오늘날 이런 식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 요즘처럼 너무 실용에 매달리는 것도 문제는 있다. 가장 실용적인 배치는, 건물을 쓰기에 가장 좋은 구조는 사각형 구조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 속에서는 예술의 경지에 이른 건축물들이 등장하기를 어려울 것이다. 오늘날 한국에 건축문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생각들이 사라져가고 투자로 생각하는 요즘 시대에 철학적이고, 예술적인 건출물, 건축 문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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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들
레나타 살레츨 지음, 박광호 옮김 / 후마니타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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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한 남자를 만났다. 그 사람은 존 내쉬다!

 

  처음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러셀 크로우다. 막시무스로 출연했던 글래디에이터를 본 후에 그의 연기에 푹 빠졌다. 올 곧은 충성심, 자기 가족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 뛰어난 지도력, 그에 합당한 검술 실력! 막시무스로 분한 러셀 크로우는 간만에 보는 연기파 배우였다. 그런 그가 드라마류의 영화에 등장한다는 것이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러셀 크로우를 보기 위해 영화관에 갔던 나는 영화가 진행되면서 막시무스가 사라지고, 존 내쉬가 살아 숨쉬는 장면을 보게 되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위의 사진이 등장하는 장면으로, 그가 불안과 두려움이 극에 달했던 순간이다. 다음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과 싸우면서 어렵게 모교로 돌아온 장면이다. 이 글을 쓰기 전에 뷰티풀 마인드를 다시 보았다. 이 책의 내용이 이 영화에 그대로 들어 있기 때문에 영화를 살펴보고 넘어간다.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불안의 시대이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눈을 감는 순간까지 수없이 많은 불안들과 싸우며 살아간다. 불안으로 인한 질병들도 많이 생겼고, 이를 치료하기 위한 사회적인 비용도 날로 증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도 이런 현실에 대응하는 방법을 잘 모른다. 불안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거나 치료를 받는 사람을 그저 미친 사람 취급하고 있는 것이 우리 시대의 속살이다. 불안에 빠지는 것은 약자들이기 때문이며, 그들은 낙오자 취급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일까? 수없이 많은 정신과 질병 환자들과 그 가족들은 남몰래 눈물을 흘린다. 약간이나마 그들에게 인정을 베푸는 사람들도 그저 약물 치료만이 해답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한쪽만 바라보는 무지하고 야만적인 시각이다.

 

  불안과 싸우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 책에서 저자가 그리고 역자가 말하는대로 불안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역자는 오히려 불안이 없는 사회가 더 문제가 된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불안의 유무가 아니라 그 불안을 건강하게 끌어 안는 것이다. 뷰티풀 마인들에서 존 내쉬가 진정 위대한 학자로 거듭나는 대목도 그가 가지고 있는 불안을 끌어안는 순간이다. 영화의 대사 중에서 내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것은 "지금도 보여. 아마도 이들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지 몰라. 아마 그들은 악몽이었을지도 몰라.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를 은근히 바라는..."이다. 그렇다.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모습도 이러한 모습일 것이다. 불안에 사로잡힌 이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불안을 있는 그대로 끌어 안는 것!

 

  오늘도 난 불안을 끌어 안아 보려고 한다. 그것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그것만이 이 시대를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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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 or No 선택 단추 시리즈
스펜서 존슨 지음, 강주헌 / NEWRUN(뉴런)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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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난 자계서를 뽕이라고 표현한다. 가끔 삶이 지칠 때, 마음이 힘들어질 때 한번씩 힘을 얻고자 보면 좋지만 그 외에는 백해무익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요즘 베스트셀러 가운데 자계서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참 어렵게 살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해본다.

 

  스펜서 존슨은 이 분야에서는 참으로 독보적인 존재이다. 청소부 밥, 부모, 멘토, 행복, 성공, 치즈 시리즈 등등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처세술을 강화하려는 사람들에게 한편의 멋들어진 동화를 통하여 가르침을 주는 면에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런 그의 책이기에 정말 오랫만에 꺼내 들었다. 기대했던 대로 책은 술술 잘 넘어간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느끼는 것은 "정말 아니다."라는 것이다. 예 아니오 시스템을 통하여 보다 건설적이고 효과적인 의사 결정 방법을 제시해 준다는 명목하에 내놓는 각 장의 주제들은 항상 그렇듯이 명쾌하지만, 그렇게 창조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그냥 스킬들을 나열해 놓고 있다. 이 정도까지만 해도 그냥 그런 책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겠지만, 원래 자계서는 그러하니까라면서 넘어가겠지만, 그 결정의 밑바탕에 깔린 생각이 자꾸 반감을 불러온다.

 

  책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이런거다.

 

  너는 항상 옳다.

 

  네가 항상 옳기 때문에 여러가지 정보를 취합하고, 네 생각에 맞추어서 판단한다면 그것은 항상 옳은 결론을 도출하게 될 것이다. 대체로 이런 내용들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그렇지 않음을 이미 경험으로 보지 않았던가? 르네상스의 인문주의와 산업혁명기를 겪으면서 인류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인간성에 대한 무한한 긍정이다. 종교는, 특히 서구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기독교는 인간의 본성을 억압한다, 이러한 억압에서 벗어나서 인간 본연의 특성을 발현하면 이 사회를 좀더 아름다워질 것이다. 이것이 당시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생각들이다. 사회만 그런 것이 아니다. 기독교 신학자들도 마찬가지다. 개개인이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서 살아가면 이 땅은 천국이 된다는 것이 당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본적인 신학의 가치관이었다. 우리는 자유주의를 종교 다원주의와 착각하지만 자유주의는 인간성에 대한 무한한 긍정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신학적인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말 한번씩은 들어봤을 것이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이 선하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살면 그 사회도 선하고 도덕적인 곳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생각은 1차 대전과 2차대전을 통하여 철저하게 깨졌고, 아렌트는 이러한 경험을 토대로 악의 보편성과 평범성에 대한 역작 예루살렘의 아히히만을 남겼다. 양차 대전을 통해 사람들은 인간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악한 본성에 대해서 집중하기 시작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여러가지 교육법들과 학문적인 연구들이 쏟아졌다.

 

  그렇지만 항상 역사가 한방향으로만 흐르지는 않듯이, 인간성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에 대한 반작용으로, 인간성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가 다시 대두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긍정은 과거에 비하여 더욱 강한 포지셔닝을 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이러한 포지셔닝 중에서도 거의 극단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난 항상 결정을 하면서 고민을 한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이 옳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최선을 택할 수 없어서 차악을 선택한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런데 너는 항상 옳다니 이 무슨 망발이란 말인가? 누가 이러한 발언에 대해서 책임을 질 것인가? 스펜서 존슨이 책임을 질 것인가?

 

  집으로 올라오는 길에 한 음식점 앞을 지난다. 그 집 음식이 꽤나 괜찮기 때문에 이사를 와서는 그 집을 자주 찾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부터 발길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음식 맛이 번해서, 주인이 바뀌어서? 아니다. 그 집 앞에 있는 간판이 자꾸 눈에 거슬려서이다. 커다란 입간판에 이렇게 써있다.

 

  "손님은 항상 옳습니다."

 

  손님이 왕이라는 말도 눈에 거슬리는데 손님이 항상 옳다니! 그 집을 택한 손님은 항상 옳다는 것인지, 손님이 하는 말은 어떤 불합리한 것이라도 받아들이겠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말 한마디가 내 입을 쓰게 만든다. 나도 내가 옳다고 장담을 못하는데 무슨 근거로 그 집에 손님을 찾아가는 내가 옳다고 판단한단 말인가? 여러가지 이유로, 어찌보면 판단 내리기를 유보하는 살짝 비겁함으로, 그리고 껄쩍지근함으로 오늘도 그 집을 피하여 난 김밥 천국에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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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e inside (지식e DVD 포함) 가슴으로 읽는 우리 시대의 智識 지식e
EBS 지식채널ⓔ 지음 / 북하우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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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가수가 노래했다.

 

  강물 같은 노래를 품고 사는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내내 어두웠던 산들이 저녁이 되면 왜 강으로 스미어 꿈을 꾸다
  밤이 깊을수록 말 없이 서로를 쓰다듬으며 부둥켜 안은 채 느긋하게 정 들어 가는 지를 으음~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 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 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 눈을 닫고
  우렁 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길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 사랑 Hea~ Hea~

  지독한 외로움에 쩔쩔매 본 사람은 알게 되지 음~ 알게 되지
  그 슬픔에 굴하지 않고 비켜 서지 않으며 어느 결에 반짝이는 꽃 눈을 닫고
  우렁 우렁 잎들을 키우는 사랑이야 말로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는 것을

  누가 뭐래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길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 사랑

  누가 뭐래도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노래의 온길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우린 참 사랑

 

  새파랗던 스무살 선배들의 손에 이끌려 얼결에 들어간 동아리! 소위말하는 빨간 동아리였다. 자본론과 변유, 사유, 소비에트 연방, 사구체 등을 읽으면서 "무슨 소리고"라는 짜증과 "일학년이 뭘 알겠어 아메바인데"라는 꼰대짓하는 선배들의 갈굼 속에서 내 20대의 전반기가 지나갔다. 당시 선배들에게 갈굼을 당하면서도 기타치면서 노래부르던 자리가 좋아서 열심히 동방에 갔다. 당시 불렀던 노래들이 김광석, 안치환, 윤밴 등이다. 그중에 미친듯이, 정말 뜻도 모르고 미친듯이 불렀던 노래가 위의 노래다. 내용이 가지는 무게는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외치는 것이 좋았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가사에 끌려서 수십번도 더 불렀다. 그런데 말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고,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은 정말 녹록치 않다는 사실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는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로 바뀌었고, 어느덧 나는 현실에 적응해 가기 시작했다. 하나둘 선배들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했지만, 변한 것은 선배들만이 아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어느덧 나도 현실과 타협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느꼈던 체념과 슬픔이 얼마나 내 마음을 눌렀는지 모른다.

 

  지식e를 내가 끊임없이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책이 나올 때마다 전혀 고민하지 않고 이 책을 구매하고 몇 번이나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채 이루지 못했던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의 길에 대한 미련 때문이다. 나에게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해준 지식e가 어느덧 10년이 된단다. 5분을 위해서 23시간 55분을 투자했다는 그도 어느덧 자리를 옮겨서 뉴스타파에서 5분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물론 여전히 그는 5분을 위해서 23시간 55분을 투자하고 있다. 그 뒤를 이은 또 다른 사람도 5분을 위해서 삶의 전부를 투자하고 있다. 그 뒤를 이은 또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들의 노력이 모여서 지식e 인사이드가 탄생했다. 지금까지 보았던 스토리 중에서 골랐기 때문에 이미 다른 책에 수록되었던 것들도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다시 꽃보다 아름다운 30명의 사람들로 묶어 놓으니 감회가 새롭다.

 

  공감, 공생, 공존이라는 키워드로 묶여있고, 이 키워드는 그들의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한다. 그리고 그들이 꽃보다 아름답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발견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너도 꽃보다 아름다울 수 있다고, 삶의 방식을 약간만 바꾸면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참 쉽지가 않다. "공"이라는 말이 共보다는 空으로 그리고 攻으로 바뀐 세상 속에서 그들의 초대에 응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사회가, 그리고 우리가 나갈 길이 그 길임을 부정할 수 없다. 여러모로 나에게 부끄럼움과 부러움과, 고민과 갈등을 던져주는 지식e로 인해 그래도 인생이 약간은 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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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5-07-19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 내용이랑 살짝 비껴나간 얘기일수도 있는데, 사람리 꽃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걸이야 말로... 지극히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이기주의인것 같아요. 실상 꽃들은 저들끼리 어울려 꽃을 피울뿐이고 그렇게 그렇게 아름다울뿐인데 말이죠. 오랫만이신거 맞죠~?^^ 그동안 님의 글이 고팠나봐요. 이렇게 주절거리는걸 보면...ㅋ~.

saint236 2015-07-20 13:58   좋아요 0 | URL
사람이나 꽃이나 비교할 수는 없지요 그렇지만 꽃처럼 아릅답고 싶다는 욕심을 탓할 수는 없겠지요